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버린의 진실

   
김위생·윤혜경·하준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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홍익출판사
   
12000
2006�� 01��



■ 책 소개
SK글로벌과 소버린의 2년간의격돌을 돌아보면서 외국 자본에 대한 패러다임 쉬프트를 주장하는 책이다. SK글로벌 사태가 발생했을 때, 외국 사모펀드 소버린은 바닥을 치고 있던SK의 주식을 대량 매입함으로써 당장에 1대 주주로 등장했다. 이후 소버린은 투명경영을 요구하며 경영진 퇴진을 추진하며 최태원 회장을 압박했지만애국적인 소액 주주들의 반발에 막혀 경영권 간섭 포기를 선언하며 1,700억 원을 투자한 지 2년 4개월 만에 주식을 매각해 무려 1조 원의수익을 올렸다. 

 


그러나 소버린 사태를 결산해 보니 손해 본 사람이 아무도 없고 결국 승자만이 남았다는사실을 분석하며 외국 자본과 재벌에 대한 관점이 변화해야 한다고 말한다. 소버린 사태는 한국 경제에 "주식회사의 주인은 주주"라는 이슈를부각시킨 사건이라는 면에서 커다란 공헌을 했다고 볼 수 있다. 또한 소버린 사태는 외국 자본에 대한 무조건적인 적개심이 결과적으로는 대한민국의국부를 키우는 데 전혀 도움이 안 된다는 사실을 증명한 첫 사례이기도 하다. 


무엇보다 적극적인 외자 유치를 통해 한국경제의 파이를 확장하는 정책이 아니고서는 더 이상우리에게 미래가 없음을 말하는 이 책을 통해, 독자들은 글로벌시대의 한국 경제가 나아갈 길을 분명하게 가늠할 수 있을것이다.


■ 저자 
김위생
 -  미국호스프라대학교 경영학 교수로 하버드대학교와 카이스트 테크노경영대학원 초빙교수를 역임했다. 1986년에 대리인 비용 자본구조 이론을 최초로 실증분석한 논문을 『JFQA(Journal of Financial and Quantitative Analysis)』에 게재했다.


윤혜경 - 연세대학교 신문방송학과를 졸업하고 서울경제신문경제부 기자를 거쳐, 2006년 현재 카이스트 테크노경영대학원에서 금융공학을 전공하고 있다.


하준삼 - 부산대학교 무역학과를 졸업하고, 조흥은행에근무하면서 2002년에 은행권 최초로 적립식 전용 펀드 "모아모아" 펀드를 출시했다. 2006년 현재 카이스트 테크노경영대학원에서 금융공학을전공하고 있다.


■ 차례
프롤로그 


1부 SK와 소버린 격돌 2년, 무엇을 남겼나 
1.SK와 소버린, 2년간의 싸움 
2. 소버린, 그들은 누구인가 
3. SK, 왜 타깃이 되었나 
4. 소버린이 남긴 것
5. 기업사냥 투자기법 배우기 


2부 외국 자본에 대한 패러다임 쉬프트 
1.외국자본에 대한 오해 풀기 
2. 외국자본 유치, 왜 필요한가 
3. 외국자본을 누가, 왜 반대하는가 
4. 외국자본을유치하려면 


3부 항아리 속 한국, 그 틀을 깨라 
1. 항아리속에 갇힌 한국 
2. 제로섬에서 윈윈으로 


에필로그 
찾아보기 





소버린의 진실


SK와 소버린 격돌, 2년간의 싸움
SK 추락하다

2003년 1월 8일, 참여연대는 최태원 회장과 손길승 회장, 유승렬 전 SK그룹 구조조정본부장 등이 SK글로벌 해외법인 등 계열사를 동원해서 미국계 금융회사인 JP모건과의 이면계약을 통해 SK증권 주식을 이중 거래한 혐의가 있다며 이들을 검찰에 고발했다.


그로부터 한 달여 뒤, 새로운 정권의 출범을 일주일여 앞두고 온 나라가 기대와 흥분으로 들떠 있던 2003년 2월 17일, 서울역 앞 SK C&C 사무실과 종로구 서린동 SK그룹 본사 33층에 자리한 구조조정본부 사무실에 검찰이 들이닥쳤다. 검찰은 같은 날 최태원 회장과 유승렬 SK그룹 전 구조조정본부장 등 SK 고위 임원 17명을 출국금지 조치했다. 그나마 손길승 SK그룹 회장은 당시 전경련 회장 신분인 점이 고려되어 출국금지 대상자에서 제외됐다.


