트렌드 분석서는 거대 담론을 다루는 미래학 서적들과 다르다. 앨빈 토플러로 상징되는 미래학서적들이 대개 선진국을 중심으로 장기적인 세계적 흐름을 예측하는 방향타 역할을 하는 반면, 페이스 팝콘으로 상징되는 트렌드 서적은 10년 정도앞을 내다본다. 트렌드 서적은 자신의 현실을 돌아보며 삶의 진로를 모색하는 데 미래학 서적보다는 훨씬 구체적인 정보와 실마리를 제공하게 된다.미래를 알면 현실에 대한 막연한 두려움을 걷어내고 앞날을 대비할 수 있다.
이 책은 거대 담론의 미래학 서적이 담아낼 수 없는 구체적인 정보와 실마리를 제공해주고있다. 한국인의 변화 추세를 이 책에서는 한국인의 도전적인 미래상을 구현할 트렌드(1부), 성숙해가는 한국 자본주의 문화 속에서 발생한 새로운흐름들(2부), 절반은 과거의 전통에 발목 잡혀 있으면서 나머지 절반은 미래를 향해 내딛는 이행 과정의 트렌드(3부)의 세 가지로 크게분류한다.
■ 저자 김경훈·김정홍·이우형
김경훈은1965년 강릉에서 태어나 서울대학교 경영학과를 졸업했다. 1994년『한국인 트랜드』로 전경련에서 주는 "자유출판문화상"을 수상했다. 2005년현재 한국트렌드연구소 소장으로 일하고 있다. 지은 책으로 『10일 만에 배우는 경제학 200년』『경제를 알아야 돈이 보이다』『한국인의 66가지얼굴』『뜻밖의 한국사』등이 있다.
김정홍은 "두 그루"라는 필명으로 인문·비소설·아동 및 청소년물에 이르기까지, 분야를넘나들며 폭넓은 행보를 선보여 온 출판계의 참신한 게릴라들. 2003년 현재 (주)와우밸리의 기획·집필 위원으로 재직 중이다. 지은책으로는『내가 사랑한 여성』『지식 파파라치』『나는 무엇을 팔았나』『아주 특별한 별자리 이야기』『우린 꼭 살아 돌아간다』『꿈꾸는 자는 멈추지않는다』『남극의 마지막 영웅, 섀클턴』등이 있다.
이우형은 "두 그루"라는 필명으로 인문.비소설.아동 및 청소년물에 이르기까지, 분야를넘나들며 활동해왔다. 2004년 현재 (주)와우밸리의 기획·집필 위원으로 재직 중이며, 지은 책으로는『내가 사랑한 여성』『지식 파파라치』『나는무엇을 팔았나』『아주 특별한 별자리 이야기』『우린 꼭 살아 돌아간다』『꿈꾸는 자는 멈추지 않는다』『남극의 마지막 영웅, 섀클턴』등이있다.
■ 차례
1부 우리 사회의 지형도를 바꿀 새로운 흐름들
1장 소비 세상을 뒤흔드는 "두 손문화"의 탄생
두 손으로 만드는 문화
완제품 소비에 대한 저항
내가 만드는 세상
소비-생산의 방식이전복된다
2장 "임의 접속"-굴레 없는 관계 맺기
"임의 접속" 문화가 우리 삶을바꾼다
붙박이 삶은 싫다!
