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은 정부를 대신하여 국가의 외교를 담당하고, 중앙은행처럼 금융계에 군림하면서 전 산업계를장악했던 모건 가문의 전모를 생생하게 드러낸다. 19세기 중반 런던의 이름 없는 금융회사로 출발하여 역사상 전무후무한 금융 제국을 건설한 모건가문 사람들의 무용담과 현대 금융의 진화 과정이 날줄과 씨줄처럼 엮이며 장대하게 펼쳐진다. 독자들은 이 책을 통하여 지난 150년 동안 주요한역사적 사건들의 배후에서 움직인 돈과 권력의 흐름을 알 수 있을 것이다.
1권에서는 귀족 자본가 시대와 국제정치 시대를 다루고 있다. 첫 번째 시대는 모건 가문의핵심 인물인 피어폰트 모건이 숨을 거둔 1913년까지, 그 시대 경제를 지배하고 창조한 일들을 다루고 있다. 그리고 두 번째 시대는1913년부터 1948년까지 두 차례의 세계대전으로 얼룩진 기간이다. 당시 은행가들이 정부 대리인으로 구실하며 국제 정치의 브로커로 활동하던시대를 다룬다.
■ 저자 론 처노(RonChernow)
예일대학과 케임브리지 대학을 우등으로 졸업한 론 처노는 현재 미국에서 정치와 비즈니스 영역에서 가장두드러진 활약을 보이고 있는 시사평론가 중 한 명이다. 프리랜서 저널리스트로 경력을 쌓기 시작한 그는 1980년대 중반 뉴욕의 명문 싱크탱크인20세기 펀드에서 금융정책 수석 연구원으로 재직하면서, 경제사와 금융사 전문 저술가로서의 기반을 닦았다.
그의 저널리스트적 재능과 금융정책 연구자로서의 경험은 경이적인 데뷔작 『금융제국 J.P.모건』(1990)으로 결실을 맺는다. 4대에 걸친 J.P. 모건 제국의 놀라운 역사를 추적하고 있는 이 책은 그해 전미도서상을 수상했다. 또한1999년 모던 라이브러리가 선정한 20세기 100대 베스트 논픽션에, 2002년 「포브스」지가 선정한 가장 영향력 있는 경제 경영서 20권안에 그 이름을 올리면서 명실 공히 현대의 고전으로 인정받았다.
론 처노의 책으로는 『워버그 가문』(1993, 미국 도서관 연합회 선정 올해의 책)『은행가의 죽음』(1997)『타이탄 : 존 D. 록펠러의 삶』(1998, 「타임」지 선정 올해의 책) 『알렉산더 해밀턴』(2004,「뉴욕타임스」 선정 올해의 책) 등이 있다. 그는 전기를 저술하는 것 외에 「뉴욕타임스」와 「월스트리트 저널」등에 서평과 칼럼을 기고하고 있고, ■ 역자 강남규 ■ 차례 1부 귀족 자본가 시대 : 1838∼1913 2부 국제정치 시대 : 1913∼1948 주
건국대학교 정치외교학과를졸업하고, 영국 버밍엄 대학에서 머니, 뱅킹&파이낸스를 공부했다. 「한겨레」「이데일리」를 거쳐 현재 「중앙일보」기자로 재직하고 있다.옮긴 책으로는 『금융투기의 역사』『현명한 투자자』『월스트리트 제국』 『신용카드 제국』『위험한 시장』 『돈, 그 영혼과 진실』 『세계 금융시장을뒤흔든 투자 아이디어』등이 있다.
서문
프롤로그
1장 스크루지
2장 창업자
3장 황태자
4장 코르세어
5장 더 코너
6장 트러스트
7장 패닉
8장 타이타닉
9장 대변신
10장 제1차 세계 대전
11장 폭탄 테러
12장 오디세이
13장 재즈 시대
14장 금본위제
15장 성자
16장 대폭락
17장 대공황
18장 난쟁이
19장 제국의 분리
20장 금융 마법사
21장 횡령
22장 유화 정책
23장 볼모
24장 지는 별
금융제국 J. P. 모건 1
귀족 자본가 시대 : 1838~1914
창업자
“조직은 한 인간의 긴 그림자”라는 에머슨의 말이 옳다면, 모건 하우스에 긴 그림자를 남긴 인물은 바로 주니어스 스펜서 모건이었다. 그는 아들 존 피어폰트 모건에게 자신의 철학을 주입해 근 한 세기 동안 모건 하우스가 자신의 철학대로 움직이도록 했다. 그는 사소한 일 하나하나까지 간섭하며 아들과 은행을 채근했다. 그의 존재가 너무 컸고 자기 확신이 너무 강했기 때문에 아들만이 그를 ‘존 피어폰트 모건의 아버지’라는 자리로 돌려놓을 수 있었다. 그가 숨을 거둔 1890년까지 그의 거대한 그림자는 아들의 삶을 규정했다.
