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저자 김석봉
"석봉토스트"사장
■ 차례
여는 글 - 부드러운 미소와 빵으로여는 아침
1. 불황을 모르는 토스트맨
자릿세와아침인사 불황을 모르는 토스트맨 못 말리는 토스트 매니아들 세상에서 가장 비싼 토스트 로드 비즈니스의 관건은 청결 즐거운카멜레온 생활 바쁘게 일하고 기쁘게 쉰다 사람을 감동시키는 좋은 말들
- 석봉토스트가 드리는 신선한 마음의 재료 27가지
2. 일개 노점상에서 중국 직영 체인점 대표가되기까지
길거리 마케팅을 아십니까 노점상도 당당한 사업이다 장사의 제1원칙은 신용 중국 현지 직영 체인점을개설하기까지 마인드를 바꾸면 미래가 바뀐다
3. 용접공에서 과일행상까지 밑바닥순례
나의 노동 철학 용접공에서 과일행상까지 밑바닥 순례 마라토너가 되어 달리다 IMF, 그리고 가난과 절망 초보 토스트맨, 트럭을 사다 전략 없는 장사에는 실패만 따를 뿐이다
4. 토스트맨, 호텔 조리사 복장으로갈아입다
실패에서 배워라 낡은 습관을 버려라 호텔 조리사 복장으로 갈아입다 과거의 녹슨 판을 갈다 메모의힘, 시간을 지배하라 최고의 토스트 맛을 찾아라 석봉토스트를 빛낸 몇 가지 아이디어들 좋은 고객은 좋은 상인으로부터 나온다
-소박하지만 성실하게, 석봉토스트의 마케팅 포인트 6
5. 토스트맨, 즉결심판에회부되다
토스트맨, 즉결심판에 회부되다 오뚜기 식품 사장님의 방문 웃음의 치유력 나를 사랑하게 해주는 "3뻐운동"
6. 웃음은 희망을 낳고 희망은 성공을낳네
아이들과의 한판 축제 커피값 한 잔에 10만 원 미친 듯이 즐겁게 나는 바뻐 토스트는 예술, 포장마차는공연장 나의 모닝비전
- 집에서 토스트 맛있게 만들어 먹는 방법
석봉 토스트, 연봉 1억 신화
못 말리는 토스트 매니아들
장사를 오래 하다보면 꽤 재미있는 분들을 많이 접하게 됩니다. 더군다나 석봉토스트란 이름을 소문으로 듣고 먼 데서부터 달려오는 분들이 수월찮기 때문에 정말 여러 부류의 사람들을 만나게 되죠. 그래서 포장마차에서는 항상 이야기가 넘쳐납니다. 움직이는 이야기보따리라고나 할까요. 여기 앉아 있으면 인생 공부가 따로 필요 없죠. 옷깃만 스쳐도 인연이라고 하는데 많은 손님들과 나눈 많은 대화는 제 삶의 소중한 자양분이 되었습니다.
어느 날 예쁜 여대생이 제 포장마차를 찾아왔더랬습니다. 텔레비전에서 석봉 아저씨의 이야기를 듣고 왔으니 제일 맛있는 토스트를 달라고 하더군요. 저는 즉석에서 석봉토스트를 만들어 주었습니다. 여대생은 사이다를 마시며 토스트를 맛있게 먹더니 햄토스트와 우유 하나를 더 시켜서 먹더군요. 저는 속으로 이젠 그만 먹겠지 했습니다. 그런데 다 먹고 난 후에도 “야채 토스트” “계란 토스트” 하며 줄줄이 시켜서 먹는 게 아닙니까. 마지막엔 주스 하나를 더 마시곤 “맛있다” 하며 가볍게 마무리를 했습니다. 저는 안쓰러운 마음으로 하루 종일 끼니를 거른 게 아닐까 하는 생각까지 했습니다.
석봉 토스트는 식빵 두 개가 겹쳐 있고 그 속에 푸짐한 야채와 햄, 계란 등이 들어 있어서 하나만 먹어도 웬만한 끼니는 됩니다. 지금까지 ‘석봉토스트 먹기’ 최고 기록은 어느 건장한 남자분이 세운 네 개 분량입니다. 가냘픈 아가씨가 네 개를 먹다니, 참 신기했습니다. 다 먹고 난 후 예쁜 여대생이 가뿐하게 “아 잘 먹었다” 하는 걸 보고 저는 “위대하십니다. 아이고. 축하드립니다. 최고 기록을 세우셨습니다”하고 기뻐해 주었습니다. 그러자 여대생은 “예? 제가 기록을 세웠다구요? 워낙 맛있어서요, 아저씨. 얼마예요?” 하고 돈을 내려 했습니다. 저는 “손님이 저희 포장마차에서 최고 기록을 세우셨기 때문에 특별 서비스로 돈을 받지 않습니다. 전에 토스트 네 개 드신 분이 최고 기록이었는데 오늘 아가씨가 토스트 네 개와 음료 세 개를 드셔서 저희 석봉토스트 포장마차 사상 최고의 기록 보유자십니다. 축하드립니다”하고 말했습니다. 아가씨와 저는 깔깔깔 웃으며 포장마차에서 재미있는 추억을 만든 셈이지요.
