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의 리더십을 탐하라

   
이영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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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3800
2012�� 06��



■ 책 소개
우리는 지금 누구의 리더십을 따르고 있는가?
 
이성계, 김종직, 정약용, 이순신, 정조, 전봉준, 황희정승, 이황, 이이 등 각기다른 상황에서 나름의 고난을 헤치고 위대한 결과물을 만들어낸 20여 명의 조선 리더들을 선정하여 고찰한 책이다. 
이 리더들은 각기 다른 상황에서, 나름의 고난을 헤치고 위대한 결과물을 만들어낸사람들이다. 저자인 이영관 교수는 이 리더들의 특징을 크게 위기관리·혁신·심학·여가의 네 부분으로 나누었다. 또한 리더십을 직접 보고 느낄 수있도록 각 장에 해당하는 유적지를 다양한 사진과 함께 소개했다. 

■ 저자 이영관
1964년 충남 아산에서 태어났다. 한양대학교 관광학과와 동대학원에서기업윤리를 연구해 박사학위를 받았다. 대학을 졸업하고 세계적으로 인류역사를 빛낸 영웅들의 발자취를 답사하면서 리더십 연구에 관심을 갖게 되었다.2006년에는 코넬대학교 호텔스쿨의 교환교수로 미국에 머물면서 21세기 글로벌경영의 트렌드를 심층적으로 연구했고, 국제관광학회 회장을 역임했다.리더십 연구의 핵심가치인 통합적 모형을 정립하기 위해 2010년에는 『스펙트럼 리더십』(문화체육관광부 우수학술도서)을 발간했고, 이를 토대로개발된 『리더십 스펙트럼의 비밀』은 고용노동부에서 지원하는 고용보험 환급과정에 채택되어 ‘크레듀’를 비롯한 온라인교육업체에서 서비스 중에 있다.현재는 세계시장을 선도할 수 있는 한국형 리더십을 체계화하는 연구를 진행하고 있으며, 순천향대학교 관광경영학과 교수로 재직하고 있다. 주요저서로 『스펙트럼 리더십』『조선 견문록』『한국의 아름다운 마을』 등이 있다.

■ 차례
추천사 
책머리에 

1부 위기에서 기회를 엿보다 
PMI(Post-MergerIntegration)의 달인 이성계 
조선 리더십 기행 01 한양천도 1번지 경복궁 
2인자 리더십, 김종직의 권력균형 
조선 리더십 기행 02 김종직이 풍류를즐겼던 영남루 

