재벌家 맥(脈) 上

   
서울신문사 산업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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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2000
2007�� 11��



>■ 책 소개
이 책은 한국의 주요 대기업들이창업 후 2세와 3세로 경영승계가 되면서 어떻게 가업을 승계해 왔고, 총수와 더불어 대그룹을 일군 주역들이 누구인지를 조명해 보려는 취지에서시작된 서울신문사의 연재 기사를 정리한 것이다. 


상(上)권에서는 삼성·현대·LG·SK 등 국내 4대 그룹과 그 방계 그룹의 이야기를담았다. 한국에서 손꼽히는 재벌가(家)들은 어떻게 형성되는지, 수천억, 수조원의 재산을 가진 부자는 어떤 사람들과 결혼하고 인간관계를 맺는지,재벌과 재벌 가문에 대한 가맥(家脈), 인맥(人脈), 혼맥(婚脈)을 밝힌다. 또한 곳곳에 내용과 관련된 사진을 곁들여 생생한 이해를 돕는다.여기에는 기업경영에 관한 이야기뿐만 아니라 창업 세대들이 보여준 불굴의 의지와 도전정신, 배절의 부정적 모습을 불식시키고 시대의 요구를 경영에담으려 노력했던 후대 경영인들의 모습도 담겨 있다. 


■ 저자 서울신문사 산업부 특별취재반
홍성추- 1984년 입사. 뉴스피플 편집장, 행정뉴스부장, 기획취재팀장, 광고국장, 산업부장 
박건승 - 1988년 입사.편집부·사회부·과학정보부 기자, 경제과학부 차장, 논설위원, 산업부 차장 
정기홍 - 1988년 입사. 사회부·전국부·특집기획부 기자,행정뉴스·산업부 차장 
류찬희 - 1999년 입사. 경제과학팀 기자, 디지털팀·산업부 차장 
최광숙 - 1998년 입사.정치부·특집기획부·행정뉴스부 기자, 산업부·문화부 차장 
안미현 - 1991년 입사. 뉴스피플·경제부·산업부 기자 
이종락 -1991년 입사. 사회부·정치부·공공정책부·산업부 기자 
이기철 - 1991년 입사. 전국부·체육부·생활레저팀·주말매거진WE팀·산업부 기자
주현진 - 1998년 입사. 사회부·정치부·경제부·특집기획부·문화부·산업부 기자 
류길상 - 1999년 입사.사회부·뉴스피플·체육부·공공정책부·전국부·산업부 기자 
김경두 - 2000년 입사. 편집부·경제부·산업부기자


■ 차례
책머리에


삼성가(家) 
현대가(家) 
LG가(家) 
SK가(家) 
4대 그룹결산 취재 뒷이야기




삼성

재벌家 맥(脈)


삼성가(家) 

이병철 회장은 10명(4남 6녀)이나 되는 자녀를 분가시켰지만 명성만큼 화려한 혼맥은 아니었다. 다만 자유당 시절 법무장관과 내무장관을 역임한 고 홍진기씨 집안과 이건희 회장을 연결시켜 사돈을 맺은 것이나 둘째딸 숙희씨를 LG의 창업주인 구인회 회장의 3남인 구자학(아워홈그룹 회장)씨에게 시집보낸 것 정도가 눈에 띈다.


손영기 전 경기도지사의 딸인 손복남씨와 결혼한 장남 이맹희씨는 삼성물산 부사장을 끝으로 일찌감치 그룹 경영에서 발을 빼면서 삼성가와는 사실상 인연을 끊었다. 삼성가에서 맹희씨의 존재는 항상 껄끄러울 수밖에 없었다. 당대에 이루지 못한 맹희씨의 꿈은 2002년 장남이 이재현씨가 CJ그룹의 회장으로 취임하면서 어느 정도 풀렸다. 이 회장은 비록 CJ그룹이 삼성그룹과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규모 차이가 나지만 삼성가의 장손으로 그 위상이 만만치 않다. CJ그룹은 2004년 말 인사에서 이 회장의 누나인 이미경씨를 CJ엔터테인먼트, CJ CGV, CJ미디어 및 CJ아메리카 담당 부회장에 임명했다. 이 부회장은 95년 제일제당 이사로서 다국적 엔터테인먼트 회사 드림웍스 설립을 주도한 뒤 CJ엔터테인먼트 사업부 해외파견 상무 직함을 갖고 미국에서 머물렀다. 일각에서는 이 회장과 함께 CJ를 이끌고 있는 외삼촌 손경식 회장과 경영 담당’으로 회사 경영에 발을 담그고 있는 어머니에 이어 누나까지 가세함으로써 이 회장의 입지가 좁아지는 거 아니냐는 시선도 있다.


일본인인 이영자씨와 결혼한 차남 창희씨는 91년 백혈병으로 세상을 떠났다. 한비 사건(한국비료 사카린 불법 유통사건)으로 한때 수감생활을 하기도 했고 67년 삼성이 인수한 새한제지(전주제지) 이사로, 68년에는 삼성물산 이사로 일했지만 그룹을 물려받지는 못했다. 창희씨는 이병철 회장, 이건희 회장과 와세다대 동문이기도 하다. 창희씨 사후 새한은 부인 이영자씨를 회장으로 97년 새 CI(이미지 통합)를 선포하며 독립 그룹으로 발을 내디뎠지만 곧바로 경영위기를 겪고 만다. 2000년부터 워크아웃에 돌입했는데 채권단에 따라 (주)새한 계열과 새한미디어 계열로 나눠졌다. 한때 새한디지털미디어, 새한정보시스템 사장을 맡았던 재찬씨, 재원씨의 소식도 감감하다. 새한은 삼성의 분가그룹 가운데 가장 비참한 말로를 맞았지만 혼사만큼은 가장 화려했다. 장남 재관씨는 동방그룹 김용대 회장가의 딸인 희정씨와 중매로 결혼했다. 재관씨는 (주)동방 주식 1만 6000여 주를 갖고 있지만 경영에는 참여하지 않고 있다. 재찬씨는 최원석 전 동아그룹 회장의 딸인 선희씨와, 재원씨는 김일우 서영주정 사장의 딸과 결혼했다. 막내딸인 혜진씨도 조내벽 전 라이프그룹 회장가로 시집갔다.


3남인 이건희 회장이 삼성그룹의 2대 회장이 된 것은 유교적 전통과 장자 승계가 원칙인 한국에서 의외로 받아들여진다. 하지만 이병철 회장은 70년대에 이미 3남 후계’ 방침을 확정했다. 이병철 회장은 호암자전’에서 "장남 맹희는 주위의 권고와 본인 희망대로 그룹 경영을 일부 맡겨봤지만 6개월도 못가 맡겼던 기업은 물론 그룹 전체가 혼란에 빠지고 말았다."면서 "창희는 그룹 산하의 많은 사람을 통솔하고 복잡한 대 조직을 관리하는 것보다는 알맞은’ 회사를 건전하게 경영하고 싶다고 희망해 그대로 해주었다."고 밝혔다. 87년 11월 19일 이병철 회장이 타계한 뒤 12일만인 12월 1일 삼성의 2대 회장에 취임한 이 회장은 주변의 우려에도 불구하고 17년만에 삼성의 차원을 바꾸는 데 성공했다.


이병철 회장과 일본인 부인 사이에서 난 4남 태휘씨는 일본 게이오대학 출신으로 한때 삼성그룹 비서실과 제일제당 상무까지 역임했지만 일본으로 돌아간 것으로 알려졌다.

