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쟁기획자들 : 불가능한 시장을 만들어낸 사람들

   
서영교
ǻ
글항아리
   
15000
2008�� 11��



■ 책 소개
전쟁과 시장은 어떤 관계를 맺고 있는가.전쟁사를 전공한 저자는 역사 속 전쟁에 대한 깊이 있는 이해를 바탕으로 시장은 전쟁을 배태하는 자궁이라는 결론을 이끌어낸 뒤, 이것을 현대에벌어지는 다양한 국지전 양상에 적용해 이익을 향해 달려가는 현대사회의 구조적인 측면을 짚어내고 있다. 미국경제가 전쟁을 통해 성장하고 쇠약해진과정을 본격적으로 해부하고, 이병철, 정주영, 신격호 등 한국 경제를 이끌어온 기업 수뇌들의 "전쟁두뇌"를 본격적으로 파헤쳤다. 또한 곡물시장,인력시장, 금융시장, 무기시장, 마약시장 등 격전지들의 최신 현황을 브리핑했다.

■ 저자 서영교
1967년 경남 거창에서 태어나 부산에서 자랐다. 동국대 국사학과를 졸업하고 동 대학원 사학과에서 석 박사를마쳤다. 박사과정 중 「신라장창당의 신고찰」이란 논문을 발표하면서 전쟁사 연구에 몰입했다. 박사논문을 수정하고 보강한 저서 『나당전쟁사연구-약자가 선택한 전쟁』은 2006년 대한민국학술원 우수도서로 선정되기도 했다. 한국 고대사학자 중에서는 보기 드문 전쟁 전문가이며 전쟁 관련다큐멘터리를 1000기가바이트 이상 소장하고 있다. 최근에는 깃발, 기병, 등자 등 고대 전투에서 중요했던 요소들의 쓰임새와 변천에 대한 논문을쓰고 있으며, 6~7세기 중국 티베트 돌궐 한반도가 뒤엉킨 국제관계와 전쟁을 흥미롭게 그리는 『동아시아 세계전쟁』이라는 대작을 집필중이다. 이과정에서 새롭게 밝혀지는 흥미로운 내용들을 토대로 국제신문에 "전쟁과 시장"이라는 시리즈를 매주 연재하고 있다. 현재 충남대 인문과학연구소연구원으로 재직하고 있다.

■ 차례
추천사
머리말 

 


제1부 치열한 격전지
대의를 위한 전쟁은없다: 이라크 유전과 가야의 철
누가 군대를 국가주의의 화신이라 일컫는가: 이라크의 미군 용병과 고구려의 유목민 용병
다이아몬드의핏물은 빠지지 않는다, 수요가 있는 한: 전쟁 기획자들
시장, 전쟁을 도발하거나 억지하거나: 미국의 딜레마와 수제국의 참패
빈 라덴이원한 것, 미 경제를 수렁으로 끌어들일 전쟁: 혈우병 환자 미국

제2부 달러의 그늘
무기를 팔 때는 분쟁국의 요구에 맞춰라: 무기산업의 악마적인매력
자본은 정치를 움직이고 이권은 반란을 획책한다: 자본가의 국제정치
비단은 "사용가치"라도 있지만 달러는?: 중국의 비단과 미국달러
방탕한 왕자들, 뇌물을 좇아 세계 시장을 누비다: 고려 충혜왕과 사우디 왕자들
패권화폐 그 허망한 영광을 경계하라: 화폐폭탄,달러
제국의 번영은 "물고 물리는" 대가를 치른다: 미 제국과 당 제국
공포가 만들어낸 "기이한 공생": 미 재무부 채권과 남송의세폐

제3부 먹거리시장 쟁탈전
탐욕으로 왜곡된시장, 기아와 폭동의 원흉: 곡물전쟁
사실은 거란에 농락당한 서희의 담판: 거란이 만든 1000년 전 WTO
사료 값 폭등과 시장개방의 이중고 어떻게 넘을까: 고기와 곡물
고구려 장수왕의 몽골 개척이 식량무기 시대의 해법이다: 해외 식량기지-할흐골과지두우

제4부 시장 속의 군주
시장창출로 "전비戰費"를 마련하라: 광개토왕과 정주영 회장
시장의 붕괴는 "분열 왕조"의 몰락을 재촉했다: 고구려와 현대 재벌
한국과신라는 어떻게 확대재생산의 길로 들어섰나: 장보고와 이병철
해외에서 구축한 재력 기반으로 모국서도 "소왕국" 건설: 장보고와신격호
판단은 빨랐고 결정은 냉혹했다: 고구려 장수왕과 이건희 회장
한국사 최대의 외부 인력 유입 사건 | 이익이 되는 사업은 절대포기하지 않는다 | 무능한 정치적 두시장에 대한 권력의 지나친 개입은 독입니다: CEO 출신 국왕과 대통령
과도한 해외투자 영토확장예측불허 변수에 무너지다: 김우중과 의자왕
절대권력, 세계화 앞에 무력했다: 최충헌과 수하르토
참혹한 상처의 대가로 경제 도약을얻다: 박정희와 고려 원종의 파병

