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책 소개
글로벌 시대의 혁신 리더, 시진핑
《시진핑 리더십》은 모두 5부로 구성되어 있다. 1부는 중국의 역사, 2부는 중국 최고 지도자들의 리더십, 3부는 시진핑과 중국, 4부는 대륙의 리더 시진핑, 5부는 시진핑 리더십을 다루고 있다. 이 책에서 저자는 시진핑 리더십을 열네 가지로 분석해 놓았다. 최근 한반도를 둘러싼 정세가 급변하고 있다. 특히 사드 문제로 한반도를 둘러싼 정세는 그야말로 한치 앞을 보기 힘들 지경이다. 이러한 때 시진핑의 중국과 시진핑의 리더십을 다룬 이 책은 국제적 역학 관계에서 우리가 나아갈 방향을 일러준다. 상대를 알아야 우리의 선택 방향을 설정할 수 있듯이 이 책을 통해 시진핑과 그의 리더십을 파악한다면 헤쳐 나갈 길이 보일 것이다.
■ 저자 이창호
저자 이창호는 대한명인(연설학), 대한민국 신지식인(교육학)이며 이창호스피치리더십연구소 대표로 있다. 스피치학 분야의 최고 전문가로 연간 300회 이상의 강의, 강연을 통해 개인의 고유 브랜드인 ‘이창호 스피치’를 구축해 왔다. 국정 교과서 초등학교 6학년 읽기 도서 및 고등학교 국어(下) 교사용 지도서 등에 글이 수록되었다. 다양한 칼럼과 MBC-TV 인생은 아름다워, KBS 라디오의 고정 방송 활동을 비롯해 한중연합일보 발행인, 중국 헤이룽장성 목릉시 한국 특별 고문, 중국 성원국제 명예 회장, 한국청소년봉사단연맹 부총재을 역임하고 있다. 지은 책으로『안중근 평전』 『이순신 리더십』 등 30여 권이 있고, 자원 봉사 지도로 대통령 표창, 나눔 봉사로 대한적십자 총재 대상을 받은 바 있다.
■ 차례
머리말
1장. 중국의 역사
· 개괄
1. 고대에서 근대
2. 청말 이후 현대사
2장. 중국 최고 지도자들의 리더십
· 개괄
1. 마오쩌둥
2. 덩샤오핑
3. 장쩌민
4. 후진타오
3장. 시진핑과 중국
· 개괄
1. 시진핑의 등장
2. 시진핑의 중국의 꿈
3. 시진핑의 일대일로
4. 시진핑의 리더십과 중국의 미래
5. 한중 우호와 동반자 정신
4장. 대륙의 리더 시진핑
· 개괄
1. 혁명군의 아들로 태어나다
2. 량자허에서 리더의 기본기를 익히다
3. 정딩현에서 기층 민중 리더가 되다
4. 샤먼, 닝더, 푸저우의 리더가 되다
5. 푸저우시의 리더가 되다
6. 푸젠성의 리더로 발돋움하다
7. 중국의 리더, 글로벌 리더로 성장하다
5장. 시진핑 리더십
· 개괄
1. 섬기는 리더십
2. 원칙의 리더십
3. 공평과 정의 리더십
4. 함께하는 리더
5. 환경의 리더십
6. 도덕적 리더십
7. 비전의 리더십
8. 긍정적 신념의 리더십
9. 국방안보의 리더십
10. 변혁의 리더십
11. 경제개발 리더십
12. 협치의 리더십
13. 창의적 리더십
14. 공동체 리더십
·참고 문헌
시진핑 리더십
시진핑과 중국
시진핑의 등장
시진핑 삶의 궤적
시진핑은 1953년 6월 15일 중국 산시성 푸핑에서 태어났다. 1962년 펑더화이가 실각된 영향으로 시중쉰이 산시성으로 좌천된 이후, 어린 시진핑은 산시성의 시골 농업 공동체에서 7년 동안 육체노동을 했다. 1975년 시중쉰이 복권되었고, 이와 함께 그의 가족은 베이징으로 돌아왔다. 이후 시진핑은 칭화대 공정화학과를 졸업하고 같은 대학에서 법학박사 학위를 받았다.
