직장 내 살인사건

   
헤너 코테·크리스티안 룬처(역자: 박종대, 해제: 표창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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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2�� 06��



■ 책 소개
무엇이 일터에서 살인을 불러오는가!


업무 스트레스와 승진, 인간관계에서 비롯된 상하 간의 갈등 등으로 빚어진 직장 내 충격적인 범죄와 복수의순간들을 치밀하게 파헤친 책으로, 위험한 공간으로 변해 버린 직장과 노동 시장의 실태를 낱낱이 고발하고, 그 대안을모색한다.

소규모 작업장과 서비스 기업, 공장, 신문사편집국 등 다양한 영역에서 활동하고 있는 사람들이 미래가 보이지 않는 절망적 상황에서 실업자가 되고, 해고와 생계 불안에 맞서 싸우고, 부당한노동 조건과 동료, 상사에게 저항하는 모습들을 생생하게 보여준다. 이를 통해 일의 조건이나 일자리에 대한 걱정이 범죄의 직접적인 동기가 될 수있음을 증명하고, 어떤 상황에서 살인이 저질러졌으며, 그 책임은 누구에게 있는지 분석하여 근본적인 해결책을제시하였다.

경찰대학 표창원 교수는 이 책의 해제에서“허망하기 이를 데 없는 ‘무한 경쟁’의 환상과 성공 신화에서 벗어나 ‘지속 가능’과 ‘공존 공생’의 원칙을 되찾는 사회 공동체 정신의 회복과부활이 매우 중요하다”며, “이 책에 담긴 의미와 취지, 타산지석으로 삼을 만한 사연들이 많은 한국인에게 공유되고 공감되길 바란다.”고조언했다.

■ 저자 
헤너코테(Henner Kotte)
 - 헤너 코테는 범죄 관련 다큐멘터리 작가. 독일 드레스덴에서 자랐고 라이프치히에서 살고 있다.라이프치히와 모스크바, 슈투트가르트에서 독문학을 공부했다. 1997년에 단편 「택시」로 ‘MDR-문학상’(중부독일방송 문학상)을 받았으며, 범죄단편소설 「뺑소니」는 영화로 만들어져 드레스덴 단편영화제에서 입상하고 독일 TV에서도 방영되었다. 2001년부터 범죄문화 관련 인기 토크쇼<검은 시리즈&&의 진행을 맡고 있으며, 방송, 영화, 무대, 저술 영역에서 활발히 활동하고 있다. 주요 작품으로는『라이프치히스케치』『여우의 눈』『나무 속의 살인』 등이 있다.

크리스티안 룬처(Christian Lunzer) - 1943년에 태어나 오스트리아 빈에서범죄와 관련된 글을 쓰고 있다. 주요 작품으로 『빈 1950년』『여성 살인자들과 그 동기』『죽음의 부드러운 손길』등이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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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역자 박종대

성균관대학교에서 독어독문학과와 대학원을 졸업하고 독일 쾰른에서문학과 철학을 공부했다. 예기치 못한 삶의 파고에 휩쓸려 우연히 번역계로 흘러들었다가 번역이 평생의 업이 되었다. 사람이건 사건이건 늘 표층보다이면에 관심이 많고, 어떻게 사는 것이 진정 자기를 위하는 길인지 고민하는 ‘제대로 된’ 이기주의자가 꿈이다. 네이버캐스트 ‘인물과 역사’에글을 쓰고 있다. 역서로 『위대한 패배자』『만들어진 승리자들』『바르톨로메는 개가 아니다』『귀향』『행복』『임페리움』『목매달린 여우의 숲』등 80여권이 있다.

