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이디어 배틀

How They Started: Global Brands

   
데이비드 레스터(역자: 김무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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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스넛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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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0�� 11��



 책 소개
노키아, 닌텐도, 애플, 구글, 볼보,KFC, 아디다스, 힐튼 호텔 등 오늘날 세계 최정상을 달리는 기업들이 초창기 어떤 아이디어와 파격적 발상으로 사업을 시작하고 사업자금을확보했으며, 시장이 어려울 때마다 어떤 혁신을 단행하고 소비자를 사로잡았는지 보여주는 책이다. 세계 유수의 기업들이 어떠한 혁신과 노력을 통해자신의 사업적 목표와 아이디어를 위대한 성과로 일구어냈는지 그 과정을 생생하게 보여준다. 아울러 자신만의 아이디어로 세계적인 브랜드와 기업을탄생시키는 데 필요한 기업가적 자세와 경쟁력에 대한 답을 조목조목 제시한다. 

저자는 지난 100년 사이에 설립되어 성장한 최정상 기업들 중 가장 독창적이고 혁신적인 브랜드 20개를 꼽아 그들이 어떤동기로 사업을 시작했고 사업상 어떤 도전에 직면해왔는지 그 성장 스토리를 생생하게 전하고 싶었다고 말한다. 기업 관련 자료를 근거로 삼았지만보다 구체적인 설명을 위해 저자는 가능한 한 설립자와 직접 이야기를 나누었으며 비교적 역사가 오래되어 설립자가 고인인 경우에는 기업의 기록 및그 기업에 얽힌 이야기에 정통한 주변 인물들을 탐색해 이 책을 완성했다.

■ 저자 데이비드레스터

22살에 사업을 시작해 채 서른이 되기도 전에 자신의 사업체를 7백만 달러에 매각해 거부의 반열에 오른 데이비드레스터는 그 후로도 여러 사업에서 대성공을 거두고 현재 발군의 기업 투자가로도 활약 중이다. 새로운 사업에 대한 열정가로 알려진 그는 창업컨설팅 기업인 스타트업스(STARTUPS)의 CEO이기도 하다. 스타트업스는 우수한 컨설팅으로 유럽에서 큰 인지도를 누리고 있으며 이들이운영하는 사이트(startups.co.uk) 또한 유럽에서 가장 인기 있는 창업 사이트로 각광받고 있다. 

■역자 김무겸
영국 선더랜드 대학원에서 영문학을 전공했으며, 현재 전문번역가로 활동하고 있다. 옮긴 책으로는『창조적 루틴』『승자의 율법: 랍비에게 답을 듣다』『구매의 심리학』『우울증을 없애는 행복의 기술 50가지』『희망: 기적을 만든 한 정신과 의사이야기』등이 있다.

■차례
서문 

1: 첨단 아이디어로 무장하라 - 테크놀로지의 점령자들
블랙베리(BlackBerry)
노키아(Nokia)
닌텐도(Nintendo)
소니(Sony)
애플(Apple)

2: 세상 모든사람을 접속시켜라 - 웹사이트의 다크호스
 
이베이(eBay) 
구글(Google) 

3: 지식으로 세상을 지배하라 - 출판계의 이단아들
돌링 킨더슬리(Dorling Kindersley, DK) 
론리 플래닛(Lonely Planet)

4: 전통 산업에서 우위를 확보하라 -제조업의 마스터 기업 
볼보(Volvo) 
다이슨(Dyson)&nbsp& 

5: 미래의 먹을거리를 선점하라 - 100년을 계획하는 식음료브랜드 
그린 앤 블랙스(Green & Black’s) 
클라우디 베이(Cloudy Bay) 
KFC
피자헛(Pizza Hut) 
코카콜라(Coca-Cola) 

6: 입히고 신기고 달리게 하라 - 스포츠 용품의 빅 브랜드

빌라봉(Billabong) 
아디다스(Adidas) 