검찰은 참여연대가 SK그룹과 JP모건 간의 주식 이면거래를 이유로 고발 조치하기 이전인 2002년 12월, 이미 자체적으로 최태원 회장의 탈세 의혹을 포착하고 수사를 진행하고 있었다. 3월 11일, 검찰은 SK글로벌의 수사 과정에서 1조 5천억 원에 이르는 분식회계를 적발했다고 발표했다. 20여 년간 지속적으로 행해진 장부 조작의 산물이었다. SK글로벌의 회계에서 가장 크게 부각된 문제는 크게 두 가지로 JP모건과의 이면계약과 계열사 간 부당거래였다.


SK가 온갖 악재에 휩쓸리고 있는 사이, SK(주)의 주가가 수직 낙하한 것은 물론이고 우리나라 증시 전체가 요동쳤다. 종합주가지수는 연중 최저치인 534.74까지 곤두박질쳤다. 1만 원에서 2만 원대를 오가던 SK(주)의 주가는 장중 5,000원대까지 추락했다. 소액 주주들은 갑작스레 폭락한 주가에 손절매 시점도 놓친 채 갈팡질팡하는 경우가 대부분이었다. 2003년 3월 14일, SK(주) 주식의 장중 최저가는 5,890원으로 국내 최대 정유 업체의 주가로는 믿기지 않는 수준이었지만 투자자들은 너도나도 SK(주) 주식을 팔아 치우기에 바빴다.


소버린의 등장
2003년 4월 3일, 서울 여의도 금융감독원에 낯선 이름의 증권사 보고서 하나가 접수되었다. ‘크레스트 시큐리티즈’라는, 금융감독원은 물론이고 온갖 정보가 난무하는 증권가에서조차 지극히 생소한 이름이었다. 감독원 직원들이 더욱 경악한 것은 보고서 내용이었다. 놀랍게도 이들은 국내 최대 정유회사이자 SK그룹의 지주회사인 SK(주)의 주식을 1천만 주 이상 매입해 이미 8.64%의 지분을 확보했다는 것이었다. 국내 재벌의 핵심 기업의 주식을 이렇게 단번에 대량으로 산 경우는 사상 최초였다. 그러나 그것이 끝이 아니었다. 크레스트 증권의 SK(주) 주식 매입은 그 후로도 일주일간 거의 하루도 빠짐없이 이어졌다. 4월 16일, 크레스트 증권은 SK(주) 지분 14.99%를 보유하고 있다고 공시했다. 단일 주주로는 최대였다.


온갖 루머와 추측이 난무했다. 적대적 M&A 세력이다, 그린메일(Green Mail : 경영이 취약한 대주주에게 비싼 값으로 보유 주식을 팔아 시세차익을 올리는 것)이다, 검은 머리 외국인이다(주가 조작을 위해 한국인이 외국에 유령회사를 설립해 이 회사를 통해 주식을 매집하는 수법), 심지어 최태원 회장의 백기사라는 소문까지….


소버린 자산운용의 SK(주) 주식 매입은 현재까지도 외국 펀드의 적대적 M&A 사례에 단골 메뉴로 등장하고 있지만, 소버린은 애초부터 SK(주)의 경영권에는 관심이 없었다는 게 당시 사태에 정통한 금융인들의 증언이다. 말 그대로 주주로서 목소리를 낼 수 있을 만큼의 지분을 사서 SK(주)의 기업 지배구조가 개선될 수 있도록 압력을 가하고 거기서 나오는 과실을 다른 주주들과 함께 나누겠다는 것이 그들의 일관된 목표였다는 것이다. 후에 소버린이 추천한 사외 이사들의 면면을 봐도 소버린 측 사람들이거나 특수 관계인으로 볼 수 없었다.