■ 해제표창원
경찰관 출신으로 연쇄 살인, 엽기 범죄 등 각종 범죄와 살인자들의 심리를 날카롭게 분석해 내는 걸로 유명한 한국의‘프로파일러’이다. 현재 경찰대학에서 범죄학, 범죄 심리학, 피해자학 등을 강의하고 있다. 1989년 경찰대학을 졸업하고 1990년∼1991년경기도 화성경찰서, 1991년∼1992년 경기도 부천경찰서 형사과, 1992년∼1993년 경기 지방경찰청 외사계에서 근무했다. 1993년부터4년간 학업에 매진하여 영국 Exeter 대학교 석사 및 박사 학위(경찰학, 범죄학)를 받았다. 경찰청 강력범죄 분석팀(VICAT) 자문위원,경찰청 미제 사건 분석 자문위원, 범죄 수사 연구회 지도위원을 역임했으며 미국 샘휴스턴 주립대학교 형사사법대학 객원 교수, 한국심리학회 범죄심리사 과정 강사, 경찰 수사 보안 연구소 범죄학 및 범죄 심리학 강사, 법무연수원 범죄학 및 범죄 심리학 강사로 활발한 강의 활동을 해왔으며아시아 경찰학회 총무이사 및 회장을 지냈다. 그는 지금도 어디에선가 이유 없는 분노와 복수심에 빠져 있는 잠재적 연쇄 살인범들이 우리 사회 각기능의 제역할로 인해 상처를 치유받고 교훈을 얻고, 행동이 교정되어 무모하고 비극적인 공격의도를 꺾는 데 기여하고 싶다는 생각을 바탕으로 관련된범죄 관련 저서들을 집필 중이다. 저서로 『한국의 연쇄 살인』『숨겨진 심리학』『EBS지식 프라임』 등이 있다.
■ 차례
머리말 
1부 무엇이 일터에서 살인을 불러오는가 
1.그는 왜 그를 죽였는가 
2. 동료를 쫓아낸 노동자, 그 끝은? 
3. 진급에 실패한 장교의 선택 
4. 감추어진 진실, 입을열지 않는 갈등 
5. 철학자를 증오한 철학자 
6. 고난을 극복한 노동 운동가의 마침표 
7. 경쟁자에서 고용인으로 전락한인생 
8. 돈의 유혹을 견딜 수 있을까 
9. 잔혹한 아버지의 폭력적인 가족 경영 
10. 아무도 주목하지 않는 노동 착취

2부 직업을 유혹하는 사람들
11. 직업을 찾는 여성들, 그러나 돌아오지 않는 여성들 
12. 너무 많은 사람, 너무 부족한 일자리
13. 성폭력이 불러온 비극 
14. 모두 17명, 오늘은 이것으로 충분해 

해제





직장 내 살인사건


무엇이 일터에서 살인을 불러오는가

그는 왜 그를 죽였는가 – 살인을 통해서 살펴본 직업 세계의 실체

직장 세계는 예전에 비해 한층 냉정하고 가혹해졌다. 실업자 수는 끊임없이 증가하고, 점점 더 많은 사람들이 파트타임이나 비정규직, 저임금 일자리로 내몰린다. 이른바 1유로 일자리(1 Euro Jobs)로 대변되는 워킹푸어, 즉 아무리 열심히 일해도 형편이 나아지지 않는 근로 빈곤층도 폭발적으로 늘고 있다. 2005년 12월 오스트리아 노동조합 연맹은 새 조합원을 모집하면서 남극에서 쫓겨나는 펭귄들에 빗대 이런 대형 현수막을 내걸었다.


"여러분의 일터가 더 추워지면 우리에게 오십시오."


반면 사용자 측의 노동법 위반 사례는 실업자 수에 비례해 증가하고 있다. 오스트리아 노동청 자료에 따르면 2006년 초 오스트리아에서는 1만 9000건의 소송이 계류 중이고, 재판 건수는 해마다 40퍼센트씩 증가 추세를 보이고 있다. 그러나 이는 빙산의 일각일 뿐이다. 많은 노동자들은 울며 겨자 먹기 식으로 위법한 조건을 받아들이고, 법적 소송은 피하려 한다. 회사를 그만두고 새 일자리를 찾을 때 불이익을 받거나 보복 조치를 당할 우려 때문이다. 이것이 근거 없는 우려가 아니라는 것은 빈 경영 대학의 연구로 밝혀졌다. 실제로 고용주들은 막후에서 서로 긴밀하게 연결되어 있다. 게다가 오스트리아 연방 정부는 근로자를 해고할 때 사업장 내에서 이루어진 교육 및 훈련 과정에 들어간 비용을 근로자에게 청구할 수 있는 법까지 비밀리에 통과시켰다. 이로써 근로자는 노예처럼 족쇄에 묶이고, 회사는 안정적으로 인적 자본을 확보할 수 있게 되었다.


