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영의 모험

   
존 브룩스(역: 이충호)
ǻ
쌤앤파커스
   
16000
2015�� 03��



■ 책 소개


비즈니스, 영광과 고난의 역사
오늘날의 빌 게이츠와 워렌 버핏을 만든 억만장자의 바이블!


마이크로소프트의 빌 게이츠가 자신의 홈페이지와 『월스트리트저널』을 통해 추천하면서 43년 만에 다시 출간된 책이다. 1969년 출간 당시 압도적으로 뛰어나다라는 평가를 받으며 『뉴요커』 금융 부문 저널리스트였던 저자에게 제럴드 롭 상(비즈니스, 금융 부문에서 뛰어난 기자에게 수여하는 상)을 안기기도 했다. 그리고 시간이 흘러 1991년. 워렌 버핏을 알게 된 지 얼마 되지 않았던 빌 게이츠는 투자의 귀재로 불리는 그에게 제일 좋아하는 경영서를 물었다. 그리고 조금의 주저 없이 돌아온 답은, 예상과 같다. 워렌 버핏에게서 책을 받은 이후로만 20년, 초판 출간 이후로 헤아리자면 40년도 더 지난 지금까지도 그는 이 책이 여전히 유효하다고 단언하며 내가 읽은 최고의 경영서라는 아낌없는 찬사를 보냈다.


이 책은 주식 시장, 세금, 신제품 개발, 기업 협력과 같은 경영의 역사에 각인된 흥미진진한 이야기뿐만 아니라 기업가 본연의 정신, 기업의 내부 소통 문제처럼 시간이 흘러도 풀리지 않는 숙제들에 얽힌 상징적인 사건들을 깊이 파고든다. 오랜 취재와 연구를 바탕으로 문학과 예술, 역사와 사회로까지 뻗어나가 이야기를 엮어내는 저자의 솜씨가 대단하다.
 
■ 저자 존 브룩스
1920년 뉴욕에서 태어나 뉴저지에서 자랐다. 1942년에 프린스턴 대학교를 졸업한 뒤 제2차 세계대전에 참전했다가 돌아와 작가가 되겠다는 꿈을 안고 『타임』에서 객원 편집자로 일을 시작했다. 정형화된 형식에 구애받지 않는 글을 쓰고 싶다는 생각에 2년 만에 『뉴요커』로 자리를 옮겨 전속 작가가 되었고 『하퍼스 매거진』『뉴욕타임스 북리뷰』에 서평도 썼다. 그는 금융 부문 저널리스트로서 “압도적으로 뛰어나다”라는 평가를 받은 글을 『뉴요커』에 여러 편 썼고, 비즈니스와 금융에 관한 10권의 논픽션을 썼다. 그중 상당수는 월스트리트와 기업 세계를 상세하게 파헤친 작품으로, 비평가들의 극찬을 받았다. 『경영의 모험』뿐만 아니라 『언젠가 골콘다에서는(Once in Golconda)』『호시절(The Go-Go Years)』 등은 이 분야의 고전으로 오랫동안 자리를 지켰다. 『뉴욕타임스』는 “그는 놀라운 작가였다. 그는 단순명쾌한 이야기나 문장으로 인물을 압축해서 설명하는 특별한 재능을 지닌 천부적인 이야기꾼이자 매우 비상한 사람이었다”라고 말했다.


그는 『경영의 모험』에도 포함된 ‘주식 시장을 움직이는 손’(1964), ‘파운드화 구출 작전’(1969), 그리고 1960년대 월스트리트의 투기 거품을 다룬 『호시절』(1974)로 비즈니스와 금융 부문에서 가장 뛰어난 기자에게 수여하는 제럴드 롭 상(Gerald Loeb Award)을 3회 수상했다. 『뉴욕타임스』『인디펜던트』 등 주요 언론은 그를 2000년대 최고의 논픽션 작가이자 금융 저널리스트인 마이클 루이스(Michael Lewis)의 직계조상이라고 평가한다. 3권의 소설을 쓴 소설가로서 작가들의 권익에도 관심이 많았던 그는 1970년대 중반부터 미국 작가조합 회장, 국제 펜클럽 부회장으로 왕성하게 활동했으며, 말년에는 미국역사가협회 부회장, 뉴욕 공공도서관 이사를 지냈다. 1993년 뉴욕 주의 이스트햄튼에서 사망했다.
 
■ 역자 이충호
서울대학교 사범대학 화학과를 졸업하고, 교양 과학과 인문학 분야의 번역가로 활동하고 있다. 2001년 『신은 왜 우리 곁을 떠나지 않았는가』로 제20회 한국과학기술도서 번역상을 수상했다. 옮긴 책으로는『진화심리학』『루시퍼 이펙트』『59초』『세계의 모든 신화』『사라진 스푼』『도도의 노래』『건축을 위한 철학』『잠의 사생활』『돈의 물리학』 등이 있다.