2000년 푸젠성 성장이 된 이후 저장성 서기 등 동부 연안 지방에서 지도자 경력을 쌓아온 시진핑이 중앙 무대에서 부각된 것은 2007년 봄 상하이시 당서기였던 천량위가 비리 사건으로 낙마한 이후였다. 상하이의 당서기로서 그는 도시의 재정적 안정과 재건을 정확히 홍보하는 데 많은 관심을 두었다. 그리고 2007년 10월 중국 공산당 당 중앙위원회 정치국을 대표하는 9명의 상무위원 가운데 한 명으로 선출되었다. 이후 시진핑은 후진타오 주석의 후임자가 되었다. 그의 지위는 2008년 3월 중화인민공화국의 국가 부주석으로 선출되면서 더욱 확고해졌다. 2010년 10월에는 중국공산당 중앙군사위원회의 부주석으로 임명되었다.
중국, 시진핑을 선택하다
2007년에 전 국가 부주석 쩡칭홍은 시진핑을 차기 총서기로 밀면서 모든 정파가 받아들일 수 있는 인물로 평가했다. 이는 당시 그리고 현재 중국 사회가 요구하는 정치적 자질이 무엇인지를 시사한다. 모든 정파가 받아들일 수 있는 인물이란 스스로 부단한 수양과 단련을 거쳐야 하고, 실제로 흔하지도 않다. 이 요건은 시대의 맥을 정확히 짚고 있다는 것을 의미한다.
시진핑은 권력을 쟁취했다기보다 권력을 부여받았다. 그가 권력을 부여받기 위해 엄청난 노력을 해왔음은 두말할 필요가 없다. 자신의 의견 표출을 줄이고 상대방의 의견을 최대한 듣는 자세를 유지했으며, 상대방을 후하게 대하여 덕을 쌓았다. 파벌을 만들지 않았고, 말실수를 최대한 줄여 구설수에 오르는 일을 원천봉쇄했다. 그로 인해 중국은 시진핑의 정치 인생을 높이 평가하고 차기 후계자 자리를 약속한 것이다.
시진핑의 중국의 꿈
중국의 꿈 시작되다
2012년 11월 공식적으로 출범한 시진핑 정부는 중국의 꿈을 대대적으로 알리기 시작했다. 그는 "건국 100주년인 2049년에 국가 부강/민족 부흥/인민 행복에 주안을 둔 중화민족의 위대한 부흥이 가장 위대한 중국의 꿈"임을 천명했다.
중국의 꿈과 2단계 시간표
시진핑은 중국의 꿈을 실현하는 2단계 시간표를 제시했다.
1단계 목표 지점은 시진핑의 2기 임기 10년(2022년)이 끝나기 전인 2021년, 중국공산당 창건 100주년이 되는 해다. 그 해는 제16차 당 대회(2002년 11월)에서 결정한 전면적 소강(小康, 의식주가 해결된 중등 생활 이상 수준) 사회가 실현되는 시점으로, 중국이 매년 7퍼센트 이상 성장한다면 1인당 GDP의 2010년 대비 배증 목표를 달성하고, GDP 총량이 미국을 추월할 것으로 예상되는 시점이기도 하다.
2단계는 중국 건국 100주년 시점인 2049년이다. 태평성대나 선진 생활 수준을 의미하는 다퉁 사회에 진입하는 것으로, 시진핑 이후 지도부가 달성해야 할 목표다.
시진핑의 리더십과 중국의 미래
시진핑 리더십의 세 가지 특징
시진핑은 세 가지 요소가 결합된 지도력을 보여 주는 복합형 지도자라고 할 수 있다. 먼저, 정치적으로 시진핑은 독실한 사회주의자다. 공산당의 영도를 굳건히 믿는다. 공산당이 조국을 구원했고, 공산당만이 중국을 세계 강대국으로 발전시킬 수 있다고 생각한다. 또한 시진핑은 경제적으로는 시장주의자다. 시진핑은 아버지의 영향을 받아 젊은 시절부터 개혁개방정책을 적극 지지했다. 아울러 시진핑은 외교/안보 면에서는 실용주의 민족주의자다. 그는 군사력 강화를 강조한다. 그리고 주권과 영토 문제 등 중국의 핵심 이익과 관련된 문제에 대해서는 단호한 모습을 보이고 있다. 동시에 미국과 일본 등 기존 강대국에 맞서 결코 굴복하지 않는 당당한 외교를 지향한다. 마지막으로 그는 중국의 국익을 위해 융통성 있고 탄력성 있는 실리 외교를 추진할 수 있다.
