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저자 사마열인 (司馬烈人)
1963년에태어나 북경대학교에서 중문과 박사학위를 받았다. 지은 책으로『호설암 면경』『조조 면경』『여불위 면경』『증국번 면경』『내경』『진경』 등이있다.
■ 역자 홍윤기
고려대학교 중어중문과를졸업하고, 동 대학원에서 석사 및 박사학위를 취득했다. 중국 복단대학에서 박사학위를 받았고, 서울대학교에서 중어중문학 박사후 과정을 이수하였으며고려대학교 중국학 연구소 연구 조교수로 재직하였다. 2004년 현재 극동대학교 중국어학과 교수로 재직 중이다. 옮긴 책으로 『주역』이있다.
■ 차례
1장 체면 철학
차라리 내가천하를 등질지언정, 천하가 나를 등지게 하지는 않겠다.
2장 영웅본색
다른 사람의 낯빛을 살피지 말고 자신의 갈 길을가라.
3장 동요하지 않는 얼굴
선택하는 순간에는 얼굴색을 바꾸지 말고 동요하지도마라.
4장 처세의 법칙
성공의 세 가지 조건은 기회, 계략, 두꺼운얼굴이다.
5장 최고의 원칙
사사로운 정에 얽매이지 말고 쓸모만을따져라.
6장 천하를 틀어쥐는 지혜
얼굴을 가리고 마음을숨겨라.
7장 인재 등용법
인재는 나라의 보물이며, 사업의 기틀이다. 부드러운 낯빛으로 이들을맞아하라.
8장 얼굴을 관리하라
내 낯빛을 상대가 알아채지 못하게 하라.
9장 붉은 얼굴, 흰 얼굴
화난 얼굴로 위협하고 웃는 얼굴로 감동시켜라.
10장 낯빛을 읽어라
상대의 얼굴을 꿰뚫어보고 마음을 읽어내라.
11장 웃는 얼굴을 조심하라
웃는 얼굴을 한 사람이 당신의 가장 큰 적일 수도있다.
12장 마음을 다스려라
진정한 능력은 마음을 다스리는 데서 나타난다.
13장 천하에 마음을 두어라
인생은 고통스럽고도 짧으니, 언제 위대한 공적을 이룰것인가.
조조의 면경
스스로 자신의 체면을 만들어가라
예로부터 사람들은 충신과 간신을 나누어 생각했다. 『삼국연의』중의 제갈량은 충신이요 조조는 간신이다. 이는 오랫동안 거의 당연한 것으로 여겨졌다. 대부분 사람들은 그들의 어느 면이 충성스러운지 어느 면이 간사스러운지를 진지하게 생각하지 않는다.
그러나 곰곰이 생각해보면 이상한 점이 있다. 조조가 한나라 황실에 충성하지 않은 간신이라면, 하(夏)나라의 포악한 걸(桀)임금을 없애기 위해 반란을 일으켰던 상(商)나라의 탕(湯)임금도 간신이라고 할 수 있을까? 은(殷)나리의 흉포한 주(紂)임금을 없애기 위해 반란을 일으켰던 주(周)나라 무왕(武王)도 간신이라고 할 수 있을까? 당나라 고조(高祖) 이연(李淵)은 병사를 일으켜 수(隋)나라에 반역했으니 그는 간신일까? 송(宋)나라 태조(太祖) 조광윤(趙匡胤)은 군사를 일으켜 후주(後周)의 정권을 빼앗았는데, 그렇다면 그 또한 간신일까? 이렇게 보면 중국 역사상의 나라들 거의 절반은 신하가 섬기던 임금으로부터 빼앗아 나라가 된다. 그렇다면 이렇게 나라를 세운 사람들이 모두 간신일까?
왕조가 바뀌는 것은 정상적인 일이다. 충신인가 간신인가는 모두 상황에 따라 판단할 수 있는 일이다. 맹자(孟子)는 주나라 무왕이 은나라 걸임금을 죽인 것을 이와 같이 평가했다.
“걸이라는 한 사내를 죽였다는 말은 들었지만 임금을 사해했다는 말은 들어보지 못했다.”
맹자는 걸임금을 잔인한 독재자로 보았기 때문에, 신하가 그를 죽인 것은 그저 죄인 한 명을 죽인 것에 지나지 않는다고 여긴 것이다. 맹자의 이러한 관점은 매우 진보적인 의미가 있다.
『삼국연의』에서 조조는 군벌끼리 서로 뒤엉켜 싸우는 당시의 상황을 끝내고자 했다. 그러나 사람들은 여러 가지 이유를 들며 조조가 간신이고 나라를 혼란에 빠뜨린 역적이라고 한다. 그러나 이러한 평가는 사실 불공평하다. 조조가 천자를 천자로서 대접하지 않은 것은 실은 천자가 나약하고 무능했기 때문이다. 한나라 헌제는 비록 폭군은 아니었지만 여러 신하를 이끌어 나라를 평안히 다스릴 능력이 없었다. 이러한 군주는 바뀌어야 하지 않을까?