■ 차례
감수의 글 – 시대가 바뀌어도 반드시 읽어야 할 경영의 고전


1. 에드셀의 운명 - 완벽한 시스템, 준비된 실패
2. 누구를 위한 세금인가? - 편법과 위선이 판치는 세금의 모험
3. 비공개 정보가 돈으로 바뀌는 순간 - 부에 관한 인간의 본성
4. 주식 시장을 움직이는 손 - 언제 누구에게 닥칠지 모르는 위험
5. 제록스 제록스 제록스 제록스 - 기업의 책임은 어디까지인가?
6. 선량한 고객 구하기 - 이익이 먼저인가? 고객이 먼저인가?
7. 같은 말을 다르게 해석하는 회사 - 담합, 거짓말, 그리고 커뮤니케이션의 뻔한 오류들
8. 마지막 코너 - 월스트리트를 위협한 어느 촌뜨기의 도전
9. 기업가의 본질은 무엇인가? - 본질을 꿰는 자에게 성공은 덤이다
10. 주주들의 계절 - 주주와 회사는 어떻게 공생하나?
11. 개는 물기 전에는 모른다 - 기밀과 정보는 어디로든 흘러나간다
12. 파운드화 구출 작전 - 세계는 왜 파운드화를 구하기 위해 협력했나?


찾아보기


 




경영의 모험


비공개 정보가 돈으로 바뀌는 순간 - 부에 관한 인간의 본성

정보에 매겨지는 금전적 가치

먼 곳에서 일어난 공적 사건이건 임박한 사업 소식이건 심지어 정치적 인물의 건강 소식이건 간에 비공개 정보는 항상 증권 트레이더들에게 소중한 상품이었다. 그 가치가 얼마나 소중한 상품이었던지 일부 해설자는 증권거래소를 그러한 정보가 주식만큼이나 많이 거래되는 시장이라고 주장하기까지 했다. 시장이 정보에 매기는 금전적 가치는 종종 그 정보가 초래하는 주가 변화로 정확하게 측정할 수 있으며, 정보는 다른 상품과 마찬가지로 쉽게 돈으로 전환할 수 있다. 사실, 정보는 트레이더들 사이에 물물교환된다는 점에서 일종의 화폐라고 할 수 있다. 게다가 얼마 전까지만 해도 운 좋게 내부 정보에 접근한 사람이 그 정보를 이용해 재산을 불리는 행위가 과연 적절한지는 대체로 문제가 되지 않았다.


영국에서 로스차일드 가문이 부를 쌓게 된 주 요인은 네이선 로스차일드가 워털루에서 웰링턴 장군이 승리를 거두었다는 소식을 미리 알고서 그것을 분별 있게 활용한 데 있었는데, 이에 대해 왕실 위원회나 분노한 대중이 이의를 제기하는 일은 없었다. 거의 같은 무렵에 대서양 반대편에서는 이와 비슷하게 존 제이컵 에스터가 1812년 전쟁(미영 전쟁)을 종식시키는 겐트 조약 체결 소식을 미리 알고 이를 이용해 큰돈을 벌었다.


남북 전쟁 이후 미국의 일반 투자자들은 여전히 내부자가 자신의 특권적 정보를 이용해 거래를 하는 것을 그 사람의 권리로 인정했고, 그들이 지나가면서 흘리는 부스러기를 주워 먹는 것에 만족했다. (그러한 내부자 거래로 유명한 대니얼 드루는 심지어 독이 묻은 부스러기를 떨어뜨림으로써―그는 교활하게도 자신의 투자 계획 메모를 거짓으로 작성해 공개된 장소에 뿌렸다.―작은 은총마저 베풀길 거부했다)


19세기에 많은 미국인의 부는 실제로 내부자 거래를 기반으로 한 것은 아니라 하더라도, 그 관행을 통해 크게 불어났다. 만약 그 시대에 그러한 거래를 사실상 금지했더라면 현재의 사회적, 경제적 질서가 어떻게 변했을까 하는 질문은 쓸데없지만 흥미로운 추측을 부추긴다. 1910년까지는 자사 주식을 거래하는 기업 임원이나 이사, 직원의 도덕성에 공개적으로 의문을 제기한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1920년대까지는 그런 사람들에게 주식 시장에서 농간을 부리는 게임을 허용하는 것은 말도 안 되는 일이라는 생각이 널리 확산되지 않았고, 1934년이 되어서야 의회에서 공정성을 회복하기 위한 법안이 통과되었다. 증권거래법이라는 이 법안은 기업 내부자가 자사 주식의 단기 거래에서 실현한 수익은 모두 회사에 몰수된다고 규정하고 있으며, 게다가 1942년에 시행된 시행규칙 10B-5에 따라 어떤 주식 거래자도 사기를 치기 위해 어떤 계획을 사용하거나 "중요한 사실에 관하여 허위 진술을 하거나…중요한 사실의 진술을 누락해서는" 안 된다고 규정했다. 


중요한 사실의 진술을 누락하는 것은 내부 정보 이용 방법의 핵심이기 때문에, 법은(내부자의 자사 주식 취득을 금지하지도 않고, 해당 주식을 6개월 이상 보유한다면 그 수익을 몰수하지도 않는 반면) 내부 정보를 이용해 농간을 부리는 행위를 불법으로 간주하는 것으로 보인다. 하지만 실제로는 얼마 전까지만 해도 1942년 법은 사실상 존재하지 않는 듯한 취급을 받았다. 증권거래법에 따라 설립된 연방 집행 기관인 증권거래위원회는 아주 드물게, 그리고 그 행위가 너무 노골적이어서 반드시 이 법이 아니더라도 관습법으로 충분히 기소할 수 있는 사안에 대해서만 이 법을 적용했다.


