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통령들과의 경제 토크

   
21세기경제학연구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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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향미디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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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2�� 02��



■ 책 소개
4.19혁명 직후의 짧은기간을 제외하고는 독재정권이 1990년대 초까지 장기간 이어졌고, 그동안 언론통제 속에서 대중세뇌가 치열하게 이루어졌다. 또한 당시에 국가의주인인 국민을 배신하고 독재정권에 부역하며 온갖 호사를 누렸던 인물들이 회고록 등에서 자신들의 화려한 경력과 업적들을 내세우기 위해 자화자찬을해댔고, 이것이 거짓 신화로 굳어졌다. 심지어 실패한 정책들까지 온갖 미사여구를 동원하여 성공한 것처럼 꾸미기도 했다.

하지만 거짓 신화는 타파되어야 하고, 실패한 정책도진실을 밝혀 배척되어야 마땅하다. 그래야 과거의 실패를 반복하지 않을 수 있다. 아울러 성공한 것이 실패한 것으로 오도된 정책은 반드시재평가되어야 한다. 그래야 부진의 늪에 빠진 우리 경제를 다시 살려낼 수 있다.

이승만, 박정희, 전두환, 노태우, 김영삼, 김대중, 노무현, 이명박 대통령으로 이어지는 우리나라의 경제 흐름과변화, 위기와 대책 등을 분석한 책이다. 외환위기, 가계부채, 환율폭등 등 시대별 어떤 경제적 위기가 있었는지 살펴보고, 이를 해결하기 위해대통령들은 어떤 정책들을 내놓았는지 설명한다. 이를 통해 어떤 정책이 실패였고 어떤 정책이 성공이었는가를 공정하게 밝히고자 한다.

■ 저자21세기경제학연구소
21세기경제학연구소는 한국의 그린스펀이라 불리는 최용식 소장이 설립한 순수 민간 경제연구소로 정확한진단과 예측으로 많은 경제전문가와 일반인들에게 관심을 받고 있다. 21세기경제학연구소는 정부 경제 관련 정책부서에 경제해법을 제시해왔으며, 여러기업과 단체에 경제 보고서를 제공하며 실력을 인정받고 있다. 

최용식 - 세계 경제학계가 한국으로 경제학을 배우러 오고 이태백, 사오정이 없는 부강한 나라를만드는 게 꿈이다. 소위 ‘돈 있는 사람들’과 외국인 및 기관세력들에게 당하는 소시민을 위해 21세기경제학연구소이라는 민간 경제연구소를 설립하여기존 경제학의 한계를 극복한 새로운 경제학의 패러다임을 구축하고 있다. EBS 명사특강, KBS TV특강에 출연하였다. 저서로는 『회의주의자를위한 경제학』『환율전쟁』『대한민국 생존의 경제학』『거짓말 경제학』 외 다수가 있다. 

방병문 - 국제공인증권분석사(CIIA)로 10여 년간 증권사에근무하였다. 정부 및 민간 연구소들의 경제전망이 현실경제를 설명하는 데 턱없이 부족하다는 것을 절감하고 21세기경제학연구소에 참여하였다.저서로는 『위기에 다시 읽는 경제교과서(공저)』가 있다. 

임채완 - 숭실대학에서 경제학과 석사를 수료 받고 사학과 김인중 교수수업을 청강했다.21세기경제학연구소와 함께 역사, 과학적 태도, 시장이라는 세 가지 거울을 통해서 세상을 조망하고 한국 사회를 해부하고자 한다.

■ 차례
서문 -왜 우리는 거짓 신화를 믿으려 할까?

경제 토크1. 해방과 함께 찾아온 금발의 정책 
1.‘대한민국’ 호 출범하다 | 2. 해방 후 미국은 우리 경제를 살렸을까? | 3. 미국, 칠십까지 갈 세 살 버릇을 만들다 | 4. 신생독립국가 중 가장 늦게 경제성장을 시작하다 | 당시 세계 경제는? 

경제 토크2. 공갈빵을 먹은 이승만 대통령
1. 우골탑과 백골단을 아십니까? | 2. 아무도모르는 첫 번째 외환위기 | 3. 1959년 가을, 물가상승과 이승만의 담화 | 4. 이승만 대통령의 원조 신화의 진실 | 당시 세계경제는?

경제 토크3. 경제제일주의를 외친민주당 정권
1. 민주당 정권 탄생하다 | 2. 처음으로 경제제일주의를 외치다 | 3. 걸인의 철학으로 태어난‘잘살아보세’ | 4. 경제문제에 필요한 서생의 문제의식과 상인의 현실감각 | 당시 세계경제는?