조조가 황제와 신하들을 기만했다고 하지만, 그렇다면 누가 중국을 통일하는 것이 마땅하겠는가? 조조는 일찍이 말한 바 있다.
“만약 천하에 내가 없었다면, 얼마나 많은 사람이 자신을 왕이라 칭했겠는가?”
이 말은 그다지 겸손하지는 않지만 맞는 말이라고 할 수 있다. 『삼국연의』는 한나라 헌제와 그 아래 여러 신하를 약자로 묘사했다. 우리는 자연스럽게 약자에게 동정심을 품게 되어 조조를 비난한다. 그러나 이는 현실을 바로 보는 자세가 아니다. 여기에는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자신을 약자의 위치에 두려는 유약한 심리가 스며 있지 않을까? 진취적인 믿음이 없으면 현실을 똑바로 용기를 내지 못하고, 그저 값싼 동정심을 바라게 된다.
자신을 잘 보호하라
큰일을 이루려는 사람은 우선 자신을 잘 감추어 지켜내야 한다. 자신의 생명을 지키지 못하면 어떻게 훗날의 대업을 이룰 수 있겠는가? 영웅들이 자신을 지키는 데에는 두 가지 방법이 있다. 하나는 ‘자살’을 함으로써 자신의 명예와 자신을 도왔던 무리를 지키는 것이다. 다른 하나는 자신을 위협하는 인물들을 없애버리는 것이다. 조조가 여백사(呂伯奢)를 죽인 것은 두 번째에 해당한다.
조조는 동탁의 부름을 거절한 뒤 기병 몇 명만을 데리고 낙양성을 빠져나갔다. 지름길을 통해 고향인 초현 방향으로 급히 달아났다. 호뢰관(虎牢關)에서 나와 성고(成皐)를 지날 때 친분 관계가 있었던 여백사의 집에서 묵었는데, 그때 여백사의 집안 식구들을 죽이고 말았다.
그 뒤 조조는 계속해서 동쪽으로 달아났다. 그런데 중모(中牟)를 지나면서 그만 체포되어 현으로 압송되었다. 이 때 현리에서는 이미 조조를 체포하라는 동탁의 수배령을 받은 상태였지만 자신들이 붙잡은 사람이 바로 조조인 줄은 몰랐다. 하급 관리였던 공조(功曹) 한 사람만이 조조를 알아보았다. 그러나 그는 세상이 바야흐로 어지러워질 터이므로 천하의 영웅준걸을 붙잡아서는 안 된다고 생각하고, 허튼 명령을 내려 조조를 풀어주었다.
이런저런 복잡한 상황을 거쳐 조조는 초현에서 멀지 않은 진류?양읍(襄邑) 일대에 도착했다. 그는 이곳에서 머무르며 가산을 팔아 의병을 모집해서 동탁을 토벌할 준비를 했다. 포부를 지닌 사람은 우선 자신을 지킬 줄 알아야 한다. 그래야만 천하를 내달릴 수 있다. 조조와 달리 먼저 안에서 자신을 지키지 못한 채 밖에서 싸움을 벌이다가 패망한 사람으로 제갈각(諸葛恪)이 있다. 오나라 대신 제갈각은 위나라가 차지한 합비(合肥)의 신성을 에워싸고 공격했지만 이기지 못하고 돌아갔다. 이에 위나라의 등애(鄧艾)가 사마사(司馬師)에게 말했다.
“제갈각은 막 나라의 정치를 쥐었지만 안으로 중심이 되는 임금이 없습니다. 그런데도 그는 아랫사람을 어루만져 그 뿌리와 기틀을 튼튼히 세우려 하지 않고, 바깥일에 바빠 백성을 잔인하게 부리고, 나라의 전체 군대를 다 써가며 우리의 튼튼한 성 앞에 패해, 죽은 자가 만 명이 넘는 참담한 결과를 가지고 오나라로 돌아갔습니다. 이제 제갈각이 벌을 받을 날만 남았습니다. 옛날 오자서(伍子胥)?오기(吳起)?상앙(商?)?악의(樂毅) 등은 모두 당시의 임금에게 발탁되었지만, 임금이 죽자 이들의 정치 기반은 무너져 내리고 말았습니다. 하물며 그 재주가 이 현인 네 분에 미치지 못한데다가 앞으로 큰 재난이 닥칠 것임을 생각지도 못하니, 곧 죽게 될 것입니다.”
제갈각은 오나라로 돌아가서 과연 죽임을 당했다. 따라서 큰일을 할 사람은 반드시 먼저 자신을 지킬 줄 알아야 다른 일에도 힘을 미칠 수 있다.
속마음을 얼굴에 내보이지 마라
동탁의 서량(西?) 군대가 낙양을 향해 올 때, 조조는 부대를 지휘하여 십상시의 쿠데타로 파괴된 궁전과 담장을 손보고 시신을 수습했다. 그의 마음속은 온갖 생각들로 가득하여 얼굴이 굳어 있었다. 동탁의 군대가 들어온다는 소식을 듣고 조조는 크게 염려했다. 조조는 동탁을 알지 못했지만, 앞으로 정국이 어떻게 전개될지 알았다. 외부에 어떤 군대가 들어오더라도 조정에게는 모두 중대한 위협이 될 것이다. 이를 제대로 처리하지 않으면 내전으로 이어질 수 있었다. 오래지 않아 소제(少帝)가 쫓겨나고 정원(丁原)이 여포에게 죽임을 당했으며 원소가 도망치는 일이 벌어졌다. 조조는 이 화가 자신에게 닥쳐오리라는 것을 알았다.
