산을 오르듯 나를 경영하라

   
서재경
ǻ
예지
   
7800
2005�� 04��



>size=2>color=#5f5f5f size=2>■ 책소개
산행에서 얻은 깨달음. 산행에는 사람을 끌어당기는 매력이 있다. 정상을 정복하는 쾌감, 번잡한 일상을 벗어난 호젓함,마음을 어루만져주는 풍경 등 그 매력이란 게 백인백색이겠지만, 이 책의 저자가 10년이나 산행을 그만두지 못한 것은 거기서 인생길의 축소판을발견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 


color=#5f5f5f size=2>저자는 서울경제신문사의 기자로 사회에 첫발을 내디딘 후 한국 경제사의 산 증인 대우그룹에서22년을 일했다. 모두 하루 14시간 근무가 일상이었고, 부사장이었던 그에게도 그런 근무 환경은 별로 다르지 않았다. 그러다 어느 날부터 몸이아프기 시작했다. 그 원인을 알고자 이 병원 저 병원에 물어보았지만 별 뾰족한 대답을 듣지 못하다가, 한 의사로부터 산행을 권유받았다. 그렇게시작한 산행이 10년을 훌쩍 넘겼다.


color=#5f5f5f size=2>주로 혼자 올랐던 산행 틈틈이 철학, 종교, 고사를 넘나들며 산이 주는 가볍지만은 않은교훈을 되새김질하여 더러는 공책에 간단하게 적고 더러는 지인들에게 들려주었던 이야기들을 이번에 책으로 엮었다. 쉽고 군더더기 없는 글에는 한국경제 격동의 20여 년을 최전선에서 보낸 경영인으로서의 묵직한 경험이 녹아 있다. 이 책은 대한민국에서 그처럼 살아왔고 또 지금 살고 있을사람들에게 각자의 생각을 비춰볼 수 있는, 산행의 좋은 길동무가 되어줄 것이다. 


color=#5f5f5f size=2>■ 저자 서재경
1947년 목포에서 태어나 외국어 대학서반아어과를 졸업한 후 5년간의 경제부 기자생활 끝에 대우그룹에 입사하여 22년간 일했다. 산업별로는 무역업, 건설업, 호텔업, 전자산업에서일했으며 업무 영역으로는 기획, 영업, 관리분야를 두루 경험 했다. 중남미본부장으로서 해외 일선을 진두 지휘했으며, 그룹의 기획조정실과 비서실에근무하는 동안 최고경영자를 위한 참모와 조언자로서 많은 시간을 일했고 이 기간동안 위기관리에 대한 효과적인 해결책을 개발하는데 남다른 노력을쏟았다. 전경련회장의 보좌역을 마지막으로 대우그룹을 떠나 컨설턴트로 활동 중이다.


color=#5f5f5f size=2>서강대 경영대학원에서 최고경영자과정을 수료했고 하바드대학의 행정대학원에 수학하면서사회간접자본의 민영화 문제, 국제안보문제, 그리고 미국 행정부의 정책 입안자들을 위한 최고경영자과정에서 공부했으며 이어서 하바드대학 부설한국학연구소에서 객원연구원으로 활동했다. 2001년부터는 외국어대학의 겸임교수로 초빙되어 3년간 경영학을 강의한바 있으며, 매일경제신문,머니투데이, 오마이뉴스 등에 기업경영과 관련된 컬럼을 쓰기도 했다. 월드컵유치에 기여한 공로로 정부로부터 체육포장을 받았으며 미국의 Who’sWho in the World와 영국의 International Biographical Centre가 발행하는 인명록에 등재되었고 2002년에는영국의 IBC가 선정한 20세기의 탁월한 인물 200인에 선정된바 있다.


color=#5f5f5f size=2>저서로 『PI-기업인의 이미지』『시장은 넓고 팔 문건은 없다』와 역서로『부처님이라면 어떻게하실까』『한반도 운명에 관한 리포트』『리더여 두려움을 극복하라』 등이 있다. 