소유하는 것이 아니라 버리는 것이 문제
자유로운 접속 문화가 노동의 성격을 바꾼다
3장 파워풀한 문화 소비자―페로몬 공동체
공감으로 만든 문화 소비자 집단-페로몬공동체/미디어 상품 소비자들의 아름다운 몰입
유행의 생산지가 되고 있는 게시판들
인간이 내뿜는 페로몬에 유혹당하다
10대들의몰입, 그리고 변신
4장 머니 게임 경주자들의 조기 은퇴
하운드레이서(Houndracer)들의사회
완전히 벗어나려면 완전히 미쳐라
그들의 꿈은 이루어지는가
기계 미끼 없는 트랙으로 이사하려는 사람들
5장 여자들의 우정이 사회를 바꾼다
여성들의 감성 네트워크가 움직이기시작했다
앞에서 끌고 뒤에서 밀어준다
인터넷은 여자들을 위해 태어났다
생산 네트워크를 정복하는 여성들
여성 네트워크가사회의 성격을 바꾼다
6장 노인, 생산적 현역의 시대
"그림자 인간"을 거부하는 생산적 현역의시대
노인의 지혜가 새로운 가치를 창출한다
생산, 혹은 자원 봉사를 통한 회춘 프로젝트
나는 소망한다, 내게 허락된성을
2부 성공의 꿈과 욕망이 빚은 자본주의적트렌드
1장 새로운 시대의 인재상―멀티태스커
한 우물을 뛰어넘는 멀티태스커의 시대가 온다
재능의 경계를뛰어넘다
문화의 경계를 뛰어넘다
멀티를 지향하는 경력 관리
2장 네버랜드(Neverland) 러시
그래서 그들은 네버랜드로 달려간다
김부장, 출출한데 어디 가서 치즈 버거라도 먹을까?
구두를 벗고 운동화 끈을 묶다
젊어지고 싶으세요? 지갑을 여세요
3장 고객 존중을 넘어선 메모리 마케팅
메모리 마케팅이란 무엇인가
기억력 강화를위한 유행들
사람을 차별하는 메모리 마케팅의 진로
메모리 마케팅의 짝을 찾아라
기억력의 미래 상품들에 관한상상
4장 시간을 팔아서 시간을 산다
당신의 지갑에 시간이 들어 있다
시간절약 상품의시대
25시간 활용법은 없는가
"One Click, One Button, One Stop"-딱 한 번 문화
아직 남아 있는시간이 있을까
5장 안전 벨트를 맨 모험가들
"앉은뱅이 사회"로부터 탈출하는 사람들
머리 :환상의 세계로 모험을 떠나는 사람들
몸: 거친 자연 속으로 모험을 떠나는 사람들
인공 자연과 유사 체험을 향해 모험을 떠나는사람들
일상 속으로 들어온 모험
6장 e-불안한 세상 : 24시간 경비 사회
내 쉴 곳은 어디에
위험 vs.안전 1-나를 지켜줘
위험 vs. 안전 2-편리하지만 위험한
e-불안한 세상
기업, 내부의 적과 스파이
3부 오래된 과거를 깨고 나오는 한국인
1장벌거벗고 뛰는 할리우드식 일등주의
승자독식의 세계를 받아들이다
한 번만 맞아라
치밀한 계산으로 몸을 만든다
일등주의의사회적 에너지
승자독식 세상으로부터의 사업 아이디어들
2장 충동조절장애 증후군과 불신 사회
재채기처럼 튀어나오는 우울한충동
톨레랑스와 르상티망
왜 한국인은 미움을 받는가
협상술의 준비된 인기 비결
신뢰 마케팅의 새로운부상
3장 나를 꼭 안아주는 체온 커뮤니티
나를 꼭 안아주는 체온 커뮤니티만들기
커뮤니티 형성의 작동 원리
인터넷의 토론 중독
의지할 곳이 없어진 데서 오는 공포
4장 금기를 깨고 쾌락하기
바른 생활 속의 금기를 향한 질주
역동성의 상실과욕망 드러내기
또 다른 나를 위한 쾌락
몸을 통한 금기 넘어서기
금기를 넘는 성, 성문화
5장 10인 10색, 성 르네상스의 시대
내 거야! My sex, Mystyle
동상이몽(同床異夢)-한 침대에서 서로 다른 애인을 꿈꾼다
