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권에서는 제2차 세계대전 이후 펼쳐진 "카지노 시대"를 다루고 있다. 은행가들은 과거와달리 고객을 완벽하게 통제하지 못했고, 금융회사들을 살아 남기 위한 경쟁을 벌였다. 그들이 새로운 황금 어장인 인수합병 시장에서 벌였던 활약과영향들을 살펴보고 있다.
■ 저자 론 처노(RonChernow)
예일대학과 케임브리지 대학을 우등으로 졸업한 론 처노는 현재 미국에서 정치와 비즈니스 영역에서 가장두드러진 활약을 보이고 있는 시사평론가 중 한 명이다. 프리랜서 저널리스트로 경력을 쌓기 시작한 그는 1980년대 중반 뉴욕의 명문 싱크탱크인20세기 펀드에서 금융정책 수석 연구원으로 재직하면서, 경제사와 금융사 전문 저술가로서의 기반을 닦았다.
그의 저널리스트적 재능과 금융정책 연구자로서의 경험은 경이적인 데뷔작 『금융제국 J.P.모건』(1990)으로 결실을 맺는다. 4대에 걸친 J.P. 모건 제국의 놀라운 역사를 추적하고 있는 이 책은 그해 전미도서상을 수상했다. 또한1999년 모던 라이브러리가 선정한 20세기 100대 베스트 논픽션에, 2002년 「포브스」지가 선정한 가장 영향력 있는 경제 경영서 20권안에 그 이름을 올리면서 명실 공히 현대의 고전으로 인정받았다.
론 처노의 책으로는 『워버그 가문』(1993, 미국 도서관 연합회 선정 올해의 책),『은행가의 죽음』(1997), 『타이탄: 존 D. 록펠러의 삶』(1998, 「타임」지 선정 올해의 책), 『알렉산더 해밀턴』(2004,「뉴욕타임스」 선정 올해의 책) 등이 있다. 그는 전기를 저술하는 것 외에 「뉴욕타임스」와 「월스트리트 저널」등에 서평과 칼럼을 기고하고 있고, ■ 역자 강남규 감사의 글
건국대학교 정치외교학과를졸업하고, 영국 버밍엄 대학에서 머니, 뱅킹&파이낸스를 공부했다. 「한겨레」「이데일리」를 거쳐 현재 「중앙일보」기자로 재직하고 있다.옮긴 책으로는 『금융투기의 역사』『현명한 투자자』『월스트리트 제국』 『신용카드 제국』『위험한 시장』 『돈, 그 영혼과 진실』 『세계 금융시장을뒤흔든 투자 아이디어』등이 있다.
■ 차례
3부 카지노 시대:1948-1989
25장 무드셀라
26장 이단자
27장 요나
28장 타블로이드
29장사무라이
30장 아랍의 토후
31장 묘비명 광고
32장 삼바
33장 트레이더
34장 빅뱅
35장 불마켓
36장 마천루
주
참고문헌
사진 출처
J. P. 모건연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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금융제국 J. P. 모건 2
3부 카지노 시대 : 1948-1989
무드셀라
뉴욕의 J. P. 모건은 세심하게 이미지를 관리했다. 현관문에는 우아한 글씨체로 ‘23’이라는 숫자를 새겨놓았다. 대표 전화번호는 ‘하노버 5-2323’이었고 검은색 은행 캐딜락의 차량 번호는 ‘G-2323이었다. 오랜 전통을 보유하고 과거 귀족을 상대한 은행답게 엄격한 에티켓을 준수했다. 누군가를 만나러 갈 때 젊은 은행원들은 모자를 써야 했고, 저고리를 벗은 채 화장실을 가면 경력에 회복할 수 없는 오점이 찍혔다. 신탁 담당 부서의 여성 화장실에는 아무런 표시가 되어 있지 않았다. 그곳에 ‘여성용’임을 뜻하는 표시를 달아 놓는 것 자체가 신사들의 공간인 모건 은행에 어울리지 않았기 때문이다. 모건 은행 사람들은 겸손을 미덕으로 여겼다. 고객의 정보를 결코 외부에 발설하지 않았다. 재무제표에는 아무런 그림도 없었고, 광고는 엄격히 금지되었다. 신참 직원이 공보 담당에게 하는 일이 무엇이냐고 물었을 때 그 담당자는 “은행이 언론에 오르내리지 않도록 하고 월급을 받는다”고 말했다. 1950년대에도 J. P. 모건과 고객의 관계는 배타적이었고 고객을 놓고 다른 금융회사와 경쟁하는 일은 터부시되었다. 굳이 모건 은행을 널리 알려야 할 이유가 없었다.
