73인의 유쾌한 역발상

   
구츠와다 타카후미(역자 : 정하상 외)
ǻ
모색
   
11500
2005�� 08��



>■ 책 소개
거꾸로 생각하는 사람이성공한다!


우리는 살면서 새로운 한계에 부딪친다. 그러나 인간들에게 주어지는 가장 큰 한계는 이 책에나오는 역발상의 대가들에게는 도전의 대상이다. 안정을 거부하고, 풍파를 일으키고, 습관이나 관례를 철저히 무시하고, 자신을 지나치게 과시하고,마음껏 복수하고 독재자가 되었던 인물들이다. 그들의 성공을 둘러싼 엇갈리는 평가들은 아직도 공존한다.


이 책에 등장하는 인물들은 정치, 경영, 사회, 문화의 각 분야에서 위기를 빛나는 도전으로극복한 사람들이다. 이들의 성공은 현재 우리의 안정을 가져다주었고, 풍파를 일으켜 세상을 떠들썩하게 했다. 습관이나 관례의 극복은 우리가 죽을때까지 극복해야 할 한계이며, 부조리한 세상을 복수심으로 이겨낼 수 있다. 반대하라. 특히 주류에 반대하는 사고는 유쾌한 역발상의 입문이다.


■ 저자 구츠와다 타카후미
1936년생.와세다대학 정경학부를 졸업하고 아사히신문 사회부데스크, 편집위원, 논설위원을 역임했다. 1989년부터 8년 동안 아사히신문의 칼럼 "소립자"를담당 집필했고, 2005년 현재 에세이스트로 활동 중이다. 또한 다양한 양성강좌에서 강의를 하고 아사히TV의 "뉴스스테이션"과 "슈퍼J"NHK-FM의 "일요카페" 등에도 출연하고 있다. 지은 책으로『생각하는 힘을 길러주는 책』,『시대를 움직이는 말』,『소(小) 논문에강해진다』등이 있다.


■ 역자 정은재·정하상
정은재
는 2005년현재 경북과학대학 부학장으로 재직 중이다.


정하상은 2005년 현재 경북외국어대·경북과학대학이사장으로 있다.


■ 차례
제1장 반대하라. 특히 주류에반대하라
 
1. 안정을 거부하라 | 이데미츠흥산 창업자, 이데미츠 사조 
2. 풍파를 일으키는 사람이 되라|물리학자, 알버트 아인슈타인 
3. 지나치게 공부벌레가 되지 마라 |생물학자·민속학자, 미나카타 쿠마구스 
4. 습관이나 관례를철저히 무시하라 |영국 전(前) 수상, 마거릿 대처 
5. 자신을 지나치게 과신하라 |지휘자, 오자와 세이지 
6. 마음껏 복수하라|샤넬 창업자, 코코 샤넬 
7. 독재자처럼 군림하라 | 영화의 아버지, 데이비드 W. 그리피스 


&>제2장 머리는 굽히되, 야심은 절대 굽히지 마라 
8. 결코 머리를숙이지 마라 | 소니 창업자, 모리타 아키오 
9. 거목의 그늘에 들어가지 마라 | 교세라 창업자, 이나모리 카즈오 
10. 논쟁에서상대를 이롭게 해주어라 | 크라이슬러 전(前) 회장, 아이아코카 
11. 쓰기 쉬운 돈은 쓰지 마라 | 츠다쥬쿠대학 설립자, 츠다 우메코
12. 싸울 때는 철저히 계산하라 | 전력중앙연구소 전(前)이사장, 마츠나가 야스자에몬 
13. 이름을 남기려 하지 마라|저널리스트, 미야타케 가이코츠 
14. 실각을 두려워하지 마라 | 인도 독립지도자, 간디 
15. 시류를 읽지도 말고 편승하지도마라 | 세콤 창업자, 이이다 마코토 


&>제3장 성공법칙, 철저히 잊어버려라. 모르면 모를수록 성공한다
16. 다른 사람의 가치관을 쫓지 마라 | 아지노모토 개발자, 이케다 키쿠나에 
17. 아이디어를 얻으려면 일에 쫓기며 살아라|만화가, 데츠카 오사무 
18. 어린 시절의 경험에서 배워라 | 영화감독, 스티븐 스필버그 
19. 발상은 도둑맞아야 가치가 나온다| 샤프 창업자, 하야카와 도쿠지 
20. 선례를 따르지 마라 |닛쇼쿠식품 창업자, 안도 모모후쿠 
21. 자기 손을 더럽혀라 |도요타자동차 창업자, 도요타 키이치로 
22. 쓸모없어 보이는 발상이라도 버리지 마라 |이토엔 창업자, 혼죠 마사노리 
23. 상식이없기 때문에 자유가 있다 | 노벨화학상 수상자, 다나카 고이치 
24. 스스로를 미아(迷兒)로 만들라 |소설가, 나쯔메 소세키