제5부 자유 시장의본질, 선량한 사기
낙랑 통해 신문물 흡수한 고구려의 실용정신: 낙랑 PX와 미군 PX
철저한 "정복" 위해 철저한"자유" 허용: 홍콩과 낙랑의 자유경제
반시장적 금기법은 악을 잉태한다: 황소와 알 카포네
감언이설로 타국을 기만한 희대의 사기극:일왕을 속인 신라 왕자
불합리한 탕진의 놀라운 생산성: 일본 황제와 신라 신문왕 결혼식
한국과 티베트, 중국의 양끝에서 수천 년시소타기: 멈추지 않는 역사의 수레바퀴
좁은 국내시장이 배태한 비극: 전쟁 수요와 이민자 입대
애국했지만 죄인이 된 사람들: 로버트김과 신라인 우로
무엇이든 받아들이는 자가 승리한다: 제국의 약탈 항해의시대

참고문헌





전쟁기획자들 : 불가능한 시장을 만들어낸 사람들


제1부 치열한 격전지
대의를 위한 전쟁은 없다: 이라크 유전과 가야의 철

세계 석유업계는 이라크에서 ‘유전개발 대전(大戰)’을 준비하고 있다. 세계 굴지의 70여 개 석유업체가 2008년 2월 18일 마감한 유전개발 사업에 참여하겠다는 투자 제안서를 이라크 중앙정부에 접수했다. 우리나라뿐만 아니라 외국 기업들은 이라크 정부와 쿠르드 지방정부 간의 대립으로 선택의 갈림길에 서 있다. 세계의 석유 기업들은 ‘눈앞의 이익이냐 아니면 미래를 볼 것이냐’를 놓고 딜레마에 빠진 셈이다. 이라크 중앙정부에 막강한 영향력을 행사하고 있는 미국은 쿠르드의 독자 행동이 못마땅하다는 입장이다. 미국 국무부는 2007년 9월 세계 메이저 석유회사에 이라크 중앙정부의 허락 없이 쿠르드와 별도 계약을 하지 말라는 지침을 통보하기도 했다. 후세인 정권을 붕괴시킨 부시 행정부에게 이라크 유전은 ‘전리품’이기 때문이다.


이라크의 확인된 원유 매장량은 1150억 배럴로 사우디아라비아(2627억 배럴)와 이란(1360억 배럴)에 이어 세계 3위이다. 하지만 이라크의 원유 매장 추정치는 2150억~4320억 배럴이나 된다. 더욱 매력적인 것은 원유를 퍼올릴 수 있는 가채 연수가 115년을 세계 최장이며, 원유가 지표면으로부터 낮게 묻혀 있어 개발 비용이 적게 들고 질도 좋다. 달러면 원유 1배럴을 생산할 수 있다. 유엔의 이라크 위임 기간이 2008년 말로 완료된다.


문제는 중국이 석유를 대량 소비하면서 시작되었다. 세계의 석유 공급량이 점차 빠듯해지자 미국은 그동안 잠가두었던 이라크의 석유 꼭지를 다시 열어야 했다. 사담 후세인이 권좌에 있는 상황에서 이라크에 대한 석유 금수조치를 해제한다는 것은 위험한 일이었다. 후세인이 막대한 부를 거머쥔다는 것은 무엇을 의미하겠는가? 9.11 사태가 터지자 전쟁을 벌일 빌미를 찾았다. 미국은 이라크를 점령하고 사담 후세인을 처형했다.


400년, 왜의 대군이 상륙해 신라 왕경을 향해 진군해왔다. 내물왕은 고구려에 사신을 보냈다. 광개토왕은 평양에서 내물왕이 보낸 신라 사신을 만났다. “그들이 어떻게 한 번에 가야지역에 상륙해 신라를 칠 수 있다는 것이지요?” “가야 지역에서 생산되는 철 때문입니다. 철은 일본에서 아직 생산되지 않고 있습니다. 313년 이전 시기에, 후한 말 황건적의 반란이 중국 대륙 대부분을 휩쓸어 무정부 상태에 빠졌습니다. 이 과정에서 중국은 철 산업이 완전히 파괴되었습니다. 위, 촉, 오의 삼국은 중원의 패권을 놓고 끊임없이 전쟁을 했습니다. 철이 절대적으로 부족하게 되었습니다. 철의 가격이 천정부지로 오르고 중국에서 낙랑으로 철이 들어오지 않게 되었지요. 낙랑 상인들은 한반도의 낙동강 유역에서 철광산을 발견했습니다. 그 뒤 가야의 철은 낙랑과 대방, 그리고 일본열도로 수출되기 시작했습니다.”


“과인이 듣기로 철을 매개로 한 교역이 금관가야를 중심으로 이루어지고 있다고 하던데?” “철을 비롯해 낙동강 각 지역에서 생산된 물품은 금관가야에 집결됩니다. 금관가야는 철 생산량이 많지요. 하지만 중요한 것은 수로를 통해 그곳에 집중되어 가격이 결정된다는 점입니다. 금관가야의 시장에서 가야지역의 각 나라는 일본열도의 수많은 호족들과 교역했습니다. 통제란 것은 없었습니다. 다만 일정한 세금만 금관가야에 내면 되지요. 그런데 신라가 강성해지고 철 수요가 증가하자 금관가야에 집산되는 철의 양이 줄었고, 가격이 상승시켰습니다. 철을 생산하고 판매하는 가야의 국가들과 그것을 구입해야 하는 일본열도의 여러 호족들이 막대한 피해를 보게 되었습니다. 그들이 신라를 침공한 것도 이것 때문입니다.”

