달러의 역설

   
정필모
ǻ
21세기북스
   
16000
2015�� 03��





■ 책 소개


왜 미국의 빚이 늘수록 달러의 힘은 세질까?
슈퍼 달러를 유지하는 세계 최대 적자국의 비밀


KBS 경제 전문 기자인 정필모의 책. 저자는 미국이 세계 최대 적자국임에도 ‘슈퍼 달러’를 유지할 수 있는 이유를 미국의 달러가 ‘세계 기축통화(국제간의 결제나 금융거래의 기본이 되는 통화)’이기 때문이라고 밝히며, 세계 경제가 달러에 의존할 수밖에 없는 불합리한 현실을 꼬집는다. 기축통화를 가진 미국의 ‘과도한 특권’에 문제가 있음을 잘 알고 있으면서도, 전 세계의 금융 거래가 달러로 이루어지고 있기 때문에 모든 나라가 어쩔 수 없이 달러를 떠받쳐주고 있다는 것이다. 저자는 이 같은 상황을 ‘달러의 역설(Dollar’s paradox)’이라 새롭게 정의내리고, 이 관점에서 세계 경제위기의 진단을 하는 한편 앞으로 세계 경제, 한국 경제가 나아가야 할 방향에 대해 그리고 있다.


이 책은 지나치게 이론적이거나 단편적, 음모론적인 논의에만 머무른 다른 경제서들과는 달리 세계 경제위기의 과거와 현재, 미래에 대한 전망을 체계적이면서도 대중적으로 접근하고 있다. 일찍이 1997년 외환위기를 겪은 적이 있는 우리나라가 미래에 같은 일을 되풀이 하지 않도록 지금이라도 현명한 대처 방안을 세워야 한다고 주장한다.


■ 저자 정필모
KBS 경제 전문 기자. 한국외국어대학교를 졸업하고, 같은 대학 글로벌경영대학원에서 국제경제학을 공부했다. 성균관대학교에서 저널리즘 연구로 정치학 석사, 언론학 박사 학위를 받았으며 미국 듀크대학교에서 미디어 펠로우를 지냈다. 1987년 KBS에 입사한 뒤 30년 가까운 기자 생활의 대부분을 경제뉴스 관련 부서에서 보냈다. 사회·국제·경제부 기자를 거쳐 ‘경제전망대’ 데스크 겸 앵커, ‘취재파일 4321’ 데스크, 보도본부 경제과학팀장, 1TV뉴스 제작팀장, 경제뉴스 해설위원 등을 역임했다. 현재 KBS 국장급 보도위원으로 KBS 1TV 미디어 비평 프로그램 ‘미디어 인사이드’를 진행하고 있다. 미디어 정치경제학과 저널리즘, 금융위기와 국제 경제 질서 연구에 관심을 가지고, 이에 대한 주제로 강연을 활발히 하고 있다.


지은 책으로 『방송 보도를 통해 본 저널리즘의 7가지 문제』(공저), 『방송뉴스 바로 하기』(공저) 등이 있다.


■ 차례
이 책을 시작하며 - ‘골디락스’에서 ‘화이트 스완’으로
프롤로그 - 대마는 죽지 않는다


| CHAPTER 1 | 달러, 다시 태풍의 눈이 되다
‘금리전쟁’의 시작 | 대충격의 예고편 ‘버냉키 쇼크’ | 잉태된 위험 ‘자산 버블’ | 양적완화 효과의 명암 | 부채 화폐화(debt monetization)의 함정 | 이웃 나라 가난하게 만들기 | ‘빈익빈 부익부’는 신흥국에서도 마찬가지 | 이익의 사유화, 손실의 사회화 | 딜레마에 빠진 세계 경제 | 디플레이션 경고음 | 위기의 악순환


| CHAPTER 2 | 역사로부터 배우다
기축통화는 정치·경제·군사력의 산물 | 팍스 달러리움(Pax Dollarium) 시대의 개막 | 브레튼 우즈 체제의 붕괴와 자본자유화 | ‘플라자’에서 ‘루브르’까지 | ‘블랙 먼데이’의 교훈 | 브레튼 우즈 체제는 왜 자본 이동을 제한했나? | 고정환율제냐, 시장변동환율제냐? | 쉽지 않은 불균형 해소


| CHAPTER 3 | 위기를 부른 금융세계화
금융위기는 복합적이다 | 위기는 금융자유화의 대가 | 금융자본을 위한 세계화 | 세계화의 정신적 지주 ‘워싱턴 컨센서스’ | 금융자유화의 함정 | 경제 주권의 제한 | 경상수지 위기에서 자본수지 위기로 | 외환보유액은 얼마가 좋을까? | 한국의 적정 외환보유액은? | 금융 변동성 키운 IT | 보이지 않는 위험, ‘그림자 금융’


