백만번의 프러포즈

   
조용모
ǻ
다산북스
   
9800
2005�� 10��



■ 책 소개
가난한 환경을 딛고 고생 끝에 5급사무관으로 사회생활을 시작한 저자는 스물일곱, 뺑소니사고로 한쪽 다리를 쓰지 못하는 장애를 얻었다. 감당할 수 없는 불행에 좌절과 분노,자기부정, 방황 끝에 자살을 기도하기도 했다. 그러나 그 다음 행보는 남달랐다. 그는 이렇게 갑작스레 닥친 불행을 이겨내고 다시 일어나 대한민국최고의 세일즈맨이 되었다. 

 


성한 사람도 하기 힘든 세일즈이지만 사람과 사람이 만나는 데 가장 중요한 것은 신뢰와진실이라는 신념으로 고객에게 성심을 다했다. 그에게 세일즈는 끊임없이 도전해야 하는 삶의 터전이었으며, 고객은 아무리 변덕을 부려도 사랑해야하는 단 한 명의 연인이었다. 책 제목 "백만번의 프러포즈"는 이러한 그의 삶을 단적으로 표현한다.


책은 세일즈 명장 조용모 씨의 끝없는 도전과 열정에 관한 이야기다. 또한 한 세일즈맨의영업 분투기이며, 장애에 대한 세상의 편견을 뒤엎은 휴먼 스토리이기도 하다. 저자의 영업·조직 관리 노하우와 리더십은 물론 불굴의 집념과 오기,도전정신, 열정과 희망의 메시지를 담았다.


■ 저자 조용모
1953년 전북 익산에서 태어나 간신히초등학교, 중학교를 마치고 서울대 대학원 법학과를 졸업하기까지 독학으로 공부했다. 한때 국가기관의 촉망받는 사무관이었던 그의 인생이 느닷없이항로를 바꾸게 된 건 스물일곱, 꽃다운 나이에 뺑소니차에 치이면서였다. 수술에 수술을 거듭하며 일곱 달을 보냈지만 그에게 남은 건 ‘지체장애3급’이라는 딱지뿐이었다.


절망 끝에서 자살을 시도하고, 다시 살아나 몸을 추스른 후 직장을 찾아 나섰지만 장애인인그에게 세상은 쉽사리 문을 열어주지 않았다. 110번의 입사지원 끝에 보험회사에 취직했다. 그리고 ‘열정’이라는 단 하나의 무기로 세상의고정관념과 편견을 과감하게 깨뜨리며 가는 곳마다 ‘세일즈 신화’를 만들어냈다. 현재는 컨설팅 회사 ‘해피라이프 개발원’을 운영하며 많은사람들에게 희망과 열정의 메시지를 전하고 있다.


가난과 장애라는 이중고에도 굴하지 않고 운명을 개척한 그의 이야기는 중앙일보, SBS<인생대역전>, KBS <이것이 인생이다>, MBC <느낌표>등에 소개되어 많은 이들에게 진한 감동과 교훈을선사한 바 있다. 

■ 차례
머리말 - 인생은 프러포즈의 연속이다


1장 세상이 나를 밀어내고, 밀어내도
나의 첫강연
내 스물일곱을 삼켜버린 불빛
살아야 할 이유
포기하지 않는 순간 이미 이겼다
처음으로 맛본 내세상


2장 세상을 향한 백만 번의 프러포즈
109번째프러포즈
한 발로 밟는 페달
나에게도 직업이 생겼다
세상을 향한 나의 첫 프러포즈
드디어 첫 계약을 따내다
세상을 내편으로 만들어라
파출소 습격사건
땀, 눈물, 그리고 피
진심은 통한다
희망을 꿈꾸게 하는 인연들


3장 한 발로 서서 세상에 나를 세일즈하다
마음을흔드는 프러포즈를 위하여
새로운 도전
금쪽같은 아침 조회
한 부하직원의 항복선언
최고의 선물
영업소에 나타난 눈덩이효과
주인으로 사는 인생
꿈의 크기는 열정에 비례한다