그래서 그는 먼저 아버지 조숭이 도성을 떠나도록 했다. 그리고 고향인 패국의 초현(?縣)으로 조홍(曹洪)에게 보내, 가족을 다른 곳으로 옮기도록 했다. 과연 며칠 지나지 않아 동탁에게서 효기교위(驍騎校尉)를 맡으라는 요청이 왔다. 낙양의 모든 금위군(禁衛軍)을 관리하라는 명령이었다.
조조의 관심은 그저 한나라 황실을 지켜내는 데 있었던 것이 아니라, 사회 질서를 회복하고 천하를 안정시키는 데 있었다. 따라서 그는 동탁이 제멋대로 조정을 협박하여 천하의 안정을 파괴하는 행위에 협력할 수 없었다. 그러나 자신의 세력이 미약하다는 것도 잘 알았다. 낙양성 내에서는 상당히 명망이 있었지만 이것은 빈 이름이었고, 정치투쟁에서는 그다지 큰 의미가 없었다. 오히려 자신의 신변과 집안의 안전에 위협을 받기 쉬웠다. 그는 차라리 상황을 잠시 지켜보기로 하고 원소처럼 강력하게 반대 의견을 표현하지는 않았다.
또한 조조는 즉시 중대한 결단을 내려야 했다. 만약 관직을 받으면 자신이 동탁의 행위에 동의한다는 표시가 되었고, 관직을 받지 않으면 살아남기 어려웠다.
조조의 첫 번째 생각은 삼십육계 줄행랑을 치는 것이었다. 그는 어떻게 어디로 도망치며 또 도망친 뒤에는 어떻게 해야 할지 생각했다. 급한 가운데에서도 조조는 꾀를 하나 생각해냈다. 조인(曹仁)을 동탁에게 보내 핑계를 둘러댔다. 앞서 벌어졌던 십상시의 쿠데타를 진압하느라 무척 지친 데다가 오랫동안 앓던 편두통이 재발하여 며칠 쉬어야겠다는 핑계였다. 조조는 줄곧 심한 두통을 앓았기 때문에 동탁은 의심하지 않고 조조에 대한 임명을 늦추었다.
이어서 조인을 아버지 조숭에게 보내 어서 길을 떠나도록 했다. 또한 조인에게 장정 몇 사람만을 데리고 아버지를 모시도록 하여 동탁의 의심을 받지 않도록 했다. 안전을 위해 그는 조숭에게, 고향으로 가지말고 동쪽의 서주로 난을 피하도록 했다. 부친 일행이 더 머리 갈 수 있도록 조조는 일부러 임명을 하루 더 늦추었다.
11월 말의 추운 겨울날 하늘빛이 어두워졌을 때, 조조는 관저 사람에게 다음날 황후를 뵙는 일로 바빠서 일찍 쉬어야 하니 시중들 필요가 없다고 말했다. 집에 돌아온 뒤 조조는 곧 외출복으로 갈아입고 찬 기운을 막는 외투를 걸치고 안에는 병기를 숨기고 관저 뒷벽을 넘어, 홀로 자신이 살던 곳을 빠져나갔다. 사람의 주의를 끌지 않도록 조조는 걸어서 어둠을 헤집으며 성을 빠져나갔다.
하룻밤 하루낮을 걸어 사예(司隸)지역 가까이에 있는 중모현(中牟縣)에 이르렀을 때, 조조는 먹을 것을 찾다가 야간 순찰대에 붙잡혔다. 조조는 의미 없는 죽임을 당하고 싶지 않아, 저항하지 않고 현령을 뵙겠다고 요청했다.
중모현령은 이미 동탁이 보낸 체포령을 받았고, 잡혀온 사람이 바로 도망 중인 조조라는 것을 알아보았다. 그러나 이 일을 처리할 책임이 있던 공조(功曹)는, 동탁이 권력을 휘둘러 세상이 어지러워져만 가는 상황에 조조와 같이 명망이 높은 영웅을 죽일 수는 없다고 생각했다. 공조는 조조를 몰래 풀어주어, 그가 밤을 틈타 사예 지역으로 도망칠 수 있도록 해주었다.
조조는 진류에 이르러 그곳에서 기다리던 조홍을 만날 수 있었다. 그들은 가산을 팔아 얻은 자금을 가지고 공개적으로 병사를 모집하여 동탁을 토벌할 준비를 했다. 혼자의 힘으로 병사를 모집하여 당시에 역량이 가장 막강했던 서량의 군대에 대항하고자 한 것을 보면 조조의 열정과 담력이 얼마나 큰지 알 수 있다. 그의 열정에 감동하여 진류 지역의 많은 부호가 자금을 내어 도왔다. 조조는 사병들과 거의 같이 생활하고 같이 군대에서 갖추어야 할 무기와 장비를 준비해나갔다.