1836년 조지프(주니어스의 아버지)는 아들 주니어스를 위해 하트퍼드의 하우 마더라는 직물 무역을 하는 회사의 지분을 인수했다. 그해 주니어스는 올드 홀리스 스트리트 교회의 담임 목사를 맡고 있던 보스턴 출신의 존 피어폰트 목사의 딸, 줄리엣 피어폰트와 결혼했다. 이렇게 모건 가와 피어폰트 가의 결합으로 1837년 태어난 사람이 바로 피어폰트 모건이었다. 피어폰트 모건은 아주 다른 유전자가 결합한 결과였다. 주니어스의 장인 피어폰트 목사는 시인이자 열정적인 설교자였고, 노예제 폐지를 강력히 주장했다. 그는 모건 가문 사람들의 양키 상인 정신을 경멸했다. 그는 뉴잉글랜드에 정착한 가문에서 태어나 처음에는 장사를 했으나 실패했다. 낭만적인 기질을 갖고 있었고 자신이 옳다고 생각한 원칙을 위해 과감하게 십자가를 질 수 있는 인물이었다. 모건 가문 사람들의 도덕적인 성향과 잠재된 낭만적 성향은 외할아버지인 피어폰트 목사의 피를 물려받은 듯하다. 그래서인지 모건 하우스는 월스트리트의 양심으로 여겨져 성직자와 교사의 자녀들이 일하려고 지원하는 경우가 많았다.
조지프는 1847년 숨을 거두면서 100만 달러가 넘는 유산을 주니어스에게 남겼다. 주니어스는 아버지가 숨을 거둔 지 4년 뒤 보스턴이라는 더 큰 무대에서 게임을 벌이기 위해, 파트너로 참여하고 있던 하우 마더의 지분을 정리해 현금 60만 달러를 마련했다. 그가 설립한 J. M. 비비 모건 앤 컴퍼니는 보스턴 최대 무역회사였다. 주니어스의 사업 무대는 전 세계였다. 주니어스가 사업의 본거지를 보스턴으로 옮김에 따라 피어폰트 모건은 잉글리시 고등학교에 등록해 1854년 졸업했다. 그는 이 학교를 다니는 동안 염증성 류머티즘을 심하게 앓아 1852년에는 스페인령 아조레스 섬에서 수개월 동안 요양하기도 했다. 이 시기 병치레 때문에 결국 그는 한쪽 다리가 다른 쪽보다 짧아지게 되었다. 그의 건강과 심리 상태는 진자처럼 극단을 오갔다. 거의 미친 사람처럼 열정적으로 일에 매달리다 과로로 쓰러져 침대 신세를 지는 일이 되풀이되었다.
피어폰트는 일찍부터 아버지 주니어스의 원대한 사업 계획의 일부였다. 주니어스는 당대 최고 금융회사인 베어링 브라더스와 로스차일드가 모두 가문 사람들이 주축이 된 금융 하우스라는 점을 눈여겨보았다. 실제로 로스차일드의 상징 문양에 들어 있는 화살 다섯 개는 5형제를 의미했다. 다섯 형제는 유럽의 주요 거점에 파견되어 로스차일드 현지 은행을 운영했다. 영국의 「이코노미스트」의 편집장이면서 경제 전문가인 월터 베지훗은 이에 대해 “금융가라는 직업은 대물림된다. 은행의 신용은 아버지에게서 아들로 이어진다. 물려받은 자산은 또 다른 명성을 얻는 디딤돌이다”라고 말했다. 20세기 들어 유명해진 햄브로스 은행의 회장은 이와 관련해 “은행가라는 우리의 직업은 잘 육성되어야 한다”라고 말하기도 했다.
