저자는 1990년대 후반에 아시아 경제국들에서 나타난 경제위기는 1930년대미국의 대공황과 흡사하고, 지금의 세계 경제위기는 보다 더 미국의 대공황과 흡사하다고 주장한다. 독감바이러스처럼 형태를 달리하며 다시 퍼진 세계경제위기의 뿌리를 IMF 사태와 동일한 문제의식 위에서 다루고 있다. 이는 세계 경제가 공황에 빠지는 대신 불황이 오랫동안 지속될 수 있음을의미한다. 이러한 신용위기 해결방법으로 저자는 신용경색 완화와 소비 지원을 주장한다. 경기부양을 위해 더 많은 공적 자금을 투입해야 하며,단기적으로나마 금융시스템의 국유화를 해 신용경색 완화를 해야 한다는 것이다. 그리고 경제학의 패러다임을 공급 중심이 아닌 수요 중심으로 전환해야한다고 조언한다.
그리고 계속되는 불황에 대한 해결책으로 ‘불황의 경제학’을 제시한다. 즉불황을 무조건 터부시하지 않고 체제 내에서 다루는 경제학을 말한다. 크루그먼은 반복되는 세계 경제위기를 궁극적으로 해결하기 위해서는 경제 전반을이해하는 패러다임을 바꾸어야 한다고 말하며, 그 대안이 ‘불황의 경제학’이라고 주장한다.
■ 저자 폴 크루그먼
2008년노벨경제학상 수상자. 현재 프린스턴 대학의 경제학 및 국제학 교수로 재직중이다. 2000년부터 「뉴욕타임스」에 일주일에 두 번 칼럼을 연재하면서예리한 통찰과 독설로 경제학자로서의 필명을 날리고 있다. 또한 최근에는 자신의 블로그 ‘자유주의자의 양심’(The Conscience of aLiberal)에 매일 글을 올리면서 일반 대중들과 경제학적 관심을 나누고 있다. 이런 활동에 대한 평가로 미국의 미디어비평 잡지 「에디터 앤드퍼블리셔」는 그를 ‘올해의 칼럼니스트’로 선정하기도 했다. 크루그먼은 지금까지 20권이 넘는 책을 저술하고 200편 이상의 논문 및 전문 저널기사를 쓰거나 편집했다. 더 자세한 정보는 Krugmanonline.com에서 찾아볼 수 있다.
■ 역자 안진환
경제경영서 분야에서활발하게 활동하고 있는 전문번역가. 연세대학교를 졸업하고 명지대학교와 성균관대학교의 전문번역가 양성 과정에 출강했다. 현재 인트랜스번역원 대표로있다. 『스펜서 존슨의 행복』『포지셔닝』『괴짜경제학』『미운오리새끼의 출근』『전쟁의 기술』 등의 베스트셀러를 번역했다. 지은책으로는『영어실무번역』과 『Cool 영작문』 등이 있다.
■ 차례
들어가는 말
제1장 “핵심문제는 해결되었습니다!”
제2장 경고를 무시하다 -라틴아메리카의 위기
제3장 일본의 함정
제4장 아시아의 붕괴
제5장부적절한 정책
제6장 세계를 움직이는 세력 -헤지펀드의 실체
제7장 그린스펀의 거품
제8장 그림자 금융
제9장 공포의총합
제10장 돌아온 불황경제학
불황의 경제학
들어가는 말
대부분의 경제학자들은 1930년대 미국 대공황이 피할 수도 있었던 불필요한 비극이라고 생각한다. 만약 당시 미국 대통령이었던 허버트 후버가 경기침체라는 현실 앞에서 균형예산에 집착하지 않았더라면, 만약 연방준비제도이사회(연준, FRB)가 미국 국내 경제를 희생해가면서까지 금본위제를 고수하지만 않았더라면, 또 만약 정부가 파산 위험에 빠진 은행들에게 신속히 자금을 지원했더라면, 그렇게 해서 1930년에서 1931년에 걸쳐 진행된 금융공황을 진정시켰더라면, 앞서 1929년에 발생했던 주식시장 붕괴는 흔해빠진 일시적 침체만을 야기했을 터이고, 곧 잊혔을 거라는 이야기다. 경제학자와 정책입안자들은 여기서 교훈을 얻었다. 대공황과 같은 사태는 결코 다시 발생할 수 없는 일이었다.