하루는 이런 일도 있었습니다. 노숙자로 보이는 걸인이 포장마차에 불쑥 들어왔습니다. 얼굴과 손은 씻지 못한 채 새까맣게 그을린 듯한 모습이었죠. 걸인은 제 얼굴도 쳐다보지 않곤 “빵 하나 주세요” 했습니다. 헐벗은 모습에 시장 끼가 역력한 얼굴 표정이라 급하게 드려야겠다는 생각으로 석봉토스트를 얼른 구워 건넸습니다. 얼마나 굶었을까? 몹시 궁금하더군요. 그런데 토스트를 건넨 지 30초도 안 되어 다시 어눌한 말투로 ”하나 더 주세요“ 하는 것이었습니다. 저는 ”네, 잠깐 기다리세요“ 하며 두 번째 토스트를 드렸습니다. 역시 일분도 안 되어 ”하나 더“를 외쳤고, 또 조금 후에 ”하나 더“ 하며 부리나케 드셨습니다. 저는 계속 종류가 다른 네 가지 토스트를 만들어 드렸습니다. 네 개를 먹는데 4분이 채 안 걸렸습니다. 목이 메일까봐 ”저, 우유도 드세요“ 하는 말이 제 입에서 떨어지자마자 걸인은 등을 돌리더니 밖으로 바삐 사라졌습니다. 저는 그의 뒷모습을 보며 ’오늘 배가 고프신 예수님을 대접해드렸구나, 마실 것을 좀 드릴 것을……‘ 하며 아쉬워했습니다. 저는 어떤 손님이든 제가 만든 토스트를 맛있게 드시는 모습이 참 좋습니다. 그래서 하나하나 정성을 들이게 되죠. 토스트 한 개가 손님의 끼니가 되어주고 더 나아가 마음 따듯한 양식이 되어 준다면 그보다 더 소중한 행복이 어디 있을까요?
또 하나의 에피소드가 있습니다. 포장마차 마감시간인 11시가 다 되어서 생긴 일입니다. 포장마차 문을 닫기 위해 한참 정리를 하고 있는데 어떤 여자 분이 가쁜 숨을 몰아쉬며 휘장을 걷고 들어왔습니다. 얼굴을 보니 많이 친숙한 얼굴이었습니다. 3개월 전까지 석봉토스트를 매일 찾던 K여행사 L양이었는데 갑자기 안 보여서 무척 궁금했던 차였습니다. 어디가 아픈 건지, 직장을 옮긴 건지 별별 생각을 다 했더랬습니다. 그날 L양한테 들은바, 결혼을 하여 직장을 그만두자 곧 임신을 했는데 매일 아침에 사먹던 석봉토스트가 생각나 참을 수가 없더랍니다. 그래서 벼르고 벼르다가 오늘 시간을 내어 분당에서부터 무거운 길을 급히 달려온 것이라고 했습니다. L양은 토스트 두 개를 먹더니 “이제 소원 풀었다‘ 하며 몇 개를 더 포장해 갔습니다.
그 외에도 여의도?신림동?강남 등 먼 곳에서 찾아오시는 분, 8년?5년?3년째 매일 아침 오시는 분 등 석봉토스트에는 열혈 단골 손님들이 참 많습니다. 제가 텔레비전에서 소개된 걸 보곤 맛있는 석봉토스트를 사 먹으라고 아침밥을 차려주지 않는 주부님들도 계시다는 말을 들었습니다. 제가 졸지에 아내가 챙겨주는 아침밥 먹는 즐거움을 앗아간 나쁜 사람이 되어 버렸지 뭡니까.
저는 석봉토스트 매니아들이 찾아오면 무척 즐겁습니다. 거리에 수없이 널려 있는 게 포장마차인데 잊지 않고 이곳을 찾아와 주는 고마운 분들, 제가 그들의 삶 속에 작은 기억이라도 되어 준 것이 기뻐 손님들을 진정으로 대하게 됩니다. 그분들 덕분에 석봉토스트 포장마차는 보통 포장마차가 아닌, 사람과 사람간의 아름다운 가교가 된답니다. 석봉토스트 매니아 분들, 정말 감사드립니다!