불황 없는 산업
더 이상 어두운 데 있기싫다
6장 향기로운 남자로 거듭나기
남성 콤플렉스 벗어던지기
화장하는남자들
변화하는 미남의 기준
부드럽고 유머러스하며 향기나는 어떤 것
7장 신생 인류, 호모 유머리스트
웃고 싶다, 웃기고 싶다
유머와 처세술의결합
유머를 사고 파는 시장의 생성
웃기는 영화, 웃기는 광고
8장 풍류를 즐기는 안단테, 안단테
몸의 속도, 영혼의 속도
그들은 어디서어떻게 살고 싶어할까
쉬어도 좀 다르게 쉰다
느리게, 멋있게 살기-풍류를 즐기는 안단테
속도 역행하기 상품의유행
한국인 트렌드
1. 우리 사회의 지형도를 바꿀 새로운 흐름들
파워풀한 소비자 - 페로몬 공동체
나비 암컷은 아주 적은 양의 페로몬을 몸 박으로 내뿜는다. 그러나 수컷은 10km나 떨어진 곳에서도 그 냄새를 좇아 정확히 암컷에게 날아간다. 포유류의 경우는 몸 밖으로 난 페로몬 분비선을 통해 자신의 세력권(텃세권)을 알린다. 코끼리는 머리 부위에, 사슴 종류는 눈 밑에, 캥거루는 가슴에 페로몬 분비선을 갖고 있으며, 토끼는 그 선이 항문 주위에 있어서 똥 무더기에 페로몬을 묻혀 자기 구역임을 알린다. 인간에게도 페로몬이 있다고 추정하는 학자들이 많다. 사랑을 하게 되면 동물과 마찬가지로 향기를 내는 방향성(芳香性)과 쉽게 날아가는 휘발성을 가진 페로몬이 분비된다는 것이다.
특히 최근에 와서는 실질적인 쓸모보다 상징적이고 욕구의 충족을 훨씬 중요하게 생각하는 사람들이 늘면서, 페로몬은 절대적인 영향력을 행사하기 시작했다. 사람들은 자신의 감성적 분비물인 페로몬을 흘리고, 물리적으로 아무리 멀리 떨어져 있어도 그 감성 페로몬에 딸깍! 하고 동류의 공감을 느끼면 인터넷으로 순간 이동을 한다. 그리고 ‘공감(共感)’의 즐거움으로 입을 다물 줄, 아니 손가락을 멈출 줄 모른다.
예를 들어보자. 2000년 9월 6일, 한 해충방제 인터넷 게시판에 질문이 올라왔다.
“나는 바퀴벌레를 먹는다. 아주아주 맛있다. 그 씹히는 맛이 달콤한 바퀴벌레!(하략)”
잠재 소비자에겐 무조건 친절하기로 한 회사 방침 때문에 기술 연구소의 연구원은 이렇게 답변을 올렸다.
“저희 홈페이지를 방문해주셔서 감사합니다. 바퀴, 모기 등의 해충은 고단백질로 영양가는 있습니다. 그러나 그들이 가지고 있는 병원균은 수십 종으로, 사전 처리를 잘 하고 드셔야 합니다. 행운이 있으시길 바랍니다.”
이런 것도 있다.
문) 해충보다 못한 일부 정치인들에게는 어떤 살충제를 써야 하나요?
답) 어떤 해충인지 확실히 구분이 안 가므로 샘플을 보내주시면 전자 현미경 관찰 뒤 방법을 알려드리겠습니다.
그러다가 1년이 지난 어느 날, 한 대학생의 더듬이가 우연히 이 회사 게시판에 도달했다. 그는 엉뚱한 질문과 대답으로 이루어진 이 게시물들을 자기의 감성을 자극한다는 것을 발견했다. 그는 1년치 게시판을 모두 검색한 후, 그 중 가장 재미있는 글 5개를 뽑아 ‘이렇게 친절한 기업도 있습니다!’ 라는 제목으로 대학 게시판에 올렸다. 이후 이 글이 발산하는 독특한 냄새는 인터넷을 통해 엄청난 속도로 전파되었다. 그들은 웃고, 즐기고, 공감한 후 그 회사의 게시판으로 몰려들었다. 그리고 해충방제 회사의 게시판은 하루에 10만 건이 넘는 조횟수를 기록했다. 이것이 바로 우리 나라 최초로 탄생한 기업 팬클럽인 ‘세팬(세스코 팬클럽)’이다.