과연 그럴까? 1990년대 후반에, 세계 총생산의 약 4분의 1을 책임지며, 약 7억 명의 인구가 살고 있는 일단의 아시아 경제국들에서 대공황과 기분 나쁠 정도로 흡사한 경제위기가 발생했다. 대공황 때와 마찬가지로 위기는 마른하늘에 날벼락처럼 찾아왔다. 그리고 1930년대에도 그랬듯이 전통적인 대처 방안들은 효과가 없거나 때로는 역효과를 낸다는 사실이 드러났다. 대공황에 대해 알고 있는 사람이라면 현대 세계에서 이와 같은 일이 다시 발생할 수 있다는 가능성에 등골이 서늘했을 것이다.
10년 전에 나왔던 이 책의 초판은 1990년대 아시아의 경제위기를 분석하기 위해 썼던 것이다. 당시 몇몇 전문가들은 이 위기를 아시아에 국한된 현상으로 보았다. 하지만 나는 이것을 불황경제학의 문제가 현대 세계에서 결코 사라지지 않았음을 보여주는 경고로 판단했다. 슬프게도 나의 우려는 기우가 아니었음이 드러났다. 이 책의 개정판을 준비하는 지금, 미국을 비롯한 세계의 많은 국가들이, 아니 세계 대부분의 국가들이 금융위기 및 경제위기에 직면해 사투를 벌이고 있다. 작금의 상황은 불행히도 1990년대에 아시아가 겪었던 것보다 훨씬 더 대공황과 흡사한 모양새를 띠고 있다.
우리는 사실 아시아가 10년 전에 겪었던 종류의 경제 문제나 현재 우리 모두가 겪고 있는 종류의 경제 문제에 대한 예방법을 안다고 믿었다. 그러나 이러한 신념이 옳지 않다는 사실을 우리는 10년 전에 깨우쳤어야만 했다. 일본은 1990년대 대부분을 케인스 시대에 겪었던 것과 유사한 경제적 덫에 걸려 허덕였다. 일본보다 규모가 작은 아시아의 몇몇 경제국들은 말 그대로 하룻밤 만에 호황에서 재난으로 치달았다.
핵심 문제는 해결되었습니다!
대공황은 자본주의와 민주주의를 붕괴 직전의 상황까지 몰고 갔다. 하지만 그 후 한동안 지속적인 경제 성장의 시기가 이어졌다. 잠깐의 침체는 기간이 짧은데다 깊지 않았다. 1960년대 후반까지 미국은 단 한 차례의 경기후퇴도 없이 성장했다. 그러나 1970년대는 경기침체와 인플레이션이 결합된 스태그플레이션(stagflation)의 시대였다. 1973년과 1979년에 두 차례의 에너지 위기가 발생하더니, 이어 1930년대 이래 최악의 불경기가 찾아왔다. 하지만 1990년대에 들어오면서 로버트 루커스와 벤 버냉키도 앞으로 일시적인 침체는 있을 수 있지만 범세계적인 불황과 심각한 경기후퇴는 역사 속으로 사라졌노라고 단언했다. 그게 불과 몇 년 전의 일이다.
이러한 주장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는가? 어떤 경우에도 답이 확실하다고, 특정한 무엇 때문에 경기후퇴가 일어난다는 식으로 말해서는 안 된다. 특정한 무엇이란 당신이 선택한 편견일 뿐이다. 이 문제에 대해 좀 더 고민해본다면, 특히 시장이 어쨌든 수요와 공급을 조절해나간다는 개념을 이해하며 그것을 전반적으로 신뢰한다면, 경기후퇴는 매우 특이한 현상이 아닐 수 없다는 점을 알게 될 것이다. 경제가 부진할 때, 특히 심각한 불황일 때는 공급은 넘쳐나는데 수요는 거의 없어 보인다. 일하고자 하는 사람은 있는데 일자리가 없고, 공장은 충분한데 주문이 없으며, 상점은 열려 있지만 손님이 별로 없다. 특정한 재화에 대한 수요가 줄어드는 원인을 파악하는 것은 그리 어려운 일이 아니다. 예를 들어 한 제조업체가 바비(Barbie) 인형을 대량으로 생산하고 있는데 소비자들은 브라츠(Bratz) 인형을 원한다면 바비 인형 중 일부는 팔리지 않고 재고로 남을 것이다.(바비와 브라츠는 모두 미국 마텔Mattel사의 제품이다―옮긴이) 그런데 어떻게 재화에 대한 전반적인 수요가 줄어드는 일이 발생할 수 있는가? 사람들이 무언가에 돈을 쓸 필요가 없어진다는 말인가?