개혁주의자의 위기관리, 정양용의 비전은실학 
조선 리더십 기행 03 다산초당에서 만난 정약용 

보수주의자의 벤치마킹, 추사체에 깃든 김정희의 예술혼 
조선 리더십 기행 04 봄 풍경이 매혹적인 추사고택

탐욕과 독단은 조직을 망친다, 조선사회를 퇴보시킨권력자들 
조선 리더십 기행 05 난공불락 천연 요새였던 남한산성 

2부 혁신으로 영웅이 되다 
혁신으로 나라를 바꾸다, 세종대왕의 인재관리와 훈민정음
조선 리더십 기행 06 세종대왕의 휴양지 온양행궁 

전란을 대비하는 혁신 이순신의 창조적 완벽주의 
조선 리더십 기행 07 옥포해전이 벌어졌던 옥포만

혁신으로 문예부흥을 이끌다, 정조의 창조적 실용주의
조선 리더십 기행 08 사도세자가 잠들어 있는 융릉 

세상을 바로 세우는 혁신, 백성들을 리드한 전봉준 
조선 리더십 기행 09 황토현 전적지에서 만난전봉준

3부 심학으로 세상을 리드하다
정통성을 지켜내는 중용, 원칙을 중시했던 황희의 덕치주의 
조선 리더십 기행 10 황희정승의 유배지 광한루

자기 자신을 다스리는 심학의 대가, 권력욕을 경계했던이황 
조선 리더십 기행 11 도산서원에서 만난 이황 

원칙주의자의 위기관리, 타협에 서툴렀던 이이의 십만양병설 
조선 리더십 기행 12 이이의 출생지 오죽헌

난세에 빛을 발하다, 임진왜란을 진두지휘한 류성룡
조선 리더십 기행 13 문필봉을 바라보며 꿈을 키우다 

과유불급, 아쉬운 영웅들 

4부 여가생활로 삶의 균형을 추구하다 
음악으로 정치적 탐욕을 경계하다, 맹사성의청백리정신 
조선 리더십 기행 14 맹사성고택과 외암민속마을 

고품격 여가생활, 정자에서 꽃피운 정철의 가사문학 
조선 리더십 기행 15 가사문학의 산실, 피향정과송강정

미래지향적인 여가생활, 윤선도가 설계한 무릉도원
조선 리더십 기행 16 윤선도의 발자취 녹우당과 부용동원림 

왕실의 여가문화를 엿보다, 임금들의 산책로 창덕궁 후원





조선의 리더십을 탐하라


위기에서 기회를 엿보다

PMI(Post-Merger Integration)의 달인 이성계

한양천도로 조선왕조의 정통성을 세우다

위화도회군 후에 보여준 이성계의 행보 또한 거침이 없었다. 임금이 된 이듬해에는 명나라의 도움을 얻어 국호를 조선으로 바꾸었다. 그는 더 나아가 수도를 옮겨 신왕조가 시작되었음을 만백성에게 알리고자 했다.


고려의 충신들을 아우르며 신왕조의 기틀을 바로세우는 일은 고려왕조를 무너뜨리는 일보다 결코 쉬운 과제가 아니었다. 그러나 전쟁터에서 승부사로서의 능력을 유감없이 발휘했던 이성계는 조선왕조의 기틀을 다지는 데 있어서도 남다른 능력을 보여주었다. 기업 인수합병(M&A)에 적극적으로 활용되고 있는 PMI(Post-Merger Integration)의 달인이라 할 만큼 이성계는 조선 건국 후 빈틈없는 전략과 지략으로 신왕조의 기틀을 공고히 하였다.


PMI란 인수합병의 부작용을 최소화하기 위해 합병 이후 나타날 수 있는 문제점들을 제거하여 시너지효과를 극대화하는 전략으로, 이는 인수합병 이후의 통합에 초점을 맞추고 있다. 이질적인 조직들을 합병시켜 놓으면 각각의 이해집단들은 자신들의 기득권을 보호하려는 과정에서 불협화음을 야기하기 때문에 최고경영자는 갈등을 봉합하면서 미래를 향해 나아갈 수 있는 남다른 지도력을 발휘해야만 한다.


이성계는 한양천도를 단행하는 과정에서도 풍수지리 전문가들의 의견을 경청하면서 최적의 의사결정을 이끌어냈다. 특정인에게 의뢰하지 않고 전문가들에게 각자 나름대로의 방식으로 한양천도의 최적지를 찾아보길 지시했던 것이다. 조선을 건국하였을 때 숭유억불을 주장했음에도 스님인 무학대사를 참여시켰을 만큼, 한양천도는 조선왕조의 기틀을 공고히 하느냐 마느냐 하는 핵심적인 과업이었다.


천도에 대한 의견이 좀처럼 좁혀지지 않자 새 후보지로 거론된 신촌 일대와 계룡산, 북악산 주변지역을 태조가 직접 둘러보았다. 여러 우여곡절 끝인 1394년 태조는 옛 고려의 남경[南京, 고려시대의 사경(四京) 가운데 지금의 서울에 해당하는 행정 구역을 말한다.]이었던 한양의 옛 행궁에 머물면서 그곳을 궁궐터로 정했다. 최고 의사결정권자가 직접 둘러보고 좋다는데 반대할 사람은 없었다.