시진핑과 중국의 미래
시진핑 정부는 공산당 18차 당대회를 통해 향후 10년 동안 중국이 추진할 국가 발전 전략과 주요 방침을 결정했다. 이는 후진타오 정부의 전략을 계승, 발전한 것이다. 중국의 국가 발전 전략이 20년 동안 일관되게 추진된다는 점은 매우 높이 살 만하다. 이는 몇 가지 이점이 있기 때문이다.
우선, 장기적인 정책의 수립과 집행이 가능하고 이를 통해 국가 정책의 연속성과 일관성을 보장할 수 있다. 또한, 국가 정책의 연속성과 일관성이 보장되기 때문에 국내외로 높은 정책의 신뢰성을 확보할 수 있다.
정책의 일관성과 연속성이 보장된다고 해서 그것이 제대로 집행된다는 보장은 없다. 시진핑 정부가 당면한 현실은 엄준하고 추진해야 하는 정책도 그렇게 쉽지 않다. 특히 다음 세 가지 과제는 중요하면서 동시에 매우 어렵다. 첫째는 경제 발전 양식을 양적 성장에서 질적 성장으로 전환하는 과제다. 둘째는 지역 격차, 도농 격차, 민족 격차, 계층 격차 등 다양한 사회적 불평등을 해소하는 과제다. 셋째는 자연 환경을 보호하고 에너지 소비를 줄이는 과제다. 시진핑 총서기가 말하는 중국의 꿈이 실현될지 여부는 이 세 가지 과제를 얼마나 잘 해결하느냐에 달려 있다.
대륙의 리더 시진핑
량자허에서 리더의 기본기를 익히다
하방하다
시진핑은 산시성에서 혁명 원로로 부총리였던 시중쉰의 아들로 태어나서 어렸을 때는 부러운 것 없이 자랐다. 그러나 1962년 륜즈단 사건에서 시중쉰이 펑더화이를 지지하다 반당 집단으로 몰려 오지로 처분되자 1969년 열여섯 나이에 하방당해 간 곳이 량자허라는 마을이었다. 시진핑이 량자허까지 간 이유는 마오쩌둥이 1968년 12월 "지식 청년들은 농촌으로 가서 가난한 농촌 속에서 재교육을 받으라"고 지시했기 때문이다. 시진핑을 포함한 베이징 청년 학생 열다섯 명이 배당받아 간 량자허라는 시골 마을은 옥수수국수밖에 먹을 것이 없는 깡촌이었다. 시진핑은 그곳의 산비탈에 만들어진 토굴에서 7년간 갖은 고생을 하며 청소년 시절을 보내야 했다.
량자허의 촌장이 되다
시진핑은 반동의 자식이라는 굴레에 좌절하지 않았다. 그는 번번이 거절당하면서도 공산당의 인재 양성을 위한 청년 조직 공산주의청년단에 가입하기 위해 끊임없이 신청서를 냈다. 여덟 번 만에 공청단 입단 승인을 받은 그는 공산당 입당에도 성공했으며, 이어 지역 생산대의 책임자인 서기에 임명되었다. 이루 1974년에는 량자허의 촌장이 되었다. 당시 시진핑의 나이 스물두 살이었다.
정딩현에서 기층 민중 리더가 되다
정딩현을 살리다
정딩현으로 부임한 시진핑은 매우 검소하게 생활했다. 항상 군복을 입고 다녔으며 마을 시찰을 나갈 때는 현의 다른 간부들처럼 자전거를 타고 다녔다. 식사도 농가에서 얻어먹거나 관공서 구내식당을 이용했다. 가끔 마을 시찰에서 늦게 돌아와 구내식당이 문을 닫았을 때는 숙소에서 라면으로 끼니를 때웠다. 또한 시진핑은 투철한 업무 태도와 추진력으로 정딩현 사람들에게 깊은 인상을 남겼다.
샤먼, 닝더, 푸저우의 리더가 되다
샤먼에 부임하다
1985년 6월 1일 시진핑은 32세 생일에 샤먼으로 부임했다. 일부 평론가들은 시진핑이 아버지와는 다르게 정계 진출이 매우 순조로웠다고 평가했다. 별다른 풍파를 겪지 않고 2~3년마다 한 단계씩 진급했기 때문이다.