이처럼 모건 사단은 은행의 신비로운 이미지를 한껏 자랑했지만, 허세가 많았던 것도 사실이다. 공보 담당 제임스 브루거는 “거대 기업 가운데 최고 기업과만 거래한다는 고고한 이미지는 새로운 시대의 기업가와 경영진에게 반감을 갖게 했다”라고 말했다. 이어 “은행은 1950년대 들어 길게 설명하지 않은 채 과거에 고수했던 신화 가운데 몇 가지를 버렸다”라고 덧붙였다. 머천트 뱅크 시절의 ‘은행가의 신사도’는 특정 은행과 고객의 배타적인 관계를 강조했다. 그러나 이 시기 들어 모건 은행은 그런 제왕적이고 수동적인 원칙을 견지할 처지가 아니었다. 휘트니는 ‘젊은 직원들’을 미국 전역에 파견해 고객 확보에 나섰다. 그는 고객의 지역적 분포가 광범위해지기를 원했다. 이런 변화를 지나치게 과대평가할 필요는 없지만, 모건 은행이 새로운 고객을 확보하기 위해 뛰어다녀야 했기 때문에 나이 많은 직원이나 간부들은 자존심에 상처를 입었다. 신탁 부서의 롱스트리트 힌턴이 말한 대로 ‘은행 내 몇몇 사람들은 잠재 고객이 은행과 비즈니스할 때 주도권을 행사해야 한다고 믿었고, 심지어 일부는 기존 고객이 다른 은행과 거래하려고 하지 않는다’고 생각했다.
J. P. 모건이 고수한 전통 가운데 하나는 요구불 예금계좌를 개설하기 위해서는 최저 잔액으로 100만 달러를 요구하는 것이었다. 그만큼 모건 은행 수표를 발행할 수 있는 인물이 줄어들었다. 그래서 모건 은행 수표는 세계 어디에서나 현금으로 인정되었고, 모건 은행의 계좌를 갖고 싶어 하는 기업의 임원들을 고객으로 끌어들이기가 수월했다. 1950년대 코미디언들이 “모건 은행의 창구 직원들은 100만 달러짜리 미소를 갖고 있고, 100만 달러를 지닌 고객에게만 웃어준다”라고 비아냥거릴 정도였다. 그러나 모건 은행의 이런 배타성은 자기 무덤을 파는 행위였다. 수많은 고객들이 경쟁 은행으로 발걸음을 돌렸다. 급기야 조지 휘트니는 연례 주주총회에서 ‘최저 잔고 100만 달러’를 부인했다. 「뉴욕 타임스」는 그의 발언을 인용해 “휘트니, ‘모건 신화’ 탈피”라는 제목의 기사를 내보냈다. 이어 “100만 달러 이하도 예금으로 받아”라는 말을 덧붙였다. 하지만 기사를 꼼꼼히 읽어 보면, 휘트니의 유보적인 태도가 발견된다. 결국 그는 개인 계좌를 열기 위해서는 잔고가 100만 달러는 되어야 한다는 인상을 남기고 만다.
요나
1960년대, 모건 개런티는 일본 금융시장을 방어하고 있는 ‘죽의 장막’을 뚫고 들어가기로 결정했다. 일본 도쿄에 있는 에이전트 사무소를 도쿄지점으로 정식 승격하기로 한 것이다. 당시 일본의 금융시장은 오늘날과는 견줄 수 없을 정도로 폐쇄적이었다. 모건 사단의 일본 진출을 허용해 주고 정치적 비판을 감수할 관료는 한 명도 없었다. 정부 당국자들은 일본에는 외국계 금융회사가 충분히 진출해 있다고 보았다. 더 허용하는 것 자체가 상당히 민감한 사안이었다.
그런 흐름 속에서 이오지마와 오키나와에서 일본군을 상대로 싸웠던 토머스 게이츠가 당시 수상인 미츠다 미키오에게 모건 개런티 지점의 설치 신청서를 제출했다. 게이츠는 일본인과 이야기할 때도 상당히 직설적인 어법을 구사했다. 그는 의전 절차를 생략한 채 무뚝뚝하게 지점을 허가해달라고 요청했다. 게이츠와 일본 수상의 만남에서는 어떤 타협도 이루어지지 않았다. 일본 정부는 모건이라는 이름에 대한 존경심과 경외감을 표현했지만, 모건 개런티가 허가를 받기 위해 29개월 동안이나 절절 매도록 했다. 결국 일본 재무부는 허가를 검토하면서 두 가지 조건을 내걸었다. 첫째는 일본정부와 협상한 내용을 일본 주재 미국 대사관에 알리지 말고, 둘째는 어떤 변호사와도 법률적인 문제를 논의하지 말라는 것이었다. 모건 개런티는 첫 번째 조건은 존중했지만, 두 번째 조건에 대해서는 콧방귀를 뀌었다.
