새판을 짜다

   
장박원
ǻ
행간
   
15000
2013�� 05��



■ 책 소개
절대적 가치가 붕괴된 세상에서 새판을 짜려고고군분투한 혁신적 인물들에 관한 이야기!

기존의 가치가 붕괴된 세상에서 ‘혁신’을 위해 고군분투했던 춘추전국시대,이들의 모습을 그리기 위해 일생에서부터 사상에 이르기까지 다양한 시각으로 각 인물들을 분석했다. 
지속가능한 혁신을 위해 민생을 안정시키고 파격적으로 인재를 등용시키는 등 국가 전분야에 걸쳐 혁신을 이룩한 관중을 비롯해, 약육강식과 무력의 시대에 지식혁명을 일으켰던 공자, 시대 변화에 따른 전쟁의 양상이 바뀌었음을 읽고승리의 의미를 재정의한 손자, 그 시대 당연하게 생각했던 세습적 관료주의와 족벌주의의 철폐를 주장한 오기, 시스템으로 사람마저 변화시킬 수있다고 믿었던 상앙, 세 치 혀만을 이용한 설득의 기술로 합종연횡이라는 희대의 외교 전략을 구사한 소진과 장의, 진정성 있는 용인술로 식객문화를 선두하고 난세를 헤쳐나간 맹상군, 말더듬이였으나 법가를 집대성하고 진시황의 사상적 멘토가 되어 사상사와 중국사에 큰 족적을 남긴한비자까지, 다양한 방법으로 개인적, 국가적 혁신을 이룬 인물들을 소개하고 그들에게서 혁신의 방법을 배워본다. 그리고 다양한 일화나 문헌인용으로 ‘혁신’에 대한 그들의 사상 등은 물론 그와 관련된 현 시대의 상황들을 폭넓게 다루었다.
■ 저자 장박원 
고려대학교와 동 대학원에서영문학을 전공했다. 매일경제신문 편집국에서 일하고 있다. 어린 시절부터 문학과 역사에 관심이 많았고 그중에서도 고전에 대한 애정이 깊었다. 현재사람을 만나고 책을 읽고 생각하고 글 쓰는 일이 저자의 직업이 된 것이나 실용적 글쓰기를 하면서도 인문학적 글쓰기의 끈을 놓지 않은 데에는,고전에 진정한 삶의 가치와 현명하게 사는 길이 있다고 믿기 때문이다. 

그러나 아무리 뛰어난 고전이라 해도 ‘오늘의 삶’을 전제로 재해석되지 않으면 버려진 폐품에 불과하다는 것이 저자의생각이다. 고전의 가르침을 전하는 것이 단지 역사적 사실과 문헌을 탐구하는 것이라면 학자의 몫이겠지만, 현재의 당면 과제를 풀 새로운 열쇠로서고전을 재해석하는 것이라면 이야기가 달라진다. 다양한 관점의 해석이 필요한 것이다. 저자는 기자라는 직업의 특성상 수많은 사람과 사건을 접하고분석해왔다. 이러한 경험은 역사적 인물과 상황을 재해석해 현재로 되살리는 작업에 자양분이 되었다. 현재에 대해 고민하고 따져보던 시야를 과거로돌려 역사속의 인물들을 다른 시각으로 바라볼 수 있었다. 

특히 중국 고전에 관심이 많은 저자는 『사기』『국어』『전국책』 등의 역사서와 『논어』『관자』『손자』『한비자』 등 사상가들의핵심 이론이 집약된 고전을 통해서 역사 속의 인물들을 깊이 연구했다. 중요한 단락은 수십 번 반복해 읽었고 다각도로 생각해 인물에게서 새로운솔루션을 발견하는 데 많은 시간을 할애했다. 그들이 살아가면서 터득한 인생의 가르침을 현 시대의 독자들에게 어떻게 쉽게 전달할 수 있을까를 항상고민했다. 그리하여 현재와 같이 동양사상 가장 혼란한 시기인 춘추전국시대의 인물들 중에 이 시대가 필요로 하는 메시지를 던져줄 수 있는 자들을선별하고, 오늘의 우리가 무엇을 배울 수 있는가를 이야기하는 시리즈를 기획하게 되었다. 