세팬은 감성의 ‘페로몬’에 공감한 사람들끼리 만든 공동체, 즉 ‘페로몬 공동체’‘다. 누군가 감성 섞인 냄새를 풍기면, 이에 공감하고 유혹당한 사람들이 순식간에 집단을 형성하는 이 시대는 페로몬 공동체의 시대다. 최고의 공로자는 물론 인터넷이다.
페로몬 공동체가 본격적으로 등장하면서, 그 뒤의 드라마들도 이들의 영향권을 벗어나지 못했다. 후속 드라마인 〈대장금〉에 빠진 사람들은 ‘애호대장금’ 이라는 공식 동호회를 출범시켰는데, 그 주인공이나 줄거리에 관여함은 물론이고 스태프들에게 직접 음향이나 소품, 분장까지 지적하는 코너를 통해 드라마에 영향력을 행사하고 있다.
원래 TV 시청은 지극히 수동적인 소비자를 양산하는 분야였다. TV가 바보상자로 불린 것도 그 때문이었다. 그런데 페로몬 공동체의 등장은 TV 시청자를 생산에 관여하는 소비자로 재탄생시켰다. 그들은 단순하게 받아들이지 않는다. 그래서 인기 드라마 주인공의 패션이나 액세서리가 유행하던 식의 단순한 패턴을 뛰어넘는 새로운 소비 패턴이 생겨나고 있다.
유행을 창조하는 곳은 이제 인터넷 게시판들이다. 특정한 페로몬에 공감하는 사람들이 모여 공동체 게시판을 만들기도 하고, 누군가가 홈페이지를 열었을 때 그가 발산하는 감성의 분비물에 유혹당한 사람들이 몰려와 공동체를 형성하기도 한다.
디자인 사이드(www.dcinside.com)라는 사이트에 가면 네티즌들이 직접 올린 엄청난 합성 사진들을 볼 수 있다. 이 사이트의 초기 게시물 중 하나인 ‘개벽이’- 개가 벽 사이로 얼굴을 내밀고 있는 사진이 올라왔는데, 그 개에게 이런 이름을 붙여주었다- 는 수많은 합성 사진에 변주되었다. 이 사진이 발산하는 감성의 페로몬은 “호기심 어린 강아지의 표정, 눈빛, 그리고 벽이 주는 느낌 등이 합쳐”져 귀엽기도 하고, 엉뚱하기도 하고, 불쌍하기도 한 묘한 느낌이었다. 그들은 합성 사진을 만들고 감상하면서 그들만의 공동체를 형성하기 시작했다.
이 대열에 선 사람들의 몰입과 열정은 유행을 낳기도 했다. 독일 아디다스사의 상품과 똑같은 모양을 가진 ‘디디바오’라는 중국 상품 사진을 누군가 올리자, 일부 네티즌은 거기서 ‘짝퉁(모방 상품)도 이 정도 당당하면 예술이다’라는 느낌을 받았다. 그들은 예술에 가까운 짝퉁 상품 사진을 찾아 연이어 올렸고, 여기에 공감한 사람들은 실제로 시장에서 이들 상품을 사기를 원했다. 짝퉁 명품 유행은 이렇게 해서 시작되었다. 이들은 명품으로 상징되는 귀족 문화에 대응해 ‘모방도 예술’ 이라는 당당함의 문화를 생산하고 있다.
같은 종류의 페로몬에 공감하는 네티즌 공동체의 힘은 이처럼 폭발적이다. 그들 스스로 상품을 만들어내고, 유행을 창조하고, 새로운 문화를 선도한다. 누가 그들을 단지 ‘소비자’라고 부를 수 있는가.