| CHAPTER 4 | 적자의 늪에 빠진 달러 제국
‘쌍둥이 적자’의 악순환 | 재정수지 흑자는 잠시, 적자는 계속 | 경상수지 적자는 과잉 투자·소비의 결과 | 대책 없는 빚 늘리기 | 천문학적 부채를 둘러싼 해프닝 | 연방준비제도에 대한 오해와 진실


| CHAPTER 5 | 그래도 달러는 강하다
‘슈퍼 달러(super dollar)’ 시대 | 달러 ‘대세 상승기’의 배경 | 견고한 달러 기축통화의 위상 | 오일, 달러의 ‘아킬레스건’에서 ‘버팀목’으로 | 석유를 무기로 미국과 싸우겠다고? | 석유도 금융상품이다 | 러시아의 운명을 좌우하는 유가 | 통화전쟁에서 미국이 이길 수밖에 없는 이유


| CHAPTER 6 | 달러에 발목 잡힌 중국
불안한 균형 | 달러 지키기 ‘카르텔’ | 꺼지지 않은 유동성 버블 | 굼뜬 위안화 절상 속도 | 미국의 ‘중국 때리기’ | 겉과 속이 다른 미국 | 중국도 달러 값 폭락이 두렵다 | 중국의 ‘그림자 금융’ 주의보 | 갈 길이 먼 위안화의 국제화 | 위안화는 왜 기축통화가 될 수 없나?


| CHAPTER 7 | 흔들리는 유로존
유로존 위기의 근원 | 통화동맹의 성공 조건 | 통화동맹의 붕괴 원인 | 유로존의 한계 | 재정동맹이냐, 동맹 해체냐?


| CHAPTER 8 | 미국 앞에만 서면 작아지는 일본
아베노믹스의 명과 암 | 위태로운 아베의 도박 | 일본의 아킬레스건은 국가 채무 | 버블 붕괴와 ‘잃어버린 20년’ | 미국이 엔저(円低)를 용인하는 이유


| CHAPTER 9 | 안전한 국제 금융 질서의 모색
더 이상 미룰 수 없는 개혁 | 과도한 외환보유의 비효율성 제거 | 중·일 주도권 싸움과 미국의 견제 | 국제 투기자본에 대한 견제 | 현실성 없는 ‘경상수지 목표제’ | ‘기축통화국’ 미국의 책임 강화 | IMF의 역할과 구조적 문제 | IMF 개혁을 위한 몇 가지 제안 | 비트코인은 왜 대체 통화가 될 수 없나? | 미국과 중국의 주도권 경쟁: TPP vs. RCEP


에필로그 - ‘브레튼 우즈 정신’으로 돌아가자


 




달러의 역설


프롤로그 - 대마는 죽지 않는다

경제학의 전통적 이론에 의하면, 버블 붕괴로 인한 부실을 해결하기 위해서는 강력한 통화 긴축이 불가피하다. 그러나 미국의 처방은 전혀 달랐다. 오히려 양적완화를 통해 돈을 거의 무제한으로 풀었다. 물론 디플레이션에 대한 우려가 만연한 상황에서 어쩔 수 없는 선택일 수도 있다. 하지만 1997년 동아시아 외환위기 때 미국이 IMF를 앞세워 한국 등에 강요했던 초긴축정책과는 사뭇 다른 조치이다. 이는 기축통화국인 미국이 가지고 있는 특권과 무관하지 않다. 미국은 화폐 주조 비용을 제외한 나머지 명목가치로 다른 나라의 물건을 구매할 수 있다. 이른바 ‘세뇨리지 효과(seigniorage gain)’를 톡톡히 누리고 있는 것이다. 이는 달러가 기축통화이기 때문에 가능한 일이다.