7: 서비스는 불멸의 아이템이다 - 휴식과 체험을 파는 기업 
힐튼 호텔(HiltonHotels) 
이케아(IKEA) 




아이디어 배틀


첨단 아이디어로 무장하라 - 테크놀로지의 점령자들

블랙베리(BlackBerry)

역사상 가장 많은 이윤을 창출한 기기 제조업체로 여겨지는 리더시 인 모션(RIM)을 공동으로 설립한 마이크 라자리디스. 그의 연구의 주된 결실은 현재 세계적으로 수백만 사용자로 하여금 이동하는 동안 이메일을 받아보거나 보내게 해주는 블랙베리(BlackBerry)다. 현재 그는 48세의 나이에 세계에서 가장 성공적이고 혁신적인 테크놀로지 사업체 중 하나를 이끌고 있다.


새로운 물결, 블랙베리 출시

1999년은 최초의 블랙베리가 출시된 해다. 이 기기는 사용자로 하여금 이동하면서도 무선으로 마이크로소프트의 익스체인지 서버를 통해 회사 이메일 계정을 열어볼 수 있게 해주었다. 매 순간 작동 중인 이 테크놀로지는 출시 직후 소비자들로부터 대단한 호응을 얻었다. 이 기기는 2000년에 이르러 「인포월드(InfoWorld)」지가 선정한 올해의 제품에 등극했다.


블랙베리는 상업적으로도 대성공을 거두었다. 1999년 블랙베리의 판매로 RIM의 총수입은 전년도보다 두 배 이상 증가한 4천 7백 50만 달러를 기록했고, 순수익은 680만 달러를 기록했다. 블랙베리 성공의 중심에는 블랙베리 기기와 요금제를 제공할 수 있도록 해준 주요 인터넷 서비스 제공업체와 통신업체, 그리고 휴대폰 네트워크 회사 등과의 파트너십이 있었다.


블랙베리가 급격한 인기를 끈 이유는 휴대가 가능한 소형 기기로 쉽고 신속하게 이메일 계정에 접근할 수 있다는 이점 때문이었다. 여기에 덧붙여 블랙베리에는 기존의 틀을 깨고도 훌륭하게 기능하는 또 다른 두 가지 장점이 있었다. 첫 번째 장점은 크기가 커서 쉽게 사용할 수 있는 쿼티(Qwerty) 배열(일반 컴퓨터 키보드와 동일한 배열)의 키보드를 장착했다는 것이고, 두 번째 장점은 이메일과 다른 화면 사이를 이동하는 데 플라이휠(flywheel)을 사용했다는 것이다. 이것은 아주 빠르게 작동했고, 말 그대로 몇 초 만에 사용법을 익힐 수 있을 정도로 조작법이 간단했다. 대부분의 다른 경쟁 제품들과는 달리 사람들은 설치하는 데 몇 분이면 충분한 블랙베리를 아주 편안하게 사용했다.


지속적인 해외 진출

2004년 RIM은 전 세계적으로 170만 명의 블랙베리 가입자를 확보했다. 하지만 가입자의 82%가 여전히 북미를 기반으로 했기에 블랙베리는 해외 사업을 촉진시키기 위한 발걸음을 뗐다. 특히 유럽에 초점을 맞춘 RIM은 2004년 오렌지와 BT를 비롯한 유럽의 주요 네트워크 업체 대다수와 계약을 체결했는데, 이로써 유럽 지역에서의 RIM 매출은 두 배로 늘었다. 이러한 성공의 열쇠는 자사의 직원들에게 블랙베리를 나눠주길 원하는 기업들에게 블랙베리의 영업 사원들이 해당 제품을 일정 기간 무료로 사용할 수 있도록 배려했다는 데 있다. 그 결과 이들 기업의 90%가 유상 고객이 되었다.


블랙베리의 현재

현재 140여 개국에서 사용되고 있는 블랙베리는 러시아와 라틴 아메리카, 중국, 동남아 등지에도 진출할 계획이다. 세계적으로 7백만 명 이상의 사람들이 블랙베리를 이용해 원격으로 이메일을 송수신하고 있다.


