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치ㆍ군사 리더와 성공

Military and Political Leaders & Success

   
윌리엄 J. 오닐(역자 : 이근수 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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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식의날개
   
12000
2005�� 06��



■ 책 소개
어떤 분야에서든 성공한 사람들은 최고가되기 위해 필요한 공통된 자질을 가지고 있다. 욕구와 결단력, 추진력 등이 그것이다. 또한 제각각 경쟁에서 승리하여 정상에 도달하기 위해자신만의 독특한 방법을 체득하고 있다는 것도 공통점이다. 그들은 어떻게 성공적인 지도자의 자리에 올라설 수 있었을까? 

 


이 책은 세계 역사를 주도해 온 군사 지도자와 정치 지도자 55인에 관한 이야기다. 훈련과결단력, 성실성, 신념, 혁신과 전략, 위험의 극복, 동기 부여와 배려심 등 그들이 성공적인 리더의 자리에 오를 때까지의 핵심적인 이야기를 한사람당 4∼5쪽 분량으로 압축한 것이다. 이 이야기는 미국 내에서만 100만 명 이상의 독자를 가지고 있는 「Investor"s BusinessDaily」의 Leaders & Success 시리즈로 연재되어 인기를 누린 바 있다.


또한 이 책은 정치군인들의 군사독재로 얼룩진 현대사를 갖고 있는 우리에게 많은 시사점을던져주고 있다. 진정한 군인의 세계가 어떠한지, 역사에 남는 정치가는 어떠해야 하는지를 새삼 생각하게 한다. 원제가 Military andPolitical Leaders & Success인데도 군사·정치 리더와 성공이라고 하지 못하고 정치·군사 리더…로 순서를 바꿀수밖에 없는 게 우리의 현실이기 때문이다.


정치가나 직업군인으로서 성공하려는 사람, 대학생, 고등학생, 그리고 자녀들을 이러한 분야의인재로 키우고 싶은 부모들은 이 책의 사례들을 통해 영감을 얻고, 고금의 위대한 정치·군사 지도자들을 성공으로 이끈 비결을 확실하게 배울 수있을 것이다.


■ 저자 윌리엄 J. 오닐(William J. O"Neil )
100만 명의 고정 독자를 가지고 있는 「Investor"s Business Daily」의 창립자이자 현 발행인. 주요저서로 『성공적 투자자 : 8천만 투자자들이 큰 손실을 피하고 성공적 투자를 하기 위해 알아야 하는 것들』『주식으로 돈 버는 법 : 불황기에도성공하는 투자기법』『성공적 투자에 필요한 24개의 철칙 : Investor"s Business Daily의 창립자로부터 배우는 중요한투자기법』등이 있다.


■ 역자 이근수·이덕로
이근수
 : 서울대 외교학과졸업, 고려대 대학원 정치외교학과(정치학 석사), 경희대 대학원 정치학과(정치학 박사), 미국 Center for Strategic andInternational Studies(CSIS) 객원연구원, 현재 한국국방연구원(KIDA) 안보전략연구센터 책임연구원/국방정책연구실장.


이덕로 : 서강대 정치외교학과 졸업, 연세대 대학원행정학과(행정학 석사), 미국 플로리다 주립대학(FSU) Askew 행정대학원(행정학 박사), 연세대학교 도시문제연구소 연구원, 미국 플로리다주립대학 Center for Economic Forecasting and Analysis 선임연구원, 현재 한국국방연구원(KIDA)자원관리연구센터 선임연구원. 


■ 차례
서문 - 윌리엄 J. 오닐


PART 1 훈련과 결단을 통한 성취 
조직적 대통령드와이트 아이젠하워 25 
민주주의의 설계자 토머스 제퍼슨 31 
로마제국의 초석 줄리어스 시저 36 
철의 여인 마거릿 대처41 
양심적 전쟁영웅 앨빈 요크 46 
최우수 전투기 조종사 윌리엄 비숍 52 
작은 정부를 실현한 캘빈 쿨리지 58
역동적 대통령 시어도어 루스벨트 63 
서부 확장의 선구자 새뮤얼 휴스턴 69 


PART 2 성실로 쌓은 신뢰 
정직의 대명사 해리트루먼 77 
전쟁의 천재 조지 패튼 82 
이스라엘 총리 이츠하크 라빈 87 
남북전쟁의 영웅 로버트 리 92
국무장관에 오른 흑인 장군 콜린 파월 97 
아메리카 인디언 지도자 테쿰세 103 
군인 정치가 조지 마셜 108
충직한 장군 존 퍼싱 113 