그해 9월에는 정도전을 중심으로 조정의 관료들이 한양을 방문하여 궁궐·사직·종묘 터를 결정했다. 궁궐터가 정해지자 태조는 급히 한양으로 거처를 옮겼다.


이런 과정을 거쳐 태조가 꿈꾸었던 한양천도는 완성되었다. 그는 궁궐과 도성이 건립되는 동안 불편한 객사에서 생활하면서도 공사현장을 직접 진두지휘하느라 고단한 나날을 보내야만 했지만 그의 신하들과 백성들에게 보다 나은 풍요로운 세상을 만들어줄 영웅으로 부각될 수 있는 일석이조의 결과를 낳게 되었다. 리더에게 도전이란 반드시 넘어서야만 하는 통과의례이고 그 과정에서 리더의 지도력은 자연스럽게 검증된다고 볼 수 있다.


2인자 리더십, 김종직의 권력균형

사림정치 구현을 위한 인재 육성

우여곡절 끝에 나이 어린 성종이 즉위하자 세종의 넷째 아들 임영대군의 아들인 구성군은 왕권을 위협할 수 있는 인물이라는 죄목으로 대신들에 의해 탄핵되어 유배지에서 생을 마감하는 신세가 되고 말았다. 이 사건 이후로 왕족이 관료가 되는 길은 제도적으로 봉쇄되어 신권이 정치를 주도하는 조선 정치사의 전환점이 된 것도 흥미롭다. 이는 성종대에 접어들어 왕권이 극도로 쇠약해져 버렸다는 반증이기도 하다. 그런 상황에서는 임금이라 하더라도 신하들이 반대하는 개혁정책을 추진하려면 사사건건 신권과의 대립을 불러왔을 것이다.


그러나 성종은 총명한 군주였다. 그는 7년간 정희왕후의 수렴청정이 끝나자 권력이 특정인의 손에 의해 좌우되는 정치현실을 바로잡으려 노력하였다. 하지만 한명회를 중심으로 하는 공신세력들은 자신들의 기득권을 쉽게 포기하지 않았다. 결국 성종은 공신세력들의 죄를 물어 정죄하는 방식보다 새로운 정치세력인 사림인사들을 중용시켜 훈구세력과의 세력균형을 도모하였다. 사림이란 본래 지방에 근거지를 둔 중소지주 출신의 지식인으로, 중앙정치에 진출하기보다 지방에서 영향력을 행사해 오던 선비들을 말한다. 이들은 학문의 기본정신을 도학(道學, 유학의 분파로서 주자학의 별칭)에 두었으며 대의명분을 매우 중시한 인사들이다.


이즈음 사림정치의 선구자로 등장한 인물이 밀양사람 김종직이다. 그는 성종의 총애를 받아 정여창, 김굉필, 김일손 등의 제자들을 대거 관직에 등용시킬 수 있었지만 훈구파와의 갈등을 초래할 수밖에 없는 처지에 놓이게 되었다. 그럼에도 김종직은 살아생전에 훈구세력들과 큰 갈등 없이, 비교적 원만하게 관료로서의 성공적인 삶을 살았고 천수를 누릴 수도 있었다. 그는 훈구세력을 공격하면서도 그들과 격의 없이 생활했고 대의명분을 내세우면서도 점진적이고 은밀하게 훈구세력들을 견제했다.


그가 훈구세력과의 대립 속에서도 무탈하게 개혁을 이끌었던 원동력은 관직에 등용된 제자들이었다. 김종직에게는 사람의 됨됨이를 분별하는 탁월한 재능이 있었고 제자들을 따뜻하게 보살폈으며 그의 제자들 또한 스승이자 은인인 김종직에게 충성으로 보답했다.


훈구세력과의 갈등을 무마해주던 김종직이 세상을 떠나자 사림세력들은 순식간에 역적 신세로 전락해 버렸다. 기회를 엿보고 있던 훈구세력들의 총공세에 김종직의 제자들은 추풍낙엽처럼 쓰러져 유배지에서 또는 정치현장에서 생을 마감하는 신세가 되고 말았다.