2. 성공의 꿈과 욕망이 빚은 자본주의적 트렌드
고객 존중을 넘어선 메모리 마케팅
사람의 기억력도 훈련을 통해 향상시킬 수 있다. 하물며 기업의 기억력은 어떤 노력을 하느냐에 따라 사람의 기억력을 뛰어넘는 획기적인 향상이 가능하다. 지금, 여기서 진행되고 있는 기억력 향상 노력을 살펴보자. 지식 경영의 유행은 메모리 마케팅의 번성에 힘을 실어주는 방법론적 모색이 된다.
고객들과 대면하는 현장 영업사원들은 고객과 고객의 심리, 고객 주변의 여러 가지 상황에 대한 정보를 습득한다. 이것은 그동안 영업 사원 개개인의 두뇌 속에 머물러 있다. 지식 경영은 이러한 지식들을 공유하려고 한다. 개인의 한계 내에 머물러 있던 지식이 중앙으로 모이고 고이면서 지식은 대중화되고, 업그레이드가 한결 쉬워진다. 동시에 고객 각각에 대한 지식은 기업에 의해 ‘기억’ 된다. 지식은 기억이 되고, 고객에 대한 이해의 질을 높여주며, 따라서 메모리 마케팅에 활력을 불어넣는다.
조금 다른 사례지만, 현대 백화점은 CRM(고객관계 관리)을 도입한 후에야 고객에 대한 새로운 지식을 얻게 되었다. 신세계백화점이 한 발 앞서 1995년 일본의 CRM 패키지를 국내 실정에 맞춰 도입한 지 2년 만에, 현대백화점도 CRM 프로젝트를 추진했다. 현대백화점 CRM 팀은 프로젝트를 추진해 나가면서 고객이 두 종류로 나뉜다는 지식을 얻었다. 즉, 가격에 민감한 고객과 관계를 중시하는 고객으로 나눌 수 있었던 것이다. 관계를 중시하는 고객은 자신과의 관련성, 자신에 대한 대우 등에 민감했다. 반면, 가격에 민감한 고객은 관계보다 실리적 가치를 중시하기 때문에, 할인점과 경쟁해서 이길 가능성이 없는 백화점으로서는 이들 고객을 포기하는 편이 온당했다. 새로운 지식이 경영과 방향을 잡는 데 중요한 역할을 한 셈인데, 이것 역시 고객에 대한 지식의 향상으로 인한 마케팅 변화의 사례이다.
세계적인 서적 판매 사이트였던 아마존(www.amazone.com)은 한 번 주문한 고객이 다시 방문하면 자동으로 그 고객을 기억하는 기능을 최초로 마련했다. 100명이 찾든 1,000명이 찾든, 전자 기억력의 한계는 돌파되지 않는다. 고객의 선택들은 그대로 고객 취향의 분석에 필요한 기억 소자가 되고, 다음에 방문하면 그 소자들을 활용해 상품들을 추천할 수 있다. 아마존닷컴이 새로 개발한 서비스는 메모리 마케팅의 또 다른 진화다. 그들은 책을 찾는 독자가 자신의 흐릿한 기억 때문에 구매를 포기하는 경우에 대비하여, 고객의 기억을 도와주는 서비스를 만들었던 것이다.
전자 기억을 활용하는 방법들은 하루가 다르게 진화하고 있다. 이 모든 방법들은 고객에 대한 기억이 고객 그 자체가 될 때까지 진화를 멈추지 않을 것이다.
‘150명의 직원이 일대 일로 하루 150명의 건강 진단을 책임진다.’
낯선 병원 복도를 이리저리 헤매며 자신의 건강에 대한 걱정보다 다음 코스가 어딘지 고민하던 건강 진단과는 완전히 다른 맞춤 서비스다. 이것은 최근에 개원한 서울대병원 강남검진센터의 서비스 내용이다. 최첨단 장비를 갖춰놓고 교통도 편리한 서울 한복판 빌딩의 38층과 39층에 만들어진 이 센터는 처음부터 사람을 차별한다. 편안하게 휴양도 하고 숙박도 하면서 건강 진단을 받는 ‘숙박 건강진단’은 비용만 200만~300만 원에 이른다.