피어폰트는 사촌이면서 흉중을 털어놓는 친구인 제임스 굿윈과 함께 1861년 뉴욕 맨해튼 익스체인지 플레이스 54번지에 ‘J. P. 모건’을 설립했다. 그는 이때 스물네 살에 지나지 않았지만 조지 피바디 은행의 뉴욕 에이전트로 활동하고 있었다. (하지만 ‘J. P. 모건’은 오래가지 못한다. 그 이름은 1895년에 다시 생명을 얻게 된다.) 금융자본가의 힘이 비약적으로 커진 시기에 주니어스 모건과 피어폰트 모건이라는 부자 은행가는 무대 전면에 등장했다. 우리는 그 시대를 ‘귀족 자본가 시대’라고 부를 것이다. 이는 철도와 중화학 공업이 등장하는 시기와 일치했다. 철도와 중화학 공업은 가장 부유한 개인이나 가문일지라도 감당할 수 없을 만큼 엄청난 자본이 필요했다. 그들은 희소한 자본을 조성하고 배분하는 역할을 담당했다.
황태자
남북 전쟁에 이어 찾아온 철도 버블의 시대에 미국은 요동했다. 거대한 부가 눈앞에 펼쳐져 있는 듯했다. 피어폰트는 남북전쟁 시기 “우리 미국은 풍부한 천연자원 덕분에 언젠가는 세계에서 가장 부유한 나라가 될 것”이라고 예견했다. 미국이 가진 잠재력의 원천인 천연자원 개발의 물꼬를 튼 계기가 바로 철도 건설이었다. 과거 어떤 산업도 철도처럼 아메리카 대륙에서 만개한 적이 없었다. 남북전쟁 직후 8년 동안 부설된 철도 길이는 이전의 두 배로 늘어나 무려 11만 킬로미터에 이르렀다. 연방정부가 철도 건설을 지원하기 위해 내놓은 국유지 불하가 철도 버블의 불쏘시개였다.
미국 철도회사 주식을 두고 벌어지는 투기가 광적인 수준에 이르자 유럽 투자자들은 갈피를 잡지 못했다. 미국을 알지 못했던 유럽 투자자들이 정글과 같은 미국 시장에 투자하기 위해서는 미국 쪽 에이전트에 의존할 수밖에 없었다. 미국 은행가들은 그 시기 금융의 중심지였던 런던의 투자자들을 위해 미국의 최신 정보를 전달하는 창구였다. 피어폰트와 패니 모건은 최신 정보를 확보하기 위해 1869년 5월 미 대륙 횡단 철도가 완공된 직후 서부 대탐험에 나섰다. 19세기 중반 이후 월스트리트에서 유대인 금융자본가와 전통적인 미국 주류 세력인 양키 금융자본가 사이에 치열한 경쟁이 벌어졌다. 조지프 셀리그먼 등 독일 출신 유대인 세력은 독일에 미국 철도 주식을 팔아 자본을 조달했고, 양키 금융 세력의 선두 주자인 모건 가문은 주로 영국에서 투자를 유치했다.
1879년, 피어폰트 모건은 본격적으로 아버지의 그늘에서 벗어나 주요 거래를 책임지고 진행하기 시작했다. 그는 당시까지 기업 공개 가운데 가장 큰 규모였던 밴더빌트 가문의 뉴욕 센트럴 철도의 주식 인수? 유통을 총괄하게 된다. 밴덤빌트 후손들이 보유하고 있는 주식 25만주를 인수해 시장에 부담을 주지 않으면서 훌륭하게 처리해야 하는 게 그의 임무였다. 밴더빌트 가문의 부를 일군 코모도어 코닐리어스 밴더빌트는 1877년 숨을 거두었다. 향년 83세로, 그가 남긴 유산은 1억 달러에 이르렀다. 말년에도 너무 비싸다는 이유로 샴페인을 마시지 않았던 그는 미국 최고의 부자였다. 코모도어 밴더빌트의 죽음은 가문의 영역에서 공공의 영역으로 비즈니스가 넘어가는 결정적인 순간이었다. 그는 평생을 투자해 구축한 철도 왕국이 해체되는 사태를 피하기 위해 지분의 87퍼센트를 고스란히 장남인 윌리엄 헨리 밴더빌트에게 물려주었다. 윌리엄은 촌스럽고 무기력한 땅딸보였다. 이런 윌리엄이, 바위처럼 억센 코모도어가 성냥 하나까지 일일이 챙기며 경영했던 뉴욕 센트럴 철도를 관리한다는 것은 사실상 불가능해 보였다.