“신라에 들어와 있는 왜국을 격파하려면 막대한 병력과 군량이 소요되는데, 우리에게 그 이상의 이익이 돌아올 수 있겠소?” “전하, 가야의 철을 장악하고 그 유통권이 우리 손에 들어온다면, 우리가 철의 가격 결정권을 가지게 되고, 가야의 철에 의존하고 있는 신라는 물론이고 일본열도에 있는 수많은 나라들의 목줄을 쥐게 되는 것이지요. 그들은 우리가 철을 주지 않는다면 무기와 농기구를 제대로 만들 수 없습니다. 철이라는 자원을 무기화해 그들에게 많은 요구를 할 수 있게 되는 것이지요.”


고구려 군대는 강변을 따라 뗏목과 배와 함께 내려오면서 보급을 받았다. 이미 신라는 낙동강 상류지역의 사람들에게 방대한 물자를 수취하고 배를 징발하고 뗏목을 만들게 하고 있었다. 낙동강으로 병력이 파병되고 충주의 국원성에 병력과 물자가 집중되기 시작했다. 고구려 군대는 주로 현지에서 생산이 불가능한 보급품을 챙겼다. 소백산맥을 넘은 5만의 군대 가운데 기병이 먼저 신라의 왕경을 향했다. 고구려 기병들이 신라의 왕경으로 향하고 있다는 소문이 벌써 왜군의 귀에 들어갔다. 왜군은 백제를 통해 고구려 군대가 얼마나 야수 같고 거칠며, 동시에 규율이 잘 잡혀 있는지 알고 있었다. 그들은 낙동강 유역에 있는 가야의 소국들로 도망치기 시작했다. 고구려 기병은 바람처럼 달려가 활을 쏘았다.


고구려군이 김해의 임나가라(금관가야)의 종벌성에 도착하니 왜군은 아무도 저항하지 않았다. 이 성은 고구려군이 가야지역을 공략하는 데 중요한 거점이 되었다. 이로써 왜군이 한반도 남부에서 일소되었다. 낙동강에서 바다로 나가는 출구인 김해가 고구려의 손에 떨어졌다. 고구려 군대는 사천만을 점령했고, 만의 입구에 있는 창선도를 장악했다. 고구려는 가야의 철이 바다로 나갈 수 있는 두 개 수로의 출구(김해, 사천)를 봉쇄했다. 가야의 철 시장이 고구려의 손에 들어갔다.


석유 가격 급등의 직접적인 원인은 미국이 이라크 반군의 저항을 효과적으로 제압하지 못한 데에서 비롯되었다. 석유 소비가 급증하고 있는 가운데 이라크 내 치안 불안으로 석유 증산이 불투명했던 것이다. 하지만 최근 치안이 점차 좋아지자 생산량이 크게 늘어나기 시작했다. 엑슨과 칼텍스를 비롯한 미국 석유회사들은 미국이 이라크를 완전히 장악하길 간절히 바라고 있다. 부시 행정부의 이라크 침공을 부추겼을 그들이 바로 최대의 수혜자가 될 수도 있다.


전쟁에서 승리하면 예상 이익이 막대하다는 것을 절감한 광개토왕은 군대 투입을 결정했다. 그해(400년) 2월 요하 서쪽 후연의 공격을 받고 서북방의 영역을 상당히 상실했는데도 광개토왕은 기수를 북으로 되돌리지 않았다. 대왕은 가야의 철 확보가 막대한 이익을 줄 것이고 향후 후연에 반격을 가하는 데 재원이 될 것이라고 판단했다.


두 사례가 우리에게 주는 메시지가 있다. 하나는 전쟁이 단순한 영토의 확장이라기보다 시장에서 유리한 고지를 점령하기 위한 작업의 일환이라는 점이다. 다른 하나는 시장 가격으로부터 자유로운 자는 거의 없다는 점이다. 



제2부 달러의 그늘
비단은 ‘사용가치’라도 있지만 달러는?: 중국의 비단과 미국 달러

1990년대 미국은 자유시장 개혁, 사유화, 달러 민주화라는 ‘복음’으로 무장하고 자본 이동의 벽을 허물기 시작했다. 배후에는 월스트리트의 금융기업들이 있었다. 인간의 자유가 아니라 자본의 자유였고, 그 자본은 달러였다. 1980년대 말 소련의 위협이 사라지자 자본주의 동맹국들에 대한 미국의 통제력도 약화될 터였다. 미 행정부는 ‘글로벌화’라는 덫을 개발했다. 눈치를 챈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1993년 아태경제협력체(APEC) 정상회담에서 미국은 동아시아 경제권에 대해 금융시장을 개방하라고 요구했다. 한국에도 해외 투자가 자유롭게 들어오고 나가도록 허용됐다. 한국의 고금리에 현혹된 외국 투자가들이 몰려 왔다. 외국인 증권 투자가 610억 달러까지 늘어났다(1991~1996년). 해외자본 유입에 따른 통화 증발과 인플레 압력을 상쇄하기 위해 정부와 한국은행은 유입된 외화를 외국으로 다시 내보내는 정책을 시도했다(불태화 정책). 만성적 국제수지 적자에도 불구하고(1996년 적자 237억 달러) 단기자본 유입으로 환율이 안정되었다. 분명히 왜곡된 현상이었지만 세계화 시대에는 국제수지 적자의 의미가 달라진다고 착각했다. 아시아의 다른 나라들도 달러의 유입에 휩쓸리고 있었다. 호화 부동산, 주식 등에 투기적인 거품이 일어났다.