삼성가는 딸들의 경영활동이 활발하기로 유명하다. 장녀인 이인희씨는 경북지방의 대지주였던 조범석가로 시집갔다. 남편인 조운해씨는 고려병원(현 강북삼성병원) 원장/이사장 및 병원협회장을 역임했다. 인희씨는 91년 삼성에서 분리, 92년 한솔그룹으로 이름을 바꾸며 새 출발했다. 한때 계열사가 16개에 이르는 등 승승장구했지만 외환위기를 겪으며 현재는 8개 계열사로 줄었다. 장남인 조동혁 회장에 이어 현재 그룹 경영은 3남인 조동길 회장이 맡고 있다. 차남인 조동만 전 한솔PCS 회장은 PCS 사업 매각 관련 비리로 비운의 주인공이 됐다.


차녀인 숙희씨는 LG가로 시집을 갔다. 남편인 구자학씨는 해군 소령으로 예편한 뒤 제일제당, 동양TV 이사, 호텔신라 사장, 중앙 개발 사장 등 처가에서도 활발한 경영을 펼쳐 눈길을 끈다. 그는 본가로 돌아간 뒤 금성사 사장, LG반도체/LG건설 회장 등 굵직한 자리를 맡다가 2000년 외식산업인 아워홈’을 갖고 독립했다. 지금도 LG가에서 구자학 회장은 구씨답지 않게 낭만적이면서도 미스테리한 인물’로 회자된다. 3녀 순희씨는 김규 전 서강대 교수와 결혼한 뒤 이혼했지만 이후 김 교수와 다시 결합했다. 4녀 덕희씨는 삼성가의 고향인 경남 의령의 대지주 이정재씨 집안으로 시집갔다. 마산고와 서울 상대를 마친 남편 이종기씨는 중앙일보 부회장, 제일제당 부회장을 거쳐 삼성화재 회장까지 지내다 은퇴했다. 그는 지금도 삼성전자 주식 8만주 이상을 보유하고 있는 큰 손’이다.


삼성가의 딸들 가운데 가장 활발한 활동을 벌이고 있는 사람은 5녀 이명희 신세계 회장. 이 회장은 2005년 신세계백화점 본점을 오픈하면서 이병철 회장의 흉상을 본관에 세웠다. 언론 인터뷰에 나서고 사보에 아버지와의 일화를 소개하는 글을 싣는 등 외부와의 접촉을 늘리고 있다. 롯데와 유통명가 대결을 벌이고 있는 신세계는 이명희 브랜드’로 기선을 제압한다는 전략이다. 이 회장의 시아버지는 4/5대 국회의원과 삼호방직/삼호무역 회장을 지낸 정상희씨로 남편인 재은씨가 차남이다. 남편인 정재은씨는 경기고/서울대 공대를 졸업하고 미국 콜럼비아대학에서 수학한 엘리트. 삼성항공/삼성종합화학 부회장, 삼성전기 회장, 삼성전자 대표이사 등을 역임하며 삼성그룹에서 맹활약하다 분가와 함께 삼성을 떠났고 현재 신세계 명예회장직을 갖고 있다. 신세계가의 후계자인 정용진 부사장은 미스코리아 출신 고현정씨와 결혼했다가 2003년 이혼했다.


태휘씨와 마찬가지로 일본인 부인에게서 태어난 6녀 혜자씨는 현재 소식이 알려지지 않고 있다.


신세계그룹

신세계그룹은 삼성그룹에서 계열분리한 기업들 가운데 가장 성공적인 케이스로 꼽힌다. 2004년 재계 서열 21위(자산 기준)로 한솔그룹(고 이병철 삼성 창업주의 장녀 이인희 고문, 재계 36위), 새한그룹(차남 고 이창희 회장, 워크아웃 중), CJ그룹(장손 이재현 회장, 재계 23위)보다 앞섰다.


창업주의 5녀(막내딸)인 이명희(62) 회장은 1997년 계열 분리 때 백화점과 조선호텔만 갖고 나왔다. 그리고 그룹을 국내 최고의 유통 명가’로 키웠다. 삼성에서 떨어져나온 지 불과 7년만에 백화점과 할인점 이마트를 주축으로 한 유통사업 외에 신세계건설, 신세계푸드시스템, 조선호텔, 신세계인터내셔널 등 13개 계열사를 거느린 그룹으로 성장시킨 것이다. 자신은 여성 캐피털리스트 1위를 고수하던 올케 홍라희(이건희 삼성그룹 회장의 부인) 호암미술관장을 제치고 2001년 이후 국내 최고의 여성 부호가 됐다. 이 회장은 삼성가(家)의 전통에서 벗어나지 않는 전형적인 정중동(靜中動) 행보의 오너다. 외부에 나서지는 않지만 소리없이 막후에서 회사의 중심을 잡으면서 방향을 제시하는 스타일이다.  1979년 신세계백화점 영업본부 이사로 경영수업을 시작, 80년 신세계백화점 상무로 승진한 뒤 97년 부회장에 올랐다. 무려 17년 동안이나 상무 직함을 유지했다. 그룹 회장이 된 것은 98년 말이다. 이 회장은 1967년 정재은(66) 명예회장과 중매로 만나 결혼, 아들 정용진(37) 신세계 부사장과 딸 정유경(33) 조선호텔 상무를 뒀다.


재계에서는 "신세계가 삼성보다 더 삼성 같다."는 얘기가 나돈다. 그만큼 기업문화, 경영스타일이 닮았다는 것이다. 여기에는 창업주의 형제들 가운데 누구보다 부친을 닮으려고 애쓰는 이 회장의 숨은 뜻이 담겨 있다. 이 회장은 한해에 고작 한두 차례 회사를 방문, 업무 보고를 받을 뿐 경영에 일일이 간섭하지는 않는다. 부친과 마찬가지로 결재 서류에 사인을 해 본 적이 없다. 그렇다고 해서 이 회장이 완전히 손을 놓고 있는 것은 아니다. 신세계 본점 재개발 사업, 신규 백화점 진출, 명품 브랜드 유치 등에 꾸준히 관심을 갖고 챙기면서 방향타’ 역할을 했다.


신세계는 1999년 구학서 사장이 총사령탑에 앉은 이후 계속 상승곡선을 그려 왔다. 구 사장은 명실상부한 전문경영인으로 이 회장의 전폭적인 신임을 받고 있다. "전문 경영인은 무한 책임을 지고 일해야 한다."는 신조를 갖고 있다. 그는 회사 부채율을 230%에서 130%대로 낮췄다. 취임 당시 5만 원했던 주가를 5년만에 30만 원대로 끌어올려 이 회장을 한국 최고의 여성부호로 만들어 주기도 했다. 구 사장은 겉으로는 부드러운 스타일이지만 실제로는 승부욕, 추진력, 결단력을 두루 갖췄다.