■차례
서문 - 반복되는 말세의 징조, 그 안에서 춘추전국 인물들이 주는 교훈
1장 관자 - 혁신은 사람에 달려 있다 
1.혁신가는 큰 뜻을 품는다
2. 사람을 아는 자가 성공한다
3. 혁신을 이끌 인재를 구하라
4. 시대의 새로운 기준을세우다

2장 공자 - 무력의 시대에지식혁명을 일으키다 
1. 세상을 지배하는 진정한 힘
2. 제왕들 사이에 인문학 바람이 불다
3. 지식혁명프로젝트가 시작되다
4. 인류의 위대한 스승이 되다

3장 손자 - 이길 수 있을 때 싸우는 것이 혁신이다
1. 싸움은 이기고 시작하라
2. 승자가 싸우는 방법
3. 전쟁에서 혁신을발견하다

4장 오자 - 연고주의의희생양에서 개혁의 아이콘이 되다
1. 인간 사회의 필요악, 네포티즘
2. 벽이 있다면 부숴라
3. 포기하지 않는자에게만 허락되는 것

5장 상군 -체계적인 시스템으로 사람을 움직이다
1. 시스템이 사람을 바꾼다
2. 혁신에도 숙성의 시간이 필요하다
3.시스템에 완벽이란 없다

6장 소진과 장의- 설득의 미학, 외교혁명을 이끌다
1. 세 치 혀로 세상을 움직이다
2. 소통의 힘으로 강자에 대항하다 :소진
3. 쓰일 데를 알고, 물러날 때를 알다 : 장의
4. 설득에도 전략이 필요하다
7장 맹상군 - 용인술의 새 지평을 열다
1.인맥은 금맥이다
2. 진정한 용인술을 위한 조건
3. 나를 알고 싶으면 내 지인을 보라
8장 한비자 - 새로운 시대는 혁신을 원한다
1.난세는 영웅을 부른다
2. 천하통일의 근간이 되다
3. 혁신의 성공 조건

주요 참고문헌





새판을 짜다


관자 - 혁신은 사람에 달려 있다

관이오(管夷吾) : 제환공(齊桓公)을 섬긴 뛰어난 재상으로 춘추시대 초기 환공을 실질적인 패자로 만들었다. 흔히 관중으로 불린다. 관중 사후에 추종자들이 그의 말과 행위를 기록한 『관자(管子)』는 춘추전국시대 사상의 백과사전이라고 해도 부족하지 않다. 제갈공명이 롤모델로 삼았을 만큼 혁신의 아이콘이며, 제갈공명과 함께 중국의 2대 재상으로 불린다. 관중은 환공을 도와 정치, 경제, 행정, 군사 등 국가 전반에 걸친 혁신에 성공하고, 대외적으로 9번의 회맹(會盟)을 통해 제후들을 연합하여 제나라를 명실상부한 패자로 만들었다. 이 과정에서 환공은 국가의 대소사를 모두 관중에게 위임하였고, 그를 높여 중부(仲父)라 부르기도 했다. 인재를 무엇보다 중요시했던 그는 평민을 천거하는 등 파격적인 인사정책을 펴 제환공의 주변에 많은 인재가 모이는 데 큰 역할을 했다. 가난했던 소년시절부터 평생을 지켜간 포숙아(鮑叔牙)와의 우정은 관포지교(管鮑之交)라는 고사성어로 잘 알려져 있다.


혁신가는 큰 뜻을 품는다

춘추전국시대 첫 패자를 만든 인물이자 관포지교의 주인공 관중은 정치와 경제, 사회 등 전 분야에 걸쳐 개혁을 단행했지만 핵심적인 것은 경제혁신이었다. 그중에서도 가장 독창적인 것이 치미(侈靡) 이론이다. 치(侈)는 사치(奢侈)하다라고 할 때 쓰는 말이고 미(靡)는 마구 쓴다는 의미를 갖는다. 소비를 많이 하게 해 돈을 활발히 돌게 하고 경기를 활성화시키는 것이 치미 이론의 핵심이다. 군주의 질문에 답하는 형식으로 되어 있는 『관자』의「치미」편에 나온 글을 보자.