경제 토크4. 천리마를 뒤로 탄 박정희 대통령
1.한강의 기적, 그 시작과 끝은 어디인가? | 2. 경제개발 5개년계획은 성공책일까? | 3. 엄청난 파장을 불러일으킨 1962년 증권파동 |4. 대한민국 경제건강을 악화시킨 샤워꼭지 정책 | 5. 박정희 때문에 vs 박정희였음에도 | 당시 세계경제는?

경제 토크5. 스캔들에 휩싸인전두환 대통령
1. 박정희는 운이 좋은 사나이? | 2. 우리 경제의 성장잠재력을 확인한 안정화 정책 | 3. 전두환 정권정책의 그림자 | 4. 중화학공업추진의 비극 | 당시 세계경제는?

경제 토크6. 성장잠재력을 소진시킨 노태우 대통령
1. 양호한 경제체제를 물려받은노태우 정권 | 2. 최악의 경제정책이라 불리는 이유 | 3. 주식시장에 놀아난 주식시장 부양정책 | 4. 성장잠재력을 손상시킨 주택 2백만 호건설정책 | 당시 세계 경제는?

경제토크7. 부실기업을 인수한 김영삼 대통령
1. 정국을 뒤집은 3당 합당 | 2. ‘외환위기 징비록’으로 살펴본 외환위기진행과정 | 3. 외환위기 1단계: 나날이 심각해진 금융시장의 불안 | 4. 외환위기 2단계: 뒤늦게 시작된 IMF 구제금융협상 | 5.외환위기 3단계: IMF 구제금융을 강요한 미국의 은밀한 속내 | 6. 외환위기 4단계: 지지부진하게 이어진 IMF 구제금융협상 | 7.외환위기 5단계: 드디어 합의한 IMF 구제금융 | 당시 세계 경제는?

경제 토크8. 또 한 번의 기적을 이룬 김대중 대통령
1. ‘국민의 정부’ 시작되다 | 2.금융개혁, 한국 경제에 응급조치를 취하다 | 3. 구조조정으로 IMF의 수렁을 빠져나오다 | 4. 환율전쟁에 승리한 국민의 정부 | 5.‘국민의 정부’가 ‘무능 정부’라 불린 까닭은? | 6. 근거 없는 위기설과 눈감은 전문가들 | 당시 세계경제는?

경제 토크9. 한 편의 드라마가된 노무현 대통령
1. 우여곡절 많은 참여정부의 시작 | 2. 보수정당, 저주를 시작하다 | 3. 최우선과제로 떠밀린가계부채문제 | 4. 서민 울린 서민을 위한 가계부채조치 | 5. 경제원리를 외면한 일자리 창출 정책 | 당시 세계경제는?

경제 토크10. 경제 대통령?이명박 대통령
1. 경제 대통령이 내놓은 경제정책의 성적은? | 2. 새롭게 추가된 거짓 신화 | 3. 2008년환율폭등의 숨겨진 비밀 | 4. 잘못된 믿음으로 무거운 숙제를 남기다 | 당시 세계 경제는?

경제 토크11. 우리 경제를 살릴 미래 대통령
1. 우리경제가 넘어야 할 5대 장애물 | 2. 그리스 경제위기를 통해본 금융위기 | 3. 글로벌 금융위기를 헤쳐 나갈 방법은 무엇일까? | 4.신자유주의를 둘러싼 오해와 진실 | 5. 우리 경제가 시급히 해결해야 할 3대 난제들 | 6. 대한민국 경제는 절망적인가? | 7. 우리 경제를살릴 방법은 무엇인가

참고문헌

 





대통령들과의 경제 토크


해방과 함께 찾아온 금발의 정책

‘대한민국’ 호 출범하다

‘대한민국 경제’라는 배는 1945년에 해방을 맞았지만 경제성장은 물론이고 경제안정의 발판조차 너무 취약했다. 거의 모든 자원이 제2차 세계대전에 총동원되어 경제는 피폐해질 대로 피폐해졌고, 공출과 배급제가 시행되던 중에 해방과 함께 행정력이 무너지면서 경제시스템 자체가 붕괴된 상태였다. 그뿐만이 아니다. 일본강점기에 지어진 대부분의 제조업 생산시설은 군수물자를 조달하기 위한 것이었고, 그 대부분을 일본인이 지배했다. 해방 후 일본인이 철수하자 국내 대부분의 생산시설은 가동을 멈출 수밖에 없었다.