4장 세상과 나를 바꾸는 작은 힘
누구나 프로를꿈꾼다
거꾸로 도는 시계
손은 거짓말을 하지 않는다
즐거움에는 힘이 있다
당신도 나처럼


5장 모든 사람이 행복한 세상을 꿈꾸며
나의 별명,외다리 보험왕
해피, 해피라이프


맺음말 - 지금 딛는 한 발자국이 오늘과 다른 내일을만든다




백만번의 프러포즈


세상이 나를 밀어내고, 밀어내도
전에 다니던 회사 회장님의 주선으로 첫 강의를 한 지 어느 덧 10년이 흘렀다. 그러나 그 첫 강연의 감동은 아직까지 나를 흥분시킨다. 그것이 인연이 되었는지 나는 10년이 지난 오늘도 강연 준비를 한다. 연일 이어지는 강연, 정말 하루 종일을 쏟아부어도 쉴 새가 없다. 그러나 나는 즐겁다. 강연을 듣고 결심을 새롭게 다지고 용기를 갖게 되는 사람들의 모습을 지켜보노라면 어느새 피곤함은 사라지고 의욕에 불탄다. 절망의 끝에서 죽음만 생각하며 살던 내가 이제는 절망에 빠진 다른 사람들에게 희망과 용기를 북돋아주는 역할을 하고 있는 것이다. 그런 생각을 하면 가슴 한편이 보람으로 충만해진다.


절망보다는 희망이 우세하고, 불신보다는 믿음이 강렬하고, 비관보다는 낙관을 좋아하고, 나태보다는 열정을 사랑하는 그런 나이인 스물일곱, 나는 뺑소니사고를 당한 뒤 한쪽 다리를 잃고 회사도 잃었다. 그간의 노력이 하룻밤 사고로 모두 사라져버렸다. 술에 취해서 익숙하지도 않은 목발에 몸을 의지해 밤거리를 걷고 또 걸었다. 그러지 않고는 터질 것 같은 울분을 참을 수가 없었다.


수면제를 한 움큼 털어넣어 자살을 시도해보았지만 어머니가 발견하여 급히 병원으로 옮겨졌고, 18일 후에 퇴원할 수 있었다. 어머니의 기도와 정성이 죽음에 이른 자식을 살려낸 것이다. 그때 어머니의 기도는 나를 살려달라는 것 딱 하나였다고 한다. ‘이 아들이 죽으면 나도 그 길로 자식 따라가겠다’는 생각만으로 그렇게 기도를 하셨다고 한다. 그때의 어머니 심정을 생각하면 마음이 저민 듯 아프다. 못난 자식 탓에 얼마나 애가 타셨을까.


죽다 살아난 나는 세 가지를 깨달았다. 첫째는 그 누구도, 부모형제까지도 나를 대신해서 살아줄 수는 없다는 것이었고 둘째는 모두가 빌려 쓰는 목숨이고 언젠가는 죽음의 계곡으로 가게 될 것이니 서두를 이유가 없다는 것이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내 어미가 살아 계시는 한 그분의 두 눈에 다시는 이슬 맺히게 하지 말자는 것이었다.


어머니는 나를 낳아주셨고, 죽어가는 내 목숨을 살려내셨다. 나를 두 번 낳으신 셈이다. 이 여벌의 목숨은 오롯이 어머니의 바람을 실현하는 데 쓰여야 했다. 어머니가 바라는 대로 이 세상과 다시 건강하게 호흡하며 열심히 살아야 했다. 기이하게도 죽음을 결심하자 살아야 할 이유가 생긴 것이다. 그렇게 나는 비로소 절망의 밑바닥을 디뎠다. 다시 수면 위로 박차고 올라갈 힘을 얻었다. 절망의 밑바닥에서 나는 판도라의 상자에 맨 마지막까지 남아 있던 희망을 발견한 것이다.