이 법을 이렇게 느슨하게 적용한 데는 그럴 만한 이유가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무엇보다도, 자사의 기업 비밀을 이용하는 특권은 경영진에게 최선의 노력을 기울이도록 자극하는 인센티브로 널리 간주되었으며, 일부 당국자는 아무리 공정한 게임의 정신에 어긋난다 하더라도 주식 시장에 내부자들이 아무 제약 없이 존재하는 것이 부드럽고 질서 있는 거래의 흐름에 꼭 필요하다고 주장했다. 게다가 엄밀히 따지면 내부자이건 아니건 대다수 주식 트레이더는 어떤 종류의 내부 정보를 갖고 있거나 숨기고 있으며, 아니면 적어도 그렇다고 바라거나 믿으며, 따라서 시행 규칙 10B-5를 공정하게 적용한다면 월스트리트에 대혼란이 일어날 것이라는 주장도 있었다.


따라서 증권거래위원회는 이 규칙을 20년 동안 대체로 규정집 안에 넣어둔 채 꺼내서 휘두르지 않음으로써 월스트리트의 큰 취약점 중 하나를 건드리는 행동을 의식적으로 삼간 것처럼 보였다. 그런데 증권거래위원회는 준비 동작처럼 가볍게 잽을 두어 번 던진 뒤에 갑자기 맹렬하게 그 취약점을 공격했다. 증권거래위원회는 텍사스걸프설퍼컴퍼니와 그 회사 이사와 직원 13명을 상대로 민사 소송을 제기했다. 이 재판은 1966년 5월 9일부터 7월 21일까지 폴리스퀘어 미국연방 지방법원에서 배심원단 없이 진행되었다. 재판장인 더들리 본설은 재판 도중에 "우리가 여기서 새 땅을 일구고 있다는 사실에 모두가 동의하리라고 봅니다"라고 가볍게 언급했다. 그들은 거기서 단지 땅을 일구는 데 그치지 않고, 어쩌면 씨도 뿌린 것으로 보인다. 헨리 만은 『내부자 거래와 주식 시장』이란 책에서 이 재판은 내부자 거래의 모든 문제를 거의 고전적이라고 할 만큼 훌륭한 용어로 제시했다고 말하고, 그 판결은 "앞으로 오랫동안 이 분야의 법을 결정할지 모른다"라는 의견을 내놓았다. 


키드-55에서 터진 광맥

증권거래위원회를 행동에 나서게 만든 사건은 1959년 4월에 뉴욕 시에 본사를 둔 세계적인 황 생산업체 텍사스 걸프가 캐나다 순상지(캐나다 북부 및 중부 지역에 광범위하게 뻗어 있는 선캄브리아대의 탁상지)를 항공기로 지질 탐사하면서 시작되었다. 텍사스걸프는 채굴 가능한 광맥을 발견함으로써 사업 영역을 확대해 시장에서 가격이 떨어지고 있던 황에 대한 의존도를 줄이려고 했다.


그중에서도 가장 유망한 곳은 그들의 지도에 키드-55 구역으로 표시된 곳이었다. 그곳은 온타리오 주 티민스에서 북쪽으로 24km쯤 떨어진 곳에 위치한 면적 1평방마일의 저습지로, 나무가 조금 있고 지면에 노출된 암석은 거의 없었다. 텍사스걸프 같은 큰 회사가 광물 채굴 탐사를 한다고 알려진 지역에서 땅을 취득하려면 복잡한 문제가 많았기 때문에, 1963년 6월에 가서야 키드-55 중 4분의 1에 해당하는 북동쪽 구역에서 시추를 할 수 있는 허가를 얻었다. 11월 8일에 첫 번째 시추공을 뚫기 시작했다. 그러고 나서 키드-55에서는 흥분의 날들이 이어졌다.


그[MIT에서 지질학 박사를 받은 40대의 캐나다인인 홀릭]는 최종 길이가 약 180m인 코어에서 구리의 평균 함량은 1.15%, 아연의 평균 함량은 8.64%로 보인다고 추정했다. 광업에 특별한 지식을 가진 캐나다의 한 증권 중개인은 나중에 그만한 길이와 그 정도 광물 함량을 가진 코어는 "그 누구의 상상도 넘어서는 것"이라고 말했다.


비밀리에 시작된 주식 매수

광산의 형태와 경계를 제대로 파악하려면, 지표면의 여러 장소에서 다양한 각도로 땅속으로 파고들어가 조사한 여러 시추 구멍들의 패턴을 얻는 게 필요했다. 하지만 텍사스걸프가 키드-55의 나머지 4분의 3 지역까지 개발권을 얻기 전에는 그런 패턴을 얻기가 불가능했다. 텍사스걸프 사장인 클로드 스티븐스는 탐사에서 발견한 사실이 실제 탐사 활동에 관여한 사람들 밖으로, 심지어 회사 내에서도, 절대로 새어나가서는 안 된다고 지시했다. 11월 하순에 내용물의 성분과 함량을 과학적으로 분석하기 위해 시추한 코어를 여러 부분으로 나누어 솔트레이크시티에 있는 유니언성분분석소로 보냈다. 그러고 나서 텍사스걸프는 키드-55의 나머지 땅을 매입하기 위해 은밀히 손을 쓰기 시작했다.