현재 블랙베리의 시장점유율은 70%에 달한다. 소니 에릭슨을 비롯해 몇몇 세계적인 휴대폰 제조업체와의 제휴를 통해 RIM은 이들 업체의 스마트폰 개발을 돕고 있다. 따라서 RIM은 이 분야에서 확고한 위치를 유지하고 있는 것이다. 비록 최근에 노키아가 결별을 선언함으로써 RIM이 주력했던 노키아와의 제휴 관계는 깨졌지만, 이러한 유형의 커뮤니케이션 시장은 세계적으로 크게 성장할 것이 틀림없기에 RIM의 미래는 밝을 것으로 보인다. 모바일 업무가 점점 더 늘어남에 따라 의사 결정자인 회사의 중역뿐만 아니라 점점 더 많은 직원이 원격 이메일링 시스템에 입문할 테니 말이다.



세상 모든 사람을 접속시켜라 - 웹사이트의 다크호스

이베이(eBay) 

취미로 온라인 경매를 실험하고 있던 소프트웨어 엔지니어인 설립자 피에르 오미디아르는 재미삼아 부러진 레이저 프린터를 인터넷으로 팔아보려고 광고를 했다. 그는 누군가가 정확히 14달러 83센트를 지불하고 작동하지 않는 그 물건을 구입하려 한다는 데 놀랐다.


이 사건으로 그는 사람들의 수집 욕구를 충족시켜주는 것에 충분한 사업 가능성이 있다고 확신했다. 부러진 레이저 포인터는 적절한 절차에 따라 거래가 체결되어 구매자에게 운송되었고, 이것으로 이베이 최초의 역사적인 거래가 성공적으로 이루어졌다. 오늘날 세계에서 규모가 가장 큰 온라인 시장인 이베이는 닷컴 시대의 가장 성공적인 기업 중 하나이며 지금도 여전히 세계 도처에서 헤드라인을 장식하고 있다.


온라인 경매에 불을 붙이다

전 세계 사람들을 연결시켜주는 웹의 잠재력을 시험해보고 싶었던 피에르는 구매자와 판매자가 가격과 제품에 대한 정보를 공유할 수 있는 플랫폼을 구축해보려고 했다. 이러한 플랫폼의 개발은 시간과 인내를 요했지만 피에르는 자신의 도전을 즐기며 쉴 새 없이 일했다.


1997년 사업이 놀라운 성장률을 보이자 피에리는 처음으로 광고에 꽤 많은 투자를 했고, 이베이의 아이콘과 같은 현재의 로고를 탄생시킬 수 있도록 했다. 1997년 말과 1998년에 걸쳐 세계의 비즈니스 커뮤니티는 닷컴 붐을 향유하고 있었고, 그 어떤 온라인 사업이라도 투자가 및 소비자들에게 매혹적으로 다가갔다.




서비스 장애로 인한 위기

하지만 급격한 성장은 그 대가를 치러야 했다. 1999년 6월에 사이트 개편 후 이베이는 스물두 시간 지속된 서비스 장애를 비롯해 몇 차례의 서비스 장애로 곤란을 겪어야 했다. 이것은 사용자와 사이트 간의 상호작용에 심각한 영향을 끼쳤고, 그 결과 이베이의 주가는 8달러 이상 하락했다. 이후에도 서비스 장애는 또다시 발생해 이베이의 수익에 치명타를 입혔다.