노점상도 당당한 사업이다
“하나님, 화장실이 집 안에 있는 세 칸짜리 방을 얻게 해주십시오.”
단칸방 시절, 토스트 장사를 처음 시작하면서 저는 매일 세 칸짜리 방을 얻을 수 있게 해달라고 기도했습니다. 교회에 가서도 그렇게 소리내어 기도를 했죠. 제 기도를 엿들은 어떤 교회 분이 한번은 이런 말씀을 하시더군요. “진성이 아빠, 무슨 기도를 그렇게 터무니없이 하세요? 하하, 방 세 칸을 달라고 기도하는 모습이 너무 재미있어요.” 저는 이렇게 반문했습니다. “기도 내용이 구체적이어야 하나님께서 쉽게 알아들으시지 않을까요?” 그런데 그 후 세 칸짜리 방의 꿈이 이루어졌으니 구체적인 기도는 정말 이루어진다고 할 수 있지 않을까요? 구체적인 희망을 품으면 또 구체적인 결과를 얻을 수 있습니다. 사업에서도 마찬가지입니다.
제가 장사를 시작하면서 품은 꿈은 어린이들을 위한 캠프장을 세우는 것이었습니다. 삭막한 도시공간에 지친 어린이들이 대자연 속에서 마음껏 아름다운 꿈을 꾸고, 비전 있게 살아가는 아이들로 자라게 하는 것이 제 희망입니다. 아직 그 꿈이 실현되지는 않았지만 제겐 끊임없이 동기부여가 됩니다. 아직 그 꿈이 실현되지는 않았지만 제겐 끊임없이 동기부여가 됩니다. 그래서 어린이 캠프장만 생각하면 하루 종일 장사에 시달려도 피곤함을 느끼지 않습니다.
제가 체인점 사업을 구상하게 된 것도 어린이 캠프장 꿈을 하루빨리 실현시키기 위해서입니다. 한낱 노점상이 무슨 프랜차이즈 사업이냐고 고개를 저을 분도 계실 겁니다. 하지만 저는 불가능해 보이는 일에도 도전해 보고 싶습니다. 사업을 하면서 깨달은 점은 자기 안의 고정관념을 깨는 것입니다. 프랜차이즈 사업이 몸집을 키우려는 욕심에서 비롯된 것은 아닙니다. 몸이 뚱뚱해지면 욕심이 많아지고 탐욕스럽게 됩니다. 제 의도는 다른 것에 있습니다. 어려운 형편에서 출구를 찾는 분들에게 희망을 주고 그분들을 돕겠다는 생각에서였습니다. 체인점을 열면 저의 포장마차 운영철학과 석봉토스트의 맛을 더욱 널리 알릴 수 있을 것이라는 생각이죠.
저는 체인점을 두기 위해 프랜차이즈 사업 컨설턴트를 찾았습니다. 그곳에서 여러 가지 조언을 듣게 되었죠. 그래서 장사 시작 4년째 되던 해에 체인점을 내기로 맘먹었던 겁니다. 프랜차이즈 사업의 장점과 주의사항을 꼼꼼히 챙겼습니다. 나 혼자만 돈을 벌려는 목적에서 하는 확장이면 안 된다는 생각을 먼저 했습니다. 예전의 저처럼 어려움을 겪는 분들에게 제가 그동안 고생하며 터득한 노하우를 알려드리고픈 생각에서 시작한 일이었습니다. 처음엔 겁도 났지만 우선 부딪쳐보고 안 되면 접겠다는 편한 마음으로 시작했습니다. 대신 준비는 전문가의 도움을 받아 꼼꼼히 따져나간 것입니다.
점포 없이도 할 수 있는 소자본 사업으로서 노점상은 매력적입니다. 사업을 하다 실패하신 분들은 대개 “노점상이나 한번 해볼까”하는 말씀을 하십니다. 하지만 그런 식의 충동적 선택은 오래가지 못합니다. 길거리 사업도 엄연한 사업이라 고려해야 할 게 한 두 가지가 아니니까요. 이런 점을 먼저 강조하며 저는 석봉토스트 체인점을 원하는 분들에게 이렇게 조언을 드립니다.