■ 차례 
1.산을 오르기는 힘들고 내려가기는 어렵다 
2. 세상에 변하지 않는 것은 없다 
3. 어리석은 노인이 산을 옮긴다 
4. 산처럼고요하고 깊게 
5. 게으르고 사악한 사람은 산에 가지 않는다





산을 오르듯 나를 경영하라


1. 산을 오르기는 힘들고 내려가기는 어렵다

산을 오르면서 제일 먼저 떠오르는 생각은 자기 몫의 산행은 자기가 해야 한다는 사실이다. 자기 몫을 아무도 대신해 주지 않기 때문이다, 누가 대신 가줄 수도 없고 업어다 주지도 않는다. 그래서 피곤해도 일어서야 한다. 힘들어도 가야만 한다. 천리 길이 한 걸음에서 시작되듯 만리 길도 한발한발 걷는 결과일 뿐이므로, 인생 길도 무엇이 다르겠는가.


산은 오르기는 힘들고 내려가기는 어렵다. 산에서 몸을 다치는 것은 대부분 내리막길에서다. 오를 때는 힘만 뒷받침되면 충분하지만 내리막에서는 힘만으로 되지 않는다. 거기에는 균형 감각이 필요하다. 그래서 더욱 어렵다. 주역64괘중 첫 번째인 건(乾)괘에 항룡유회(亢龍有悔)라는 대목이 나온다. 뜻을 이룬 자가 결정에 올랐을 때 더욱 삼가고 조심하라는 가르침이다. 산길이든 인생길이든 정상에서 있는 사람들이 음미해 볼 경구가 아닐 수 없다.


산은 올라갈수록 힘들다. 체력은 떨어지고 바람의 저항은 거세지고, 경사는 급해지며, 먹을 것은 줄어들고, 산소는 부족해진다. 모든 괴로움이 함께 찾아오는 곳. 그곳이 바로 정상이다. 그런 점에서 인생과 산행은 정말 비슷하다. 인생에서도 무엇인가를 이루기 직전이 가장 힘들기 때문이다. 사람들은 많은 위인들이 성공의 문턱에서 겪었던 좌절과 고통에 대한 고백을 기억하고 있다. 그러므로 어렵고 힘든 지경을 만나면 그것이 인생의 정점에 가까워졌다는 신호로 받아들이는 것이 좋지 않겠는가.


지혜로운 사람은 미리부터 산행을 대비한다. 산에 오를 체력, 가는 곳에 대한 정보, 산행에 필요한 물자, 산행의 조력자, 함께 할 동반자를 미리 준비한다. 지혜 없는 자는 무모하게 산을 오른다. 아무 준비도 없이, 무턱대고 오른다. 산에서 사고를 당하는 경우는 대부분 준비 없이 무모한 출발 때문이다. 하루 이틀의 산행에도 계획과 준비가 필요하다면 한평생을 사는 인생 길에 계획과 준비가 필요함은 두 번 다시 말할 필요가 없으리라.


가는 길을 아는 사람과 모르는 사람의 산행에는 큰 차이가 있다. 길을 아는 사람은 페이스 조절이 가능하기에 덜 지친다. 그들은 속도를 낼 곳과 천천히 가야 할 곳을 구분하며 힘을 쓸 지점과 힘을 아낄 지점을 분별하므로 힘을 안배할 수 있다. 그래서 처음 가는 산행에는 경험 많은 안내자가 소중하다. 인생도 마찬가지여서 아마도 인생의 길을 아는 사람을 가리켜 "선지식(善知識)"이라고 불렀으리라.


앞길이란 항상 기대와 두려움의 대상이다. 산길에서 넘어야할 어려운 재 하나를 앞에 두고 걱정 근심이 없을 수 없다. 그러나 걱정만 하면 무슨 소용이 있겠는가? 걱정으로 해결되는 것은 하나도 없다. 뚜벅뚜벅 산길을 오르는 것 외에 달리 무슨 묘안이 있겠는가?