"음식과 화려한 음악은 백성이 원하는 것입니다. 그들이 하고자 하는 것을 만족시키고 원하는 것을 넉넉하게 하면 그들을 부릴 수 있을 것입니다. (……) 부유한 사람이 충분히 소비하면 가난한 사람은 일자리를 얻게 됩니다. 이것이 백성이 편안한 삶이고 온갖 생업을 진작시켜서 먹고살게 하니 이것은 백성이 혼자 스스로 노력해서 되는 것이 아니라 군주가 나서서 도와주어야 하는 것입니다. (……) 백성은 보물이 없어서 이익을 으뜸으로 여깁니다. 이익이 있은 뒤에야 유통할 수 있고 유통한 뒤에야 성시(成市)를 이룹니다. (……) 상인은 나라에 고용된 사람이 아닙니다. 일정한 지역을 가리지 않고 거처하고, 군주를 가리지 않고 일을 하니, 물건을 내어서 이익을 따르고 물건을 들여서 보존하지 않습니다. 나라의 살림은 곧 이익을 얻습니다. 시장의 세수는 군주가 농업을 강화하는 데 쓰입니다. 그러므로 윗사람은 소비를 하고 아랫사람도 소모를 하여 군신이 서로 왕래하고 서로 친하면 군신의 재물이 사사로이 저장되지 않으니 그러하면 가난한 사람은 팔다리를 움직여 먹을 것을 얻을 수 있습니다. 성시를 증가시키고 시장을 확대하는 것 또한 한 가지 방법입니다."


근검절약으로 부를 축적하는 것보다 여력이 있으면 더 많이 소비하는 게 오히려 경제를 발전시키고 부강한 나라가 되는 길이라는 발상은 그때나 지금이나 매우 유용하다. 그렇다면 무려 2700년이란 긴 세월의 간격을 좁힌 경제혁신의 원조 관중은 대체 어떤 인물이었을까?


주나라와 춘추전국시대는 철저히 귀족사회였다. 귀족만 경대부가 되고 장군이 될 수 있었다. 귀족이 아닌 사람이 역사의 중앙 무대에 등장하는 것은 불가능에 가까웠다. 관중의 계급은 지식인이라 할 수 있는 사(士)로, 천민은 아니었으나 실생활에서는 농민이나 상인과 별로 다를 바 없이 생업(노동)을 해야 하는 처지였다. 사마천은 『사기』「관안열전」에서 관중과 포숙에 대해 이렇게 설명했다.


관중 이오는 영수 남쪽 사람이다. 그는 젊었을 때 항상 포숙아와 사귀었는데, 포숙은 그의 현명함을 알아주었다. 관중은 곤궁하여 언제나 포숙을 속였지만, 포숙은 그를 잘 대해주었다. (……) 관중은 이렇게 말했다. "내가 가난하게 살았을 때 포숙과 장사를 한 적이 있었다. 이익을 나눌 때마다 내가 더 많은 몫을 차지하곤 했으나 포숙은 나를 욕심쟁이라고 말하지 않았다. 그는 내가 가난한 것을 알았기 때문이다."


포숙은 군자이며 청렴하긴 했지만 엄격하고 융통성이 없는 편이었다. 반면 관중은 전형적인 정치인이었다. 포숙처럼 원칙에 따라 일을 처리하지 않고 현실을 감안해 일이 가장 잘될 수 있도록 목표를 정해 행동하고 판단했다. 관중이 정치를 하던 시기에는 충신과 간신이 함께 어울릴 수 있었다. 충신은 충신대로, 간신은 간신대로 그들의 능력을 극대화할 수 있도록 관중이 조율했기 때문이다. 포숙은 바로 이런 관중의 능력을 알아봤던 것이다. 그리고 이런 장점이 궁극적으로 제나라가 천하를 제패하는 데 결정적인 역할을 할 것으로 확신했다. 그래서 포숙이 제환공에게 관중을 추천했던 것이다.