내게는 좋은 이야기가 하나 있다. 불경기가 무엇인지 설명할 때 즐겨 인용할 뿐만 아니라, 나 자신의 사고를 가다듬는 직감의 펌프‘로도 이용하는 이 이야기는 조안(Joan)과 리처드 스위니(Richard Sweeney) 부부가 1978년 ‘통화이론과 그레이트 캐피톨힐 베이비시팅 협동조합의 위기’(Monetary Theory and the Great Capitol Hill Baby-Sitting Co-op Crisis)라는 제목으로 발표한 기사의 내용이다. 스위니 씨 가족은 1970년대에 그레이트 캐피톨힐 베이비시팅 협동조합의 조합원이었다. 이 조합은 서로의 아이들을 돌봐주는 것이 목적이었는데, 각 부부에게 동일한 만큼의 부담을 할당해야 한다는 점이 만만치 않은 과제였다. 캐피톨힐 협동조합은 (다른 많은 품앗이 조직들과 마찬가지로) 쿠폰을 발행하는 것으로 문제를 해결했다. 쿠폰 한 장으로 한 시간 동안 아이를 맡길 수 있었다. 아이를 돌보기로 한 부부는 아이를 맡기는 부부로부터 해당하는 시간만큼의 쿠폰을 받고 아이를 돌봐주었다. 구조적으로 볼 때 모든 조합원이 공평할 수 있는 아주 효과적인 시스템이었다.
그런데 문제가 쉽지만은 않았다. 요점은 회전되는 쿠폰의 양이 상대적으로 적어진 시기가 닥쳤다는 것이다. 그래서 모아놓은 쿠폰이 부족하다고 생각한 부부들은 다른 부부의 아이를 돌보고 싶어 안달이었고, 외출을 꺼렸다. 그러나 한 부부의 외출이 다른 부부에게 베이비시팅의 기회가 되는 것이었으므로 쿠폰을 모을 기회는 점점 줄어들었다. 이제 사람들은 특별한 일이 아니면 모아놓은 쿠폰을 쓰지 않으려고 했고, 그 결과 베이비시팅이 기회는 더욱 줄어들었다. 간단히 말해 베이비시팅 조합이 불경기에 들어간 것이다. 이 조합은 불경기의 가능성을 지닌 사실상 최소 규모의 경제라고 볼 수 있다.
이제 이 이야기가 담고 있는 두 가지의 핵심적인 의미를 생각해보자. 하나는 불경기의 발생 경위에 관한 것이고, 다른 하나는 불경기를 다루는 방법의 문제다.
먼저 베이비시팅 조합이 왜 불경기에 들어섰는지를 살펴보자. 문제는 조합의 생산 능력이 아니라 단순히 유효수요(effective demand)의 부족에 있었다. 사람들이 현금(쿠폰)을 모으는 일에만 신경을 쓰느라 실제 재화(아이를 맡기는 시간)의 소비가 현저히 감소했던 것이다. 여기서 우리가 얻을 수 있는 교훈은 비즈니스 사이클 상의 불황은 한 경제의 근본적인 강점이나 약점과는 거의 혹은 아무런 상관이 없을 수도 있다는 것이다. 튼튼한 경제에도 나쁜 일이 일어날 수 있다는 얘기다.
그렇다면 둘째, 베이비시팅 조합의 해결책은 무엇이었을까? 결국에는 경제학자들의 의견에 따라 쿠폰의 공급을 늘리는 조치가 취해졌다. 이에 따라 부부들은 좀 더 자주 외출하기 시작했고, 이로 인해 다른 부부의 아이를 돌볼 기회도 점점 많아졌으며, 이는 다시 조합원들의 외출 빈도 증가와 베이비시팅 기회의 확대로 이어졌다. 조합의 GBP(Bross Baby-sitting Product), 즉 ‘베이비시팅 총생산’ 수치가 치솟은 것이다. 다시 한 번 강조하지만 이는 단순히 통화의 혼란이 바로잡혔기 때문이었다. 다시 말해, 단순히 돈을 찍어내기만 해도 불황과 맞서 싸울 수 있다는 얘기다.
