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책은 삼성, 포스코, 현대 등 한국을 대표하는 기업들은 물론, 소니와 도요타,포드자동차 등의 기업들의 창업과 성장, 정상에 오르기까지의 과정을 생생히 재현해내고 있다. 또한 단지 화려한 성공 스토리에만 포커스를 맞추고있는 것이 아니라 실패작이란 오명을 딛고 세기의 베스트셀러가 된 포스트잇이나 못 쓰는 천막천에서 미국 문화의 아이콘이 된 리바이스 청바지,"워크맨"이란 기발한 아이디어로 현대인의 라이프스타일을 바꿔버린 소니 사의 이야기 등도 담고 있다. 이 책은 성공을 향해 달려가는 모든 이에게새로운 아이디어와 교훈을 선사할 것이다.
엮은이들은 세상을 바꾸는 것은 기업가들의 도전정신이라고 말한다. 오늘의 성공에 안주하지않고 더 나은 내일을 위해 혁신과 도전을 멈추지 않는 기업가들이 있는 한 비즈니스 명장면은 계속될 것이다.
■ 편자
조영호 -아주대학교와 카이스트를 졸업하고, 프랑스 엑스마르세유제3대학교대학원에서 경영학 박사학위를 받았다. 미국 미시간대학교에서 객원교수를 역임했다.삼성, KT, KTF, SK, 쌍용, 대우, 대림 등에서 기업문화, 조직 활성화, 인력개발에 대한 자문을 맡아왔고, 최근엔 STX그룹과LG인화원을 돕고 있다. 2004년부터는 아주대학교 경영대학원장을 맡아 국내 최고의 경영대학원으로 키우고 있다. 지은 책에는 『사람을 위한조직관리』 『청개구리 기업문화』 등이 있다.
서형도 - 아주대학교 경영학과 박사 과정에서인사조직을 전공하고 있으며, 경영과학연구소 연구원으로 활동하고 있다. 고용 가능성과 경력 관리를 주로 연구하고 있으며, 기업체의 교육훈련프로그램을 설계하고 진행하는 데 재능이 있다.
■ 차례
글머리에
세상을 바꾸는 것은 기업가들의 도전정신이다
PART 1 가슴을 뛰게 하는 개척자들의 이야기
01. 500원 지폐에 새겨진 거북선을 보여주고 - 현대중공업을 일으킨 정주영 회장
02. 다시 지면 그때는끝이다 - 반도체로 세계 1등이 된 삼성전자
03. 라디어도 플라스틱 제품 아닌감 - LG그룹의 창업자 구인회 회장
04.롬멜하우스와 우향우 정신 - 제철보국을 실현한 포스코
05. 프렌차이즈는 아무나 하나 - 프렌차이즈 왕국을 건설한 맥도날드
PART 2 아이디어 하나로 세상을 바꾸다
06. 스타일, 성능, 가격, 세 마리 토끼를잡아라 - 포드자동차의 머스탱
07. 이것을 어디다 쓰나 - 3M의 포스트잇
08. 그게 뭐죠? 로드 왁스에요! - 100년이넘은 바셀린
09. 형편없는 천막을 팔다니 - 청바지를 탄생시킨 리바이스
10. 녹음기능 없는 녹음기를 누가 살까요 - 소니의워크맨
PART 3 혁신은 죽은 기업도 살려낸다
11.무언가 불필요한 일을 하고 있는 거야 - 도요타 생산방식을 창안한 오노 다이이치
12. 그럼, 우리가 2원짜리라는 거야 - 초관리를도입한 삼원정공 양용식 사장
13. 친절은 MK택시에서 배워 - 죽어가던 안동병원을 살린 강보영 이사장
14. HEG cannotsurvive! - 한국전기초자를 회생시킨 서두칠 부회장
15. 바퀴벌레 먹어도 되나요? - 쥐약회사에서 초일류 방제회사가 된 세스코
PART 4 세상을 아름답게 하는 인간 중심의 경영
16. 15초 안에 끝내라 - 고객감동 경영을 창시한 스칸디나비아 항공
17. 처가 식구를 아홉이나 초대한다고? - 금호 제안왕윤생진 전무