인생에는 리허설이 없다. 한번도 해보니 않은 일을 리허설도 없이 곧바로 무대에 올리면서 살아간다. 아내노릇, 남편노릇, 군대생활, 직장생활 등 모두 리허설이 없다. 한번만 더 기회를 준다면 이번에는 잘할 것만 같은데 리허설이 없는 인생이기에 두 번째 기회는 돌아오지 않는다. 만약 두 번째 기회가 주어진다면 정말 잘할 수 있을까? 같은 산을 두 번째 갈 때는 누워서 떡먹기처럼 아주 쉽던가? 두 번째일지라도 그렇게 쉽지만은 않으리라. 느끼는 어려움과 치러야 할 수고는 매번 비슷한 무게로 다가온다.

오늘 산길에서 넘어지지는 않았는가? 혹시 그랬다면 원인이 무엇이었던가? 큰 바위 때문인가, 작은 돌부리 때문인가? 큰 나무 등걸 때문인가, 작은 나무뿌리 때문인가? 답은 자명하다. 항상 사람을 넘어지게 만드는 것은 작은 돌부리나 작은 나무뿌리 따위와 같은 우리가 하찮게 생각하는 것들이다. 성공을 향해 내달리던 전도양양한 사람들이 인생의 레이스에서 넘어지는 것도 대부분 돈, 술, 여자와 같은 사소한 이유 때문이다. 거대한 제방이 무너지는 것도 조그마한 바늘구멍이 그 이유이듯이.



2. 세상에 변하지 않는 것은 없다

우리가 가는 산은 태초부터 산이 아니었다. 대부분은 평지였다가 지각변동으로 솟아올라 산이 되었고, 그중 상당수는 바다 밑의 마그마가 솟구쳐 올라 산이 되었다. 그래서 산을 통해 우리가 깨닫게 되는 위대한 우주의 법칙은 세상에 변하지 않는 것이 아무것도 없다(무유정법)는 사실이다. 산에 가는 사람들은 자신들이 서 있는 이산이 언젠가는 또 다시 평지가 되거나 바다 속으로 다시 가라앉을 수도 있다는 사실을 생각해야한다. 단지 그 날이 언제인지 모를 뿐이다.


산에서 사람들은 무엇을 배우는가? 그것은 첫째는 아마도 인내요. 둘째는 겸손이니라. 인내 없이는 산행을 계속할 수 없으며, 인내 없이는 산행을 끝낼 수 없다. 산에 가서 겸손하지 않으면 사고를 당하기 십상이다. 겸손 없이는 산을 안전하게 오를 수도, 내려올 수도 없다. 인내와 겸손을 빼고 인생의 성공을 어떻게 말할 수 있겠는가.


드물게 산이 우리에게 결단을 요구하기도 한다. 계속 갈 것인가. 그만 내려갈 것이다, 정면 돌파할 것인가, 돌아갈 것인가. 요구는 주로 예기치 않았던 상황의 변화에 기인한다. 기업경영이나 인생살이도 변화하는 환경과 게임이라서 순간의 결단이 훗날 엄청난 결과로 이어지곤 한다. 몸에 병이 커지는 것이나 기업이 부실해지는 것이나 인생의 성패도 결단의 타이밍과 불가분의 관계에 있다.


산행은 앞섬과 뒤섬의 연속이다. 비슷한 시각에 출발한 사람들이 산을 오를 때는 앞서거니 뒤서거니 한다. 그러나 거의가 비슷한 때 산을 내려온다. 직장생활에서도 이런 현상을 자주 볼 수 있다. 앞서가던 사람이 뒷사람에게 추월 당하는 일도 생기고 뒤처진 사람이 다시 앞으로 나가는 일도 허다하다. 그러나 직장을 떠나는 것은 거의가 비슷한 시기의 일이다. 그러다 세상을 떠날 때쯤 생전에 앞서거나 뒤서는 것에는 큰 의미가 없음을 알게 된다.


직업인의 성패냐 직위에 달려있지 않고 그 직분을 어떻게 수행했느냐에 달려있듯이, 인생의 성패 역시 속도에 있지 않고 얼마만큼 충실하게 그 길을 갔느냐에 달려있다.