구 사장의 취임 당시 신세계의 위상은 롯데, 현대에 밀려 3위로 내려앉은 초라한 신세였다. 그는 그때 불어닥친 국제통화기금(IMF) 경제위기를 적절히 활용했다. 종합금융을 매각하고 카드 사업에서 손을 떼는 등 대대적인 메스’를 가한 것이다. 창고형 할인점 코스트코홀세일을 매각하면서 들어온 1억달러로 전국 알짜의 상권부지들을 헐값에 사들여 이마트 부지로 확보했다. 경기도 산본의 백화점 부지도 이마트로 업종을 변신시키는 등 자산 회전율을 높이며 기업의 수익구조를 끌어올리려고 부단히 노력했다. 삼성그룹에서 재무통으로 커온 경력이 뒷받침됐다. 이런 신세계의 성장을 구 사장은 전문경영인 체제 덕분으로 돌린다. 구 사장은 1972년 삼성에 공채 12기로 입사했다. 재계의 인재사관학교로 불리는 삼성 비서실, 삼성전자, 제일모직, 삼성물산 등을 거쳐 삼천리그룹으로 갔다가 96년 신세계 경영지원실 전무로 발탁됐다. 당시 이인희 한솔그룹 고문도 구 사장에게 눈독을 들였다는 후문이다.



현대가(家)

다른 재벌가에 비해 현대의 혼맥은 의외로 소박하다. 낭만을 즐겼던 고 정 명예회장이 자식들의 연애에도 너그러웠던 영향이 가장 크다. 왕 회장’이라는 별칭으로 더 자주 불렸던 그 자신, 강원도 통천의 평범한 고향 처녀(변중석)와 결혼해 평생을 함께 했다. 슬하에 9남매(8남 1녀)를 두고 동생이 일곱(한 명은 어려서 사망)이나 됐지만 눈에 띄는 혼사는 손가락을 꼽는다.


오랜 세월 재계를 주름잡았던 현대의 위상에 견줘 혼맥이 조촐한데는 창업주의 성공 과정과도 무관치 않다. 가난한 농군의 아들로 태어나 부두 막노동꾼을 거쳐 대기업 총수에 오른 그는 살아생전 "세상에 공짜란 없다."라며 담(淡)한 마음을 갖자고 입버릇처럼 강조하곤 했다. 권력이나 부(富)를 결코 싫어하지 않았지만 굳이 혼사줄까지 대가며 공짜를 탐할 이유 또한 없었던 것이다. 정략결혼의 흔적이 적은 대신에 유난히 많은 손(孫)과 맞닥뜨리는 게 현대라는 집안이다. 이런 현대가 대(代)를 건너뛰면서 LG, 롯데, 한진, 이건, 비비안 등 내로라하는 그룹들과 사돈을 맺은 점은 흥미롭다. 현대가의 2세들이 몽(夢)’자 돌림이라면 3세들은 딸이 이(伊)’, 아들은 선(宣)’ 자 돌림을 쓴다. 4세는 진’ 자(딸), 창’ 자(아들) 돌림이다.


큰아들 정몽필씨는 나이 50세도 안돼 교통사고로 세상을 떠났다. 이 때가 49세. 몽필씨가 떠난 지 한 달 뒤, 정주영 회장은 동서산업 공장장이던 이영복씨를 사장으로 파격 승진시켰다. 이씨는 몽필씨의 처남, 즉 이양자씨의 친동생이다. 졸지에 가장을 잃은 장남 가족에 대한 배려였다. 하지만 이양자씨마저 91년 위암으로 눈을 감고 말았다. 몽필씨의 죽음으로 사실상 집안의 장남 역할을 도맡아 한 이는 둘째아들 정몽구(MK)씨였다. 현대정공(현 현대모비스) 사장 시절, 갤로퍼 신화’를 만들어낸 그는 기아차마저 인수해 지금의 현대/기아차그룹을 이끌고 있다. 2000년 자동차전문 그룹으로 출범한 지 몇 년도 안돼 그룹을 세계 6위의 반열에 올려놓았다. 출범 당시 10개였던 계열사 수는 28개로 불어났다. 세계 최고 권위를 자랑하는 미국의 소비자 보고서(컨슈머 리포트)’는 현대차의 뉴쏘나타를 세계에서 가장 결함이 적은 차로 선정했다. 갤로퍼 신화 때부터 MK가 강조해 온 품질 경영’의 힘이다.


3남 정몽근씨는 일찌감치 유통을 넘겨받아 현대백화점 그룹을 이끌고 있다. MK(몽구)/MH(몽헌)/MJ(몽준) 빅3에 가려 조명은 덜 받았지만, 묵묵히 외길을 걸으면서 소리없이 유통 명가로 키워낸 주인공이다. 현대백화점, 현대H&S(비 백화점 계열), 현대홈쇼핑 등 주력 계열사를 토대로 2004년 5조 5000억 원의 매출을 올렸다. 전문 최고경영자(CEO)들이 소신있게 일을 할 수 있도록 여건을 만들어 주면서도 거의 매일같이 매장을 둘러봐 조직에 긴장감을 불어넣는 것으로도 유명하다.


4남 몽우씨는 미인 이행자씨와 연애결혼했다. 40대에 현대알루미늄 회장을 맡은 그는 평소 심한 우울증을 앓았다. 결국 1990년 4월 45세의 젊은 나이에 서울 시내 한 호텔에서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 남겨진 유족을 돌보는 일도 사실상 장남 몽구씨의 몫이었다. 조카 셋을 모두 현대차그룹의 계열사인 BNG스틸(전 삼미특수강)에 입사시켰다. 큰조카, 즉 몽우씨의 장남인 일선씨는 경영능력을 인정받아 최근 BNG스틸 대표이사 사장으로 승진했다.


비운의 황태자’ 5남 몽헌씨는 1998년 그룹 공동 회장으로 취임하면서 화려한 비상을 시작했다. 1983년 현대전자(현 하이닉스반도체)를 설립해 4년 만에 흑자로 돌려놓으면서 아버지 정주영 회장의 두터운 신임을 끌어냈다. 2000년에는 형들을 제치고 그룹 단독 회장에 추대되기도 했다. 하지만 대북 송금’ 사건에 연루돼 검찰 조사를 받던 중, 극심한 스트레스를 견디지 못하고 2003년 8월 4일 서울 계동사옥에서 몸을 던지고 말았다. 급작스러운 남편의 죽음으로 부인 현정은씨가 황망히 그룹을 물려받았지만 사업가 집안의 딸답게 배포와 합리적 리더십으로 1년 만에 그룹을 정상궤도에 올려놓았다.


6남 몽준은 정치인의 이미지가 더 강하지만 세계 일류 현대중공업의 뒤에는 기업인 정몽준씨가 있다. 형제 중에 학벌(서울대-미국 MIT경영대학원)이 가장 좋아 신문대학’(소학교만 졸업한 정주영 회장은 신문을 통해 지식의 대부분을 얻었다며 자신을 신문대학 출신이라고 소개하곤 했다) 출신인 왕 회장이 유난히 예뻐했다는 몽준씨는 31세에 현대중공업 사장으로 전격 발탁되면서 집중 조명을 받았다. 1988년 금배지를 처음 달면서 소유와 경영의 분리를 시도했다. 경영은 CEO에게 맡기고 자신은 대주주로서 회사의 중요한 의사결정만 내리고 있는 것. 현대중공업의 어떤 직함도 갖고 있지 않다.


7남 몽윤씨는 2004년 말 업계 2위의 손해보험회사인 현대해상의 등기이사 겸 이사회 의장으로 돌아왔다. 경영 일선에서 물러난 지 8년만의 전격 복귀였다. 방카슈랑스(은행상품과 보험상품의 교차판매) 확대 시행 등 변화하는 금융 환경에 맞춰 공격적인 경영 행보를 보이고 있다. 1981년 김진형 부국물산 회장의 딸 혜영씨와 결혼했다. 8남 막내아들인 정몽일씨는 미국 조지워싱턴대학에서 경영학 석사 학위를 받은 뒤 현대상사 등에서 근무하다가 2000년 현대기업금융을 차려 독립했다. 기업대출 등을 주로 취급하는 회사다. 권영찬 현대파이낸스 회장의 딸 준희씨와 결혼했다.