“노점상이지만, 기존의 노점상을 한다는 마인드로 하시면 분명히 실패합니다. 다른 생각, 다른 행동으로 대응하셔야 합니다. 무엇보다 이 사업의 장점은 망해도 타격이 크지 않다는 것이지만, 타격이 크지 않다 해도 타격은 타격입니다. 다시 생활을 이끌어갈 수 있도록 하려면 망하지 않고 성공하는 것이 최선이고, 성공하지 못한다면 적어도 망하지는 않을 만큼 본전치기는 할 수 있을 정도가 되는 것이 차선입니다.
노점상은 적은 돈으로 할 수 있지만, 노점상을 하는 분들에게는 자신이 가진 전부를 걸고 하는 것이기 때문에 쉬운 선택은 아닙니다. 노점상을 하더라도 큰 성공을 목표로 할 필요가 있습니다. 우리는 행복해져야 하니까요. 성공을 하는 방법은 지금까지 제가 하는 많은 말속에 담겨 있을 것입니다. 우리는 이미 행복해지는 방법을 알고 있습니다. 문제는 부끄러움과 자기 경영 마인드가 없다는 접입니다. 그것을 극복하면 누구나 안정된 벌이를 할 수 있고, 일하는 보람과 살아가는 기쁨을 맘껏 볼 수 있습니다.
용접공에서 과일 행상까지 밑바닥 순례
15살의 어린 나이에 택한 자동차 정비소에서의 노동은 힘겨웠습니다. 잔심부름과 궂은 일은 다 제 몫이었습니다. 어른들 눈치를 보며 시키는 대로 온갖 허드렛일을 마다하지 않았어요. 부지런히 일해야 돈을 벌 수 있다는 생각밖에 없었습니다. 또래들이 학교에서 공부할 때, 저는 정비소에서 기름밥을 먹어야 했던 시절이었죠.
당시엔 제대로 정비기술을 가르치는 학원이 없었습니다. 그래서 정비소에서 도제 방식에 따라 일을 배워 기술을 익힐 수 있었습니다. 어린 나이지만 성실하게 배워 기술을 습득하는 과정에서 자연스럽게 손대게 되었지요. 용접 일도 저처럼 빨리 배우는 사람이 별로 없었습니다. 자동차 정비소에서 계속 일했다면 아마 지금도 그 일을 하고 있었을 겁니다. 하지만 정비소 공장장이 저를 너무 힘들게 만들었습니다. 어리다는 이유로 기분 내키는 대로 막 대하고 밤낮없이 일을 시켰습니다. 그래도 오랫동안 참는 생활을 해야 했지요.
한번은 이런 사건이 있었습니다. 일과를 끝내고 저녁 청소를 하고 있을 때였어요. 요즘은 가스하고 산소를 공급해서 용접을 하지만 당시는 카바이트로 용접을 했습니다. 용접을 끝내면 용접에 썼던 카바이트 통을 꼭 비웁니다. 겨울날의 살 에이는 추위 속에서도 카바이트 통을 비워야 했어요. 그런데 하루는 공장장이 그 카바이트 통을 깨끗이 닦지 않았다고 무섭게 화를 냈습니다. 앞뒤 상황도 묻지 않고는 미친 사람처럼 흥분을 해 물건을 닥치는 대로 부수고, 쇠뭉치가 달린 고무호스를 휘둘렀습니다. 그러다가 얼떨결에 그 호스에 등을 맞았지요. 저는 순간 숨이 턱 멎는 것 같았습니다. 제일 어린 제가 타깃이 된 겁니다. 너무 겁이 나서 화장실에 숨어 있다 깊은 밤이 돼서야 집으로 돌아올 수 있었습니다. 등이 쑤시고 아픈 건 둘째치고 먹구름이 드리워진 앞날에 희망이 보이지 않았습니다.
그때가 16살이었습니다. 이태 가까이 꾹 참고 했던 일을 몇 개월을 하다 그만뒀죠. 그때 제가 절실하게 느낀 건 어떤 곳에서든 사람을 사람답게 대해야 한다는 거였습니다. 그리고 스스로 할 수 있는 일을 찾아보았습니다. 남 밑에서 일하는 것보다 스스로 할 수 있는 일을 찾고 싶었습니다. 바람이 이뤄지기까지는 시간이 오래 걸렸지만 원칙은 그때 세워졌지요.
공장을 그만두고 한동안 집에서 쉬다 인천으로 이사를 왔습니다. 인천에 와서도 배운 게 도둑질이라고, 그전 일과 비슷한 일을 하게 되었습니다. 하지만 그 세차장 주인도 아주 나빴습니다. 용접봉으로 저를 때린 적이 한두 번이 아니었으니까요. 그래서 비인간적인 대우를 참다못해 그만두었습니다. 세차 요령도 빨리 익히고 일도 잘한다는 소릴 들었지만, 그런 곳에서는 일할 수가 없었습니다.