지난 몇 년간 실적이 좋았던 회사들의 경우를 살펴보자. 수년 간 약정 고객들의 돈으로 성공한 도이체텔레콤은 2005년 막대한 수익을 올리고도 일자리 3만 1000개를 감축했다. 같은 시기 도이체방크 역시 무척 훌륭한 실적을 발표한 뒤 근로자 6400명에 대한 감원 계획을 세웠다. 알리안츠생명은 8000명, 헹켈은 3000명, IBM은 고숙련 프로그래머 620명을 해고했다. 또한 AEG를 매입한 엘렉트로룩스는 뉘른베르크 AEG 공장을 폐쇄해 일자리 1750개를 줄였다. 그뿐이 아니다. 수년 전 오스트리아 트라이스키르헨 공장을 폐쇄한 콘티넨탈오토모티브는 하노버 공장까지 폐쇄할 계획이다. 그러면 일자리 320개가 또다시 사라진다. 이런 예는 헤아릴 수 없이 많고, 일자리는 계속 사라질 것이다.


기업의 경제적 성공이 오히려 그 성공을 함께 일구어 낸 노동자들에게는 해고로 돌아왔다. 문제는 이것이 자연스러운 현상으로 받아들여지고, 그에 대한 대책을 마련하려는 노력도, 사회적 토론도 없다는 사실이다. 한때는 삶의 의미가 되고 생존을 보장했던 일자리가 이제는 귀하고 드문 자산이 되었을 뿐 아니라 심지어 살인의 동기가 되기도 한다.


직장에서의 모빙(mobbing), 즉 집단 따돌림은 몇 년 전부터 우리의 직장 세계를 표현하는 핵심 개념이 되었다. 이제는 만인이 만인을 상대로 싸우는 시대다. 이런 현상은 회사나 공장뿐 아니라 연구소와 대학, 병원, 언론사, 극장, 박물관 할 것 없이 비일비재하다. 일터 내에서 피고용자들끼리의 분쟁인 셈이다. 그것도 단순히 출세나 남보다 먼저 치고 올라가기 위해서가 아니라 훨씬 기본적이고 유치하기까지 한 이유, 즉 일자리를 지키고 자신과 가족의 생계에 필요한 수입을 확보하기 위해 그렇게 싸운다.


빈곤층으로의 추락은 쉽고 빠르다. 몇 가지 전제 조건만 갖추어지면 된다. 장기간의 질병, 세계화의 일환으로 추진되는 직장 폐쇄, 기업의 이윤 상승을 위한 구조 조정, 그로 인한 일자리 상실이 노동자들을 빈곤층으로 내몬다. 거기다 부양가족까지 많으면 최악이다. 평균적인 소득을 올리는 사람이나 혼자 가족을 부양하는 사람은 미성년 자녀가 2명만 있어도 빈곤층의 경계선에 닿아 있다. 생계에 대한 불안감은 당연한 일이 된다. 그것은 가장뿐 아니라 아내와 자녀들에게도 마찬가지다. 더구나 경쟁에서 탈락한 실패자로, 영원한 패배자로 낙인찍힐지 모른다는 압박감과 아내와 자녀들에게 필요한 것들을 마련해 주지 못할 거라는 부담감까지 더해진다.


미래에도 나아질 희망이 보이지 않으면 절망은 쉽게 공격적으로 바뀐다. 오늘날 가족 내에서 벌어지는 살인 행위는 모든 살인 사건의 절반에 이른다. 그중 상당수는 자신을 잘 표현하지 못하는 소통 능력의 부재와 생계에 대한 불안, 일과 소득의 문제, 그로 인해 야기된 가족 간의 불안한 관계가 살인 동기들이다.


진급에 실패한 장교의 선택 – 호프리히터의 독살 사건

1909년 11월 17일 오후, 하인 안톤 토몰라는 장에 갔다가 빈 3구역 하인부르거 거리의 주인집으로 막 돌아왔다. 주인 리하르트 마더 대위의 저녁 식사를 위한 찬거리를 사 가지고 오는 길이었다. 집에 도착해 계단에 올라섰을 때 어디선가 도와 달라고 외치는 낮은 목소리와 신음, 거친 숨소리가 어렴풋이 들려왔다. 안톤은 서둘러 계단을 올라가 3층 주인집으로 들어갔다. 닫혀 있지 않은 현관문 뒤에 마더 대위가 고통스러운 모습으로 쓰러져 있었다.