모건 개런티와 일본 정부의 협상은 인내심 경쟁과 같았다. 모건 개런티는 한숨을 내쉬고 어깨를 으쓱하고, 어려움을 넌지시 알리는 것까지 세심하게 조율하는 일본인 대표를 통해 협상을 진행해야 했다. 또한 모건 개런티는 사절을 파견했을 뿐만 아니라 초기에는 국제 금융 책임자인 존 메이어가 직접 참여하기도 했다. 1969년 토머스 게이츠의 뒤를 이어 모건 개런티의 회장으로 선임되는 메이어는 전후 은행가 가운데 드물게 엄격하고 유머 감각이 없는 인물이었다. 큰 키에 돌처럼 단단해 보이는 몸을 지닌 그는 둥근 대머리에다가 숱이 많은 눈썹을 가지고 있어서 일본인들에게 사무라이 같다는 인상을 주었다. 그는 미소를 보이는 경우가 드물었고 파이프 담배를 빠는 모습으로 순간적인 심기를 드러냈다. 방대한 경험과 엄청난 사실을 기억하고 있으면서 어떤 일이 발생하면 몇 수 앞을 내다보는 인물이었다. 그가 모건 하우스에 합류한 이후 보여준 철저함은 가히 전설적이었다. 1927년 개런티 신탁에 입사한 그는 40년 전에 자신이 다룬 철도회사 채권의 세세한 내용까지 기억했다.
메이어는 모건 하우스의 전통인 비밀주의와 꼼꼼함을 되살려 이후에도 유지되도록 했다. 또한 그는 정치 상황이 변했다는 사실을 알면서도 모건 은행의 총수 가운데 대외 활동을 가장 적게 한 인물로 꼽혔다. 메이어는 전 세계 금융시장에 대한 방대한 정보를 수집하고 분석해 기억했다. 한 동료는 “메이어는 CIA에서 일했어야 할 사람이었다.”라고 평가하기도 했다. 전설적인 체력을 보유했던 인물인 메이어는 일본의 후지산을 올라 행복했던 주말을 오랜 기간 기억했다. 그는 후지산을 오르면서 일본인의 체력을 능가했다. 그가 도쿄에 있는 로런에게 필요한 게 무엇인지를 물었을 때마다 로런은 “인내심! 인내심! 인내심!”이라고 대답했다. 끝내 그 인내심은 보상받았다. 모건 개런티는 1952년 이후 미국 은행으로선 처음으로 죽의 장막을 뚫고 도쿄에 지점을 설치한 은행이 된다.
아랍의 토후
전 세계 은행 업계가 짙은 암운에 눌려 있는 가운데 갑자기 서광이 한 줄기 비쳤다. 오일 달러였다. 아랍이 석유 금수 조처로 세계 금융시장에 암운을 드리우는 한편 치유책마저도 내놓고 있는 모양새였다.
런던의 모건 그렌펠에 오일 달러 홍수는 운명적인 사건이었다. 이 은행은 인수합병 붐이 가라앉기 시작한 1960년대 후반 오일 달러와 인연을 맺는다. 당시 모건 그렌펠은 자본금 부족으로 생존을 위해 몸부림치고 있었다. 1972년 영국이 아닌 유럽 금융시장에서 파운드화 표시 증권, 즉 유로파운드 증권의 발행을 처음으로 주관했지만, 유로 마켓에서 최고가 되기에는 자본금이 빈약했다. 탈출구가 보이지 않는 상황이었다. 석유 파동으로 대공황이나 다름없는 불황이 산업계를 짓누르는 바람에 영국의 수출은 극도로 침체했다. 더 시티는 1973년과 1974년 사이 이자율 상승과 부동산 시장의 거품 파열, 제2 금융권 위기에 홍역을 앓았다. 라자드의 풀 경은 이런 와중에 어떻게 살아남을 계획이냐는 질문에, “단순 명료하다. 이튼 출신에게만 여신을 제공할 작정이다”라고 말했다.