일반적으로 경상수지나 재정수지 적자가 누적되면, 그 나라의 화폐 가치가 떨어지고 결국 국가 부도의 위기에 직면하게 된다. 1997년 외환위기 때 한국과 태국, 인도네시아가 그랬다. 최근에는 유로존 위기에서 그리스가 파국에 직면한 것이 대표적인 사례다. 그러나 미국은 세계 최대의 경상수지, 재정수지 적자국으로 금융위기를 불러왔으면서도 정작 자신들은 파국을 면했다. 게다가 위기 이후에도 엄청난 달러를 찍어냈지만, 달러 가치는 얼마 지나지 않아 오히려 상승하는 추세를 나타냈다. 이것이 바로 ‘달러의 역설(Dollar’s paradox)’이다. 이유는 단순하다. 세계 경제가 불안할수록, 대부분의 사람들은 그래도 믿을 수 있는 건 달러라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보다 근본적인 이유는 이른바 ‘대마불사(too big to fail)’의 믿음에서 찾을 수 있다. 대마불사는 국제 경제 질서를 지탱해주는 냉엄한 현실이다. 달러 가치가 폭락하고 미국 경제가 파국에 직면하면, 결국 대미 수출 의존도가 크고 달러화를 많이 보유한 중국, 일본, 한국, 대만과 같은 나라의 경제가 먼저 위기에 빠진다. 그러니 이들 나라가 달러화의 폭락을 방치할 수 없는 것은 당연하다. 그럴수록 미국은 과잉 투자와 소비로 인한 적자 축소 노력을 소홀히 하게 된다. 이것이 바로 기축통화국 미국의 ‘과도한 특권(exorbitant privilege)’이고 ‘도덕적 해이(moral hazard)’를 불러오는 원인이다.



달러, 다시 태풍의 눈이 되다

‘금리전쟁’의 시작

2차 대전 이후 최대의 경제 실험인 미국의 양적완화가 2014년 10월 31일 막을 내렸다. 미국의 중앙은행인 연방준비제도가 연방공개시장위원회 정례회의를 통해 예고했던 대로다. 이로써 2008년 금융위기 직후 6년 동안 시행된 미국의 채권 매입을 통한 돈 풀기 프로그램은 역사 속으로 사라졌다.


세계의 이목은 이제 미국의 금리 인상 시기에 쏠리기 시작했다. 세계 경제는 이미 미국의 통화확대정책 이후 금리 인상 시점에서 벌어진 충격을 몇 차례 경험했다. 특히 1987년 10월 ‘블랙 먼데이’의 충격은 미국의 금리 인상에 대한 걱정이 한낱 기우가 아니라는 것을 일깨워주고 있다. 이제 금리 인상 시기를 놓고 벌어지는 미국과 세계 금융시장, 여타 경제권 간의 총성 없는 통화 전쟁, 즉 ‘금리전쟁’이 한 걸음 앞으로 다가와 있다.


부채 화폐화(debt monetization)의 함정

양적완화는 중앙은행이 화폐를 발행해 채권을 사들이는 방식으로 돈을 푸는 것이다. 사들이는 채권은 주로 정부가 발행한 국채다. 정부가 중앙은행의 발권력에 의지해 재정 지출 여력을 늘리는 것이나 마찬가지이다. 결국 양적완화는 정부 부채의 화폐화를 의미한다. 이는 본원통화를 늘리는 것이어서 인플레이션을 유발할 수 있다. 그렇게 되면 정부 부채는 결국 민간경제주체의 부담으로 전가되는 셈이다. 이처럼 통화정책의 주체인 중앙은행을 정부의 재정 운영에 동원하는 것은 물가를 불안하게 함으로써 중앙은행의 독립성을 심각하게 위협할 수 있다.


독일 역시 주요 교역 상대국인 유로존의 다른 나라나 미국, 일본 등의 경제가 제대로 살아나지 않으면서 경기가 점차 나빠지고 있다. 그런데도 독일은 왜 양적완화에 거부반응을 보이고 있는가? 그것은 독일의 역사적 경험과 무관치 않다. 독일은 1920년대 바이마르 공화국 시절 1차 대전 패전의 책임을 지고 전쟁 배상금을 물어야 했다. 이 때문에 채무가 쌓이고 급기야 국가 부도 사태에 직면할 우려가 커졌다. 그러자 돈을 찍어내는 방식으로 위기를 벗어나려다가 하이퍼인플레이션(hyperinflation)에 빠지게 된다. 1992년 5월, 1마르크였던 신문 한 부의 가격은 1년 5개월 후 무려 100만 마르크까지 치솟았다. 당시 환율도 1달러에 4조 마르크로 폭등했으니 통화 남발이 어떤 파국을 초래했는지 짐작하고도 남는다.


미국이라고 이런 사실을 모를 리 없다. 그러니 양적완화를 서서히 줄이면서 조만간 금리를 올릴 것임을 예고하고 있는 것이다. 금리 인상의 시기는 미국의 경기 회복 속도에 달려 있다. 그러나 그 시기야 언제가 됐든 미래에 닥칠지 모르는 인플레이션을 막기 위해서는 양적완화로 풀린 돈을 거둬들여야 한다는 것은 분명한 사실이다. 한쪽에서는 자산시장의 거품을 우려하는 데 반해, 다른 한쪽에서는 실물경기의 더딘 회복을 걱정하는 이율배반의 현실이 양적완화를 둘러싼 딜레마의 일단을 잘 보여준다.