11월 12일에 포가티[찰스 포카티 전무이사]는 텍사스걸프 주식 300주를 매수했고, 15일에는 700주를, 19일에는 500주를, 26일에는 200주를 추가 매수했다. 클레이턴[리처드 클레이턴 엔지니어]은 11월 15일에 200주를 매수했고, 몰리슨[리처드 몰리슨 부사장]은 같은 날에 100주를 매수했다. 그리고 홀릭[월터 홀릭 수석 지질학자]의 부인은 29일에 50주를 매수하고, 12월 10일에 추가로 100주를 더 매수했다. 하지만 이러한 주식 매입은 특정 임원들과 직원들 그리고 심지어 그 친구들 사이에서 곧 몰아닥칠 텍사스걸프 주식 매수 열풍을 암시하는 조짐에 불과했다.


12월 하순에 다크[케네스 다크 지질학자]는 워싱턴 D.C.와 그 인근으로 여행을 떠나 자신이 아는 여자와 그녀의 어머니에게 텍사스걸프 주식을 사라고 권했다. 재판에서 "티피"라고 지칭된 이 두 사람은 그 정보를 다른 두 사람에게 전달했고, 논리적으로 당연히 이들은 "서브티피(sub-tippee)"로 지칭되었다. 12월 30일부터 다음해 2월 17일 사이에 다크의 티피와 서브티피는 텍사스걸프 주식을 2100주 매수했고, 추가로 콜 옵션을 1500주 더 샀다. 콜 옵션은 특정 주식을 명기된 기간의 어느 시기에 미리 정한 가격(일반적으로는 현재 시장 가격과 비슷하게 정하는 게 보통이다)에 합의한 양만큼 살 수 있는 권리를 말한다. 대부분의 상장 주식에 대한 콜 옵션은 그것을 전문으로 취급하는 딜러들에게서 항상 살 수 있다. 매수자는 일반적으로 실제 주가보다 훨씬 낮은 가격에 옵션을 살 수 있다(옵션은 주식 자체를 사는 게 아니라, 주식을 살 수 있는 권리를 사는 것이므로). 콜 옵션은 주식 시장에서 가장 적은 돈을 투자해 도박을 할 수 있는 방법을 제공한다. 그와 동시에 내부 정보를 현금으로 바꾸기에 가장 편리한 방법이기도 하다.


1964년의 처음 석 달 동안 다크는 텍사스걸프 주식 300주를 노골적으로 매수하고, 콜 옵션으로 3000주를 더 샀으며, 점점 불어나는 자신의 티피 명단에 형제를 포함해 여러 사람을 더 집어넣었다. 마침내 봄이 다가올 조짐이 보이자, 텍사스걸프의 토지 구입 계획도 아주 잘 마무리되었다. 3월 27일 무렵에 텍사스걸프는 필요한 땅을 대부분 손에 넣었다. 


재판

증권거래위원회는 소송 대리인인 프랭크 테너머 주니어가 자신의 의도가 "피고들의 불법 행위를 만천하에 드러내 강력히 비난하기 위한 것"이라 밝힌 뒤, 포카티, 몰리슨, 클레이턴, 홀릭, 다크, 크로퍼드와 1963년 11월 8일부터 1964년 4월 15일 사이에 주식이나 콜 옵션을 산 그 밖의 여러 회사 내부자[이때 30달러 선이던 주가는 1966년 말에는 100달러가 넘었다]가 다시는 "증권 매수나 매도와 관련해 다른 사람에게 사기나 기망으로 작용하거나 작용할 수 있는…어떤 행위에도 관여하지" 못하도록 영구적인 금지 명령을 내려달라고 법정에 요구했다. 이에 더해 피고들에게 내부 정보를 바탕으로 주식이나 콜 옵션을 매수함으로써 사취를 한 당사자들에게 배상을 하라는 명령을 내려달라고 요청했는데, 이것은 그야말로 이 분야에서 신천지를 개척하는 영역으로 한 발을 내디딘 것이라 할 만했다.


상식적으로 납득할 수 있는 시간

1968년 2월, 제2지구 항소법원은 클레이턴과 크로퍼드에 대한 판결을 확정한 것을 제외하고는 거의 모든 점에서 본설 판사의 판결을 단호하게 뒤집는 판결을 내렸다. 항소법원은 11월의 시추공은 가치 있는 광석 매장에 관해 중요한 증거를 제공했으며, 따라서 포가티와 몰리슨, 다크, 홀릭을 비롯해 겨울 동안에 텍사스걸프 주식이나 콜 옵션을 산 내부자는 모두 증권거래법을 위반했다고 판결했다.


이 판결은 증권거래위원회에 유명한 승리를 가져다주었는데, 월스트리트의 첫 반응은 큰 혼란을 낳을 것이라는 비명이었다. 대법원에서 상고심이 나오기 전까지 이 판결은 적어도 흥미로운 실험을 낳을 것이다. 세계 역사상 처음으로 월스트리트의 주식 시장에서 농간을 부리지 않고 거래를 하려는 노력이 일어날 테니까. 



제록스 제록스 제록스 제록스 - 기업의 책임은 어디까지인가?