아무리 작은 나라의 경제라도 당연히 베이비시팅 조합보다도 훨씬 복잡하다. 그러나 근본적인 면에서는 작은 세계와 하나도 다를 것이 없다. 불황은 보통 대다수의 대중이 현금을 쌓아둘 때, 다시 말해 투자보다 저축을 하려고 할 때의 문제이며, 이는 더 많은 ‘쿠폰’을 발행하는 것으로 쉽게 해결할 수 있다.
현대 세계의 쿠폰 발행자들이 바로 중앙은행이다. 연방준비제도이사회, 유럽중앙은행, 일본은행 등이다. 이들은 현금을 필요한 만큼 넣거나 빼서 경제를 안정시키는 역할을 한다. 그런데 이것이 이처럼 쉬운 일이라면 우리는 왜 불황을 겪는 것일까? 중앙은행들은 왜 완전고용을 유지하기에 충분한 돈을 매번 찍어내지 않는 것일까?
제2차 세계대전 이전의 정책입안자들은 단순히 무슨 일을 해야 할지를 알지 못했다. 지금은 밀턴 프리드먼부터 시작해 중도와 좌파에 이르는 사실상 모든 부류의 경제학자들이 대공황은 유효수요의 붕괴 때문에 일어난 것이며, 연방준비제도이사회가 돈을 대규모로 투입해서 이겨냈어야 했다는 데 동의한다. 하지만 당시의 전통적 지혜는 달랐다. 그러나 제2차 세계대전이 끝난 후 경제는 통상적인 처방에 반응을 보였고 미국은 또 다른 성장기로 들어섰다. 그리하여 1990년대 말 무렵이 되자 비록 비즈니스 사이클이 사라진 것은 아니지만 적어도 의심할 여지 없이 길들여지기는 했다고 말해도 무방하게 되었다.
아시아의 붕괴
1997년 태국 바트화의 폭락은 아시아 대부분의 나라에 영향을 미친 금융위기의 방아쇠였다. 먼저 태국의 호황과 붕괴 과정을 살펴보기로 하자. 전통적으로 농산물 수출국이던 이 나라가 주요한 산업 중심지가 된 것은 1980년대에 들어서면서부터다. 이때부터 외국 기업들(특히 일본계)이 태국에 공장을 세우기 시작했다. 태국의 경제성장은 급물살을 탔다. 태국은 연 8퍼센트를 웃도는 경제성장률을 보였다. 1990년대 초까지는 이러한 성장을 가능케 한 대부분의 투자가 태국 국민들의 저축에 의해 이루어졌다. 그러나 1990년대가 흐르는 동안 이 금융 자본의 상태에 변화가 오기 시작했다.
1990년 한 해 동안 개발도상국으로 흘러든 민간자본은 모두 420억 달러였다. 해외에서 계속해 더 많은 자금이 들어옴에 따라 대규모 신용팽창이 이뤄졌고, 이것은 신규 투자의 물결을 일으켰다. 투자의 일부는 오피스빌딩 및 아파트 건설 등 실제 용도로 쓰였지만 투기가 되는 경우도 많았다. 1996년 초 동남아시아 경제는 1980년대 후반의 일본 거품경제와 매우 흡사한 모습을 보이기 시작했다. 외화시장에서 바트화를 팔아야만 했던 태국은행은 채권을 팔아 다시 그 바트화를 환수하여 투기 붐을 막으려고 노력했다. 사실상 방금 찍어낸 돈을 다시 차입하는 셈이었다. 그러나 이는 국내 이자율을 올리는 결과로 이어졌고, 결국 해외로부터의 차입은 더욱 늘어나게 되었다. 더 많은 엔화와 달러가 유입됐다. 안전장치를 만들려는 정부의 노력은 실패로 돌아갔고, 신용은 팽창 일로를 걸었다.