안톤은 즉시 마더 대위를 거실 소파에 누이고 의사를 불렀다. 그러나 이미 너무 늦었다. 급히 달려온 응급 의사는 대위의 죽음만 확인했을 뿐 더 이상 손쓸 일이 없었다.


국방부에서 근무하는 마더 대위는 기밀 취급자였기에 군 당국에 즉시 사망 소식이 전해졌다. 쿠체라 대령이 지휘하는 특별 수사팀이 현장에 급파되었다. 그러나 군사 기밀과 관련된 사항은 발견되지 않았고, 갑작스러운 죽음을 설명할 어떤 단서도 보이지 않았다. 요즘 들어 특별히 기분이 나쁘거나 우울해 한 적도 없었다. 사실 그럴 이유가 전혀 없었다. 오히려 마더 대위는 요즘 들어 사람들의 시샘을 살 정도로 잘나갔다. 11월 1일 날짜로 참모 본부 대위로 진급한 것이다.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에서는 일반 군인이 대다수 민간인보다 사회적 신분이 훨씬 높았다면, 참모 본부에 소속된 군인은 일반 군인보다 몇 단계는 더 높았다. 고급 장교로 진급하는 길도 오직 참모 본부 장교들에게만 열려 있었다. 따라서 참모 본부의 일원이 되는 것은 모든 야심 있는 장교들의 가장 절실한 목표였다.


그러나 그 길로 들어서는 것은 쉽지 않았다. 실력도 실력이지만 영향력 있는 사람들과 끈이 연결되어 있어야 하고 행운도 따라야 했다. 대개 장교 후보생들은 어려운 입학시험을 거쳐 사관학교에 들어가면 4년 동안 사생활을 완전히 포기한 채 혹독한 수업을 받아야 했다. 그런 다음 졸업 시험을 통해 성적순으로 분류되었고, 가장 좋은 성적을 거둔 장교들에게만 진급의 기회가 주어졌다. 물론 출신과 후원자도 어느 정도 영향을 끼쳤다.


진급하지 못한 장교들은 그동안의 고생과 수고가 모두 물거품으로 돌아간다. 그들은 일반 장교 신분이 되어 굴욕과 수치심을 안고 야전 부대로 내려갔다. 진급 대상자 명단은 대개 10월 말에 발표되었는데, 그 명단에 이름이 적히지 않은 장교들은 애당초 기회가 없었다. 그러다 보니 진급자 명단에서 아깝게 탈락한 장교들은 더더욱 마음이 쓰라렸다. 물론 그들에게는 아주 희박하나마 하나의 가능성이 남아 있었다. 진급 대상자들 가운데 누군가 질병이나 사망으로 참모 본부를 떠나야 할 경우 다음 순번이 그 자리를 메웠던 것이다.


마더 대위는 그런 요행을 기대할 필요가 없었다. 1905년 사관학교 졸업생 110명 가운데 성적이 30등 안에 들어 졸업과 동시에 국방부에 배정되었기 때문이다. 그의 앞날은 더없이 창창했고, 군에서 출세할 가능성도 활짝 열려 있었다. 갑작스러운 죽음을 불러올 정도로 몸이 허약하지도 않았고 지병도 없었다.


보도에 따르면, 지극히 교활한 방법으로 마더 대위를 독살하고 다른 아홉 명에게도 독살을 시도한 범인은 아돌프 호프리히터였다. 린츠 제4보병 연대 중위로 1905년에 졸업한 사관생도들 중에서 진급하지 못한 부류에 속했다. 동료들은 그를 지적이면서도 무척 야심이 큰 친구로 기억했다.


범행 동기는 출세에 대한 야망이었다. 마더 대위의 죽음으로 참모 본부 안에 공석이 생기면 자신이 진급할 수 있으리라 기대한 것이다. 하지만 개인적 욕구를 채우기 위해서가 아니라 참모 본부에 소속되어 아내에게 안정된 생활 기반을 마련해 주길 위해서라고 실토했다.