고 정주영 회장의 형제들은 동생이기 이전에 창업 동지요, 사업동료였다. 동아일보 외신부 기자로 활동하던 첫째동생 정인영씨는 1953년 현대건설 전무로 입사하면서 경영에 본격 합류했다. 75년 말 중동 진출 때 신중론을 펴 형과 이견을 보일 때까지 그룹의 초석을 닦았다. 당시 독립해 만든 한라그룹은 한라건설/한라시멘트/한라중공업/만도기계 등을 거느리며 재계 서열 12위로까지 도약했었다. 그러나 외환위기 때 자금난이 가중되면서 그룹이 부도나는 시련을 겪었다. 지금은 둘째아들 몽원씨가 한라건설 회장을 맡아 재기를 꿈꾸고 있다. 큰 아들 몽국씨는 94년 아버지가 동생을 그룹 후계자로 지목하자 경영에서 완전히 손을 뗐다. 한때 배달학원 이사장을 맡았으나 지금은 개인사업을 하고 있다.


현대시멘트/성우종합건설/성우리조트/현대종합금속 등의 계열사를 거느리고 있는 성우그룹은 둘째동생 정순영씨 일가가 이끌고 있다. 순영씨는 2005년 10월 13일 노환으로 세상을 떠났다. 오래전 경영권을 2세에게 넘겨줘 경영권 분쟁은 없었다. 큰아들 몽선씨가 현대시멘트와 성우종합건설을, 둘째아들 몽석씨가 현대종합금속, 셋째아들 몽훈씨가 성우전자, 넷째아들 몽용씨가 성우오토모티브를 각각 맡고 있다. 몽선씨는 사촌인 정몽윤 현대해상 이사회의장과 함께 고 정몽헌 회장의 부검을 임관하기도 했다.


자동차부품회사인 한국프랜지공업의 김영주 명예회장은 고 정주영 회장의 유일한 매제다. "그가 다가가기만 해도 기계가 저절로 고쳐졌다."라며 매제를 기계박사’라고 불렀다. 부인 정희영씨는 2001년 정주영 회장이 노환으로 세상을 떴을 때 "대통령 한번 못해보고///. 우리 오빠 불쌍해서 어쩔거나." 하며 가장 서글프게 울었던 동생이다. 장남 김윤수씨가 회사를 물려받아 한국프랜지공업 회장으로 있다. 둘째아들 근수씨는 독립해 울산화학/퍼스텍 등의 계열사를 거느린 후성그룹 회장을 맡고 있다.


포니 정’이라는 별칭으로 유명한 넷째 동생 정세영씨는 외아들 몽규씨와 함께 1999년 3월 현대그룹에서 독립해 건설시장에서 영역을 확실하게 굳혔다. 꼼꼼한 시공과 치밀한 분양으로 현대산업개발을 국내 도급순위 4위 업체로 키워 놓았다. 포니 정’이라는 별명은 1976년 누구나 불가능하다고 여겼던 국산 고유모델 자동차 1호 포니’를 만들어낸 데서 붙여졌다. 이 같은 열정과 헌신을 인정받아 87년 형에게서 현대그룹 회장직을 물려받기도 했다. 2005년 들어 병세가 악화돼 5월 21일 세상을 떠났다. 회사 경영은 아들 몽규(회장)씨가 책임지고 있다. 지금의 서울 삼성동 사옥은 몽규씨가 직접 지었다. 지나칠 정도로 꼼꼼하다는 게 주위의 평가다. 현대가 맺은 최고위층 사돈도 세영씨 집안에서 나왔다. 큰딸 숙영씨가 노신영 전 국무총리의 장남 경수(서울대 교수)씨와 결혼한 것.


다섯째 동생 정신영씨는 고 정주영 회장이 가장 자랑스러워했던 동생이다. 서울대를 나와 동아일보 기자로 있다가 독일로 유학을 떠났다. 함부르크대학원에서 경제학 박사과정을 밟던 중 병으로 세상을 떠난 것이 1962년. 당시 잠자는 시간을 제외하고는 잠시도 일에서 떠나본 적이 없는 정주영 회장이 일주일을 손놓았을 만큼 가족의 슬픔은 컸다. 서울대 음대 출신의 첼리스트였던 미망인 제수씨(장정자)에게 현대학원(현대고)을 경영토록 했다. 장정자씨는 남북이산가족 상봉 때 대한적십자사 부총재로 남한측 방문단장을 맡았었다. 장홍선 전 극동도시가스 회장의 누나다.


막내동생인 정상영씨는 불에 타지 않는 바닥재’ 등으로 유명한 자재 전문그룹 KCC를 이끌고 있다. 불도저 같은 추진력과 성격 등이 고 정주영 회장을 가장 많이 닮아 리틀 정주영’으로 불린다. 큰형과 나이 차이가 21살이나 나 아버지처럼 따랐다. 장조카 몽구씨와도 두살밖에 차이나지 않는다. 또 다른 조카인 고 정몽헌 회장이 자금난에 몰렸을 때 200억 원을 선뜻 내놓았을 만큼 의리도 강하다. 그러나 조카의 죽음 이후 현정은 회장과 경영권 다툼을 벌이면서 다소 빛이 바랬다. 그룹 경영은 두 아들에게 맡긴 상태다. 큰아들 몽진씨가 대표이사 회장, 둘째아들 몽익씨가 대표이사 부사장이다. 셋째아들 몽열씨는 계열사인 금강종합건설 사장을 맡고 있다. KCC는 몽익씨를 통해 롯데/한진그룹과 사돈으로 연결된다. 몽익씨의 부인 은정씨가 신격호 롯데그룹 회장의 외조카(신 회장의 여동생인 정숙씨의 딸)이다. 은정씨의 언니 은영씨는 한진해운 조수호 회장의 부인이다. 몽익씨와 조 회장이 동서지간인 셈이다.


2000년 형제간 다툼’은 현대가를 정신적으로나 물리적으로나 핵분열시킨 결정적 계기였다. 99년 12월 마지막 날, 고 정몽헌(MH) 회장쪽 인사로 분류되던 박세용 당시 그룹 구조조정본부장이 정몽구(MK) 회장 계열의 현대차 회장으로 전격 발령나면서 시작된 형제간의 경영권 갈등은 그룹 후계자로 MH를 지목한 고 정주영 회장의 육성 테이프가 공개되기까지 석 달여에 걸쳐 숨막히게 전개됐다. 효심이 남달랐던 MK는 아버지의 육성이 공개되자 깨끗이 승복하고 자동차 계열사를 이끌고 그룹에서 나왔다. 이 과정에서 아픔도 적지 않았지만 결과적으로 현대의 지배구조를 선진화시키는 데 일조했다는 평가를 받고 있다.


가신 3인방의 등장

박세용-심현영-이내흔 등에 가려 주목을 받지 못하던 새로운 인맥이 90년대 중반 들어 등장한다. 김윤규-이익치-김재수로 이어지는 이른바 가신 3인방’의 급부상이다. 왕회장 인맥이 MK/MH 인맥으로 쪼개지는 시점이기도 하다.