 

사실 관중은 오래전부터 제나라를 춘추시대 최고 강국으로 키우려는 큰 뜻을 품고 있었다. 꿈을 달성할 전략과 전술도 구상해뒀다. 죽마고우였던 포숙은 관중이 꿈꾸는 대업(大業)에 공감했고 관중만이 대의를 이룰 수 있는 인물이라고 믿었다. 이런 비전에 따라 관중과 포숙은 정권을 잡을 가능성이 높은 공자(公子) 규와 소백(제환공) 두 사람을 각각 맡기로 했다. 포숙이 죽기를 각오하며 관중을 제환공에게 추천했던 배경이다. 관중이 자신의 주군인 공자규가 죽고 이어 소홀이 자살한 상황에서 기어코 목숨을 부지하려 했던 것도 오래전부터 꿈꿨던 이 큰 뜻을 저버릴 수 없어서였다.


"나와 함께 곁에서 공자규를 도왔던 소홀은 스스로 목숨을 끊었으나 나는 붙잡혀 굴욕스런 몸이 됐다. 그러나 포숙은 나를 부끄러움도 모르는 사람이라고 여기지 않았다. 그것은 내가 자그마한 일에는 부끄러워하지 않지만 천하에 이름을 날리지 못하는 것을 부끄러워함을 알았기 때문이다. 나를 낳아준 이는 부모이지만, 나를 알아준 이는 포숙이다."


시대의 새로운 기준을 세우다

주나라의 권위가 떨어졌다지만 춘추시대 초기엔 노골적으로 천자를 끌어내리고 천하를 차지할 수 없었다. 대신 가장 힘이 강한 제후는 겉으로 종주국인 주 왕실을 제대로 섬길 것을 명분으로 내세우는 존왕을 외치면서 실제로는 힘과 위협, 강압적인 설득으로 다른 제후들을 규합해 주변 이민족의 침입을 막는 양이(攘夷)를 따랐다.


존왕양이를 위해선 먼저 정권을 안정시켜야 했다. 이런 측면에서 제환공의 형이자 정적인 공자 규를 지지했던 노나라와 벌인 두 번의 전쟁은 불가피한 통과의례였다. 먼저 건시 땅에서 노나라와 맞붙은 전쟁은 침략을 받았기에 어쩔 수 없는 일이었다. 두 번째 장작 전투는 환공이 관중을 완전하게 신임하기 이전에 일어난 사건으로 대신들의 판단 착오로 발생했다. 건시 전투에서는 이기고 장작 전투에서는 졌는데 이를 계기로 환공은 관중을 중용하고, 이에 따라 권력기반이 더욱 공고해지는 결과를 낳았다.


관중은 무력으로 제후들을 제압하기에 앞서 먼저 충분하게 힘을 길러야 한다고 환공에게 충고했다. 먼저 정세 파악을 하고 주변국을 우호세력으로 만들고, 과거에 침략으로 빼앗은 주변 국가의 땅을 돌려주며 제나라가 아닌 지역에서는 세금을 거두지 말라고 권했다. 2단계 작전은 제후국을 한 장소에 모아 종주국인 주 왕실을 섬기고 무슨 일이 일어나면 서로 돕자는 취지로 회맹을 추진한 것이었다.


끊긴 것을 이어주고 망한 나라를 다시 살린다는 계절존망도 빼놓을 수 없다. 중원의 제후국 가까운 곳에 사는 이민족의 침입으로 위기를 겪은 대표적인 곳이 위나라와 형나라다. 이에 대해서는 「제어」에 잘 요약돼 있다.


존왕양이와 계절존망 덕분에 관중이 집권하던 시절 천하는 비로소 안정을 찾을 수 있었다. 한 국가의 혁신은 이렇듯 전 세계에 영향을 준다. 우리 시대가 혁신을 잃어버린 원인은 무엇일까? 관중이 다시 태어난다면 어떤 해법을 내놓을까? 사람의 얼굴을 한 자본주의? 최적의 효율을 내는 사회주의? 분명한 것은 모두가 납득할 만한 국제질서 아래 지구촌의 모든 사람이 잘 먹고 잘사는 세상을 위한 혁신이어야 할 것이다. 