만약 처음부터 SK(주)의 경영권 장악을 목표로 했다면 소버린이 SK(주)의 지분을 15% 이상 사들이는 것도 가능했다. 실제로 소버린은 당신 일본 UFJ은행에 투자한 자금만 해도 500억 엔(한화로 약 5천억 원)에 달하는 등 자금 동원에 전혀 문제가 없었다. 소버린도 자신들이 SK(주)의 지분을 15% 이상 확보하면 SK(주)와 협상력이 높아질 것을 알고 있었지만 굳이 SK(주)가 SK텔레콤에 대한 의결권을 잃거나 SK텔레콤 지분을 팔아야 하는 상황으로 몰아가는 것을 원치 않았다는 것이 주위 사람들의 증언이다. 어찌 보면 이는 SK(주)에 대한 배려였는데, 이 역시 소버린이 SK(주)의 경영권을 원하지 않았다는 것을 보여주는 대목이다.


소버린이 보도 자료를 낼 때마다 SK(주) 주가는 솟구쳤다. 소버린이 1대 주주 등극을 공식 발표한 4월 14일, SK(주)의 주가는 상한가를 기록하면서 1만 2,650원에 마감됐다. 한때 6,000원대로 떨어졌던 SK(주)의 주가는 크레스트 증권이 SK(주)의 주식을 사들이는 도중에 M&A 가능성이 제기되면서 SK글로벌 분식회계가 벌어지기 이전 수준으로 회복되었다. 시장에서는 소버린이 SK(주)에게 굴러들어온 복덩이라는 평가까지 나올 정도였다. 그러나 이 시기의 SK(주) 주가 상승은 시작에 불과했다. 소버린이 ‘주주 권리 강화 운동’에 본격적으로 돌입하면서 SK(주)의 주가는 말 그대로 폭발 상태로 치달았던 것이다.


소버린의 주주 권리 강화 운동
2003년 4월 28일, 각 언론사 경제부 기자들에게 ‘SK(주) 기업 지배구조 개선을 위한 소버린의 입장’이라는 제목의 보도 자료가 날아들었다. 주요 내용은 다음과 같다. “SK글로벌에서 문제들이 계속되고, SK해운의 분식회계가 새로 밝혀지는 상황에서, SK(주)는 SK그룹 계열사들과 거리를 두고 있다는 사실을 보여주는 일이 중요하다. SK(주)의 주주들과 채권자들은 SK(주)의 경영진이 강력한 기업 지배구조 개선을 통해 기업의 수익성과 신용도를 회복시키는 데 전념하기를 바라고 있다.” 이는 소버린이 SK(주)의 1대 주주로서 낸 첫 번째 경영 참여 목소리였다.


이러한 소버린의 입장은 SK글로벌의 회생 쪽으로 가닥을 잡고 있는 SK그룹의 경영 방침과는 정면으로 배치되는 것이었다. SK 내부에서는 SK글로벌이 법정관리에 들어갈 경우 그룹 전체에 대한 피해를 끼칠 것으로 봤다. 그러나 외부 평가기관들은 그 반대로 SK(주)가 SK글로벌에 대한 지원을 지속할 경우 신용등급 하향이 불가피하다는 입장을 밝히고 있었다.


부실 계열사에 대한 지원 중단은 소버린이 관철하고자 하는 지배구조 개선의 핵심 사항이었고, 결국 후에 주총에서의 위임장 대결로 향하게 되는 결정적 계기로도 작용하게 된다. 여기까지는 SK(주)와 소버린의 작은 마찰음에 지나지 않았다. 그로부터 두 달 뒤, 소버린이 SK(주)의 지도부 교체를 요구하고 나서면서 SK(주)와 소버린의 전쟁은 본격적인 막이 오른다.


최태원 회장 등이 법원에서 유죄 판결을 받았을 즈음인 6월 15일, SK글로벌 역시 생사 여부를 결정짓는 중요한 판정을 기다리고 있었다. 이날 열린 SK(주) 이사회는 SK글로벌에 대한 지원 여부를 결정하는 자리였던 것이다. 최태원, 손길승 회장을 제외한 8명의 SK(주) 이사들이 약 11시간가량의 회의를 거쳐 내놓은 결론은 ‘SK글로벌 지원’이었다.