일본인이 소유했던 생산시설이 우리 국민에게 불하된 뒤에도 기술자가 절대적으로 부족하여 생산이 제대로 이뤄지지 못했다. 일본인이 약탈했던 농지도 주인을 잃음에 따라 농업생산이 원활하지 못했다. 일본의 퇴각과 함께 일본인 소유의 농지가 즉각 우리 농민에게 되돌려져 농업생산이 이뤄져야 했고, 건국준비위원회가 그것을 시행하려고 했지만, 미 점령군이 진주하여 건국준비위원회의 활동을 불법화함으로써 농업생산의 조기 회복은 무산되고 말았다. 이런 때에 국외로 이주했던 약 230만 명의 국외동포들이 해방 직후 한꺼번에 환국함으로써 식량은 물론이고 다른 생필품 부족이 더 심각해졌다.


남북분단은 더 치명적이었다. 일본강점기에 지어진 생산시설들은 일본군의 만주 진출을 위해 주로 북한에 지어졌다. 이에 따라 물자 부족이 심각했고 물가는 매년 폭등을 거듭했다. 그런 빈약한 생산 시설마저 6·25 전쟁이 터진 뒤에는 미국 공군기의 융단폭격으로 모두 초토화되었다. 대한민국 경제 호는 그렇게 출범했던 것이다.


신생 독립국가 중 가장 늦게 경제성장을 시작하다

미군정 기간에는 국가 경제의 재건을 위한 장기적인 안목의 정책은 전무하고 그때그때의 대증적 정책만 난무했다. 당시 문정관이었던 그레고리 헨더슨은 그때를 다음과 같이 적나라하게 묘사했다. “권력은 전쟁(제2차 세계대전)에 지친 미군 장교들이 장악하고 있었다. 그들이 열망하는 것은 하루 빨리 집으로 돌아가는 것이었다. 장기적인 목표나 단기적인 방법도 준비하지 않은 채 정책을 집행했다는 말이다. 심지어 미군 정부는 한국인들에게 ‘통역관 정부’라고 불리게 되었다. 통역에 의해 걸러지고 그들 자신의 무지가 합쳐져 올바른 정보도 없이 마음 내키는 대로 수하의 지도자와 참모들을 뽑아 몽골의 고려 지배자들이 고려 사회에 분열의 씨를 뿌린 시절을 연상시켰다.”


미군정은 섣부르게 시장경제를 실험했다가 철회하는 등 혼란만 부추겼다. 예를 들어 1945년 10월에는 미곡자유시장을 개설하였으나 가격폭등만 불러왔고, 불과 3개월 후인 46년 1월에 ‘미곡수집령’에 의해서 통제체제로 전환했다. 한마디로 미군정의 경제정책은 긍정적으로 평가해줄 만한 것을 눈을 씻고 찾아봐도 없다. 오직 부정적인 정책들만 눈에 띌 뿐이다.


미군정은 일제 부역자들을 관료로 채용하면서 그들의 실무능력을 명분으로 삼았으나, 최소한 경제정책 면에서 이들이 남긴 업적은 아무 것도 없다. 오히려 부정적인 업적만 남겼다. 실제로 우리나라는 신생 독립국가 중에서 가장 늦게 경제성장을 시작하는 결과를 빚었다.


다행히 1947년 2월 민정장관에 안재홍이 임명된 뒤부터는 신진 관료들이 경제정책에 참여하기 시작했다. 그들은 일제 귀속재산을 매각하는 노력을 기울이고, 물가안정에도 심혈을 기울였다. 그러자 1948년부터는 물가가 차츰 안정을 되찾아갔다. 서울 도매물가는 29.9%, 소매물가는 18.6%가 상승함으로써 드디어 물가안정의 기틀이 마련되었던 것이다.


그렇지만 경제를 성장시키기에는 역부족이었다. 단지 물가안정을 위한 노력을 전재할 수 있는 계기를 마련했다는 정도의 의의만 있을 뿐이다. 안재홍은 젊은이들을 대거 선발하여 미국과 유엔 등의 원조기구에 파견함으로써 선진 경제정책과 경제학을 배우게 했다. 훗날 이들이 발언권을 본격적으로 행사하기 시작한 뒤에야 우리 경제는 비로소 도약의 길로 들어설 수 있었다.



경제제일주의를 외친 민주당 정권

처음으로 경제제일주의를 외치다

이승만과 박정희 사이에는 묘한 공통점이 있다. 가장 중요한 공통점은 이상주의다. 일민주의를 내세웠던 이승만이나 사회재건을 내세운 박정희나 처음에는 ‘국가적 통일’이나 ‘완벽한 사회’ 같은 이상주의를 내세웠다. 이승만이 처음부터 반공반일을 내세운 것은 아니다. 박정희도 처음부터 수출제일주의를 내세우지는 않았다. 그들은 신비하고 이상적인 통일이나 사회정화를 내세웠다. 반공반일이나 수출제일주의 등은 이런 이상적인 주장이 실패하고 나서 나타난 슬로건이다.