PART 3 신념을 추구하는 지도자 
노예의 해방자에이브러햄 링컨 121 
공군 창설의 아버지 빌리 미첼 127 
최초의 흑인 조종사 벤저민 데이비스 2세 132 
아프가니스탄의투사 아메드 샤 마수드 137 
남북전쟁의 승장 율리시스 그랜트 143 
체코의 지도자 바츨라프 하벨 149 
아이티의 해방자투생 루베르튀르 155 
민권운동가 넬슨 만델라 160 
위대한 인디언 시팅불 167 
존경받는 퍼스트레이디 엘리너 루스벨트173 


PART 4 성공의 길을 밝히는 혁신과 전략 
대제국의건설자 알렉산더 대왕 181 
미국 건국의 아버지 조지 워싱턴 187 
천년왕국의 기틀을 다진 콘스탄티누스 대제 193 
도쿄공습의 영웅 제임스 둘리틀 198 
인도의 황금시대를 연 악바르 대제 204 
전쟁론의 저자 칼 폰 클라우제비츠 209 
컴퓨터제독 그레이스 머레이 호퍼 215 
전략정보국 창설자 윌리엄 도노번 221 
군사전략가 존 보이드 227 


PART 5 위험 속에서 기회를 찾다 
행동주의자 레흐바웬사 235 
대공황을 극복한 프랭클린 D. 루스벨트 242 
터키의 국부 무스타파 케말 아타튀르크 248 
미드웨이 해전의영웅 체스터 니미츠 253 
황소 제독 윌리엄 F. 홀시 258 
이집트 대통령 안와르 엘 사다트 264 
중세의 여장부아키텐의 엘레아노르 269 
남아메리카의 해방자 시몬 볼리바르 276 
대중과 함께 한 대통령 앤드루 잭슨 282


PART 6 동기부여와 배려로 얻은 승리 
혜안의정치가 윈스턴 처칠 291 
위대한 제독 호레이쇼 넬슨 297 
유럽을 정복한 나폴레옹 보나파르트 303 
완벽한 전략가 버나드로 몽고메리 308 
미국적 가치를 재창조한 로널드 레이건 314 
죽지 않는 노병 더글러스 맥아더 320 
걸프전의 주인공노먼 슈워츠코프 327 
최고경영자 엘리자베스 1세 333 
국제사면위원회의 지네타 사강 340 
대초원의 정복자 칭기즈칸346





정치?군사 리더와 성공


PART 1 훈련과 결단을 통한 성취


조직적 대통령 드와이트 아이젠하워

드와이트 아이젠하워(Dwight D. Eisenhower. 1890~1965)에게 작은 봉투가 하나 전달되었다. 그 내용물은 요약하자면 “이제 막 인계받은 백악관은 위로부터 아래에 이르기까지 재조직이 절실하게 필요한 시점”이라는 정보였다. 그것은 1953년 새로운 직무를 시작한 지 불과 몇 시간도 안 된 미국의 제 34대 대통령이 수석 의전관에게서 건네 받은 봉투였다. 대통령은 백악관에 매일같이 날아드는 수백 통의 편지를 일일이 직접 읽어야만 했다. 그 사건을 계기로 그는 백악관 전체의 시스템도 개조해야겠다고 결심했다. 1953년 그는 백악관 내부에서부터 개혁을 추진했다. 그는 참모들에게 다른 사람들이 해결할 수 없는 문제에만 시간을 할애하고 싶다고 말했다. 그리고 개인적 업무를 담당하는 참모와 대통령 업무를 도와줄 직무 참모진을 신설해서 그의 모든 업무를 관리토록 했다. 그 후로 이러한 시스템이 표준 관행으로 정착되었다.


아이젠하워가 계획을 세우는 과정에서 비판을 수용하는 일은 중요한 부분을 차지한다. 아이크는 항상 그의 결단을 요구하는 복잡한 이슈들을 앞에 놓고 다른 사람들의 다양한 견해를 물었다. 그는 사람들에게 각자의 견해를 밝히는 것은 사적 이해와 전혀 무관해야 한다는 점을 주지시켰다. 백악관에서는 금요일마다 각료회의가 열렸다. 그 자리에서 아이크는 각료들에게 국가를 위한 최선의 대안을 제시하도록 요구할 뿐 각 부처의 요구사항은 알고 싶어하지 않았다. 그는 그들이 자기 부처의 이익만을 취하려는 영업사원이 아니라 정치가여야 한다는 점을 강조했다.


끊임없이 배우는 것은 아이젠하워에게 중요한 열쇠였다. 그는 복잡한 미국 경제를 감독하기 위해 신문의 금융면을 공부했다. 또한 친구들이나 서른도 안 되는 나이에 증권시장에서 큰 재산을 모은 버나드 바루크(Bernard Baruch)와 같은 성공한 투자자들로부터 조언을 구했다. 또 다른 시금석은 근면이었다. 대통령이 되었을 때, 아이크는 오전 6시에 기상해서 정보서류철을 읽고 세 가지 신문을 훑어보는 것으로 하루일과를 시작했다. 하루에 네 갑씩이나 피울 정도로 애연가였던 아이크는 ‘스스로에게 내린 단 한 번의 명령으로’ 어느 날 갑자기 담배를 끊어 버렸다. 그는 또한 인생이란 모름지기 즐거워야 한다고 믿었다. 다트머스 대학 학생들에게 그는 이렇게 연설했다.