이로부터 나흘 후인 6월 17일, 소버린은 마침내 SK(주) 지도부 교체를 공식적으로 요구하고 나섰다. 소버린과 일부 소액 주주들의 반대에도 이사회가 전격적으로 SK글로벌 지원안을 통과시킨 것이 직접적인 계기가 되었다. 외부 기간의 평가 의뢰도 없이 SK 측이 제공한 자료를 바탕으로 이 같은 결정은 내린 것은 사외 이사들조차 재벌 그룹의 영향력에서 자유롭지 못하다는 사실을 보여준다는 것이 그들의 판단이었다. 소버린이 당시 주장한 요구 사항에는 SK글로벌에 대한 지원 중단 외에도 부당 내부거래, 분식회계 문제 등으로 유죄 판결을 받은 최태원 회장 등 현직 이사들의 자진 사퇴도 포함되어 있었다.


6월 18일, SK(주)는 SK그룹 체제의 구심점 역할을 했던 구조조정본부를 해체하는 한편, 각 계열사별 이사회 중심의 독립 경영체제를 가속화하겠다고 밝혔다. 앞으로 각 계열사 간의 관계를 ‘SK 브랜드와 기업 문화를 공유하는 독립 기업의 느슨한 네트워크’로 설정하겠다는 것이 이날 발표한 기업구조 개혁방안의 중요 내용이었다.


10월 26일, SK(주) 이사회는 소버린과 일부 소액 주주, 노조의 반대에도 8,500억 원 규모의 SK네트웍스 출자전환을 결의했다. 그로부터 얼마 지나지 않아 SK(주)는 유동성 위기를 맞은 SK해운 살리기에까지 나서게 된다. 시장은 이에 즉각 반응했다. 이날 SK(주)의 주가가 8% 가량 폭락했던 것이다.


사상 초유의 위임권 대결
2004년 1월 10일, 손길승 SK그룹 회장은 SK해운을 비롯한 그룹 계열사를 통해 1조 원의 비자금을 조성하고, 이 가운데 7,800억 원 가량을 이사회의 결의 없이 선물 투자 등에 유용한 혐의로 구속 수감된다. 이때부터 소버린은 최태원 회장 측과 본격적인 전쟁에 돌입한다. ‘위임권 대결’이라는, 국내에서는 생소한 이름의 전쟁이었는데 자신의 주장을 반영시키기 위해 주주들의 위임권을 받아 표 대결을 벌이는 방식이었다.


이를 위해 소버린은 우선 SK그룹과 독립적인 위치에서 SK(주)의 경영에 참여할 사외 이사를 추천했다. 소버린이 추천한 이사 명단은 다섯 명의 사회 명망가와 석유산업 전문가들로 구성되었는데, 소버린의 이 같은 행보는 소액주주 운동가나 소버린의 이해 관계자를 이사 후보로 내세울 것이라는 세간의 예상을 완전히 벗어난 것이었다. 이들은 소버린의 이사 후보 추천을 받아들이는 대신 이사로 선임되더라도 SK(주)의 기존 경영진은 물론 소버린과도 독립된 결정권을 행사할 것이라는 점을 분명히 했다. 소버린의 의도가 완전한 경영권 확보가 아니라 국내 소액 주주들과 외국인 주주들의 민심을 확보해 기존 SK(주) 경영진의 독주를 막는 것이었다는 게 여기서도 분명해진다.


소버린과 SK(주)의 주총 대결을 앞두고 양측이 한창 열을 올리고 있을 무렵인 2월 22일 일요일 오전, SK(주) 이사회가 정기 주총을 앞두고 전격적인 결정을 내렸다. 지배구조 개선을 요구한 소버린의 공세에 나름대로 파격적인 제안을 한 것이다. 내용은 손길승, 김창근, 황두열 이사가 퇴진하고 사외 이사 비중을 50%에서 70%까지 늘리겠다는 것이었다. 그러나 소버린은 최태원 회장 퇴진이 받아들여지지 않았기 때문에 이런 개선안은 여전히 미흡하다는 입장을 고수했다. 결국 SK(주)와 소버린은 주주총회장으로 장소를 옮겨 본격적인 전쟁에 돌입한다. 주총에서의 진검승부밖에 달리 방법이 없었던 것이다.


