종래의 획일적이고 중앙통제적인 사회주의 경제 체제에서 벗어나 개방과 경쟁을 근간으로 하는시장경제 체제로 변화하고 있다. 이에 힘입어 우리나라도 작년 한 해 동안 26억 8000만 달러의 대 베트남 투자 실적을 기록하며 최대투자국으로 급부상하였다. 저자는 이런 베트남 경제의 변화를 현지 취재를 토대로 분석하였다.
1부에서는 베트남의 대외적인 위치, 경제산업의 변화 등을 소개하고, 2부에서는 경제 성장의그늘을 살펴보았다. 그리고 3부에서는 현재 한국과 베트남의 관계를 둘러보고, 앞으로의 발전방향을 모색하였다. 특히 가능한 한 실제 사례를 많이인용하여 베트남 경제의 실상을 면밀히 파악할 수 있도록 하였다.
■ 저자 차학봉
서울대학교 언론정보학과를 졸업한 후 조선일보에 입사해 수도권부와 경제과학부를 거쳐 산업부에서 부동산을 담당하고있다. 건국대 부동산대학원에서 「고령화에 따른 공간 구조의 분석」으로 석사학위를 취득했으며, 일본 게이오 대학에서 방문연구원으로 일본의부동산시장과 국토 정책을 연구했다.
저서로 『일본에서 배우는 고령화 시대의 국토 - 주택정책』(삼성경제연구소)과 『부자들만아는 부동산 시장의 법칙』(조선일보사)이 있다.
■ 차례
제1부 기회의 땅 베트남
01 고도성장의 시발점, 도이머이 정책
02 세계 경제권 편입의 서곡, WTO 가입
03 어제의 적도오늘의 동반자
04 ‘엘도라도’로 부상하는 베트남 증시
05 빠르게 성장하는 IT 산업
06 젊은 인구가 경제 성장을이끈다
07 산유국 베트남을 아시나요?
08 베트남은 세계 쌀 수출 2위국
제2부 경제 성장의 그늘
01 부동산 투기붐이 인다
02 성장의 최대 장애물, 부정부패
03 지하경제의 나라
04 뿌리 깊은 지역감정
제3부 멀지만 가까운 나라, 베트남
01베트남인의 눈에 비친 한국
02 베트남을 동북아로 인식하자
03 불멸의 호찌민 주석
04 ‘대원군’이 존재하는 나라
05 비즈니스는 낮에 이루어진다
06 생활 필수품 오토바이
아시아의 젊은 호랑이 베트남
기회의 땅 베트남
빠르게 성장하는 IT 산업
젊은 베트남, 고도의 성장을 구가하는 베트남을 읽을 수 있는 또 다른 모습은 정보통신(IT)분야가 아닐까 싶다. 인터넷과 휴대폰 가입자 수가 2005년 9월 말로 각각 1,000만 명을 넘어섰기 때문이다. 경제적인 낙후성과 사회주의 체제의 폐쇄성에도 불구하고 여덟 명에 한 명 꼴로 인터넷과 휴대폰을 쓴다는 것은 경이로운 일이 아닐 수 없다.
IT 인프라의 급속한 확충
베트남의 IT시장은 IMF 외환위기에서 어느 정도 벗어난 2000년을 분수령으로 매년 30% 이상의 비약적인 성장세를 구가해왔다. 특히 2005년과 2006년 2년 동안에는 연간 50%의 성장을 기록했다. 이는 전 세계적으로도 유례를 찾아보기 힘든 가파른 성장세다.
베트남우정통신공사(VNPT)에 따르면 신규 전화 가입자 수는 2005년 8개월 동안에만 500만 명으로 집계됐다. 이는 베트남이 통일된 1975년부터 2000년까지 25년 동안의 가입자 수보다 배가 많은 기록이다. 그러나 이런 급증세에도 불구하고 전체 인구 가운데 전화 보유자는 2,000만여 명으로 보급률이 24.4%에 불과한 실정이다. 흥미로운 것은 전화 가입자 가운데 55%가 유선전화보다는 휴대전화 가입자라는 점이다. VNPT 산하의 비나폰과 모비폰, 한국의 SKT 등 이동통신 사업자들이 가격 인하 경쟁 등 판촉을 강화하면서 앞으로 2년 사이에 휴대전화 가입자 수는 2,000만 명을 넘어설 것으로 전망된다.