가까운 산 먼 산을 가린다. 비록 작은 산일지라도 가까이 있으면 시야를 가로막아 멀리 있는 큰 산을 보지 못하게 만든다. 설령 멀리 있는 산들이 보인다손 치더라도 가까운 작은 산이 먼데 큰 산보다 더 크게 느껴진다. 원근법에 의한 착 현상 때문이다. 경영자나 리더들이 사람을 쓸 때도 똑같은 현상이 일어난다. 눈앞에 있는 소인들로 인해 멀리 있는 인재를 보지 못하거나, 본다 하더라도 눈앞 사람보다 크게 느껴지기 때문이다.


가파른 산실에서 때로는 안개를 만나기도 한다. 가뜩이나 조심스러운 몸놀림이 안개로 인해 더욱 조심스러울 수밖에 없다. 한치 앞도 알아보기 어려운 안개 속에서 취할 수 있는 선택은 두 가지다. 위험을 무릅쓰고 뚫고 지나가거나, 안개가 걷힐 때까지 기다리거나, 안개와 같은 불청객은 인생길에서도 자주 나타나는 복병이다. 근거 없는 루머도 그 중의 하나요, 억울한 비방도 그 중의 하나다.

 

산에는 메아리가 산다. 그 메아리가 재미있다. 아! 하고 부르면 아! 하고 대답하고 어! 하고 부르면 어! 하고 대답한다. 좋은 말을 내놓으면 좋은 말이 되돌아오고 나쁜 말을 던지면 나쁜 말이 더 크게 돌아온다. 메아리를 생각하면 너희가 대접받고 싶은 대로 먼저 남을 대접하려는 성서의 가르침이 떠오른다. 그래서 왕비 대접을 받고 싶거든 아내가 먼저 남편을 왕 대접하라는 경구도 태어났으리라.


정상에서 외치는 함성은 애초에 소리를 지르기 위한 것이 아니었다. 그것은 산 아래에서 꼭대기에 이르기까지 차고 또 차오르던 숨이 자신도 모르게 터져 나오면서 만들어낸 탄성이었다. 일상생활에서 우리는 허파크기의 3할도 채 사용하지 못한 채 얕은 숨을 쉰다. 그러다가 산행처럼 힘든 운동을 하면 그동안 사용하지 않았던 허파의 나머지 부분까지도 총동원하게 된다. 내 몸에 지닌 것도 다 쓰고 누리지 못하면서 몸밖의 없는 것을 구하느라 사람들은 얼마나 애를 쓰는가!



3 어리석은 노인이 산을 옮긴다

산을 오르면서 우공이산(愚公移山)의 고사를 생각할 때가 많다. 그 높은 북산(北山)은 보잘 것 없는 농기구만으로 파서 없애겠다고 거대한 공사에 착수한 노인의 의지에 감동했다는, 그리하여 하늘이 스스로 다른 곳으로 옮겨주었다는 이야기는 언제 들어도 기운을 북돋워준다.


율곡은 금강산의 주봉인 비로봉에 올라 이런 노래를 지었다.


지팡이 끌며 가파른 봉우리에 오르니

시원한 바람 사방에서 불어오네.

푸른 하늘은 머리 위의 모자요

파란 바다는 손안의 술잔이로다.


화담 서경덕 역시 같은 봉우리에서 노래하나를 읊조렸다.


말로만 듣던 금강산

그리워하기 20년이었네.

이제 그 절경을 찾아왔는데

맑은 가을 맑은 하늘까지 만났구나.

계곡의 국화향기 이제 막 퍼지고

바위 위의 단풍은 붉게 타누나.

깊은 산골짜기 노래하며 지나자니

마음과 생각이 쓸쓸해지는구려.


적극적으로 현실정치에 참여했던 율곡과 숨어살며 학문에 정진하기를 원했던 화담의 천성이 어쩌면 똑같은 금강산을 대하고도 서로 다른 노래를 만들게 했으리라.