하지만 그들의 더 큰 문제(공통점)은 이상적 세계에 도달하기 위한 그 추진을 자신만이 할 수 있다고 믿었다는 점이다. 예컨대 통일은 이승만을 통해서만 생각할 수 있고, 우리 민족이 나아갈 길잡이는 민족 구국의 영웅인 박정희뿐이라는 것이다.


반면, ‘민주주의의 정통성’과 ‘경제제일주의’는 민주당의 가장 중요한 두 개의 목표였고, 장면 총리와 윤보선 대통령은 이를 늘 천명했다. 민주주의의 정통성은 민주당에게 어울리지만 경제제일주의는 그렇지 않다고 생각하는 사람이 많을 것이다. 이는 경제제일주의를 박정희가 훗날 애용함으로써 이것이 박정희 정권의 전유물인 것처럼 알려졌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것은 민주당 정권에서 처음 쓴 표현이다.


중요한 점은 민주주의와 성장은 한 사람에 의해 이루어질 수도 없고, 이루어지지도 않는다는 사실이다. 또한 한꺼번에 이루어질 수도 없고, 이루어지지도 않는다. 성장은 민주주의의 조건이고, 민주주의는 성장의 조건이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이승만과 박정희의 차이점은 무엇일까? 그것은 이승만은 민주당 이전의 사람이었고, 박정희는 민주당 이후의 사람이라는 점이다. 박정희는 경제제일주의의 일부를 도용할 수 있었고, 민주주의로 도색할 수 있었다. 이승만과 박정희는 포장되고 과장된 반면, 이승만과 박정희 사이에 끼어 있는 민주당 정권은 오히려 이상적이었고 실현 불가능한 주장을 했다는 비판을 받았다. 이승만과 박정희는 대통령 중심제의 장점인 신속한 결정을 찬사하는 반면 내각책임제의 장점인 신중한 결정을 비판했던 것이다.



성장잠재력을 소진시킨 노태우 대통령

최악의 경제정책이라 불리는 이유

1982년 이래 세출은 계속적으로 10% 미만의 증가율을 보였는데 1986년과 1987년에는 각각 12.7%와 14.2%라는 비교적 높은 증가율을 기록했다. 여기에다 주식시장까지 과열되면서 경기는 과열로 치달았다. 물가는 이미 집권 초부터 불안해지고 있었으며 1988년 3월 10일에는 물가안정종합대책을 발표해야 했다. 실제로 1988년의 소비자물가상승률은 7.1%로 급등했다. 이런 사실은 명백히 과열되었다는 것을 의미했다. 그렇다면 좀 더 강력한 안정화 정책을 펼쳐야 했지만, 정부는 1988년에 재정지출을 21.9%나 증가시켰고, 1989년에는 무려 33.0%나 팽창시켰다.


재정을 팽창시키자 성장률은 오히려 더 떨어져 1989년에는 6.4%를 기록하는 데에 그쳤다. 경기가 부진했음에도 물가상승률은 5.7%라는 비교적 높은 실적을 기록했고, 국제수지 흑자도 전년도의 37% 수준으로 떨어졌다. 국제경쟁력과 성장잠재력이 그만큼 소진되고 있었던 것이다. 경제학적으로 봤을 때 재정지출이 팽창되면 수요는 경기를 상승시키는 역할을 한다.


그렇지만 공급은 흔히 반대 역할을 한다. 재정지출은 주로 한계생산성이 낮은 분야에 이뤄지는 것이 일반적이기 때문이다. 가격은 한계효용이 결정하듯이 소득은 한계생산성이 결정하므로, 한계생산성이 낮은 분야에 재정지출이 집중되면 국민소득은 그만큼 줄게 된다. 물론 재정지출의 경기 부양효과는 단기적으로 나타나고, 한계생산성감소에 따른 부정적 효과는 장기적으로 나타나는 것이 일반적이다. 그래서 재정지출을 증가시키면 경기는 일시적으로 상승했다가 곧이어 하강으로 돌아선다.