인터넷 부문의 성장세도 놀랍기는 마찬가지다. 1997년 상업 서비스를 시작한 인터넷의 사용자 수는 2006년 8월 말 현재 1,340만여 명으로 집계됐다. 인터넷 사용자 수의 증가율은 매년 100%를 넘어섰으며, 오는 2010년에는 전체 인구의 35% 가량인 3,000만 명이 인터넷을 사용할 것으로 예상된다.
인터넷 부문의 고성장은 해와 기업들의 본격적인 투자로 연결됐다. 가장 발 빠른 투자업체는 미국 기업들이다. 세계 최대 IT 기업인 마이크로 소프트(MS)의 빌 게이츠 회장은 제 10차 전당대회가 열린 2006년 4월 말 베트남을 방문해 전폭적인 지원을 약속했다. 베트남의 IT 교육 인프라를 구축하는 데 지원을 아끼지 않겠다는 것이 약속의 핵심이다. MS사는 베트남에 생산 공장을 짓는 대신 2010년까지 5년 동안 IT 교육 전담 교사의 양성과 베트남 중학생의 IT 기초 교육을 약속했다.
IT 강국인 우리나라도 발 빠른 움직임을 보이고 있기는 마찬가지다. 이미 상당수의 한국 IT 업체들이 베트남에 현지 법인이나 지사를 설립해 은행 전산화 작업 수주 등 활발한 영업 활동을 벌이고 있다. 이 가운데 가장 눈에 띄는 것은 바로 IT 대학 설립 지원이다. 중부 다낭 시에 위치한 이 IT 대학은 한국 정부가 2003년 카이 총리 방한 때 약속한 것이다. 모두 1,000만 달러가 투입돼 2007년 9월 개교하는 이 대학은 매년 800명씩의 IT 전문가를 양산하게 돼 앞으로 청년실업 해소와 한국에 대한 이미지 제고에 크게 기여할 것으로 기대된다.
경제적 이익과 체제의 위협
베트남 정보는 인터넷에 대해서는 이중 잣대를 갖고 있다. 경제적 이익 못지않게 사회주의 체제를 유지하는데 인터넷이 자칫 큰 위협 요소로 작용한다는 판단 때문이다. 베트남 정부는 이미 2004년부터 대응책을 마련해놓은 상태다. 2004년 7월 도쭝따 우정통신부(MPT) 장관은 음란 및 반정부 내용이 담긴 웹사이트에 접근이 가능한 인터넷 카페와의 계약을 중지할 것을 FPT 등 인터넷 서비스 업체에 지시했다.
무소불위의 권력을 행사하는 공안부도 인터넷 카페에서의 신분증 제시 의무화를 주요 내용으로 규제 조항을 신설해 시행에 들어갔다. 규정에 따르면 인터넷 카페 주인들은 인터넷 사용 시간을 기입해야 하며, 사용자들이 방화벽(firewall)을 우회하지 못하도록 소프트웨어를 업그레이드해야 한다. 이와 함께 인터넷을 이용해 국가 기밀이나 국가 안보와 사회 질서에 유해를 끼칠 수 있는 내용을 유포하는 것을 금지했다. 위반자는 5,000만 동(3,200달러)의 벌금이 부과되거나 형사처벌을 받게 된다.
공안부는 여기에 만족하지 못하고 사이버 특공대를 발족해 불법 사용자들에 대한 단속을 강화하기 시작했다. 사이버 특공대는 정부나 공산당을 비판하는 내용의 글이나 사이트를 추적해 관련자를 적발하는 한편 사용자들이 불법으로 정부 기관이나 회사 사이트에 침투하는 해킹 행위 등도 단속하고 있다.
성장의 최대 장애물, 부정부패
2006년 5월 초 베트남 정부는 흥미로운 조치를 발표했다. 고속도로 톨게이트 관리자들의 부정을 막기 위해 모든 주머니를 없애라는 골자의 조치. 이번 조치는 특히 물 좋은 곳 으로 알려진 하노이에서 하이퐁으로 이어지는 5번 고속도로 톨게이트 근무자들을 직접적으로 겨냥한 것으로 부정부패의 실상을 엿볼 수 있는 사례다.