“하루가 유쾌하고 즐겁고 만족스럽게 기억될 수 없다면 그 날은 손해를 본 것이다.”



PART 2 성실로 쌓은 신뢰


정직의 대명사 해리 트루먼

해리 트루먼(Harry Truman)은 “사람에겐 언젠가 분연히 일어나 자기에게 주어진 책무를 완수해야 하는 때가 온다”는 것을 믿었다. 청렴과 강한 직업윤리로 무장한 그는 제2차 세계대전의 종전에 기여했고, 소련에 대한 봉쇄정책을 구축했으며, 1948년에는 유럽을 지원하기 위한 마셜 플랜을 제창했고, 1949년에는 나토의 창설에 기여했다. 트루먼은 또한 1948년과 1949년의 베를린 공수작전과 1950년 한국전 참전을 명령한 바 있다.


켄 헤클러(Ken Hechler)는 트루먼을 책임감이 무엇인지 아는 사람이라고 평한다. 1949년 프린스턴 대학의 정치학과 교수였던 헤클러는 트루먼의 백악관 연설 담당 비서관으로 발탁되었다. 헤클러는 최근 인터뷰에서 트루먼이 집무실에 참모들을 모아 놓고 기자회견을 열어 맥아더 장군을 해임하던 상황을 회고했다. 당시 집무실 책상에는 “모든 책임은 내가 진다(The Buck Stops Here)"라는 문구가 붙어 있었다. 소장 참모 중의 한 사람이 대통령에게 맥아더를 해임하는 안건에 대해 합참해서 만장일치로 찬성했다는 사실을 알려야 한다고 진언했다. 그러자 트루먼은 “군과 역사는 당신이 무슨 말을 했는지 정확하게 기록할 것이오. 그러나 오늘 밤 이 결단은 누구에게도 넘길 수 없이 내가 져야만 하는 짐이오”라고 말했다고 헤클러는 기억한다.


하나의 주제에 대해 완벽하게 통달하겠다는 열정으로 트루먼은 누구에게나 신뢰할 수 있는 권위를 지닌 인물로 각인되었다. 그는 제2차 세계대전에서의 전시 유류 공급, 전함 손실, 전쟁물자 생산 등을 포함한 미국의 역할에 관한 모든 문제를 다루는 조사위원회를 관장하게 되었다. 트루먼은 위원들에게 사실을 대신할 수 있는 것은 아무 것도 없다며 사실에 입각한 조사를 당부했고, 위원들도 그의 뜻에 따라 임무를 수행했다. 그의 노력은 전국적으로 인정을 받았고, 트루먼은 1943년 3월 8일 「타임(Time)」의 표지인물로 선정되었다. 「타임」은 트루먼을 정직의 대명사라고 칭찬했다. 결점이라고는 이따금 포커 게임을 즐기는 것밖에 없다는 것이다. 트루먼은 이렇게 말했다.


“좌절할 때도 있었다. 그러나 나는 한번도 포기한 적은 없다.”


국무장관에 오른 흑인 장군 콜린 파월
1950년대 초 브롱크스에 사는 젊은 콜린 파월(Colin Powell)에게는 돈이 필요했다. 그러던 어느 날 드디어 펩시콜라 공장의 청소부 자리가 나왔는데, 백인 아이들은 아무도 그 자리에 가려고 하지 않았다. 그렇지만 파월은 궂은일도 마다하지 않았고, 그 해 여름 내내 끈적끈적한 콜라 원액을 청소하면서 보냈다. 파월은 그 일을 성실하게 아주 잘 해냈고, 다음해에는 콜라병을 관리하는 업무를 맡았다. 두 번째 해 여름이 끝날 무렵 그는 교대조 담당 부조장이 되었고, 이 경험은 그에게 값진 교훈을 일깨워 주었다. 그는 『콜린 파원 자서전(My American Journey)』에서 이렇게 말하고 있다.


“모든 일은 영예로운 것이다. 항상 최선을 다하라. 누군가 지켜보고 있을지도 모르니까.”