감추어진 진실, 입을 열지 않는 갈등 – 스위스 켄토날방크 살인 사건

2004년 7월 5일 월요일 오전 7시 50분이었다. 취리히 켄토날방크의 테시너플라츠 지점에서 재무 설계 및 상담 팀 간부 회의가 열렸다. 매일 열리는 정례 회의였다. 회의가 시작되고 10분쯤 지났을 때였다. 마찬가지로 이른 시간에 출근한 다른 부서의 직원들은 재무 팀의 한 직원이 3층 회의실로 올라가는 것을 보았다. 나중의 경찰 발표에 따르면 그는 당시 휴가 중이었으며 평상복을 입고 있었다. 아무리 휴가 중이어도 은행에 올 때는 항상 정장을 입어야 한다는 은행 복무규정에 맞지 않는 차림새였다.


회의실 앞에서 잠시 망설이던 그는 8시에 회의실로 들어가 한마디 말도 없이 바로 총을 꺼내서는 회의를 주재하는 부장을 쏘았다. 부장은 머리에 총을 맞고 책상 위에 쓰러졌다. 범인이 노린 차장 한 명은 옆 사무실로 들어가 숨었고, 다른 사람은 복도로 달아났다. 범인은 그를 쫓아가면서 두 발을 발사해 머리를 맞혔다. 그 뒤로 총은 또 발사되지 않았고 범인은 남자를 뒤쫓는 것을 포기했다.


첫 신고가 접수된 것은 8시 6분이었다. 신고자들은 너무 놀라고 당황해서 상황을 자세히 설명할 수 없었고 경찰 역시 사건 경위를 제대로 파악하지 못했다.


방패와 헬멧, 방탄조끼로 무장한 경찰들이 1층부터 건물 수색에 나섰다. 건물 1층의 수색 작업이 끝난 직후 4층에서 총성이 들렸다. 경찰은 총소리가 난 사무실 문을 부수고 안으로 들어가 평상복을 입은 한 남자를 발견했다. 범인으로 추정되는 남자가 손에 총을 들고 책상 위에 고꾸라져 있었다. 총으로 머리를 쏘아 스스로 목숨을 끊은 것이다. 병원으로 옮긴 피해자 두 명도 숨을 거두었다. 부장은 43세였고, 차장은 그보다 약간 나이가 많았는데 둘 다 두 아이의 아버지였다.


이 사건은 당연히 세간의 큰 주목을 받았다. 경찰은 즉시 언론 브리핑을 결정했다. 대변인 마르코 코테시는 범인이 피해자들과 같은 부서의 직원이고, 56세의 기혼자로 두 아이의 아버지라고 발표했다. 범행 동기는 지난 몇 주간 불거진 직무상의 갈등으로 추정했다.


경찰은 범인의 집에서 가족들에게 남긴 지극히 사적인 내용의 짧은 편지를 발견했다. 그동안 있었던 일과 그렇게 될 수밖에 없는 것에 안타까운 마음을 드러내면서도 구체적인 범행 이유는 밝히지 않았다. 사생활을 이유로 경찰은 편지 전문은 공개하지 않았다.


담당 검사 토마스 모더는 은행 내에서 긴장 관계가 있었고, 범인이 직장 생활에 만족하지 않은 것으로 판단된다고 밝혔다. 그러면서도 그것이 특별한 긴장 관계가 아니라 직장 생활에서 으레 발생할 수 있고, 외부인이 보면 별로 대수롭지 않은 갈등이라고 했다. 게다가 거기엔 개인적인 문제가 덧붙여 있을 것이라는 말로 직장 내의 갈등을 완곡하게 완화시켰다.


은행은 지금까지의 명성을 지키고 향후 안정된 영업을 위해서라도 모든 방법을 동원해 범행 동기를 다른 방향으로 돌려야 했다. 투자 상담을 하는 민감한 부서에서 살인까지 불러오는 갈등이 존재해서는 안 되기 때문이다. 게다가 그것은 한 지점이나 한 은행의 문제가 아니라 은행업으로 큰 수익과 신뢰를 쌓아 온 스위스라는 국가와 관련된 문제이기도 했다. 그런 이유로 은행 측 입장과 논거는 스위스 최고위층으로부터 확고한 지원을 받았다.