치솟는 투자는 새롭게 부유해진 소비자들이 만들어낸 엄청난 구매력과 어우러져 수입 급증을 야기했다. 그러는 동안 호황으로 인해 임금은 상승한 반면, 수출품의 경쟁력은 떨어져갔다. 수출성장률 둔화에 따른 막대한 무역적자가 발생했다. 외화자금이 국내에 통화와 신용을 공급하는 대신 수입품 구매 비용으로 나가기 시작했다.
엔화와 달러의 유입이 줄자 외환시장에서 바트화에 대한 수요도 줄어든 것이다. 반면 수입 대금 결제를 위한 외환 수요는 줄지 않았다. 바트화의 가치를 지키기 위해 태국은행은 시장에 개입해 달러와 엔화를 주고 바트화를 사들여 자국의 통화를 지지하려 했다. 그러나 바트화의 가치를 방어하는 능력에는 한계가 있었고, 외환보유고는 얼마 안 가 바닥을 드러냈다. 사태가 이 지경에 이른 상황에서, 태국 정부는 기다리고만 있었다. 그리고 7월 2일, 태국은 결국 바트화 방어를 포기했다.
적어도 이 시점까지 예상 밖의 일은 발생하지 않았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바트화 폭락 이상의 사태는 없을 거라고 생각했다. 태국 정부로서는 수치였고, 과도하게 사업을 확장한 몇몇 기업들은 크게 휘청거리겠지만, 그렇다고 재앙일 것까지는 없었다. 파괴적 불황은 오지 않을 터였다. 그러나 잘못된 예측이었다.
모든 것이 정상적으로 돌아갈 때는 통화의 가치하락을 허용해도 끔찍한 사태가 발생하지 않는다. 일반적인 계산으로 바트화가 15퍼센트 정도 떨어지면 태국의 산업이 비용 대비 경쟁력을 갖출 것이라고들 했다. 대략 그 정도의 하락은 예상하고 있었다. 그러나 바트화는 수직 하강을 했다. 만약 태국 정부가 이자율을 대폭 올리지 않았더라면 바트 가치는 더욱 폭락했을 것이다.
왜 바트화가 이렇게 폭락했을까? 금융 악화와 신뢰 상실이 원인인데, 뱅크런(예금 인출 쇄도 사태)은 이 순환 고리의 단지 한 측면일 뿐이다. 다음은 이 과정을 그림으로 나타낸 것이다. 금융위기에 휩쓸린 아시아의 여러 나라에서 동일한 과정이 발생했다.(형태의 차이는 다소 있었다) 여기서는 태국 통화와 경제에 대한 신뢰 하락에서 시작해보자.
태국의 통화와 경제에 대한 신뢰 하락은 국내외 투자자들로 하여금 이 나라에서 돈을 빼내고 싶게 만들었다. 이는 바트화의 가치 폭락을 일으켰다. 달러와 엔화가 부족한 태국 중앙은행으로서는 통화가치 하락을 막는 유일한 길은 이자율을 올려 바트화를 이 악순환에서 벗어나게 하는 것뿐이었다. 그런데 불행하게도 통화가치 하락과 이자율 상승은 비즈니스에 금융상의 문제점을 안겨주었다. 이자율 상승과 경영실적 악화, 그리고 대출 자체가 거의 불가능해진 은행 시스템 등의 문제들이 합쳐져 기업들이 씀씀이를 대폭 줄여야만 하는 상황이 되었는데, 이것이 경기후퇴를 낳았고, 결국 수익률 하락과 적자 경영으로 이어졌다. 이러한 나쁜 소식들이 신뢰를 더욱 무너뜨렸다. 태국 경제는 완전히 쓰러지고 말았다.
시장경제가 실제로 이처럼 불안정해질 수 있다는 사실, 그리고 앞의 도표와 같은 피드백이 폭발적인 위기를 일으킬 만큼 강력할 수 있다는 사실을 좀처럼 믿으려고 하지 않는 사람들이 지금도 많다. 하지만 그렇다. 위기가 번져나간 과정을 보면 쉽게 이해할 수 있다.