소버린과 SK(주)의 주총 대결은 여러 가지 점에서 시사하는 바가 크다. 우리 경제 역사상 유례없이 소액 주주들이 진정으로 주주의 권리를 행사할 수 있는 장이 마련됐다는 게 그 하나이다. 통상 우리나라에서 주주 총회는 명목상으로만 이뤄질 뿐 소액 주주들이 실질적인 권한을 행사할 수 있는 기회는 많지 않다. 그런 의미에서 SK(주)와 소버린의 주총 대결에서 소액 주주들이 던질 한 표 한 표는 양쪽 모두에게 너무나 귀한 것이었다. 


SK그룹은 2월 27일부터 3월 11일까지, SK(주)는 물론이고 SK텔레콤 등 계열사 직원들까지 총동원해서 개인 소액주주 위임장 확보에 나섰다. 이렇게 얻어 낸 위임장은 의결권의 6%에 이르렀다. SK(주) 직원들이 소액 주주들의 집을 가가호호 방문하고 있을 무렵인 3월 6일, 반포 메리어트 호텔에서는 소버린 측 사외 이사 후보들이 소액 주주들을 상대로 간담회를 가졌다. 이 자리에는 70여 명의 소액 주주들이 참석했다. 소버린이 추천한 김준기, 김진만, 조동성, 한승수, 남대우 이사 후보 등 다섯 명은 주주들의 질문에 답하면서 연신 지지를 호소했다. 이날 사외 이사 후보들이 주장한 요점은 소버린의 이익이 아니라 주주의 이익을 대변하겠다는 것이었다.


3월 12일 오전 9시 30분, 서울 워커힐 호텔 비스타홀. SK(주)의 정기 주주총회에 참석한 400여 명의 주주가 주총이 시작되기를 기다리고 있었다. 10시 정각, 출석 주주 및 주식수 보고, 영업 보고 등을 거쳐 의안 심의에 들어갔다. 1번 안건인 대차대조표 승인에 이어 드디어 ‘2-1항’이 상정됐다. 바로 SK그룹의 운명을 결정하는 최태원 회장 이사 선임 건이었다. 10시 40분쯤부터 긴장된 가운데 투표가 시작되었다. 표 대결에서 60.63%의 찬성을 얻어 최태원 회장 이사 선임 건은 가결되었다. 이날 투표에서 SK(주)와 소버린이 공동으로 추천한 남대우 씨를 제외한 네 명의 소버린 추천 사외이사 선임안은 부결되었다. 소버린 지지 세력은 50%가 채 되지 않았다.


워커힐 호텔 룸에서 조마조마한 마음으로 기다리던 최태원 회장은 가슴을 쓸어 내렸다. 반면 완패한 소버린 측은 낙담했다. 이로써 지난해 정기주총 이후 약 1년 동안 계속되던 SK(주)와 소버린의 피 말리는 전쟁은 일단락되었다.


SK vs 소버린 전쟁 2기
주총 대결은 최태원 회장 측의 승리로 일단락됐지만 소버린은 또다시 최태원 회장의 퇴진 등을 담은 안건으로 임시주총 소집을 요구했다. 소버린이 임시 주총을 요구한 배경에 대해 당시 상황을 잘 알고 있는 한 금융 전문가는 다음과 같이 설명했다. “2004년 3월 정기 주총이 끝나자 SK(주)의 백기사를 자청했던 국내 우호 세력들은 거의 다 주식을 팔았다. 소버린은 여전히 최태원 회장 퇴진과 사외 이사 교체에 강한 의지를 갖고 있었다. 임시 주총이 열리면 SK(주) 우호 세력들이 줄었기 때문에 승산이 있다고 봤다.”


2004년 10월, 소버린의 임시주총 요구는 또다시 무산된다. 이사회가 이를 거부한 것이다. 그러나 SK(주)와 국내 언론들은 환호했다. 국내 기업의 경영권을 노리는 외국 투자자와 싸워 이겼다는 자부심이 가득했다. 그 모습은 흡사 강화도 앞바다를 침공한 외세를 물리친 대원군에 비길 만했다.