국제 은행들로부터 받은 비밀 여신한도로 무장한 투기꾼들은 가장 취약한 태국을 골랐다. 1997년 4월 태국 바트화에 대한 투기 공격이 감행되었다. 6월 태국은 달러화에 대한 바트화의 고정환율을 폐기했고, IMF에 구제 요청을 했다. 헤지펀드와 은행들은 필리핀과 인도네시아를 강타했고, 곧바로 한국에 상륙했다. 1997년 12월 13일, 한국 정부는 IMF로부터 구제금융 580억 달러를 차입하는 약정서에 서명했다. 경제 운영은 IMF로 넘어갔다. IMF는 언제나 그렇듯이 고환율, 고금리 정책을 썼다.


이듬해 5월 1만 5000개 이상의 기업이 부도를 냈고, 정상 기업의 조업률도 60퍼센트 이하로 떨어졌다. 구제금융과 외환 사정 호전의 대가로서는 너무나 가혹했다. 고금리는 기업들에게 노동자의 임금 삭감, 정리해고 등을 강요했다. 많은 사람들이 빈곤으로 빠져들었고, 한국의 알짜배기 기업과 부동산이 헐값에 매각되었다. 서방의 투기꾼들과 금융자본들은 천문학적 이익을 챙겼다.


577년, 세계는 돌궐과 북주 양극 체제로 굳어졌다. 외척이었던 양견(수문제)이 북주의 실권을 잡았다. 그는 돌궐과의 전쟁을 염두에 두고 이란의 페르시아에서 만주의 고구려에 이르는 방대한 지역에 비단 교역에 대한 이권을 주겠다며 공작을 개시했다. 양견은 582년 수나라를 세웠다. 돌궐은 침공의 빌미를 잡았다. 5명의 칸은 40만의 기병을 이끌고 만리장성을 넘었다. 수는 엄청난 타격을 입었다. 이때 파발마가 도착했다. “폐하, 지금 돌궐 서군의 타르두칸 군대가 그들의 본거지로 철수했습니다.” 옆에서 듣고 있던 변경공작 전문가 장손성이 말했다. “폐하, 우리가 이전부터 공작해온 것이 이제 효과가 나타나는 것 같습니다. 사산조 페르시아와 유목민 에프탈이 중앙아시아의 서돌궐 본거지를 공격한 것이 확실합니다.”


2~3일 후 파발마가 또 다른 소식을 가지고 왔다. “폐하, 돌궐 중군을 이끌던 이쉬바라가 군대를 이끌고 고비사막 이북으로 철수했다고 합니다. 고구려와 키르키즈가 움직였다고 합니다.” 장손성이 말했다. “고구려와 키르키즈도 돌궐의 팽창으로 극심한 피해를 입었습니다. 돌궐은 고구려 휘하의 말갈족과 거란족을 많이 포섭해갔고, 고구려는 비단 교역에서 완전히 제외된 상태였습니다. 키르키즈도 돌궐의 공격을 받고 가난한 북쪽의 타이가 산림으로 밀려났습니다. 돌궐이 우리 중국을 공격하는 사이에 사산조 페르시아, 에프탈, 호탄은 서쪽에서, 고구려와 키르키즈는 동북쪽에서 각각 협공을 가했던 것입니다. 유라시아 대륙 전체를 상대로 한 우리의 대외공작이 대성공을 거둔 것이지요.”


역대 중국의 어느 왕조보다 수나라는 부유했다. 중국 비단은 세계 어디에서나 통용되는 달러화 같은 역할을 했다. 비단에 대한 수요가 지속되는 한 수나라의 영화도 지속될 것 같았다. 석유 거래를 오로지 달러화로만 결제하도록 하는 것이 미국의 정책이다. 석유 수입에 의존하는 나라들이 달러화를 필요로 하는 한 미국의 무역 위상이 약화되는 것을 막아준다. 적자를 달러화 발행으로 보충해온 미국에 후세인이 도전했다. 그는 “앞으로 이라크 원유 결제 통화를 달러화에서 유로화로 전환하겠다”고 선언했다(2000년). 이란과 인도네시아 등이 동조할 움직임을 보였다. 2003년 3월 이라크를 침공해 사담 후세인 정권을 붕괴시킨 미국이 가장 먼저 한 일은 석유수출 결제 대금의 달러화 환원이었다.


수가 예전의 약속을 지키지 않자 고구려가 도전했다. 비단의 최대 산지인 하북평원과 인접한 요서에 군사적인 위협을 가했던 것이다. 나아가 고구려는 수의 영향 아래 있던 돌궐에 접근해 곡물을 주고 전마를 받아갔다. 만주의 곡물은 돌궐을 부흥시킬 가능성을 높이고, 몽골의 말은 고구려를 더욱 강력하게 만들 터였다. 612년 수가 고구려를 침공했다. 하지만 결과는 재앙이었다. 30만이 전사했고, 고구려는 그들의 뼈를 모아 승전 기념탑을 만들었다. 살아 돌아온 병사들이 수나라 전역에 공포의 씨앗을 뿌렸다. 수의 무능이 만천하에 증명되었고, 고구려 침공에 가장 많은 물자와 노력을 부담한 하북에 반란의 기운이 무르익었다.