세상엔 좋은 사람도 있고 그렇지 않은 사람도 있습니다. 각양각색의 사람이 모여 사는 곳이 세상입니다. 이런 밑바닥 생활에서도 제가 중심을 잃지 않았던 것은 신앙의 힘이었습니다. 어릴 적부터 교회를 다니면서 어떤 마음으로 사람을 대하고 세상을 살아야 하는지 생각했었지요. 참 재미있는 건, 엄청난 양의 책을 읽었던 에릭 호퍼도 성경을 매우 흥미로워했다는 사실입니다. 특히 구약성경이 지닌 깊은 맛에 취해 최고의 책이라고 찬사를 아끼지 않더군요.
저는 교회에서 좋은 분들을 많이 만났습니다. 저의 평일과 주말은 완전 딴 세상이었습니다. 온갖 괄시와 천대를 당하며 밑바닥 생활을 하다, 주말에 교회에서 예배드리고 봉사하는 시간은 너무 행복했지요. 저는 서서히 몸과 맘이 부드러워졌습니다. 그러자 희망도 새록새록 돋아났습니다. 그러다가 교화 분들과 큰누나의 도움으로 조그만 과일행상을 시작하게 되었습니다. 빈둥거릴 수 없다는 생각에서 그저 일을 시작하게 된 거죠. 제가 처음 선택한 거리 장사이기도 했구요. 그래서인지 장사 요령이 있었던 것도 아니고 호객 행위도 제대로 못하겠더라구요.
과일행상으로는 별로 재미를 보지 못했습니다. 장사가 안 되어 과일을 다른 분들에게 나눠주는 날이 잦았으니까요. 사람들이 오가는 길을 지키는 것만으로도 뭔가 큰일을 하는 것 같은 착각을 하곤 했습니다. 그러나 제대로 된 방법은 하나도 알지 못했습니다. 희망은 있으되 희망의 길이 보이지 않던 시절입니다.
그렇게 행상 일을 하다 군대에 갔습니다. 제대를 하고 나서는 절대로 놀지 않겠다는 다짐을 했습니다. 제대 후에 제게 큰 도움이 되었던 건 용접기술이었습니다. 배워놓은 게 써먹을 데가 있었던 거죠. 인천을 근거지로 삼아 자동차 부품공장, 조선소, 컨테이너 업체 등을 전전하며 용접 일을 했습니다. 닥치는 대로 일을 했습니다.
교회활동도 부지런히 했습니다. 특히 주일학교 어린이를 가르치는 일이 저에겐 큰 즐거움이었습니다. 인생의 기쁨이 무엇인지 알게 되었다고나 할까요. 주일학교 교사노릇을 좀더 잘하고 싶어 성경책도 많이 읽고 아이들에게 들려 주었습니다. 그러곤 사단법인 어린이전도협회를 알게 되었고, 그곳에서 인형극 공연을 체계적으로 배울 수 있었습니다. 아이들의 심성을 밝고 건강하게 가르치는 곳이어서 제가 하고 싶은 일이 많았습니다.
제가 어린 시절에 겪었던 슬픔과 고통을 다른 아이들이 느끼지 않도록 하고 싶었습니다. 아이들을 즐겁게 해주는 일이 좋았습니다. 어린이전도협회에서 저는 인형극 공연 방법과 레크리에이션 강사 교육 등 유익한 일들을 익힐 수 있었습니다. 그땐 이 일들이 나중에 큰 재산이 되리란 걸 몰랐습니다. 그저 좋아서 했을 뿐이니까요.
낡은 습관을 버려라
오랫동안 이렇게 저렇게 무얼 할지 그려보고 결국 선택한 장사가 ‘토스트’였습니다. 하지만 처음 3개월간에는 실패를 맛봤습니다. 저는 원인을 찾아 스스로 잘못한 점을 다섯 가지 찾아냈습니다.
① 나는 주변 상권에 대한 분석과 치밀한 판매 전략이 없다.
② 나는 뚜렷한 동기부여 없이 주먹구구식으로 일을 대한다.
③ 나는 기존의 고정관념을 버리지 못하고 머뭇거리고 있다.
④ 나는 부자와 가난뱅이의 정신이 다르다는 것을 모른다.
⑤ 나는 프로페셔널 정신이 없다.