엔지니어 출신의 김윤규(61) 전 현대아산 대표이사 부회장은 소떼 방북’을 성사시킨 대북 사업의 주역이다. 정주영 회장의 평생 염원인 금강산관광 사업을 주도하면서 2대(정주영-정몽헌)에 걸쳐 두터운 신임을 얻었다. 정주영 회장의 임종 직전까지 거의 매일 서울 청운동 자택을 찾아 점심을 함께 하며 말동무가 돼 주기도 했다.


정주영 회장의 비서 출신인 이익치(61) 전 현대증권 회장은 98년 3월 바이 코리아’ 돌풍을 일으키면서 주가 1000시대를 이끌었다. 매사가 시원시원하고 자신감에 넘쳐 MH의 총애를 받았지만, 경박함 때문에 싫어하는 이도 적지 않았다. MH의 상가에 끝내 나타나지 않아 입방아에 오르기도 했다. 정몽준(현대중공업 대주주) 의원과도 사이가 벌어지면서 현대가와 완전히 등을 돌렸다. 


역시 정주영 회장의 비서 출신인 김재수(57)씨는 박세용 회장의 뒤를 이어 구조조정본부장을 맡아 그룹을 이끌었다. 재무통으로 노래도 잘했던 그는 2000년 경영권 분쟁 과정에서 대학 동문인 MH 진영에 뒤늦게 합류했다. 다소 욱’하는 성질도 있다는 게 주위 얘기다.


세 사람은 이렇듯 형제간 경영권 다툼 과정에서 MH를 공개적으로 지지하며 MH 인맥을 만들어냈다. MH의 눈과 귀를 가렸다는 부정적 평가도 적지 않다. 이후 현대건설이 자금난에 휩싸이면서 세 사람 사이에도 반목이 커졌다. MH의 그림자’로 불리던 강명구(59) 전 현대택배 회장, 박종섭(58) 전 현대전자 사장 등도 MH 인맥으로 꼽힌다. 같은 범주에 들었던 김충식 전 현대상선 사장은 대북송금 특검 과정에서 MH와의 인연을 끊었다.


MK 인맥의 전면 부상

MH쪽에 김윤규-이익치-김재수가 있었다면 MK쪽에는 유인균-이계안-정순원이 있었다. 세 사람 모두 MK의 고등학교(경복고) 선후배다. 가장 선배인 유인균(65) 전 INI스틸 회장은 보는 이에 따라 시각이 엇갈리기는 하지만 의리파’로 통한다.


이계안 의원은 76년 현대중공업으로 입사해 2004년 총선에 출마할 때까지 20년 넘게 현대에 몸담았다. 현대 시절의 가장 큰 보람으로 그는 기아차 인수를 꼽았다. "기아차를 인수하자고 하니까 그룹내에서 다들 겁먹고 물러서며 반대했다. 찬성한 사람은 오직 정몽구 회장 한사람 뿐이었다." 이 의원은 규모의 경제’를 내세워 결국 기아차를 성공적으로 인수했다. 이 일로 MK의 신뢰를 굳혔지만 MK 인맥내 세 싸움에서 밀려나 현대를 떠났다는 관측도 있다.


정순원(53) 현 로템 부회장은 경제학 박사 출신답게 학자 스타일이다. 현대/기아차그룹의 구조조정본부격인 기획총괄본부장을 오랫동안 맡았다. 현대차서비스 출신의 윤명중(64) 전 현대하이스코 회장, 자타가 공인하는 해외영업통 김뇌명(63) 전 기아차 부회장, 영업의 귀재’ 김수중(64) 전 기아차 사장, 현대정공(현 현대모비스) 창립 멤버인 박정인-김동진(현대차 부회장)으로 이어지는 정공 인맥’은 저돌성과 로열티(오너에 대한 충성심) 면에서 건설 인맥’과 매우 흡사하다는 평을 듣는다.


 

LG가(家) 

LG의 역사를 이야기할 때 구씨-허씨 동업을 빼놓을 수 없다. 두 가문의 인연은 구인회 회장의 8대조인 구반 공시절때부터 시작되어 두 집안은 무려 8건의 겹사돈으로 맺어지며 끈끈한 관계를 이어왔다. 구씨와 허씨는 1946년 1월 구 회장 장인(허만식)의 재종인 허만정씨가 셋째아들 허준구(당시 24세)씨를 데리고 당시 구 회장이 살던 부산으로 찾아오면서 사돈에서 동업자 관계로 발전한다. 허만정씨는 사업자금을 내놓으며 아들의 경영수업을 부탁했고 구 회장은 일본 도쿄 유학을 다녀왔던 준구씨를 흔쾌히 받아들였다. 준구씨는 첫째동생 구철회씨의 맏사위였으므로 이미 남도 아니었다. 잘  알려진 대로 허준구씨는 LG건설/LG전선 회장 및 그룹 부회장을 지내며 LG의 역사와 함께 했고 허창수(57) 현 GS그룹 회장, 허정수(55) GS네오텍(전 LG기공) 사장, 허진수(52) GS칼텍스 부사장, 허명수(50) GS건설 부사장, 허태수(48) GS홈쇼핑 부사장 등 그의 아들들도 LG의 경영에 깊숙이 관여했다.


LG는 그동안 숱한 계열분리를 통해 친족간 재산분배를 마무리지었다. 현재 LG에 남아있는 오너 일가’는 구본준 LG필립스LCD 부회장이 유일하다. 하지만 몇 년 전만 해도 주요 계열사 사장과 임원 상당수가 구씨, 허씨일 정도로 가족경영이 활발했다. 오너 일가들이 지나치게 많아 그만큼 부작용도 적지 않았지만 LG의 창업과정에서 이들의 공을 무시하기는 어렵다.


구인회 회장은 첫째동생 구철회씨와 동업으로 구인회상점’을 창업했다. 철회씨는 형과 함께 사업을 일구며 락희화학, 금성사 등의 사장을 맡았다. 둘째동생 구정회씨도 경성전기학교(수도공대 전신)를 마치고 형의 사업을 돕기 시작했다. 정회씨는 45년 구인회 회장이 조선흥업사’라는 무역회사를 운영하고 있을 때 화장품 기술자 김준환씨를 영입해 화장품 사업에 뛰어드는 계기를 마련했다. 처음 만든 화장품 이름을 럭키(LUCKY)라고 지어럭키그룹의 기반을 닦은 것도 정회씨였다. 셋째동생 구태회씨는 서울대 문리대에 다니면서 서울 창신동 집에서화장품 연구에 몰입,투명크림을 개발하는 데 성공했다. 그는 50년 서울대를 졸업하자마자 락희화학의 전무로 입사, 형의 사업을 돕기 시작했다. 같은 해 장조카 구자경 명예회장도 부산대 사범대 부속초등학교 교사 생활을 접고 락희화학 이사로 입사했다. 태회씨는 이후 안 깨지는 크림통 뚜껑에 목말라하던 구인회 회장을 도와 LG가 플라스틱 사업에 진출하는 데 결정적인 기여를 했다. 1953년 락희화학이 서울에 사무소를 낼 때 기반을 닦은 것도 태회씨였다. 태회씨는 58년 제4대 국회의원 선거에 자유당 후보로 고향인 진양에서 출마해 당선되면서 정치인의 길을 걷는다.