시진핑은 샤먼시로 부임한 지 1년 만에 부시장에서 상무부시장으로 승진해 시의 모든 업무를 맡게 되었다. 그는 샤먼에서 근무하는 동안 누구보다 열심히 업무에 몰두하면서 지극히 검소한 생활을 했다. 하지만 그가 샤먼시로 부임했을 당시 그는 처음으로 대도시 행정 관리를 책임지게 된 데다 경제 특구 업무 경험은 전혀 없는 상태였다. 샤먼시에서 보낸 3년 동안 그는 숱한 시행착오와 실패를 겪으며 경험을 쌓아 갔다.
닝더에서 청백 리더가 되다
샤먼에서 3년간 근무하던 시진핑은 푸젠성의 낙후 지역인 닝더로 전근하게 되었다. 시중쉰이 후야오방의 낙마로 정치적 입지가 크게 약해지면서 당내에서 유명무실한 존재로 냉대를 받고 있을 때 시진핑은 닝더로 가게 되었으나, 그것은 오히려 시진핑의 탁월한 업무 능력을 높이 평가받는 기회가 되었다.
1988년부터 1990년까지 시진핑은 닝더 지역위원회 서기로 있으면서 제대로 갖추어져 있지 않은 사회 기초 설비와 경제적 기반이 취약한 단점을 보강하는 데 주력했다. 그리하여 마침내 닝더는 양적/질적 변화를 통해 새로운 도시로 거듭났다.
푸저우시의 리더가 되다
푸저우시, 개혁적 리더를 맞다
1990년 중국공산당 중앙조직부와 푸젠성 위원회 조직부는 수차례에 걸친 논의 끝에 시진핑을 푸저우시 워원회 서기 겸 푸저우시 인민대표상무위원회 주임으로 임명했다. 그리고 같은 해에 시진핑은 푸젠성 위원회 상무위원으로 진급했다. 이로써 시진핑은 중국 정계에서 가장 젊은 중간급 간부 가운데 한 명이 되었다.
푸젠성의 리더로 발돋음하다
푸젠성 성장이 되다
푸젠성 위원회 부서기로 승진한 뒤 시진핑은 대만과의 협력 관계를 추진하면서 삼통을 위한 포석을 깔아 당 중앙 고위층의 주목을 받았다. 또 서민들의 생활을 개선하기 위해 농업 발전과 탈빈곤정책에 심혈을 기울이면서 많은 이들로부터 칭송받았다.
중국의 리더, 글로벌 리더로 성장하다
베이징의 주인이 되다
2000년 중국에서는 정치권을 뒤흔드는 격변이 일어났다. 상하이시 당서기 천량위가 부패 혐의로 실각한 것이다. 그의 후임을 두고서도 장쩌민 전 주석이 이끄는 상하이방과 후진타오 당시 주석이 이끄는 공청단이 대결 양상을 보였다. 그러나 힘겨루기는 의외로 싱겁게 끝났다. 모든 사람의 예상을 깨고 두 계파에 속하지 않았던 시진핑이 발탁된 것이다. 시진핑에게 불어온 훈풍은 여기서 그치지 않았다. 천량위 사건 뒤처리와 상하이 도처에 뿌리박은 부패 문제를 척결하는 데 힘을 쏟은 시진핑은 7개월 뒤인 제17차 전국대표대회에서 파란을 일으켰다. 2008년 3월 중국공산당 최고위직인 정치국 상무위원 자리를 꿰찼던 것이다.
시진핑이 최고 지도자로 뽑힌 배경에는 중국 권력지형의 힘이 크게 작용했다는 분석이 많다. 양대 계파에 속하지 않았던 시진핑이 대안이 되었고, 누구도 시진핑을 반대하지 않았다는 것이다. 그의 청렴함과 폭넓은 인간관계도 크게 작용했다.
중국의 리더가 되다
시진핑 중국 국가주석은 외국 기업에 중국 시장 문호를 활짝 열어 세계화의 첨병 역할을 하겠다고 뜻을 밝히며, "중국은 외부 세계를 향해 문을 닫지 않고 오히려 더욱 넓게 열어 경제 세계화에 적극적으로 참여하겠다"고 약속하면서 "폐쇄적이고 배타적인 협정은 올바른 선택이 아니다"라고 강조했다.
아시아/태평양의 리더가 되다
시진핑 중국 국가주석은 대내적으로는 중국의 꿈을 제시하면서 인민통합을 시도해 온 데 이어 아시아태평양경제협력체 회의에서는 아시아/태평양의 꿈을 화두로 던졌다. 이는 막강한 경제력을 토대로 아태 지역의 경제적 맏형 역할을 하겠다는 의지와 자신감을 드러낸 것으로 풀이된다.