부정부패와 무사안일
베트남 공직 사회의 부정부패는 오래 전부터 발전의 가장 큰 저해 요소 가운데 하나로 지적됐다. 이의 심각성은 홍콩 정치경제위험자문공사(PERC)의 조사 결과에서도 잘 나타난다. PERC가 2005년 12월 아시아 지역 외국인 임원 96명을 대상으로 부패 정도에 대한 여론조사를 한 결과, 베트남은 인도네시아와 필리핀에 이어 조사 대상국 12개국9한국, 일본, 중국, 싱가포르, 대만, 말레이시아, 태국, 인도, 필리핀, 인도네시아, 베트남, 홍콩)가운데 세 번째로 부패한 나라로 지목됐다.
2005년 9월 2일 쩐득르엉 베트남 국가주석(대통령)은 베트남의 가장 큰 난제는 부정부패와 공직 사회의 무사안일이라고 일갈했다. 그는 독립 60주년 기념식에서 "여전히 많은 국민들이 빈곤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고 정치 체제는 여전히 전근대적이고 비효율적"이라고 지적한 뒤 "공직 사회는 관료주의, 낭비, 책임감 결여, 국가 통치권 비준수 등 많은 문제를 갖고 있으며, 특히 그들의 부정부패와 사회악은 큰 사회적 과제"라고 개탄했다.
그러나 그보다 큰 충격적인 발언은 3개월 뒤 나왔다. 폭탄 선언의 장본인은 레카피에우 전(前) 공산당 서기장이다. 1997년부터 2001년까지 베트남에서 최고의 권력을 구가한 피에우는 전국 일간지 <투오이쩨(청년)>와의 회견에서 당과 정부 주도로 진행 중인 부정부패 척결 사업과 관련해 "소리만 요란할 뿐 효과는 전혀 없는 것"이라고 직격탄을 날렸다.
이 회견에서 피에우는 "그러나 정작 심각한 것은 부정부패가 어느 특정 세력이나 부문에 국한된 것이 아니라 최고위층에서 최하위층까지, 최하위층에서 최고위층까지 만연돼 있다는 사실"이라고 주장했다. 그러면서 자신이 최고 권력기구인 공산당 정치국원에 재직할 때 일부 방문객들이 5천~1만 달러가 든 봉투를 건네주려고 시도했다는 사실을 털어놓았다. 봉투 안에 든 액수는 서기장이 됐을 때 더욱 늘어났다고 한다. 또한 뇌물 제공자들이 나중에는 돈을 자신에게 직접 전달하지 않고 꽃바구니 안에 넣어 탁자 위에 놓고 가는 경우가 대부분이었다고 고백했다. 피에우는 "이런 이야기를 털어놓는 것은 뇌물을 주고받는 경우가 너무 만연되어 있는데다 사람들도 이를 당연하게 여기기 때문"이라면서 "뇌물 수수 관행이 여전히 변하지 않아 비애를 느낀 나머지 언론을 통해 고백을 결심했다."고 주장했다. 그는 당 서기장 재직 때 강도 높은 부정부패 단속과 함께 정치국원들에 대한 사찰을 지시하여 실세 정적들로부터 반발을 초래함으로써 결국 서기장에서 축출된 인물이다.
권력과 조폭이 합세한 남깜 스캔들
공직 사회 부정부패의 특징은 구조적이며 만연해 있다는 점이다. 공직자들, 특히 고위 공직자들이 연루된 부정부패 사례 가운데 현지인들의 기억 속에 가장 생생한 것은 남깜 사건이다. 이 사건의 주범이자 폭력조직의 두목이었던 남깜(본명 쩡반감)은 이미 2004년에 형장의 이슬로 사라졌다. 그러나 이 사건의 여파가 아직도 계속될 만큼 베트남 전역에 엄청난 후유증을 몰고 왔다.
무엇보다 이 사건에 연루된 공직자 수만 155명에 이르렀다. 공직자 가운데에는 우리의 경찰청과 국정원을 합쳐놓을 정도로 무소불위의 권부인 공안부의 차관, 대검찰청 차장, 장관급인 방송국 사장 등이 포함됐다. 남깜 사건은 한마디로 권(權)?폭(暴) 스캔들로 정의된다.