&>제4장 세상과 사회를 위해 멸사봉공하라. 그곳에 길이 있다 
25.잘 쓰여질 수 있는 충복이 되라 |도쿄전력 전(前) 회장, 히라이와 가이시 
26. "없는 것"을 당연하게 생각하라 | 이토요카도 창업자,이토 마사토시 
27. 욕망에 사로잡혀 움직여라 | 칼피스 창업자, 미시마 카이운 
28. 공과 사를 구별하지 마라 | 브리지스톤창업자, 이시바시 쇼지로 
29. 입장 표명을 분명하게 하지 마라 | 중국 초대 국무총리, 저우언라이 
30. 필요 경비를 기준으로발상하지 마라 | 도토루 커피 사장, 도리바 히로미치 
31. 성공은 "나쁜 감정"에서 태어난다 | 쯔보하치 사장, 이시이 세이지
32. 악평을 무시하라 | 지휘자, 허버트 폰 카라얀 
33. 야심을 갖지 마라 | 일본지도 작성자, 이노우 타다타카


&>제5장 남들이 "보"를 낼 때 "가위"를 내라. 그것이 "돈"이다
34. 가난을 드러내어 자랑하라 | 마쯔시타전기 창업자, 마쯔시타 고노스케 
35. 충동적으로 구매하라 | 크라이슬러사 창업자,월터 P. 크라이슬러 
36. 모든 것을 돈으로 살 수 있다고 생각하라 | 오타니그룹 총수, 오타니 요네타로 
37. 돈을 마음의지주로 생각하라 |일본 맥도널드 창업자, 후지타 덴 
38. 공짜로 여기는 공기도 돈이 될 수 있다 | 야후 창업자, 제리 양 &데이비드 파일로 
39. 땡전 한푼 없어도 즐겁게 살아라 |만담가, 고콘데이 신쇼우 
40. 자신을 위해선 돈을 쓰지 마라 |이시카와지마중공업 초대회장, 도고우 도시오 
41. 성공 후에 더욱 철저히 자기를 관리하라 |마이크로소프트 회장, 빌 게이츠 
42.필요로 하는 사람에게 돈을 주지 마라 |철강왕, 앤드류 카네기 

제6장 마찰을 두려워 마라. 마찰은 전진을 위한 에너지다 
43. 교류한 시간의길이에 가치를 부여하지 마라 |캐논 창업자, 미타라이 쯔요시 
44. 사람을 선별하라 | GE 전(前) 회장 겸 CEO, 잭 웰치
45. 다른 사람의 머리를 빌려라 | 소니 창업자, 이부카 마사루 
46. "사람"보다 "일"이 더 중요하다 | 애플컴퓨터 CEO,스티브 잡스 
47. "나니와부시"로 사람을 움직여라 | 테이진 전(前) 사장, 오오야 신조 
48. 부하에게 전적으로 맡겨라 |CNN 설립자, 테드 터너 
49. 사원 교육은 헛된 일이다 | 키와코퍼레이션 사장, 나카지마 다케시 
50. 고향에 가면 고향을거슬러라 |닛산자동차 COO, 카를로스 곤 


&>제7장 "안정"을 포기하고 "위험"을 노려라. 그것이 비상의 길이다
51. 단 한 가지를 남기고 모두 버려라 | 야마토운수 전(前) 사장, 오구라 마사오 
52. "언젠가 반드시"로 막연히 기대하지마라 |도미노피자 창업자, 톰 모너건 
53. 땅 짚고 헤엄치기식 불로소득을 잡아라 |닌텐도 회장, 야마우치 히로시 
54. 전략을수시로 바꿔라 | 남아프리카공화국 전(前) 대통령, 넬슨 만델라 
55. 무모한 행동을 계속하라 | 산토리 사장, 사지 게이조
56. 성공을 독점하지 마라 | 스타벅스 커피 회장, 하워드 슐츠 
57. 때를 기다리지 말고 "지금 현재"를 준비하라 | 가수,미소라 히바리 
58. 이상(理想)을 낮게 잡아라 | 도시바 전(前) 회장, 이와타 가즈오 
59. 진정한 장점은 오직 자신만이 안다| 우주비행사, 유리 가가린 