제록스의 폭발적 성공

1887년에 시카고의 A. B. 딕 컴퍼니가 등사기(사무실에서 실용적으로 사용할 수 있는 최초의 기계식 복사기)를 시장에 내놓았을 때, 그것은 즉각 온 나라를 휩쓸진 않았다. 오히려 창립자인 딕은 힘겨운 마케팅 문제에 맞닥뜨렸다. 딕은 제재업 일을 할 때 가격표를 일일이 손으로 베껴 적는 게 지겨워 직접 복사기를 만들려고 애쓰다가 결국 등사기를 발명한 토머스 에디슨에게서 등사기를 생산하는 권리를 얻었다. "사람들은 문서를 많이 만들길 원치 않았어요." 그의 손자이자 A. B. 딕 컴퍼니의 부사장인 매튜스 딕 주니어는 이렇게 말했다. 현재 A. B. 딕 컴퍼니는 등사기를 포함해 온갖 종류의 복사기를 생산하고 있다.


"등사기를 처음 사용한 사람들은 대체로 교회나 학교, 보이스카우트 같은 비영리 단체였어요. 회사와 전문직 종사자의 관심을 끌기 위해 할아버지와 동료들은 선교에 가까울 정도로 엄청난 노력을 기울였습니다. 기계로 복사를 하는 사무실은 오랫동안 확립돼온 사무실 패턴을 뒤집어엎는 새롭고 불안한 개념이었지요. 어쨌든 1887년에는 타자기도 시장에 나온 지 10년이 좀 넘었지만 여전히 널리 쓰이지 않았고, 카본지 역시 마찬가지였습니다. 만약 사업가나 변호사가 어떤 문서 5장이 필요하다면, 직원에게 시켜 5장을 만들게 했습니다. 일일이 손으로 써서 말입니다 사람들은 할아버지에게 이렇게 말하곤 했죠. "이런저런 문서가 많이 복사되어 사방에 널리는 걸 누가 좋아하겠습니까? 사무실에는 잡동사니만 너저분하게 널리고, 그것을 훔쳐보려는 사람을 유혹할 뿐만 아니라, 아까운 종이 낭비 아닙니까?"


1950년 이전에는 상용 서신이나 타자한 문서를 한 장 복사하는 데 실용적인 기계는 카본지를 끼운 타자기가 유일했다. 1950년대에는 사무용 복사 기계화에 선구적인 혁신이 일어났다. 원판을 사용하지 않고 장당 몇 센트의 비용으로 그리고 장당 1분 이내의 시간에 대부분의 사무 문서를 복사할 수 있는 온갖 종류의 장비가 갑자기 시장에 쏟아지기 시작했다.


1950년에 출시된 미네소타 마이닝 앤드 매뉴팩처링의 서모팩스는 열에 민감한 복사지를 사용했고, 아메리칸 포토카피의 다이얼-A-매틱 오토스탯(1952년)은 보통의 사진술을 개량한 기술을 사용했으며, 이스트먼 코닥의 베리팩스(1953년)는 염료 전사법이라는 방법을 사용했다. 하지만 이 혁신적인 복사기들은 모두 근본적으로 심각하고 불만스러운 결함이 있었다. 예를 들면, 오토스탯과 베리팩스는 조작하기가 어려웠고, 복사된 종이가 축축해져 말려 사용해야 했으며, 서모팩스로 복사한 문서는 열에 지나치게 노출되면 검게 변하는 경향이 있었고, 셋 다 제지업체가 공급하는 특수 처리 용지를 사용해야 했다.


강박 행동을 열풍으로 발전시키려면 기술적 돌파구가 필요했는데, 1950년대가 끝나고 1960년대가 시작될 무렵에 제로그래피(xerograghy)라는 새로운 원리를 바탕으로 하고, 보통 종이에 건조하고 영구적이며 양호한 품질로 복사할 수 있는 기계가 발명되면서 그 돌파구가 열렸다. 그 효과는 즉각적이었다. 미국에서 1년 동안 복사되는 양은 1950년대 중엽에 약 2000만 장이던 것이 1964년에는 95억 장으로 껑충 뛰었고, 1966년에는 140억 장으로 늘어났는데(유럽과 아시아, 라틴아메리카에서 복사된 수십억 장은 말할 것도 없고), 제로그래피의 등장이 주요 원인이었음은 말할 필요도 없다.


그뿐만이 아니었다. 인쇄된 교과서에 대한 교육자들의 태도와 문서를 통한 커뮤니케이션에 대한 기업인들의 태도에도 눈에 띄는 변화가 나타났으며, 전위적인 철학자들은 제로그래피를 바퀴의 발명과 비교할 만큼 중요한 혁명이라며 환영했고, 동전으로 작동하는 복사기가 과자점과 미용실에 등장하기 시작했다. 복사 열풍이 모든 곳을 휩쓸었다. 이 열풍은 비록 17세기에 네덜란드에서 일어났던 튤립 열풍만큼 즉각적으로 전국을 휩쓸진 않았지만, 결국에는 그보다 훨씬 더 광범위한 영향을 미쳤다.