세상을 향한 백만 번의 프러포즈
110번째로 이력서를 낸 H자동차보험에 합격해 익산 대리점 점장을 맡았다. 하지만 말이 좋아 점장이지 혼자서 모든 일을 해나가야 했다. 잘되느냐 못되느냐는 모두 내 손 안에 달려 있었다. 오직 내가 어떻게 하느냐에 따라 성공과 실패가 갈렸다.


사무실을 따로 얻을 여력이 없으니 집을 대리점으로 사용할 수밖에 없었다. 길가에 면해 있는 벽에 ‘새한 대리점’이라는 간판을 걸어놓고 전화기를 한 대 들여놓았다. 이처럼 초라한 출발이었지만 내 마음은 100평짜리 사무실을 얻은 것보다 큰 기쁨으로 가득했다. 그곳은 내가 새로운 삶을 시작하는 첫 공간이었으며, 어둠 속에서 불을 밝히는 등대처럼 내 삶의 이정표가 세워질 공간이었다. 또한 세상을 향한 프러포즈를 준비하는 뜻깊은 산실이었다.


드디어 첫 계약을 따내다
익산 근처에 팔봉이라는 마을이 있다. 그곳에 정미소를 하는 분이 있었는데 ‘많이 돌아다니고 많은 사람을 만나자’라는 다짐대로 이곳저곳 열심히 돌아다니다가 알게 된 분이었다.


“사장님, 보험 하나만 드세요.”
“몇 번 말해야 알겠나? 나는 이미 거래하는 사람이 있다니까.”


우리의 이 대화는 만날 때마다 반복되었다. 말도 한번 제대로 못 붙여보고 차가운 시선에 그냥 돌아설 때면 온몸에서 힘이 쫙 빠졌다. 그냥 땅 속으로 꺼져버리고 싶은 심정이 들 때도 많았다. 하지만 처음부터 쌍수를 들고 환영하는 고객은 아무 데도 없다. 비록 지금은 거래하는 다른 사람이 있다 해도 조금 있으면 계약기간이 끝날 것이다.


아무리 거절해도 내가 지치지도 않고 찾아가자 한두 마디씩 말을 받아주었고 어쩔 때는 이런저런 이야기를 두런두런 나눌 수도 있게 되었다. 이야기를 나누는 횟수가 늘어갈수록 그분과 나 사이의 거리는 알게 모르게 조금씩 좁혀지고 있었다.


그렇게 서로 어느 정도 가까워졌을 때 하루는 내가 정색을 하고 물었다. “대체 거래하고 계신 분이 누군가요? 그것만이라도 알려주세요.” 그러자 그분은 마지못한 듯 입을 열었다. “알걸? 익산 경찰서 형사계 출신 말이야.” 아무래도 형사 출신으로 인맥이 넓은 데다가 보험영업을 한 지도 오래되어 그의 거래처를 뚫고 들어가는 건 어려울 것 같았다. 하지만 나에게도 오기는 있었다. 새벽에 사고를 당한다고 해도 현장으로 곧장 달려나가 사고처리까지 직접 해드릴 수 있다는 것을 절절한 심정으로 전달했다. 그러다 얼마 뒤 새벽에 그분에게서 전화가 왔다. 다급한 목소리로 들어보니 그분 친척이 사고를 당했는데, 사고 처리를 도와줄 사람이 없어 내게 전화를 한 것이다. 나는 자다 일어나 눈곱도 떼지 못하고 현장으로 달려가 이런저런 정황을 살피고 말끔하게 사고처리를 해주었다.


“정말 고맙네. 사실 거래하던 그 영업자에게도 전화를 했었는데, 그 사람은 ‘이 새벽에 웬 전화냐’고 하더군. 그래서 혹시나 하고 자네한테 전화를 한 건데, 피곤할 텐데도 이렇게 나와서 도와주니 고맙기 그지없네 그려.” 그의 말을 듣고 있자니 내가 다른 사람에게 도움이 될 수 있다는 사실만으로도 가슴 구석구석이 벅차올랐다.