훈구세력들이 사림인사들을 처단하기 위해 들고나온 카드는 김종직이 사초(史草, 공식적인 역사편찬의 자료)에 적어놓았던 조의제문(弔義帝文)이었다. 조의제문은 항우에게 죽은 초나라 의제의 죽음을 애도하는 내용을 담고 있는데 이는 세조에게 죽임을 당한 단종을 의제에 비유한 것으로 세조의 정통성에 문제가 있다는 점을 간접적으로 표현한 것이다. 이미 사망한 김종직은 부관참시(죽은 뒤에 큰 죄가 드러난 사람의 시체를 베거나 목을 잘라 거리에 내 거는 극형)를 당하였고 그의 문집은 모두 소각되었으며 김일손을 비롯한 많은 그의 제자들이 처형당하는 빌미가 되었다. 하지만 그의 실추된 명예는 중종 때 복원되었고 숙종 때 영의정에 추증되었다.


권력 균형을 중시했던 김종직

조직 내의 1인자는 자신의 자리를 넘보거나 배반하는 자들을 철저하게 경계하기 때문에 2인자들은 주군에게 신뢰받을 수 있는 여건을 조성해야만 살아남을 수 있다. 김종직은 1인자였던 성종의 의중을 정확히 간파했고 주군이 뜻하는 정치의 구현에 최선을 다했다. 최고경영자가 될 수 없는 여건이라면 주군으로부터 절대적인 신임을 받아야만 조직 속에서 자신의 존재가치를 각인시킬 수 있을 뿐만 아니라 자신의 역량 또한 발휘할 수 있다.



혁신으로 영웅이 되다

세상을 바로 세우는 혁신, 백성들을 리드한 전봉준

외세를 배격했던 전봉준의 민족주의

개인적인 부귀영화를 포기하고 목숨이 다하는 순간까지 우리 민족의 장래를 위해 투쟁했던 전봉준은 쓰러져가는 조선왕조 말기에 우리민족의 자주적 역량을 일깨워준 위대한 영웅이다.


표면적으로 보면 그는 정부에 대항해 반란을 일으킨 인물이다. 그가 만약 고부봉기에서 관군에게 제압당했다면 역사는 그를 민심을 교란시킨 교활하고 사악한 역도로 기록했을 것이다. 그러나 그는 농민군의 역량을 시험해볼 수 있는 고부봉기에서 승리를 거둠으로 농민군 수장으로서의 위상을 높일 수 있었다.


그 승리의 원동력은 비전이었다. 민족자존을 내세웠던 그의 비전에 농민군은 전적으로 동감했다. 또한 백성들에게 큰 호응을 얻고 있던 동학을 주도적으로 수용하여 대내외적으로 농민혁명의 이념적인 명분을 축적할 수 있었고 자신들의 투쟁이 지니는 역사적인 의미와 가치를 극대화시킬 수 있었다. 군사력이 아니라 전투에 임하는 명분과 집중력의 차이가 농민군의 승리를 가져왔다는 것이다. 꿈과 희망을 제시하는 차별화된 비전이 지도자에게 얼마나 중요한 것인지를 보여준 생생한 예라 하겠다. 비전은 현재의 결과가 아니라 보이지 않는 미래의 성공을 계획하는 것이기 때문에 성공에 대한 강한 신념과 세상을 긍정적으로 바라보는 가치관이 매우 중요하며, 미래예측에 관한 남다른 노하우도 축적해야만 한다. 여유롭게 명상하며 산책하는 삶의 여유 또한 리더의 미래예측에 큰 보탬이 될 수 있다.