안팎의 위기에 시달리던 모건 그렌펠에게 아랍의 오일 달러는 구세주나 마찬가지였다. 철저한 비밀주의와 영국 머천트 뱅크의 귀족적인 스타일에 이끌린 아랍의 토후들은 더 시티의 대표적인 은행인 모건 그렌펠에 거액의 오일 달러를 맡겼다. 그들은 런던의 오래된 건물을 너무도 좋아했다. 영국 외무부는 미국의 국무부보다 아랍 사람들의 주장에 훨씬 동조적이었다. 그래서 모건 그렌펠의 부회장인 크리스토퍼 워팅턴은 “우리 은행은 중동에서 제대로 대처할 수 없는 미국을 이용할 수 있다”며 “우리는 그들에게 토네이도 전투기를 팔 수 있지만 미국은 의회 때문에 아무것도 할 수 없다”고 말하기도 했다. 모건 그렌펠은 오일 달러를 유인할 수 있는 또 다른 장점을 가지고 있었다. 런던의 수많은 머천트 뱅크들은 유대인 가계에 기원을 두고 있었다. 그 때문에 오일 달러를 들고 런던은 찾아온 아랍의 토후들은 그레이트 윈체스터 23번지에 몰려들 수밖에 없었다. 오일 달러 전성기인 1970년대 중반 모건 그렌펠의 순이익 가운데 70퍼센트가 아랍 지역 고객 덕분이었다.
모건 그렌펠 내부에서 오일 달러를 유치하는 일은 초기에 존 스티븐스 경의 몫이었다. 세계 곳곳을 다녀 보았던 경험을 가지고 있을 뿐만 아니라 영란은행 고위 임원을 지낸 스티븐스는 이란의 중앙은행에 자문을 해준 적도 있었다. 그는 모건 하우스의 깃발을 옛 대영 제국의 전초 기지인 홍콩과 싱가포르, 오스트레일리아, 뉴질랜드에 꽂았고, 모스크바와 일정한 커넥션을 유지했다. 영국 외무부에서 영입된 데이비드 벤덜은 라틴 아메리카에서 그와 비슷한 구실을 했다.
과거 모건 그렌펠은 해외에서 금융 플레이를 펼칠 때 화이트홀과 긴밀하게 협의했다. 1970년대에도 영국 정부가 외국과 관계를 돈독하게 하기 위해 활용한 정부 보증 수출 금융을 전문적으로 수행하고 있었다. 덕분에 모건 그렌펠은 아랍 국가인 오만과 요르단에 영국 기업들이 정유 시설 등 플랜트뿐만 아니라 무기를 수출하는 일에 깊숙이 개입할 수 있었다. 또한 동유럽 국가들과의 교역에도 발을 들여놓을 수 있었다. 1975년 모건 그렌펠은 정부가 보증한 수출 계약을 적극적으로 뒷받침한 공로로 여왕 상을 받은 최초의 머천트 뱅크가 되었다. 모건 그렌펠은 변화무쌍한 인수합병 시장의 격변에 시달리면서도 이 수출 금융 덕분에 재무제표의 건전성을 유지할 수 있었다. 숨 막힐 정도로 답답한 머천트 뱅크의 전통적인 업무인 수출 금융이 은행의 구세주가 된 셈이다.
묘비명 광고
모건 스탠리의 독보적인 지위를 위협하는 가장 큰 요인은 유명하지만 아무런 실익이 없는 고집, 즉 기업 공개나 증권 공모를 알리는 묘비명 광고에서 자사 이름이 가장 먼저 나와야 한다는 것이었다. 그 묘비명 광고에는 검은 띠가 가장자리에 둘러쳐져 있었다. 묘비명 광고에 나타난 서열은 월스트리트 투자은행들의 생사를 가르는 중대한 문제였다. 윗자리를 차지하거나 괄호로 표시된 투자은행에는 많은 물량이 배정된 반면, 밑에 처져 있는 투자은행에 돌아가는 물량은 많지 않았다. 괄호 안에 들어가 있는 투자은행의 순서는 알파벳에 따르는 게 관례였다. 월스트리트 투자은행들이 ‘알파벳 대전쟁’을 치른 1976년 하슬리 스튜어트는 괄호 안에서 앞에 나오기 위해 배치(Bache)라는 파트너의 이름으로 회사명을 바꾸기까지 했다. 이는 웃을 일이 아니었다. 1964년 5월 13일, 콤새트가 증권을 발행할 때 투자은행 월스턴(Walston)이 알파벳 순서에 따라 후순위로 밀리자, 다음 날 최고 경영자 버논 월스턴이 권총을 쏴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 월스트리트는 전율해야 했다.