며칠 뒤 그분에게서 친척이 사고를 당했으니 도와달라는 전화가 와서 가보니 그분이 밥상을 차려놓고 나를 기다리고 있었다. “사고는 무슨 사고! 함께 점심이나 먹음세. 내가 장난 좀 친 거야. 우선 밥이나 먹자고. 내 할 말이 있어서 오라고 했네.” 나는 조금 어리둥절했지만 한편으로는 안심이 되었다. 밥을 다 먹고 나자 그는 약간 짓궂은 미소를 지으며 내게 말했다.


“내 자동차 보험료 한번 뽑아보게나!”


이렇게 나는 그 사람에게 첫 계약을 따냈다. 절망의 늪에서 일어나 다시 시작한 이 일에서 내가 이룬 첫 성과물이었다. 물론 이 계약을 통해 얻은 수입이 더 많은 것은 아니었지만, 나는 백만 원, 천만 원을 번 것보다 더 기뻤다.


하루 종일 수십 km를 자전거를 타고 돌아다녔기 때문에 밤이면 피로가 쌓여 움직이기 힘들 정도였다. 그런 나는 그 새벽, 보험설계사로 나섰을 때의 첫 마음을 떠올려 보았다. 세상을 향해 온 마음으로 프러포즈하겠다던 첫 다짐을 상기했다.


그러나 나에게도 숱한 시행착오가 있었다. 보험을 시작한 지 얼마 되지 않았을 때에는 사람들에게 오해도 많이 받았다. 오해보다 더 힘든 건 같은 업종에 종사하는 사람들과 부딪힐 때였다. 하지만 나에게는 나 나름의 방식이 있을 거라 생각했다. 고객을 진심으로 대하고 하루하루를 성실하게 채워간다면 제 아무리 경쟁이 치열해도 나의 고객을 찾을 수 있을 거라 생각했다.


내가 하는 일에서 최고가 되겠다는, 그리고 남들의 발이 아직 많이 닿지 않은 시장을 개척해보겠다는, 도전정신, 보험을 남들보다 나을 것 하나 없는 조건으로 뒤늦게 시작했던 나다. 하지만 남들보다 더 많이 가지고 있었던 게 하나 있다면 그건 도전정신일 것이다. ‘도전’이라는 말을 나직이 입속으로 읊조려보면, 이 낱말이 펄펄 뛰는 물고기처럼 입안에서 살아 움직이는 느낌이 든다. 그렇게 매일매일 도전하면서, 나는 보험 세일즈맨으로 조금씩 성장해나갔다.



한 발로 서서 세상에 나를 세일즈하다
주인으로 사는 인생

나는 1994년 7월 1일 영업 현장을 떠나 대전에 있는 중부본부의 교육담당으로 부임했다. 교육이라면 현장 경험이 풍부한 내가 적격이었을 것이다. 그러나 익산 지역에 지점을 개설할 시점이 다가온다는 것을 아는 나는 내 손으로 일군 그 지역의 지점장이 되기를 은근히 바랐다. 이제는 지점장으로서 내 인생에 새로운 이정표를 세우고 싶었다. 아니, 처음 이 회사에 입사하면서 세웠던 ‘입사 10년 안에 부장으로 승진하겠다’는 목표를 실현하기 위해서라는 표현이 더 맞을지도 모르겠다.


그런 의미에서 나는 교육보다는 영업을 하고 싶었다. 엄밀히 말하면 영업관리를 하고 싶었다. 그렇다고 지금껏 가꿔온 텃밭을 갈아엎을 수도 없는 법, 나는 주어진 자리에서 다시 1년 6개월을 기다렸다. 새 지점장을 다시 임명하는 때가 오고, 나는 다시 한 번 결과에 주목했다. 하지만 이번에도 역시 나의 기대는 무참하게 짓밟히고 말았다.