시진핑 리더십
섬기는 리더십
인민이 동경하는 행복한 생활을 추구하라
시진핑은 인민들의 삶을 속속들이 알아채고 그들의 행복한 삶을 추구하는 데 무엇보다 관심이 많았다.
오직 인민만 섬겨라
또한 시진핑은 "마음으로 인민을 섬기지 않는 사람은 관료가 되면 안 된다"라고 말했다. 그리고 인민을 위해 일하지 않는 사람이라면, 그를 굳이 관료의 자리에 앉힐 필요가 없다고 강조했다.
원칙의 리더십
법치국가, 법치정부, 법치사회를 구현하자
시진핑은 중국이 발전하려면 법 질서 확립이 중요하다고 판단했다. 그래서 법치를 강조했다.
정해진 법은 지켜라
합리적이고 공정한 법을 만들어 엄격하게 집행하는 것은 법치국가 건설의 성공을 판단하는 중요한 기준이요, 법이 지켜지기 위한 핵심 조건이다. 당이 법을 지키고, 정부가 법을 지켜야 한다. 또한 관료는 법치사고를 강화해 법치의 궤도 위에서 일하고, 인민도 문제가 생겼을 대 법에서 근거를 찾아 해결해야 한다. 그래야만 좋은 법치 환경이 만들어지고, 법치국가를 위한 튼튼한 기초가 만들어진다. 시진핑도 그것을 알고 관료사회에 끊임없이 법치 환경의 중요성을 외쳤다.
공평과 정의의 리더십
공평과 정의를 촉진하여 인민을 행복하게 하자
시진핑은 공평과 정의를 중요시했다. 이를 위해 그는 법치라는 것을 기본 틀로 두고자 했다. 그리고 그것이 지향하는 것은 바로 인민의 행복이었다.
15억 인민이 공평한 교육을 받아야 한다.
그는 공평과 정의의 근간으로 법과 교육을 들었다. 이는 대단히 중요한 지점을 파악한 것으로 그의 교육철학과도 연결된다. 그는 15억 인민이 더욱 향호하고 더욱 공평한 교육을 받을 수 있게 하여 그들이 자신을 발전시키고 사회에 공헌하며 인민들의 복지를 도모하게 해야 한다고 했다.
함께하는 리더십
타국과의 관계는 화이부동을 기본으로 한다
시진핑은 관계의 문제를 처리할 때 기본적으로 화이부동(和而不同)의 태도를 취해야 한다고 말했다. 남과 화목하게 지내야 하지만 자기의 중심과 원칙은 잃지 않아야 한다고 전한 것이다. 자국의 문명과 다른 문명을 대할 때는 하늘보다 더 넓고 광활한 마음을 가져야 한다고 말했다. 서로 다른 문명에서 지혜와 자양분을 흡수해 전 인류에게 정신적인 버팀목 역할을 하며, 영혼을 위로해 주고, 전 인류가 공동으로 직면한 문제를 다 함께 해결해야 한다는 의미이다.
차이나드림은 다른 나라들의 목표와도 일치한다
시진핑은 중국과 프랑스 수교 50주년 기념대회 연설에서 "세계적인 시각에서 생각할 때 차이나 드림은 중국의 목표이고, 이 목표는 다른 국가들의 목표와도 일치한다"고 주장했다. 중국에는 중국의 꿈이 있고 프랑스에는 프랑스의 꿈이 있다고 언급하면서, 중국의 꿈은 프랑스에 기회이고 프랑스의 꿈은 중국에 기회라고 이야기했다.
도덕적 리더십
사소한 부패도 철저히 책임을 물으라
시진핑은 당의 군중노선교육실천활동 작업회의 연설에서 사소한 부패도 놓치지 말고 철저히 책임을 물으라고 했다. 특히 자본주의와 사회주의의 결합을 실험하고 있는 중국에서 부패의 문제는 사회 시스템을 좀먹고 중국의 꿈을 갉아먹는 기폭제였다. 작은 문제를 방치하면 곧 큰 문제로 자라나기 때문에 시진핑은 일하는 태도에 대해 분명한 생각을 가지고 있었다.