딜레마에 빠진 세계 경제

양적완화와 초저금리정책은 장기적으로 지속될 수 없다. 미국은 물론이고 그에 맞서 돈 풀기에 나선 유로존, 영국, 일본, 중국 등도 이 사실을 알고 있다. 가까운 장래에 양적완화를 끝내고 금리를 올려야 한다. 이른바 출구전략을 실행해야 한다. 이렇게 되면 세계 경제는 유동성 팽창의 시대에서 유동성 축소의 시대로 옮겨갈 수밖에 없다. 그 시작은 미국이 하게 될 것이다. 미국은 이미 양적완화를 끝내고 금리 인상 시기를 저울질하고 있다. 아직도 경기 회복이 지지부진한 다른 선진 경제권에 비해 경기 회복의 조짐이 뚜렷하게 나타나고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미국의 양적완화가 끝나기 전부터 세계 경제는 곳곳에서 파열음이 들리고 있다. 원인은 크게 두 가지이다. 하나는 양적완화 종료에 이어 금리가 인상될 경우 유동성 축소로 금융시장이 요동칠 것이라는 우려이다. 다른 하나의 원인은 사상 최대의 양적완화와 초저금리정책에도 불구하고 경제가 의도한 만큼 살아나지 않고 있다는 데 있다. 보다 심각한 것은 후자다. 언젠가 양적완화를 끝내고 금리를 올리는 일은 불가피하다. 문제는 그 시점이 경기 회복에 따라 결정된다는 데 있다. 그런데도 미국을 제외한 주요 경제권의 경기 회복은 아직도 가시화되지 않고 있다. 오히려 경기가 더 나빠지는 조짐마저 나타나고 있다.


미국의 금리 인상이 다시 위기를 불러올 것이 확실하다면, 미국도 주저할 것이다. 앞서 언급한 대로 2014년 10월 8일 공개된 연방공개시장위원회 의사록에서 그런 의도의 일단이 드러났다. 하지만 미국이 금리 인상을 마냥 늦출 수는 없다. 사상 최대의 통화확대정책에도 불구하고 미국을 제외한 나라에서는 효과가 신통치 않다. 더 이상의 돈풀기는 오히려 양극화를 심화시키고 금융과 실물 부문을 유리시키는 결과를 가져온다는 것이 입증됐다. 주요 선진국들은 금리를 내릴 만큼 내린 상태에서 거의 무제한으로 돈을 풀었다. 이제 더 이상 별다른 처방은 없다는 것이 딜레마에 빠진 세계 경제의 현주소다.



역사로부터 배우다

팍스 달러리움(Pax Dollarium) 시대의 개막

1944년 영국과 미국을 중심으로 한 세계 주요 선진국들은 미국 뉴햄프셔주의 브레튼 우즈에서 종전 이후의 국제 경제 질서에 관한 합의에 도달했다. 이 합의에 기초해 형성된 국제 경제 질서를 브레튼 우즈 체제라고 한다. 브레튼 우즈 합의의 핵심적 내용은 다음과 같은 세 가지로 요약할 수 있다.


첫째, 달러를 기축통화로 하는 고정환율제를 유지한다. 둘째, 경상거래를 위한 외환거래는 자유화하되, 국제적 자본 이동은 제한할 수 있다. 셋째, 일시적인 국제 유동성 부족에 빠진 나라에 긴급 자금을 제공하고, 국가 간 금융 관련 통계나 정보를 교환하기 위해 국제통화기금을 설립한다. 브레튼 우즈 체제는 이 같은 합의에 따라 출범한 IMF가 핵심적 역할을 수행한다. 이 때문에 ‘IMF 체제’라고 부르기도 한다.


브레튼 우즈 체제는 이처럼 그것을 지탱한 두 가지 조건, 즉 미국 경제의 압도적 우위와 자본 이동 제한이라는 조건이 충족되지 않으면 유지되기 어려울 수밖에 없었다. 그러나 1960년대 후반에 들어서 미국의 생산성 증가율이 일본이나 독일에 비해 크게 낮았고, 경상수지도 적자로 반전됐다. 동시에 미국의 자본수출이 꾸준히 증가하고, 베트남 전쟁 과정에서 미국의 전비 지출마저 급증하면서 이른바 달러 과잉의 문제가 발생했다. 이 같은 달러 과잉은 달러 가치를 떨어뜨리고 달러에 대한 신인도를 훼손해 브레튼 우즈 체제의 근간을 위협했다.


