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책은 정말 악인이었던 지도자들을 기강이 해이해진 조직과 사회, 독선에 빠져 망해가는기업과 조직의 면면을 살필 수 있는 반면교사로, 역사가 낳은 악인일 뿐 보수와 전통에 얽매여온 기존 정치세력에 도전한 개혁가 기질과 리더십을다분히 보여주는 인물들을 리더십의 올바른 모델로서 소개하고 있다.
■ 저자 박기현
중앙대학교 신문방송대학원 수학.LG그룹을 거쳐 신문사 문화부 기자, 도서신문 편집국장, 대교방송 미디어본부 편집국장, 리브로 경영기획실 이사, 서일경제연구소 부소장 등을 거쳐현재는 글쓰기에 전념하고 있다. 장편소설『러시안십자가』『별을 묻던 날』을 발표했고,『손에 잡히는 고려이야기』『마음을 다스리는 50가지지혜』『느리게 혹은 천천히』등을 펴냈다.
■ 차례
궁궐의 고양이까지 없앤 여제 측전무후
-탄압으로 얻어낸 절대 카리스마의 리더십
건안칠자를 휘어잡은 시대의 효웅 조조
-문무겸전, 인재등용의 리더십
법치와 공포의 양날을 세워 천하를 통일한 시황제
-법, 술, 세를 바탕으로 한제왕철학의 리더십
만민 평등을 외친 홍수전
-2천년 전제정치 타파를 내건 개혁적 리더십
콜럼버스를 무색케 한 대모험가 영락제
-개척과 솔선수범의 리더십
법치의 이상을 스스로 깨버린 야심가 이사
-권력과 법, 제도로 통일을 이루어낸리더십
1,800km 대운하를 건설한 양제
-권력의 집중화를 이룬 저돌적 리더십
주지육림의 오명을 남긴 동방원정의 호전가 주왕
-반면교사로 보는 포악한 군주
청제국의 마지막 보루를 자처했던 서태후
-냉정하고 과감한 폭압의 리더십
중원 사대주의를 내던진 진보주의자 묘청
-자주독립 부르짖은 혁신의 리더십
여진의 황제를 꿈꿨던 반역 용장 이징옥
-청렴하고 강직한 무인의 리더십
시대를 잘못 타고난 영웅 정여립
-파격적, 열정적, 진보적 리더십
명분은 있으나 신망을 잃은 궁예
-난세에 비전을 제시한 희망의 리더십
맨몸으로 사직을 떠받친 진성여왕
-민심을 헤아리고 스스로의 진퇴를 안 책임의 리더십
붕당정치 속에서 대조전의 주인으로 올라선 장희빈
-집념과 의리로 무장한 당당한리더십
경제전쟁을 일으킨 도요토미 히데요시
-변신과 집념, 솔선수범의 리더십
반도 침략의 원흉 이토 히로부미
-국제정세를 자국 이익에 악용한 정치가적 리더십
군국주의 첨병으로 나선 전범 도조 히데키
-영웅주의로 무장한 광기의 리더십
어느 반전주의자의 오판 야마모토 이소로쿠
-미군이 가장 두려워한 전술전략의 리더십
양두구육의 문화정치를 편 사이토 마코토
-회유와 억압, 구밀복검의헤드십
악인(惡人)들의 리더십과 헤드십(동양편)
궁궐의 고양이까지 없앤 여제 측천무후 - 탄압으로 얻어낸 절대 카리스마의 리더십
측천무후는 고양이를 끔찍이도 싫어했는데, 다음과 같은 연유 때문이라고 전한다. 권력을 잡은 그녀는 황제가 총애하던 두 비빈을 벌거벗겨 난장 100대를 친 다음, 사지를 자르고 술독에 넣어 서서히 죽도록 했다. 그러자 비빈 하나가 이렇게 저주를 퍼부었다.
“내세에 너는 쥐로 태어날 것이다. 나는 고양이로 태어나 반드시 너를 잘근잘근 씹어 먹을 테다.”
아무리 측천무후라고 해도 그 저주만은 섬뜩했는지, 그녀는 궁정에서 고양이를 일절 기르지 못하도록 했고, 자신이 행차하는 곳에는 고양이부터 없애라는 지시를 내렸다고 한다. 이로 인해 있을 수 없는 것을 뜻하는 말로 ‘당나라 궁정의 고양이’라는 말이 생겨났다고 한다.