이 거대한 돌파구를 열고, 수십억 장의 복사 중 대부분을 복사한 기계를 만든 회사는 바로 뉴욕 주 로체스터에 기반을 둔 제록스 코퍼레이션이었다. 그 결과 제록스는 1960년대의 가장 괄목할 만한 기업 성공 사례가 되었다. 제로그래피 방식의 사무용 자동 복사기를 처음 내놓은 1959년의 회사(그때 회사 이름은 핼로이드 제록스였다) 매출액은 3300만 달러였다. 1961년에는 그것이 6600만 달러로 늘어났고, 1963년에는 1억 7600만 달러, 1966년에는 5억 달러 이상으로 증가했다.


제록스는 1961년만 해도 『포춘』이 선정하는 미국 500대 기업에 들어가지 못했지만, 1964년에는 227위를 차지했고, 1967년에는 126위로 순위가 올라갔다. 『포춘』이 매기는 순위는 연매출을 기준으로 하는데, 다른 기준을 따르면 제록스의 순위는 171위보다 더 높다. 예를 들면, 1966년 초에 제록스는 순이익을 기준으로 할 때 미국에서 63위를 기록했고, 매출액 순이익률로 따지면 대략 9위, 주식 시가 총액으로는 대략 15위를 차지했다. 특히 마지막 항목에서는 이 신흥 기업이 오랜 전통을 자랑하는 거대 기업인 US스틸이나 크라이슬러, 프록터 앤 갬블, RCA를 추월했다.


실제로 제록스에 대한 일반 투자자의 열광이 얼마나 대단했던지 그 주식은 1960년대 주식 시장의 골콘다(Golconda, 다이아몬드 가공으로 큰 부를 쌓은 인도 남부의 고대 도시. 여기서 유래해 "무진장의 부"라는 뜻으로도 쓰인다)가 되었다. 1959년 말에 그 주식을 사서 1967년 초까지 보유한 사람이라면 누구나 약 66배의 수익을 올렸을 테고, 정말로 훌륭한 선견지명이 있어 1955년에 핼로이드 주식을 샀던 사람이라면 그 투자 금액이 약 180배로 불어났을 것이다. 따라서 "제록스 백만장자" 무리가 생겨난 것은 전혀 놀라운 일이 아니다. 그들은 모두 수백 명이나 되었는데, 대부분 로체스터 지역에 사는 사람이거나 그곳 출신이었다.


이상주의의 이례적인 성공

조잡한 실험실에서 외로이 연구한 발명가, 가족 중심의 작은 회사, 초기의 거듭된 좌절, 특허 제도 의존, 고대 그리스어를 바탕으로 한 상표명, 마침내 자유 기업 제도의 우수성을 입증하는 영광스러운 승리 등, 거두절미하고 요약한 제록스의 이야기는 고리타분한 이야기처럼, 심지어 19세기의 낡은 이야기처럼 들린다. 하지만 제록스에는 다른 차원의 이야기가 있다. 단지 주주와 직원과 고객뿐만 아니라 전체 사회에 대한 책임감을 발휘한 측면에서 제록스는 대부분의 19세기 기업과 정반대의 행동을 보여주었다. 이 점에서 제록스는 20세기 기업의 전위나 다름없었다.


윌슨[창업자의 손자인 조지프 윌슨]은 "목표를 높이 잡고, 거의 이루기 힘든 포부를 품고, 사람들에게 그것들을 이룰 수 있다는 믿음을 심어주는 것. 이것은 대차대조표만큼, 아니 어쩌면 더 중요하다"라고 말한 적이 있고, 제록스의 다른 중역들도 "제록스 정신"은 목적을 이루기 위한 수간이 아니라 "인간의 가치" 자체를 강조하는 문제라고 자주 강조했다.


1965년에 제록스는 교육 및 자선 단체에 163만 2548달러를 기부했고, 1966년에는 224만 6000달러를 기부했다. 두 해의 가장 큰 수혜자는 로체스터 대학교와 로체스터 공동모금회였고, 각각 그 액수는 세전 순이익의 약 1.5%에 해당했다. 이것은 대부분의 큰 회사들이 자선을 위해 따로 떼어놓는 비율보다 훨씬 높았다.


제록스는 다른 문제들에서도 이익과 아무 상관이 없는 이유로 위험을 감수하는 행동을 보였다. 윌슨은 1964년에 한 연설에서 "기업은 중요한 공공 문제에 대해 분명한 입장 표명을 거부해서는 안 됩니다"라고 말했다. 이것은 기업계에서는 이단이나 다름없는 태도인데, 기업이 공공 문제에 대해 어떤 입장을 밝히는 것은 반대 입장에 있는 고객과 잠재적 고객을 밀어내는 것이나 마찬가지이기 때문이다.


제록스가 분명하게 밝힌 한 가지 중요한 공식 입장은 국제연합을 지지하는 것이었다. 자연히 이것은 국제연합을 비방하는 사람들에게 반대한다는 의사를 밝힌 것이기도 했다. 1964년 초에 제록스는 1년 광고 예산에 해당하는 400만 달러를 들여 국제연합을 다루는 일련의 전국 방송 텔레비전 프로그램의 비용을 대기로 했다. 그리고 방송이 시작될 때와 끝날 때 제록스가 그 제작비를 지원했다는 언급 마로는 그 프로그램을 방송하는 내내 상업 광고나 제록스를 알리는 어떤 내용도 일절 내보내지 않기로 했다.