파월은 항상 그렇게 길을 찾았고, 또 그런 삶 속에서 뭔가를 깨우쳤다. 파월은 여러 가지 고려 끝에 ROTC에 입대했고, 군에 대해 배웠다. 군대의 매력에 도취된 파월은 주어진 기회를 놓치지 않았다. 그는 ROTC 과정에서 최상위 성적을 올렸고, 육군 장교로 입대하여 이후 30년 간 복무했으며, 마침내 미군 최고 지위인 합참의장에까지 올랐다. 그는 군 복무기간 내내 놀라운 저력을 발휘했다. 그는 항상 창의적으로 문제해결책을 모색했으며, 문제에 봉착하면 이를 철저히 분석하고 모든 정보를 검토했다. 이런 태도는 그가 다른 사람들은 생각해 내지 못한 방법을 찾을 수 있는 바탕이 되었다. 파월은 항상 자신에게 중요한 것이 무엇인가를 파악하려 애썼고 거기에 집중했다. 주변에 이런저런 문제가 생겨도 자신만은 절대로 정상궤도에서 이탈하지 않았다. 심지어 인종문제로 곤란해졌을 때도 그는 굴복하지 않았다. 그는 열심히 복무했고, 항상 남에게 친절을 베풀었다. 상관들은 그의 노력을 인정하고 상응하는 포상을 했으며 파월은 꾸준히 진급했다.


파월은 자신의 능력이 무엇인지 깨닫는 것이 매우 중요하다고 생각한다. 그는 “그렇지만 동시에 자신의 약점이 무엇인지 아는 것도 중요하다. 좋은 지도자는 자신의 능력을 보완해 줄 사람을 주변에 둔다”고 말했다. 그는 또 “모든 성공적인 군사조직과 기업조직은 각기 다른 형태의 리더십을 갖추고 있다. 비전과 실행력을 다 갖추고 있는 조직에는 다른 모든 사람들의 욕구를 조정하고 통제할 수 있는 중재자가 필요하다”고 말했다. 이렇듯 리더십 구조를 제대로 이해하고 있었기에 그는 2001년 이후 조지 W. 부시(George W. Bush) 대통령 휘하에서 국무장관직을 수행할 수 있었다.



PART 3 신념을 추구하는 지도자


노예의 해방자 에이브러햄 링컨

링컨(Abraham Lincoln. 1809~1865)이 가장 참을 수 없었던 것을 꼽으라면 그건 옳지 않은 리더십이었다. 링컨은 자기 혼자만의 힘으로 전체를 이끌어 갈 수 없음을 알고 있었다. 전쟁에 이기기 위해서는 자신을 도울 수 있는 다른 리더들을 찾아야만 했다. 1863년 링컨은 미시시피주 빅스버그 공격을 성공적으로 마친 불같은 성격의 소유자 율리시스 그랜트(Ulysses S. Grant) 장군에 대해 들었다. 링컨의 보좌진들은 그랜트 장군이 무례하고, 복장도 항상 남루하며, 말도 제대로 못 한다는 것이었다. 그러나 링컨의 관심사는 그랜트가 남군의 리 장군을 이겨야만 하는 직무를 잘 수행할 것이냐 하는 단 하나뿐이었다. 승리에 대한 그의 열망은 집요했고 매우 열정적이었다. 오랜 고심 끝에 링컨은 그랜트가 적임자라고 결론을 내렸다. 링컨은 그랜트를 총사령관에 임명했고, 마침내 그랜트의 전략과 추진력이 전장에서 남군을 패배시켰다.


링컨은 정의가 하찮은 미물에게까지 실현되어야 한다는 점을 굳게 신봉했다. 어린 시절 그는 동물 학대를 반대하는 연설을 했다. 열 다섯 살 때에는 거북이를 괴롭히는 아이들을 보고 다음과 같은 연설을 했다. “우리의 삶이 우리에게 소중하듯 작은 개미의 삶도 그 자신에겐 소중한 것이다.” 열일곱 살이 되던 해 링컨은 정의를 바로 세우기 위해 변호사가 되기로 결심했다. 링컨은 온갖 직업을 전전하며 궂은 일거리를 도맡아 하는 와중에도 변호사가 되겠다는 꿈을 잃지 않았다. 어떤 일을 하든지 언젠가 자신이 변호사가 됐을 때 도움이 될 수 있는 일이라 생각하고 작은 일 하나라도 배우려 했다. 상점의 점원으로 일할 때 그는 모든 거래에서 항상 정직하고 공정하고자 했다. 우체국장으로 일할 때는 직원들을 잘 훈련시켰고, 토지감정사 일을 볼 때는 정확성을 기하기 위해 애썼다.