‘몰자비’란 아무 것도 쓰지 않은 비석을 말한다. 역대 중국 황제 가운데 유일하게 몰자비의 주인공이 된 이가 있으니, 바로 철권 여성 통치자 측천무후다. 당 고종과 함께 건릉에 묻힐 때, 수많은 업적을 비문에 도저히 다 써넣을 수 없었고, 순장한 수많은 부장품들이 도굴될까 두려워 후세 사람들이 이를 알지 못하게 한 것이리라. 2000년 6월 중국의 언론 보도에 따르면, 당 고종과 측천무후가 묻힌 건릉에는 12조 원에 이르는 보물이 묻혀 있다고 한다. 당시 경제 수준으로 볼 때 이 정도의 보물을 순장했다면 나라 살림이 어떻게 되었을까 짐작할 만도 하다. 중국 유일의 여성 황제인 그녀는 잔혹한 폭군이었지만, 한편으로는 혼란기에 나라를 이끈 강한 리더십을 가진 황제였다. 우리 입장에서 보면 신라와 연합하여 고구려와 백제를 공략함으로써 치욕적인 역사를 안겨준 인물이었으나, 자국의 영토를 넓히고 국력을 키운 국제 감각이 탁월한 정치가였다.
측천무후의 성은 무, 이름은 조로, 당 초기인 624년에 출생했다. 빼어난 미모를 지녀 14세 때 당 태종의 후궁이 되었고, 태종이 죽자 비구니가 되어 감업사로 쫓겨났다. 황제의 후궁이었던 여인이 세상에 나가 다른 남자와 관계를 가지게 되면 권위가 떨어진다 하여 취한 당시의 관례에 따른 것이다. 그런데 고종을 둘러싼 황후 왕씨와 숙비 소씨의 다툼이 일어났고, 황후는 숙비에게로 기울어진 고종의 마음을 돌리기 위한 수단으로 그녀를 환궁시켰다.
왕씨와 힘을 합쳐 소씨를 폐하고 소의의 자리에 오른 그녀는 이번에는 황후를 몰아낼 음모를 꾸몄다. 어려서 궁정생활을 했던 그녀는 일찍부터 정치적 책략에 밝았고 황제의 총애를 권력에 이용하는 법을 철저히 꿰뚫고 있었다. 그녀는 자신이 낳은 아이를 이불로 덮어 질식사시키고, 이를 황후의 짓이라 누명을 씌우는 등 여러 간계를 써서 고종의 미움을 사게 만들어 결국 황후를 폐위케 했다. 결국 32세 때, 마침내 인수(印綬)를 목에 걸고 문무백관의 하례를 받으며 황후가 된 그녀는, 병든 고종 대신 정무를 맡아 자신의 등극을 반대한 신하들을 제거하고 절대 권력을 휘둘렀다.
자신의 소생을 죽일 만큼 냉정하고 무자비한 성격의 소유자인 측천무후는 철저히 정보에 의존하는 정치를 했다. 정보를 얻기 위한 방법으로 밀고를 장려했고, 역모의 소문이 떠돌기만 해도 사실로 인정하여 죄를 묻는 등 공포정치를 펼쳤다. 이 때문에 그녀는 역대 어떤 황제보다 안정된 정치기반을 유지할 수 있었다. 그녀는 가족이라 할지라도 추호의 용서가 없었다. 자신이 낳은 황태자 역시 예외가 아니었다. 683년 고종이 죽고 즉위한 아들 중종이 실권을 쥐려는 기미를 보이자, 그녀는 그를 폐위하고 다른 아들을 예종으로 세워 권력을 유지했다. 마지막 아들 이단이 예종인데, 그녀는 가부장적 권위에 정면으로 도전하여 아들의 성을 무로 바꿈으로써 모계 성 사용을 공식화하기도 했다. 물론 이는 그녀 사후에 다시 바뀌었다.
그녀의 그런 전횡은 황실과 가까운 사람들의 저항을 불렀다. 684년 서경업은 당나라 동남부 양주에서 반란을 일으켰다. 그러나 반란군은 토벌군에게 패하고, 서경업은 부하들에게 죽임을 당했다.
무후는 적대 세력을 무자비하게 숙청하면서 자신이 황제가 되기 위한 준비를 조직적으로 했다. 690년 마침내 즉위하여 성신황제라는 칭호를 받고 나라 이름을 주로 고친 그녀는, 철권통치로 정적들을 제거해 안정을 이룩해 냈다. 내치는 성공적이었다고 평가될 정도로 민란이 거의 없었고 적인걸, 위원충 등 지혜로운 신하들을 등용했다. 하지만 주변 황족과 반대파 신료들을 무자비하게 처단하여 비난을 받았다. 705년 중종이 복위되어 당나라로 이름이 바뀌고 얼마 후 병사했다.