&>제8장 큰소리쳐라. 모난 돌이 세상을 바꾼다 
60. 허풍이 현실을움직인다 | 미키모토진주 창업자, 미키모토 코우키치 
61. 장밋빛 미래만을 생각하라 | 피아 창업자, 야나이 히로시 
62. 허풍도우겨대면 진실이 된다 | 복서, 모하메드 알리 
63. 하나하나 쌓지 말고 위에서 굴려라 | 그리코 창업자, 에사키 리이치 
64.망상을 현실화시켜라 | 디즈니 창업자, 월트 디즈니 
65. 있어도 좋고 없어도 좋다 | 요시모토흥업 창업자, 요시모토 세이 
66.도움과 선(善)을 혼동하지 마라 | 사상가, 존 스튜어트 밀 
67. 묘수는 악수(惡手)에서 나온다 | 일본 장기왕, 하부 요시하루


&>제9장 백짓장을 잘못 맞들면 찢어진다. 차라리 혼자서 도전하라
69. "불화(不和)"는 나쁜 것이 아니다 | 혼다기연공업 전(前) 부사장, 후지사와 후케오 
70. 팀은 어려움을 만든다 |모험가, 우에무라 나오미 
71. 세상의 이해를 바라지 마라 | 생물학자·작가, 레이첼 카슨 
72. 바깥을 볼려면 안을 응시하라 |교육자·UN사무차장, 니도베 이나조 
73. 비즈니스는 정(情)으로 하라 | 혼다기연공업 창업자, 혼다 소이치로 


&>참고문헌 





73인의 유쾌한 역발상


반대하라, 특히 주류에 반대하라

영국 전(前) 수상, 마거릿 대처 - 습관이나 관례를 철저히 무시하라

1974년 가을, 영국 국민의 관심은 보수당의 동향에 쏠려있었다. 보수당은 히스 당수가 리드하고 있었는데 노동당에 연속으로 두 번이나 선거에 참패한 결과 그로 인한 비판이 고조되고 당수를 교체해야 한다는 분위기가 무르익었기 때문이다.


마거릿 대처는 당수에 입후보할 것을 결의하고 1975년 2월에 보수당 최초의 여성 당수로 선출되었다. 처음에는 대처의 입후보를 예측한 사람은 전혀 없었다. 대처가 유능한 인물임은 누구나 인정했지만 그때까지 보수당의 다른 정치가들에 견줄 만큼 영향력이 있는 인물이 아니었기 때문이다.


영국의 정치권은 유머 감각에 특별한 취미들이 있어 다양한 인격의 소유자들이 많이 포진되어 있다. 특히 상류계급 출신이 많은 보수당에선 이런 경향이 두드러졌다. 하지만 대처는 정치에 전력투구하는 이른바 일이 곧 취미인 유형이었는데, 이는 보수당 정치인들의 이미지와는 많이 동떨어진 것이었다. 게다가 당수가 되려면 우선 외무장관이나 재무장관 등의 중요한 지위를 경험하는 과정이 절대적 필요조건이었는데 당시의 대처는 그러한 경험도 전무했다.


그러나 그녀는 "자신이야말로 가장 보수당다운 보수당이다"라고 주장할 만큼 강력한 신념을 무기로 당수 선거에서 기적적인 역전극을 성취해내었다. 이리하여 대처는 보수당 당수에 취임하긴 했지만 정작 영국의 정권은 노동당이 장악하고 있었다. 대처가 수상이 된 것은 그로부터 4년 후인 1979년 5월이었다. 그녀는 보수당 당수로서의 4년이란 기간을 소홀히 보내지 않았다. 우선 히스색이 강한 보수당 내에서 자신의 기반을 공고히 하고, 이어서 노동당의 정책적 오류를 맹렬하게 공격하고 또 물고 늘어졌다. 그 결과, 영국 최초의 여성 수상이 탄생하게 되었다.


당시, 영국은 최악의 상황이었다. 고인플레에다가 거액의 재정적자, 게다가 강성 노동조합의 연속적인 파업으로 인해 국가산업의 대외경쟁력은 떨어질 대로 떨어져 있었다.