윌리엄 밴더빌트는 모건 은행이 영국과 미국 시장에서 모두 유력한 금융회사였다는 사실을 감안해 지분 처분과 같은 민감한 일을 마흔두 살의 피어폰트에게 맡겼다. 문제는 증권 시장에 부담을 주지 않으면서 25만 주나 되는 막대한 물량을 처분하는 방법이었다. 모건 은행이 주도한 신디케이트는 이를 위해 윌리엄에게 1년 이내 또는 신디케이트가 물량을 모두 소화할 때가지 추가 물량을 매도하지 않겠다고 약속할 것을 요구해 이를 관철시켰다. 시장에 부담을 주지 않으며 막대한 물량을 소화하기 위해 피어폰트가 동원한 또 다른 기법은 해외 유통이었다. 런던의 J. S. 모건은 5만 주를 배정받아 런던 시장의 일반 투자자들에게 판매했다. 주니어스는 이때 월스트리트에서는 상상하기도 힘든 재량권을 행사했지만 물량 자체가 워낙 많았기 때문에 주식을 매각하는 일 자체가 힘들었다. 게다가 세계 경제가 침체의 늪에서 완전히 벗어난 상태도 아니었다. 유럽 투자자의 해외 투자도 활기를 띄지 못했다. 영국 투자자들은 미국 철도회사의 채권이나 주식을 매입했다가 미국 경영자의 투명성 부족으로 입은 상처를 여전히 기억하고 있었다.
비밀리에 진행된 윌리엄 밴더빌트의 주식 매각이 다 끝난 뒤 피어폰트가 매각 사실을 발표했을 때 금융시장 참여자들은 경탄해 마지않았다. 주식의 대부분이 해외에서 매각되었기 때문에 미국 증권 시장에 전혀 부담을 주지 않았다. 피어폰트는 지분 매각 작업을 수행한 대가로 당시로선 어마어마한 액수인 300만 달러를 수수료로 받았다. 주니어스가 파트너에게 귀띔한 대로 그는 “런던 투자자의 이익을 보호하기 위해” 뉴욕 센트럴의 이사가 되었다.
국제정치 시대 : 1913~1948
제1차 세계 대전
전쟁 초기는 모건 하우스의 시련기였다. 모건 은행은 다른 금융회사와 마찬가지로 순이익 가운데 상당 부분이 마진론을 빌려주고 받은 이자 수익이었다. 하지만 전쟁으로 증권 거래가 중단되는 바람에 순이익은 줄어들 수밖에 없었고, 은행 분위기는 침울했다. 이 때문에 세계 금융 지형에 발생하고 있던 지각 변동을 간파한 사람은 거의 없었다. 제1차 세계 대전을 계기로 미국 월스트리트가 영국 런던의 더 시티를 누르고 세계 금융의 중심지로 발돋움하고 미국은 순채무국에서 순채권국으로 변신할 참이었다. 당시 금융시장 참여자들은 이 변화를 빨리 간파하지는 못했지만 영국의 해가 지고 있었던 것만은 분명했다. 결국 전쟁이 끝난 뒤 영국 파운드화는 기축 통화 지위를 미국 달러에 넘겨주게 된다.
전쟁 발발 소식이 전해지자 잭 모건은 신파조가 섞인 예측을 내놓았다. “이 나라에서 경험하지 못한 증권 가치의 무시무시한 파괴가 일어날 것이다.” 그는 나중에 고립주의자들한테서 ‘죽음의 상인’이라는 별명을 얻게 되지만, 전쟁 초기 그가 보인 반응은 아주 인간적이었다. 1914년 7월 31일에는 이례적으로 평화를 호소하는 성명을 발표하기도 했다. 그는 그날 발표한 성명서에서 “민감한 상황이 변하지 않고 그대로 진행된다면, 전쟁 기간 동안 피와 재산을 바쳐야 하는 사람들의 저항을 받을 것”이라고 말했다. 잭은 전쟁 특수로 수익을 챙길 수 있다는 희망에 들뜬 게 아니었다. 그는 뉴욕이 세계의 금융 중심지인 런던을 대신할 수 있다는 예측을 비판하기도 했다.