일이 그쯤 되자 아무리 강한 마음을 먹고 모든 것을 이겨내야 한다고 다짐한 나였지만 어쩔 수 없이 자괴감에 시달렸다. 그렇게 실망을 하고 있는데 본부장님이 나를 술집으로 이끌었다. “미안하네. 지점장 이사는 사장이 직접 하는데, 도무지 내 말이 먹히지를 않아. 어차피 말이 나온 김에 하겠네. 아무래도 지금 이 사장이 계속 있는 한 자네가 지점장이 되기는 틀린 것 같아. 사장이 껍질을 너무 많이 보거든.장애인에 대한 편견을 갖고 있어.”


하늘이 무너지는 것 같았다. 그래도 뭔가 한번 이뤄보겠다고 몸부림치면서 걸어왔던 지난날들이 더욱 아프게만 다가왔다. 술을 마시면서 밤을 지새웠다. 스물일곱 살의 절망이 떠올랐다. 그 절망을 딛고 살아온 나였다. 스물일곱 살 때처럼 속절없이 무릎 꿇고 살아갈 수는 없었다. 절이 싫으면 중이 떠나는 법, 내가 떠날 수밖에 없다는 생각이 들었다. 편견에 부딪혀 또 다시 나락으로 빠져들 수는 없었다.


결국 1996년 5월, 본사로 올라가 사장님과 대면했다. 나의 굳은 의지를 마지막으로 피력해보았으나 사장님은 완곡하지만 분명한 거절의 의미로 “회사를 위해 한 2년 정도만 더 교육에 힘을 쏟아주게”라고 했다.


10여 년의 인연이 종착역에 다다랐음을 느꼈다. 이미 작성해서 품에 넣어온 사직서를 꺼내 꼭 일주일 뒤로 날짜를 적었다. 회사를 나와 택시를 타고 서울역으로 향하는데, ‘J화재’의 간판이 눈에 들어왔다. 순간적으로 저곳에 가보자는 판단을 내렸고 택시에서 내린 나는 근처의 문방구를 찾아가 이력서 한 장을 다급히 써서 챙겼다. 그러고 난 뒤 무턱대고 회장님과의 면담을 요청했고 거절하는 비서를 밀치고 회장실로 들어가 회장님을 보는 순간 이력서를 내밀면서 지점장 자리를 부탁했다.


그렇게 이력서를 내려놓고 돌아왔는데, 이틀 만에 정말 연락이 왔다. J화재 중부권 본부장이라는 사람한테서 회장님 허락이 떨어졌다는 이야기를 들었다. 6월 7일자로 먼저 다니던 회사를 그만두고 6월 8일자로 J화재 익산지점 개설 준비위원장으로 발령을 받았다. 그렇게 길 가다가 눈에 띈 간판을 보고 찾아간 나를 고용해주고, 또 나 하나만을 믿고 20일 만에 10억에 가까운 돈을 투자하는 것을 보고는 정말 가슴이 터질 것만 같았다. 다른 것은 하나도 보지 않고 나의 실력과 능력, 그리고 뚝심만을 보고 세상이 나를 받아준 것이다. 그랬기에 더욱 그 기대를 저버릴 수가 없었다. 나는 보란 듯이 개설 첫 달 전국 38개 지점 중 신규계약 환산실적 2위, 그리고 두 달 만에 전국 1위를 달성했다.


모두 다 놀랄 만한 실적을 보고 회장님이 나를 서울로 불렀다. “다른 사람은 스카우트를 하면 6개월 내지 1년이 돼서야 실적이 나오던데, 자네는 어떻게 이렇게 오자마자 이렇게 난리굿인가?” 웃으면서 묻는 회장님에게 나는 이렇게 대답했다. “회장님, 저는 항상 주인으로 삽니다.”