새출발하는 마음으로 새 장소 무교동에 다시 또아리를 틀었습니다. 이제 제 토스트 포장마차는 거리에서 쉽게 볼 수 있는 노점상이 아니었습니다. 이제 제 포장마차를 그 누구도 우습게 여길 수 없도록 만들자는 다짐을 했습니다. 세심하게 고객을 맞고 깊은 인상을 심어줄 방법을 궁리하기 시작했죠. 실패의 원인을 분석하고 나니 매너리즘에서 탈피할 수 있게 되었습니다. ‘나는 파는 사람이고 손님은 사는 사람이지. 양쪽이 모두 만족감을 느껴야 해.’ 장사에서 중요한 것이 바로 상호성이라는 사실을 절실히 깨달았습니다. 서로가 좋은 감정을 갖기 위해선 자신이 먼저 준비가 되어 있어야 합니다.
새로운 계획과 판매 전략을 세우고 무교동 코오롱빌딩 앞 골목에 자리를 잡자 상황이 달라지는 듯했습니다. 그곳은 대로변은 아니었지만 그렇다고 막다른 길도 아니었고, 사람들이 많이 오가는 장소이긴 했지만 안정성이 있었습니다. 그래서 사람들이 토스트 포장마차에 들어와 마음 편히 빵을 먹을 수 있었습니다. 저는 제 판단을 믿기로 했습니다. 한눈팔지 않고 열심히 토스트를 구웠습니다. 이곳에서도 처음 한동안은 장사가 썩 잘되지는 않았습니다. 또다시 자리를 옮길까도 고민해 보았습니다. 그때 코오롱사의 두 여직원이 이렇게 충고해 주었습니다.
“아저씨, 앞으로 여기 장사 잘될 거예요. 우리 사무실 사람들이 이 주변에서 많이 사 먹어요.”
그때 이 말을 그냥 흘려듣고 다른 곳으로 자리를 옮겼다면 아마 오늘의 석봉토스트는 없었을지도 모릅니다. 상호성이 중요한 것은 상대방이 던진 사소한 말 한마디가 훌륭한 길을 제시하기도 하기 때문입니다. 상대의 말에 귀 기울일 줄 몰랐다면 저는 그 고마운 아가씨들의 말을 무시했을 겁니다. 더 많이 팔 수 있는 장소에만 목매달고 시간을 허비했을 수도 있습니다. 장기적인 안목으로 보지 못하고 눈앞의 이익에만 급급해 목 좋은 자리를 놓칠 수도 있었을 겁니다. 냉정히 스스로를 점검하고 얻게 된 소득은 이런 것이었습니다. 마음을 열고 모든 것에 관심을 기울이니 다른 사람들의 말이 들리고 세상이 다시 보이는 듯 했습니다.
시간이 흘러 사람들과 사귀기 시작하면서 점차 토스트 판매는 가속도가 붙기 시작했습니다. 주위의 토스트 가게들과 경쟁을 하면서도 전혀 위축되지 않았습니다. 고마운 손님들이 점차 늘어났고, 한 번 왔던 손님은 다시 찾는 경우가 대부분이었죠. 이렇게 되자 저는 그들을 그저 토스트 손님이라고 생각지 않게 됐습니다. 남의 이목에 신경을 쓰지 않게 되자 새로운 친구들이 생겨나기 시작했습니다.
저는 이른 새벽에 잘 일어날 수 있도록 전화의 모닝콜 기능을 이용했습니다. 아무리 늦은 시간에 잠들어도 늘 같은 시간에 깨는 일이 습관화되기 시작했습니다. 제가 제 자신을 바꾸고 있다는 것에 점점 자신감이 붙기 시작했습니다. 웅크리고 눈치보고 머쓱해하던 과거, 판에 박힌 나 자신과 결별하게 되었습니다. 조금씩 달라지는 자신을 또렷이 만날 수 있었습니다. 저녁시간의 낭비는 사라지고 막연한 상념들은 자취를 감추었습니다. 늦잠은 사라지고 내면에서 자신감이 용솟음쳤습니다. 친숙한 습관이여, 안녕!
오뚜기 식품 사장님의 방문
요즘 YTN방송에서는 “웃는 사회 만들기” 캠페인을 합니다. 참 좋은 생각입니다. 웃음의 힘은 놀라운 것입니다. 저 역시 웃음으로 이렇게 행복한 삶을 얻었다고 생각하니까요. 좋은 사람일수록 잘 웃는다는 말도 있습니다. 웃음은 다소 지나쳐도 흉이 되질 않죠. 저도 이 포장마차에서 얻은 미소짓는 습관 덕분에 좋은 일을 많이 만들었습니다. 좋은 분들에게 따뜻한 도움을 받은 적이 아주 많죠.