링컨은 정치적으로 실패하기도 했지만 성공도 거두었다. 실패할 때마다 링컨은 더 배우고 더 세련되어지려고 노력했다. 그는 신중했으며, 신념을 잃지 않고 정상을 향해 매진했다. 1860년 링컨은 공화당에서 두 번째로 선출된 대통령 후보로 출마하여 당선되었다. 1860년 12월 20일 사우스캐롤라이나주가 북부연합에서 탈퇴했고, 1861년 4월 남북전쟁이 발발했다. 내각에서조차 시골뜨기 변호사 출신인 링컨이 이 중대한 위기상황을 잘 관리할 수 있을 것이라고 믿지 않았다. 링컨은 경험 미숙을 노력으로 보충했다. 전쟁보고서를 읽기 위해 대개 아침 6시 이전부터 집무를 시작했고, 자정을 넘기고도 집무실을 떠나지 않았다. 통일국가를 향한 집념과 매사를 잘 처리하려는 의지는 항상 그에게 일하게 하는 동기를 부여했다. 리 장군은 그랜트 장군에게 1865년 4월 9일 항복했고, 6일 후 링컨은 워싱턴 D.C.의 한 극장에서 암살 당했다.


민권운동가 넬슨 만델라
1950년대 초반, 넬슨 롤리랄라 만델라(Nelson Rolihlahla Mandela)는 수도 요하네스버그에 최초로 흑인 법률사무소를 열었다. 합법화된 인종차별에 대항하기 위해 만델라는 1952년 흑인, 인디언, 혼혈인들을 규합하여 부당한 법률에 맞서는 저항운동을 벌였다. 이 운동은 전 세계에 인종차별주의에 대한 인식을 환기시켰고, 그로 인해 1912년 결성된 시민운동그룹인 아프리카민족회의(african National Congress : ANC)의 회원은 2만에서 10만으로 늘어났다. 만델라는 ANC의 성장을 저항세력의 연합을 더욱 강화할 기회로 삼았다. 1955년 전국의 반인종차별운동 세력의 단결을 꾀하고 ‘새로운 남아프리카공화국을 위한 원칙’들을 만들기 위해 국민의회를 조직했다. 112명의 백인을 포함한 3천명 이상의 대표들이 의회에 참여했다. 이 회의에서 ‘아프리카인들에게 민영기업의 지원과 자본주의의 번영을 약속’하는 민주 원칙인 역사적인 자유헌장이 채택되었다.


만델라는 폭력을 혐오했고, 그를 지지하는 사람들에게 인도의 지도자 간디의 평화적 저항 원칙을 따를 것을 촉구했다. 심지어 남아프리카공화국 정부가 ANC를 비롯한 금지된 시민운동 단체에 참여한 것을 빌미로 그를 구속했을 때도 그는 포기하지 않았다. 그는 27년 간이나 감옥에 갇혀 지냈지만 끊임없이 전 세계에 남아프리카공화국에서 벌어지는 불의를 알리고자 노력했다. 그는 곧 억압받는 남아프리카공화국을 상징하는 세계적 인물이 되었다. 1980년대 말 그의 강력한 결의는 마침내 미국을 포함한 다른 나라들을 설득해 냈다. 각국은 남아프리카공화국 정부가 모든 인종을 완전한 주권을 가진 시민으로 인정하는 데 동의할 때까지 제재를 가하기로 했다. 1990년 2월 2일 드 클레르크는 집권 6개월만에 만델라의 요구를 대부분 수용했으며 9일 후 만델라는 석방되었다.


그러나 투쟁은 끝나지 않았다. 이후 4년 동안 만델라는 민주적인 남아프리카공화국을 만들기 위한 협상을 이끌어 내고자 노력했다. 1994년 4월 최초의 다인종 선거가 치러졌다. ANC는 62.6%를 득표했고, 의회 의석 총 400석 가운데 252석을 얻었다. 그리하여 만델라는 1994년 5월 10일 대통령에 취임했다. 인종차별주의를 종식시키기 위한 노력으로 만델라와 드 클레르크는 1993년 노벨평화상을 수상했다. 현재 만델라는 AIDS가 남아프리카공화국에 미치는 영향에 대해 각별한 관심을 기울이고 있다. 국민들의 삶의 질을 향상시키려는 노력의 일환으로 그는 극빈 가정 출신의 아동들을 돌보기 위한 넬슨 만델라 아동기금을 조성했다.



PART 4 성공의 길을 밝히는 혁신과 전략


대제국의 건설자 알렉산더 대왕

BC 333년 페니키아 군도의 티레 주민들이 항복을 거부했을 대, 알렉산더 대왕(Alexander the Great : BC 256~323)은 침공작전이 필요하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당시 페니키아인들은 세계 최고의 항해사들이었다. 알렉산더는 자신의 약점을 잘 알았는데 해전도 그 중 하나였다. 하지만 문제는 없었다. 꿈을 크게 갖는 사람이 생각도 큰 법이다. 알렉산더는 부하들에게 대륙에서 섬에 이르는 길이 2천 피트, 폭 200피트의 진입로를 건설하라고 지시했다. 바다를 가로지르는 진입로를 건설하는 데는 7개월이 소요되었다. 그동안 알렉산더의 부대는 적의 화공으로 곤욕을 치러야만 했다. 하지만 수년간 알렉산더와 함께 싸워 온 병사들은 그의 명령이 승리를 염두에 둔 것임을 믿어 의심치 않았고, 그들은 마침내 티레 섬을 반도로 만들어 함락시키는 데 성공했다.