이러한 환경에서 정치 일선에 등장한 대처는 수상으로서의 절대적 권한을 행사했다. 영국의 각료는 정부의 결정에 집단 책임을 지게 되어 있어, 각의의 의결을 거쳐 의견을 통일시키는 것이 관례였다. 그러나 대처는 이것을 무시해버렸다. 그녀가 내놓은 것은 초긴축재정이었다. 내각 개편과 더불어 초긴축재정을 단행했고, 그 결과는 긍정적이었다. 1982년 영국 경제는 회복 조짐을 보이기 시작했다. 치솟기만 하던 인플레율이 10퍼센트 떨어지고 공업 생산성도 높아지기 시작했다.(제2치 세계대전 이후의 사회주의적 정책 일변도로 인해, 많은 기업들이 국영화되고 노동조합이 강화되어 생산성이 크게 저하되었으며, 인플레율은 26.9퍼센트에 달할 정도였다. 그녀가 실시한 공기업 사유화, 노조에 대한 강경책, 금리 인상을 통한 인플레 억제 등의 신자유주의 정책들은 영국 경제를 시장 자유화를 바탕으로 하는 성공적인 모델로 부각시켰다 - 역자주)


대처수상에게 본격적인 서광이 비칠 무렵, 영유권문제를 둘러싸고 아르헨티나 포클랜드 침공이 발단이 되어 프클랜드 분쟁(포클랜드는 남미 대륙 동남쪽 해역에 자리한 군도(群島). 수산자원이 풍부하고 원유매장 가능성이 큰 지역. 아르헨티나는 1833년 스페인으로부터 독립하면서 포클랜드 영유권을 함께 받았다고 주장했으나 영국이 무력 점령한 후 자국민을 자치령으로 삼는 바람에 분쟁의 씨앗이 뿌려졌다. 1982년 개전 72일만에 아르헨티나군의 항복으로 종전. 아르헨티나측 630명을 포함해 1053명의 양국군 병력이 사망했다 - 역자주) 이 터지고 말았다. 후에 대처는 "포클랜드 분쟁은 영국의 국제적 위신 차원이든, 국내 문제 차원이든 매우 중대한 사건이었다"고 회고했다.


내각, 외무, 국방성 모두 본국으로부터 자그마치 1만 3천 킬로미터 떨어져 있는 데다, 주민 수가 고작 1천 8백 명인 섬 포클랜드에 영국 함대를 파견하는 것에 대해 회의적인 입장을 보였다. 그러나 대처는 국제 여론을 자기 편으로 끌어들임과 동시에 강력한 카리스마를 보여주면서 국내 지지를 얻어내는 데도 성공하여 분쟁지역을 향해 과감하게 개입했다. 영국군은 그러한 수상의 태도에 지지를 보냈고 마침내 승리했다.


대처는 이렇게 말했다. "우리들에겐 후퇴란 있을 수 없습니다. 잠시 머뭇거리는 것조차 허용될 수 없습니다. 오직 앞으로 나아갈 때만이 미래가 약속되는 법이니까요."



머리는 굽히되, 야심은 절대 굽히지 마라

소니 창업자, 모리타 카즈오 - 결코 머리를 숙이지 마라

"그 조건으로는 계약할 수 없소." 도쿄통신공업(오늘의 소니)의 모리타 아키오는 트랜지스터 라디오를 십만 대 수주하는 회담을 중단해버렸다. 1955년 미국, 국제적 시계회사 글로벌사와의 협상 자리에서의 일이었다. 해외에 비해 일본에서 지명도가 낮았던 입장에서 미국의 국제적인 대기업과의 협상은 매우 매력적인 것이었다. 사전 연락을 받은 도쿄 본사도 이번 수주에 커다란 기대를 걸고 있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모리타는 회사의 의향을 완전 무시한 듯 정반대의 행동을 연출한 것이다. 고대해마지 않았던 사업 기회를 모리타는 왜 발로 차버린 것일까? 이유인즉 상대방이 제시한 조건이 터무니없다고 여긴 때문이었다. 도쿄통신공업은 미국 진출을 목표로 새로운 제품 브랜드 - 소니(sony) - 를 만들어냈다. 그런데도 글로벌사는 도쿄통신공업의 첨단 라디오제품을 사들여 거기에 자사 브랜드를 붙여 판매하겠다고 나선 것이다.


물론 소니 브랜드는 아직 무명(無名)이었다. 세계적 인지도가 있는 글로벌사의 브랜드로 포장하면 제품 판매는 확실하게 보장될 것이다. 드러내진 못했지만 당시의 회사내 사정은 어려웠다. 거대기업 글로벌사의 요구를 받아들이든가, 아니면 자기 고집대로 밀고 나가는 위험을 감수하든가를 선택해야만 했다. 당시의 결단을 회고하면서 훗날 모리타는 이렇게 말했다. "상대방의 요구대로 따르기만 하면 당장의 이익을 얻을지는 모르지요. 그러나 그렇게 했다면 지금의 소니 브랜드는 이 세상에 나올 수 없었을 거요,"


거의 무모함에 가깝다고 할 만큼 사운을 건 판단이 내려질 수 있었던 데는 또 다른 배경이 존재했다. 모리타와 함께 소니를 창업한 이부카 마사루의 두뇌와 확실한 기술력이 튼튼한 버팀목이 되어 주었던 것이다. 자신들의 제품이 최첨단, 최고급이라는 점에 대해서 모리타는 강력한 자부심을 갖고 있었다. 그러므로 대기업에 머리를 숙이지 않아도 신제품을 얼마든지 판매할 수 있다는 것을 모리타는 읽고 있었다. 이는 훗날 세계 최소형 트랜지스터 라디오가 미국에서 대히트를 기록함으로써 명백하게 입증되었다.