18. 사람을 선착순으로 뽑다 보니 - 초정밀 톱니바퀴를 만드는 주켄공업
19. 빗자루 들고 청소부터 하자 -노사분규를 딛고 일어선 대우조선해양
20. 잔업하려면 돈 내고 해! - 일본에서 가장 적게 일하는 미라이공업
PART 5 감동을 창조하는 경영
21. 우리는인도네시아 회사 - 현지화에 성공한 코린도 그룹
22. 장애인은 10퍼센트 할인입니다 - 감동 서비스의 대명사가 된 MK택시
23. 떳떳한 집을 짓자 - 영국 최고의 DIY 회사 비앤큐
참고문헌
가슴을 뛰게 하는 비즈니스 명장면 23
500원 지폐에 새겨진 거북선을 보여주고 - 현대중공업을 일으킨 정주영 회장
배는 그냥 떠다니는 집인데
조선소 건립은 처음부터 쉽지 않았다. 계획 단계에 들어서면서 많은 반대에 부딪쳤다. “기초 기술도 없는데 조선업을 하겠다고요? 그건 매우 위험한 일입니다.” 하지만 정주영의 생각은 달랐다. “조선업이나 건축업이나 원리는 크게 다를 바 없어요. 용접, 절삭, 철근 구조 등 건축업 기술을 조선업에 그대로 응용할 수 있지 않습니까. 게다가 정유 공장의 정유 탱크를 적당히 구부려 선체를 만들면 될 것 아니오.”
이미 정주영의 머릿속에는 국내의 풍부한 노동력을 바탕으로 조선업을 일으키면 성공할 수 있다는 확신이 가득 차 있었으며, 이를 꺾을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정주영은 푸른 동해를 안고 있는 미포리 60만 평 위에 세계 제일의 조선소를 만들겠다고 발표했다. 그렇지만 조선소를 만드는 비용은 경부고속도로 건설비용과 맞먹었으며, 경우에 따라서는 그보다 더 많은 돈이 들 수도 있었다. 나라 안에는 그만한 돈이 없었다. 외국에서 달러를 빌려 와야 했다.
정주영은 차관 도입을 위해 직접 영국으로 갔다. 앞서 직원을 보내 영국 제일의 바클레이스 은행과 교섭을 펼쳤으나 반응이 신통찮았기 때문이다. 그는 당시 현대조선소와 기술제휴를 맺고 있던 A&P 애플 도어 엔지니어링 사로 발길을 돌렸다. 이 회사의 찰스 롱바톰 회장은 바클레이스 은행을 움직일 만큼 영국의 재계에서 영향력이 큰 인물이었다.
“한국에서 배 만드는 기술이 언제부터 발전해왔습니까?” 이 질문에 대한 정주영의 태도는 엉뚱했다. 그는 거북선이 그려진 500원짜리 지폐 한 장을 꺼내 들고, 돈 위에 그려진 도안을 가리키며 말했다. “이것은 1500년경 한국 사람이 만든 철갑선인데, 영국보다 300년이나 앞선 것입니다.” 롱바톰은 지폐 안의 거북선을 뚫어지게 들여다보았다. “그렇게 오래전부터 이처럼 훌륭한 기술이 있었다면 왜 그동안 배를 만들지 않았습니까?” “거북선을 만든 후에는 위정자들이 어리석어 쇄국정책을 펴는 통에 산업화가 늦어지고 지혜에 녹이 났던 것입니다. 하지만 한국인의 지혜와 통찰력은 여전하니 조금 녹슨 부분에 기름칠만 하면 이보다 더 훌륭한 배를 만들 수 있을 것입니다. 이 한국인을 믿어주십시오.”
롱바콤의 입가에 미소가 번졌다. 정주영의 당당한 태도가 그의 마음을 움직인 것이다. 그는 ‘현대라면 조선업을 일으킬 능력이 충분하다’는 추천서를 써서 바클레이스 은행에 보내주었다. 정주영은 바클레이스 은행과의 차관 협의를 순조롭게 시작할 수 있었다. 동시에 바클레이스 은행에서는 한국 현지에 사람을 파견해 현대에서 건설한 각종 건물과 공장 등을 시찰하게 했다. 그들은 ‘현대라면 가능하다’는 긍정적인 결론을 내렸다.