알렉산더 대왕은 서른 두 살로 사망하기 전, 지브롤터 해협에서 펀자브 지방까지 100만 평방 마일에 이르는 광대한 마케도니아 제국을 건설하여 다음 대에 물려주었다. 그는 70개 이상의 도시를 건설하여 그리스의 지도자, 이집트의 파라오, 아시아의 왕이 되었다. 그의 권력은 당대의 어느 영도자보다 강했다. 13년이나 전쟁을 치르는 동안 알렉산더는 화살에 가슴을 꿰뚫리거나, 투석에 맞아 어깨를 다치거나, 거의 실명할 뻔하기도 하는 등 아홉 번이나 심각한 부상을 당했다. 그러나 성취를 향한 그의 의지는 누구보다 강했고, 이런 모습에 매료된 부하들은 어떤 명령을 내리든 헌신적으로 충성했다. 시저나 나폴레옹 같은 후세의 영웅들도 알렉산더의 그런 점을 부러워했다.


그의 명령 하나 때문에 알렉산더의 군대는 2만 마일을 원정하고 가족들과 12년 간이나 떨어진 채 지냈음은 물론, 한여름 폭염 속에서 사막을 하루에 30마일씩 전진하는 지옥 같은 행군도 마다하지 않았다. 그러나 알렉산더는 치명적인 판단착오를 범했다. 군사들을 폭우와 진흙 구덩이를 뚫고 인도까지 진격시킴으로써 군대를 한계 상황까지 몰아붙인 것이다. 그는 과거의 승전을 상기시키며 많은 보상을 약속했지만, 격려 연설은 실패했다. 향수병에 시달린 병사들은 진군을 거부했고, 어쩔 수 없이 적의 영토를 가로질러 고국을 향한 고난의 행군을 지휘했다. 이 행군 후 그는 곧 의문스런 상황 속에서 죽음을 맞았다.


천년왕국의 기틀을 다진 콘스탄티누스 대제
물가 상승은 로마제국을 빈곤으로 몰아넣었다. 데나리온(당시 화폐단위) 가치는 수천 분의 일로 떨어졌고, 절박해진 디오클레티아누스(Diocletianus) 황제는 301년 맥주에서 흉갑에 이르는 수백 가지 품목의 가격 상한선을 정하는 칙령을 발표했다. 칙령은 재앙이었다. 상품이 모두 암시장으로 흘러 들어가 품귀 현상을 빚었고, 부정부패가 만연하여 법의 공정한 집행조차 어려웠다. 몇 년 후, 306년부터 337년까지 통치한 콘스탄티누스 대제(constantinus the Great : 272~337)는 실패한 칙령을 기억하며 문제를 근본부터 뿌리뽑기로 했다. 그는 견고하다는 뜻의 솔리두스(solidus)라는 새 금화를 발행했고, 솔리두스는 지중해 유럽의 대표적인 통화로 7세기 동안 통용되었다.


그는 30년 간 분할통치체제였던 로마제국을 한 사람의 통치자 밑으로 통합시키고 경제 안정, 종교의 자유, 인간에 대한 인도적 처우, 안정한 국방, 건전한 정부를 위해 광범위한 개혁을 주도했다. 그의 개혁은 천년왕국을 구가한 비잔틴 제국의 기틀이 되었다. 자신이 선호하는 정책이 있으면 그는 바로 채택했다. 예를 들어 그가 제정한 법의 대부분은 기독교의 도덕률에 기초한 것이었다. 그는 노예 가족을 분리하는 것과 주인이 노예를 죽이는 행위를 불법화했으며 일요일을 휴일로 지정했다. 그의 전략은 맞아떨어져 내전이 일어났을 때 기독교도들의 지원을 받을 수 있었다. 그러나 제국에는 비기독교 시민들이 더 많았다. 콘스탄티누스도 그들을 소외시키고 싶지 않았기에 그는 기독교를 국교로 채택하지는 않았다.


콘스탄티누스는 변화를 원하더라도 차근차근 실행했다. 예를 들어, 그는 대중적 인기가 높은 검투사 경기를 경멸했다. 그러나 이것을 불법화하면 폭동과 반란이 일어날 것이 분명했다. 그래서 그는 긴 안목에서 문제에 접근했다. 일단 그는 죄인을 경기장으로 보내는 것을 막았다. 이 정책으로 검투사들의 공급이 차단되었다. 경기는 시들해졌고 결국 자연스럽게 사라졌다. 콘스탄티누스는 권력투쟁이 제국을 붕괴시킬 수 있음을 알고 권력을 분할했지만, 그가 은퇴하자마자 그의 체제는 무너졌다. 황제의 자리를 노리는 군사 지도자가 너무도 많았기 때문이다.