전봉준은 또 가는 곳마다 전폭적인 지지를 이끌어냈는데 이는 자신들과 같은 처지에 있는 농민들에게 피해가 가지 않도록 세심한 주의를 기울였기 때문이다. 가난과 굶주림이라는 어려운 환경에 처한 농민들임에도 물질적인 대가없이 전봉준에게 전폭적인 신뢰를 보였다. 현대경영 차원에서 보면 전봉준은 부하직원들의 사기를 진작시키는 인터널마케팅(Internal marketing)의 귀재였다고 볼 수 있다. 또한 사기를 진작시키는데 물리적 포상이 아닌 정신적 포상의 중요성을 일깨워 준 인물이기도 하다.


그는 외세의 개입 속에서도 흥선대원군과 제휴하기도 하고 지속적으로 투쟁하며 눈부신 활약을 보여주었지만 막강한 화력으로 무장한 외세의 개입으로 말미암아 결국 붙잡혀 한양으로 압송되고 말았다. 일본은 백성들로부터 존경 받는 그를 살려두어 한국 통치에 이용하려 했으나 전봉준은 의연하게 죽음의 길을 선택했다. 죽음 앞에서도 자신의 과업에 대한 당위성을 포기하지 않고 죽어야만 하는 운명까지도 의연하게 받아들일 수 있는 정신력을 전봉준은 몸소 보여주었다.



심학으로 세상을 리드하다

난세에 빛을 발하다, 임진왜란을 진두지휘한 류성룡

류성용의 안민부국(安民富國)

세종대왕이 맹사성과 황희와 같은 명재상을 발굴하여 성군이 될 수 있었다면, 선조는 이순신과 함께 원칙을 준수하며 국익을 위해 혼신의 힘을 다한 류성룡이 곁에 있었기에 전란을 수습할 수 있었다고 해도 과언은 아닐 것이다. 이순신은 전투에 있어 불패신화를 일궈내면서 왜군을 물리치게 되는 결정적 전기를 마련했지만 무인보다 문인의 권력이 컸던 당시의 상황을 고려해볼 때 영의정 류성룡의 업적 또한 간과할 수 없다. 조선의 국운을 걱정했던 류성룡은 이순신과 동향도 아니고 정치적 동질성을 지닌 관계도 아니었지만 이순신의 잠재능력을 일찍이 발견해 그를 음으로 양으로 지원하여 임진왜란 때에 역량을 발휘할 수 있는 자리에 올려놓았다. 만약 그가 이순신을 발탁하지 않았다면 이순신 또한 그 능력을 발휘하지 못했을 수도 있었다. 전란 중 육지에서 큰 전과를 일궈낸 권율도 그가 뽑은 장군이다.


그의 인재등용 방식은 철저하게 능력 중심으로 이루어졌다. 인재를 능력 위주로 선발할 수 있었던 것은 난세였기에 가능했던 측면도 없지 않았겠지만 류성룡이었기에 할 수 있었던 것도 사실이다. 그는 능력이 뛰어난 자라면 서얼이나 공사천(公私賤, 관청이나 개인적으로 거느리던 노비)은 물론이고 장사꾼이나 병졸들도 눈여겨 보았고 신분이 천한 자라 할지라도 업적이 뛰어난 사람들에게는 충분한 보상이 될 수 있는 길을 터주어야 한다고 주장하기도 했다.


이와 같은 그의 생각은 사대부 중심의 관료사회에서 쉽게 통용되기 힘든 가치관이었다. 그가 나름대로 그의 실용주의 노선을 부분적이나마 관철시킬 수 있었던 것은 개인적인 사리사욕이나 당파간의 이해득실보다 국익을 우선시하는 충(忠)이 흔들리지 않았기에 가능했다고 여겨진다. 그의 업적에 대해 부정적인 견해를 피력하는 이들도 있지만, 그가 보여준 합리적이며 실용적인 리더십은 조선 후기에 꽃을 피운 실학사상에 큰 영향을 미쳤을 만큼 그는 시대를 앞서간 인물이었다.