달러화에 대한 반란이 다시 시작되었다. 이란이 석유수출 대금을 유로화로 받을 것이라고 선언했다(2007년). 시리아가 그 뒤를 이었고, 베네수엘라도 호응하고 있다. 중국, 러시아도 자국 통화로 달러를 대체하려고 한다. 달러화 약세가 계속되는 가운데 카타르와 아랍에미리트의 중앙은행들이 유로화 매입에 적극 나섰다. 돈놀이꾼 미국의 주먹이 약해진 것을 직감한 것이다. 미국은 순조롭게 이라크를 접수했지만 게릴라들의 저항으로 전쟁은 끝없는 늪에 빠졌다. 미국의 군사력이 한계를 드러냈고, 부동산 시장에 위기가 닥쳐와 미국 금융기업에 치명타를 날렸다.


중국의 비단과 미국의 달러는 성격이 다르다. 비단은 사용가치가 있지만 달러는 교환의 종이 증서일 뿐이다. 하지만 유통과 그 가치에 있어 유사한 점도 있다. 중국 비단의 원활한 유통은 실크로드를 장악할 수 있는 수나라의 무력을 필요로 했고, 1971년 금본위제가 종식된 후 달러화의 가치는 아브람스 탱크, F16 전투기와 핵무기로 뒷받침되었다. 



제3부 먹거리시장 쟁탈전
사실은 거란에 농락당한 서희의 담판: 거란이 만든 1000년 전 WTO

국물 메이저가 담합해 곡물값 폭등을 조장한 사례는 비일비재하다. 1972년 세계 곡물 생산량이 약 3퍼센트 감소하자 쌀과 밀의 국제가격은 3배 이상 급등했다. 당시 미국의 곡물창고에 쌓여 있던 밀 재고분의 56퍼센트는 이미 곡물 메이저들이 점유한 상태였다. 1973년 닉슨 정부가 100일 동안 콩 수출 중단 조치를 내렸을 때도 국제가격이 4.6배나 뛰어올랐다. 그들은 창고에 콩 재고분의 91퍼센트를 쌓아두고 있었다. 1970년대의 식량 파동을 경험한 세계 각국은 증산에 나섰고, 1980년대에 들어서 상당 부분 식량 자급을 달성하게 되었다. 국제 농산물 가격이 하락했다. 이런 상황은 곡물 메이저에게 위협이었다.


곡물 메이저들은 우루과이라운드(UR) 협상 당시부터 WTO(세계무역기구) 체제하 국제 농산물 자유무역에 깊숙이 개입했다. 1993년 2월에 타결된 UR 협상을 통해 이뤄진 농산물의 무역자유화를 뒤에서 조종한 것이 바로 이들이다. 예컨대, 1986년 미국이 내놓은 농산물 자유무역안을 실질적으로 작성한 사람은 카킬 사의 부회장인 대니얼 암스테드였다. 2003년 멕시코 칸쿤에서 열린 WTO 농업 협상에서는 아예 카길이 미국 측 의견서를 작성했다. 곡물 메이저는 미국 정부뿐 아니라 세계 농업 정책 전반에 막강한 영향력을 행사한다.


문제는 1990년대 들어 곡물 수입국들 사이에 민영화 바람이 불면서 수요자는 분산되고 있는 반면, 곡물 메이저들은 오히려 인수와 합병을 통해 몸집을 키우면서 시장 지배력을 가속화하고 있다는 점이다. 이들은 ‘곡물 마피아’라 불릴 만큼 그 정체가 베일에 싸여 있다. 특정 국가에 요란하게 진입하지 않으며 진입해도 잘 드러나지 않는다. 자국 정부의 고차원적 곡물 수출정책에 기생하거나 편승해서 독점적 폭리를 취하고, 국내외에 거미줄 같은 정보망을 가지고 있을 뿐만 아니라 심지어 인공위성을 통해 밀, 옥수수, 쌀 등 세계 주요 농작물의 국가별 작황까지 수시로 파악하고 있다.


998년, 거란 장수 소손녕이 80만 대군을 이끌고 고려를 침공했다(1차 침공). 거란의 침공에 고려는 군사적 대응을 펼칠 준비가 되어 있지 않았다. 거란 침공 3개월 전, 여진은 고려에 거란이 곧 침입할 거라고 경고했다. 고려 조정은 이를 믿지 않았다. 고려의 방관적인 태도는 거란에게 있어서 확실한 기회였다. 무방비 상태에 처한 고려 조정의 겁먹은 관리들이 평양 이북의 땅을 거란에 할양하자는 주장을 내세우기 시작했고 이 의견이 우세해졌다. 단 한 사람, 서희가 여기에 반대했다.