모건 하우스는 제1차 세계 대전을 통해 더욱 막강한 권한과 영향력을 지닌 금융 하우스로 떠올랐다. 1913년 제위를 이어받았을 때, 잭은 여러 면에서 부족하다는 평가를 받았지만 한편에서는 그의 지식이 아버지 모건과 맞먹는다고 생각하며 안심하기도 했다. 그는 파리의 파트너인 하예스에게 “늘 그랬듯이 우리 은행이 중심이 있어 기쁘다. …… 내게는 금융 공동체에서 아버지가 수행했던 역할을 이어받을 능력이 있고, 여러 방면에서 많은 일을 해낼 수 있다”라고 말했다. 잭이 청년 시절에 런던에 머물고 있을 때 로이드 조지가 아버지 피어폰트의 200만 달러짜리 생명보험 계약을 가능하게 해줘 아주 기뻐한 적이 있었다. 그런데 이제 그는 아버지보다 보험금 규모가 더 큰 250만 달러짜리 생명보험에 가입해 놓고 있었다. 그러나 잭 모건은 과민한 인물이었다. 그는 성공에 도취되기보다는 다른 사람의 비판에 더 민감하게 반응했다. 윌슨이 모건 하우스의 수출 부서 인력을 넘겨받지 않자 그는 깊은 상처를 받고 와신상담했다. 그는 근본적으로 이루어질 수 없는 욕망을 가졌다. 그는 우습게도 부자인 동시에 모든 사람의 사랑과 인정을 받고 싶어 했다. 단순히 유명해지는 게 아니라 대중의 애정과 이해를 갈구했다. 그는 늘 적을 과대평가하는 경향이 있었다. 심지어 그는 세계 최고의 은행가가 되었을 때도 자신이 여전히 적에 둘러싸여 힘겹게 헤쳐 나가고 있다고 여겼다. 1917년, 그는 이와 관련해 다음과 같이 말한다.
“워싱턴에 존재하는 J. P. 모건에 대한 적대감은……우리가 어떤 특혜를 바라며 몸을 낮추지 않기 때문이다. 민주당은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우리를 불구로 만들려 한다. 그들은 U.S. 스틸을 조사하고 있고 푸조 위원회 조사 활동과 클레이턴 법안을 제정했다. 그들의 이 모든 행위는 우리의 생명을 앗아가기 위해서이다. 하지만 우리는 계속 전진해 왔고 잘 헤쳐 나왔다. …… 우리에 대한 반감은 모두 정치적 시샘이다. 우리는 그들의 마음을 바꾸어 놓을 수 없다.”
폭탄테러
국제정치 시대, 모건 하우스의 파트너 가운데 토머스 러몬트가 외교 무대에 특히 많은 관심을 기울였다. 그는 윌슨의 최측근인 에드워드 만델하우스와 함께 유럽의 상황을 탐색하기 위해 이미 1917년에 현지 조사를 벌이고 있었다. 재무장관 카터 글래스는 그를 미국 대표단의 금융 자문관으로 지명해 파리 강화회담에 파견했다. 러몬트는 전쟁 기간 동안 플랑드르 지방을 둘러보다 전쟁의 참혹함에 충격을 받았다. 연기가 피어오르는 포탄이 갑자기 폭발한 순간을 ‘생지옥’으로 기억했다. 러몬트는 그 경험을 계기로 세계 평화를 위한 조직이 필요하다고 확신했다. 그는 우드로 윌슨이 나중에 주창하는 국제연맹을 열렬히 지지했고 미국의 국제연맹 가입을 지지하는 조직에 많은 돈을 기부하기도 한다.
1920년 9월 16일 월스트리트에서 폭탄 테러가 발생했다. 그날 오후 스틸새시 226킬로그램을 실은 마차 한 대가 모건 하우스의 본부와 미국 수입품 검사소 사이의 월스트리트에 출현했다. 그리고 굉음을 내며 폭발했다. 포장도로에 수천 개의 구멍이 생겨났고 새시 조각은 날카로운 파편으로 변해 점심시간을 맞아 지나가던 사람들에게 박혔다. 38명이 숨을 거두었고 부상자는 300명에 달했다. 월스트리트 23번지 ‘더 코너’를 지나치고 있던 청년 조지프 P. 케네디(존 F. 케네디의 아버지)는 폭풍에 휘말려 바닥에 나뒹굴었다. 월스트리트 쪽으로 난 모건 빌딩의 유리창을 포함해 반경 800미터 이내의 유리창이 모두 박살났다. 불길과 푸르스름한 기운이 감도는 섬뜩한 연기가 12층 건물 높이만큼 치솟아 올랐다. 뉴욕 증권거래소 내 트레이더들은 비단 커튼으로 드리워진 창문이 갑자기 깨지며 트레이딩 플로어로 쏟아져 내리자 우르르 한쪽으로 피했다.
뉴욕 J. P. 모건은 자부심의 상징인지, 아니면 폭발 사고로 숨진 두 직원을 기리기 위함인지 알 수 없지만, 건물 벽면에 남은 파편 자국을 지우지 않고 그대로 남겼다. 현재 월스트리트와 브로드 스트리트를 걷는 사람들은 그 흔적을 볼 수 있다. 한 파트너는 수리 비용이 너무 많이 들어 보수를 포기했다고 말하면서 “파편 자국이 남아 있는 게 더 적절하고 옳다”라고 주장했다. 월스트리트 은행가들은 이 사건 이후 한 세대 동안 자신의 관록 등을 자랑할 때 상대에게 “폭발 사건 당시 당신은 어디에 있었는가?”라고 물었다. 월스트리트 폭탄 테러가 9월에 발생했기 때문에 잭은 예년처럼 스코틀랜드 사냥터에 머물고 있었다. 다른 파트너들은 사무실에서 업무를 보는 중이었지만, 운 좋게도 모두 브로드 스트리트 쪽 사무실을 차지하고 있어 큰 화를 면할 수 있었다.