프로메테우스는 제우스의 이복동생이었다. 그는 인간을 창조하고 제우스의 불을 훔쳐 인간에게 넘겨줌으로써 문명생활을 누리게 했다. 그러나 천상의 불을 훔친 것에 화가 난 제우스는 큰 형벌을 내렸다. 프로메테우스를 코카서스 산중에 쇠사슬로 묶어놓고 독수리가 그의 간을 쪼아먹도록 하는 것이었다. 밤이 되어 상처가 아물면 다음날 어김없이 독수리가 날아와 다시 간을 쪼았다. 프로메테우스는 인류를 위해 값진 것을 선물했으니 이로 인해 기나긴 고통을 감수해야만 했다. 세상에는 공짜가 없고 값진 일에는 그만큼의 희생이 따른다는 교훈을 이 신화는 전하려 했던 것이 아닐까.


산에서 자일을 타는 친구들을 보면 마틴 루터의 우화가 생각난다. 쥐 한 마리가 물은 건너 맞은편 언덕으로 가고 싶었다. 그래서 수영선수인 개구리와 상의했다. 개구리는 심술이 궂은 터에 평소 쥐를 싫어했으므로 엉큼한 꾀를 냈다. 그래서 쥐에게 말했다. 우리 둘의 다리를 잡아맨다면 헤엄쳐서 함께 저 언덕으로 갈 수 있겠지? 쥐와 개구리는 다리를 묶고 물을 건너기 시작했다. 그러나 물에 들어가자마자 쥐를 빠져죽게 하려고 개구리가 잠수를 시작했다. 겁에 질린 쥐는 고함을 지르며 발버둥을 쳤다. 그때였다. 하늘 높은 곳에서 쏜살같이 솔개 한 마리가 내려와서 쥐를 낚아챘다. 결국 개구리도 함께 딸려 올라가 솔개 밥이 되었다.


퇴계 선생의『도산육곡(陶山六曲)』가운데 이런 시조가 있다


뇌정이 파산(破山)하여도 농자는 못 듣고

백일이 중천 하여도 고자는 못 보나니

우리는 이목총명 남자로 농고같이 말리라


농자(농자)는 귀머거리를, 고자(고자)는 장님을 뜻하며 농고는 귀머거리와 장님을 줄여 붙인 이름이다. 우레가 쳐서 온 산이 무너져도 귀머거리는 모른다는 첫머리에서 시대의 지성이 느끼는 안타까움과 탄식을 보게 된다. 민심이 무너져 내리는 소리가 산 무너지는 것처럼 들려와도 듣지 못하고, 대낮같이 밝음 명명백백한 사실도 보지 못하는 지도자가 있다면 바로 귀머거리와 장님이 아니고 무엇이겠는가.



4. 산처럼 고요하게 깊게

어떤 이는 쉬러가고, 어떤 이는 생각하러가고, 어떤 이는 빌러가고, 어떤 이는 비우러가고, 어떤 이는 재미 삼아간다. 더러는 이 모든 것을 한꺼번에 이루기 위해서도 간다. 어떤 목적이건 산은 넉넉하게 그 소원을 받아준다. 그래서 산을 내려오는 사람의 마음은 항상 든든하고 넉넉하다. 친정집을 다녀온 색시의 마음처럼.


혹시 친구에게 배신당하거나 믿었던 사람이 등을 돌리거나 아니면 라이벌에게 패한 상처를 달래기 위해 산을 찾기로 했다면 칼 힐티(Carl Hilty, 1833~1909)의 충고도 함께 가져가자. 그의『잠 못 이루는 밤을 위하여』에서 누군가를 끈덕지게 미워하는 행위는 내적인 생명을 좀먹는 위태로운 일이라고 경고하면서 미워하는 마음은 미움의 대상보다는 미움을 지니고 있는 사람에게 훨씬 해롭다고 충고한다. 그렇다면 마음에도 없는 용서를 선언한다거나 화해의 기도를 한다고 해서 복수의 감정이 해소되지는 않는다. 힐티는 이런 경우 잠시 복수를 포기하고 신에게 맡겨버리라고 제안한다.