노태우 정권은 1990년도에도 재정지출을 19.3%나 늘렸는데 더욱 심각한 것은 특별회계, 지방재정, 각종 기금과 정부 산하기관 등의 팽창이었다. 정부는 재정팽창이라는 비난을 피하기 위해 각종 편법을 동원했다. 우리 연구소가 개별적으로 조사한 바에 따르면 1987년부터 환란 직전인 1997년까지 국내총생산이 3.1배 증가하는 동안 일반회계는 4.3배 증가하였고, 특별회계는 9.2배, 각종 기금자산은 5.6배, 정부 산하기관의 지출은 52.8배나 증가했다. 이런 사실은 공공부문의 팽창, 특히 정부 산하기관의 팽창이 얼마나 심각했는지를 증명한다. 결국 우리 경제의 성장잠재력과 국제경쟁력은 더욱 크게 약화될 수밖에 없었다. 1997년 외환위기는 이미 이때부터 잉태되었던 것이다.


최악의 경제정책이 된 노태우 정권의 정책

1990년에 대대적인 경기부양조치가 펼쳐지자 성장률은 일시적으로 9.5%까지 상승했다. 그렇지만 성장률과 함께 물가상승률도 8.5%까지 뛰어오르고, 국제수지는 20억 달러의 적자로 급전직하했다. 이런 상태에서도 정부는 1991년에 세출을 21.2%나 증가시켜 경기과열을 부추겼다. 이에 따라 물가는 더욱 불안해져서 소비자물가상승률이 9.3%를 기록했고, 국제수지 적자도 83억 달러로 급증했다. 이런 부작용과 후유증의 영향으로 1992년의 성장률은 5.4%로 떨어지고 말았다, 그래서 소비자물가상승률은 6.3%로 약간 안정되었으며 국제수지 적자도 39억 달러로 줄어들었다.


정리하자면 노태우 정권의 경제정책은 최악이었다고 평가할 수 있다. 김영삼 정권이 초기에 긴축정책과 개혁정책을 펼치지 않았더라면 환란은 더 빨리 찾아왔을지도 몰랐다. 외환위기의 주범은 김영삼 정권으로 낙인찍혀 있지만, 그 책임의 상당 부분은 노태우 정권에 있다고 해야 할 정도다.


그뿐만이 아니다. 노태우 정권의 다른 경제정책들도 실패의 연속이었다. 중요한 경제실책 중 하나는 주식시장의 폭등을 제어하지 못했다는 것이다. 폭등은 폭락을 부르기 마련이다. 그럼에도 노태우 정권은 주식시장이 극도로 위축되자 주식시장을 부양하기 위해 1989년에 ‘12·12조치’를 취했다. 이것은 최악의 실패였다. 주가지수가 불과 3년 만에 5.6배나 폭등했었는데 이런 투기 장세를 유지하겠다는 것은 무모하기 짝이 없는 생각이었던 것이다.



한 편의 드라마가 된 노무현 대통령

우여곡절 많은 참여정부의 시작

‘노짱’ 노무현의 대통령 당선은 말 그대로 한 편의 드라마였다. 민주당 경선이 진행되기 전만 해도 그가 대통령이 되리라 짐작한 이들은 그리 많지 않았다. 하지만 민주화의 성지인 광주에서 노무현은 처음으로 후보 경선에서 1위를 차지하게 된다. 이미 그때부터 대세는 노무현이었다. ‘이인제는 민주당의 적자가 아니다’라는 아젠다와 더불어 ‘행정수도 이전’이라는 핵폭탄급 공약이 먹혀들면서 그의 지지도는 파죽지세로 치솟기 시작했다. 무엇보다도 IMF 외환위기를 성공적으로 극복한 김대중 정부의 업적을 그대로 물려받았다는 점에서 더할 수 없이 좋은 여건이었다.


하지만 그의 청와대 생활은 ‘대통령 못해먹겠다’는 푸념처럼 평탄치 못했다. 취임 초 노무현은 많은 국무위원의 반대에도 한나라당이 단독으로 처리한 ‘대북송금 특검법안’을 전격적으로 수용한다. 민주당을 지지했던 사람들에게 이것은 그야말로 ‘충격’이었다. 이 사건은 2000년 6월 김대중이 제1차 남북정상회담을 했을 때 현대그룹이 4억 달러를 몰래 북으로 보낼 수 있도록 당시 박지원 청와대 비서실장이 산업은행을 통해 편의를 제공하면서 발생했다.


이와 관련해 김대중은 ‘잘사는 형이 가난한 동생을 찾아가는데 빈손으로 갈수는 없는 것 아닌가’ ‘남과 북이 화해와 협력의 길을 열 수만 있다면 무슨 일인들 못하겠는가’라며 남북관계 개선을 위해 펼쳤던 일이었음을 피력했다. 당연히 “이 문제가 사법적 심사의 대상이 되어서는 안 된다.”는 입장을 강력히 밝혔던 것이다.