고객을 최우선시하는 것은 피에르의 한결같은 목표였기에 그는 서비스의 질에 대한 믿음을 고객들에게 다시 심어주는 작업에 착수했다. 하지만 소수의 이용자들은 이베이와 같은 온라인 경매 서비스를 제공하는 다른 사이트로 옮겨갔다. 그중 대표적인 사이트가 온라인 경매 검색엔진 야후와 온라인 쇼핑몰 아마존이었다. 아마존은 판매 수수료와 판매자에게 평점 주기, 피드백 등을 비롯해 이베이와 유사한 서비스를 제공하는 온라인 경매를 1999년 3월에 론칭했다. 하지만 이러한 경쟁은 결과적으로 이베이에게 긍정적인 영향을 끼친 것으로 보인다. 이 일로 인해 이베이가 서비스를 향상시키는 데 한층 더 주의를 기울일 수 있었기 때문이다. 이베이는 경매 대상이 되는 제품군을 늘렸고, 구매 및 판매 프로세스를 향상시키려 노력했으며 급기야 해외 진출에도 눈을 돌렸다.


이베이의 현재

2008년 4월 마가렛이 CEO 자리에서 물러나면서 이베이 소유의 마켓플레이스(Marketplaces) 사장인 존 도나호가 이베이의 새로운 CEO로 부임했다. 이베이의 해외시장 수입은 2년 전 이베이 총수입의 47%에서 54%로 증가하면서 밝은 전망을 내다보고 있다. 이베이의 성공 요인 중 하나는 2000년도의 한 인터뷰에서 피에르가 설명한 바 있는 설립 초기의 기업 비전을 시대 상황에 맞게 쇄신하고 수정한 역량에 있다.


이베이 사이트는 최근 경매 물품 및 즉시 판매 물품 개시를 보다 용이하게 해주는 새로운 방식들을 도입했고, 피드백 메커니즘을 변경했으며, 이베이를 보다 안전한 거래가 이루어질 수 있는 곳으로 만들기 위해 사기를 방지하는 조항을 강화했다.



전통 산업에서 우위를 확보하라 - 제조업의 마스터 기업

볼보(Volvo) 

81년이 넘는 역사를 자랑하는 볼보는 경쟁력을 유지하기 위해 상황에 따른 정책을 펼치긴 했지만 자동차 테크놀로지가 진화해온 동안에도 적당한 가격에 안전성을 갖춘 자동차를 고객들에게 제공한다는 볼보 브랜드의 핵심 가치를 변함없이 유지해왔다.


수입 자동차에 내민 첫 도전장

1925년 스웨덴 국민으로서의 긍지와 야망을 가진 아사르 가브리엘손과 구스타프 라르손. 가브리엘손에겐 경제적인 노하우 및 사업에 필요한 후원을 할 수 있는 실력이 있었고, 라르손에겐 자동차를 설계하는 기술이 있었다. 이들은 오로지 당시 스웨덴에 판매되는 수입 자동차에 도전장을 내밀 만한 자신들만의 자동차를 마들려는 생각에만 빠져 있었다.


두 사람은 SKF의 자회사인 AB 볼보(라인어로 나는 구른다라는 뜻)라는 이름을 내걸고 자신들의 자동차를 개발할 수 있었다. 1925년 설립된 AB 볼보는 자동차 업계에서 볼 및 롤러베어링을 제조·판매하는 것으로 출발했다. 이 시기는 꾸준한 개발이 이루어지고 여러 새로운 아이디어가 속출한 자동차 제조업계의 황금기였다. 이러한 상황에서 자동차 업계에 막 발을 들여놓은 볼보는 계속해서 급속한 성장세를 보였고 설립 이듬해 새로운 버전의 세단과 회사 최초의 트럭을 출시했다.


성공적인 출발

볼보는 첫해 연말에 이르러 140만 크로나라는 총 매출을 올렸고, 직원 수는 250만 명에 달했다. 볼보는 본질적으로 스웨덴 브랜드였지만 두 설립자는 해외시장으로의 진출이 중요한 성장 전략이라는 걸 일찌감치 깨닫고 있었다. 그래서 볼보는 핀란드에 최초의 자회사를 설립한 1928년부터 수출을 시작했다. 자국의 유명 자동차 브랜드가 없는 나라에서부터 출발한 것은 매우 현명한 판단이었다. 핀란드 진출로 인한 볼보의 급속한 성장은 81년이 넘는 볼보 역사에서 쇠퇴의 징조를 보이지 않은 훌륭한 전례가 되어주었다.