1960년대 말과 1970년대 초 묘비명 광고에서 윗자리를 차지한 투자은행은 모건 스탠리와 퍼스트 보스턴, 쿤 로브, 딜런 리드였다. 이들 가운데 모건 스탠리와 퍼스트 보스턴이 대부분의 증권 인수에서 주간 투자은행으로 구실했다. 모건 스탠리는 주간 투자은행으로서 증권 인수에 따른 수수료 수입을 늘 독차지하려고 했다. 한 전직 임원이 “내가 처음 모건 스탠리에 갔을 때 ‘우리의 시간 가운데 50퍼센트는 증권을 발행하려고 하는 기업의 관계자를 겁주어 우리를 유일한 주간 투자은행으로 정하도록 하는 것이다. 우리는 여전히 잘 나가고 있다’고 말하는 것을 들었다”라고 증언할 정도였다. 모건 스탠리가 묘비명 광고의 왼쪽 위에 있는 투자은행 자리에 유일하게 이름을 올려야 한다고 고집하는 것은 일종의 자아도취였다. 모건 스탠리의 이런 고집 이면에는 1970년대 이전 세일즈 능력이 부족해 여러 투자은행과 매매 중개 전문 증권사로 신디케이트를 구성해 세를 과시해야 하던 현실이 작용했다. 이는 모건 스탠리 사람들이 드러내놓고 말하기 어려운 요인이었다. 루이스 버나드는 “모건 스탠리가 월스트리트 사람들이 임금님이 벌거벗은 사실을 알지 못하도록 해야 했다”라는 말로 그 요인을 설명했다. 다른 투자은행들도 단독으로 인수 업무를 주간하고 싶어 했지만, 횟수 면에서 모건 스탠리를 따라잡지 못했다.
그런데 모건 스탠리는 이 방침을 고수하는 바람에 공동으로 인수하라고 요구하는 강력한 기업들을 놓쳐야 했다. 일본 정부가 무모하게 한때 모건 스탠리와 퍼스트 보스턴을 공동 인수자로 내세우려고 했던 사례도 이 경우에 해당했다. 모건 스탠리가 증권 인수를 포기한 또 다른 경우는 재봉틀 회사인 싱어였다. 이 회사는 인수합병을 도와준 골드먼 삭스를 공동 인수자로 지정해 인수합병에 기여한 공로를 보상해 주려고 했지만, 모건 스탠리가 공동 인수를 거부해 버렸다. 하지만 과거 듀퐁에서 J. P. 모건까지 수많은 기업들이 모건 스탠리의 단독 플레이를 인정하고 따랐다는 점은 풀리지 않은 미스터리라고 할 수 있다.
삼바
라틴 아메리카 채무 위기가 본격화한 사건은 1982년 4월 포클랜드 전쟁이었다. 이 전쟁은 라틴 아메리카에 여신을 제공한 은행들 입장에서 보면 암운이었다. 그 지역의 불안이 본격적으로 드러나는 계기이기도 했다. 아르헨티나가 포클랜드를 점령하자, 영국은 보복 조처로 이 나라가 런던에 보유한 금융 자산을 동결해 버렸다. 군사적 충돌이 끝난 뒤 모건 하우스는 영국과 아르헨티나의 관계를 회복시키기 위해 비밀리에 움직였다. 영란은행과 아르헨티나 중앙은행은 서로 체면을 살리면서 관계를 회복하는 방법을 알지 못했다. 누가 먼저 말을 걸 것인가? 이때 모건 은행의 라틴 아메리카 담당 부회장인 안토니오 게바우어가 중재자로 나섰다.
두 나라의 중앙은행 대표자들이 뉴욕으로 날아와 월스트리트 23번지 회의실에서 마주 앉았다. 이는 전쟁까지 치른 두 나라의 금융가들이 처음 만나 어색한 분위기를 털어 내는 자리였다. 전쟁 이후 서방 은행들은 라틴 아메리카 국가들의 신용도를 파악하는 게 더욱 어려워졌다. 미국 내 지방 은행들은 브라질이 훌륭한 사회 간접 자본을 보유한 교과서적인 나라라는 모건 은행의 평가에 동의하지 않았다. 오히려 당시 세계 최대 규모인 900억 달러의 빚을 지고 있고, 매달 15억 달러를 빌려야 현상을 유지할 수 있는 나라라고 판단했다. 모건 은행은 브라질 중앙은행 총재인 카를로스 랑고니를 뉴욕으로 불러 다른 은행의 우려를 불식시키라고 요구했다. 모건 은행은 이와 함께 국무장관이고 한때 건설 회사 벡텔의 회장을 지냈을 뿐만 아니라 1970년대 모건 은행의 이사를 지낸 조지 슈츠와 브라질의 재무장관 에르나네 갈베아스가 나란히 브라질-미국 상공회의소가 주는 상을 받는 이벤트를 연출하기도 했다. 본래 슐츠는 사적인 이익과 공적인 목적이 마구 뒤섞이는 그런 자리에는 잘 가지 않았던 인물이었다.