일대일 서비스가 가능하니까 고객에 대한 병원측의 기억력은 탁월할 것임에 틀림없다. 하지만 이 탁월한 기억력을 기대하기 위해서는 탁월한 지출 여력이 있어야 한다.
메모리 마케팅은 고객을 일일이 구분함으로써 필연적으로 고객을 차별하는 마케팅이다. 그리고 제대로 차별해야 부자들의 넉넉한 호주머니 구경을 할 수 있다.
금융권의 고객 차별은 한층 심하다. 고액 자산가를 상대하는 프라이빗 뱅킹(Private Banking)은 이발소 아저씨처럼 고객을 관리한다. 하지만 이발소 아저씨가 해줄 수 없는 서비스들이 즐비하다. 최근 한 은행은 독일제 최고급 차종인 BMW의 국내 대행업체와 제휴하여, PB고객을 대상으로 공항 에스코트 서비스를 시작했다. 시가 1억 원을 가볍게 넘기는 모델들이 여기에 동원된다. PB 고객 자녀들은 부모를 잘 둔 덕에 결혼정보 회사의 맞선 서비스를 공짜로 받을 수도 있다. 세계 최고의 경매 회사인 소더비의 미술 전문가를 초청하여 PB 고객에게 강연회를 열어주기도 한다. 물론 PB 전문지점에 드나들려면 10억 원 이상의 자산가라는 점이 은행의 기억 속에 저장되어 있어야 한다.
사람 차별의 메모리 마케팅은 오래 전부터 예고된 것이었다. 1997년의 외환위기 직후에도 부자들은 소비를 줄이지 않고, 그 비싼 외제 수입차의 판매는 오히려 늘었다. 기업들은 재빠르게 이것을 기억했고, 고객의 자산 규모와 씀씀이에 대한 기억은 다른 어떤 것들보다 오래, 강인하게 살아남았다. 이로부터 부자에 대한 메모리 마케팅이 시작되었던 것이다.
우리 시대 소비자들의 가장 중요한 변화는 기성복 고르듯 하는 소비에 싫증을 느끼게 된 것이다. 아무리 재빠른 주기로 새로운 디자인과 기능을 가진 신상품을 공급해도, 기성품에 싫증을 느끼는 각 개인의 욕망을 일일이 충족시킨다는 것은 불가능하다. 따라서 기업이 고객에 대한 완벽한 기억력을 갖춘다 해도, 생산 측면에서 이를 뒷받침할 수 있느냐 하는 문제는 여전히 남게 된다. 완벽한 주문 생산만이 이를 해결해 줄 수 있으니까….
신발 제조업체인 나이키사는 고객이 온라인상에서 색상이나 로고 위치, 신발끈을 직접 선택하고 개인의 아이디를 입력하면 신발 뒷면에 아이디를 새겨서 배달한다. 고객이 원하는 디자인에 이름까지 새겨주는 맞춤 티셔츠도 생겼고, 잡지도 고객의 요구에 따라 내용을 다르게 맞춰주는 맞춤 잡지가 탄생했다.
그러나 아직까지 이런 새로운 생산 방식의 선두 주자이자 가장 확실한 길을 제시하고 있는 것은 델(Dell) 컴퓨터다. 그로부터 대량이란 뜻의 (Mass)와 맞춤화, 혹은 주문화란 듯의 커스터마이제이션(Customization)을 조합한 ‘대량맞춤(Mass-customization)’이라는 생산 양식이 유행하기 시작했다.