하루를 살더라도 나의 의지대로, 성취감을 느끼면서 주인으로 살고 싶었다. 그래야 세상 끝에서 다시 돌아와 살아가는 의미를 찾을 수 있다고 생각했다. 나는 관리자가 되면서 10년 이내에 꼭 부장이 돼야겠다는 목표를 세웠다. 남들보다 한참 늦어버린 내 인생에 그런 목표라도 만들어 매진하고 싶었다. 한마디로 잃어버린 시간을 만회하고 싶다는 열정이 그 목표를 설정하게 만든 것이다.


잘 산다는 것은 다른 것이 아니라 뚜렷한 목표를 가지고 자기가 하는 일에서 보람을 찾는 것이라 생각한다. 과녁을 향해 계속해서 시위를 당기다 보면 적중하는 날이 꼭 오고야 만다. 나는 그것을 의심하지 않았다. 과녁을 정확히 보고 지치지 않고 몇 번이라도 활시위를 당긴다면 목표는 반드시 이루어진다.



세상과 나를 바꾸는 작은 힘
즐거움에는 힘이 있다

힘들다고 처져 있으면 아무것도 해결되지 않지만 웃으면서 긍정적으로 생각하면 의외로 수월하게 해결되는 일이 많다. 진심으로 감정을 나누고, 느끼고, 공감하는 것, 이 모든 것이 어려움을 이겨낼 수 있는 힘이 된다.


1998년 9월 1일, 영등포 지점과 부천 지점을 통폐합시켜 강서 지점이 탄생하면서 내가 지점장으로 부임하게 되었다. 별 목적의식도 없이 일요일까지 출근해야 하는 직장문화 속에서 직원들은 점점 지쳐가고 있었다. 한마디로 그 지점의 분위기는 복지부동의 전형이었고, 영업가족 간의 대화는 단절되어 있었다. 영업실적을 올리지 못하는 것은 당연한 것으로 받아들여지는 실정이었다. 신바람이 나야 효율이 오르는데, 이건 완전히 초상집 분위기였다. 전임자들은 이런 분위기를 견디지 못해 6개월을 못 채우고 지점을 떠났다고 한다. 하지만 나는 그렇게 떠날 수 없었다.


그런 상황에서 내가 가장 먼저 한 일은 6시 30분에 출근해서 밤 9시까지 사무실을 지키는 것이었다. 그건 380명이나 되는 영업가족들의 얼굴과 이름, 생년월일, 핸드폰 번호, 영업소 이름까지 외우겠다는 목표를 달성하기 위해서이기도 했지만 또 다른 이유도 있었다. 부전공으로 동양철학을 공부하다 보니, 강서 지점이 들어선 그 자리의 집터가 세다는 것을 직감적으로 느낄 수 있었다. 결국 나쁜 기운과의 싸움이었다.


처음 3개월 동안은 소리 소문 없이 현황을 파악하는 데에 정신을 집중했다. 그리고 느닷없이 눈보라가 몰아치고 비바람이 칠 때면 영업을 잘하는 사람들도 중요하지만 힘들어하는 우리 영업가족들에게 전화를 걸었다. 지점장이 전화를 했으니 행여나 질책하는 소리를 하지나 않을까 싶어 그들은 바짝 긴장했다. 나는 최대한 따듯하게 다가가고 싶었다. “아, 길이 미끄럽습니다. 넘어지면 큰일 납니다. 제가 지금 모시러 갈 테니 거기 계십시오.” 전화를 받은 사람들은 할 말을 잊었고 어떤 분은 흐느끼기도 했다. 그리고 내가 정말 자기들을 데리러 갔을 때 그들의 얼굴에는 기쁨이 넘쳤다. 그렇게 하나하나 사람과 일을 챙겨나갔다.