또 한 차례 바클레이스 은행의 심사를 거친 후에, 은행 부총재로부터 ‘점심이나 함께 하자’는 연락이 왔다. 런던의 금융계는 오랜 역사와 전통만큼이나 보수성과 원칙주의를 고수하는 곳이다. 그런 사람들로부터 ‘점심이나 함께 하자’는 연락을 받았으니 정주영은 식은땀이 날 수밖에 없었다. 이튿날 정주영은 은행 관계자들이 모인 점심식사 자리에 참석했다. “좋습니다. 하지만 조건이 있어요. 조선소도 만들고 배도 만들었는데 팔리지 않으면 아무 소용이 없는 것 아니겠습니까? 선박 주문서를 받아오세요. 그럼 바로 결제해 주겠습니다.” 산 너머 산이었다. 만들지도 않은 배를 팔아야 했다.
조선소도 없이 배를 팔아?
이번에는 세계의 선주들을 찾아다녔다. 정주영은 잡초가 우거진 미포리 백사장 사진을 선주들 앞에 내놓았다. “이 백사장에 세계 최대의 조선소를 세울 겁니다. 배를 사세요.” 선주들은 황당한 표정을 지었지만 정주영은 이에 굴하지 않고 미포리의 5만 분의 1 지도를 펴놓고 26만 톤짜리 유조선 설계도까지 내놓았다. “거참, 정신 나간 사람이군. 조선소도 만들지 않고 배를 팔러 다녀?” 선주들이 코웃음을 쳤다. 백사장 사진 한 장을 보고 배를 사려는 사람은 없었다.
정주영은 파리에서 휴가를 보내던 리바노스 회장을 찾아갔다. 그는 세계 해운업계의 거물이면서 그리스 선박왕 오나시스의 처남이었다. 그에게 모든 것을 솔직하게 이야기하고 현대에서 건조한 첫 번째 배를 그에게 바치는 영광을 가지고 싶다고 했다. “좋습니다, 정 회장. 내가 배를 사겠습니다. 26만 톤 대형 유조선 2척을 사지요. 그런데 배가 좀 급하게 필요합니다.” “가능합니다. 2년 안에 만들겠습니다.” “조선소도 만들지 않았다면서요? 조선소만 3년은 걸릴 거요.” 리바노스는 정주영의 말을 반신반의하면서 계약을 했다. 마침내 정주영은 소나무 몇 그루와 초가집 몇 채가 전부인 황량한 바닷가 사진 한 장을 들고 26만 톤급 유조선 2척의 주문서를 받아 쥐게 되었다.
석 달 후, 영국수출신용보증국의 보증으로 바클레이스 은행 등에서 차관을 얻어 마련한 총 투자액 8,000만 달러를 가지고 현대조선소 기공식이 거행되었다. 조선소 건설에 매일 2,200명의 건설 노무자가 투입되었다. “회장님, 도크가 다 완공되었습니다.” “그러면 도크 안으로 블록을 운반해서 배를 조립하자.” “그런데 그걸 움직일 만한 크레인이 없습니다.” “크레인을 준비하려면 얼마나 걸릴 것 같나?” “도크 위에 걸쳐질 골리아스는 높이가 100미터 가깝습니다. 그러니 설치하려면 석 달은 걸릴 겁니다.” “석 달? 안 돼! 그래서는 약속한 날짜를 지킬 수 없어!” 2년 안에 배를 만들려면 잠시라도 지체할 수 없었다. 차선책이 필요했다. 정주영은 깊은 도크의 바닥까지 비탈길을 만든 후 트레일러에 배의 한 부분을 싣고 비탈길을 내려가게 했다. 불도저가 뒤에서 트레일러를 당겨 내려가는 속도를 줄였다. 이 운반 방법은 대성공이었다.