서희는 자신이 거란과 강화를 시도하겠다고 주장했다. 청천강 부근의 천막에서였다. 그 안에는 고려의 서희와 거란의 소손녕이 앉아 있었다. “당신들 말이요, 송나라와의 교역량이 거대하다고 들었소. 그런데 우리와의 교역에 왜 그렇게 인색하시오?” 서희가 대답했다. “사실 우리 고려는 당신들에게 사올 것이 없소. 가축은 동북만주에 있는 여진인들에게 구입하면 되고, 비단과 자기는 송에서 가져오면 되지요. 소 장군! 그러지 말고 이야기의 핵심을 말하시오. 원하는 게 무엇이오?” “여진은 지금 말의 최대 수출국이오. 우리도 매년 말 1만 필을 여진에서 들여오고 있소. 그런데 여진은 송에도 말을 판매하고 있소. 그 말들은 송나라 기병 육성의 핵심이 되고 있지요.” “그러니까 소 장군께서는 고려가 압록강 입구까지 북진해 이 부근에 있는 여진족을 몰아내기를 원하시는 것이군요.” “맞소. 압록강 이남의 땅은 고려의 것으로 인정해주지요.” 

 

소손녕은 군사를 돌이켰다. 그 직후 거란 왕의 허락을 받아 고려가 압록강 동쪽 280리의 땅을 차지하는 데 동의하는 서신을 보내왔다. 서희는 994년부터 3년간 압록강 동쪽의 여진족을 몰아낸 뒤 강동 6주에 성을 쌓아 고려의 영토로 편입했다. 강화 체결 후, 거란은 의주(내원성)를 확실하게 확보하게 되었고, 고려와 송의 공무역을 단절시켰다. 이로써 말이 송나라로 들어가는 모든 길이 막혔고, 송의 기병 전력에 치명상을 주었다. 이제 거란은 송에게 두려운 강적이었다.


1004년, 거란군이 하북성을 남하해 송이 건설한 소택지의 방어시설을 깨고 황하의 북안에 도착했다. 송군은 거란군 진영에 사절은 보냈다. 협상이 성립돼 송이 매년 비단 20만 필과 은 10만 냥을 거란에 증여하는 조건으로 거란군이 물러갔다. 그것은 거란의 경제 발전과 군비 증강의 자양분이 되었다. 거란은 그것을 고려를 침공하는 데 사용했다. 전쟁의 목적은 송과 고려의 교섭을 완전히 근절하는 것이었다. 1010년 거란은 40만 대군으로 고려의 주력 부대를 대파했고, 수도 개경까지 쳐들어가 철저히 유린했다(2차 거란 전쟁). 그것은 송과의 무역을 단절하고 거란을 통해 송의 물품을 구입해가라는 강력한 경고였다. 무역전쟁이었다. 거란은 고려, 송, 여진 삼국의 교역로를 거란의 초원 교역로에 편입시켜, 중개무역 차익을 얻어내고자 했다.


현재 식량, 원유, 원자재와 같은 자원 문제가 심각하게 대두되고 곡물 메이저들이 맹활약할 수 있는 무대가 제공되는 근본적 배경에는 WTO 체제가 있다. 거기에 가입하지 않을 수 있는 것이 세계 각국이 처한 현실이다. 자유무역에 기반을 둔 수출산업이 수많은 사람에게 일자리를 주고 있는데, 만약 WTO의 규정을 어기면 그 나라의 수출산업이 파괴될 것이 뻔하다.


1000년 전 세 번째 전쟁에 승리했지만 고려는 거란의 돈과 비단에 굴복했고, 결국 그 교역권에 편입되었다. 1000년 전 거란이 만들어낸 무역체계는 그 나라가 망한 후 여진족이 세운 금나라에게 계승되었고, 무력으로 고려에서 유럽까지 이어지는 교역망을 확보한 칭기즈칸과 그의 후손들이 세운 원제국에 의해 완성되었다. 원이 사라지자 고려도 사라졌다.
 


제4부 시장 속의 군주
판단은 빨랐고 결정은 냉혹했다: 고구려 장수왕과 이건희 회장

일본 「마이니치 신문」이 발행하는 경제주간지 「이코노미스트」는 최근 ‘일본 전자기업의 위기’라는 특집 기사에서 “창업 2세인 이건희 회장이 이끄는 삼성의 연간 순이익은 1조 엔을 돌파해 일본 7대 전자기업의 총순이익보다 두 배나 많다”면서 “이는 삼성의 반도체와 휴대전화, LCD 등에 대한 집중 투자와 젊은 인재 등용, 세계 각지 연구기술 인력의 대량 스카우트 등에 기인한다”고 분석했다. 


한국 역사상 최대의 외부 인력 유입은 436년 고구려 장수왕 때 있었다. 한때 북중국의 맹주였던 후연이란 나라를 그대로 이어받은 북연이 고구려에 사신을 보내 북연 황제의 망명을 청했다. 당시 북연은 북위의 공격으로 언제 나라가 망할지 모르는 상황이었다. 장수왕은 북연에 군대를 파견했다. 북연의 영토, 물자, 인력이 고스란히 북위로 넘어가는 상황을 결코 좌시할 수 없었기 때문이었다.