하지만 노무현의 이야기는 이와 달랐다. 특검법 수용을 대통령 거부권을 행사해 막을 수는 있지만 검찰수사까지 막을 수는 없다는 것이다. 이조차 막으려면 당시 행위가 수사의 대상이 아닌 ‘대통령의 통치행위’라고 해야 하는데 그러기 위해서는 김대중이 ‘남북관계를 열기 위해 내가 특단의 조치를 취한 것’이라는 정도의 설명은 국민에게 해줘야 했다는 것이다. 그런데 김대중이 ‘마지막 기자회견에서 4억 달러의 문제를 보고받지 않아 몰랐다’고 하는 바람에 ‘통치행위론’을 내세울 근거가 사라져버렸고 이것저것 들쑤셔질 가능성이 있는 검찰수사보다는 차라리 특검이 낫겠다는 게 자신의 생각이었다고 술회했다.


이 문제로 기존 민주당 사람들과 노무현은 감정의 골이 깊어졌다. 급기야 열린 민주당과 열린우리당은 당을 쪼개기에 이르렀고 헌정사상 최초의 대통령 탄핵 사태에 이르는 우여곡절을 거치게 된다. 그 후 이라크 파병문제와 한미 FTA를 거쳐 한나라당의 ‘대연정’에 이르기까지 노무현의 정치적 스탠스는 지지자들조차 헷갈려 했다. 그러나 지지자들이 그에게 등을 돌린 결정적인 이유는 경제정책의 실패였다. 한때 그는 야당으로부터 ‘경포대’라는 비아냥을 들어야 했다. ‘경제를 포기한 대통령’이라는 뜻이다.


물론 IMF 사태를 불러온 한나라당이 그런 주장을 한다는 것은 어불성설이었지만 국가부도 사태라는 질곡에서 이룩한 김대중 정부의 경제성적과 비교하면 보수언론들의 집중공격에 시달릴 만했다. 집권 기간 5년 평균성장률이 4.3%에 머물러 김대중 정부의 5%에도 미치지 못했고, IMF 위기로 큰 폭의 마이너스 성장을 했던 98년을 뺀 평균성장률 7.7%에는 턱없이 모자란 탓이다. 또한 서민들의 가장 큰 희망사항이었던 내 집 마련의 꿈이 부동산가격 폭등으로 한순간에 물거품이 돼버린 것도 한 원인이었다.


‘경포대’와 ‘잃어버린 10년’

너무도 아쉽고 안타깝다. 그는 성공한 대통령이 될 수 있었다. 역대 어느 대통령보다 정치적 문제에서 자유로웠고 그 어떤 대통령보다 많은 국민으로부터 실질적 지지를 받았다. 하지만 입지전적 인물로 많은 서민에게 꿈과 희망을 주던 그의 갑작스런 서거 배경에는 그를 지지했던 사람들의 등돌림이 있었고 또다시 그 배경에는 경제정책의 실패가 자리잡고 있었다.


이는 분명한 사실이다. 한나라당 이명박 정부가 747로 불리는 ‘경제살리기’에 올인해 집권했다는 것을 직시해야 한다. 그의 죽음 못지않게 안타까운 사실은 민족 최대의 수난이라는 IMF 환란을 제공한 한나라당에게 ‘잃어버린 10년’이라는, 경제에 무능한 진보 세력이라는 소리를 듣고 있다는 사실이다.


참여정부가 도대체 무엇 때문에 ‘경포대’, ‘잃어버린 10년’이라는 소리를 듣게 된 것인지 왜 김대중 정부보다 저조한 성장률을 달성하게 됐는지 어떠한 경제정책에서 실패했는지 먼저 그것부터 따져보기로 하자.


참여정부는 김대중 정권으로부터 최강의 국제경쟁력과 근래 최고의 성장 잠재력을 물려받았다. 실제로 김대중 정부 집권 말기인 2002년 성장률은 7.2%에 달했다. 소비자물가는 2.8%에 불과했고, 경상수지는 54억 달러의 흑자를 기록했다. 따라서 노무현 정부가 출범하던 때의 잠재성장률은 최소한 7%는 넘었다고 유추할 수 있다. 잠재성장률이 한 나라의 경제가 물가상승이나 국제수지 적자 등 경제적 부작용 없이 달성할 수 있는 최대의 성장률을 의미한다고 할 때 당시 7% 성장률은 얼마든지 지속 가능한 수준이었다.