기회의 균등이라는 가치가 흔들리게 되면 사회의 응집력이 약화되기 마련이고 조직의 성장 동력도 함께 약해진다. 신분여하를 막론하고 우수한 인재들을 영입하기 위해 관습이나 형식에 얽매이지 않았던 그의 정치철학은 대한민국이 선진사회로 진입하면서 심화되고 있는 계층분화와 양극화의 사회병폐를 치유하는 해법을 도출하는 데 참고해볼만하다.


조선 리더십 기행 13 문필봉을 바라보며 꿈을 키우다

우리나라 전국 방방곡곡에는 많은 민속마을들이 있지만 그중에서도 역사성과 전통건축의 공간미학을 갖춘 안동하회마을은 그중에서도 단연 으뜸이다.


이 마을은 풍산 류씨가 대대로 살아오던 집성촌으로 낙동강물이 동쪽으로 흐르다가 S자형을 이루며 마을을 감싸고 돌아나가 마을이름이 하회(河回)가 되었다고 한다. 지천이 아닌 낙동강의 너른 강폭과 살랑거리는 푸른 물결, 그리고 사람들을 실어 나르는 나룻배가 어우러진 풍광은 이곳을 처음 방문한 나그네조차 그저 바라만 봐도 가슴이 시원해지는 풍경이 아닐 수 없다.


풍수지리의 심오한 지식이 없는 범인들이 보더라도 하회마을은 길지임을 단박에 느낄 수 있다. 천연 요새인 마을의 삼면을 폭이 넓고 풍부한 수량의 낙동강이 지켜주고 있고 마을 뒤편에는 사람들의 접근을 쉽게 허용하지 않는 산세가 외부의 접근으로부터 마을을 온전하게 지켜주고 있다. 요새의 중심에 둥지를 튼 하회마을은 사람들이 농사짓고 생활하기에 충분한 강물과 너른 옥토를 선물로 받았을 뿐만 아니라 주변 지형과 어우러진 풍경은 신선들이 질투할 만큼 목가적이고 낭만적이다. 이토록 아름답고 풍요로움이 넘쳐나는 길지에서 위대한 영웅이 탄생하지 않았다면 아마도 풍수지리는 허구임을 입증할 수밖에 없을 것이다.



하회마을의 좋은 풍수 기운을 증명하듯 이곳에서 나고 일찍부터 문필봉을 바라보며 꿈을 키워온 서애 류성룡은 조선의 국운이 걸린 임진왜란 때에 조선군의 통수권자로서 왜군을 무찌르는데 혁혁한 공을 세웠다. 풍산 류씨의 대종택인 양진당(養眞堂)은 마을 앞 낙동강 너머의 문필봉을 바라볼 수 있는 최적의 장소에 지어졌다. 조선 선비들이 얼마나 풍수지리를 신봉했는지 짐작이 가고도 남음이 있는 곳이다.



류성룡은 이곳에서 태어나 이곳의 산과 들의 기운을 받아 커 갔으며 마지막에는 이곳에 묻힐 때까지 분명 이 산과 강, 마을이 말하는 것들을 어릴 적부터 자연스럽게 몸으로 느끼고 배우고 자라났을 것이다. 그를 태어나게 하고 품은 하회마을이 지금까지도 그 우아한 멋을 멋스럽게 드러내고 있듯이 그도 자신의 주변을 조용하지만 오래 밝힐 수 있는 촛불과도 같은, 그런 삶을 살고자 한 것은 아니었을까? 그런 그라면 현재의 부귀영화도 언젠가는 사그라질 것이고 화려하게 피어난 것들의 마지막은 그만큼 악취가 날 수도 있음을 경계했을 것이다.


과거의 류성룡이 살았던 이곳은 지금의 우리들에게도 많은 길을 보여주고 있다. 앞으로만 빨리 나아가려는 사람들에게 좋은 미래란 빨리 갈 수 있는 길이 아니라 오래 걸을 수 있는 푸르고 단단한 길임을 말이다.