미국 대기업의 최장수 CEO로 이름을 날리고 있는 마이클 델이 1984년에 델 컴퓨터를 만들었을 때, 그의 아이디어는 컴퓨터 솔루션의 직거래였다. 중간유통 단계를 줄이겠다는 발상이었다. 이후 델은 성장을 거듭하여 1996년에 전자상거래를 시작하면서 업계를 이끌더니, 마침내 1998년 대량맞춤 생산방식에 의거한 온라인 판매라는 모델로 엄청난 양의 컴퓨터를 팔아대기 시작했다. 델 컴퓨터의 고객들은 집에 편안히 앉아서 인터넷에 띄워져 있는 델의 제품 라인들 중 자기의 기호에 맞게 시스템을 선택한 후, 가격을 확인하고 온라인상에서 주문한다. 주문 후의 과정이 어디까지 어떻게 진행되는지도 온라인상에서 확인할 수 있다. 고객은 고객대로 자신의 요구를 상품에 반영하게 되었고, 델 컴퓨터는 고객의 요구를 맞춰주면서도 중간유통 단계를 생략하고 대량 주문으로 인한 대량생산 체제를 가동시켜 비용을 절감했다.
모든 상품이 대량 맞춤이 가능한 것은 아니다. 하지만 메모리 마케팅의 짝으로 생산양식 부문의 대량 맞춤이 효과적인 구실을 하고 있는 것만은 사실이다. 고객의 다양한 욕구를 생산 차원에서 조응해주는 방식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고객의 요구는 선택의 폭과 다양성 면에서 더 높은 수준을 필요로 할 것임에 틀림없다. 대량 맞춤이 좋은 생산 방식이긴 하지만, 그래도 완벽한 것은 아니다. 대량 맞춤이 새로운 정보통신 기술과 생산조립 기술의 발전에 힘입은 결과였듯이, 앞으로 어떤 신기술이 출현해 고객의 다양한 욕구를 100% 만족시킬지는 아무도 모른다.
3. 오래된 과거를 깨고 나오는 한국인
발가벗고 뛰는 할리우드식 일등주의
승자독식의 사회(The Winner-Take-All Society). 이 사회의 존재야말로 일등주의의 에너지다. 편안한 세상을 꿈꾸다가도, 한번 이 세계를 훑어보기만 하면 일등주의를 포기하지 못하도록 하는 에너지가 재충전된다. 우리는 무섭게 내달리는 말 잔등에 올라탄 게 아닐까? 너무 빨라서 내리고 싶어도 내릴 수 없는….
음반이나 영화, 책, 그리고 컴퓨터 소프트웨어는 초기에 생산하고 시장에서 자리잡기 위한 비용은 크지만 추가 생산에 드는 비용은 생산량이 많을수록 작아진다. 복제가 쉽기 때문이다. 이런 상품일수록 생산 규모의 확대에 따른 수익이 기하급수적으로 늘어나는 ‘규모의 경제’가 쉽게 작동한다. 따라서 생산 규모를 확대할 수 있는 일등기업이 시장을 좌우하게 된다. 더구나 21세기를 이끄는 새로운 산업들, 즉 3T(Bio, Culture, Information Technology: 생명?문화?정보통신 기술)나 극미세기술 (NT: Nano Technology)의 상품들은 거의 무한 복제가 가능하고, 추가 복제에 드는 비용은 극히 미미하다. 따라서 일등 기업은 뒤따라오는 기업들보다 많이 생산하는 만큼 가격을 더 낮출 수 있다. 품질면에서도 물론 선도하겠지만 가격에서도 유리하니 일등 체제는 더욱 강화되고, 시장 점유율은 이등을 초라하게 만든다.
기업들도 경험으로부터 일등주의로 가고 있다. 이를 증명하는 사례가 롯데 그룹이다.
롯데의 경영 방식을 흔히 사무라이 경영이라고 하는데, 단칼에 적의 목을 베듯 일등 이외에는 눈을 돌리지 않기 때문이다. 롯데의 신격호 회장은 일본의 껌 시장을 놓고 1956년부터 10여 년 간 미국 리글리 사와 치열한 일등 경쟁을 벌였고, 승리했고, 그 전리품을 만끽했다. 그 후 그는 일등주의 사무라이 경영을 신조로 삼았다. 롯데쇼핑?롯데제과?호텔롯데 등 각 분야별 일등 기업을 소유한 롯데는 그것을 놓치지 않기 위해 대규모 물량 공세를 자제하지 않는다. 아마 신격호의 머릿속에는 ‘2등= 꼴찌’ 라는 공식이 박혀 있는지도 모르겠다.