역시 서울대 문리대를 나온 넷째동생 구평회씨는 락희화학 지배인 시절인 54년 멕시코에서 열린 국제청년상공인회의(JCI)에 참석한 뒤 곧바로 미국 뉴욕으로 날아가 콜게이트사’ 주변에 머물며 치약 제조기법을 알아내는 공을 세웠다. 5/16 쿠데타 직후인 61년 부정축재 기업인’ 처벌 때는 형을 대신해 6개월간 감옥생활을 하기도 했다. 삼성 이병철 회장의 차남인 이창희씨가 아버지와 형(이맹희)을 대신에 처벌을 받은 것과 같은 맥락이었다.


6남4녀의 방대한 혼맥’

구인회 회장은 허을수씨와 사이에 6남4녀를 뒀다. 자손이 워낙 많다 보니 LG가를 재벌 혼맥의 핵’이라고 부르지만 권력 핵심이나 정계쪽과는 인연이 없어 세칭 정략결혼’으로 보기는 어렵다는 평이다. LG가는 특히 아들이 많은데 會’자 돌림만 6명, 滋’자 돌림은 23명에 달한다. 本’자 돌림은 구인회 회장 직계로만 11명이다.


장녀 구양세(83)씨는 15세때 경남 남해군수를 지낸 박해주씨의 아들이며 진주고보 학생이던 박진동씨에게 출가했다. 박씨는 해방 후 좌우익 투쟁 와중에 학병동맹본부 피습사건으로 사망했다. 구씨 형제들은 일찍 혼자가 된 양세씨에게 각별한 정을 쏟고 있다. 장남 구자경(80) 명예회장은 17세 때인 1942년 5월 고향과 가까운 대곡면 단목리의 대지주 하순봉씨의 장녀 정임(80)씨와 혼례를 올렸다. 구 명예회장은 당시 진주공립중 4학년이었고 신부는 한문에 뛰어난 소양을 갖춘 사람이었다. 2남 구자승(74년 작고)씨는 56년 부산에서 금성방직 전무로 있던 고 홍재선씨의 딸 승해(71)씨와 선을 본 뒤 4개월만에 결혼했다. 홍씨는 훗날 전경련 회장과 쌍용양회 회장을 지냈다. 3남 구자학(75) 아워홈 회장은 잘 알려진 대로 고 삼성 이병철 회장의 차녀 숙희(70)씨와 57년 결혼했다. 구 회장은 64년 제일제당(현 CJ) 기획부장으로 삼성에 입사한 뒤 동양TV방송 이사, 호텔신라 대표이사, 중앙개발(현 삼성에버랜드) 사장 등을 지낸 뒤 본가로 돌아왔다.


4남 구자두(72) LG벤처투자 회장은 심계원(현 감사원) 심계관과 국방부 차관을 지낸 고 이흥배씨의 딸 의숙(67)씨와 결혼했다. 이 혼사는 이미 사돈을 맺었던 홍재선씨의 중매로 이뤄졌다. 이씨는 64년 동양TV 사장으로 일하다가 삼성과의 동업 파기로 물러났고 이후 국제신보(현 국제신문) 사장에 취임했다. 삼성과 LG는 동양TV 사장에 이병철 회장의 사돈인 홍진기씨와 구인회 회장의 사돈인 이흥배씨를 나란히 앉혀 공동경영’을 시도했지만 결국 파국으로 끝나고 말았다.


5남 구자일(70) 일양화학 회장은 일찌감치 독립했는데 부인 김청자(66)씨는 사업가인 김진수씨의 딸이다. 차녀 구자혜(68)씨는 대림산업 이규덕 창업주의 장남 고 이재준 대림그룹 회장의 막내동생인 이재연(74) 아시안스타 회장에게 시집갔다. 이재연씨는 럭키화학 상무로 LG에 입사한 뒤 희성산업 사장, 금성통신 사장, 금성사 사장을 거쳐 LG카드 부회장을 지냈다. 장남에게 외식업을 해보라고 권유, 국내에 패밀리 레스토랑 TGIF를 처음 들여왔다.


3녀 구자영(66)씨는 제일은행장을 지낸 이보형씨의 아들 이재원(68)씨와 결혼했다. 구 회장 막내처남 허윤구씨의 아들인 허남목씨 소개로 만난 뒤 20일만에 초스피드’로 결혼했다. 이씨는 자신 소유의 일성제지 회장을 지냈지만 98년 신호제지에 합병됐다. 4녀 구순자(62)씨는 류헌열 전 대전지법원장 아들이자 서울지검 검사였던 류지민씨에게 시집갔다. 이 혼례도 사돈인 이흥배씨가 주선했는데 구씨의 혼사는 이처럼 사돈이 연결해 준 경우가 많다. 구 회장은 막내사위를 무척 아껴 골프장에 자주 데리고 다니는 등 각별한 애정을 쏟았지만 류씨는 43세때 요절했다. 유일하게 구 회장 타계 후 결혼한 6남 구자극(59)씨는 이화여대 조필대 교수의 딸 아란(54)씨와 결혼했다.


- LG그룹 분가의 원칙

LG는 1999년 LG화재를 시작으로 LG벤처투자, 아워홈, LS, GS그룹 등을 차례로 분리했다. 재산배분을 둘러싸고 집안 싸움’이 벌어지기 예사인데 유독 LG만은 큰 잡음없이 대규모 분가를 마무리지었다. 이는 LG가 엄격한 유교집안으로 집안어른이 정한 기준을 자손들이 철저히 지킨데다 수십년간 그룹에서 친족들의 지분을 관리해왔기 때문이다. 분리에 앞서 일부 친족들이 이의를 제기하면 재산관리팀’에서 그동안 정리해 놓은 지분율을 근거로 제시하기 때문에 큰 불만을 가질 수 없는 구조다.


계열분리의 신호탄이 된 LG화재는 정부의 5대그룹 생명보험사 진출 금지’ 정책에 맞물려 분가됐다. 한때 대한생명 인수전에 뛰어들어 손해보험-생명보험을 영위하려 했던 LG는 생명보험사업이 좌절되면서 LG화재를 독립시키려 했고 집안회의에서 고 구철회씨 가족들이 화재를 원해 순조롭게 분리가 이뤄졌다. LG벤처투자를 갖고 떠난 구자두씨 가족은 얼핏 재산’이 너무 적어 보이지만 윗대인 구철회씨 가족에 비해 가족수가 적기 때문에 지분도 그만큼 적었다. 아워홈의 구자학씨는 한때 삼성에서 호텔신라 사장을 지내는 등 유통/서비스쪽에 관심이 많아 이견없이 분배가 이뤄졌다.


2003년말 분리된 LS그룹은 구태회/평회/두회씨가 LG의 창업공신인데다 자녀들도 적지 않아 상황이 복잡했다. 게다가 LS전선은 허씨 가문의 고 허준구씨가 회장을 지내는 등 오랫동안 허씨들이 경영을 맡아 애착을 보이고 있었다. 하지만 이 역시 태회/평회/두회씨’ 가족이 갖고 있던 지분과 비슷한 가치를 지닌 회사를 묶어주면서 마무리됐다. 3형제 가운데는 평회씨 지분이 가장 많다.


LG그룹의 가장 큰 지각변동은 허씨들이 갖고 간 GS그룹의 분리다. GS칼텍스, GS건설, GS홈쇼핑, GS리테일을 주축으로 한 GS그룹은 자산이 18조 7200억 원이나 될 정도로 규모가 컸다. 일각에서는 창업주 형제들이나 구자경 명예회장 형제에 비해 허씨들의 재산이 지나치게 많은 것 아니냐는 의문이 제기되기도 했다. 이에 대해 LG 관계자는 "고 허만정씨가 처음 사업자금을 댄 이후에도 허씨들은 계속 자금을 출자했고 그 비율은 일찌감치 65대35로 정해져 있었다."라고 밝혔다.