석봉토스트가 광화문 일대에서 명물로 소문나면서 차츰 언론에 조명을 받기 시작하던 2001년이었습니다. 지금은 신문?방송 출연을 많이 해서 다소 익숙해졌지만, 그때는 처음으로 저의 살아가는 얘기를 방영한 이례적인 경우였습니다. 이른 아침부터 방송국에 가서 분장을 하고 촬영대기를 하면서 떨기도 했죠. 그 날 방송은 제가 번 돈을 어떻게 쓰는가에 초점이 맞추어졌습니다. SBS의 〈아름다운 세상〉이란 프로그램이었지요. 방송을 하고 난 후에는 생각지도 못한 여러 분들에게서 전화를 받았습니다. 그런데 그 이튿날, 웬 신사복 차림의 중년 남자가 저를 찾아와 느닷없이 어디 소스를 쓰느냐고 묻더군요. 무슨 말씀을 하시려나해서 긴장했지요.
제가 대답할 틈을 주지 않고 그분은 말을 이어갔습니다. “저는 오뚜기식품에서 나온 최광명이라는 사람입니다. 오뚜기식품 아시죠?‘ 그럼요, 알다마다, 지금 사용하는 소스도 그 회사 제품인데요, 저는 속으로 그렇게 중얼거렸습니다. 곧이어 그분은 ”어제 우리 사장님이 선생님이 출연한 방송을 보고 감동을 받으신 것 같습니다. ’그 사람 내일 당장 찾아보고, 몇 가지 소스를 쓰는지 물어봐라!‘고 하시더군요. 그래서 제가 이렇게 석봉토스트를 방문하게 됐습니다. 몇 가지의 소스를 쓰십니까? 어려운 이웃을 위해 봉사하는 데 도움을 드리고 싶습니다. 저희가 소스를 무상으로 제공할 테니 앞으로도 좋은 일 많이 해주시면 좋겠어요“ 하는 게 아닙니까.
저 역시 너무나 감동을 받았습니다. 처음부터 그 회사의 소스를 쓰고 있었는데, 분에 넘치는 호의였습니다. 저는 한동안 망설이다 이렇게까지 먼 길을 오시고 좋은 일에 동참하시겠다는 마음을 거절할 수 없었습니다. 그날 이후, 저는 오뚜기식품에서 생산하는 소스를 협찬받고 있습니다. 감사한 일입니다. 또 그날 이후, 할아버지들에게 드리는 달걀을 한 판에서 두 판으로 늘일 수 있었습니다. 제가 받은 사랑을 저보다 어려운 이들에게 돌려 드리는 데 더 신경을 쓰게 되었습니다. 이 선행의 연쇄작용이 저를 살맛나게 합니다. 흔히들 “자본주의에서는 돈이 최고”란 말을 많이 합니다. 하지만 약육강식의 법칙이 아니라 나눔의 법칙으로 움직이는 양심의 자본주의도 있다는 확신을 갖게 됩니다. ‘공평한 분배’의 아름다움 말입니다. 저를 늘 챙겨주시는 오뚜기 사장님께 머리 숙여 깊이 감사 드립니다.
이 일은 선의의 마음들이 우리 사는 세상을 밝혀 준다는 믿음을 갖게 한 좋은 경험이었습니다. 아직도 저는 오뚜기식품에서 제공하는 소스를 무상으로 사용하고 있습니다. 이렇게 좀더 가진 사람이 덜 가진 사람에게, 덜 가진 사람은 그보다 덜 가진 사람에게 이어지는 선행의 릴레이가 저는 웃음에서 비롯된다고 생각합니다. 겉으로 보이는 미소보다 더 아름답고 강한 마음속에서 우러나는 미소, 사람을 살리는 미소 말입니다!
이렇게 받은 축복을 저는 항시도 잊지 않을 것입니다. 그래서 늘 많이 웃고 친절하게 손님을 대하려 합니다. 그러면 웃음의 보상이 크게 주어집니다. 제게 다음과 같은 격려의 말씀들을 보내주신 고객 분들도 많습니다. 정말 따뜻한 마음들이 느껴지는 글입니다.
당신은 기분 좋은 사람
몹쓸 병을 이기고 다시 돌아온 저의 아침 담당 석봉 사장님! 맛있는 토스트만큼 행복한 미소로 오래도록 저의 아침을 열어주세요. - 삼성생명 정하원
김석봉 사장님, 아니 형님!