『태평어람(太平御覽)』에는 다음과 같은 일화가 실려 있다. 조조가 모집한 병사와 말들은 진류 부근의 양읍(襄邑)에 주둔하고 있었다. 어느 날 관복을 벗고 작업복으로 갈아입은 뒤 대장장이와 함께 짧은 칼을 만들었다. 때마침 북해(北海)사람 손빈석(孫賓碩)이 조조를 찾아왔다. 그는 조조를 보고 빈정거리며 말했다.
“큰일을 생각해야 할 사람이 대장장이와 함께 겨우 칼이나 만들고 있소?”
이에 조조는 웃으며 대답했다.
“작은 일도 잘하고 큰일도 잘하는 것이 무에 나쁠 것이 있겠소!”
전해져 오는 이 말이 사실인지는 모르지만, 이 기간에 조조는 힘든 노동의 고통을 참아내며 뜨거운 열정으로 동탁에 맞설 준비를 했고, 그리하여 진류 지역 백성들의 뜨거운 지지를 얻었다. 며칠 지나지 않아 조인이 조숭을 안전하게 서주로 도망치게 한 뒤 진류에 와서 합류했다. 동한 영제 중평(中平) 6년, 곧 한 헌제 영한(永漢) 원년 12월 중순에 조조는 겨우 병사 5000명을 데리고 당대 최고 무장 세력인 동탁에게 대항하는 첫 번째 의군이 되었다.
계책을 잘 세워라
건안 원년(196) 한나라 헌제는 하동에서 낙양으로 돌아왔다. 조조가 헌제를 모시는 문제와 허창(許昌)으로 도읍을 옮기는 문제에 대하여 논의할 때, 어떤 이들은 화산(華山)의 동쪽 지역이 아직 완전히 평정된 상태가 아니고, 한섬과 양봉이 막 천자를 이끌고 낙양으로 왔으며, 또 이들은 북쪽으로 장양(長楊)과 연합한 상태라서 갑자기 이들을 제압할 수는 없다고 생각했다.
이때 순욱이, 옛날 진(晉)문공이 주나라 양왕을 맞아 낙양으로 되돌아가자 제후들이 마치 그림자처럼 따르며 모셨으며, 한 고조가 동쪽으로 정벌을 나서며 항우에 의해 죽음을 당한 의제를 위해 흰 옷을 입으니 천하가 고조에게 마음을 돌렸다는 이야기를 하며 이렇게 말했다.
“지금 천자께서 혼란을 피해 쫓겨 돌아다니시니 장군께서는 처음으로 정의로운 군대를 일으키셨습니다. 그러나 산둥 지역이 아직은 혼란스럽기 때문에 황제를 맞으러 멀리 함곡관 서쪽까지 달려갈 수는 없는 형편입니다. 그러니 장수들을 나누어 보내시어 위험을 무릅쓰고라도 황제께 연락이 닿도록 하십시오. 비록 지금 장군께서는 재난을 막아내느라 밖에 계시지만, 마음속으로는 황제께서 계신 황실을 잊으신 적이 없습니다. 장군께서 이리하신 것은 천하를 바로잡으려는 장군의 본디 뜻에 의한 것이었습니다. 지금 황상의 가마는 서경인 장안에서 동경인 낙양으로 되돌아오기는 했지만, 낙양은 덤불만 우거진 상태입니다. 정의로운 선비들은 나라의 뿌리인 조정을 보존하려는 생각을 하고, 백성들은 살기 좋았던 옛날을 떠올리며 슬퍼하고 있습니다. 진실로 이때를 좇아 황상을 받들어 백성들의 소망을 따르는 것은 위대한 순리입니다.
가장 높은 기준이 되시는 천자를 지키시어 영웅과 호걸들을 순순히 따르게 하는 것은 위대한 지략입니다. 드넓은 정의가 되시는 천자를 부축하여 영웅과 준걸들을 오게 하는 것은 위대한 덕성입니다. 비록 천하에는 이러한 법도를 거스르는 반역의 무리가 있으나 우리의 걱정거리가 되지 못함이 분명합니다. 한섬과 양봉이 어찌 감히 우리에게 덤벼들어 해를 끼칠 수 있겠습니까! 만약 이처럼 좋은 때에 맞추어 천자를 맞아들이는 계획을 실천하지 않는다면 사방에서 딴마음을 먹을 수 있을 것입니다. 그렇게 되면 나중에 지금과 같은 생각이 들더라도 이미 때는 늦을 것입니다.“
조조는 마침내 낙양으로 가서 천자를 받들어 모시고 허창에 도읍을 세웠다. 그러나 원소는 이와 달랐다. 원소는 상황 판단이 늦고 과단성이 부족하여 결국에는 좀처럼 얻을 수 없는 좋은 기회를 잃고 말았다.