PART 5 위험 속에서 기회를 찾다


행동주의자 레흐 바웬사
레흐 바웬사(Lech Walesa)는 노동자들을 조직화한다는 것이 생각보다 쉽지 않음을 깨달았다. 조직화가 제대로 이루어지지 않을 경우 비극적인 결과를 초래할 수도 있었다. 1970년 12월 폴란드 공산정부는 임금을 동결한 채 식량과 연료의 가격을 두 배나 인상했고, 이에 반발하여 폴란드 전역에서는 연일 파업사태가 이어졌다. 당시 스물일곱 살이었던 바웬사는 발트 해 연안의 그단스크에 있는 레닌 조선소에서 일하고 있었다. 파업위원회에 속해 있던 그는 3천 명의 노동자를 이끌고 경찰서로 향했다. 시위대는 1만 명 규모로 늘어났고 성난 군중으로 돌변했다. 바웬사가 진정해 줄 것을 호소했으나, 실제로는 자신이 오히려 폭동을 조장하고 있다는 것을 깨달았다. 그는 앞으로는 평화스런 시위만을 주도할 것을 맹세했다.


1980년 8월 정부가 다시 식량 가격을 인상했을 때 바웬사는 과거의 실책을 만회할 기회를 찾았다. 바웬사는 공장연합 투쟁위원회의 우두머리로서 책임을 맡게 되었다. 그는 비폭력 운동을 다짐했고, 약 1천만 명에 달하는 노동자를 하나의 노동조합, 즉 솔리더리티(Solidarity)로 묶었다. 그는 자유로운 사회의 필요성에 대해 대중연설을 하며 방방곡곡을 돌아다녔다. 노동자들에게 “우리는 똑같은 종류의 빵을 먹는다”고 외치며 노동자들이 당면한 문제를 잘 이해하고 있음을 이해시켰다. 바웬사는 1980년 9월 말 노동조합의 ‘단결’을 극적인 승리로 이끌었다. 그는 노조의 모든 요구안을 수용하고 6명의 공산당 간부를 해임하라고 정부를 설득했다. 결국 공산당 간부들은 바웬사같은 노조 간부들이 지나친 권력을 가지고 있다고 판단했고, 그는 1981년 12월 체포되어 11개월 간 투옥되었다.


하지만 바웬사는 감옥에서도 노조를 유지시켰고, 이 조직은 폴란드 국민의 자유, 자존, 희망의 표상으로 남았다. 1983년 그는 노벨 평화상을 받았고, 노조의 금지조치는 1988년 또 한 차례의 조선소 파업을 겪은 후에 철폐되었다. 1989년 공산당은 폴란드의 새 의회 구성을 위한 자유선거를 허용했고, 1990년 바웬사는 반세기만에 이루어진 자유선거에서 첫 번째 대통령으로 선출되어 1995년까지 재임했다.


대공황을 극복한 프랭클린 D. 루스벨트
프랭클린 델러노 루스벨트(Franklin Delano Roosevelt : 1882~1945)는 관습에 굴하지 않는 인물이었다. 1921년 그는 소아마비에 걸렸다. 그 병으로 인해 프랭클린은 불구가 되었고 고통의 구렁텅이에 빠져 공직생활이 거의 끝날 뻔했다. 모두가 그에게 사퇴를 조언했다. 아무도 불구의 정치가에게 투표하지 않을 것이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루스벨트는 자신의 상황을 분석했다. 그는 소아마비에 대해 조사해서 이해하고, 자신의 불구 정도를 명확히 인식한 후 불구를 극복할 수 있는 대안을 생각했다. 그는 어떤 어려움에도 눈 하나 깜짝하지 않았다. 루스벨트가 옳았다. 그는 정계에서 살아남았고 2년 임기의 뉴욕 주지사를 연임하게 된다. 1928년은 선거에서 승리하여 임기를 처음 시작한 해였다. 이후로 그는 네 번 연임이라는 기록을 남긴 대통령이 되었으며 마지막 임기 도중에 사망했다.