국제 유가 급등에 따른 국제적 자본 이동의 증가도 브레튼 우즈 체제를 불안하게 하는 요인이 됐다. 1970년대 초 석유가격의 급등으로 중동의 산유국들은 막대한 규모의 달러를 벌어들여 런던을 비롯한 유럽의 금융시장에 예치했다. 그 결과 유로달러시장(euro dollar market)이라는 새로운 형태의 국제 금융시장이 형성됐다. 유로달러시장의 형성은 국제적 자본 이동의 규모를 급격히 증가시키는 계기가 됐다. 이는 자본 이동에 대한 규제를 기술적으로 더욱 어렵게 만들었다. 이러한 국제 경제 상황의 변화로 브레튼 우즈 체제는 결국 1973년에 종말을 고하게 됐다.



적자의 늪에 빠진 달러 제국

대책 없는 빚 늘리기

미국은 국가채무 한도를 지난 1940년 이후 지금까지 모두 90여 차례에 걸쳐 조정해왔다. 이 가운데 채무 한도를 낮춘 것은 5차례에 불과하다. 그것도 모두 1963년 이전의 일이다. 나머지는 모두 채무 한도를 높인 것이다. 부채가 법정 한도를 넘는다는 것은 국가 부도에 이를 가능성이 높다는 것을 의미한다. 미국의 채무 급증은 미국 경제뿐만 아니라 세계 경제의 잠재적 위험 요인이 된다. 이 때문에 미국 정부와 의회는 부채가 급증할 때마다 채무 한도를 늘리기 위한 협상을 벌였다. 이 과정에서 협상 타결이 늦어지면 정부의 재정이 바닥을 드러냈다. 그때마다 정부의 업무가 잠정 중단되는 사태가 1976년 이후 17차례나 반복돼왔다.


미국 정부는 이처럼 빚이 늘어날 때마다 부채 한도를 늘려야만 업무의 중단을 막고 부도 위기를 넘길 수 있다. 실제로도 지금까지 그렇게 해왔다. 그러나 늘어난 미국 정부의 부채는 해마다 갚아야 하는 이자만 2,000억 달러를 넘을 정도다. 빚이 빚을 낳는 악순환이 되풀이되는 지경에 이르렀다. 이제 문제를 해결하는 방법은 미국 정부가 세금을 더 걷든지, 지출을 줄이는 것이다. 그런데도 미국이 버티는 것은 여전히 기축통화인 달러가 가진 특권인 세뇨리지 효과 때문이다.


천문학적 부채를 둘러싼 해프닝

그럼에도 불구하고 세계에서 가장 많은 빚을 지고 있는 미국은 여전히 대마불사의 신화를 믿고 있다. 미국 스스로만 그런 것이 아니다. 전 세계가 그 같은 신화가 깨지는 것을 두려워하고 있다. 미국이 파산하면, 당장 대미 수출에 의존하는 나라들도 경제가 크게 흔들릴 수밖에 없다. 그뿐인가. 달러가 휴지조각이 되면, 수출해서 벌어들인 돈으로 투자한 달러 표시 자산도 역시 아무 쓸모가 없게 된다. 결국 미국의 파산은 미국의 교역상대국, 즉 대미 수출 의존 국가들에게도 파국을 의미한다. 역설적이지만, 대마불사의 믿음이 깨지지 않는 것도 그와 같은 두려움 때문이다. 대마불사의 신화가 현실이 된 셈이다.


현실이 된 신화는 때때로 엉뚱한 논란을 불러온다. 미국이 부채 위기를 해결하기 위해 1조 달러짜리 동전을 발행해야 한다는 주장이 그것이다. 요지는 이렇다. 미국 재무부가 1조 달러짜리 백금 동전을 만들어 연방준비제도이사회 계좌에 예치하면, 정부가 부채 한도 초과 위기를 피해 인플레 등 경제적 부작용 없이 충분한 현금을 확보할 수 있다는 것이다. 이 아이디어는 당초 2011년 미국 오캠 파이낸셜그룹의 창립자인 컬렌 로쉬가 내놓았다. 이어 2013년 1월 민주당 소속의 제럴드 내들러 연방 하원의원이 이 제안을 심각하게 검토해야 한다고 주장하면서 의원들 사이에서 관심을 끌었다. 물론 이 제안을 액면 그대로 받아들일 수 없는 측면이 있다. 연방정부의 부채 한도를 상향 조정하는 문제를 놓고, 오바마 행정부와 민주당이 그것을 반대하는 공화당을 압박하려는 계산이 깔려 있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미국 정부는 2013년 1월 21일 1조 달러 백금 동전을 발행하지 않기로 최종 결정했다. 오바마 대통령은 “궁극적 문제는 미국 채권을 매수하는 투자자들의 신뢰를 얻는 것이다”라는 이유를 들어 1조 달러짜리 동전 발행 가능성을 차단했다. 아마 누가 봐도 꼼수에 불과한 그 같은 방안을 실천에 옮길 경우 미국 경제에 대한 신뢰가 바닥으로 떨어지면서 또 다른 위기를 불러올 수도 있기 때문이었을 것이다. 사실 민주당 일각에서도 처음부터 실행 의지를 갖고 그런 주장을 한 것은 아니다. 하지만 비록 해프닝으로 끝났다 하더라도 부채의 늪에 빠진 미국의 고민을 드러낸 사건이다.