고위 관료가 부정부패 척결에 본을 보여라
시진핑은 고위 관료가 부정부패 척결에 모범을 보여야 한다며, 해결하기 어려운 문제가 발생하더라도 능력 있는 사람이 나서면 어렵지 않게 풀 수 있다고 했다. 그리고 고위 관료일수록 엄격한 자기관리로 본보기 역할을 충실히 해서 부하 관료들에게 긍정의 에너지를 전파해야 한다고 주문했다.
사치와 부패는 나라가 망해 간다는 징조이다
시진핑은 한정된 사회 자원을 먹고 마시는 데 쓰고, 사치 풍조가 만연하는 것을 그대로 방치하면 중국공산당은 인민의 정서에서 멀어져 지지를 잃고, 전통을 잃고, 힘을 잃게 된다고 보았다. 그래서 그는 "당원과 관료가 절약을 영광이요, 낭비는 수치이다라는 관념을 갖고 소박하게 생활하고, 낭비하는 일이 없게 꼼꼼하게 계산하고, 부지런히 처리하게 지도해야 한다"라고 반복해서 강조했다.
긍정적 신념의 리더십
차이나 드림을 위해 온 인민이 힘을 모으자
시진핑은 중국의 꿈을 이루기 위해서는 인민 모두가 한마음이 되어야 한다고 말했다. 그리고 "지위가 비천해도 나라 걱정하는 마음을 잊지 못한다"라는 말을 인용하며 모든 인민에게 나라를 부강하게 하여 민족을 부흥시키기 위해 조금의 힘이라도 보태라고 요구했다.
애국주의는 나라를 흥하고 강하게 한다
시진핑에게 애국주의는 민족을 똘똘 뭉치게 하는 정신적인 힘이요, 모두의 뜻을 하나로 모아 나라를 흥하고 강하게 하는 영혼이다. 이를 기반으로 했을 때 비로소 그는 자신이 주장한 중국의 꿈이 현실이 될 수 있다고 생각했다.
중국이 가는 길에 자신감을 가져라
시진핑은 중국이 가는 길에 자신감을 가지라고 했다. 현재 중국 위협론이나 중국 붕괴론 같은 목소리가 존재하는 것이 사실이다. 중국은 지난 30여 년 동안 사회와 경제가 발전하는 과정에서 돌발적인 자연재해, 세계 경제의 위기, 정치 파동 등의 여러 고비를 겪었다. 하지만 매번 잘 견뎌냈고, 한차례 폭풍우가 지나간 후에는 더 크게 발전했다. 그러므로 중국은 마땅히 자신감을 가져야 한다고 그는 주장한 것이다.
변혁의 리더십
개혁하라
시진핑은 사상선전 작업에서 가장 피해야 할 것은 개혁을 거부하고 현실에 안주하는 것이라고 말했다. 그는 지금 중국에서 사상선전 작업을 잘하기 위해 본질적으로 요구되는 것이 창조라며 그 근거로 기술의 다변화, 이익의 다양화, 관념의 다원화 등과 같이 전례를 찾아볼 수 없는 새로운 여론 환경을 제시했다.
경제 개발 리더십
빈곤에서 벗어나 잘 살아보자
시진핑은 중국의 꿈을 부국강병으로 명확히 설명했다. 그리고 빈곤을 퇴치하고 민생을 개선하며 다 함께 부유한 생활을 영위하는 것이야말로 사회주의의 본질적 요구라며 가는 곳마다 경제 개발의 필요성을 역설했다.
창의적 리더십
중국은 끊임없이 새로워져야 한다
시진핑은 "중국은 끊임없이 새로워져야 한다"고 주장했다. 특히 그는 이 말을 창조에 관해 말할 때 가장 많이 인용했다. 간단명료하면서도 심오한 이 말에는 꾸준히 배워서 늘 자신을 새롭게 하고, 시대에 능동적으로 적응하고, 사회 발전을 적극적으로 이끌라는 사상이 반영되어 있다. 그리고 능동적인 입장에서 끊임없이 창조를 강조하는 이 말은 사람들의 마음에 깊이 스며들어 창의적인 의식을 만들고 사회를 발전시키는 강력한 힘이 되었다.
공동체 리더십
시진핑은 북으로는 실크로드, 남으로는 해상 실크로드를 통해 경제 공동체를 꾸릴 계획을 세우고 있다. 이를 통해 지역의 지배권을 강화하는 것은 물론이다. 향후 중국이 경제력을 기반으로 정치, 문화적 지배를 강화하는 방식으로 큰 그림을 그리고 있음을 알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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