카리스마와 정보력을 바탕으로 한 리더십
후세 사가들은 그녀가 태종과 고종 사이를 오가며 사랑을 나눈 데다 남자 후궁을 둔 것 때문에 음란하고 질투심 많은 탕녀로 기록하고 있지만, 최근 들어 중국의 재야 학자들은 측천무후에 대해 상당히 후한 평가를 내리고 있다. 그녀가 권력에 대입한 것은 황후로 재임한 15년을 포함해 거의 50년에 이른다. 이 동안 대외적으로 서경업의 난을 평정한 이후, 기록에 남을 만한 민란이나 소요, 모반 등이 없었다는 사실만 보아도 그녀의 정치수완은 탁월했다고 볼 수 있다. 비록 철권통치였지만 백성들은 안정된 삶을 누린 것으로 평가된다. 그래서 이 시기를 한나라 이후 가장 황금시대였다고 평가하는 이도 있다. 정적에게뿐 아니라 모리배와 간신 척결에도 무자비했기에 지방 관리들조차 그 위세에 눌려 백성을 덜 괴롭혔던 탓이다.
? 흔들림 없는 일관성 : 측천무후의 모토는 한마디로 ‘초지일관’이라고 할 수 있다. 한 번 주장한 것은 흔들림 없이 끝까지 밀고 가는 성격이 국가의 안정을 만들어낸 것이다. 그녀는 반대 세력에게는 추호의 용서도 없었지만, 자신에게 굽히는 이들은 철저히 보호해 주었다. 이 원칙은 그녀가 죽을 때까지 지켰다. 그녀의 영향력이 얼마나 대단했던지 사후에도 그녀를 추종하는 세력이 일어날 정도로 남성 위주의 중국 귀족체계의 근간을 흔들어 놓았다. 사대부 관료들조차 그녀를 마음속에 섬겼다는 이야기이다.
? 당근과 채찍의 병용 : 그녀는 무자비함과 너그러움이라는 극단적 양면성을 지닌 데다 이를 십분 활용할 줄 알았다. 자신을 거역하는 자는 설령 친자식이나 인척이라 할지라도 결코 용서가 없었으며, 일벌백계로 처단하는 방법 또한 끔찍하여 모두를 두려움에 떨도록 만들었다. 하지만 자신을 따르는 이에게는 한없이 관대했으며 또한 철저히 보호해주었다.
? 에너지의 집중과 분배 : 67세의 나이로 꿈에 그리던 황제의 자리에 오른 그녀는 낙양을 신도라 개칭하며 조정을 옮기고, 상대적으로 푸대접을 받던 동부지방의 인재를 등용하였다. 그리하여 대부분 서부 출신인 관료의 세력을 약화시키고, 새로운 인재들을 불러들여 자신에게 충성하는 집단으로 만들었다. 기존 관습과 보수세력을 개혁하고자 한 이 전략에 그녀는 목숨을 걸고 에너지를 쏟아 부었다. 그리하여 기존의 가신들과 반대세력을 모두 밀어내고 확실한 안정을 거둘 수 있었다.
? 뛰어난 정치적 감각 : 그녀는 국제정세에 밝았다. 서역의 반란을 잠재우고 장시 집권체제로 접어들자, 측천무후는 동쪽으로 눈을 돌려 신라 김춘추의 요청을 받아들였다. 그녀는 유인궤, 소정방, 이적 등을 앞세워 당나라 군사를 한반도에 파견했다. 그리하여 신라와 함께 고구려와 백제를 정벌, 적대적이던 한반도 정세를 우호적으로 바꾸어 놓았다. 이때 백제의 의자왕과 태자 융, 대신들과 백성 1만 2,000여 명이 당나라로 압송되었으며, 당나라는 한반도의 위세를 꺾는 계기를 마련한 것이다.
? 인재의 등용과 적절한 배치 : 그녀는 사람들을 가려 쓸 줄 알았다. 위원충, 적인걸 등의 공신을 중용하여 정사를 올바르게 펼쳤기에 후일 당나라로 정권이 돌아갔을 때도 국정에 조금도 흔들림이 없을 정도로 나라가 안정되어 있었다. 후세 사가들은 그녀의 치적으로 부패한 관료의 제거, 고른 재화 배분, 문예 부흥 등을 꼽았다. 이처럼 인재를 골라 적소에 배치한 것은 탁월한 정치적 경륜을 반증하는 것이라 할 수 있다.