임무를 맡기면 의심하지 말고, 의심스러우면 임무를 맡기지 말라
조조는 다른 사람들의 평가에 따라 사람의 능력을 평가하려 하지 않았다. 그리고 서로 다른 능력을 가진 사람들이 서로 다른 영역에서 발휘하는 능력을 적극적으로 인정해주었다. 그럼으로써 인재들은 더욱 자신의 능력을 발휘하려 했다. 그는 빗발치는 화살을 무릅쓰고 눈부신 전공을 세운 장군들에게 큰 상을 내린 것처럼, 비록 실제 전투에 참여하지는 않았지만 전략을 짜고 전쟁의 흐름을 바꾼 문인들에도 큰 상을 내렸다.
조조가 이렇게 문인을 중시했으므로 많은 문인이 그에게 구름처럼 모여들었다. 이들 가운데 유명한 문인들의 동아리를 ‘건안7자(建安七子)’라고 한다. 건안7자의 한 사람인 왕찬(王粲)은 원래부터 조조 집단에 소속된 문인은 아니었다. 그는 유표 밑에서 15년 동안이나 일해왔지만, 생김새가 못나서 눈에 띄지 않았고 중용되지도 않았다. 하지만 왕찬은 조조가 피 한 방울 흘리지 않고 형주 땅을 통째로 차지하는 데 결정적인 구실을 한 인물이었다. 그의 공로가 어찌 용맹한 장군 열 명이 세운 공로에 뒤질 수 있겠는가! 조조가 위나라를 세운 뒤 왕찬은 시중(侍中) 벼슬을 지낸다.
조조의 문인 우대 정책은 자기 개성과 주관이 뚜렷하고 풍격이 강건한 문인들을 길러냈다. 건안7자의 한 사람이었던 유정(劉楨)은 태자 조비의 견씨(甄氏)부인을 똑바로 쳐다보는 불손한 행동을 보이기조차 했다. 봉건시기 신하가 태자의 부인을 똑바로 쳐다보는 것은 목이 달아날 정도 되는 불경죄에 해당했다. 유정이 견씨 부인을 똑바로 쳐다본 것은 견 부인의 권위를 인정하지 않는 유정의 곧은 성품을 나타낸다. 견 부인은 원래 원소의 둘째아들인 원희(袁熙)의 처였다. 조조가 기주를 격파한 뒤 그녀를 아들인 조비에게 주었으므로 유정은 그녀에게 존경을 표시하지 않은 것이었다.
이러한 일이 있었음을 보고 받은 조조는 화가 머리끝까지 났지만, 유정을 차마 죽이지는 못하고 제왕이 쓰는 물건을 만드는 황실의 공장에서 일을 하도록 시켰다. 이에 유정은 돌 가는 일을 맡게 되었다. 조조가 황실의 공장에 들러 작업을 살피다가, 유정이 똑바로 앉아서, 바른 낯빛으로 돌 가는 것을 보게 되었다. 조조가 그에게 물었다.
“자네가 가는 돌이 어떤가?”
유정은 그 말을 듣자 무릎을 꿇고 자신의 처지를 빗대어 말했다.
“이 돌은 형산에 걸린 바위의 꼭대기에서 나왔으므로 겉으로는 다섯 색깔 무늬가 빛나고, 안으로는 변씨의 구슬과 같은 가치를 지닙니다. 이 돌은 갈아도 이보다 빛나게 할 수 없고, 쪼아도 더 무늬를 보태지 못할 정도로 아름답습니다. 하늘로부터 받은 기운이 굳고 단단해서 이 모습이 바로 본디 모습입니다. 그 무늿결이 구불구불하다 해서 그 무늬를 똑바로 펼 수는 없답니다.”
조조는 곁에 있던 시종들을 돌아보며 크게 웃고, 그날 바로 유정의 죄를 사면했다. 조조는 돌의 성질을 쉽사리 바꾸기 어려운 것처럼 사람의 성격도 바꾸기 어려우니 자신을 그만 고생시키라는 유정의 문학적 표현에, 그를 너그럽게 용서했던 것이다. 한편 견씨 부인은 그 뒤로 조비와의 명제가 되는 조예(曺叡)를 낳았지만, 조비가 황제의 자리에 오르면서 총애를 잃고 천자를 저주했다는 죄목으로 죽임을 당한다.
싸우려고 하지 않는 사람은 성공할 수 없다
걸출한 인물들의 공통점은 사나운 현실을 두려워하지 않고 과감하게 덤벼든다는 점이다. 그러나 달걀로 바위를 치는 것과는 다르다. 그들은 기회를 잡아 뛰어든다.
중평6년(189) 12월, 조조는 진류군에서 정식으로 군대를 일으켰다. 당시 주(州)의 목(牧)과 군(郡)의 수(守) 가운데 어떤 이는 적극적으로 그를 도와 많은 준비를 해주었고, 어떤 이는 망설이며 바라만 보았다. 진류의 태수 장막은 조조와 의기가 투합하여 함께 준비하고 계획을 짰다. 조조는 비록 병사의 수가 적었고, 더 많은 명사를 갖출 수 없었지만, 기회를 기다리지만은 않았다. 그는 먼저 의로운 군대를 일으켜 비범한 담력과 식견, 기백과 용기를 표출했다. 그의 이러한 행위는 반동탁 투쟁의 물결을 일으키는 데 배우 결정적인 구실을 했다.