멕시코가 1982년 8월 짊어지고 잊는 빚 870억 달러를 제대로 갚을 수 없다고 청천벽력 같은 선언을 했다. 멕시코의 디폴트는 라틴 아메리카 전체에 대한 불신과 불확실성을 극도로 고조시켰다. 당시 그 지역 국가들은 급등하는 이자율 상승과 글로벌 경제 침체, 원자재와 농산물 가격의 급락에 알몸으로 노출되어 있었다. 브라질 주재 미국 대사인 랭혼 머틀리는 1982년 9월 21일 멕시코 사태의 여파로 “일본 은행들은 라틴 아메리카에 대한 여신을 회수하여 탈출하고 있고, 유럽 은행들은 겁에 질려 있다. 미국의 지방 은행들은 브라질에 대해서는 말을 들으려 하지 않는다. 미국의 메이저 은행들은 사태를 예의 주시하면서 비즈니스를 진행하고 있다”며 서방 은행들이 브라질 채권을 긴급히 회수하려 할 것이라고 국무부에 보고했다.
브라질 대통령은 1982년 10월 유엔에서 연설했다. 경제기획장관 네토와 재무장관 갈베아스는 연설 직후 ‘더 코너’를 방문해 비밀 협상을 벌였다. 멕시코 사태에 겁을 먹은 모건 은행은 단기 채권 30억 달러를 이미 회수한 상태였다. 두 사람은 신규 자금으로 25억 달러에서 30억 달러를 지원받고 기존 채무의 만기 연장과 이자율 인하 등 채무 조정을 받는 것 외에는 디폴트를 피할 길이 없다고 생각했다. 일반적으로 채무 조정을 위한 채권 은행 회의가 진행되면, 가장 많은 채권을 보유한 은행이 모든 과정을 주관한다. 하지만 브라질 사람들은 안토니오 게바우어의 능력을 철석 같이 믿고, 미국의 다른 4대 은행이 더 많은 채권을 보유하고 있었지만 모건 은행이 채권 은행 회의를 주관해 주기를 바랐다. 당시 시티 은행은 브라질에 46억 달러를 꾸어 준 상태였기 때문에 일반적인 프로토콜에 따른다면 당연히 채무 협상의 주간 은행이 되어야 했다. 게바우어는 난처한 느낌을 줄이기 위해 시티 은행과 공동으로 채권 은행 회의를 주관하기로 했다. 그는 브라질 사람들에게 “채권 은행이 요구하는 절차를 따르도록 하라”고 말했다. 시티 은행은 게바우어의 제안에 묵묵히 따랐다.
트레이더
월스트리트의 관행과 전통에 대한 공식적인 장례식이 1982년 3월 거행되었다. 증권거래위원회가 규정 415호를 제정해 이른바 일괄 등록제(shelf registration)를 도입한 것이다. 이는 획기적인 혁명이라고 평가받고 있다. 기업은 이전까지 신규 채권이나 주식을 발행할 때마다 금융 감독 당국에 유가 증권 발행 신고를 하고 심사를 받아야 했다. 그러나 일괄 등록제가 도입된 이후 기업은 2년 이내에 발행할 물량을 전액 금융 감독 당국에 신고해 심사를 받은 뒤 채권이나 주식을 회사 내 선반에 쌓아 놓고, 필요할 때 매각해 필요한 자본을 유치할 수 있게 되었다. 기업의 재무 책임자는 자사 채권의 시장 이자율이 낮을 때, 바꿔 말해 자사 채권의 시세가 높은 순간 잽싸게 자금을 조달할 수 있게 되었다. 규정 415호의 제정으로 투자은행의 업무는 모건 스탠리가 이전까지 해 왔던 스타일, 즉 몇 주에 걸쳐 신디케이트를 구성하고 증권을 인수하는 형태가 아니라 순식간에 촌각을 다투며 트레이딩하는 형태가 되었다. 발행 기업도 투자은행에 증권을 배분하거나 뮤추얼과 연기금 펀드에 증권을 직접 매각하는 방식으로 자금을 유치할 수 있게 되었다. 딜런 리드의 한 간부는 이와 관련해 “모건 스탠리의 가장 큰 고객들은 첨단 금융 기법을 잘 알고 있기 때문에, ‘어이 친구! 이번에는 잠시 쉬게’라고 말할 가능성이 높다”라고 예상했다.