SK가(家) 

최씨가의 2세들은 정략이나 중매 결혼이 손에 꼽을 정도로 드물다. 특히 최종건 전 회장이 일찍 돌아가신 이후 최종현 전 회장이 사실상 10남매의 가장 역할을 자임했던 만큼 큰 집’ 조카들도 이 같은 영향을 많이 받았다. 최진원 SKC 회장은 "숙부는 자식들 결혼과 관련해서 복잡한 것을 굉장히 싫어하셨다."면서 "예물 등도 가능한 한 안주거나 받지 않는 주의였다."라고 설명했다.


장남인 최태원(45) SK(주) 회장은 노태우 전 대통령의 딸인 노소영(44) 아트센터 나비 관장과 결혼했다. 부친과 똑같이 미국 시카고대학에서 노 관장을 만나 연애했다. 차남인 최재원(42) SKE&S 부회장의 부인은 영어교사였던 채희경씨의 맏딸 채서영(41) 서강대 영문과 교수다. 막내딸 최기원(41)씨는 당시 (주)선경정보시스템 차장으로 근무하던 김준일(46)씨와 만난 지 3개월만에 결혼에 골인했다.


큰 집’인 고 최종건 회장의 일가 혼맥도 학계부터 권력층에 이르기까지 다양한 스펙트럼을 보이지만 정략적인 냄새는 없어 보인다. 장남인 고 최윤원 전 SK케미칼 회장은 김이건 전 조달청장의 딸인 채헌(51)씨와 결혼했다. 장녀 정원(50)씨의 남편은 고학래 전 사상계 고문의 아들인 고광천(54)씨며, 차녀 혜원(48)씨는 박주의 전 금융인 아들인 박장석(50) SKC 사장과 결혼했다. 막내 아들 최창원(41) SK케미칼 부사장은 변호사 집안인 최유경(38)씨와 결혼했다.


4녀 예정(43)씨의 남편인 이동욱(43)씨가 최종건가(家)에서는 눈에 띈다. 현재 개인사업을 하고 있는 이씨의 부친이 이후락 전 중앙정보부장이다. 최 창업주와 이후락 전 중정 부장은 서로 호형호제를 할 정도로 막역했던 사이였다. 양가가 둘의 결혼을 일찍이 약속을 했고, 결혼은 최 창업주 사후에 이뤄졌다. 고 최종건 회장이 각별하게 지냈던 재계 인물로는 김용산 전 극동건설 회장이 있으며, 언론계에서는 고 방일영 조선일보 고문과 형님 동생’하는 사이였다.


방계로 넘어가면 장녀 최양분 여사는 한때 종건/종현 형제의 가정교사였던 고 표현구 전 서울대 농대 학장과 결혼했다. 표문수(52) 전 SK텔레콤 사장이 그의 아들이다. 3녀 최종분(73) 여사는 고 이한용 신아포장 대표와 결혼했으며, 막내 사위인 정재현(46)씨는 현재 SK C&C 전무로 일하고 있다. 차녀 최양순(82) 여사는 고 여운창 경기개발 대표와 결혼했으며, 4녀 최종순(69) 여사는 해군 중령 출신인 고 조제동씨에게 시집갔다.


3남 최종관(71) 전 SKC 고문은 장명순(71) 여사와 결혼해 1남 6녀를 두었다. 이 가운데 3녀 경원(42)씨가 김연준 전 한양대 이사장 아들인 김종량(55) 한양대 총장에게 시집갔다. 또 4녀 은성(40)씨는 나웅배 전 부총리 아들인 나진호(42)씨와 짝을 이뤘다. 장녀 순원(47)씨는 존 캐리 퍼크너(47)씨와 국제 결혼했다. 장남인 최철원(36) 마이트엔메인 대표이사는 한숙진(34)씨와 인연을 맺었다.


4남 최종욱(66) 전 SKM 회장은 조효원 전 서울대 교수 딸인 조동옥(59)씨와 결혼했다. 조씨의 남동생이 조동성 서울대 교수다. 미혼인 장남 준원(30)씨는 현재 SK C&C에서 근무하고 있으며, 차녀 윤선(29)씨도 통신/방송장비 전문업체인 SK텔레시스에서 일하고 있다.


경영 대표선수’ 패밀리 4인방

최태원 SK(주) 회장이 그룹 승계자로 확정된 것은 1998년 8월 가족회의에서다. 최종현 회장이 별세하자 최씨가의 차세대 5인방인 사촌 형제들이 모여 당시 최태원 SK(주) 부사장을 그룹의 경영권 승계자로 합의했다. 패밀리 5인방’이 별다른 갈등없이 신속하게 후계 구도에 합의한 것은 고 최종현 회장으로부터 물려받은 지분이 많지 않아 뭉쳐야 산다’는 묵계가 있었기 때문. 동생인 최재원 부회장과 기원씨는 아예 상속포기 각서를 썼을 정도였다. 또 연장자인 최윤원/신원 형제가 경영권에 욕심을 내지 않았을 뿐 아니라 맏이인 최윤원 전 SK케미칼 회장은 최태원 회장이 가족 대표로 경영권을 승계를 할 수 있도록 분위기를 적극 유도했다고 한다. 그러나 최 회장은 가족회의 결과에도 불구하고 그룹 회장에 오르지 않았다. 그는 훗날 "대주주라는 이유만으로 최고경영자가 되는 것이 아니라 전문경영인으로서 능력과 자질을 인정받아야 한다."라고 그 배경을 설명했다.


SK그룹은 98년 9월 계열사 사장단 회의격인 수펙스(SUPEX/슈퍼 엑셀런트의 준말)추구협의회에서 손길승 회장을 그룹 회장’으로 선임하고, 최 회장은 SK(주) 회장직을 맡았다. 국내 재벌가에서 보기 드문 대주주와 전문경영인이 이끄는 파트너십 체제’가 구축된 것이다.


최 회장의 경영 스타일은 토론해서 분석하고, 협의해서 합의한다.’로 요약된다. 합리적이며, 틀에 얽매이는 것을 싫어한다. 고려대 물리학과를 거쳐, 미국 시카고대 경제학 박사과정을 수료했다. 최재원 SKE&S 부회장은 파이낸싱’의 귀재로 통한다. 뉴욕 월스트리트의 일본계 증권사에서 18개월가량 근무한 경력도 있지만 그의 진면목을 드러낸 것은 2000년 SK텔레콤의 신세기통신 인수에서였다. 당시 신세기통신의 최대 주주는 27.6%의 지분을 보유한 포항제철(현 포스코). SK가 이를 매입하려면 1조 7000억 원의 막대한 자금이 필요했다. 최 부회장은 이를 SK텔레콤 지분 6.5%와 포철의 신세기통신 지분을 교환하는 방식의 스와핑(주식 맞교환)으로 해결했다. 최 부회장은 미국 브라운대 물리학과, 스탠퍼드대 재료공학과 석사, 하버드대 경제학 석사 출신이다.