소버린, 마지막 카드를 던지다
2005년 7월 18일, 소버린은 결국 SK(주)의 주식 전량을 처분한다. 그들로서는 주주로서 행사할 수 있는 마지막 카드였다. 소버린의 투자 부문 총책임자 마크 스톨슨은 SK(주) 지분을 모두 처분한 데 대해 다음과 같은 이유를 밝혔다. “한국 법제 아래 주주로서 쓸 수 있는 권리는 모두 행사해 봤다. 소버린은 이제 우리에게 남아 있는 유일한 수단을 행사하기로 했다. 그것은 바로 주식을 파는 것이다.”


신문, 방송, 인터넷 등 각종 언론 매체들은 ‘소버린, SK 주식 팔아 1조 원 벌었다’는 제목의 기사를 일제히 주요 뉴스로 다뤘다. 이들의 시각은 소버린이라는 외국 투기자본이 2년 4개월 동안 한국 주식시장을 휘저어 놓더니 결국 SK(주)의 주식을 모두 팔아 치웠고, 이 과정에서 1조원 가까운 돈을 벌었다는 것이다. 이와 함께 막대한 돈을 벌었음에도 세금은 거의 한 푼도 내지 않았다는 내용도 비중 있게 보도됐다.


그러나 『이코노미스트』지, 『월스트리트』지, 『파이낸셜 타임스』 등 해외 유수 언론들의 평가는 사뭇 다르다. 이들의 평가를 한번쯤 되새겨 볼 필요가 있는 이유는, 그들의 시각이 우리나라와 우리 기업을 바라보는 전 세계 해외 투자자들의 평가와 별반 다르지 않기 때문이다. 『파이낸셜 타임스』는 이렇게 썼다.


“더 나은 기업 지배구조를 달성하기 위한 아시아 사상 최대의 전투는 패배로 끝났다. 회계 부정 사건으로 유죄 선고를 받은 최태원 회장은 세계 2위의 정유 회사인 SK주식회사를 계속 경영하고 있다. 주주들은 SK그룹이 입은 수십억 달러 규모의 손실에 대해 여전히 어떠한 설명도 듣지 못하고 있다. SK(주)에 대한 개혁 운동이 시작된 지 2년이 넘어선 어제, 소버린 자산운용은 15%에 상당하는 지분을 처분하는 것으로 화살통에 남아 있던 마지막 화살을 뽑아 쏘았다. 이 전투의 가장 큰 패배자는 바로 한국이다. 이 딱한 이야기는 한국이 안고 있는 기업 지배구조의 위험을 부각시킨다. 코리아 디스카운트는 이미 이를 반영하고 있다. 부패한 임원들을 지원하는 이사회에 자금을 맡기는 것은 가격의 고하를 막론하고 위험한 행동이다.”



소버린이 남긴 것
SK(주) 주주들, 2년 동안 6조 원을 벌다

소버린의 SK(주) 지분 매각 이후 ‘해외 자본에게 또 당했다’는 식의 여론이 팽배했다. 그러나 한 번 냉철히 생각해 보자. 당한 사람이 누구인가? 소버린이 보유하고 있던 SK(주) 지분을 사들인 세력은 홍콩 등 해외 투자자들이다. 소버린이 1조 원에 가까운 차익을 얻었지만 그 차익이 국내 투자자들 주머니에서 나간 것은 아니라는 것이다. 따라서 소버린이 벌어들인 막대한 이익을 국부유출과 연결시키는 것은 논리에 맞지 않다. 우리들에게는 단순히 소버린이 1조 원 가까이 벌었다는 수식 계산이 아니라 SK(주) 기업 당사자는 물론이고 SK(주)의 주주, 한국 기업, 나아가 한국 경제를 아우르는 큰 틀의 손익계산서가 필요하다.


소버린이 불과 15%의 지분으로 9천억 원을 벌었다면 나머지 85%의 SK(주)의 주주들의 이익은 얼마일까? 단순히 소버린과 동일한 기간 동안 투자했다고 가정하면 적어도 5조 원 이상의 이익을 거뒀을 것이라는 계산이 가능하다. 소버린은 한 주당 5만 원이 채 안 되는 가격에 주식을 처분했지만 투자 기간 중 주가가 한 주당 7만 원까지 오른 점을 감안하면 더 많은 이득을 본 투자자가 있을 수 있다. 소버린 등장 이후 SK(주)의 주가가 오르면서 SK(주)의 임원들이 스톡옵션을 행사해 얻은 이익만도 169억 원에 이르는 것으로 알려져 있다.