다음해 2월, 조조와 장막의 뒤를 이어 함곡관 동쪽의 각 주와 군에서 비로소 하나하나 군대가 일어나 동탁을 토벌하려는 움직임이 있었으니, 그 주요 세력으로는 후장군(後將軍)인 원술, 기주의 목인 한복(韓馥), 예주자사인 공주(孔?), 연주자사인 유대, 하동의 태수인 왕광(王匡), 발해(渤海)의 태수인 원소, 동군(東郡)의 태수인 교모(橋瑁), 광릉(廣陵)의 포신(鮑信) 등이 있었다.
조조가 앞장서면서 전국적인 규모로 반동탁 전선이 형성된 것이다. 관동의 여러 군대는 각 지역에 나뉘어 주둔했다. 그러나 관동의 제후들은 전선에 병사들을 펼치며, 동탁을 몰아내고 나라를 구하자고 소리쳤지만, 실제로는 이부자리를 덮고서 다른 꿈을 꾸는 꼴로 각자가 다른 마음을 품고 있었다. 이들은 단지 자신의 힘을 지키는 데 급급하여 동탁과는 진짜로 싸우려 들지 않았다. 이에 조조는 매우 실망해서 화를 내며 각각의 장군들에게 다음과 같이 말했다.
“정의로운 군대를 일으킨 것은 포기하고 어지러운 세력을 없애기 위해서입니다. 큰 무리가 이미 이렇게 모였는데, 여러분께서는 무엇 때문에 머뭇거리십니까? 만약 동탁이 산동의 우리 연합군이 일어났다는 소식을 듣고, 왕실의 위엄에 기대고 낙양과 장안의 험난한 요새에 의지하여 우리가 있는 동쪽으로 쳐들어와서 천하를 차지하려 한다면, 그가 비록 도의에 어긋나 막되게 행동하더라도 충분히 환란을 일으킬 만합니다. 그는 지금 궁실을 불태우고 천자를 을러메어 수도를 옮겼으니, 천하가 부르르 떨면서 누구를 의지해야 할지를 모르고 있습니다. 이에 우리가 그를 한 번 치기만 하면 천하는 안정될 것입니다. 이 기회를 잃어서는 안됩니다.”
여러 장수들은 조조의 격정적인 말에 꿈적도 하지 않았다. 조조는 단독으로 출동할 것을 결정하고 여러 장수들을 이끌었지만, 결국에는 겨우 포신 형제만 호응했을 뿐 장막조차 위자(衛玆)만을 보내고 자신은 그대로 있으면서 움직이지 않았다.
조조는 어쩔 수 없이 겨우 두 부대를 이끌고 출격했다. 그는 먼저 성고를 차지한 뒤에 다시 좋은 계획을 내려고 했다. 그러나 형양의 변수(?水)가에서 동탁군의 대장 서영(徐榮)의 대군과 맞닥뜨리게 되었다. 조조의 부하는 모두 신병들이어서 훈련이 부족했다. 동탁의 군대는 실제 전투 경험이 풍부한 양주(?州)의 기병이었다. 결국 조조군은 하루 동안의 격렬한 전투에서 패배하고 말았다. 포신은 부상을 입었고, 조조도 화살에 맞았는데 조홍이 죽음을 무릅쓰고 구해주었기에 운 좋게 살아날 수 있었다.
변수 전투는 조조의 군사적?정치적 생애에서 첫 번째 참패였다. 그는 피의 대가로 한 가지 사실을 깨닫게 되었다. 제후들은 모두 천하를 구할 만한 인재가 되지 못하고, 큰일을 이룰 수 있는 자는 바로 조조 자신뿐이라는 것을! 그는 처음부터 다시 시작해야만 했다.
범을 풀어주고 산으로 돌려보내지 않는다
건안 3년(198), 여포는 다시 조조에게 반란을 일으키고 원수에게 붙었으며, 고순(高順)을 파견해서 소패에 있는 유비를 공격해 무찔렀다. 조조는 하후돈을 파견해 유비를 구원하려 했지만, 거꾸로 고순에게 패배했다. 이에 조조는 직접 여포를 징벌하러 그 성 아래까지 가서 여포에게 서신을 보내, 어떻게 행동하는 것이 재앙이고 어떻게 행동하는 것이 복인지를 설명해주었다. 여포는 항복하려 했으나, 진궁 등은 자신들이 조조에게 지은 죄가 너무 깊다고 생각하고 여포가 항복하려는 것을 막았다. 그리하여 여포는 사람을 보내 원술에게 구원을 요청했다. 원술은 직접 기병 1000여 기를 이끌고 싸움에 나섰지만, 패배하여 자신의 성으로 되돌아 달아나 성을 지키기만 할 뿐 감히 나와서 싸우려 하지 않았다. 원술은 여포를 구원할 수 없었던 것이다.