첫날 언론 브리핑 이후에는 직장 내 갈등이 더 이상 범행 동기로 거론되지 않았고, 휴가 중에 발생한 범인의 사적인 문제에 초점을 맞추기 시작했다. 그것은 해당 은행뿐 아니라 전 은행업계의 이해와도 일치했다.


직장 내에 여러 어려움과 갈등이 있다 해서 그것이 스위스에서, 그것도 스위스 은행에서 살해 동기로 작용해서는 안 된다는 것이 은행 업계와 정부의 공통된 입장이었다. 그래서 3명의 희생자를 낸 직장 내 갈등에 대해서는 더 이상 자세히 알려진 사실이 없다. 검찰은 처음에는 이 사건을 한 치의 의문도 없이 파헤치겠다고 호언장담했으나 결국 꼬리를 내리고 말았다.


철학자를 증오한 철학자 – 슐리크와 한스 넬뵈크 사건

1936년 6월 22일 월요일, 화창한 초여름이었다. 대학에서는 여름 학기 마지막 수업이 열리거나 막 첫 시험이 치러지고 있었다. 총소리가 네 번 연속 울리더니 곧이어 흥분한 남자 목소리가 들렸다.


"넌 이제 끝장이야, 이 더러운 개새끼!"


구내 청소부로 일하는 마리 핀더는 깜짝 놀라 물통과 빗자루를 내려놓고 계단으로 올라갔다. 남자 하나가 뒤틀린 자세로 계단에 쓰러져 있었다. 강의실에서 뛰어나온 학생들이 대학 경비원들과 함께 피를 흘리는 남자를 위층 학장실로 옮겼다. 그들 옆에는 안경을 낀 젊은 남자가 총을 든 팔을 축 늘어뜨린 채 돌처럼 굳은 표정으로 우두커니 서 있었다.


몇 분 뒤 구급차가 도착했으나 피해자는 이미 숨이 끊어진 상태였다. 현장에 머무르다가 경비원 두 명에게 붙잡힌 범인은 아무 저항 없이 학교 관리실로 인도되었다. 이름은 한스 넬뵈크, 생년월일 1903년 5월 11일, 학력은 철학 박사였다. 직업은 없는 상태였다.


한스는 범행 동기를 담담히 털어놓았다. 슐리크 교수가 지난 몇 년 동안 자신이 일자리를 얻지 못하도록 계속 방해하여, 자신의 삶과 미래를 파괴했기에 죽일 수밖에 없다는 것이다.


이 사건은 세간의 큰 주목을 받았고, 피살자의 유명세 때문에 세계적으로도 보도가 퍼져 나갔다. 1922년부터 빈 대학에서 학생들을 가르친 모리츠 슐리크 교수는 철학 연구소 회원으로 대외적으로도 유명한 인물이었다.


한스 넬뵈크는 특별히 내세울 것 없는 지극히 평범한 가정에서 태어났다. 그는 대학에 다닐 때도 김나지움과 마찬가지로 과외로 생계를 이어가야 했다. 집에서는 학자금을 기대할 수 없는 상황이었다. 그는 빈 대학 철학 연구소에서 라이닝거 교수와 슐리크 교수의 강의를 들었고, 1931년 3월에 슐리크 밑에서 빈 학파의 중심 분야 중 하나인 논리학 논문으로 박사 학위를 받았다.


그 후 문제가 불거졌다. 학위 직후 지도 교수 슐리크와 불화가 생긴 것이다. 그 이유는 지금까지 명쾌하게 밝혀지지 않았다. 한 가지 분명한 것은 한스가 원래 박사 학위를 마치면 중학교 교직 시험에 응할 계획이었는데 그 시험을 치지 못할 상황이었다는 사실이다. 사이가 틀어진 슐리크 교수가 채점 위원이었기 때문이다. 한스는 공부한 전공으로 생계를 이어갈 가능성을 박탈당한 셈이었다.


이후 한스는 계속 과외와 대학 예비 과정 학생들을 가르치면서 힘겹게 생계를 이어갔다. 그러다가 1935년 가을, 갑자기 그의 인생에 구름 사이로 햇빛이 반짝 비치는 순간이 찾아왔다. 철학과 대학 동창인 레오 가브리엘이 빈 시민 대학의 강의 자리를 주선한 것이다.