테러와 협박 편지 등으로 점철된 제1차 세계 대전 이후 불안한 시대 상황은 잭 모건이 왜 그토록 심한 반유대주의자였는지를 이해하는 배경이 된다. 반유대주의는 그의 세계관의 중요한 일부였고 그가 수많은 사건, 특히 자신과 가족들에 대한 공격을 스스로 설명하는 데 동원한 요긴한 논리였다. 그의 반유대주의는 당시 유행한 통념과 비슷했다. 그는 유대인들이 전세계적으로 제5열을 구성해 사람들이 모국을 배반하고 외세의 음모에 가담하도록 부추긴다고 생각했다. 그는 월스트리트에 있는 독일 출신 유대인 금융회사를 보고 이런 현상이 전세계적이라고 과도하게 일반화했다. 잭은 아버지 피어폰트와 마찬가지로 자신이 설정한 범주에 드는 사람들에게는 너무나 따뜻하고 상냥했지만, 그 밖의 사람들에게는 이루 헤아릴 수 없이 냉담했고 배타적이었다. 그는 약한 사람들을 박해하거나 몰아내는 게 아니라고 생각했다. 오히려 그의 적들은 그저 모건 가문의 한 사람이고 마땅히 누려야 할 것을 누리고 있는 자신보다 강한 존재라고 생각했다.
독일 출신 유대인 금융자본가들 가운데 반모건 세력이 있다고 확신한 잭은 1920년 찰스 블루먼탈이라는 인물을 고용해 유대인 금융 하우스에 침투시켰다. 블루먼탈은 2년 동안 잭에게 월스트리트 유대인들의 동향을 정탐해 정기적으로 보고했다. 그가 어떻게 정보를 수집했는지는 기록으로 남아 있지 않지만 그가 추적한 인물 가운데 한 명이 바로 푸조 위원회에서 피어폰트를 공격한 새뮤얼 언터마이어라는 사실은 잘 알려져 있다.
대공황
연준이 1929년 대폭락 이후 경제 시스템의 안정을 위해 움직인 반면, 모건 하우스는 구체적인 사안과 국지적인 위기를 맡아 대응했다. 연준은 기본적으로 개별 경제 주체를 구제하는 기관이 아니라 경제 전반의 안정을 위해 움직이도록 설계되었다. 대폭락 이후 사태 진전 상황을 살펴보면, 모건 하우스가 중시했던 게 무엇인지 알 수 있다. 모건 하우스는 공공의 이익을 위해 나선다고 하면서도 실제로는 고객과 친인척, 동료 은행가의 이익을 위해 움직였다. 모건 하우스가 위기의 순간에 행사한 영향력은 월스트리트 동종 업계를 위한 것이었다. 이런 특징은 대폭락 이후 여실히 드러났다.
마침내 모건 금융제국 내에 잠복하고 있던 권력 투쟁이 본격화했다. 모건 하우스의 권력 지형이 드러났을 때 잭 모건은 러몬트가 움직일 수 있는 언론의 힘을 실감할 수밖에 없었다. 잭과 러몬트는 그동안 암묵적인 타협 속에서 움직여 왔다. 1931년 당시 잭은 60대 초반이었다. 반쯤 은퇴한 상태인 총수였다. 눈에 띄지는 않았지만 모건 하우스에 대한 통제권을 잃어 가고 있었다. 러몬트는 한 번도 공개적으로 잭 모건의 권위에 도전하지 않았다. 그런데 그는 잭의 런던 발언에 격분해 총수에게 정면으로 대들었다. 그는 전례가 없는 비난성 편지를 잭에게 띄웠다. 그 편지에는 지분 구조상 2대 파트너이고 노장파에 속한 찰스 스틸의 서명이 들어 있었다. 사실 스틸은 잭의 절친한 벗이었다. ‘더 코너’에서 유쾌하고 현명한 할아버지로 통했다.