1974년 6월, 정주영은 드디어 26만 톤급 대형 유조선 2척을 건조하는 데 성공했다. 조선소 건설에서 배를 건조하여 진수시키기까지 걸린 시간은 2년 3개월이었다. 전 세계 선박 건조 역사상 유례없는 대기록이었다. 길이 270미터, 높이 27미터의 애틀랜틱 배런 호에 올라탄 정주영의 감회는 남달랐다. 세계를 향해 “우리의 기술과 역량으로 세계적인 종합 조선소를 건립할 것”이라고 선포한 후 조산준령을 넘어 드디어 그 꿈을 현실로 이뤄낸 것이다.
스타일, 성능, 가격, 세 마리 토끼를 잡아라 - 포드자동차의 머스탱
카디날은 실패작입니다
1960년, 당시 포드자동차에서는 카디날이라는 신차를 독일에서 개발하고 있었다. 탁월한 세일즈 실력으로 사업본부장이 된 아이아코카는 진행 상황을 점검하기 위해 독일로 날아갔다. 그리고 마침내 카디날을 보았을 때 그는 크게 실망하고 말았다. 독일에서 돌아오자마자 아이아코카는 헨리 포드 회장을 찾아갔다. “카디날은 실패작입니다. 우리는 젊은 층에게 어필할 수 있는 신차를 만들어야 합니다.”
곧 카디날 생산이 중단되자 아이아코카는 각오를 다지며 그만의 계획을 추진했다. 그는 사내에서 재기발랄하고 창의적인 젊은 인재로 개발팀을 만들었다. 그들은 일주일에 한 번씩 회사에서 약 1킬로미터 떨어진 디어본의 페어레인 호텔에 모여 저녁을 먹고 토론을 했다(이 모임은 후에 ‘페어레인 위원회’로 불렸다). 그렇게 한 까닭은 회사 안에는 그들의 실패를 고대하는 이들로 득실댔기 때문이다. 주위의 따가운 눈총에도 불구하고, 아이아코카는 앞으로 자동차 시장에 지각변동이 올 거라는 판단을 굽히지 않았다. 당시에 미국인의 평균 연령은 빠른 속도로 낮아지고 있었다. 원인은 2차 세계대전 이후에 찾아온 베이비붐이었다. 이 아이들이 커서 10대가 되었고, 차를 구입할 때가 다가오고 있었다. 아이아코카는 앞으로는 이 베이비붐 세대가 자동차 시장의 핵심 고객이 될 거라 확신했다.
새로운 구매층, 새로운 트렌드가 밀려온다
젊은 층에게 어필하려면 3가지 요소가 필요했다. 멋진 스타일, 강력한 성능, 저렴한 가격이 그것이다. 이 3가지 요소를 고루 갖춘 신차를 개발하기란 쉽지 않았다. 본격적인 연구에 착수하면서 아이아코카와 개발팀은 변화하는 시장에 관해 새로운 사실을 알게 되었다. 첫째, 한 집에서 두 대 이상 차를 갖는 가족이 늘어나고 있으며, 첫 번째 차에 비해 두 번째 차는 스포티한 느낌의 소형차를 선호했다. 둘째, 여성들이 자동차 판매량을 늘리고 있었다. 여성들은 다루기 쉬운 소형차를 주로 선택했다. 독신자들 역시 새로운 구매층이었는데, 이들은 기혼자들에 비해 스포티한 소형차를 선택했다. 셋째, 앞으로 몇 년 동안 미국인들은 이전의 어떤 때보다 수송과 오락 수단에 소비할 많은 돈을 갖고 있었다.
토론이 거듭될수록 그들의 아이디어는 점점 더 굳어졌다. ‘앞으로 나올 차는 스포티하며 운전하기 간편해야 한다. 네 사람이 탈 수 있으면서 트렁크 공간은 넉넉해야 한다. 금요일 밤에는 컨트리클럽을 방문하고, 토요일에는 다른 차와 스피드 시합을 벌일 수 있으며, 일요일에는 교회로 몰고 갈 수 있는 차.’ 이러한 조건들을 충족시키기 위해 아이아코카와 개발팀은 같은 제품의 몇 가지 다른 모델을 만들기보다는 다용도의 목적을 가진 한 가지 기본 차종을 개발하기로 의견을 모았다.