전쟁으로 인한 타격의 극복

제2차 세계대전이 일어나기 전 몇 해 동안에도 볼보는 매해 새로운 모델을 출시하면서 급속한 진화의 속도를 유지했다. 하지만 세계대전이 발발하자마자 곧바로 연료 및 자재 부족의 문제를 겪었다. 하지만 볼보는 이러한 상황에 미래지향적인 방식으로 접근함으로써 전쟁 발발 후 한두 달 만에 발생로(發生爐) 가스(producer gas)라 불리는 낮은 등급의 연료를 사용하는 자동차를 생산하기 시작해(이미 이전부터 가솔린을 대체하는 연료 연구를 진행 중이었다) 전쟁이 계속되는 동안 수만 대를 제조했다. 이때 제조한 자동차 및 군용차의 판매로 볼보는 그동안의 손실을 만회했다. 게다가 전쟁으로 인한 난관에도 불구하고 AB 볼보는 스벤스카 플라그모터 AB의 주식 대부분을 매입한 것을 비롯해 여전히 몇몇 성공적인 인수를 할 수 있었다. 후에 이것은 여객기와 전투기, 로켓 등의 엔진 및 기타 부품을 생산하는 볼보의 자회사 볼보 에로(Volvo Aero)가 된다.


안전성에 핵심을 둔 브랜드 구축

시간이 흐르면서 볼보는 모든 시장에서 안전과 품질이라는 핵심 가치를 지닌 브랜드로 유명해졌다. 볼보의 마케팅은 제품 개발팀의 성과에 힘입어 안전을 브랜드의 특별한 셀링 포인트로 부각시켰다. 1936년 라르손은 다음과 같은 유명한 말을 남겼다. "자동차는 사람이 운전합니다. 그래서 볼보에서 만드는 모든 제품은 근본적으로 안전해야 한다는 원칙에 부합해야만 합니다."


자동차 사고 및 안전에 대한 사람들의 인식이 높아짐에 따라 안전에 역점을 둔 볼보의 마케팅은 점점 강력한 힘을 발휘해 판매에 더욱 박차를 가했다. 1970년대에 볼보는 북유럽에서 가장 많이 판매되는 자동차 브랜드가 되었고, 미국이 스웨덴을 물리치고 볼보의 가장 큰 시장으로 등극했다.


볼보는 1960년대부터 오늘날 매우 중요한 문제로 대두된 환경문제를 고려하기 시작했는데, 1980년대에 이미 최초의 환경 친화적인 콘셉트카를 선보인 볼보. 가스 터빈과 전기 모터, 고속 발전기 테크놀로지를 이용해 완벽한 하이브리드 자동차를 구현한 볼보의 1980년대 모델은 상당 부분 재생 가능한 연료를 사용한다는 점에서 세계적인 관심을 끌었다.


볼보의 현재

오늘날 볼보 그룹은 볼보 트럭, 볼보 버스, 볼보 건설장비, 볼보 펜타, 볼보 에로, 볼보 금융 서비스 등으로 구성되어 있다. 하지만 볼보 브랜드는 여전히 볼보 자동차로 유명하다. 포드에 인수된 이후에도 볼보 자동차는 계속해서 강세를 보이며 자동차 업계의 개척자로 남아 있는 것이다.



미래의 먹을거리를 선점하라 - 100년을 계획하는 식음료 브랜드

피자헛(Pizza Hut)

지금으로부터 50년 전에 설립된 피자헛은 현재 미국에 6천 2백 개의 매장과 백 개국에 걸쳐 4천 개 이상의 매장을 보유한 세계에서 가장 큰 피자 체인점이다. 두 가지 형태, 즉 패밀리 레스토랑 형태와 피자헛 익스프레스라는 브랜드 아래의 패스트푸드점 형태로 나뉘는 피자헛은 피자뿐만 아니라 창조적인 피자 크러스트로도 유명하다.