모리타는 나고야의 3백 년의 역사를 간직한 양조업 집안에서 태어났다. 전통과 격식이 엄한 가풍이긴 했지만, 증조부와 아버지 두 분 모두 새로운 세대 사조를 적극적으로 받아들인 남다른 재능의 소유자들이었다. 덕분에 포드제 자동차, 서구의 가전제품에 둘러싸여 어린 모리타는 무럭무럭 성장했다. 동시대의 아이들과 달리 첨단의 선진 환경에서 아버지는 모리타에게 제왕학을 가르쳤다.


"일단 문제가 생겼을 때 부하를 꾸짖거나 다른 사람에게 책임을 전가하는 것은 무익한 일이다."

"일을 성취하려면 쌍방의 이익을 도모하라, 곧 정통의 동기를 요령껏 이용할 줄 알아야 한다."


그러나 모리타가 걸어간 여정은 결코 평탄치 않았다. 라디오나 워크맨의 성공 이면에는 무수히 많은 실패와 굴곡 많은 경험이 자리했기 때문이다. 그 최대의 시련은 비디오테이프레코더(VTR)의 규격을 둘러싼 일대 전쟁을 들 수 있다. 모리타는 소니의 베타방식 VCR 기술이 VHS진영보다 우세하다고 자부하고 있었다. 그러나 라이벌들은 기술을 공유하는 것으로 소비자의 시선을 장악하는 데 성공하여 소니는 이 기술공유 싸움에 휘말리면서 무너지고 말았다.(비즈니스 전쟁에서 승자가 모든 것을 가지는 결과가 극명하게 나타난 예가 VCR 기술 표준이다. 일본의 소니 베타방식과 필립스 등 반소니 계열이 주도한 VHS 방식이 세계 시장을 놓고 경쟁을 벌였다. 이 싸움에서 패배한 베타방식은 결국 역사 속으로 사라지게 됐다. 베타방식은 1975년 소니사가 개발한 홈 비디오의 하나이고 VHS방식은 1976년 일본 빅터사가 개발한 홈비디오 방식인데 실제 재생 품질은 베타방식이 더 우수했다 - 역자주) 그러나 이 패배는 모리타에게 큰 재산이 되었다.


"실패는 막을 수가 없지요. 중요한 것은 실패의 원인을 정확히 파악하는 것입니다. 그것은 사원교육은 물론이고 회사를 위해 중요한 영양소이자 교훈이 되니까요."


모리타다운 명쾌한 논리이다. 그리고 이 교훈은 후에 콤팩트디스크, 신 8밀리 캠코더는 물론이고 최신 게임기 플레이스테이션에 이르기까지 적극적으로 활용되었다.



남들이 보를 낼 때 가위를 내라. 그것이 돈이다

월터 P. 크라이슬러 - 충동적으로 구매하라

어린 나이의 크라이슬러는 돈도 학력도 없었다. 아버지는 지방 철도회사의 기관사였고 형도 똑같이 철도회사에 근무하고 있었다. 크라이슬러도 고등학교를 졸업 후 자연스럽게 철도회사에 근무하게 되었다. 그것말고 달리 선택할 방도가 없었지만 정비공장의 일보다는 그래도 청소계 작업에 근무하는 것으로 만족하고 있었다. 이 크라이슬러가 훗날 빛나는 성공을 거둘 인물이 될 것이라 보여질 만한 구석은 단 하나도 없었다.