문제는 ‘과연 그런 차를 쉽게 만들 수 있느냐’였다. 신차 한 대를 제작하려면 천문학적인 자금이 소요된다. 아이아코카는 기존의 부품들을 신차에도 사용해 경비를 줄이기로 했다. 한 가지 중요한 결정이 더 있었다. 아직 디자인을 정하지 못한 것이다. 몇 달간 디자이너들이 제안한 모델은 18가지에 이르렀다. 시간이 촉박해지자 그는 최고의 디자이너 3명을 불러 전례 없는 공개경쟁을 결정했다. 2주일간 불철주야 작업한 끝에 7가지 모델이 제출되었다. 그 중 1등은 데이브 애쉬의 작품이었다. 얼핏 고양이같이 생긴 그 모델은 처음에는 ‘쿠가(Cougar)’라고 불리다가 얼마 뒤 ‘머스탱(Mustang)’으로 이름이 확정되었다.
진열된 차를 보다가 교통사고까지
1964년 3월 9일, 디자인이 정해진 지 571일만에 최초의 머스탱이 공장에서 굴러 나왔다. 머스탱의 출시일인 4월 17일, 전국 각지의 포드 대리점으로 고객들이 구름같이 몰려들었다. 시카고에서는 바깥에 구경꾼이 너무 많아 쇼룸을 걸어 잠글 수밖에 없었다. 시애틀에서는 지나가던 트럭 운전수가 진열해놓은 머스탱에 매혹되어 운전대를 놓치는 통에 진열창을 뚫고 들어오는 사고도 발생했다. 발매 첫 주에만 400만 명이 머스탱을 구경하기 위해 포드 대리점을 방문했다.
언론에서도 흥분하기는 마찬가지였다. 「타임」은 머스탱에 대해 이렇게 평가했다. “아이아코카는 신차 이상의 것을 만들어냈다. 긴 후드와 짧은 뒷지붕, 페라리적인 감각, 입을 딱 벌린 공기 흡입구. 머스탱은 미국인들이 남몰래 선망해온 유럽 스포츠카의 느낌을 미국적 감각으로 훌륭히 소화해냈다. 그러면서도 가격을 알맞게 책정했으며, 기호품을 다양하게 부착할 수 있도록 했다. 머스탱은 미국 자동차 구매층의 3분의 2를 흡수할 수 있을 것이다.”
머스탱이 팔리는 만큼 옵션 판매로 얻는 수익도 늘어났다. 구매 고객의 80퍼센트가 라디오를 원했고, 70퍼센트가 8기통 엔진을 원했으며, 50퍼센트가 자동변속기를 추가로 구입했다. 특별 옵션인 회전 속도계와 시계를 선택하는 고객도 10퍼센트에 이르렀다. 고객들은 2,368달러의 기본 가격에 평균 1,000달러를 더 썼다.
출시되고 2년간 머스탱이 올린 순이익은 11억 달러였다. 지금으로 봐도 엄청난 기록이었다. 첫해가 지나기 전에 수백 개의 머스탱 클럽이 생겨났으며 머스탱 선글라스, 열쇠고리, 모자 그리고 어린이들을 위한 장난감 머스탱이 나왔다. 누군가는 빵 가게 창문에 이런 쪽지가 붙어 있는 것을 보았다고 했다. "우리 가게의 핫케이크는 머스탱처럼 팔립니다!"
그럼, 우리가 2원짜리라는 거야 - 초관리를 도입한 삼원정공 양용식 사장
우리가 무슨 초등학생이냐, 정리정돈이게
1979년, 삼원정공의 양용식 사장이 생산계장이었을 때 문학무 사장과 일본 공장을 견학할 기회가 있었다. 기술력이나 생산성 어느 것에도 아쉬울 것이 없는 그 공장의 한쪽 벽면에는 "죽을힘을 다해 기술에 도전하자"라고 큼지막하게 쓰여 있었다. 그는 몸이 오싹하는 충격을 받았다. “이미 놀랄 만한 기술력을 갖춘 기업이 죽을힘을 다해 기술에 도전하다니! 기술력도 떨어지고, 생산성도 그리 높지 않은 우리가 ‘죽을힘’은커녕 ‘최선’을 다하지도 못하고 있는데, 일본의 기업이 ‘죽을힘’을 다하다니!” 이 경험은 얼마 뒤 5S 운동을 펼치는 계기가 되었다.