그 결정이 발표되고 나서 석 달쯤 지난 그해 7월과 8월에 갑자기 제록스에 그 계획을 철회하라는 내용의 편지가 빗발치듯 쏟아지기 시작했다. 약 1만 5천 통에 이르는 그 편지들은 부드럽게 합리적으로 쓴 것에서부터 공격적이고 감정적인 비난을 퍼붓는 것에 이르기까지 다양했다. 일부 편지는 회사 사장들이 보낸 것이었는데, 직설적으로 만약 그 계획을 철회하지 않는다면 자기 사무실에서 제록스 기계를 빼겠다고 위협했다. 제록스는 그러한 항의나 위협에 물러서거나 겁먹지 않았다. 국제연합 시리즈는 1965년에 ABC 방송을 통해 방송되었고, 거의 모든 사람들로부터 호평을 받았다.


훗날 윌슨은 그 시리즈(그리고 항의를 무시하기로 한 결정)는 제록스에 적보다 친구를 더 많이 만들었다고 주장했다. 그 문제와 관련된 모든 공식 발언에서, 윌슨은 많은 전문가들이 사업적 이상주의가 극히 드물게 성공을 거둔 사례로 간주한 그 일을 그저 건전한 사업적 판단이었을 뿐이었다고 줄곧 강조했다.



기업가의 본질은 무엇인가? - 본질을 꿰는 자에게 성공은 덤이다

전후 워싱턴에서 가장 논란이 많았던 사람

월스트리트와 워싱턴의 사이가 견원지간에 가까웠던 프랭클린 루스벨트 대통령 재임 기간에 월스트리트 사람들이 보기에 대통령을 제외하고 뉴딜 정책을 대변하는 대표적인 인물은 데이비드 엘리 릴리엔설이었다. 맨해튼 남부 지역에서 릴리엔설이 이런 평가를 받은 이유는 그가 특별히 월스트리트에 적대적인 행동을 했기 때문이 아니라(사실, 웬델 윌키를 포함해 그를 개인적으로 만나본 일부 금융업자들은 일반적으로 그를 합리적인 사람으로 평가했다), 테네시강유역개발공사(Tennessee Valley Authority, 이하 TVA)에서 일하면서 얻게 된 상징적 명성 때문이다.


TVA는 미국 내 어떤 민간 전력 회사보다 훨씬 큰 정부 소유의 발전 회사로, 월스트리트의 눈에는 질주하는 사회주의라는 개념을 상징하는 존재로 보였다. 릴리엔설은 1933년부터 1941년까지 TVA의 3인 이사회에서 눈에 띄게 활동적으로 일했고 1941년부터 1946년까지는 3인 이사회 의장으로 일했기 때문에, 그 기간에 경제계에서는 그를 자신의 표현에 따르면 "뿔 달린" 사람으로 여겼다. 1946년에 릴리엔설은 미국원자력위원회 초대 위원장이 되었는데, 1950년 2월에 50세의 나이로 그 자리에서 물러날 때, 『뉴욕타임스』는 그에 대해 "아마도 전후 워싱턴에서 가장 논란이 많았던 인물"일 것이라고 썼다.


릴리엔설은 정부를 떠난 뒤에 무슨 일을 했을까? 공식 기록을 보면 많은 일을 한 것으로 나오는데, 놀랍게도 모두 월스트리트나 민간기업 혹은 양쪽 모두에 관련된 일이었다. 한 예를 든다면, 릴리엔설은 많은 비즈니스 개요서에 디벨롭먼트 앤드 리소시스 코퍼레이션(Development and Resourse Corporation, 이하 D&R)의 공동 창립자이자 이사회 의장으로 소개돼 있다.


몇 년 전에 나는 뉴욕 시 브로드웨이 50번지에 있는 D&R 사무실로 전화를 걸어 이 회사가 해외 천연자원 개발에 필요한 관리, 기술, 사업, 계획 서비스를 제공하는 민간 회사라는 사실을 확인했다. 다시 말해서, D&R는 외국 정부들을 도와 TVA와 비슷한 계획을 세우고 추진하는 사업을 하고 있었는데, 마침 D&R의 또 다른 공동 창립자는 릴리엔설의 뒤를 이어 TVA 의장을 맡았던 고든 클랩이었다.


D&R은 1955년에 설립된 이후 많지는 않아도 만족할 만한 수준의 수익을 올렸는데, 황량하고 가난하지만 원유가 많이 매장된 이란 서부 지역인 후지스탄 개발을 위해 거대한 계획을 세우고 추진했으며, 이탈리아 정부에는 낙후된 남부 지역을 개발하는 일에 대해 조언을 했으며, 콜롬비아 정부에는 비옥하지만 홍수 피해가 자주 발생하는 카우카 강 유역 개발을 위해 TVA와 비슷한 공사를 세우는 일에 도움을 주었고, 가나 정부에는 물 공급에 대한 조언을, 코트디부아르 정부에는 광물 개발에 대한 조언을, 푸에르토리코 정부에는 전력과 원자력에 관한 조언을 해주었다.


한편, 릴리엔설은 기업 중역과 사업가로서 상당히 많은 돈을 벌었다. 1960년 6월 24일자 미네럴스 앤드 케미컬스 코퍼레이션 오브 아메리카의 위임장 권유 신고서에서 나는 릴리엔설이 이 회사 이사로 등록돼 있고, 보통주는 4만 1366주 보유했다는 사실을 확인했다. 내가 조사할 당시 이 주식은 뉴욕증권거래소에서 주당 25달러 이상에 거래되고 있었으므로, 단순한 곱셈만으로도 그 가치는 개인 재산 없이 정부에서 받는 봉급만으로 평생을 보낸 사람을 포함해 대다수 사람들의 기준으로는 엄청난 액수에 이른다는 사실을 알 수 있다.