어느 날 아침에 토스트를 사 먹으러 갔다가 걸인 분들이 석봉토스트 가게 앞에서 “사장님, 저 왔어요. 빵 주세요. 배고파요”하며 소리를 지르는 것을 보았다. 그러자 석봉 사장님은 아무런 짜증도 내시지 않고 햄에다가 치즈까지 얹어서, 즉 석봉토스트 스페셜을 만들어서 맛있게 드시라며 인사까지 곁들여 토스트를 권하시는 게 아닌가. 그 후로 난 석봉 사장님의 팬이 되었다. 그분의 이웃 사랑도 그러려니와 프로페셔널한 서비스 정신과 깔끔한 주방매너는 가히 예술. 김석봉 사장님, 아니 형님! 건강하시구 앞으로 돈 많이 버셔서 좋은 일 많이 하세요.
- (주)킨텍스 김원곤 사장
나의 모닝 비전
저는 아직도 꿈을 버리지 않고 살아갑니다. 어린이 캠프장을 만들기 위한 20만 평의 대지가 제 마음속에 펼쳐져 있습니다. 저는 아직도 마라토너의 마음으로 일년 365일 하루하루 열심히 뛰는 토스트맨으로 살아갑니다. 제가 조금씩 성취해 가는 꿈에 여러 고마운 분들을 초대해 잔치를 벌이고 싶습니다.
저는 요즘 석봉토스트의 프랜차이즈 사업에 더욱 박차를 가하고 있습니다. 20만 평 대지에 여섯 개의 다양한 캠프장을 만들어 연령별로 아이들이 심신을 건강하게 키우는 터전을 마련하고 싶습니다. 달랑 한 개인 캠프장에 1학년부터 6학년까지 모조리 쓸어 담는 시장바닥 같은 캠프장이 아니라 각 학년의 어린이들이 특성에 맞춰 체계적으로 놀고 배울 수 있는 체계 있는 캠프장을 만들고 싶습니다. 뜻있는 분들이 동참해 주신다면 더욱 좋겠구요. 놀 곳도 쉴 곳도 없는 어린이들이 꿈을 가꾸며 건강하게 성장하는 터전을 마련하는 것입니다. 그것을 위해 토스트 장사도 더욱 부지런히 합니다. 매일 아침 만나는 건강한 회사원들을 통해 건강한 우리의 미래를 봅니다. 격무에 시달려도 밝은 웃음으로 아침을 여는 그들이 있어 미소 연습은 그칠 줄 모릅니다.
그들이 보내주는 소리 없는 격려에 힘입어 저는 이 책을 쓰게 되었습니다. 이 책에는 무엇을 어떻게 하면 얼마를 번다는 내용은 없습니다. 하지만 단순한 돈벌이의 문제가 아니라 살아간다는 것의 신비를 말하고 싶었습니다. 성경에 보면 야곱이란 인물이 나옵니다. 야곱은 에서의 쌍둥이 동생입니다. 사람들은 야곱을 집념의 사나이라고 말하곤 합니다. 그는 축복을 받기 위해 약복 강가에서 천사(하나님)와의 씨름도 마다하지 않은 적극적인 사람이었습니다. 우는 아이 젖 준다는 말이 있습니다. 삶에 열심히 칭얼거리고 보채면 확실히 얻는 것이 있습니다. 마치 탈속한 은둔자처럼 모든 걸 그냥 받아들이면 발전은 없습니다.
더 좋은 것, 그리고 더 나은 것을 위해 뛸 준비를 해야 합니다. 비전을 세워야 합니다. 그래서 저는 제 사업체의 이름을 ‘모닝비전’이라 이름지었습니다. 아침에 일하고 아침처럼 싱그럽게 번성하리라는 믿음을 이름에 담은 것이죠. 아침에 품은 비전을 이루기 위해 하루 종일 바삐 움직입니다. 정말 쉬지 않고 꾸준히 뜁니다.
체인점을 좀더 확장하고 사업을 체계화하기 위해 저는 토스트 재료를 전문적으로 가공하는 재료 공장을 세울 구상도 하고 있습니다. 그러면 석봉토스트라는 제품은 더욱 힘을 얻게 될 것입니다. 그날이 머지 않았습니다. 꿈은 이루어진다는 말을 다시 새깁니다. 일개 토스트 노점상이 이렇게 원대한 꿈을 꾸게 되었습니다. 현재 상황이 아무리 어려워도 미래를 믿고 꿈을 좇는 자를 당해내지 못합니다. 이걸 믿으세요.
저의 모닝비전은 소박하지만 성실하게, 흐릿한 안개를 걷고 점점 뚜렷한 윤곽을 드러내고 있습니다. 이런 꿈이 가능할 수 있었던 건 제 자신의 믿음을 회복한 데서 비롯되었습니다. 자기 자신을 어떻게 경영하고 삶을 어떻게 디자인해 갈지는 각자의 몫입니다. 매일 아침, 저는 희망 찬 미래를 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