콜럼버스를 무색케 한 대모험가, 영락제 - 개척과 솔선수범의 리더십
‘정난의 변’을 일으켜 제위에 오른 영락제는 조카를 죽이고 권력을 잡은 조선왕조의 수양대군과 비슷한 악평을 받고 있다. 또한 환관정치를 본격화하여 후대에 폐해를 끼치기 시작했다는 점에서도 부정적 평가를 받고 있다. 하지만 그는 제녕과 임청 간의 회통하를 준설하여 대운하를 건설했고, 5차례에 걸친 친정(親征)으로 몽고와 티벳을 확보하였다. 그는 문화정책에도 힘을 기울여 주자학을 국가 교학으로서 굳혔다.
일본과 아프리카에 이르기까지 세력을 넓힌 해외 원정은 콜럼버스를 능가하는 것으로 여겨지고 있다. 물론 영락제를 폄하하는 이들은 대외 항해는 본인이 아니라 환관 정화가 이루어낸 위업이라며 애써 무시하기도 한다. 그래서 사가들은 영락제를 내적으로는 혹독한 정치가로, 외적으로는 위대한 모험가로 평가하는 것이다.
확고한 내치와 외부로의 국력 신장
명의 태조 주원장은 31년간 제위에 머물면서 황실의 안녕과 보호를 위해 개국공신조차 수없이 숙청하고, 왕자들을 각 지역의 분봉왕으로 내보내 황실에 도전하지 못하도록 했다. 주원장 사후, 적손인 건문제가 즉위하여 중앙집권 강화책으로 왕들의 세력을 감축하기 시작했다. 그러자 연왕은 정난의 변을 일으키고 4년 뒤 즉위했는데, 그가 바로 성조 영락제다.
그는 대 몽골 전략상, 또한 전통적 적대세력의 중심지인 남경을 피해 북평을 북경이라 개칭하여 천도하였다. 그리고 경제적 중심지인 강남지방과의 연결을 위해 대운하를 개수하여 대규모 조운법을 확립, 재정적 기반을 굳혔다. 그는 환관 정화에게 명하여 7차례에 걸친 대항해 결과 인도양 연안에서 아프리카 동안까지의 여러 나라와 교역함으로써 중국인들로 하여금 세계로 눈을 돌리도록 했다. 그는 문화 정책에도 힘을 기울여 2만여 권에 이르는 일대유서를 편찬시켰으며, 국가 교학으로서 주자학의 지위를 굳혔다. 영락제는 내란으로 동요된 외정을 바로잡기 위해 5차례에 걸친 친정으로 티벳과 안남에 이르기까지 영토를 확장했으나, 1427년 7월 몽고를 정벌하고 돌아오는 길에 위무촨에서 죽었다.
엄(嚴)은 있으나 인(仁)이 없었던 냉정한 황제
영락제가 연왕 시절 조카와 대립한 정난의 변은 무려 4년을 끌었다. 이 싸움으로 수많은 백성이 목숨을 잃었으며 중원의 북부지역이 황폐화될 정도로 치열했다. 그는 황제의 자리에 오르자 수많은 관료를 숙청했고 연루자까지 모두 처형했으며, 건문제의 연호와 황제로서 지위조차 압살했다. 그는 몽고를 경제하기 위해서 수도를 북경으로 옮겼다. 하지만 천도는 결코 쉬운 일이 아니었다 무엇보다 가장 큰 문제는 당시 경제 중심지였던 강남으로부터의 물자 수송이었다. 그는 중앙 정부의 재정 젖줄을 위해 대운하를 건설하는 사업을 펼쳐 백성들의 노역을 대규모로 투입했다. 또한 재위 중에 자금성 공사를 위해서도 수많은 백성을 노역에 동원했다. 거듭되는 노역으로 백성들의 불만이 고조되자, 영락제는 이를 무마하기 위해 1421년 환관 출신인 대신 정화에게 해양원정을 명령했다. 그러나 이것도 지난 참화에 살아남아 멀리 바다 건너 도피했다는 조카 건문제를 찾아 주살하기 위한 것이라는 소문이 파다했다.
무엇보다 영락제로 하여금 악평을 받게 만든 것은 영락 18년 천도 직전에 특무기관인 동창을 설립함으로써 환관을 정식으로 등용했기 때문이다. 이는 건문제 축출 때 정보를 제공한 환관들에 대한 배려이기도 한데, 이들을 측근으로 둔 것은 관료들과 측근 황실의 사찰을 위한 것이라는 평가가 지배적이다. 동창에 이어 이를 견제하기 위한 서창까지 등장하면서 벌어진 숱한 환관의 작태와 범죄들로 중국의 역사가 오염되었기에, 환관 중용은 영락제 최대의 실패작으로 꼽힌다.