사형이 집행됐을 당시 57세였던 주범 남깜의 성장 이력은 관심을 끌기에 충분하다. 남부 출신인 그는 청년기에 부두하역 노동자로 일하다 후에 남(南)베트남군에서 하사관으로 전쟁에 참전했다. 종전 후 호찌민 시의 폭력조직에 가입한 그는 다시 독자 세력을 확대해 2001년 12월 구속되기 전까지 오락장과 윤락 시설 등을 운영하는 한편 술집 주인 등으로부터 보호비 명목으로 엄청난 돈을 갈취했다. 그리고 이렇게 모은 돈으로 관계와 정계는 물론이고 언론계의 유력인사에 이르기까지 뒷돈을 제공하면서 보호막을 형성했다. 덕택에 그는 온갖 악행을 저지르면서도 10년 넘게 법망에서 교묘히 벗어날 수 있었다.
그가 관여한 사업은 매춘, 불법 도박 알선, 청부 폭력 등 다양했다. 밤의 황태자로 군림하던 그는 그러나 자신에게 반기를 든 반대파 폭력조직 두목의 살해를 지시한 사실이 드러나면서 본격적인 나락의 길로 접어들었다. 베트남 정부는 공무원 매수까지 포함된 남깜 세력의 비리에 대해 비등하는 여론을 무시할 경우 권위가 실추되는 것은 물론이고 자치 제 2, 제 3의 남깜 조직이 나타나 사회 체제에 도전 세력으로 등장할 것이라 판단했고 특공작전을 방불케 하는 기습 검거를 통해 그를 체포하는 데 성공했다.
검은돈과 연결된 관료들의 부패가 사회?경제 발전의 발목을 잡는 가장 큰 요인 가운데 하나임을 인식한 베트남 공산당과 정부는 그에 대한 일벌백계(日罰百戒) 의지를 과시하기 위해 남깜의 비호 세력으로 알려진 고위 인사들을 검거해 법정에 세웠다. 비등하는 여론을 일시나마 잠재우기 위해서 법원은 연루된 고위 공직자들에게 모두 중형을 선고했다. 그러나 중형 선고에도 불구하고 여진은 계속됐다. 남깜의 총살형이 분명히 집행됐는데도 불구하고 세간에는 소문이 끊이지 않았다. 남깜은 유력자의 특별 배려로 제 3국으로 탈출하고 다른 인물이 변창한 채 사형을 당했다는 근거 없는 소문이 계속 나돌았다.
멀지만 가까운 나라, 베트남
베트남을 동북아로 인식하자
베트남은 분명히 지리적으로 동남아에 속한다. 이를 반영하듯 아세안(ASEAN, 동남아국가연합) 회원국이기도 하다. 최근에는 태국, 말레이시아 같은 역내 국가들과 교역 확대 등을 통해 열심히 관계를 강화하고 있다. 그러나 그렇다고 해서 베트남을 계속 동남아권 국가로 인식하거나 취급하는 것은 실상을 모르는 것이나 마찬가지다. 문화? 역사적으로 베트남은 차라리 중국이나 우리나라 같은 동북아권에 가깝다.
베트남인들 스스로도 이런 사실을 굳이 부인하지 않는다. 비상한 손재주, 근면성, 명석한 두뇌, 은근한 끈기, 높은 교육열, 외세에 대한 끈질긴 항쟁 의지 등은 동남아권에서는 거의 찾아보기도 힘든 요소다. 실수에 대해 인정보다는 변명으로 일관하는 모습, 체면을 중시하는 경향, 깊은 지역감정, 노골적인 외세 거부 풍조 역시 동북아적인 요소로 인식된다.
우리는 베트남을 동남아 국가의 하나로 인식하는 경향이 강하다. 그러나 우리와 핏줄의 근원이 같고 동질한 유쿄 문화를 가진 베트남을 여전히 동남아권에 묶어둘 경우 득보다는 실이 더 많을 것이다. 현지를 방문하는 한국인들이 이구동성으로 털어놓는 친밀감의 배후에도 혈연과 문화적 동질성이 자리 잡고 있음을 주지해야 한다. 포괄적 동반자 관계인 한국과 베트남의 현재와 미래를 더욱 발전시키기 위해서라도 동북아 개념으로 베트남을 이해하는 것이 좋다.