여포는 비록 빠르고 사나웠지만 계략이 없었고 의심하고 꺼리는 것도 많았으므로, 그 무리 전체를 통솔하지 못한 채 그저 몇몇 장수만 믿었다. 그러나 몇몇 장수들도 각각 의견을 달리하여 서로 의심했으므로 싸울 때마다 패배했다. 조조는 여포가 지키는 성 주위에 구덩이를 파고 석 달을 싸웠다. 그러자 성안에 있던 윗사람과 아랫사람들의 마음이 서로 벌어지게 되었다. 여포의 장수 후성(侯成) 송헌(宋憲) 위속(魏續)이 진궁을 묶고서 휘하의 무리를 이끌고 조조에게 항복했다. 여포는 직속 부하들과 함께 백문루(白門樓)에 올랐다. 조조의 군대가 포위를 꽉 죄어 몰아치자, 여포는 이에 백문루에서 내려와 항복했다. 마침내 여포를 사로잡은 것이다. 이에 여포가 말했다.
“오랏줄을 너무 꽉 묶어서 숨을 못 쉬겠으니, 좀 느슨하게 풀어주시오.”
조조가 말했다.
“범을 묶을 때는 어쩔 수 없이 꽉 죄게 묶는 법이라네.”
“저 여포는 현명하신 조 공에게 가장 큰 걱정거리였소이다. 오늘 조 공께 이미 이렇게 항복했으니, 천하에 걱정할 필요가 없습니다. 현명하신 공께서는 보병을 거느리시고, 저더러 기병을 거느리게 하신다면, 천하를 평정하기 어렵지 않을 것입니다.”
조조는 의심하는 낯빛이었다.
이때 유비가 앞으로 나와서 말했다.
“현명하신 조공께서는 여포가 정 건양(정원)과 동 태사(동탁)를 섬겼던 것을 보지 못하셨습니까!“
조조는 고개를 끄덕였다. 여포는 유비를 째려보며 말했다.
“네놈이야말로 가장 믿을 수 없는 놈이로구나.”
이리하여 조조는 여포를 목매달아 죽였다. 여포와 진궁, 고순 등은 모두 목을 베어 허창으로 보냈고, 그 뒤에 이들을 땅에 묻었다.
범을 풀어주면 결국에는 그 해를 받게 된다. 조조는 일의 걱정거리가 될 수 있는 뿌리를 남겨두지 않고 확실하게 쳐 없앴다. 반면에 칼끝 아래에서 사람을 살려주는 인정을 베풀기도 했다.
속으로 칼을 품었더라도 겉으로는 웃는 표정을 지어라
순욱이 조조에게 유비를 없애버리라고 건의하자, 곽가는 그 의견에 반대했다. 곽가가 말했다.
“주공께서는 정의로운 군대를 일으킨 것은 백성을 위해 난리를 없애버리기 위해서였습니다. 이에 가장 중요한 것은 천하로부터 얻어 호걸들을 모으는 것입니다. 유비는 본디 영웅이라고 불려왔습니다. 지금 그가 곤란을 만나 주공께 기대는 터에 그를 해치신다면, 천하에는 주공께서 능력있는 선비를 해쳤다는 소문이 돌 것입니다. 그렇게 되면 사해(四海)안의 뛰어난 전략가나 이름난 장수들 가운데 어느 누가 우리편으로 몸을 맡기겠습니까? 어느 누가 우리 진영으로 들어오려 하겠습니까? 유비는 분명 쉽게 부릴 수 있는 사람이 아닙니다만, 주공께서는 그를 참고 받아주신다면, 천하의 호걸들의 마음을 끌어들일 수 있을 것입니다. 걱정거리가 될 만한 사람 하나를 없애려다가 사해의 소망을 막게 된다면 얻는 것보다 잃는 것이 더 많습니다.”
하지만 정욱도 유비가 오래도록 다른 사람의 밑에 있을 사람이 아니므로 일찍 없애버리는 것이 좋겠다고 했지만, 조조는 낯빛을 바로 하며 말했다.
“지금은 천하가 크게 어지러워, 치세를 이해하는 유비와 같은 영웅이 필요한 때요. 한 사람 때문에 천하의 마음을 잃을 수는 없소. 내 생각은 곽가와 같소. 설령 나중에 유비가 배반한다고 하더라도, 나는 후회하지 않을 거요.”
이리하여 조조는 유비에게 병사3000명과 말을 내주고, 예주로 가서 유비가 소패를 빼앗아 오는 것을 도와주었다. 조조는 처음부터 원대한 계획이 있었으므로, 이를 위해 끊임없이 자신의 멋진 모습을 빚어냈고, 자신이 바라는 목표를 이루어갔다.
마음속으로 목표를 따져 보라
조조는 천하를 받든다는 명분으로 신하들을 부렸고, 또한 겉으로는 천자를 받드는 척하면서 천자를 핍박했다. 조조는 권력을 휘두르며 유씨(劉氏)왕조를 끊임없이 공격하고 약화시켰다. 조조가 한나라 유씨 왕조를 공격하여 약화시킨 것은 세 측면에서 나타난다.