최창원 SK케미칼 부사장은 94년 선경(현 SK)그룹 경영기획실로 첫 발을 내디뎠다. 구조조정과 사업 재편에 뛰어나다는 평이다. 특히 재무구조가 좋지 않은 계열사를 일부러 찾아다니며, 경영수업을 받아왔다. 그가 96년 선경인더스트리(현 SK케미칼) 기획관리실장으로 있을 때는 국내 최초로 명예퇴직제를 도입했으며, 쉐라톤 워커힐호텔과 SK상사에서도 잇따라 명퇴를 통한 감량 경영 바람을 일으켰다. 이 때문에 그는 구조조정 리베로’라고 불렸다. 특히 최 부사장이 계열사로 내려온다는 소문이 들리면 해당 임/직원들은 긴장했다고 한다. 서울대에서 심리학을 전공했으며, 미국 미시간대 경영대학원을 나왔다.


고 최윤원 전 SK케미칼 회장은 90년대부터 나는 경영에 자질이 없다.’며 경영일선에서 한 발짝 비켜섰었다. SK케미칼 회장 때는 아예 회장 결재란을 없애고, 전문경영인에게 권한을 일임했다. 사교와 대외활동에 관심이 많았으며, 특히 그룹의 원로 경영인들을 많이 챙겼다고 한다. 우석대와 미국 엘론대에서 경영학을 공부했다.


SK호 이끄는 전문경영인

조정남(64) SK텔레콤 부회장은 SK텔레콤의 기술력을 세계적인 수준으로 올려놓은 산파’로 통한다. 또 CDMA 전도사’라 불린다. 조 부회장이 밝힌 1995년 CDMA(부호분할다중접속)의 개발 성공 일화다. "당시 손길승 부회장이 저에게 지속적으로 CDMA 성공여부를 물어오셨지만 답답하기는 나도 마찬가지였습니다. 그러던 차에 드디어 수천 명이 동시에 통화를 시도할 수 있는 상업화 규모의 투자를 결심해야 하는 판국에 몰렸습니다. 그때 제가 손 부회장에게 제게 400억 원을 주십시오. 항상 물으시던 CDMA 성공 여부에 대해 확실한 답을 드리겠습니다.’라고 했습니다. 손 부회장은 과감한 지원을 약속했고, 결국 세계 최초의 CDMA 상용화라는 신화가 탄생하게 됐습니다." 조 부회장은 외모에서 드러나는 것처럼 친근감이 넘친다. 자칭 리버럴리스트’로 말한다. 전북 전주 출신으로 서울대 화학공학과를 나왔다.


김창근(55) SK케미칼 부회장의 별명은 마징가’다. 매일 서너 시간만 잠자며, 일에 매달리는 엄청난 체력의 소유자이기 때문이다. 때로는 쏟아지는 잠을 쫓기 위해 허벅지를 꼬집으며 업무를 했다고 한다. 일처리와 관련, 손길승 전 SK그룹 회장 후계자로 불릴 정도다. 그는 마지막 구조본부장으로서 1974년 경영기획실’로 출범한 SK 구조조정본부를 30년 만에 직접 간판을 내리기도 했다. 그는 1974년 입사 이후 SK케미칼 외환과장/자금부장/재무담당 상무를 거쳤고, 1997년에는 그룹 구조본 재무팀장을 맡는 등 SK를 대표하는 재무 전문가다. 서울 출신으로 연세대 경영학과, 미국 USC(남가주대) 경영대학원을 나왔다.


신헌철(60) SK(주) 사장은 소탈한 외모와는 달리 일처리가 꼼꼼하다는 평과 함께 노력형 CEO(최고경영자)로 불린다. 상고 출신으로 주판알만 튀기던 그가 이효석의 단편 소설 『메밀꽃 필 무렵』 때문에 대학 입시에 떨어지자, 아예 작품을 통째로 암기해 버릴 정도다. 그는 지금도 기분이 좋아지면 메밀꽃 필 무렵’을 술술 읊어댄다. 신 사장은 본인을 운 좋은’ CEO라고 평가한다. SK(주) 사장도 운 때가 맞아떨어진 것이지, 능력으로 뽑았다면 될 가능성이 전혀 없었다고 겸손해 한다. 신사장의 얘기다. "최 회장으로부터 SK(주)를 맡아달라고 했을 때 고민이 많았습니다. 능력도 부족한 내가 맡아서 잘 이끌어 갈 수 있을까. 그러나 최 회장이 지금의 SK(주)는 아버지’ 같은 CEO보다 상처를 보듬어주고, 이것저것 챙겨줄 수 있는 어머니’ 같은 CEO가 필요한 시점이라고 하더군요. 그래서(CEO를 맡을) 결심을 하게 됐습니다." 그러나 능력없다.’는 말과 달리 SK(주)는 신 사장이 CEO로 취임한 이후 최고의 전성기를 보내고 있다. 매출과 수출, 순이익 면에서 역대 실적들을 갈아치우고 있다. 신 사장은 경북 포항 출신으로 부산상고와 부산대 경영학과, 연세대 경영학과 대학원을 나왔다.


김신배(51) SK텔레콤 사장은 논리적이며 날카롭다는 인상을 주지만, 의외로 가사를 외운 팝송이 100여 곡에 이를 정도로 감성적인 면도 적지 않다. 또 순탄하게 CEO까지 오른 듯 보이지만 이공계 출신의 기획통 CEO로서 만년 하위권이던 수도권 영업을 SK텔레콤지사 중 1위로 올려놓을 정도로 야전 경험’도 많다. 그는 당시 현장 직원과 친해지기 위해, 또 바닥권이던 점유율을 끌어올리기 위해 매일 술 전투’를 벌였다고 한다. 그는 사석에서 "평소에 즐겨하지 않던 술이었지만 그때 마셨던 술이 그 전 동안 마셨던 술보다 더 많았을 것"이라고 했다. 또 신세기통신과의 통합작업을 2년간 잡음없이 해 낼 정도로 사업 조정 및 대인 관계에도 능수능란하다는 평이다. 김 사장은 충남 부여 출신으로 경기고, 서울대 산업공학과, 미국 펜실베이니아대 경영대학원을 나왔다.


정만원(53) SK네트웍스 사장은 위기를 기회로’ 바꾼 대표적인 CEO다. 2003년 그룹이 SK글로벌(현 SK네트웍스) 사태로 위기를 맞았을 때 SK글로벌 정상화추진본부장으로 뛰어난 위기 관리 능력을 보여줬다. 이 같은 활약 덕분에 SK네트웍스 사장으로 취임, 채권단 조기 졸업을 진두지휘하고 있다. 정 사장은 21회 행정고시 수석 출신으로 1994년 통상산업부 과장에서 SK맨’으로 변신했다. 그는 사령장을 받자마자 서점으로 달려가 관련 서적 40권을 구입했다고 전한다. 95년부터 OK캐쉬백사이트의 원형이 쇼핑몰을 구상했으며, OK캐쉬백과 그 사이트를 기획해 SK에서 입지를 다졌다. 그는 서울 출신으로 중앙고, 연세대 경영학과, 미국 뉴욕대 경영대학원을 졸업했다.


박장석(50) SKC 사장은 오너가(고 최종건 회장의 둘째 사위)의 일원이지만 전문경영인으로 불리기를 더 좋아한다. 솔직함과 친근감을 바탕으로 강한 추진력과 빈틈없는 일처리 능력을 보유한 전형적인 외유내강형’의 CEO라는 평이다. 그는 1979년 (주)선경 미주본부로 입사, 경영지원본부장, 관리총괄 부사장을 거치며, 방송/통신 장비업체인 SK텔레시스 인수를 이끌어내기도 했다. 서울고와 한국외국어대 경제학과, 미국 스티븐스대 경영학 석사 출신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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