피자 돌풍의 막을 올리다

총 스물다섯 명이 앉을 수 있고 맥주와 피자를 제공하는 최초의 피자헛 레스토랑은 1958년에 문을 열었다. 단과 프랑크 카니 형제는 사람들의 관심을 유발하기 위해 개업 첫날 밤 손님들에게 피자를 무료로 제공했다. 10인치와 14인치 피자의 포장 주문이 쇄도하면서 사업은 바쁘게 돌아갔다. 피자헛은 고객들이 구매를 주저하기 전에 샘플을 맛보도록 했고, 그 결과 지역 주민들의 관심에 불이 붙기 시작했다.


피자헛에 매료된 이들은 비단 고객들뿐만이 아니었다. 당시의 다른 레스토랑 주인들도 피자헛의 잠재력에 깊은 인상을 받고 피자헛과 관계를 맺어 이와 비슷한 레스토랑을 운영하고 싶어 했다. 이에 카니 형제는 캔자스시티 밖으로 사업을 확장하고 다른 레스토랑들의 증폭되는 관심을 충족시키기 위해 1960년대의 프랜차이즈 모델에 눈을 돌렸다. 하지만 이러한 프랜차이즈 개념의 신빙성을 의심한 위치토 은행은 이들 형제에게 재정적인 지원을 거의 하지 않았다. 형제는 결국 자신들의 자금으로 프랜차이즈 계획을 추진했다. 그로부터 1년 반 후, 이들은 다섯 개의 피자헛 프랜차이즈 가맹점(다섯 매장 중 네 매장의 부지는 카니 형제의 소유였다)을 소유함으로써 사업을 구체화했다.


폭발적으로 늘어가는 가맹점

이들 형제는 보다 공격적으로 사업을 성장시키기로 결정하고 프랜차이즈 가맹점 수를 점점 더 늘리기 시작했다. 본사가 가맹점에게 어떠한 자금 지원도 하지 않기에 가외의 막대한 초기 자금을 투입하지 않고도 성장할 수 있다는 것이 그들이 판단한 프랜차이즈 사업의 가장 큰 장점이었다. 그리고 피자헛의 성장 및 인지도 상승의 주요 열쇠는 공격적인 마케팅과 혁신적인 광고였다.


경쟁에서의 승리

스티븐 레이먼드가 새로운 CEO로 임명되고 새로운 경영진이 구성된 1984년은 피자헛의 비약적인 성장이 시작되는 시기였다. 1986년, 5천 번째 피자헛 가맹점이 문을 열면서 배달 사업을 시작했는데, 이것은 엄청난 성공을 불러들인 결정적인 전략이었다. 그로부터 몇 년 후인 1990년대 초반에 배달과 포장 판매가 피자헛 매출의 4분의 1을 차지하게 되었으니까 말이다.


한편, 레스토랑 프랜차이즈는 경쟁 우위를 한층 더 강화하기 위해 1990년 모스크바에 가맹점을 오픈하는 등 세계적인 인지도 강화 및 새로운 시장의 진출을 노렸다. 러시아로의 진출은 참치와 고등어, 연어, 양파 등을 토핑으로 얹은 러시아식 피자 모스크바(Moskva)를 탄생시켰다. 해외시장에서 피자헛이 성공을 거둔 비결은 시장에 따른 맞춤식 피자를 개발했다는 데 있다. 홍콩 시장에선 콘드비프가, 캐나다에선 베이컨 토핑이 인기가 있었고 호주 사람들은 카레 피자를 좋아했다.