공포의 총합
미국의 주택 대호황은 2005년 가을부터 꺼지기 시작했지만 이후에도 집값은 한동안 상승세를 유지했다. 그러다가 2006년 늦봄에 이르러 시장의 약세가 드러나기 시작했다. 가격은 처음에는 서서히 떨어졌지만 어느 순간부터 급락의 물살을 탔다. 집값이 오르기는커녕 떨어지기 시작하면서 집을 쉽게 팔 수 없게 되자 곧바로 채무불이행 건수가 많아지기 시작했다. 그리고 이 시점에서 유질처분(담보물을 찾을 권리의 상실-옮긴이)은 주택소유자에게도 비극이지만 대부업자에게도 불리한 거래라는 점이 드러났다. 유질처분된 주택을 시장에 다시 내놓을 때까지 걸리는 시간과 법적 비용, 사람이 살지 않는 빈집은 쉽게 낡아버린다는 점 등을 감안할 때 차용자의 집을 취득한 채권자는 대체로 대출금을 온전히 회수할 수 없었으며, 심지어 원금의 절반 정도 선에서 만족해야 하는 경우도 많았다.
차용자의 상환금을 적당히 줄여주기 위한 차용자와의 의견 조율 역시 비용이 들고 인력이 필요한 일이다. 더 중요한 점은, 대부분의 경우에 있어 서브프라임 대출을 보유하고 있는 은행이 대출의 주체가 아니라는 데 있다. 대출의 주체는 대출자산보유자(loan originator)들로서 이들이 대출을 재빨리 금융기관에 팔면 금융기관들은 이러한 모기지 채권 집합을 자산담보부증권(CDO)으로 나누고 쪼개어 투자자들에게 매도한다. 대출의 실질적 권리는 융자기관(loan servicer)들의 몫이었는데, 이들 융자기관은 자본도 없을뿐더러 대개는 대출재조정에 관여할 권한도 갖지 못했다. 그리고 서브프라임 대출을 뒷받침하는 ‘금융 공학’의 복잡성으로 모기지의 소유권은 각양각색의 우선변제권을 주장하는 수많은 투자자들이 나눠 가졌고, 그리하여 어떤 종류의 채무탕감이든 법적으로 매우 어려워져버렸다. 따라서 재조정이 이루어진 경우는 거의 없었으며, 대신 비용이 많이 드는 유질처분 방식이 사용되었다. 이는 곧 서브프라임 모기지 담보증권은 주택 붐이 주춤하면 곧바로 부실 투자로 전락한다는 의미였다.
2007년 초에 진실의 순간이 닥쳤다. 서브프라임 대출의 문제점이 처음으로 명백해졌을 때였다. 자산담보부증권에는 지분에 차등을 두는 우선변제권 방식이 적용됐다. 평가기관들이 AAA등급으로 평가한 우선변제지분들이 가장 먼저 지불되며, 이보다 낮은 평가를 받은 지분들, 즉 우선 변제 순위에서 상대적으로 밀려나 있는 지분은 우선변제지분들이 모두 지불된 다음에야 몫을 챙길 수 있었다. 2007년 2월경, 비교적 등급이 낮은 지분은 필경 큰 손실을 볼 거라는 인식이 서서히 퍼지면서 이러한 지분들의 가격이 폭락했다. 이것이 서브프라임 대출의 전체 과정을 어느 정도 끝냈다고 할 수 있다. 아무도 낮은 등급의 지분을 사려 하지 않자 서브프라임 대출을 더 이상 재포장해 판매할 수 있는 가능성이 사라졌고, 자금줄도 끊겼다. 이는 다시 주요한 주택 수요의 원천을 없앤 셈이라 주택 시장의 후퇴를 가속화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오랫동안 투자자들은 자산담보부증권의 우선변제지분들만큼은 적절한 보호를 받고 있다고 믿었다. 그러나 결국 주택과 관련한 것은 어느 것도, 즉 우선변제지분이나 심지어 상당액의 계약금을 낸 우수한 신용등급의 차용자에게 해준 대출조차도 안전하지 못하다는 사실이 분명해졌다.