단 하나, 그가 다른 사람과 다른 점이 있었다면 그것은 타의 추종을 불허할 정도로 기계광이었다는 점이다. 그는 기계에 대해선 무조건적일 정도로 열렬한 흥미를 갖고 있었다. 매일 정비공장에서 작업 중간마다 여러 종류의 기계를 살펴보고 만져보고 조립하는 일을 생각하며 커다란 희열에 사로잡히곤 할 정도였다. 이윽고 그는 청소계 일을 하면서 본격적으로 기계기사 공부를 시작하게 되었다. 혼신의 정열을 기울여 열심히 공부한 끝에 20세가 되었을 무렵에는 베테랑 기계기사가 무색해질 정도로 기술과 지식을 겸비하게 되었다. 그는 엔지니어로서의 능력을 무기삼아 미국 중서부를 종횡무진하다시피 하며 각지의 철도회사에서 기사장과 공장의 총감독으로 맹활약하게 되었다. 그러한 와중에 그는 기계에 대한 순수한 흥미를 느끼는 것 외에 기계를 통한 수송에도 남다른 관심을 갖기 시작했다. 그는 현장의 작업 속에서 기계를 이용한 운송업의 전망을 생생하게 느낄 수 있었다.


어느 날 그는 운명적인 만남을 갖는다. 시카고 모터쇼에서 로코모빌(1899년 제작된 증기자동차)이라 이름 붙여진 꿈의 자동차가 그의 눈길을 사로잡은 것이다. 크라이슬러는 뒷날 이때의 감회를 다음과 같이 말했다. "나 자신도 모르게 그 차에 사로잡혀 버렸습니다. 4일간 내내 자동차쇼가 벌어진 현장을 떠날 수 없었을 정도였으니까요."


자동차를 자기 손으로 직접 만들어보고 싶은 순수한 호기심이 그의 몸과 마음에 소용돌이친 것이다. 더구나 당시의 자동차는 아무나 가질 수 없는 고가품일 때였다. 더구나 모터쇼에 출시된 로코모빌은 최신 고급차였기 때문에 그는 끙끙거리며 고민에 고민을 거듭한 결과 마침내 결심을 굳히고 은행에서 자그마치 5천 달러나 되는 거금을 빌려다 그 자리에서 자동차를 구입했다. 그리고 열차에 올라타고 집으로 돌아왔다.


보통 사람 같으면 고가의 차를 구입한 뒤에는 반드시 드라이브 삼매로 나날을 보내기 쉽지만 크라이슬러는 만들어보고 싶은 마니아답게 자기 신념에 충실한 인물이었다. 그는 로코모빌을 단 한번도 운전해보지 않고 가져온 그대로 분해했다 다시 조립했다. 그 과정이 끝나고 나서야 한번 시승을 해보았고 시가지를 한 바퀴 주행해본 다음, 다시 분해했다가 재차 조립했다. 이렇게 분해-조립 과정을 수차례 반복했던 것은 로코모빌을 하나의 교과서로 삼아서 철저하게 연구했기 때문이다. 그러한 그를 보면서 친구들은 "저 친구 머리가 좀 어떻게 된 거 아냐?"라고 조롱할 정도였다. 그러나 이러한 행위가 훗날 미 자동차업계 빅3의 하나로 군림할 크라이슬러사 창업의 소중한 밑거름이 되었던 것이다.


그가 거액의 빌린 돈을 갖고 로코모빌을 충동 구매했을 당시, 그의 내면에는 창업의 힌트 같은 것도 없었고 최신의 수송수단에 투자해보겠다는 생각 같은 것도 없었다. 그는 구매 당시 참을 수 없이 좋아하는 것을 만났을 때의 짜릿한 흥분만을 느꼈을 뿐이라고 했다. 뒷날 크라이슬러는 "당신의 성공 비결은 무엇입니까?"라는 질문에 다음과 같이 답하고 있다. "성공의 비결은 열성이라기보단 흥분이라고 봅니다. 나는 사람이 흥분하는 것을 볼 때 가장 좋아요. 사람은 흥분했을 때 인생을 성공시킬 수 있으니까요."



마찰을 두려워 마라. 마찰은 전진을 위한 에너지다

제너럴 일렉트릭(GE) 전(前) 회장 겸 CEO, 잭 웰치 - 사람을 선별하라

제너럴 일렉트릭(GE)은 발명왕 에디슨을 창업자로 한, 백 년 이상의 역사를 자랑하는 회사로 미국은 물론이고 세계 최고의 기업으로 군림하는 거대기업이다. 그러나 1970년대 후반부터 1980년대에 이르러 일본의 기업이 본격적으로 등장한 이래 미국의 다수 기업들은 정체상태를 면치 못하게 되었다. 그 와중에서 거대기업 GE도 침몰의 위기를 맞이하게 되었다. 이렇게 쓰러져가던 GE를 완벽하게 소생시켜 21세기에도 성공하는 기업으로 극적으로 변화시킨 장본인이 1981년에 GE회장 겸 CEO로 취임한 잭 웰치였다.