최태원 회장을 퇴임시키는 게 성공했다면 SK(주) 주가가 더욱 상승했을지 그 여부는 알 수 없다. 그러나 재벌 총수의 무책임한 경영이 코리아 디스카운트의 주범이라는 이론에 의하면, 이론적으로는 최태원 회장 퇴진이 SK(주) 주가의 추가 상승을 촉진할 수 있었으리라는 유추는 해볼 수 있다. 그렇다면 최태원 회장의 유임을 주장한 소액 투자자들은 다른 많은 소액 주주들에게 잠정적인 손해를 끼친 장본인들이다. 이 사건은 여기서만 그치는 것이 아니다. 외국인들이 한국 기업의 적대적 인수를 더욱 조심스럽게 취급하게 될 것이며, 최태원 회장과 비슷한 처지에 있는 다른 재벌 총수들에게는 자신들의 권력 세계가 아직은 충분히 건재함을 인식하게 했을 것이다.


SK, 신용등급 오르다
2003년 2월, 대규모 회계 부정 사건으로 그룹 전체가 흔들렸던 SK(주)는 2005년으로 접어들면서 희소식이 만발했다. 7월에 무디스는 SK(주)의 신용등급과 전망을 ‘Ba2, 향후 상향조정 가능’에서 ‘Ba1, 긍정적’으로 올렸다. 무디스는 SK(주)의 신용등급 상향조정 이유에 대해 정유업계의 전반적인 경영환경 개선으로 부채가 줄어든 데다 기업의 지배 구조가 좋아졌기 때문이라고 밝혔다. 무디스는 소버린이라는 특정 펀드를 언급하지 않았지만 소버린과 분쟁 과정에서 SK(주)가 지배구조 개선을 위해 사외 이사를 늘리고, 기업의 투명성 강화를 위한 위원회를 설립한 것을 높이 샀다고 말했다. 무디스가 SK(주)의 신용등급을 올린 지 채 한 달도 지나지 않은 2005년 8월에 S&P도 SK(주)의 신용등급 전망을 ‘안정적인 BB+’에서 ‘긍정적인 BB+로 상향조정했다.


이처럼 해외 신용평가기관들이 SK(주)의 신용등급을 올림으로써 SK(주)는 앞으로 더 싼값에 돈을 빌릴 수 있게 되었다. SK(주)의 재무 구조가 더 좋아질 수 있는 여건이 만들어진 것이다. SK(주)는 기업의 지배 구조가 좋아진 것은 자기들의 공로라고 주장하겠지만 소버린의 개입이 일정 역할을 한 것은 부인할 수 없는 게 사실이다.


주주 민주주의 혁명의 시발점
소버린의 등장이 한국 경제에 가져다 준 가장 큰 이득은 ‘주식회사의 주인은 주주’라는 이슈를 부각시킨 것이다. 이는 기업뿐 아니라 주식에 투자하는 투자자들에게도 매우 의미 있는 화두이다. 그동안 국내의 개인 투자자 중 상당수가 해당 기업의 가치를 따져 보고 그 기업의 미래에 투자한다는 생각을 하기보다는 단기간에 대박을 터뜨리겠다는 목적으로 투자를 하는 경우가 많았다. 그런 과정에서 투자자들은 해당 기업의 주인이라는 생각을 하지 못했다.


오히려 주주로서 기업의 주인의 권한을 행사하기 위해 기업의 경영에 목소리를 내는 세력에 대해 악의적인 의도로 경영 간섭을 한다고 판단하는 경우도 많았다. 소버린 사건은 개인 투자자뿐만 아니라 기업들 역시 그동안 무게감을 거의 느끼지 못했던 주주의 존재를 새삼스럽게 인식시키는 계기가 되었다.