그런데 결정이 계속 미루어지더니 1936년 1월에 최종 거절 통보가 날아왔다. 그 통지서에 서명한 인물은 사회주의 계열의 노동조합 일원으로 시민 교육 분야를 맡은 빅토로 마테이카였다. 훗날 제 2차 세계 대전 뒤에는 공산당 당원으로 빈 시의회 초대 문화 위원에 위촉된 인물이다. 한스는 이번에도 사회 민주주의 진영과 밀접한 관계를 유지하고 있는 슐리크가 손을 썼다고 확신했다. 가브리엘도 그 사실을 부정하지 않았다. 물론 시민 대학 운영진 측에서는 부인했다. 증인으로 나선 마테이카는 한스의 정신병 전력 때문에 거절 결정을 내렸다고 주장했다. 한스에게는 어차피 상관없는 일이었다. 마테이카에게 그런 결정을 내리도록 부추긴 사람이 슐리크라는 점은 변하지 않기 때문이었다. 결국 한스에게는 취업의 가능성이 모두 사라졌고 더 이상 미래도 없었다. 슐리크 교수가 살아 있는 동안에는.


유명 철학자 슐리크 교수가 정말 직위를 이용해 제자의 삶과 미래를 송두리째 파괴하려 했는지, 아니면 작은 계기에서 시작된 편견이 어느 순간 한스의 머릿속에서 확신으로 변해 가다가 계속되는 우연한 사건들에 의해 사실처럼 굳어졌는지는 확실치 않다. 유명한 피해자에 비해 유명하지 않은 가해자의 목소리는 어차피 잘 들리지 않기 때문이다.



직업을 유혹하는 사람들

모두 17명, 오늘은 이것으로 충분해 – 슈타인호이저 사건

"우리 학교는 귀하가 초래한 결과를 근거로 튀링겐 학교법에 의거해 학교와 귀하 사이의 관계가 오늘부로 끝나게 됨을 알려드립니다."


이는 정당한 절차에 따라 이루어진 공식 편지였다. 교육청이든 해당 고등학교든 이렇게 학교에서 내쫓기는 졸업반 학생에게는 전혀 책임감을 느끼지 않았다. 그러나 퇴학 처분은 해당 학생의 상황을 급격히 변화시켰고, 추락은 엄청났다. 퇴학은 그에게 굴욕감을 안겼을 뿐 아니라 한순간에 그를 고등학교 졸업장도 없는 사회보호 대상자로 만들었다. 그때까지 튀링겐 학교법은 아비투어(대학입학 자격시험)를 통과하지 못하거나 레알슐레(실업계 고등학교)를 졸업하지 못한 12학년 학생들을 학교에서 쫓아냈다. 마치 처음부터 학교를 전혀 다니지 않은 사람처럼.


퇴학당한 학생은 에어푸르트에서 미친 듯이 총을 쏘며 배회했다. 15분 사이에 17명이 희생되었다. 이 사건은 전 세계를 경악에 빠뜨렸다.


사건의 범인 로베르트 슈타인호이저는 별로 눈에 띄지 않는 외모의 19세 청년이었다. 그에겐 미래가 없었다. 슈타인호이저의 경우도 그렇지만 이 책에 소개된 다른 많은 사건들도 미래에 대한 희망의 상실이 밑바닥에 깔려 있다. 삶의 토대를 빼앗겼다는 박탈감, 그에 맞서 아무것도 할 수 없다는 좌절감, 무기력, 굴욕감, 복수심 등의 감정이 분출되었고, 그것들이 살인의 직접적 동기로 작용했다. 그런데도 세상은 그런 사건이 터지면 마치 뜻밖의 일이 터진 양 깜짝 놀라며 고개를 젓는다. 실은 냉혹한 세상이 그들의 손에 폭탄을 쥐어준 사실은 까맣게 잊는다.


클라인슈로트 가족은 살인을 통해서만 폭력적인 아버지와 가혹한 강제 노역에서 빠져나올 수 있다고 생각했고, 베르노 헤네스는 로이코 나우비츠를 죽이는 것 외에는 다른 탈출구를 찾지 못했다. 1919년 상이용사들은 국방부의 연금 삭감 정책으로 삶의 토대가 무너진다고 생각해 폭동을 일으켰고 국방장관이 살해당했다. 레비 변호사와 슐리크, 톰슈케 부부 살인 사건은 빈곤에서 벗어나고픈 욕구에서 비롯되었다. 직업의 미래는 자유의 미래까지 결정하고, 도둑맞은 미래는 파국을 부른다. 결국 범인들은 법정에 섰고, 법에 따라 최고형을 선고받았다.