그래도 달러는 강하다

‘슈퍼 달러(super dollar)’ 시대

1971년 미국의 닉슨 대통령이 “더 이상 달러를 금으로 바꿔주지 않겠다”는 금 태환 중지 선언을 한 이후에도 달러의 기축통화 위치는 변함없이 유지돼 왔다. 그 이전까지만 해도 미국의 달러화를 보유한 다른 나라의 중앙은행이 미국에 달러화를 금으로 바꿔줄 것으로 요구하면 거기에 응해야 하는 것이 미국의 의무였다. 사실 금으로 바꿔줄 의무가 사라진 달러는 종이조각에 불과하다. 그러나 종이조각에 불과한 달러는 이미 국제 결제통화와 준비통화로서 세계 각국의 중앙은행과 정부, 일반은행, 기업, 가계의 금고에 잠겨 있었다. 이런 상태에서 달러가 아무 가치가 없는 휴지조각이 되는 것을 원하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을 것이다.

닉슨의 금 태환 중지 선언과 함께 추락의 길을 걸었어야 하는 기축통화로서의 달러의 위상이 오히려 더 견고해질 것이라고 누가 믿었겠는가. 경제학자들조차 그런 예상을 한 사람은 별로 없었다. 미국의 입장에서 달러는 미국이 만들어낸 가장 위대한 상품이다. 액면가에서 주조 비용을 빼면 모두 이익으로 가져갈 수 있는 세뇨리지 효과의 특권을 손에 쥐고 있으니 그럴 만도 하다. 경제위기 속에서도 살아남는 달러의 위상, 세계 경제가 불안할수록 오히려 강세를 나타내는 달러의 가치는 오늘날 미국이 세계를 지배하는 힘의 원천이다. 이렇듯 세계 최대 적자국이자 채무국인 미국의 달러가 초강세를 이어가는 ‘슈퍼 달러 시대’는 이제 현실이 됐다.


통화전쟁에서 미국이 이길 수밖에 없는 이유

미국의 양적완화는 애초부터 국제적인 합의와 공조를 통해 환율이나 국제수지를 조정하겠다는 생각과는 거리가 있는 정책이다. 다른 나라야 어찌 되든 통화 증발을 통해 경기를 부양하고 디플레이션을 막겠다는 게 미국의 속셈이다.


양적완화는 시작부터 신흥국이나 개발도상국에겐 재앙의 전주곡이었다. 쏟아져 들어오는 외국자본 때문에 증권시장과 부동산시장의 침체는 막았는지 모른다. 하지만 수출업체의 가격 경쟁력을 유지하기 위해 환율 하락을 막는 데 막대한 대가를 치러야 했다. 환율 하락을 저지하기 위해 유입된 달러를 사들이다 보면 자국 돈이 많이 풀려 물가 관리가 어렵게 된다. 쏟아져 들어오는 달러를 방치하면 수출업체가 울고, 수출 경쟁력을 유지하기 위해 달러 매입에 나서면 대다수 국민들이 물가 상승의 부담을 감내해야 한다. 이래저래 신흥국과 개도국들은 진퇴양난일 수밖에 없었다. 그랬던 것이 이제는 미국이 양적완화를 끝내고 금리 인상을 저울질하자 외화 유동성 위기를 걱정해야 하는 처지에 몰리게 됐다.


미국이 다른 나라의 고민을 감안해줄 리 만무하다. 통화정책은 패권적 질서를 추구하는 미국의 전략이다. 양적완화를 통해 경기를 부양하고 부채의 부담을 떠넘기니, 미국으로서는 그야말로 ‘일석이조’, ‘일거양득’이다. 게다가 양적완화 종료와 금리 인상을 계기로 이번에는 외화 유동성이 부족한 신흥국과 개도국의 생사여탈권까지 쥐게 되는 셈이다. 달러를 무기로 세계를 주무를 수 있으니 ‘일석삼조’의 효과라 하지 않을 수 없다.