러몬트의 정면 도전을 의미하는 그 편지가 작성된 1931년 9월 25일은 모건 금융제국이 ‘한 가문의 제국’이라는 틀을 벗어던진 순간이었다. 러몬트는 문제의 서한에서 “우리가 잭 모건님에게 말씀 드리고 싶은 요지는, 귀하가 제대로 파악하지 못하고 있을 수도 있지만 전 미국이 주시하는 뉴욕 J. P. 모건의 처지를 아주 불편하게 했다는 사실을 알아야 한다는 점입니다. 여기 모든 은행들은 이 어마어마한 자금 지원이 어떻게 해서 하루아침에 없던 일이 되어야만 하는지 이해하지 못하고 있습니다”라고 말했다. 1931년 현재 러몬트는 자신이 보유한 재산과 모건 하우스 안팎의 위상 덕분에 누구도 도전할 수 없는 힘을 지닌 존재가 되어 있었다. 물론 이때에도 후폭풍을 감안하지 않고 잭에게 대들 수 있는 인물은 모건 하우스 내에서 극히 드물었다. 이후 모건 하우스 내에서 총수 가문 사람들의 영향력은 지속적으로 줄어들어 미래의 어느 시점부터는 유명무실해진다.
모건 하우스는 1920년대 말 제국주의 일본의 재정 대리인이나 마찬가지였다. 러몬트는 과거 일본을 방문한 이후 일본이라는 고객의 이익을 위해 더욱 봉사했다. 그는 일본 내에서 서방 은행가로서 전례가 없는 명성과 영향력을 확보했다. 러몬트는 관동 대지진 직후 도쿄와 요코하마, 오사카의 지방 정부 채권을 인수 ? 유통했을 뿐만 아니라 도쿄 전력과 도쿄 전기의 합병을 성사시켰다. 또한 일본 중앙은행과 뉴욕 연방준비은행 사이에 가교 구실을 했다. 일본이 1930년 1월 금본위제를 채택할 때 대기성 자금 2,500만 달러를 지원해 주었다. 특히 대폭락 직전 모건 하우스는 일본 정부의 공식적인 후원을 받으며 일본의 금융 재벌 미쓰이와 제휴를 추진했다. 러몬트는 일본과의 거래 이야기가 나오면 뿌듯함을 느꼈다. 러몬트가 품은 일본에 대한 확신은 처음에는 그다지 문제가 되지 않았다.
하지만 이후 모건 하우스 파트너들은 그들이 섬겨야 할 대상이 미국인지 아니면 일본인지 더 이상 구분하지 못하고 있었다. 1932년 5월 15일, 그 섬나라에서 저격 사건이 발생해 일본의 이미지를 더욱 어둡게 했다. 나이 든 수상인 이누카이 츠요시가 관저를 급습한 청년 장교 9명이 난사한 총에 맞아 숨졌다. 그가 군부를 통제하려고 시도했기 때문이라는 분석이 제기되었다. 그를 대신해 수상이 된 인물은 사이토 마코토 해군 제독이었다. 이렇게 해서 일본에서는 제2차 세계 대전이 끝날 때까지 민간인 정부는 자취를 감춘다.
이후 일본 군부 세력은 중국 대륙 공략을 계속해 중국 북부 지역까지 점령하고, 1937년에는 중일전쟁으로 이어졌다. 군부 세력은 난징을 점령해 엄청난 수의 민간인을 살육하고 성폭행했다. 이런 사태 악화는 모건 하우스의 동북아 개입의 음울하면서 역설적인 결말이었다. 동북아와 모건 하우스의 관계는 일본이 만주를 점령하는 사태를 막기 위해 미국이 안전판으로 구실해야 한다는 월러드 스트레이트의 제안에 따라 시작되었지만, 일본의 만주 침략을 옹호하는 모건 하우스 실세의 기묘한 행동으로 파국을 맞았다.
제국의 분리
모건 사단은 뉴딜 정책으로 금융시장이 고사할 것이라고 예상했지만, 1935년 증권 시장은 또 다른 호황을 구가했고 증권 인수 건수도 4배 늘어났다. 모건 스탠리는 설립 첫해에 무려 10억 달러어치의 증권을 인수했다. 이 물량은 시장 전체 인수 물량 가운데 25퍼센트였다. 「포브스」는 이에 대해 “대부분의 금융회사들이 무난한 실적을 자랑했지만, 모건 스탠리만은 신생 투자은행으로서는 전례가 없는 탁월한 실적을 달성했다”라고 평가했다. 모건 스탠리는 증권 인수를 단독으로 주관하기를 선호해 다른 투자은행이 주관하는 인수에는 참여하지 않았다. 증권거래위원회는 투자은행이 인수할 수 있는 물량을 자본금과 연동시켜 규제했기 때문에 대규모 증권을 인수하기 위해서는 신디케이트를 구성해야 했다. 신디케이트의 규모가 급격히 불어났다.