모건 스탠리의 신디케이트 담당 책임자인 토머스 A. 손더스는 얇은 입술과 큰 입을 가진 버지니아 출신의 건장한 사내였다. 그는 어느 날 조깅을 하다가 회사에 큰 영향을 주는 규정 415호에 관한 소식을 들었다. 그 규정이 낳을 파장을 알고 있었기 때문에 그는 다음 날 회사에 출근해 “여러분, 잠깐만. 이건 믿을 수 없는 사건이야!”라고 흥분하며 말했다. 얼마 지나지 않아 월스트리트 곳곳에서 그에게 전화가 걸려 왔다. 그는 그들에게 “오, 하나님! 이건 미친 짓입니다”라고 말했다. 모건 스탠리의 로버트 볼드윈은 1975년 증권 매매 수수료가 자율화된 ‘메이데이’ 충격 이후 자신들이 지방 투자은행들을 구하는 십자군으로 자임하고 나서면서 일괄 등록 제도를 막으려고 갖은 노력을 다했다. 볼드윈은 직접 항의 서한을 작성해 증권거래위원회에 제출했다. “규정 415호는……아무도 경험하지 못한, 원치 않은 결과를 낳으면서 자본 조달 과정을 전면적으로 바꿔 놓을 것”이라는 게 그의 항의 서한 요지였다. 그가 경고한 대로 규모가 작은 투자은행들이 타격을 받았고, 자본 규모가 큰 대형 투자은행이 증권 인수를 대부분 독식하는 상황이 벌어졌다.
모건 스탠리는 미국 100대 기업 중 28개의 기업이 고객이라고 주장했지만, 이들 중 다수가 규정 415호에 호의적이었다. 엑손, U.S.스틸, 듀퐁조차 증권거래위원회의 결정을 지지한다는 의사를 밝혔다. 마침내 이들은 자신들을 얽매고 있던 사슬을 떨쳐 버리기 시작했다. 비판적인 몇몇 사람들은 규정 415호가 지난 50년간 투자은행들이 보장해 주던 증권의 건전성을 일소해 버릴 거라고 두려워했다. 모건 스탠리가 증권을 인수했다는 사실은 그동안 투자자들에게 믿음을 주는 확실한 장치였다. 그렇지만 카지노 시대의 블루칩 기업들은 더 이상 은행가들이 기업의 건전성을 보장해 주는 것을 원치 않았다. 그들은 경우에 따라서는 은행보다 더 높은 신용등급을 구가하고 있었다.
불 마켓
1920년대와 유사한 사건이 1987년 10월 19일 벌어졌다. ‘검은 월요일’이라고 불리는 그날 다우존스지수는 508포인트 폭락했다. 당시 프랑스의 GNP와 맞먹는 5천억 달러가 허공으로 사라졌다. 1920년대와는 달리 사람들이 ‘더 코너’에 모여들어 소란을 피우거나 파산한 투자자 무리가 폭도로 돌변하는 일은 없었다. 파산을 비관하고 몸을 던진 증권사 임직원도 없었다. 1987년 ‘검은 월요일’ 당시 증권 거래의 70퍼센트가 뮤추얼 펀드와 연기금 펀드 등 기관 투자가들에 의해 이루어지고 있었다. 기관 투자가들은 증권사 객장에 나타나지 않고 극장식으로 만들어진 트레이딩 룸의 컴퓨터 모니터를 통해 주가를 살펴보았다. 주가 폭락으로 우울증이나 편두통, 심지어 발기 부전을 호소하는 투자자가 있기는 했지만, 1929년처럼 스스로 목숨을 던지는 괴기스러운 모습은 나타나지 않았다. 또한 ‘검은 월요일’에 평소보다 많은 관람객이 뉴욕 증권거래소를 방문한 것 외에 ‘더 코너’ 주변에서 비극적인 분위기는 거의 느껴지지 않았다.