통화전쟁은 이처럼 처음부터 미국에 절대적으로 유리한 게임이다. 전쟁이 아니라 원하는 대로 달러를 찍어낼 수 있는 미국의 ‘꽃놀이패’이다. 이런 게임에서 패한다는 것은 바보가 아닌 이상 생각할 수 없는 일이다. 통화전쟁의 승자는 이미 기축통화로 무장한 패권국 미국으로 결정돼 있는 것이나 마찬가지다. 그러니 미국이 먼저 거리낌 없이 세계 경제를 볼모로 잡고 통화전쟁을 시작한 것이다.



달러에 발목 잡힌 중국

중국도 달러 값 폭락이 두렵다

중국의 외환보유액은 2014년 9월 말 현재 3조 8,877억 달러에 이른다. 거의 4조 달러에 이르렀다가 줄기는 했지만, 여전히 세계 최대 외환보유국이다. 이 때문에 중국이 마음만 먹으면, 달러를 대규모로 매각해 미국을 흔들 수 있다고 생각하는 사람이 적지 않다. 중국이 세계 경제를 혼란에 빠뜨릴 수도 있다는 것이다. 전혀 불가능한 일은 아니다.


중국은 2011년까지 외환보유액의 절반 이상을 미국 채권에 투자해왔다. 2012년에 그 비중이 다소 낮아지기는 했지만, 여전히 1조 5,000억 달러 이상의 미국 채권을 보유하고 있다. 달러 가치가 10%만 떨어져도 단순 계산으로 1,500억 달러가 넘는 환차손이 발생한다. 다른 쪽에서 이것을 뛰어넘는 이익이 생기지 않고서는 중국이 이 손실을 감수할 리 만무하다.


중국의 손실은 여기서 그치지 않는다. 중국의 달러 투매로 달러 가치가 일시에 폭락하면, 미국 경제와 세계 경제도 연이어 충격을 받게 된다. 그럴 경우 미국의 구매력 감소로 중국 수출품에 대한 수요가 줄어들 수밖에 없다.


달러 가치의 폭락은 이처럼 중국에도 상당한 부담이 된다. 가장 큰 문제는 수출 위축으로 경제 성장률이 떨어지는 것이다. 이로 인한 실업자의 증가는 세계 최대의 인구를 가진 중국에 경제적, 사회적 문제를 불러오게 되는 것은 물론 정치적 불안으로 이어질 가능성이 높다. 이런 상황은 중국에게 재앙과도 같은 총체적 체제 위기를 의미한다.



미국 앞에만 서면 작아지는 일본

버블 붕괴와 ‘잃어버린 20년’

무분별한 신용 확장은 과잉 투자와 소비를 낳는다. 그리고 주식과 부동산 가격 등 자산 가치의 급격한 상승, 즉 버블로 이어진다. 그러나 어느 순간 버블을 받쳐줄 수요가 충분하지 않게 되는 순간 모든 신용 버블은 디플레이션으로 종결된다. 버블이 꺼지기 시작하면 채무자들은 부채에 대한 이자를 더 이상 감당할 수 없게 된다. 결국 파산이 뒤따르고 신용은 위축되며 경기는 침체에 빠진다. 일본의 자산 버블 역시 이런 방식으로 끝났다.


한때 혼자만의 승리에 도취해 버블을 키운 일본의 도박은 결국 ‘잃어버린 20년’이라는 참담한 결과를 낳았다. 물론 가장 큰 원인은 일본 정부와 중앙은행의 정책 실패에 있다. 하지만 그 이면에는 통화전쟁을 일으킨 기축통화국 미국이 자리하고 있다. 통화팽창을 통해 성장률을 끌어올리는 것은 어렵지 않지만, 그로 인해 버블이 생겼을 때 그것을 다른 나라에 전가시키는 일은 아무 나라나 할 수 있는 일이 아니다. 오직 기축통화국만이 자신의 고통을 남에게 떠넘길 수 있다. 플라자 합의와 루브르 합의로 이어지는 대일본 압박을 통해 미국은 통화 전쟁의 승자가 됐고, 일본은 패자가 됐다. 이것이 바로 통화전쟁의 교훈이다.