약 20년의 재임기간 중에 그는 GE의 매출액을 4~5배로, 순이익은 7배로 올려놓았다. 그밖에 종업원 수를 3분의 2수준까지 대대적으로 감축한 것도 빼놓을 수 없는 일이다. 웰치는 1960년에 GE에 입사했다. 대단히 우수한 인재였던지 입사 직후부터 두각을 나타낸 웰치는 1968년 최연소로 플라스틱부문의 제너럴 매니저에 취임했다. 그는 이 무렵부터 사내에서 기업혁신을 강력하게 주장하기 시작했다. 당시는 미국 경제가 그야말로 꽃피는 춘삼월이라 할 정도로 전성기를 구가하던 시절이었다. 미국 전역에 자신감이 넘쳐나고 있었다. 그 와중에 난데없이 개혁을 제창하는 웰치의 주장이 먹혀들 리 만무했고 그는 거의 이단아 취급을 받았다.


그러나 GE가 위기에를 맞자 경제인들을 포함하여 경제적 아나키스트(무정부주의자)에 이르기까지 갖은 비난을 받고 있던 잭 웰치가 회사의 경영을 맡기로 결정됐다. 이후 CEO인 잭 웰치는 가장 먼저 조직 슬림화를 단행했다. 세계 시장에서 넘버 원이나 넘버 투인 사업부문만을 남겨놓고 나머지 부문은 모조리 매각을 단행하는 정말 대담한 전략이었다. 종합전기기업이던 GE의 사업단위는 개혁 전까지만 해도 3백 5십 개나 되었지만 웰치가 손을 대면서 13개 사업본부체제로 재편성되었다. 20년간 계속된 개혁 과정에서는 자그마치 7백 회 이상의 기업매각과 매입이 반복되었다. 이에 대한 회사 내부의 반대는 격렬했다. 재편과정에서 30만 명의 종업원이 GE를 떠나야 했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들 다수는 사무직 종사자들이었다.


당시 미국에서는 우량기업의 사무직 종사자들은 그 지위가 평생 보장되어 퇴직 후에도 충분한 연금과 무료로 의료보장혜택까지 받고 있을 때였다. 그러나 웰치는 이러한 전통을 깡그리 무시했다. "변화하지 않는 자는 떠나라!" 잭 웰치는 당시의 특권층이라 할 수 있는 화이트 칼라들을 겨냥하여 판도라의 상자를 열어 제낀 셈이었다. 간부에서 숙련공에 이르기까지 사내에서 20만 명의 직원들이 연루되어 웰치 배척운동이 일어났다. 그러나 그는 소신을 굽히지 않고 자신의 방침을 밀어붙였다.


"넘버 원 아니면 넘버 투가 되어야 합니다. 이는 목표가 아니라 생존을 위한 조건입니다."

"싸우는 이상, 이기는 것이 목적입니다. 승부에서 이기지 못하면 여러분 모두 직장을 잃게 됩니다."


한편에서 웰치는 사원들의 사기를 진작시키는 일에도 열성을 기울였다. 외부전문가를 담당자로 임명하여 40명에서 100명의 사원들로 모임을 만들어 사업과 승인, 보고, 회의, 평가의 시스템, 이른바 워크아웃제도를 만든 것도 사기 진작 차원에서 시행된 조치였다고 볼 수 있다. 이는 자기 회사 내부의 부끄러운 부분을 외부로 드러내는 일이기도 했기 때문에 매우 파격적인 전략이었다. 그러나 이러한 조치를 시행한 결과, 업무효율은 놀라울 정도로 개선되었다.


"큰 성과를 내려면 열린 대화와 상호 신뢰관계가 필수적입니다. 자기 상사에게도 과감히 도전할 수 있고 진심에서 우러나온 대화를 할 수 있는 사내 문화가 매우 중요한 것이지요"라고 웰치는 말하고 있다. 잭 웰치의 기업개혁은 사람의 선별이라고 말하기도 한다. 그러나 그것만으로 기업이 희생할 수는 없다. 사원들의 사기를 진작시키는 동시에 실천하는 것이 웰치가 남과 다른 특징이었다.             


 

백짓장을 잘못 맞들면 찢어진다. 차라리 혼자서 도전하라

혼다기연공업 창업자, 혼다 소이치로 - 비즈니스는 정(情)으로 하라

세계속의 혼다는 1948년 하마마츠시(市)에서 설립되었다. 자본금 백만 엔, 종업원 수 34명의 출발이었다. 그 소기업을 당대의 대기업으로 성장시킨 혼다 소이치로(미국 자동차 전당에 이름이 올라있다 - 역자주)는 공사의 구별이 철저하여 일찍부터 가족경영을 거부했다.