그런데 왜 참여정부가 집권하는 동안의 평균성장률은 4.3%에 머물렀을까? 무엇보다도 우리 경제의 잠재성장률이 7%를 넘는다는 사실을 몰랐다는 게 가장 큰 문제였다. 우리 경제의 건강성과 활동성이 과거 어느 때보다 양호함에도 정부는 곧 중병이 걸릴 것처럼 잘못 인식했다. 그래서 쓸데없는 독한 약을 처방했고, 여기저기 불필요한 곳을 수술하려고 했다. 가계 부채와 신용불량자 문제를 성급하게 해결하려고 했던 것은 그런 대표적인 사례이며 가장 큰 경제실책 중 하나이다.



경제 대통령? 이명박 대통령

경제 대통령이 내놓은 경제정책의 성적은?

이명박 정권은 ‘경제를 제발 살려달라’는 국민의 바람을 업고 출범했다. 노무현 정권이 당시까지 역대 최악의 실적인 4.3%의 연평균성장률을 기록했고 이에 따라 국민의 경제적 고통이 극심했기에 ‘연평균 7% 성장, 국민소득 4만 달러, 세계 7대 경제대국’을 상징하는 ‘747’ 선거공약은 국민을 열광시키기에 충분했다. 설령 범법을 저질렀고 탈세를 했고 병역기피를 했어도 좋으니 경제만 살려달라는 것이 국민의 간절한 염원이었던 것이다.


그러나 이명박 정권 4년의 경제성적표는 연평균성장률이 3% 초반에 불과하여 초라하기 짝이 없다. 이 실적은 무능하다던 노무현 정권의 연평균 성장률보다 무려 1% 이상 낮다. 역대 최악의 실적을 간단하게 갱신한 것이다. 이명박 정권은 글로벌 금융위기가 그러한 처참한 결과를 낳았다고 호도했지만 이것은 진실이 아니다.


우리나라와 똑같은 경제상황에서 중국은 매년 9~10%의 성장률을 기록했다는 사실이 그것을 결정적으로 증명한다. 설령 글로벌 금융위기가 우리 경제에 타격을 줬다고 치더라도 3% 초반에 불과한 연평균성장률은 변명의 여지가 없다. 단군 이래 최악의 난리라던 ‘환란’을 겪었던 국민의 정부는 연평균 5%의 성장률을 기록했기 때문이다.


하지만 최악의 경제실적을 기록했다는 사실보다 우리 경제의 미래를 위해 더욱 중요하게 여겨야 할 것이 따로 있다. 바로 ‘거짓이 진실로 둔갑한 거짓 신화가 얼마나 무서운 결과를 낳는가’이다. 실제로 이명박 정권은 박정희 정권에서 이미 여러 차례 실패했던 정책을 성공한 정책으로 잘못 알고 반복했고, 그 결과는 처참했다.


이것은 이명박 정권만의 문제는 아니었다. 이미 1982년에 겪었던 외환위기도, 1997년에 겪었던 외환위기도 박정희 정권의 정책실패를 반복했기 때문에 발생했다. 간단히 말해 이명박 정권은 ‘실패한 정책이 성공한 정책으로 둔갑했던 거짓 신화’의 최대 피해자였던 것이다.


더욱이 김대중 정권의 성공했던 정책을 실패한 것으로 잘못 믿고 멀리 했으니, 그 결과는 역대 정권 중 최악의 경제성적으로 나타낼 수밖에 없었고, 국민의 경제적 고통은 더욱 처참할 수밖에 없다.



우리 경제를 살릴 미래 대통령

대한민국 경제는 절망적인가?

아무리 둘러봐도 우리 경제가 낙관적이라는 얘기는 좀처럼 듣기 어렵다. 비관적이라는 얘기들만 난무하고, 절망적인 분위기만 팽배해 있다. 진짜로 우리 경제가 그렇게 심각하고 비관적이고 절망적일까? 우리 경제의 현주소를 정확하게 파악해야 향후의 흐름을 가늠하고 대책도 마련할 수 있지 않겠는가.


우리 경제가 당면한 문제 중 가장 중요하고 시급한 문제는 가계부채라는 것이 전문가들의 일반적인 견해다. 심지어 ‘2010년 가계부채가 가처분소득의 155% 수준으로 미국에서 서브프라임 사태가 터졌을 때의 138%보다 훨씬 더 높다’는 주장까지 등장했다. 진짜로 그렇다면 큰일 났다. 장차 집값과 주식가격은 폭락하고, 실업률은 10%를 넘어설 것이다. 그러나 걱정하지 마시라. 그런 일은 벌어지지 않을 것이다. 가계부채비율을 계산하는 방법이 틀렸기 때문이다. 가계부채비율은 공인된 통계로 계산해야 한다. 한국은행은 가처분소득이 포함된 국민계정과 가계부채를 뜻하는 가계 신용을 발표하는데, 이 공식적인 통계로 가계부채비율을 계산하면 약 80%에도 미치지 못한다. 아직은 심각하게 걱정할 수준은 아니다.