"미래가 불안한 사람은 현재를 파괴한다."


로베르트 슈타인호이저의 학살이 자행된 뒤 여기저기에서 언급된 말이다. 그런데 이 사태에 유무형의 책임이 있는 자들은 책임을 인정하지 않으려 했다. 그래서 "하늘에서 뚝 떨어진 불행"이라는 말로 간단하게 책임을 회피했다. 살인 동기는 결코 현실과 동떨어져 있지 않다. 에어푸르트에서 발생한 이 엄청난 비극도 마찬가지였다.


"2002년 4월 26일 오전 10시 30분경이었다. 로베르트 슈타인호이저는 스포츠 가방과 길쭉한 다른 가방 하나를 어깨에 메고 구텐베르크 김나지움으로 향했다. 10시 55분에 학교 건물로 들어서 1층 복도 끝의 남자 화장실로 들어갔다. 그곳에서 까만 장갑을 끼고 머리에 검정색 복면을 썼다."


첫 총성이 울린 지 15분이 지난 11시 12분경이었다. 안드레아스 고르스키 경사(41세)가 동료 한 명과 함께 경찰차를 타고 급히 학교에 도착했다. 그는 차에서 내려 방탄조끼를 입었다. 그러나 너무 늦었다. 경찰은 범인이 학교 밖에 있을 거라 생각했지만 슈타인호이저는 학교 안에 있었다. 평소에 사격 클럽에 다니는 그는 2층 창가에서 고르스키 경사를 향해 총을 조준했다. 경사는 등과 목에 치명상을 입고 쓰러졌다. 고르스키 경사가 이날의 마지막 희생자였다. 동료들은 죽은 그를 학교 입구로 옮겼다.


슈타인호이저는 계속 2층을 돌아다녔다. 11시 15분경에 역사 교사 라이너 하이제와 마주쳤다. 그런데 하이제를 보는 순간 살의가 갑자기 사라졌다. 그는 하이제 앞에서 복면을 벗으며 중얼거렸다.


"오늘은 이것으로 충분해."


해제

우리나라에서는 1년 평균 1000∼1300건 정도의 살인 사건이 발생한다. 2004년부터 2008년까지 발생한 살인 사건 통계를 분석하면 40대 남성이 저지른 살인이 34.7%을 차지한다. 1999년∼2003년에 비해 10% 가까이 증가했다. 사건 중 절반가량이 분노 등 감정이나 복수 심리 때문에 발생했다. 40대 남성은 직장, 직업과 떼려야 뗄 수 없는 존재이고, 가장이라는 무거운 책임감을 느끼는 사람들이다. 이들의 살인에는 직·간접적으로 직업이나 직장 생활의 애환이 작용할 수밖에 없는 이유이다.


물론 그렇다고 해서 우리 사회의 모든 실직자나 직장 내 갈등 상황에 처한 사람들이 다 살인을 저지르는 것은 아니다. 당연히 개인차가 있고, 각자의 성격과 심리 문제와 함께 선택이라는 요인이 결정적으로 작용한다. 그렇기 때문에 실직이나 직장 내 갈등이 살인 범죄의 합리화나 정당화 사유로 인정될 수는 없는 것이다.


하지만 그들의 폭력 앞에 희생된 피해자들의 한과 넋을 위해서라도 우리는 더 이상 이러한 악순환의 고리가 커지고 공고해지는 상황을 방관해서는 안 된다. 무엇보다, 허망하기 이를 데 없는 무한 경쟁의 환상과 성공 신화에서 벗어나 지속 가능과 공존 공생의 원칙을 되찾는 사회 공동체 정신의 회복과 부활이 매우 중요하다. 개인주의와 경쟁, 사유 재산을 근간으로 삼는 자본주의의 본산인 유럽이 공동체의 회복을 부르짖으며 상생을 위해 복지와 사회 안전망 확충에 힘을 쏟는 이유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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