당시 나에게는 함께 일하는 그 사람들만이 희망이었다. 아니 성공으로 도약할 동반자들이었다. 그렇게 지극정성으로 사람들을 대하자 하나둘 사람들이 내 품안으로 들어오기 시작했다. 3개월이 지나자 영업소 구성원에 대한 파악이 완전히 끝난 것은 물론이고 점포의 문제점들도 어느 정도 정리되었다. 매월 한 번 시행하던 합동조회도 주 1회로 늘려 전체 사원들이 참석하도록 했다. 또한 ‘강서 아카데미’를 창립, 상품교육과 판매기법을 전수하여 사원들이 자신감을 회복할 수 있도록 도왔다. 한편으로는 영업가족의 공동체의식과 봉사정신을 함양하기 위해 매월 1000원씩 납입한 기금으로 불우이웃을 도왔다. 그밖에도 6개월에 한 번씩 나눔의 장터를 열고, 강서 지점 자체의 소식지도 주간으로 발행하였다. 매월 합동 생일파티를 열고, 채용 파일럿 팀을 조성하여 자발적인 증원의 길도 모색해봤고, 6개월에 한 번씩은 야외행사도 가졌다.


이 모든 것이 그동안 고질적인 문제라고 파악했던 것들을 개선하기 위한 것이었다. 모두 하나 되는 즐거움과 기쁨을 나누며 일하기 위한 것이었다. 또한 각자의 목표, 영업소의 목표, 지점의 목표를 달성하기 위한 것이기도 했다.


영업소장이 6개월을 견디지 못하고 떠났던 영업소, 심지어 한 사람이 목숨을 끊게 만든 지점이 멋지게 재탄생한 것이다. 강서 지점은 두고두고 회사 전체의 벤치마킹 대상이 되었다.



모든 사람이 행복한 세상을 꿈꾸며
해피, 해피라이프

조직에서 나와 새로운 일을 시작하기로 해놓고 보니, 회사 이름을 무엇으로 할까 고민이 되었다. 사람들에게 꿈꾸는 것, 사람들에게 희망을 줄 수 있는 것, 회사 이름에 그런 이미지를 담고 싶었다. ‘사람들이 이 세상에서 가장 추구하는 게 무엇일까?“ 곰곰이 생각한 끝에 그건 바로 ’행복‘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새로운 일터는 그래서 ’해피라이프 개발원‘이라는 이름을 붙이게 되었다.


교육 컨설팅을 주로 하는 해피라이트 개발원을 시작한 후, 나는 매일 두세 건의 강의를 하고 있다. 강의 요청이 그야말로 끊이지 않고 들어와서 쉴 틈이 없을 정도다. 매일매일 강의를 통해 새로운 사람을 만나고 이야기를 나누는 것은 나에게 새로운 활력을 불어 넣어주었다. 신입사원들의 초롱초롱한 눈망울부터 CEO에 이르기까지, 많은 사람들에게 무언가를 줄 수 있다는 생각에, 바쁘지만 뿌듯한 일과를 보내고 있다.


새로운 내일은 없을 거라고, 자기 인생은 끝났다고 자포자기하는 사람들이 많다. 누구나 세상 사는 일이 호락호락하지 않다고 말한다. 하지만 오늘 초라하다고 미래에도 그럴 거라고 생각할 이유는 없다. 사람의 얼굴은 4년을 주기로 한 번씩 바뀐다고 한다. 인생의 황혼에 어떤 얼굴을 가지고 세상을 살다 갈 것인가 하는 것은 순전히 자기 자신의 선택에 달렸다. 내일을 만드는 것은 자신의 열정과 도전이다. 그리고 ‘된다’는 확신이다.

?

절망의 끝에서 죽음만 생각하며 살았던 내가 이제는 절망에 빠진 다른 사람들에게 희망과 용기를 북돋아주는 역할을 하고 있는 것이다. 돌이켜보면 정말 대단한 변신이 아닐 수 없다. 사람의 운명은 한 번에 정해지는 것이 아니다. 얼마든지 새로운 사람으로 변신할 수 있다. 몇 번이고 다시 태어날 수 있다. 운명은 타고나는 것이 아니라 스스로 개척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본 정보는 도서의 일부 내용으로만 구성되어 있으며, 보다 많은 정보와 지식은 반드시 책을 참조하셔야 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