과유불급, 아쉬운 영웅들

중종의 명참모, 신진사림 조광조

조광조는 한양사람으로 1482년에 태어났으며 무오사화로 유배 중인 김굉필(사림정치의 선구자이며 김종직의 수제자)에게 수학한 인물이다. 그가 이루고자 했던 도학정치의 핵심은 국왕이 현명해야 하고 성리학의 이념 또한 뿌리내려야 하며 사림인사들이 정계에 입문하여 부패하고 잘못된 관행을 바로잡아야 한다는 것이었다. 훈구세력은 도학정치의 방해꾼이기에 제압해야 하는 대상이었다. 훈구세력과의 싸움은 예견된 수순이었다.


개혁 초반에 조광조는 중종의 전폭적인 지지와 사람파인 성균관 유생들의 도움으로 모든 일들을 일사천리로 진행해 나갔다. 중종 또한 자신을 임금으로 추대해준 훈구세력의 그늘에서 벗어나 자신이 뜻하는 국정을 운영할 수 있었기에 그를 아꼈다. 과거제가 아니라 천거를 통한 인재등용을 활용해 신진 사림들을 국정의 다방면에 포진시키며 그의 권한은 더욱 커졌다. 하지만 이러한 그의 개혁은 훈구세력을 지나치게 자극했다. 훈구세력들은 그가 너무 독단적이며, 조선왕조가 조광조의 손에 놀아난다고 비아냥거렸다.


1519년, 그는 중종반정의 공신들이 너무 많을 뿐 아니라 부당하게 공신이 된 자들이 많다고 지적하면서 70여 명의 공훈(功勳, 나라나 기업을 위해 세운 큰 업적)을 삭제하자고 주장했다. 이에 훈구세력들은 조광조와 그를 추종하는 세력들을 무력화시키기 위해 조광조가 임금이 될 것이라는 유언비어를 퍼뜨렸다. 중종도 처음에는 믿지 않았으나 상황을 방치할 수만은 없었다. 결국 지나친 개혁의 부작용을 우려한 중종은 훈구세력과 타협하기 시작했다.


중종의 지지를 받지 못한 조광조는 순식간에 반역자로 낙인찍혀 전라도 화순 땅에서 유배생활을 하다 사약을 받고 세상을 떠났다. 당시 조광조와 뜻을 같이하다 처형된 이들은 무려 70여 명에 달했다. 임금을 업신여기거나 스스로 임금이 되고자 하는 마음은 추호도 없었으나 반대세력과의 타협은 생각지도 않은 채 급하게 개혁을 서두르는 바람에 일찍 생을 마감하게 된 조광조는 1545년 인종에 의해 복권되었다.


훈수세력을 신속하게 제압하기보다 세력균형을 유지하며 사림정치를 확대할 수 있을 만큼 조금만 더 느긋했었더라면, 스스로를 완성하는 시간을 좀 더 가졌었더라면 어땠을까 하는 생각을 해본다.



여가생활로 삶의 균형을 추구하다

왕실의 여가문화를 엿보다, 임금들의 산책로 창덕궁 후원

창덕궁 후원과 왕실의 여가문화

조선의 이궁으로 출발하여 20세기 후반기까지 왕족들이 생활했던 창덕궁은 인간미가 풍기는 궁궐이다. 그래서인지 설계 또한 왕실 가족의 쾌적한 생활에 중점을 두고 있다. 경복궁은 조선을 대표하는 궁궐답게 임금의 권위를 표현하는 데 심혈을 기울였지만 상대적으로 임금들이 거닐었던 정원은 왜소한 편이다. 반면 창덕궁 후원은 임금의 권위를 내세우기보다 왕실 가족들의 삶의 질과 여가생활에 적합한 공간구조로 조성되었다.