손자 - 이길 수 있을 때 싸우는 것이 혁신이다

손무(孫武) : 춘추시대 제나라 낙안 출신으로 천재적인 병법가이자 군사전략가다. 그의 저서인 『손자(孫子)』는 전쟁에 대한 새로운 정의와 승리를 위한 구체적인 방법들에서 시대를 앞서간 통찰력을 보여주고 있어 최고의 병법서로 평가받는다. 오나라로 망명 후 오자서의 추천으로 대장군 자리에 올랐다. 오나라 왕 합려에게 능력을 증명해 보이기 위해 궁녀들을 정예병사와 같이 훈련시킨 일화는 유명하다. 대장군에 오른 후에는 북쪽으로 제와 진나라, 서쪽으로 초나라와 싸워 크게 이겼으며 초나라는 수도를 옮기는 굴욕을 당하기도 했다. 손무는 전투에서 그만의 전쟁이론을 실전에 사용하여 그 효용을 증명해 보였다. 오나라로 돌아온 이후의 행적에 대해서는 많은 기록이 남아 있지 않으나 은둔하여 학문을 가다듬으며 살다가 생을 마친 것으로 알려져 있다. 


싸움은 이기고 시작하라

기원전 506년 중국 장강의 지류인 한수를 사이에 두고 초나라와 오나라의 전면전이 시작됐다. 초나라는 많은 인구와 풍부한 물자를 기반으로 중국 남쪽뿐 아니라 중원까지 호령했던 정통 패권국이다. 반면 오나라는 약 10년 전 합려가 궁중 쿠데타를 일으켜 왕권을 잡을 뒤 부국강병에 성공한 신흥강국이다. 당시 오나라의 총사령관이 바로 손무다. 그는 초나라에서 오나라로 망명한 오자서의 추천으로 대장군 자리에 올랐다.


손무에게는 세상을 바꾸고자 하는 열망이 있었다. 그는 전쟁의 역사와 패턴, 무기의 발달, 지형과 전투 유형, 정치와 외교, 심리와 첩보전, 인구의 역학관계 등 다양한 분야를 깊어 고찰하여 그 시대에 적합한 병법서를 집필하기 시작했다. 『손자』의 목적은 영토 확장에 열을 올리고 있는 제후들에게 싸움의 위험을 알려 가급적 싸우지 않고 얻고자 하는 것을 획득하는 것이다.

 

손무가 『손자』 첫 편 「계(計)」의 첫 구절을 "전쟁은 나라의 중대한 일이며 국민의 생사가 달려 있고 존망이 달려 있는 길"이라고 쓴 것은 전쟁에 대한 새로운 정의였다. 이전에는 대부분 귀족 중심의 소규모 전투로 전쟁이 판가름 났다. 백성 모두가 참여하는 전면전 또는 총력전은 손무 이전의 사람들에게는 낯선 풍경이었다. 손무의 혁신은 이처럼 변화의 핵심을 파악하면서 시작됐다.


승자가 싸우는 방법

『손자』 마지막편은 「용간(用間)」이다. 「용간」은 간첩을 활용하는 방법을 다룬다. 손무는 언제나 적진에 간첩을 뒀다. 적정을 파악하는 것은 최소의 비용으로 승기를 잡을 수 있는 수단이고, 적정을 제대로 파악하려면 반드시 간첩을 파견해야 한다는 게 용간의 주요 내용이다.


손무는 낭와와 위파, 심윤술이 서로 권력을 차지하기 위해 경쟁하고 있으며, 그 밑에 있는 장수들도 모두 동상이몽을 하고 있음을 간파했다. 옹서에서 오나라 군대의 기세에 눌린 초나라 군대는 싸우기도 전에 도망가기 바빴다. 합려의 동생이자 오나라 장수였던 부개는 이 기회를 놓치지 않고 도주하는 초나라를 쳤다. 초나라 군대는 거의 전멸 위기에 이르렀다. 이때 초나라 명장 심윤술이 나타났다. 오나라 군대는 더 이상 전진하지 못했다. 그러는 동안 초나라 장수와 병사는 초나라 수도인 영성으로 달아날 수 있었다.