북연의 수도 화룡성을 사이에 두고 북위군과 대치하던 고구려군은 먼저 성 안으로 들어갈 수 있었다. 고구려군은 북연의 무기고로 향했다. 그들은 고구려에서 입고 온 갑옷을 벗고 북연의 A급 갑옷으로 바꾸어 입었고, 무기도 새것으로 교체했다. 고구려 군대는 맹수로 변해 북연의 왕궁을 향해 나아갔다. 약탈이 허락됐다. 노력에 대한 정당한 보상이었다. 화룡성의 화려한 궁정과 중원에서 살다온 귀족들의 대저택이 병사들의 사냥감으로 변했다. 약탈이 끝나고 약탈의 대상이 된 화룡성의 사람들을 집합시켰다. 그들 가운데는 중원의 고급 기술을 지닌 인력들이 많았다. 남녀 모두 군복을 입히고 30킬로미터의 거대한 대열을 만들었다. 북연의 황제 풍흥을 포함해 그 휘하의 모든 사람들을 데리고 고구려로 향하려는 참이었다. 대담한 시도였다. 고구려 기병은 대열의 외부에 있고, 북연인들은 행렬의 가운데에 서게 했다. 장군 갈로맹광이 이끄는 고구려 기병이 대열의 후부를 맡았고, 수레로 움직이는 벽을 만들었다. 일촉즉발의 상황이었지만 북위군은 끝내 고구려 기병의 행렬을 공격하지 못했다.


북위군이 아무런 반격도 하지 못하고 물러난 데에는 여러 가지 이유가 있다. 그 가운데 고구려군 배후에 성이 있었다는 것이 중요했다. 요하 서쪽의 숙군성은 화룡성과 지척의 거리였다. 401년 숙군성을 차지한 고구려 군대는 그곳을 서방의 주요한 전진기지로 활용하고 있었다. 북위군에게도 배후에 금방 점령한 화룡성이 있었다. 하지만 화룡성은 고구려군의 대대적인 약탈로 텅 비어 있었고, 화염에 휩싸였다. 이 사건의 결과로 북연의 수도에 거주하던 대부분의 고위 계층과 군인, 호구들이 고구려에 이입됐다. 북위는 고구려에 사신을 보내 북연왕과 그 백성, 병력의 송환을 강력히 요구했다. 장수왕은 일언지하에 거절했다. 전쟁도 불사하겠다는 자신감의 표현이었다.


만일 삼성이 반도체에 과감한 투자를 하지 않았다면 어떻게 되었을까. 반도체 산업은 초기 투자만 50억 달러가 필요하고, 메모리 반도체 1개 라인을 건설하는 데 1조 원 가량이 든다. 투자는 엄청난데 한발 늦게 개발된 제품은 곧장 쓰레기장으로 가버린다. 사업이 아니라 도박이라는 소리를 듣는 업종이다. 이건희 회장은 1970년대 초중반에 반도체 사업 투자를 아버지 이병철 회장에게 끈질기게 건의했지만 번번이 퇴짜를 맞았다. 하지만 결국 1983년 반도체 사업을 시작할 수 있었다. 436년 고구려가 북연에 군대를 파병하는 데는 반대의 목소리가 높았다. 위험한 일이었지만 고구려는 과감하게 도박을 했고, 성공했다. 장수왕이 다스리던 고구려는 부강해졌고, 고급 인력으로 넘치는 번영된 왕국이 되었다. 당시로는 중국의 남북조와 어깨를 나란히 하는 거대한 내수 시장을 만들어냈다.


종신으로 그 자리에 있을 수 있고, 왕태자 교육을 받았으며, 중요한 결단을 놓고 한 인간으로서 고독감을 느꼈다는 점에서 장수왕과 이건희 회장은 닮은 면이 있다. 장수왕은 아버지가 넓혀 놓은 영토를 물려받아 그것을 동아시아에서 가장 번영한 나라 가운데 하나로 만들었다. 이건희 회장도 한국 최고의 기업을 이병철 회장으로부터 이어받았고, 삼성을 세계적인 기업으로 키웠다. 양자는 공통적으로 넓은 영토를 원하지 않고, 작지만 강한 나라를 원했다. 장수왕은 과감하게 북연의 모든 영토를 포기하고 사람과 재물만 이끌고 고구려로 돌아갔다. 이건희 회장은 선택과 집중을 통해 돈 되는 사업에 경영 역량을 집중했다.


무엇보다 양자는 양심이나 도덕, 윤리에서 자유롭고 자기 목적을 수행하는 데서는 합리성과 현실적 유용성에 대한 판단만으로 행동할 수 있는 냉혹함의 소유자라는 점에서 공통점이 있다. 북연을 두고 북위와 대치하는 상황에서 철저하게 실리를 취한 고구려 장수왕은 이용가치가 없어진 북연의 황제 풍흥에게 대우를 해주지 않았고, 풍흥이 말썽을 일으키자 그의 아이들과 함께 죽여버렸다. 이건희 회장도 아들의 후계 구도를 굳히는 데 어떠한 이목도 두려워하지 않고 과감하게 실행에 옮겼다. 탈세 수준의 세금을 내고 말이다. 하지만 누구나 장수왕의 백성이 되기를 원했고, 삼성에 입사하는 것을 영광으로 여기고 있다. 양자는 자기 아래 사람들의 복리를 중요하게 여겼으며, 노력에 대한 대가를 철저히 인정했고, 더 많은 기회를 주었다.


  

제5부 자유 시장의 본질, 선량한 사기
반시장적 금기법은 악을 잉태한다: 황소와 알 카포네

소금 장수가 당나라의 수도 장안을 점령한 기이한 일이 벌어졌다. 물론 당시 일반인의 소금 매매는 불법이었다. 122년 전 안록산의 반란이 일어나 당나라 정부의 재정이 거덜났다. 황제는 급하게 소금 전매제를 실시했다(758년). 그 목적이 군사비를 충당함에 있었으므로 세율이 상당히 높았다. 처음에는 생산 원가가 10전에 불과한 소금 1말에 원가의 10배가 되는 100전의 세금을 부과해 110전으로 팔았다. 이것도 엄청난 고가였는데 정부의 재정난이 가중되면서 소금 값도 더 올라 310전, 370전까지 되었다. 