복수의 사유가 타당하다면 신이 틀림없이 적당한 시기에 적당한 방법으로 정확히 갚아줄 것이다. 복수는 이렇듯 신에게 위타가는 것이 좋다. 그렇게 상처받은 감정도 시간이 흐름에 따라 신의 은총으로 차차 위안을 받게 된다.


산에서는 가급적 말 대신에 노래를 부를 일이다. 노랫말은 대부분 정제되고 세련되어 아름다움을 지닌다. 노래는 남을 헐뜯거나 누구를 원망하지도 않고 자신을 자랑하지도 않는다. 그러나 말은 하다보면 잘못되기가 십상이다. 해묵은 강의, 긴 설교, 반복되는 법문의 끝이 보이지 않아도 그 귀결을 짐작할 수가 있다. 노래를 하는 동안은 사람들의 마음이 순화되고 한마음이 되기 쉽다. 최소한 노래를 하는 동안은 그 입에서 말이 나올 수 없기 때문에 그 순간만큼이라도 말의 실수를 피하게 된다. 산길에서 가장 사랑받는 노래는 아마 김연준의 "청산에 살리라" 일 것이다. 노랫말만큼이나 곡이 서정적이다. 혹은 세상사에 지치고 혹은 믿었던 사람이 실망시키거든 말없이 산에 올라 이 노래라도 부를 일이다.


나는 수풀 우거진 청산에 살으리라

나의 마음 푸르러 청산에 살으리라

이 봄도 산허리엔 초록빛 물들었네

세상번뇌 시름 잊고 청산에서 살리라

길고 긴 세월동안 온갖 세상 변하였어도

청산은 의구하니 청산에 살으리라


계절에 따라 산의 자태가 달라진다. 그리고 계절 나름대로의 멋이 다르다. 봄의 생명력, 여름의 녹음, 가을 단풍 그리고 눈 쌓인 겨울산은 모두 다르다. 어느 것이 더 좋고 나쁘다 할 수 없는 각각 다른 맛과 멋이다.


산행의 고독을 느끼게 되는 것은 오직 한 가지 경우다. 교양 없고 무례한 사람들과 동행하게 되었을 때다. 교양 없는 사람들은 어디서나 떠들고 나서기를 좋아하며 제가 무엇이나 되는 줄로 착각하여 자기의견을 앞세우기 때문에 함께 가는 사람을 고독하게 만든다. 교양 없는 사람은 산에 와서도 라디오를 크게 틀고 다니고, 남에게 방해가 되도록 큰 목소리로 말하지만 내용은 기껏해야 아파트 평수거나 골프의 타수거나 살 빼는 이야기거나 어젯밤에 먹은 안주 이야기거나 혹은 정치 이야기가 고작이다.



5. 게으르고 사악한 사람은 산에 가지 않는다

게으른 사람과 사악한 사람은 산에 가지 않는다. 게으른 사람에 대해서는 달리 설명이 필요치 않으리라. 그런데 사악한 사람은 왜 산에 가지 않을까? 그것은 산이 거대한 지성소(지성소)이기 때문이다. 산이 지성소라는 사실은 산에서는 범죄가 거의 없다는 통계에서 증명되고 있다. 사악한 사람들은 성당이나 교회나 법당과 같은 곳을 지날 때 마음이 불편함을 느낀다. 사악한 사람도 그 나름의 양심이 있고 미약하나마 양심의 지배를 받기 때문이리라. 영국의 사회사상가 러스킨은 "지구상의 산들은 천연의 대사원"이라고 찬탄하면서 참된 종교는 거의 산속에서 이루어졌다고 말했다.


사람들은 산에 산신이 있다고 믿어왔다. 그래서 산속에 절을 지을 때 산신을 모시는 산신각도 늘 함께 지었다. 비록 크기는 부처의 거처보다 작아도 산신에게 주거 공간을 만들어준 선인들의 착상이 재미있다. 전혀 다른 신앙의 대상임에도 불구하고 부처와 산신이 한데 어우러지기를 바라는 마음에서였으리라.