모건 스탠리는 한 전화 회사의 증권을 인수하면서 투자은행 100개를 끌어들여 공동 인수단을 구성했고, 인수한 증권을 오륙백 개의 금융회사에 분산 배정했다. 모건 스탠리는 거대 신디케이트를 구성하면서 입맛에 맞지 않은 투자은행을 배제할 수 있었기 때문에 막강한 위세를 부릴 수 있었다. 투자은행들은 모건 스탠리의 영향력을 두려워했다. 모건 스탠리가 이처럼 급성장하자, 모건 은행의 단골 고객이 점차 이 신생 회사로 이전되었다. 1930년대 말이 되자 뉴욕 센트럴과 AT&T, 제너럴 모터스, 존스 맨빌, 듀퐁, U.S. 스틸, 뉴저지 스탠더드 오일 등 거대 기업들뿐만 아니라 아르헨티나와 캐나다 등 외국 정부들도 모건 스탠리의 고객이 되었다. 모건 스탠리는 글래스-스티걸법 이전 모건 은행이 강점을 보인 유틸리티와 전화, 철도, 중공업, 광산, 외국 정부 부문에서 강력한 선두 주자로 발돋움했다.
월스트리트 플레이어들은 모건 스탠리가 모기업인 J. P. 모건의 영향력과 권위를 승계했다고 평가했다. 찰스 블리스와 파트너 찰스 미첼은 투자은행 부문에서 새롭게 리더로 부상한 모건 스탠리 파트너들의 비위를 맞추려고 최선을 다했다. 블리스가 “우리가 해야 할 일은 모건 스탠리의 그늘 아래 들어가 그들과 최대한 가깝게 지내는 것”이라고 말할 정도였다. 모건 스탠리와 커넥션을 만들기 위해, 미첼은 J. P. 모건에 계좌를 개설하겠다고 제안했다. 그는 블리스에게 “계좌 자체는 중요하지 않다. 그러나 그 계좌로 우리를 드러내 보일 수 있다”고 말했다. 일반 기업은 모건 하우스와 관계를 맺고 있다는 사실 하나로 시장의 신뢰를 확보할 수 있었다.
뉴딜 정책 주도자들은 J. P. 모건이 다시 기세등등하게 나대는 것을 참기 힘들어했다. 모건 스탠리가 모건 은행의 옛 고객들을 거의 흡수했다는 사실 때문에 또 다른 의혹이 제기되기 시작했다. 내무장관으로 모건 스탠리의 등장을 면밀히 살펴보고 있던 해럴드 이키스가 강력한 적수로 등장했다. 이 인물은 모건 스탠리 설립 직후 일기에 “모건 사단이 대공황을 이용해 영역을 확대하고 있다. 그들은 별도의 투자은행을 설립해 과거보다 더 많은 비즈니스를 하고 있다”라고 적었다. 이키스 세력은 일단 시간을 벌며 기다린 뒤 의회와 법정을 활용해 강력한 반격을 퍼붓는다. J. P. 모건의 파트너들은 갑자기 호황을 보인 증권 인수 시장을 씁쓸한 표정으로 지켜보아야 했다. 1930년대 후반 모건 은행은 모건 스탠리와 달리 침체의 늪에서 헤어나질 못했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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거의 모든 인력이 ‘더 코너’에 모여 일할 정도로 단출했고, 브로드 스트리트 15번지에서 일부 인력이 업무를 보았을 뿐이다. 그래도 전체 자산은 4억 3천만 달러로 여전히 전 세계 프라이빗 뱅크 가운데 가장 컸다. 그러나 글래스-스티걸법은 영업력과 자금력, 영향력의 상실 이상을 의미했다. 모건 은행이 수십 년 동안 유지해 온 신비로운 이미지를 앗아갔다. 페코라 청문회에서 비즈니스 내용이 폭로되었을 뿐만 아니라 은행은 설립 이후 처음으로 대차대조표를 공개해야 했다. 런던에서도 비슷한 상황이 벌어졌다. 몬터규 노먼이 1936년 에드워드 그렌펠에게 모건 그렌펠의 재무제표를 요구했다. 시간이 흐르면서 귀족적이고 신사적인 은행가는 관료적으로 변했을 뿐만 아니라 햇빛 아래로 걸어 나가 세상 사람들에게 자신을 드러내야 하는 존재가 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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