이뿐만이 아니다. 1953년에 하퍼 앤드 브러더스 출판사는 릴리엔설의 세 번째 책인 『대기업 : 새로운 시대』를 출판했다. 이 책에서 릴리엔설은 미국의 생산과 분배의 우월성뿐만 아니라 국가 안보마저도 산업의 대규모화에 달려 있으며, 우리는 이제 대기업의 남용에 대해 적절한 공적 안전장치를 갖고 있거나 필요에 따라 대기업을 길들이는 방법을 충분히 잘 알고 있고, 흔히 생각하는 것처럼 대기업은 중소기업을 망하게 하지 않고 오히려 촉진하는 경향이 있으며, 마지막으로 대다수 지식인이 생각하는 것처럼 대기업 사회는 개인주의를 억압하는 게 아니라 실제로는 가난과 질병과 신체적 불안을 감소시키고 레저와 여행 기회를 늘림으로써 오히려 개인주의를 신장시키는 경향이 있다고 주장한다.


모든 기업가의 원형

나는 1968년 초여름에 릴리엔설을 다시 찾아갔다. 이번에는 화이트홀 스트리트 1번지에 있는 D&R의 세 번째 본사를 방문했다. 그 사이에 D&R도 그도 있는 장소가 바뀌었다. 후지스탄에서는 데즈 강 댐이 예정대로 완공되었다. 한때 척박했던 이 지역에서 댐 건설로 가능해진 관개 덕분에 농업도 크게 발전하고 있고, 이제 68세가 되었지만 여전히 전투적인 릴리엔설의 표현대로 "비관적인 경제학자들은 비관적인 태도를 다른 저개발국으로 돌려야 하게 되었다."


앞서 D&R은 이란과 일을 계속 이어가기 위해 5년간의 계약에 새로 서명했다. D&R의 고객 명단도 14개국으로 크게 늘어났다. 가장 논란이 많은 사업은 베트남에서 하는 사업인데, 미국 정부와 계약을 통해 남베트남의 한 그룹과 메콩 강 유역의 전후 개발 계획을 세우고 있었다. (이 일 때문에 릴리엔설은 전쟁을 지지한다는 비난을 받았다.) 사실은 그는 베트남 전쟁을 일련의 "끔찍한 오산"이 낳은 참혹한 결과로 간주했고, 전후 자원 개발 계획은 별개의 문제라고 생각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 비판에 상처를 입은 것은 분명했다.


같은 시기에 D&R은 예상을 깨고 농촌 지역 개발 사업에 뛰어들면서 사업 영역을 넓혔다. 그 사업은 TVA 접근 방법이 현대의 사막지역인 이들 빈민 지역을 개발하는 데 효과가 있는지 알아보기 위해 뉴욕 주 퀸스 카운티와 미시간 주 오클랜드 카운티의 민간 재단이 후원하는 그룹들로부터 의뢰받은 것이었다. 이 그룹들은 D&R에 사실상 "이곳이 잠비아라고 생각하고 어떻게 해야 할지 알려주시오"라고 말했는데, 그 유효성이 아직 입증되지 않았더라도 상상력이 아주 풍부한 아이디어를 내놓으라고 요청한 셈이다.


릴리엔설은 D&R과 미국 기업계에서 D&R이 차지하는 위치에 대해서는, 지난번 우리의 만남 이후 D&R은 태평양 연안 지역에 두 번째 상주 사무실을 열 정도로 팽창했고, 이익이 크게 증가했으며, 라자르[금융회사 라자르 프레르]는 형식적인 지분만을 소유한 채 사실상 종업원이 소유한 회사가 되었다고 설명했다.


무엇보다 고무적인 것은, 전통적인 기업들이 이윤에 대한 강박증에 사로잡혀 훌륭한 젊은이들이 등을 돌리는 바람에 신규 채용 문제로 심각하게 고민하던 시기였는데도, D&R이 추구하는 이상적인 목표가 가장 유망한 대학 졸업생들에게는 큰 매력이 되었다는 점이다. 그리고 이 모든 일의 결과로 릴리엔설은 마침내 지난번에 말할 수 없었던 것을 말할 수 있었다. 이제 민간 기업이 그에게 공무원 생활을 할 때보다 더 큰 만족을 준다고 말이다.


그렇다면 D&R은 반은 주주들에게 반은 나머지 인류에게 책임을 지는 미래 자유 기업의 원형일까? 만약 그렇다면 아이러니가 완성되면서 릴리엔설은 모든 사람들 중에서 기업가의 원형으로 자리 잡을 것이다.


* * *


본 도서 정보는 우수 도서 홍보를 위해 저작권자로부터 정식인가를 얻어 도서의 내용 일부를 발췌 요약한 것으로, 저작권법에 의하여 저작권자의 정식인가 없이 무단전재, 무단복제 및 전송을 할 수 없으며, 원본 도서의 모든 출판권과 전송권은 저작권자에게 있음을 알려드립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