막대한 규모의 주택 거품 때문이었다. 2006년 여름까지 미국의 주택 가격은 전국적으로 필경 50퍼센트 이상 과대평가되었을 것이다. 일부 대도시 지역에서는 이러한 과대평가가 훨씬 심각했다. 이것은 사실상 거품이 한창인 시절에 집을 산 사람은 누구든, 심지어 계약금을 20퍼센트까지 낸 사람이라도 결국 마이너스 순가 상태, 즉 모기지 액수가 집값보다 더 많은 상태에 도달하게 된다는 의미였다.
지금까지 보았듯이 2007년 전반기에 금융 분야에서 다소 심각한 동요가 일었지만 2008년 초까지만 해도 주택시장 침체 및 서브프라임 대출과 관련한 문제들은 억제되었다는 것이 공식적인 관점이었으며, 주식시장의 강세 또한 시장들이 이러한 입장에 동의하고 있음을 시사했다. 그러나 곧이어 완전히 지옥 같은 상황이 뒤따랐다. 무슨 일이 벌어졌던 것일까?
돌아온 불황경제학
세계 경제는 공황에 빠지지 않았다. 현재 위기의 규모가 크긴 하지만 세계 경제는 십중팔구(100퍼센트 확신할 수 있다면 좋겠지만) 공황에 이르지 않을 것이다. 공황 자체는 재현되지 않겠지만 (1930년대 이후로 잊고 있던) 불황경제학이 놀라운 컴백을 했다. 약 15년 전만 해도 환투기꾼들의 장난이 한 국가를 고통스러운 경기후퇴로 밀어 넣는다거나, 주요 선진국들의 소비가 미진해 공장이 멈추는 일은 없을 거라고들 생각했다. 현대 국가에서 이런 일은 있을 수 없다고 말이다. 그러나 세계 경제의 취약성은 우리가 상상했던 것보다 훨씬 컸음이 드러났다.
세계가 어쩌다 이렇게 됐을까? 더 중요한 점은, 현재의 위기를 어떻게 극복할 것인가, 또 이러한 위기가 애당초 일어나지 않도록 예방하기 위해 무엇을 할 수 있는가이다. 이 책에서 나는 많은 이야기를 했다. 이제는 몇 가지 교훈을 도출할 차례다.
지금 당장 세계가 필요로 하는 것은 구조 작전이다. 전 세계의 신용 시스템은 마비 상태이며, 이 글을 쓰는 지금 세계적인 불황은 계속 추진력을 얻고 있다. 발등의 불을 끄기 위해 전 세계 정책 입안자들이 행해야 할 일은 두 가지, 바로 신용경색 완화와 소비 지원이다.
미국은 이 모든 조치들을 다른 선진국들과 함께 협의해 조율해야 한다. 금융세계화로 인해 미국의 금융시스템이 살아나면 유럽의 신용도 회복되며, 유럽이 구제 노력을 기울이면 미국에서도 신용에 대한 접근이 수월해진다. 모두가 어느 정도는 똑같은 일을 해야 한다는 의미다. 세계는 한 배를 탄 셈이다. 한 가지 덧붙일 것이 있다. 금융위기가 신흥시장으로 확산되면서 개발도상국들에 대한 국제적 차원의 구제가 위기 해결의 일부가 되고 있다. 이 글을 쓰는 지금 (자본재구성과 마찬가지로) 이들 국가에 대한 일부 구제책이 이미 시행되고 있다. 금융 시스템 규제로 신용시장이 살아난다고 해도 세계적인 불황은 여전히 그 여세를 몰아갈 것이다. 여기에 대해서는 어떤 조치를 취해야 하는가? 케인즈식의 오래된 경기부양 재정정책이 해답이 될 것이 거의 확실하다.
이 모든 것의 핵심은 상황을 호전시키기 위해 우리는 무엇이든 다 할 것이며, 만약 지금까지 해온 것으로 충분하지 않다면 신용이 흐르기 시작하고 실물경제가 회복을 보일 때까지 더 많은 것을, 다른 무언가를 시도하겠다는 정신으로 현재의 위기에 접근해야 한다는 것이다. 그리고 일단 회복 노력을 적절하게 진행한 다음에는 예방 조치로 관심을 돌려야 한다. 위기가 다시 일어나지 않도록 시스템을 개선해야 한다는 얘기다.
(본 정보는 도서의 일부 내용으로만 구성되어 있으며, 보다 많은 정보와 지식은 반드시 책을 참조하셔야 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