루스벨트는 미국 역사상 가장 어려운 시기인 1933년에 대통령이 되었다. 도시마다 대공황의 여파로 실직자들이 양산되고 농부들도 곡가 하락과 기근의 반복으로 도시의 실업자들과 다를 바 없는 처지에 놓였다. 은행들도 줄줄이 파산하고 온 나라가 혼돈에 빠져 그야말로 공포의 도가니였다. 대통령에 당선되자 그는 자신이 가장 먼저 해야 할 일로 적극적인 태도를 견지하고 온 나라에 자신감을 불어넣는 일을 꼽았다. 그는 전 국민에게 전하는 취임사에서 “우리가 두려워해야 할 단 한 가지는 두려움”이라고 말했다. 그는 또한 신속하게 움직였다. 취임 100일 동안 그는 (예금의 대량인출 사태를 방지하기 위해) 은행 휴일을 선포하고 의회의 긴급회기를 소집했으며 시민보호단, 시민봉사단, 공공봉사단 등 수많은 주요 구호기관들을 신설했다. 이 중 시민보호단은 250만 명의 고용을 창출했다.


그는 솔선 수범하는 지도자 상이 필요하다는 것을 잘 알고 있었다. 건강이 좋지 않았고 또 전국을 순회하기에 어려운 때이기도 했지만, 루스벨트는 기근이 든 전국의 농장을 개인적으로 직접 방문하여 실상을 파악했다. 그는 노련한 행정가이기도 했다. 루스벨트는 참모진을 서로 반대되는 의견을 제안할 수 있는 인사들로 충원했다. 이런 방법으로 갈등상황을 만든 뒤 자신이 최종적인 결정권을 발휘했다. 루스벨트는 극도로 목표 지향적이었다. 그는 제2차 세계대전에 참전하여 승리하는 것 자체가 목표는 아니라고 항상 말했다.



PART 6 동기부여와 배려로 얻은 승리


혜안의 정치가 윈스턴 처칠
1941년 6월 히틀러의 군대가 러시아를 침공했을 때, 영국 수상 윈스턴 처친(Winston Churchill : 1874~1965)은 후퇴하는 공산 세력을 배후 지원했다. 처칠의 동료 정치인들 중 적지 않은 수가 그 조치를 달가워하지 않았다. 처칠 역시 평소 반공주의자로 자처해 왔지만, 공동의 적을 앞둔 상황에서 정치 이념적 차이는 중요하지 않다고 믿었다. 추축국들을 패배시키려면 단합된 노력밖에는 방법이 없다고 생각한 처칠은 세계의 여러 지도자들의 힘을 모아 영국을 돕도록 만들었다. 미국이 제2차 세계대전에 개입하기 전에 그는 프랭클린 D. 루스벨트 대통령에게 독일의 해상봉쇄로부터 영국 상선단을 보호하기 위해 순양함을 빌려달라고 간청했고, 멀리 중국의 장제스 총통하고도 만났다. 처칠은 전쟁에서 승리하기 위해서라면 어떤 일도 할 각오가 되어 있었다.


제1차 세계대전이 발발하기 전 영국 해군을 책임지고 있었을 때, 독일을 세심하게 관찰하고 있던 처칠은 동료들에게 전쟁이 임박했음을 경고했다. 그러나 그의 말을 믿는 사람은 거의 없었다. 그렇지만 그는 의견일치를 이끌어 내려 하기보다는 자신의 판단을 믿고 어떻게든 혼자 힘으로 해군을 준비시키기 시작했다. 1914년 7월 유럽에서 갑자기 전쟁이 발발했을 때 영국군 가운데 유일하게 준비된 군대는 해군뿐이었다. 독일군의 이동 상황을 지속적으로 감시하고 있던 처칠은 이미 개전 몇 주 전부터 해군에 대해 전투 위치에 임할 것을 비밀리에 명령해 두었다. 영국 함선은 프랑스군을 지원하기 위해 영국해협을 건너는 병력의 수송뿐만 아니라 북해의 독일 잠수함 추적에도 협력할 태세가 되어 있었다. 처칠은 또한 장차 전쟁에서 항공전력이 핵심이 될 것이라 판단하고 해군 항공대를 출범시켰다. 비행기도 몇 대 되지 않고 엉성했지만 독일 비행선을 여섯 대나 격파할 수 있었다.


1940년 6월부터 1941년 5월까지 당시 영국은 런던 대공습을 포함하여 독일의 대규모 공습에 맞서 홀로 싸울 수밖에 없었다. 따라서 처칠은 그가 지닌 언변이라는 수단을 동원하여 국민들의 사기를 북돋우기 위해 진력했다. 라디오와 의회에서 행한 그의 연설은 영국 국민들에게 런던 시내를 절반이나 화재로 뒤덮었던 야간 공습을 극복할 힘을 실어주었다. 국민들에게 희망을 주기 위해 그는 공습으로 불탄 지역을 방문하여 살 집을 잃어버린 난민들을 위로했다. 1940년 그는 이렇게 말했다.


“우리는 해안에서 그리고 상륙지점에서 싸울 것이며, 들판과 시가에서 그리고 언덕에서 싸울 것입니다. 우리는 결코 굴복하지 않을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