일반인들은 비싼 정부 소금을 사먹기 힘들었다. 그러니 이보다 훨씬 싸게 파는 불법적인 상인들이 생겨났다. 황소의 가문도 산동성에서 대대로 소금 밀매업을 하여 재산을 축적했다. 정부군의 단속을 막아내기 위해 행동대원들도 고용하고 있던 마피아 패밀리였다. 불법적인 사업은 너무 힘들었다. 관리도 매수하고, 행동대원들도 먹여 살려야 했다. 체포망이 황소의 조직을 향해 좁혀 왔고, 황소는 궁지에 몰렸다. 가만히 앉아 죽는 것은 억울했다.


그는 소금 밀매 조직망을 이용해 동지들을 규합하고 병력을 모았다. 그들을 괴롭히던 관원들이 절멸됐고, 관가는 점령당했다. 이제 반란군이 된 그들의 무리는 행동을 멈출 수 없었다. 황소는 무리들을 이끌고 다니면서 중국의 천하를 횡행했다. 황소는 한 곳에 정착해 영역을 확보하려고 하지 않았다. 그는 부유한 도시를 점령하고는 그곳에 축적된 물자를 소비하고 다른 곳으로 이동했다. 반란을 일으켜 중국의 내지를 남북으로 약탈하고 다닌 지 6년 만에 드디어 수도 장안을 점령했다.


대공황 시대 마피아 보스 알 카포네가 미국의 대도시 시카고를 실질적으로 장악한 적이 있다. 유능한 킬러를 거느린 그는 선거에 개입해 자신의 말을 듣는 시장과 주지사, 시의원, 노조 지도자들을 당선시키고 판사와 경찰들을 매수해 주물렀다. 뉴욕 브루클린의 빈민가에서 성장한 알 카포네는 10대에 학교를 뛰쳐나와 폭력을 배웠고, 20대에 시카고로 가서 1000명의 조직원을 거느리고 연 1억 달러의 순이익을 벌어들이는 마피아 보스가 되었다(1925년).


1919년 1월 16일 미국 의회에서는 알코올의 양조, 판매를 금지하는 헌법 18차 수정안이 비준되었다. 법안은 1920년 1월 9일 효력을 발생했다. 알코올중독이나 범죄 행위를 줄이기 위해서였다. 알코올에 굶주린 사람들은 암시장에서 술을 찾았다. 알 카포네의 상관이던 토리오는 매춘 조직과 윤락가를 이용해 밀주 사업을 벌이고자 했다. 아일랜드 갱, 유태계 갱, 폴란드 갱, 또 다른 이탈리아 갱 모두가 밀주 사업에 관심을 가지고 있었다. 아일랜드 갱의 보스인 오베니온이 이탈리아계 토리오에게 사기를 쳤고, 토리오는 오베니온을 제거했다. 아일랜드 갱들의 복수가 이어졌고, 토리오는 다섯 군데의 총상을 입었다. 토리오는 조직을 알 카포네에게 넘겼다.


알 카포네의 조직은 6000개의 밀주 판매점과 2000곳의 마권 판매소를 운영했으며, 매춘과 고리대금업, 나아가 노조의 이권에도 개입했다. 그가 얼마나 많은 사람을 살해했는지 알 수 없지만 미 정부는 그를 살인교사죄로 체포할 수 없었다. 모두가 증언을 거부했기 때문이다. 1931년 그는 결국 탈세죄로 체포되었다. 하지만 그가 없는 조직은 더 번창했다. 1933년 금주법이 파기되자 마피아들은 다른 사업을 찾아냈다. 그 가운데 하나가 할리우드의 영화 산업이었다. 금주법은 아이러니하게도 미국의 일개 불한당에 불과했던 갱들을 조직화시키고 거대 사업가로 만들었다.


황소의 반란은 10년 만에 진압되었지만(884년) 그의 동지들은 5대 10국이라는 분열의 시대에 소국의 주인이 되었다. 양자강 남쪽 일부를 점령한 오왕 서온과 사천성에서 전촉을 창건한 왕건, 절강을 영유했던 전류 등이 모두 소금 장수 출신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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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금의 공정 거래가가 비싸면 비쌀수록 암거래는 성하게 된다. 이에 대해 단속이 엄하면 엄할수록 암거래의 이익은 커지고 암거래 조직도 많아진다. 단속하는 관헌을 더욱 늘려야 하고, 그럴수록 단속 비용이 늘어나 소금 가격은 오르게 된다. 악순환의 수레바퀴가 돌아가면서 밀매 조직을 더욱 광범위하고 정교하게 만든다. 소금 전매법과 금주법이 우리에게 주는 메시지가 있다. ‘법에서 악이 배태된다.’ 금단의 사과에 대한 유혹이 원죄로 이어지듯 금기의 법은 언제나 범죄로 이어지는 것이다.

(본 정보는 도서의 일부 내용으로만 구성되어 있으며, 보다 많은 정보와 지식은 반드시 책을 참조하셔야 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