소이치로는 1954년 회사가 경영위기에 빠졌을 때, 파트너 후지사와에게 "엄혹한 시대에 경영 세습을 하게 되면 회사는 무너지고 말거야"라고 맹세하고 평생 이 신조를 굽히지 않았다.


1973년 사장 자리를 물려줄 때, 철저히 혼다 외부 사람을 후계자로 선택한 것은 세습이 지배적이던 일본 기업의 풍토 속에서 매우 이례적인 일이었다. 또, 창업 때부터 소이치로와 함께 걸어왔던 친동생 혼다 벤지로는 1962년 상무이사직에서 물러난 후 혼다 소이치로와는 전혀 다른 길을 걸었다. 그렇다면 소이치로와 후지사와가 가족경영을 배척한 이유는 무엇이었을까?


두 사람 다 남달리 가족애가 깊은 사람이란 것은 잘 알려져 있다. 하지만 경영의 세계는 비정한 세계이다. 따라서 그 와중에 어버이로서 정을 갖고 임하면 경영이 순조로울 수 없다. 그들 두 사람은 아버지이면서 경영자로서의 비정함을 자식들에게 관철시킬 자신이 없었던 것이다. 세습제의 옳고 그름에 대해 질문은 받은 소이치로는 솔직하게 이렇게 말하고 있다.


"결국 누군가 손해를 본다면 회사도 손해를 볼 것이고 그것은 내 아들에게도 해로울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내 아들은) 무언가를 해내야 한다는 강박감이 만들어지면 반드시 무리를 하게 될 것이고, 그 결과는 반드시 실패하게 됩니다."


아버지로서의 분명한 애정표현이 솔직하게 묻어나는 말이다. 소이치로의 사후, 장남인 혼다 히로토시(세계적으로 유명한 자동차경주용 엔진제조업체 무겐의 사장 - 역자주)는 가족 경영을 배척한 아버지의 신조에 깊이 감사하며 자신의 심경을 이렇게 말했다.


"창업자의 자식은 태어나면서부터 그 뒤를 이어야 한다는 것이 지나치게 강조됩니다. 하지만 아버지는 나의 인생에 조금도 제약을 가하지 않으셨지요. (중략) 덕분에 나는 하고 싶은 대로 살 수 있었습니다. 통상 2세들이 겪는 압박감을 조금도 느끼지 않고 살았으니까요."


이러한 소이치로의 정책은 현재의 혼다에도 그대로 전해지고 있다. 현직 직원들의 자녀들은 혼다에 입사할 수 없다. 이는 명문화되어 있진 않지만 일종의 불문율로 완벽하게 지켜지고 있는 것이다.


창업 반세기, 일본 경제는 그 외양부터 크게 변화되었다. 일본 기업은 대규모의 구조개혁을 단행해야만 살아남을 수 있는 막다른 골목으로 몰리게 되었다. 자동차업계만을 보아도 외국 자본이 들어오지 않은 곳은 도요타와 혼다 두 곳밖에 없었다.


혼다는 2000년 국내의 신차 판매대수를 기준으로 닛산자동차를 추월하고 혼다 소이치로의 평생에 걸친 염원이었다. 그것을 달성할 수 있었던 것은 냉혹한 시대에 경영 세습은 회사를 무너뜨린다는 혼다의 신념과 밀접하게 연관되어 있다. 혼다의 만년에 비서를 지낸 쯔지 히토시는 당시 고문이던 혼다에게 "고문의 경영철학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무엇입니까?"를 질문했는데, 이에 대해 혼다는 한마디로 답했다.


"그건 사랑이지."


자동차를 만든다는 것은 타고 있는 사람의 목숨을 책임지는 것이다. 타고 있는 고객에게 만일의 일이 생기면 그것은 돌이킬 수 없는 일이 되기 때문이다. "기술을 사용해서 사람의 행복에 봉사한다는 인간의 사랑이 없이는 불가능한 일이었다."라고 혼다는 설명했다. 공사를 분명히 구별한 원칙 또한 바로 사원들과 혼다를 위한 것이었다.


"고객에 대해서든 사원에 대해서든 항상 사랑과 배려를 잊지 않았던 혼다였다"고 쯔지는 자신의 저서에 회고하고 있다.


* * *


본 도서 정보는 우수 도서 홍보를 위해 원저작권자로부터 정식인가를 얻어 도서의 내용 일부를 발췌 요약한 것으로, 저작권법에 의하여 원저작권자의 정식인가 없이 무단전재, 무단복제 및 전송을 할 수 없으며, 원본 도서의 모든 출판권과 전송권은 원저작권자에게 있음을 알려드립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