5S 운동은 1970년대 일본의 도요타자동차에서 시작되었다. 당시 일본에서는 오류와 결함, 작업장 재해의 원인이 되는 낭비를 없애려는 움직임이 일어났는데 그것이 5S 운동이었다. 5S는 세이리(정리하기), 세이돈(정돈하기), 세이소(청소하기), 세이게츠(청결하기), 시츠게(예절 갖추기)를 뜻했다. 5S 운동을 시작으로 ‘초관리 운동’, ‘사력 0.01 운동’ 등 양용식의 혁신 운동은 오늘날까지 계속되고 있지만, 5S 운동을 처음 도입하려던 시기에는 동료들의 비협조와 부하들의 기피, 상사의 책망 등이 겹쳐 결국 1, 2차 계획은 실패로 끝나고 말았다. 그렇지만 양용식은 ‘이번에 실패하면 회사를 떠나야 한다’는 의지로 3차 계획을 추진했다. 양용식은 처음 6개월간 ‘나를 따르라’를 외치며 단호한 모습을 보였다. 이 과정에서 중도하차하는 직원들이 생겨났다. 그러나 비협조적인 사람은 직위고하를 막론하고 정리한다는 방침 아래 강하게 밀어붙였다. 양용식은 정신교육을 강화해 직원들의 행동이 일치될 때까지 실시했다. 이런 과정을 반복적으로 실시해 어느 정도 5S 운동이 정착할 수 있었다.
단 ‘1초’라도 아껴라
5S 운동이 어느 정도 수준에 이르렀을 때 양용식에게는 남모르는 고민이 생겼다. 5S 운동은 일본에서 들여온 것이라 뭔가 이질적이었다. 그는 우리 문화에 맞는 독창적인 아이디어가 필요하다고 판단했다. 그런 그에게 번뜩이는 아이디어가 떠올랐다. 해답의 실마리는 ‘시간’이었다. “모든 것을 시간으로 환산해 보자!” 초관리 운동은 한 땀 한 땀 쉬지 않고 흘러가는 초침의 원리를 적용한 구체적인 시간 관리법이었다. 1년 동안 직장에서 일하는 시간을 초로 환산하면 78만 초였다. 연봉으로 따졌을 때 임원에겐 3원, 평직원에겐 2원 꼴로 임금이 지급되는 셈이니 업무 시간에 담배를 한 대 피우면 회사 돈 900원, 커피 한 잔을 마시는 데는 1,800원이 낭비된다는 계산이 나왔다.
초관리 운동의 성과가 서서히 드러나자 예상 외로 많은 변화가 나타났다. 스스로가 시간을 아끼고 효율적으로 일을 하니까 쓸데없이 낭비하는 시간이 절약되어 잔업이 차츰 줄어들었다. 이전까지는 잔업으로도 도저히 생산량을 맞출 수가 없어 밥 먹듯이 연장근무를 했는데 이제는 그럴 필요가 없어진 것이다. 자연히 피곤에서 헤어난 직원들은 활기를 되찾기 시작했다. 잔업과 연장근무가 줄자 전력비 등 각종 경비도 크게 절감되었다.