가계부채문제가 언제부터 현안으로 등장했는지 살펴보면 이 문제가 얼마나 심각한지 알 수 있다. 가계부채문제는 2002년부터 본격적으로 제기됐는데 당시 가계부채비율은 40%대에 불과했다. 겨우 40%대였을 때부터 가계부채가 우리 경제를 궤멸로 몰아갈지도 모른다고 걱정했다는 말이다.


이런 어이없는 걱정은 심각한 사태를 빚었다. 가계부채가 심각하다고 판단한 노무현 정권은 가계신용을 극단적으로 억제하는 정책을 펼쳤다. 가계신용도 일종의 통화인데 이걸 억제했으니 경기는 후퇴할 수밖에 없었고, 성장률은 1년 만에 7.2%에서 2.8%로 뚝 떨어지고 말았다. 경기가 그렇게 하강하면 소비자는 지갑을 닫고 기업은 고용과 투자를 줄인다. 그런데 당시 기업들은 사상 최고의 이익을 거두고 있었다. 돈이 계속 쌓이고 있었던 것이다. 경기가 부진해지자 이 돈들은 부동산시장으로 흘러들었다. 부동산가격이 매년 치솟자 너도나도 은행에서 대출을 받아 아파트도 사고 토지도 사들였다. 그 바람에 가계부채비율은 더 빠르게 증가하여 40%에서 70%대 가까이로 급상승했다. 가계부채를 줄이겠다는 정책이 오히려 더 크게 늘리고 만 것이다.


우리 경제를 살릴 방법은 무엇인가

첫째, 우리 경제는 자기실현성이 아주 높다는 사실을 유의해야 한다. 많은 국민이 경기가 나빠질 것이라고 믿으면 실제로 경기가 나빠진다는 것이다. 경기가 나빠진다고 믿으면 소비자는 지갑을 닫고, 기업은 투자와 고용을 줄인다. 그래서 선진국의 경제전문가들은 경제용어의 선택에 신중을 가한다. 반면에 우리나라에서는 폭락, 붕괴, 재앙, 공황, 파국, 위기 등 온갖 자극적인 용어들이 총동원된다. 이것은 경제전문가들의 사회적 채무를 잊은 짓이다. 경제의 자기실현성이 높다는 사실을 잘 알고 있는 경제전문가라면 자극적인 용어는 최대한 자제해야 한다.


둘째, 정책은 악순환이 아니라 반드시 선순환을 시켜야 한다. 우리나라는 악순환 정책으로 가계부채문제를 풀려고 했고, 그 결과는 아주 나빴다. 반면에 미국은 가계부채문제를 경기를 호전시켜서 해결했다. 이게 바로 선순환 정책이다. 경기도 살리고 가계부채 부담도 줄였던 것이다.


셋째, 만질수록 커지는 게 있다는 사실을 유념해야 한다. 미국에서는 인종문제가 이목을 집중시킬 것이 뻔함에도 이 문제를 제기하는 전문가는 찾기 어렵다. 인종문제는 거론할수록 더욱 악화되는 특성을 가졌다는 사실을 그동안의 역사적 경험을 통해 충분히 알게 되었기 때문이다. 빈부격차나 양극화, 가계부채문제도 마찬가지다. 거론하면 할수록 악화되는 특성이 있다.


넷째, 경제정책은 정확한 현상을 바탕으로 이뤄져야 한다. 어떤 사태가 발생했을 때 장차 어디로 발전할지를 가늠하고 싶다면 먼저 원인부터 파악해야 한다. 원인을 알아야 전개과정을 알 수 있고, 현재의 상황이 어떤지를 짐작할 수 있으며, 현 상황이 장차 어디로 발전할지 가늠이라도 할 수 있다.


뛰어난 축구선수는 체력을 꾸준히 단련하고, 공 다루는 기술을 쉬지 않고 연마하며, 경기감각을 꾸준히 유지한다. 국가 경제도 마찬가지다. 축구 선수의 체력은 성장잠재력이고, 기술은 국제경쟁력이며, 경기감각은 성장의 지속성 확보라고 할 수 있다. 다시 말해 성장잠재력과 국제경쟁력 그리고 성장의 지속성 확보가 경제를 살려낼 첩경인 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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