하지만 경쟁은 끊임없이 계속되었고, 1990년대 초반에 이르러 피자헛은 가장 힘든 시험에 직면해야 했다. 세계적인 햄버거 패스트푸드 프랜차이즈 업체인 맥도날드가 맥피자라는 경쟁 상품을 몇몇 시장에 시험적으로 출시한 데다 배달 서비스를 제공했던 것이다. 경쟁 업체의 이러한 도전에도 피자헛이 타격을 입지 않고 오히려 순이익이 10% 상승한 것은 피자헛의 힘과 피자헛에 대한 고객들의 애착 덕분이었다. 또한 건강식에 대한 고객들의 커져가는 관심도 피자헛에 유리하게 작용했다. 피자헛이 채식을 선호하는 소비자가 많아지는 추세를 반영한 덕분에, 고객들은 피자헛을 기름에 튀긴 패스트푸드의 대안으로 인식했던 것이다(당시 대부분의 패스트푸드 업체가 샐러드 바를 제공하지 않았다).


피자헛의 현재

지난 몇 년간 피자헛은 계속해서 새로운 제품을 출시해왔고 시들해진 매출을 극복하기 위한 사업 확장을 추진해왔다. 그리고 2005년 상류층을 상대로 한 피자헛 이탈리안 비스트로(Pizza Hut Italian Bistro) 매장 50개를 오픈했다. 피자헛 이탈리안 비스트로는 각종 파스타 요리를 제공한다는 점 이외에는 본래의 피자헛과 유사한 메뉴를 선보이고 있다. 그 후 2007년에는 피자헛 이탈리안 비스트로와 상반된 콘셉트인 보다 저렴한 가격의 피자 미아(Pizza Mia)를 출시했다. 탄생 50주년인 2008년에 접어들면서는 파스타 시장에서 강세를 보이며 사업적으로 상향 곡선을 타게 되었다. 한편 이제는 다른 관심사에 주력하고 있는 카니 형제는 여전히 자신들의 첫 사업인 피자헛을 예의 주시하고 있다.



서비스는 불멸의 아이템이다 - 휴식과 체험을 파는 기업

힐튼 호텔(Hilton Hotels)

최고급 고객 서비스와 동의어가 된 힐튼 호텔 코퍼레이션은 전 세계 74개의 국가 및 지역에 걸쳐 3천 개 이상의 호텔과 50만 개 이상의 방을 보유한 특급 호텔 체인으로 성장했다.


우연히 시작된 호텔 사업

미국 남서부 전역(특히 텍사스)의 호텔 시설을 둘러본 콘라드 힐튼은 당시 호텔 업계가 최고급 호텔 체인을 필요로 한다는 확신을 갖게 되었다. 즉, 고객들에게 최소 비용으로 최고의 안락함과 최대의 서비스를 제공하여 만족감을 줄 수 있는 체인 호텔의 필요성을 감지했던 것이다. 이러한 사업 콘셉트를 확고히 마음에 품은 그는 1924년에 자신의 최초 체인 호텔인 달라스 힐튼 호텔 착공에 들어갔다. 첫 번째 성공에 더욱 용기를 얻은 그는 곧바로 또 다른 힐튼 호텔을 짓기 위해 장소를 물색했다. 사업 초창기 독특한 매력을 가진 호텔들을 매입하기로 결정한 그는 전통적인 호텔을 구입해 본연의 최고 모습이 드러나도록 개조하는 데 뜻을 두었다.


새롭게 시작된 사업 확장

1938년 콘라드 힐튼은 텍사스를 벗어난 그의 최초 호텔인 샌프란시스코에 있는 프랜시스 드레이크 호텔을 매입함으로써 국내 및 해외로의 사업 확장의 포문을 열었다. 프랜시스 드레이크 호텔의 매입은 비즈니스 여행객에 초점을 맞춘 고급 호텔로서의 힐튼 브랜드의 서막을 여는 것이기도 했다. 1946년에 힐튼 호텔 코퍼레이션이 형성되었고, 그 이듬해 힐튼 호텔은 뉴욕 증권거래소에 상장한 최초의 호텔 기업이 되었다.