더 나아가 직원들의 제안을 따라 자동차, 무인화된 시설까지 그 효과가 뒷받침되니까 근무시간 중에도 여유가 생겼다. 내친 김에 토요일 격주 휴무제를 실시하게 되었다. 토요일 휴무는 중소기업에게 꿈같은 일이었다. 그렇다면 임금까지 줄었을까? 종전까지는 연장근무 등을 감안해 주당 54시간으로 임금이 계산되었지만 이제 근무시간이 42.5시간으로 줄어들었으니 계산상으로는 임금이 적어지게 된다. 이렇게 되면 종업원들이 회사를 믿고 일할 수 없으며, 또한 초관리 운동 본래의 뜻과도 어긋난다. 그래서 임금 인상과는 별도로 주당 54시간에 해당하는 임금을 계속 지급했다. 종업원들 스스로 노력해서 찾은 몫이므로 그들에게 되돌렸다.
납품단가를 5퍼센트나 내려도
1992년, 삼원정공의 매출은 88억 원이었다. 약 4퍼센트의 이익이 발생해 당기 순이익은 3억 5,000만 원 정도였다. 대기업이 보자면 하품이 날 정도로 적은 액수겠지만 삼원정공으로서는 대단히 값진 성과였다. 그런데 거래업체들이 납품단가를 4~7퍼센트나 낮춰줄 것을 요구해왔다. 4퍼센트를 낮춘다면 삼원정공의 이익은 아예 없어지는 것이고, 7퍼센트를 낮춘다면 오히려 적자가 될 형편이었다. 직원들 임금도 올려줘야 하고 원재료와 소모품 값도 올라 추가 적자 요인이 발생할 것이 뻔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삼원정공은 5퍼센트 남짓 납품단가를 인하했다. 되도록 거래업체들의 요구를 따라주는 게 마땅하며 결코 불가능한 일은 아니라고 판단했기 때문이다. 납품 단가를 내리면 반드시 적자가 발생할 것이라는 예측은 수치상의 논리일 뿐 현실적으로 그렇지 않을 가능성도 곳곳에서 발견됐다.
이때부터 제3의 운동이 시작되었다. ‘눈에 보이는 낭비를 1퍼센트까지라도 줄이자’는 ‘사력 0.01 운동’은 내부의 노력만으로 이익 실현을 가능하게 했고, 외환위기를 넘어 2000년대까지 회사의 성장을 이끄는 원동력이 되었다. ‘티끌 모아 태산이다.’ ‘시간은 금이다.’ 이 평범한 진리로 차곡차곡 쌓아 만든 삼원정공의 성공 신화는 그들의 운동이 멈추지 않는 한 쉽게 흔들리지 않을 것 같다.
처가 식구를 아홉이나 초대한다고? - 금호 제안왕 윤생진 전무
최고 불량 부서를 맡아
금호타이어 곡성공장에서 반장으로 일하던 윤생진은 갑작스럽게 불량이 가장 많은 반을 맡게 되었다. 보통 감독자들이 자기 반을 맡으면 1년은 근무하다가 보직을 변경하는 것이 관례였는데 그만은 예외였다. 2개월 또는 3개월, 어떤 대는 1개월에 한 번씩 그에게는 새로운 반이 배정되었다. 부서장은 무엇을 보고 그에게 그런 기대를 한 것일까? 현장 사원관리에 대한 윤생진의 철학은 남달랐다. 그는 부하사원들을 항상 인간적으로 대했으며, 칭찬과 온정을 아끼지 않았고, 어떻게든 잘못된 것은 반드시 지적을 해서 같은 실수를 되풀이하지 않도록 이끌어주었다.
그의 머릿속에는 항상 ‘어떻게 하면 불량을 줄이고 생산성을 높이며 재미있는 근무 여건을 만들까’ 하는 궁리가 떠나지 않았다. 그러다 보니 자연히 일 또한 재미가 있었다. 관리 감독자는 부하직원들과 호흡을 같이하면서 실적을 올려야 평가받는다. 그렇기 때문에 자기가 열심히 하는 것도 중요하지만 부하직원들이 열심히 일할 수 있는 분위기를 자연스럽게 만들어내는 것이 더욱 중요했다. 윤생진은 현장에서 그런 사실들을 언제나 몸소 실천했다. 그러다 보니 부하직원들은 언제나 그를 믿고 따랐고, 아무리 불량이 많던 반도 그가 맡기만 하면 불량률이 뚝 떨어졌다.