손무와 오자서는 영성 가까이에 있는 맥성과 기남성을 함락시키기로 계획했다. 초나라 장수가 오나라 군대를 먼저 공격했다. 오나라는 초나라 공격에 대응하는 척하면서 이전에 오나라에 항복해 귀화한 초나라 병사들을 초나라 군진 속에 합류하게 만들었다. 이들의 임무는 초나라 병사들에 섞여 맥성으로 들어간 뒤 밤에 성문을 여는 것이었다. 오자서는 이 일이 성공하면 엄청난 상금을 주기로 약속했고 이들은 죽기 살기로 임무를 수행했다. 일단 성문이 열리자 맥성은 쉽게 함락됐다. 손무는 기남성에서 영성까지 이어진 적호라는 호수와 장강을 이용해 수전에 능한 오나라 병사들의 장점을 살리면서 어렵지 않게 기남성을 점령할 수 있었다. 영성에 있는 초소왕과 대신들은 영성을 포기하고 달아났고 영성은 오나라의 손에 들어갔다.


오나라가 초나라를 다스린 기간은 채 1년도 안 된다. 오나라 군대는 초나라 백성들을 마음껏 약탈하고 유린했다. 오초 전쟁의 동기 자체도 크지 않았다. 중국 전체의 패자가 되기에는 오나라 왕 합려의 그릇이 작았다. 그는 정적을 잔인하게 죽이고 왕좌에 올랐고, 어린 나이에 숨을 거둔 딸을 위해 수많은 백성을 아무런 양심의 가책도 없이 생매장했다. 오나라 중심의 새로운 세상을 열겠다는 비전도 없었다. 그저 힘을 과시하고 싶었을 뿐이다. 오자서는 합려의 이런 야망을 개인적인 복수에 활용했고, 손무는 자신의 병법을 실전에서 확인하는 수단으로 사용했다.


초나라는 비록 패전국이었지만 강한 생명력을 가지고 있었다. 초나라는 진나라의 구원병을 얻는 데 성공했다. 손무는 무조건 후퇴를 주장했다. 첫째, 살인과 간음, 약탈에 찌든 오나라 병사들의 기강을 다시 일으켜 세우기 불가능하다. 둘째는 초나라 백성들의 지지가 전혀 없다. 셋째는 영성을 점령한 뒤 정치적인 조치를 전혀 취하지 않았다. 도망간 왕을 대신할 새 군주를 세우고 새 군주와 좋은 관계를 맺은 뒤 초나라 백성이 그를 따를 수 있도록 환경과 권력기반을 다져놓으면 장기적으로 오나라에 많은 이익을 줄 수 있었다. 이미 엎질러진 물이었다. 마침 합려의 동생 부개가 먼저 오나라로 들어가 스스로 왕의 자리에 올랐다고 선포했기 때문에 오나라 왕 합려는 선택의 여지 없이 영성에서 물러나 귀국해야 했다. 오나라는 전쟁에서 이겼지만 한순간의 통쾌함 외에 얻은 것이 별로 없었다. 오초 전쟁은 군사 강국이 진정한 강국이 아님을 증명해주는 역사적 증거로 남았다.


오나라로 돌아온 손무는 별다른 활약을 보이지 못했다. 손무는 관직에서 물러나 재야로 숨어 병법을 연구하다 생을 마감한 것으로 보인다. 오자서는 합려가 죽고 그를 이어 왕위에 오른 부차에 의해 죽임을 당했다. 만약 손무가 합려 시대와 같이 오나라 조정에서 주요 역할을 했다면 오자서와 비슷한 운명을 밟았을 가능성이 크다. 위기의 전략가인 오자서나 전쟁의 신인 손무 같은 사람이 평화의 시기엔 의외로 약할 수 있다. 



맹상군 - 용인술의 새 지평을 열다

전문(田文) : 전국시대 정치가로 맹상군(孟嘗君)이라는 시호로 널리 알려져 있다. 설(薛) 지역에 봉지(封地)를 두고 있었기에 설공이라고도 불린다. 인재의 중요성이 널리 알려진 시기에 식객 문화의 선두에 섰으며 전국시대의 사군자 중 한 사람으로 추앙받는다. 제나라 위왕의 막내아들이자 제선왕 동생인 전영의 아들로 태어났으나 불길한 날에 태어났다 하여 장성할 때까지 몰래 키워졌다. 집안의 천덕꾸러기가 될 운명이었지만, 일찍부터 인재의 중요성을 간파하여 결국 후계자의 자리에까지 오른다. 누구에게나 장점은 있으며 언젠가는 도움을 받을 수 있다는 신념으로 인재를 모으고 그들을 대접하는 데 아낌이 없었다. 개 흉내를 잘 내어 도둑질을 잘하는 사람과 닭 울음소리를 잘 흉내 내는 사람의 도움으로 위기를 모면했다고 알려진 계명구도(鷄鳴狗盜) 일화는 그의 인재 사랑과 용인술을 보여주는 이야기다. 그는 인맥을 통해 자신의 인생이 바뀔 수 있음을 가장 잘 보여준 인물이다.