비원은 창덕궁이 조선의 이궁으로 건립된 다음해인 1406년(태종 6)에 조성되었다. 궁궐의 규모에 비해 상대적으로 크게 조성된 점도 흥미롭지만 단순히 임금과 왕실 가족들의 휴식 공간 외에도 다양한 용도로 활용된 점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 1776년 정조는 창덕궁의 후원인 부용정 맞은편 어수문 뒤편에 주합루를 건립하고 1층에는 왕실 도서관인 규장각을 설치했다. 조선 왕실의 학문에 임하는 자세와 철학을 엿볼 수 있는 상징성을 내포하고 있다(주합루에서 보관되고 있던 책들은 현재 서울대학교 도서관에 있다).


낙선재에서 후원으로 향하는 작은 언덕길에 올라서면 인간을 압도하는 웅장한 건물들은 보이지 않고 목가적인 전원풍경이 펼쳐진다. 창덕궁 후원은 북한산에서 이어진 산줄기의 아름다운 지형을 살리면서 곳곳에 자연친화적인 연못을 파고 정자를 배치하여 가장 한국적이면서도 세계적인 정원을 창출해 냈다.


창덕궁의 자연수계는 남북으로 길게 뻗어있는 능선에서 동과 서로 물줄기가 나뉘는데 후원으로 흘러드는 물줄기는 능선을 따라 동쪽으로 흐르는 4개의 골짜기로부터 물을 공급받는다. 주능선에서 소요정 앞으로 흐르는 물줄기와 관람지, 애련지, 부용지 등의 연못으로 흘러드는 골짜기의 물을 이용하여 정원을 꾸몄다.


부용지에서 동쪽으로 내려가자 후원에서 가장 오래된 건물인 영화당이 나타났다. 임금께서 잔치를 베풀거나 활쏘기를 즐겼던 장소였고 과거시험도 치러졌던 곳이다. 과거시험이 임금의 휴식공간에서 치러졌다는 것은 일과 휴식을 이분법적으로 생각하기보다 통합적인 관점에서 실천한 당시의 경향을 보여주는 증좌이기도 하다.


창덕궁은 조선 왕실의 생활을 엿볼 수 있는 상징적인 공간이다. 요즘 사람들은 노동과 여가활동을 이분법적으로 생각하는 경향이 강한데 조선의 왕실 가족들은 노동과 여가활동을 다분히 통합적인 관점에서 접근했음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


조선의 임금들이 머물렀던 비원은 단순히 음주가무나 쾌락이 아니라, 미래를 대비하는 전략 수립을 위한 사색의 공간이었고 이를 뒷받침하기 위한 학습과 문화체험의 공간이었다. 뿐만 아니라 유능한 선비들에게 그들의 꿈과 이상을 펼칠 수 있도록 학습의 장을 마련해주었던 배려의 공간이기도 했다. 왕세자가 공부하던 곳이었고, 신하들을 위로하고 보듬어주던 서번트 리더십(servant leadership)의 현장이었다. 사람들의 앞에 나서기 위해서는 그들을 끌고 갈 카리스마도 필요하지만 그들과 함께 하기 위한 봉사하는 마음, 섬기는 자세가 필요하다는 교훈이 담겨있는 곳이기도 하다.


창의성을 필요로 하는 기업이라면 좋은 성과를 내기 위해서라도 이제는 실무자가 편해야 한다. 더 이상 권위를 내세워서는 안 된다. 민주적이면서도 부하직원들을 세심하게 배려하는 리더여야만 성과를 높일 수 있는 시대가 되었다. 권위주의적인 리더십에서 벗어나 조직 구성원들이 잠재의식 속에 내재된 능력을 발휘할 수 있도록 직급에 따른 적절한 권한위임이 필요하다. 그리고 그들이 스스로 주인의식을 가지고 만나는 모든 이해관계자를 감동시키도록 해야 한다.


그 시작은 이 책을 읽는 여러분이 스스로를 다스리고 여유를 찾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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