세계로 뻗어나가는 힐튼 호텔의 서비스

1949년 힐튼 호텔은 푸에르토리코의 카리브 힐튼 호텔을 오픈함으로써 세계무대에 첫발을 내디뎠다. 이것은 또한 콘라드 힐튼의 또 다른 분리된 기업인 힐튼 인터내셔널 탄생의 전조이기도 했다. 1964년 힐튼 인터내셔널은 모회사로부터 떨어져나갔고, 힐튼 코퍼레이션과 힐튼 인터내셔널 둘 모두 콘라드의 초기 비전의 성취에 큰 공헌을 하며 매우 성공적으로 운영되었다.


계속되는 혁신과 카지노 사업

힐튼 인터내셔널이 전 세계에 걸쳐 사업을 확장해나가는 동안 힐튼 호텔 코퍼레이션은 콘라드의 비전에 발맞춰 호텔 업계에 지속적인 이노베이션을 일으키며 나아갔다.


콘라드 힐튼의 아들 배론 힐튼은 자금 조달 및 호텔 개발의 개척자였다. 힐튼 호텔을 위한 배론의 경영 전략은 그의 호텔 제국의 급속한 성장을 불러일으켰다. 힐튼은 또한 미국 교외 지역만을 겨냥한 크레스힐(CressHill)이란 새로운 체인 사업도 시작했는데, 크레스힐은 시간이 흐르면서 힐튼 가든 인(Hilton Garden Inn) 체인의 토대를 형성했다. 또한 1977년 힐트론(HILTRON), 1985년 힐튼*넷(Hilton*Net)을 선보이는 등 호텔 업계의 여러 기술적인 혁신을 주도하기도 했다(두 시스템 모두 호텔과 영업 부서, 예약 센터 간의 혁신적인 예약·보고 동기화를 제공한다). 그리고 1995년엔 대형 호텔 체인으로서는 최초로 독립된 홈페이지를 개설함으로써 또 한 번 업계를 주도하기도 했다. 이것으로 고객들은 하루 24시간 어느 때라도 예약을 할 수 있게 되었다. 업계 최초로 아메리칸 익스프레스 파이낸셜 서비스 사와 계약을 맺어 수수료 면제 호텔 신용카드인 힐튼 옵티마 카드를 제공함으로써 계속해서 업계 리더와 이노베이터 역할을 했다.


두 회사, 한 브랜드

세련된 테크놀로지 플랫폼과 더불어 H아너즈 리워드 익스체인지(HHonors Reward Exchange)와 같은 부가적인 고객 프로그램은 고객들에게 힐튼과 힐튼 인터내셔널 간의 상호보완적인 경험을 제공함으로써 힐튼의 능력을 한층 더 돋보이게 했다. 이 프로그램은 고객들로 하여금 포인트를 적립할 수 있게 해줄 뿐만 아니라 그 포인트를 항공사 마일리지로도 전환할 수 있게 해주는 세계 최초의 시스템이었다. 힐튼 호텔 코퍼레이션이 1987년 미국에서 처음으로 시작한 H아너즈 리워드 익스체인지는 힐튼 브랜드의 가치와 위력을 유감없이 뽐내게 해주었을 뿐만 아니라 이노베이션 리더로서의 자리를 더욱 굳건히 해주었다.


힐튼의 현재

2008년 힐튼 그룹은 프리미어 글로벌 호텔로서의 위치를 확립하기 위해 새 경영진을 임명할 것이라고 공표했다. 회사를 성장시키기 위한 이러한 전략을 통해 우리는 힐튼의 미래상 및 힐튼이 추구하는 비전을 어느 정도 엿볼 수 있다. 또한 해외 사업에도 지속적인 노력을 기울일 것이라고 공표했다.


앞으로도 힐튼은 지속적인 해외 사업 확장 및 이노베이션에 초점을 맞출 것으로 보인다. 최근 소유주 및 경영진 교체에도 불구하고 힐튼이 이렇듯 성장과 이노베이션에 끊임없이 초점을 맞추는 것은 힐튼의 기업 목표와 더불어 환대의 빛과 온기를 널리 퍼뜨림으로써 여행객이 제일 먼저 선택하는 호텔을 만들겠다는 힐튼 콘라드의 신념과 철학을 반영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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