재벌뿐 아니라 일반인들 역시 재벌의 경영권이 창업주인 1세에서 재벌 2세에게 넘어가는 것에 대해 그다지 저항감을 느끼지 않았다. 그러나 소버린과 SK(주)의 표 대결 과정에서 이처럼 당연시되었던 명제에 딴지 거는 세력들이 나오기 시작했다. 기업의 총수는 당연히 창업자의 아들이 맡아야 하는 자리가 아니라 기업 경영을 가장 잘할 수 있는 사람이 맡아야 한다는 목소리가 하나둘씩 들리기 시작한 것이다. 주식회사는 주주들이 각자 돈을 내어 만들고 출자한 돈만큼 권한과 책임을 갖는 민주공화국 체제여야 한다는 기본 명제에 눈을 돌리게 되었음을 방증한다.


실제로 최근 들어 소액 주주들이 경영인을 고소하거나 기관 투자자인 펀드들까지 기업의 경영에 적극적인 목소리를 내는 경우가 부쩍 많아졌다. 이제 펀드들도 주총에서 경영진이 제시한 안건에 무조건 찬성하는 거수기 역할만을 하지는 않게 되었다는 이야기이다. 실제로 주총에서 투자자들이 경영진에 맞서 반대 의견을 내는 경우가 많아진 것도 소버린의 등장 이후 눈에 띄게 달라진 것이다.


투자자들의 이러한 적극적인 태도 변화는 향후 한국의 주식 시장이 한 단계 업그레이드되는데도 결정적인 기여를 할 것이다. 과거에는 경영진의 부패나 경영 미숙으로 기업 가치가 하락하고 주주들이 손실을 보면 ‘역시 주식은 할 것이 못돼…’하고 주식 시장에서 손을 털고 나가는 경우가 대부분이었다. 하지만 주주들이 경영을 맡은 대리인들이 할 일을 제대로 수행하도록 적극적으로 감시하게 되면 한국 기업의 지배 구조가 개선되고 자연히 주가도 오르게 될 것이다.


소버린과 SK(주)의 대결 과정에서 우리가 얻은 또 하나의 교훈은 한국 시장이 외국 투자자들에게 개방된 만큼 기업 지배구조가 취약하고 분식회계 적발과 같은 기업의 주가 저평가 기회가 발생할 경우에는 여지없이 외국 투자자들의 타깃이 될 수 있다는 점이다. 이 때문에 재벌 경영인들이 바짝 긴장하게 된 것도 사실이다. 외국인 투자자들에게 경영권을 빼앗기지 않기 위해서는 주가 관리에 힘쓰고, 주주들의 권리 보호에도 신경을 써야 한다는 경영의 기본 원칙을 새삼 깨달았을 것이다. 특히 계열사 출자를 통해 그룹 전체를 통제하는 지금까지의 재벌의 경영 관행에도 변화가 예상된다.


국내 사모펀드 육성 분위기 조성
소버린의 대박 소식 이후 눈에 띄는 변화 중 하나가 국내 사모펀드를 육성해야 한다는 목소리가 높아진 것이다. 굳이 소버린의 출현이 아니더라도 2004년 말 자산운용법이 개정되는 등 사모펀드의 필요성을 주장하는 사람들은 최근 들어 줄기차게 증가해 왔다. 그러나 SK와 소버린의 사례는 역으로 사모펀드의 경영 참여에 대한 적대적 분위기가 새삼 확인됐다는 점에서 국내 사모펀드의 행로가 순탄치만은 않을 것이라는 유추도 가능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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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부에서는 국내 사모펀드가 해외 사모펀드와는 달리 높은 수익률을 거두기 어려울 것으로 전망하면서, 그에 대한 이유로 현실적으로 투자한 기업에 대한 경영 참여가 어렵다는 점을 꼽고 있다. 반면에 해외 사모펀드들은 저평가 기업을 발굴해 투자한 뒤에 기업 지배구조를 개선할 수 있도록 경영에 적극적으로 간섭한다. 그 결과 주주 가치가 올라가면 거기서 생긴 과실을 챙기는 방법으로 높은 수익률을 올린다. 신동방그룹이 미도파 인수를 시도하가 결국 파산한 사례를 보더라도 한국형 소버린이 국내에서 큰 성공을 거두기까지는 시간이 걸릴 것으로 보인다. 

(본 정보는 도서의 일부 내용으로만 구성되어 있으며, 보다 많은 정보와 지식은 반드시 책을 참조하셔야 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