삼성의 대항마 LG는 언제부턴가 삼성을 닮아가고 잇다. 해마다 최고 경영자들은 연초의 ‘말씀’으로 일등이 얼마나 중요한지 되풀이 설교하고 있다. 일등인재를 확보하고, 일등 사업가들을 육성하며, 일등만 하면 파격적으로 보상하고, 조직 문화도 일등이어야 한다는 것이 그들의 일등주의다. “이등은 아무도 기억하지 않습니다”라고 말하는 삼성과 다를 바 없다. 비단 LG의 현상만은 아니다. 우리는 실제로 이등은 기억하지 않는다. 올림픽 은메달을 따고서도 기뻐하지 않는 나라는 대한민국 선수들뿐이라지 않는가.
승자독식의 사회를 무너뜨릴 에너지는 어디에 있는가? 저 낮은 곳 어디에 있다. 분배의 평등이나 사회 복지, 공동체 복원 등을 외치는 목소리는 얼핏 커 보이지만, 사회를 움직이는 힘이라는 면에서 볼 때 그것은 작고 낮은 곳에 웅크리고 있을 뿐이다. 그것 역시 그 나름의 트렌드를 형성하지만 어디까지나 보조, 혹은 보완적 존재가 되고 있다.
승자 독식의 사회에서 사업 기회는 틈새 시장에 있다. 틈새 시장이란 승자가 차지하고 남은 시장이기도 하지만, 승자가 차지한 시장 내의 틈을 비집고 들어가서 만들어낸 시장이기도 하다. 부실해 보이고, 수요가 없어 보이던 곳에서 새로운 수요를 창출하는 시장이다.
출발 시간이 뒤처진 사람들로서는 그것이 유일한 방법이기도 하다. 그것은 ‘유행가 시장’에서도 만들 수 있고, 시장이 없던 장르를 통해서도 만들 수 있다. 영화?출판?음악?게임 등 문화예술 분야만큼 승자독식이 뚜렷한 분야도 없지만, 또 그래서 틈새가 승부수가 된다.
400석 규모의 객석을 갖춘 정동극장이 전형적인 예다. 1995년에 이 극장의 연간 수입은 불과 9,000만 원이었다. 그러나 4년 후인 1999년에는 16억 9,000만 원으로 뛰었다. 무려 1,878%라는 놀라운 성장률이다, 이 신화를 이뤄낸 배후에는 새로 취임한 극장장(홍문종)이 있었다. 당시만 해도 “문화 예술도 하나의 상품이다”라는 새 극장장의 지론이 틈새의 돌파구 구실을 했다. 이 지론 덕분에 그는 근처의 수많은 직장인의 점심 시간을 축내기 위한 ‘정오의 예술무대’를 만들고, 직장 여성을 위해 ‘낮잠 음악회’를 만들 수 있었다. ‘문화체험 때밀이관광’이라는 상품에 이르러서는 그 신선한 발상이 앙큼하기까지 하다. “몸의 때는 사우나에서, 마음의 때는 정동극장에서”라는 구호를 들으면 그제서야 ‘아하!’ 하고 무릎을 치게 되는데, 모범 택시?여행사?호텔 등과 제휴한 문화 상품이었다. 대형 영화와 컴퓨터 게임, 대중 가요가 독식하던 문화예술 시장에서 정동극장은 작지만 새로운 시장을 연 것이고, 그것이 승자독식 시장에서 살아남은 비결이다.
틈새의 성공 확률은 물론 높지 않다. 하지만 그것이 아니라면 승자독식이 일반화되고, 일등이 이미 먹어버린 세상을 열어젖히기가 어렵다. 그래서 틈새 찾기는 우리 시대의 사업 트렌드가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