베트남과 월남은 어떤 차이일까?
"베트남과 월남은 틀린가요?"
베트남에 대해 상당수의 사람들이 묻는 질문이다. 베트남의 현대사를 아는 사람들은 호찌민(胡志明) 주석(1969년 사망)에 세운 북부 정권을 월맹(越盟)으로, 미국의 후원을 받은 남부 정권을 월남(越南)으로 각각 지칭했기 때문에 베트남과 월남 두 단어가 같은 것이 아니라고 주장한다.
결론부터 말하면 베트남과 월남은 같은 의미다. 베트남을 한자로 표기하면 월남(越南)이 되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월남이라는 말은 언제 생겨났을까? 월남이라는 말이 처음 선을 보인 것은 베트남 최후의 왕조인 응웬 왕조의 창시자 응웬푹아인(阮福映)이 재위하던 1803년경이다.
프랑스의 도움으로 남부에서 반군 세력을 진압한 뒤 정적들의 근거지인 하노이 등 북부 지역에 대한 진격을 준비하던 응웬푹아인은 1802년 6월 조상의 도읍지인 중부의 푸쑤언(훼)에서 연호를 쟈롱(Gia Long, 嘉隆)으로 정했다. 쟈롱은 호찌민 시(옛 사이공)의 합성어로, 베트남 전역을 의미한다. 그는 한달 뒤 탕롱(昇龍)에 거의 무혈입성을 함으로써 지금의 영토를 포괄하는 최초의 왕조를 탄생시켰다.
응웬푹아인은 이듬해인 1803년 청나라에 사신을 보내 자신을 국왕으로 책봉해줄 것과 국호를 남비엣(南越)으로 해줄 것을 요청했다. 청조는 국왕 책봉에는 별다른 이의를 제기하지 않았으나 국호에 대한 승인은 거부했다. 중국계 관리 출신으로 진(秦) 제국 말기인 기원전 207년 지금의 중국 광동(廣東)성 판위(番禹)를 수도로 남비엣 왕조를 세운 찌에우다의 악몽을 연상케 한다는 이유에서였다. 한마디로 중국의 지시에 순종하지 않고 기회가 있을 때마다 독립국으로서 대항해온 역사를 되풀이하게끔 놓아둘 수 없다는 것이다.
그러나 청나라는 이 문제를 오랫동안 방치할 수 없는 상황이었다. 백련교도들의 봉기로 골머리르 앓고 있던 청나라로서는 자칫 또 다른 골칫거리에 직면할 우려가 있었기 때문이다. 이에 따라 청나라는 골칫거리에 직면할 우려가 있었기 때문이다. 이에 따라 청나라는 이듬해인 1804년 남(南)과 월(越) 두 글자를 서로 바꿔 월남(越南)을 국호로 하는 것을 대안으로 제시했다. 응웬푹아인은 자신을 쟈롱 황제로 칭하고 중앙집권화 강화와 6부 설치 등의 정책을 별다른 어려움 없이 추진할 수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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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편 연세가 든 분들이 가끔 베트남산 쌀을 지칭할 때 사용하는 안남미의 안남(安南)이라는 말은 당나라 복속 시키인 769년에 처음 등장했다. 당시 당나라는 베트남에 있던 기존의 도독부(都督府)를 안남도호부(安南都護府)로 승격시키면서 베트남인들에 대한 감시를 강화했다. 도호부 설치는 당의 복속에 저항한 주변 민족들과 그들의 거주지에 대한 감독을 강화해 허튼 짓을 하지 않도록 하려는 의도를 담고 있었다. 이에 따라 남쪽을 안정시킨다는 안남이라는 말도 어떤 의미를 담고 있는지 쉽게 유추해볼 수 있다. 이후 안남이라는 명칭도 월남과 마찬가지로 베트남을 지칭하는 말로 널리 사용되기 시작했다.
(본 정보는 도서의 일부 내용으로만 구성되어 있으며, 보다 많은 정보와 지식은 반드시 책을 참조하셔야 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