첫째, 유씨 번왕(藩王: 울타리 나라의 왕)들을 없애버렸다. 유씨 성의 왕국을 없앤다는 것은 유씨 왕조의 실제 역량을 약화시키고, 나아가 한나라 헌제를 고립시키는 것을 의미한다. 건안 17년 조조는 몇몇 유씨 왕을 봉했지만, 그것은 실제로 자신이 왕이 되는 데 필요한 바탕을 마련하기 위한 것이었다. 이른바 “빼앗으려거든 먼저 주라”는 격이다.
둘째, 헌제 곁의 사람들을 끊임없이 처형하여, 헌제를 고립시키는 영원한 구금 상태에 놓이도록 했다. 조조가 이렇게 한 것은 마치 고양이가 쥐를 가지고 노는 꼴이었다.
셋째, 그런가 하면 조조는 늘 이렇게 말했다. “내가 이렇게 속마음을 털어놓는 까닭은 바로, 옛날 주공께서도 사람들이 믿어주지 않을 까 걱정하여 금등(金?)의 글로써 주나라 천자에 대한 충성을 밝히신 것을 보았기 때문이다.” 조조는 주공이 주나라 왕실에 충성을 다한 것처럼 자신도 한나라 왕실에 충성을 다 바치겠다고 말한 것이다. 그는 언제나 자신을 충성스러운 신하의 모습으로 꾸미는 것을 잊지 않았다.
실제 상황에 따라 방법을 내놓아라
『손자병법』「모공(謨攻)」편에 이르기를, “적을 알고 나를 안다면, 100번 싸우더라도 위태롭지 않다. 적을 알지 못하고 나만 안다면, 반은 이기고 반은 진다. 적도 알지 못하고 나도 알지 못한다면 싸울 때마다 반드시 질 것이다(知彼知己, 百戰不殆; 不知彼而知己; 一勝一負; 不知己, 每戰必敗).” 이는 손자가 수많은 전쟁을 벌이면서 비로소 얻은 결론이며, 천고에 변치 않는 명언이다.
조조는 원술을 막기 위해 유비를 보냈다. 그러나 유비는 하비에 이르러, 서주의 자사인 차주(車?)를 죽이고 반란을 일으켰다. 이에 조조는 속공으로 유비를 정벌하려 했으나, 전략을 논의하는 사람들은 만약 군대를 내보냈다가 원소가 그 뒤를 치면 지금 차지한 곳까지 잃게 될까 두려워했다. 조조는 망설여져서 곽가에게 물었다. 곽가는 원소가 느리고 머뭇거리는 성격이라 분명 빠르게 움직이지 않을 것이라며, 유비가 아직 사람들의 마음을 얻기 전에 그를 치면 분명 이길 수 있다고 했다. 이는 생사가 달린 기회이니, 때를 잃어서는 안 된다고도 했다. 이제 조조는 동쪽으로 유비를 정벌했다. 유비는 싸움에 져서 원소에게 달아났으나, 원소는 곽가의 말대로 과연 군대를 내지 않았다. 조조와 곽가는 원소를 잘 알았던 것이다.
제갈량이 ‘공성계(空城計)’를 펼칠 수 있었던 것도 그가 사마의를 잘 알았기 때문이다. 제갈량은 양평(陽平)에 주둔하면서 위연(魏延)의 여러 군대와 병사들을 동쪽으로 보내고, 겨우 만 명을 남겨 성을 지켰다. 이때 사마의가 20만 무리를 거느리고 제갈량을 막았는데, 위연의 군대와 길이 어긋나, 사마의의 군대는 곧장 제갈량과 겨우 60리 떨어진 곳까지 이르게 되었다.
정탐꾼이 곧장 제갈량과 겨우 60리 떨어진 곳까지 이르게 되었다. 정탐꾼은 사마의에게, 제갈량이 성 안에 있으며 병사의 수가 적고 힘도 약하다고 보고했다. 제갈량도 사마의가 곧 닥쳐와 서로 부딪히리라는 것을 알고는 위연의 군대에게 가고자 했으나, 거리가 너무 멀었고 적은 병사들과 가다가 오히려 추격을 당할 위험이 있었다. 장수와 사병들은 새파랗게 질린 얼굴로, 군사들은 모두 깃발을 뉘고 북을 울리지 말며 함부로 군막 밖으로 나오지 말도록 명령을 내렸다. 그리고 또 동서남북의 성문을 활짝 열고, 그 앞길을 깨끗이 쓸고 먼지가 날리지 않도록 물을 뿌리게 했다.
사마의는 성격이 신중한 제갈량이 지나치게 약한 모습을 보이는 것은 군대를 숨겨두었기 때문이라고 의심했다. 그리하여 군사들을 이끌고 북쪽에 있는 산으로 갔다. 다음날 식사시간에 제갈량은 손뼉을 치며 크게 웃으며 부하에게 말했다.
“사마의는 분명 내가 겁을 집어먹고 숨었다가 산으로 달아났다고 말할 것이다.”
정탐꾼이 돌아와 보고하니 제갈량이 말한 그대로였다. 사마의는 나중에 이 사실을 알고 깊이 한스러워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