인맥은 금맥이다

맹상군은 제나라 왕족의 피를 받았지만 어머니가 천한 출신이었다. 맹상군은 그의 아버지 전영이 많은 여인을 거느리며 둔 40명의 자식들 중 하나였다. 아버지가 자신의 능력과 충심을 인정하지 않으면 쫓겨날 수도 있었다. 정치를 잘하려면 선비를 중요하게 생각해야 한다는 맹상군의 주장에 동의한 전영은 맹상군에게 우수한 인재를 모으고 그들을 대접하는 일을 맡겼다. 그는 말 잘하는 유세객을 전영과 친한 제후들에게 파견하여, 가문을 정식으로 승계하기 위한 주도면밀한 공작을 폈다. 그 결과 제후들이 맹상군을 강력하게 추천했고 전영도 맹상군 주변으로 많은 사람이 모이는 것을 목격하고 후계자로 최종 승인했다. 이로써 맹상군은 큰 정치가로 성장할 수 있는 발판을 마련했다.


맹상군이 많은 인재를 모아 제나라 국력을 키우고 재상으로 크게 명성을 떨치자 연횡을 통해 한창 팽창정책을 펼치고 있던 진나라 소왕이 그를 탐냈다. 그는 맹상군을 데려오기 위해 집요한 방법으로 제나라 민왕을 압박했다. 대국의 제안을 거절하지 못한 제나라 왕은 어쩔 수 없이 맹상군을 진나라로 보냈다. 진나라 조정에서는 의견이 분분했다. 한쪽은 맹상군을 재상으로 삼아야 한다고 주장했고, 다른 쪽은 그렇게 하면 결국 제나라에게 좋은 일만 하는 것이니 차라리 죽여버리라고 했다. 진나라 소왕은 결국 맹상군을 없애기로 했다.


맹상군은 진나라 궁정에서 왕 다음으로 영향력이 큰, 왕의 애첩을 뇌물로 매수하기로 했다. 그런데 문제가 생겼다. 애첩이 원하는 것이 맹상군이 진나라에 도착했을 때 진소왕에게 바쳤던 여우 겨드랑이 털로 만든 외투라는 것이다. 그 물건은 이 세상에 오직 하나밖에 없었다. 이때 한 사람이 손을 들었다. 자신은 개 흉내를 내어 도둑질을 하는 소질이 있다며 맹상군의 식객을 청한 자였다. 그는 개 흉내를 내어 창고지기가 밤에 마음 놓고 자게 하여 아무도 모르게 외투를 훔쳐왔다. 외투를 받은 애첩은 약속대로 왕을 설득해 맹상군 일행을 석방하도록 했다.


소왕의 마음이 변할 것을 염려해 맹상군은 서둘러 진나라 도성을 떠났다. 식객 중에 문서위조의 달인이 있어 신분을 잘 숨겨 진나라를 통과했다. 마지막 관문인 함곡관을 통과하는 것이 최대 난제였다. 규정에 따라 관문은 첫 닭이 울어야 열렸다. 정보에 따르면 소왕이 마음을 바꾸어 그를 잡기 위한 추격대가 오고 있었다. 이때 닭 울음소리를 잘 내는 사람이 나섰다. "제가 닭 울음소리를 내면 주변 닭들이 따라 울 것입니다. 문지기는 닭 울음소리를 듣고 새벽이 온 줄 착각해 관문을 열 것입니다. 그때 국경을 빠져나가면 됩니다."


쓸모없거나 앞으로도 쓸모가 없을 것 같은 사람을 받아들이는 일은 쉽지 않다. 남다른 인내와 포용력이 없다면 불가능하다. 용인술의 새 지평을 열기 위해서는 상식을 뛰어넘는 넓은 마음과 아량이 전제돼야 한다. 