물은 높은 데서 낮은 데로 흐른다. 물은 높은 산에서 시작하여 골짜기를 타고 흘러서 시내를 이루고 마침내 강에 이른다. 강이 모여서 만든 것이 바다다. 물은 산에 있을 때가 제일 높고 바다의 도착했을 때가 제일 낮다. 그런데 바다의 물은 이미 육지를 감싸고 있다. 물은 몸을 낮춤으로써 천하를 포용하는 큰 그릇이 된 것이다. 어디 물뿐이랴! 무릇 성인들은 일찍이 스스로의 몸을 낮춤으로써 그 위업을 달성할 수 있었다.


세상에는 세 가지 부류의 사람이 있다. 낮을수록 높아진다는 사실을 깨닫고 부지런히 자신은 낮춰 성인이 되는 사람이 그 첫째요. 알고도 실천하지 못하여 힘들게 인생을 살다가는 사람이 둘째요. 죽는 날까지 이 진리를 터득하지 못한 채 어리석게 살아가는 사람이 셋째다.


성경의 마태복음에는 "심령이 가난한 자는 복이 있나니…"로 시작하는 저 유명한 산상수훈이 나온다. 예수의 사상이 완벽하게 표현된 한편의 감동적인 설교다. 예수는 물가에서도, 잔칫집에서도, 성전에서도 많은 가르침을 남겼으나 어찌된 영문인지 성경에 남아 있는 완벽한 설교는 이 산상수훈 한 편뿐이다. 예수의 족적을 따라가 보면 그 역시 산과 관계가 깊었음을 알 수 있다. 예수가 광야에서 사십일동안의 혹독한 시련을 끝내고 사탄의 마지막유혹을 이겨낸 지점은 바로 높은 산이었다. 사탄은 자신에게 절을 하면 눈앞에 펼쳐진 세상을 다스릴 권세를 주겠다고 유혹했으나 예수는 사탄을 꾸짖어 물리쳤다. 예수는 낮에는 성전에서 포교를 하고 밤에는 감람산에 올라가 쉬었다. 유태교 지도자들에 의해 체포된 것도 이 산에서의 일이었고 십자가형에 처해진 것은 골고다라는 이름의 언덕에서였다.


태양의 존재는 물리적 세계에만 한정되지 않는다. 우리의 정신세계에도 태양은 존재한다. 물리세계에 존재하는 태양처럼 정신세계를 지배하는 태양과 같은 존재를  사람들은 각자의 마음에 가지고 있다. 어떤 이에게는 신이기도 하고 어떤 이에게는 그것이 부처이기도 하면 어떤 이에게는 진리이기도하며 혹은 지식이기도하다. 더러는 그것이 힘이나 권력이나 돈 일수도 있다. 그것이 무엇이든 사람들은 자신의 정신세계를 지배하고 끊임없이 정신적 영양소를 제공하는 그 대상으로부터 일생 영향을 받고 산다. 정신세계를 지배하는 태양이 무엇이지에 따라 사람은 성자도 되고 금수도 된다.


마가복음에는 예수의 이런 선언이 실려 있다.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누구든지 이 산더러 들리어 바다에 던져져라 하면 그 말하는 것이 이루어 질줄 믿고 마음에 의심하지 아니하면 그대로 되리라. 그러므로 내가 너희에게 말하노니 무엇이든지 기도하고 구하는 것은 받은 줄로 믿으라. 그리하면 너희에게 그대로 되리라."


믿음만으로 산을 옮기는 작업은 물리적으로는 불가능하다. 그러나 신앙은 불가능을 가능으로 바꾸는 신비한 세계다. 그래서 믿을 수 없는 일을 믿어야 되는 패러독스다. 산에 올라 산을 바다로 옮기는 기도를 해본 적이 있는가? 한번 그렇게 믿고 그렇게 소원해 볼 생각은 없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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