미국이 엔저(円低)를 용인하는 이유

미국이 엔저를 용인하는 속셈은 단기적인 이익보다는 중장기적인 이익을 확보하려는 데 있다. 미국의 중장기적인 세계 지배전략은 최대의 경쟁상대로 떠오른 중국을 견제하는 것이다. 미국이 최근 환태평양 경제 동반자 협정에 일본을 적극적으로 끌어들인 것도 그 때문이다. 일본의 입장에서도 약해진 경제력을 만회하기 위해서는 미국의 도움이 필요하다. 아베 정권이 들어서면서 미국과 일본 사이에는 이런 전략적 이해관계가 어느 때보다도 맞아떨어졌다. 미국은 일본에 엔저 용인 이외에도 셰일 오일 수출이라는 선물을 안겨주었다. 대신 일본은 경제뿐만 아니라 정치, 군사적으로 미국에 더욱 밀착하고 있다.


사실 재정 적자에 시달리고 있는 미국으로서는 일본 경제의 부활이 정치, 군사적으로도 반드시 필요하다. 일본이 미국을 대신해 아시아에서 중국을 견제하는 데 한몫을 해줄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일본의 군사 대국화는 동북아에서 새로운 긴장을 조성할 가능성이 크다. 그런 상황은 미국의 중장기적 이익 확보에도 결코 도움이 되지 않는다. 그렇다 하더라도 지금까지 드러난 미국의 입장이 일본의 엔저를 용인하는 것이라는 데 이의를 제기하는 전문가는 별로 없다. 미국 재무부가 2014년 11월 발표한 환율정책 보고서에서도 엔저를 묵인하겠다는 속내가 감지된다. 이 보고서는 자국 통화의 저평가를 통해 수출경쟁력을 유지하는 국가로 중국, 일본, 한국을 포함시켰다. 그러나 이 가운데 중국, 한국에 대해서는 외환시장 개입을 자제하라고 직접적인 압박을 가한 데 비해 일본에 대해서는 주시하겠다며 형식적인 경고에 그쳤다.


미국의 이 같은 엔저 용인은 미국 경제가 그래도 경쟁국에 비해 회복 속도가 빠르고 여건이 낫다는 자신감에서 비롯된 것일 수도 있다. 게다가 이미 30년 전 통화전쟁에서 쓴 맛을 본 일본 경제가 양적완화를 통해 희생하더라도 이제 미국의 기축통화국 지위를 위협할 가능성도 없다. 결국 미국의 엔저 용인은 미국의 입장에서 철저히 미국의 이익을 위해 계산된 전략의 하나일 뿐이다. 이는 미국의 경제 상황이 변하면, 언제든 엔저에 대한 미국의 입장도 바뀔 수 있다는 것을 의미한다. 이제 주목해야 할 것은 미국이 금리를 인상하는 시점이다. 금리 인상을 계기로 달러화의 강세가 지나치면 미국의 무역 적자는 다시 확대될 수 있다. 이 경우에도 미국이 고통을 감내하면서 계속 엔저를 용인할 가능성은 거의 없다.



에필로그 - ‘브레튼 우즈 정신’으로 돌아가자

국제 통화 질서의 개혁을 논의함에 있어서 우선 고려해야 할 과제는 통화체제의 근간이 되는 대외 지불준비 자산을 다각화하고 불안한 환율제도를 개선하는 일이다. 현행 변동환율제도는 주요 환율의 급격한 단기변동과 심각한 균형이탈로 인해 선진국 경제는 물론 세계 경제에 큰 악영향을 미치지 않을 수 없다. 특히 기축통화국인 미국의 경상수지 적자가 누적될 경우에는 더욱 그렇다. 따라서 달러화를 보완할 대외 지불준비 자산을 마련하고 환율의 급격한 단기변동을 제한할 수 있는 장치가 필요하다.


2차 세계대전 이후 세계 경제가 안정 성장기를 지나 경기 변동이 심해지고 위기가 잦아지기 시작한 것은 사실상 브레튼 우즈 체제가 붕괴된 미국의 달러화 금 태환 정지 이후다. 최근 겪고 있는 금융 불안과 위기는 금 태환 정지와 함께 고정환율제를 버리고 변동환율제를 도입하면서 자본의 이동을 자유롭게 허용한 데서 온 당연한 결과다. 금융 불안과 위기의 근원은 변동환율제와 자본시장 개방을 근간으로 하는 금융세계화에 있다.


원인을 알았으니 해결 방안은 자명해진다. 브레튼 우즈 체제의 기본 정신으로 돌아가야 한다. 즉 자본의 자유로운 이동을 제한하는 것이다. 물론 자본 이동의 제한은 기축통화국인 미국의 금융자본의 이해에 반한다. 그러나 적어도 투기자본의 이동만은 제한해야 한다. 그것이 세계 경제가 항시적인 금융 불안과 위기로부터 벗어날 수 있는 가장 효과적이고 현실적인 방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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