그러나 금융 지주회사 J. P. 모건과 모건 스탠리, 모건 개런티는 1920년대와 달리 ‘검은 월요일’ 대폭락 때문에 직접적인 피해를 입었다. 1987년 모든 은행과 증권사가 고유 계정의 자금을 이용해 트레이딩을 하고 있었기 때문에 주가 폭락의 여파를 피해갈 수 없었다. 그리고 모건 스탠리는 뉴욕 증권거래소의 주가지수와 시카고 선물거래소의 지수를 이용한 프로그램 매매를 벌이고 있었다. 프로그램 매매는 1987년 대폭락을 야기했다고 심한 비판을 받았다. 하지만 차분하게 음미해 보면 당시 주가 폭락이 프로그램 매매로 더 심해졌다고 말하기 힘들기 때문에 그런 비판은 지나치다고 말할 수 있다.
모건 스탠리의 트레이더와 애널리스트 50여 명은 컴퓨터가 여러 대 설치되어 있고 출입이 엄격히 제한되어 있어 ‘블랙 박스’라고 불리는 곳에서 첨단 소프트웨어를 활용해 최신 정보를 모니터하면서 아비트러지(arbitrage, 동일 상품이 지역에 따라 가격이 다를 때 이를 매매하여 차익을 얻으려는 방법) 기회를 엿보았다. 어떤 이는 입체 화면용 안경을 끼고 컴퓨터 모니터를 지켜보기도 했다. 이들은 해럴드 스탠리가 보았다면 기겁하고 기절했을 법한 리스크를 감수하며 트레이딩했다. 모건 스탠리는 뉴욕 증시 주가가 일시적으로 급락한 1986년 9월 11일 주가 반등을 예상하고 10억 달러어치의 선물에 베팅했다가 ‘검은 월요일’ 대폭락으로 막대한 손실을 봐야 했다. 그런데 선물거래는 미국 정부가 1930년대 금융시장 개혁 조처를 추진한다면서 엄격히 제한한 차입 투자를 다시 부활시키는 결과를 낳았다.
미국 주가는 1984년에서부터 1987년까지 단 한 차례의 기술적 조정도 없이 해마다 10퍼센트씩 상승했다. 이런 꾸준한 오름세는 주가 상승에 베팅하는 황소들에게는 노다지를 안겨 준 반면, 주가 하락에 베팅하는 곰 세력에게는 죽음의 전령사나 마찬가지였다. 그런데 1929년처럼 1987년 봄 채권 시장은 약세를 면치 못했고, 그해 9월에는 연준이 금리를 인상했다. 모건 스탠리는 대폭락을 10여 일 앞둔 10월 초 고객들이 다가오는 상승장을 놓칠 수 있다고 보고, 자산 100퍼센트를 주식에 투자하라고 공식적으로 권고했다. 모건 스탠리는 ‘검은 월요일’ 이후 그 투자 의견 때문에 놀림감이 되었다. 애덤 스미스라는 사람은 “10월에 당신들이 100퍼센트를 투자하라고 해서 나는 그렇게 했다. 그리고 지금 내 돈의 절반을 날렸다. 이제 어디에 투자하라는 말인가?”라고 비판했다.
1929년 대폭락은 미국 내 시장의 원인 때문에 발생했지만, 1987년 대폭락은 글로벌 패닉이었다. 전 세계 증권 시장이 급등과 폭락, 반등을 같이했다. 1980년대 격정적으로 추진된 규제 완화 덕분에 전 세계 증권 시장이 서로 맞물려 돌아가게 되어, 도쿄와 홍콩, 뉴욕, 런던, 파리, 취리히의 증권 시장이 동시에 대폭락을 경험해야 했다. “전 세계 모든 투자자들이 동시에 급락 장세를 경험했다”고 모건 스탠리의 바튼 비그스는 설명했다. 세계 증권 시장의 통합은 주가의 상하 변동성을 더욱 강화했다. 추락할 때 더 추락하고, 오를 때 더 오르는 현상이 발생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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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건 하우스의 역사라는 관점에서 비추어 볼 때 ‘검은 월요일’은 의미심장한 국면의 변화를 드러냈다. 모건 하우스의 어떤 회사도 구제 작전을 펼치는 데 적극적으로 나서지 않았던 것이다. 은행가들이 구제 직전에 모습을 드러내지 않았다는 것. 이것이 1929년 대폭락 순간에 후버가 했던 말을 되풀이했다. “경제의 펀더멘털은 양호하다.”
(본 정보는 도서의 일부 내용으로만 구성되어 있으며, 보다 많은 정보와 지식은 반드시 책을 참조하셔야 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