장인장모 모셔 오면 특별선물
맡고 있던 반의 인원이 42명이었는데 한번은 윤생진이 이런 제안을 했다. “올 송년회는 우리 직원만 하는 것이 아니고 가족끼리 모시는 것이 어떨까! 아내는 물론이고 부모, 장인, 장모까지 포함하자구. 단, 행사 경비의 50퍼센트는 내가 지불하지.” 윤생진의 제안은 한마디로 폭탄선언이었다. 다음날 그는 또 한 가지 제안을 했다. 부모, 장인, 장모를 모시고 오는 사람은 특별선물을 지급하고, 행사에 참석한 모든 사람 중에서 행운권을 추첨해서 푸짐한 상품을 선물하겠다고 한 것이다. 조장을 시켜서 송년회에 참석하는 가족 수를 신청 받았더니 무려 200여 명에 이르렀다. 윤생진은 그때서야 겁이 덜컥 났다. 많아봤자 80~100명 정도일 거라고 예상했는데 인원이 훨씬 초과된 것이다. 사정이야 어떻든 그날부터 현장의 분위기는 하늘을 찌를 듯했고, 생산성을 말할 것도 없이 높아졌다.
행사 준비를 위해 업무 분담을 했는데, 가장 중요한 문제는 장소였다. 200명이 들어가서 송년회를 할 수 있는 장소는 그리 흔하지 않았다. 고심한 끝에 한 가지 아이디어가 떠올랐다. ‘예식장은 밤이면 빈 공간이 된다.’ 그는 예식장을 예약해서 장소 문제를 해결하고 경비를 줄이기 위해 손수 선물을 만들었다. 이때 반원들이 합심해서 그를 도왔다. 반원들의 땀과 정성이 들어 있는 그때의 기념품을 10년이 지난 지금도 간직하는 사원이 있다.
부모님의 반대를 무릅쓰고 결혼한지라
이렇게 시작한 송년회는 이후 몇 년간 해마다 계속되었다. 한번은 어느 직원이 가족을 무려 9명이나 데려 왔다. 그런데 알고 보니 그 직원이 데려온 가족은 전부 처갓집 식구들뿐이었다. 장인, 장모, 아내의 고모와 이동 등이었다. 제한 인원이 4명인데 어떻게 9명을 데려 왔을까 의아했다. 가족이 합창곡을 부르는 내내 장모님이 눈물을 흘렸다. 알고 보니 그 직원은 가난한 집안의 장남이었는데 경제적으로 풍요롭게 자란 여자를 만나 결혼했고, 그 과정에서 장인장모의 반대가 매우 컸다고 한다. 그래서 그는 언제나 처갓집에서 미안한 마음을 안고 있었다. 그런데 이번에 기회를 만났고, 처갓집 식구들에게 뭔가 보여 주고 싶었다는 것이다.
윤생진을 비롯해 그 자리에 있던 모든 동료들은 그의 사연을 듣고 크게 감동했다. 그들은 그를 스타로 만들기 위해 갖가지 노력을 다했고, 마침내 작전은 대성공을 거두어 처갓집에서도 그를 대하는 태도가 확 바뀌었다고 한다. 며칠 후에 그 직원의 아내에게서 카드가 왔다. 남편하고 살면서 이번처럼 뿌듯했던 일은 처음이며 친정 식구들이 얼마나 칭찬을 하던지 집에 와서 한없이 울었다는 내용이었다. 윤생진은 그 카드를 받고 감독자가 된 이후에 가장 큰 보람과 자긍심을 느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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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는 이렇게 현장 직원들을 정과 사랑을 대했고 열심히 일할 수 있는 분위기를 만들기 위해 항상 연구하고 노력했다. 언제나 작은 부분도 소홀히 넘기지 않으니 현장 직원들이 그에게 감동받고 따를 수밖에 없었다. 리더십은 사소한 관찰과 작은 배려에서 나온다. 윤생진은 그 교훈을 이미 현장에서 실천하고 있었던 것이다.
(본 정보는 도서의 일부 내용으로만 구성되어 있으며, 보다 많은 정보와 지식은 반드시 책을 참조하셔야 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