진정한 용인술을 위한 조건

『전국책』의 「제책」에는 이런 일화가 등장한다. 맹상군의 문객 중 한 사람이 맹상군의 부인과 사통하고 있었다. 다른 문객의 밀고로 이 사건이 맹상군의 귀에 들어갔다. 맹상군은 그를 살해하거나 추방하는 대신 "남자와 여자가 서로 그 모습을 보고 사모의 정을 품는 것은 있을 수 있는 일이다. 덮어두고 더 이상 문제 삼지 말자"며 1년 후 그를 불러 위나라의 큰 벼슬자리에 추천해주었다. 시간이 흘러 제나라와 위나라의 관계가 악화돼 서로 전쟁을 벌일 위기에 처하게 되었다. 이때 맹상군의 은혜를 입은 사람은 목숨을 걸고 위나라 군주를 설득했다. 결국 위나라 왕은 제나라 공격을 중단했다. 「제책」은 말미에 맹상군을 이렇게 평가하고 있다. 맹상군은 과연 일을 잘 처리한다고 이를 수 있다. 화(禍)를 돌려 공(功)으로 만들었구나.


나를 알고 싶으면 내 지인을 보라

가난한 선비 풍환이 맹상군을 찾아와 문객을 청했다. 맹상군의 문객은 대략 3단계가 있었다. 별다른 능력이 없어 허드렛일이나 심부름을 하는 하급, 특정 분야의 전문지식으로 집 안팎의 업무를 처리하는 중급, 그리고 맹상군과 정세에 대해 논의하고 조언을 하는 상급 문객이었다. 급에 따라 대우도 달랐다. 하급은 기본 생활에 필요한 물품과 고기반찬이 없는 식사, 중급은 종종 생선 같은 맛있는 음식, 상급은 수레와 하인이 제공되었다. 출신이나 인맥도 없고 이렇다 할 재주도 보여주지 못한 풍환은 당연히 하급에 속했는데 풍환의 반응은 맹랑했다. 맹상군은 불만을 표하는 풍환에게 최고 대우와 풍환 노모의 생활까지 책임져주었다. 얼마간 세월이 흘렀다.


봉지인 설 땅에서 이자를 받아올 사람이 필요했는데 사람들에게 이자를 내놓으라고 윽박지르는 일이었기에 대부분 이 일을 꺼려했다. 풍환이 자처하기에 보냈더니 풍환은 설 땅에서 잔치를 벌여 빚진 사람을 모았다. 개별 면담을 통해 집안 사정을 듣고 빚을 갚을 수 있는 부류와 아무리 노력해도 갚을 능력이 안 되는 사람을 나눴다. 여력이 있는 사람에겐 빚 갚을 날짜를 확정해주고, 그렇지 않은 사람의 빚 문서는 한곳에 모아 태워버렸다. "이 모든 것은 맹상군 어른이 지시한 것입니다. 돈을 빌려줄 때부터 받을 생각은 없었다고 하셨습니다. 다만 갚을 수 있는 분은 형편이 되는 대로 원금과 이자를 주길 바랍니다." 풍환은 빈손으로 돌아왔다. 맹상군이 풍환에게 책임을 물었더니 이렇게 대답했다. "제가 떠날 때 받은 이자로 주군에게 부족한 것을 사오라 말씀하셨습니다. 제가 곰곰이 생각해보니 주군에겐 없는 것이 없었는데, 단 한 가지 의(義)만 빼고 말입니다. 그래서 이번에 백성들에게 의를 사 온 것입니다." 맹상군은 풍환의 말이 일리가 있다고 인정했다.


세월이 흘러 제나라 민왕은 집안 어른이기도 한 맹상군이 자신의 정적이 될 수 있다는 생각에 이런저런 빌미로 퇴진을 요구했다. 맹상군이 권력의 핵심에서 물러나자 그 많던 문객도 모두 제 살길을 찾아 떠났다. 그러나 설 땅의 백성들은 열렬하게 맹상군을 환영해주었다. 풍환 덕에 빚이 완전히 탕감되고 편한 마음으로 살고 있었기에 백성들은 맹상군을 거의 성인처럼 여겼다. 그제야 맹상군은 풍환이 사놓은 의가 얼마나 소중한 것인지를 깨달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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