내적 불만을 대외사업으로 돌린 리더십
명 태조인 주원장과 영락제는 정반대의 정치를 실현한 인물들이다. 태조가 나라를 세우고 내정을 적극적으로 안정시킨 내치형이었다면, 영락제는 대외적인 정치와 원정, 천도 등 굵직한 사역을 담당한 황제였다. 그런 와중에 당대 백성은 희생되었지만 국가의 기틀은 크게 안정되었다.
? 5차례의 친정으로 솔선수범 : 영락제는 진시황제의 전국 순행을 본받기라도 한 것처럼 영락 8년부터 24년에 걸쳐 무려 5차례의 북벌을 단행했다. 이는 대외적으로는 북쪽의 적을 물리치기 위한 것이었지만 내부적으로는 남경에서 천도한 후 내부의 불만을 잠재우기 위한 것이었다. 수구 관료들의 비판은 동창의 감찰로 잠재우고 민심은 전쟁의 승리로 잠재웠던 것이다. 그리고 이 전쟁에 솔선수범하여 내재된 불만을 누그러뜨렸다. 이 시기에 영락제는 동쪽의 타타르와 서쪽의 오이라트를 쳐부수고 만주지역을 장악했으며, 아래로는 안남을 복속시켰고 티벳과 운남을 평정했다. 그리고 나아가 일본과 아프리카에 이르기까지 위세를 보였다. 많은 희생이 따르긴 했으나 드넓은 영토 확장으로 중화제국을 만들어냈기에, 죽은 후 묘호가 성조(成祖)로 바뀐 것이다. 평생의 헌신이 후대 사가들을 감동시킨 경우다.
? 지식층을 영입한 문화사업 : 영락제는 조카를 죽이고 제위를 찬탈했다는 비난을 잠재우기 위해 지식층과 학자들을 문화사업에 대거 끌어들였다. 다분히 정치적인 목적으로 시작한 일이었으나, 역대에 편찬된 사료와 서적들을 체계적으로 정리하여 학문을 발전시키겠다는 국가적인 사업에 많은 학자가 참여했고, 그 결과 역대 최고의 걸작들이 탄생했다. 1차 사업으로 탄생한 것은 <문헌대성>으로 당대 최고의 학사 147명이 참여했다. 또한 2,109명의 학사가 참여하여 1407년부터 시작된 2차 편찬사업의 결과 <영락대전>을 완성했다. 황제가 이름을 내린 이 책은 총 11,095책 22,877권과 목록 60권으로 이루어져 있다.
? 대항해를 감행한 불굴의 모험정신 : 세 사가들은 영락제가 다분히 이상주의자이자 모험가였다고 말한다. 그는 중화사상과 보신주의에 물들어 궁궐 바깥을 거의 출입하지 않은 다른 황제들과는 달리 스스로 북벌에 나서는가 하면, 정화로 하여금 대선단을 꾸려서 전 세계의 바다와 주변 국가들을 탐험하도록 했다. 정화는 운남성 출신으로 원나라에 복속했다가 명군의 포로가 돼 거세되었다고 한다. 사료에는 없지만 아마도 남경의 환관들이 영락제를 도울 때 정화가 연락 통로가 되었던 것으로 보인다. 그는 영락제의 명령을 받고 1405년부터 1433년까지 모두 7차례에 걸쳐 세계사에 전무후무한 남해 대원정을 떠났다. 1차 항해 당시 함대는 선박 62척을 비롯해 승선인원 2만 7,800여 명이었고, 3차 원정대는 48척에 2만 7,000여 명, 6차에는 무려 107척이었다. 7차 원정대까지 매번 2만~3만 명씩 대규모로 해외에 내보냈다.
이 시기에 이런 대선단을 꾸밀 수 있는 재력과 기술, 명나라의 국운을 건 대모험이 영락제에 의해 실현된 것이었다. 선박 한 척 길이는 150m, 폭이 60m가 넘어 평균 400명이 탔다고 한다. 1회에서 3회까지는 인도까지, 나머지는 아라비아해와 중동을 거쳐 멀리 아프리카 동해안까지 항해했다고 한다. 이 항해는 조공무역이 목적이었던 만큼 비단?도자기?사향 등 중국 특산물이 해외로 나갔고, 해외의 특산품들인 각종 향신료와 진주 산호 등의 보석류, 사자?기린?얼룩말 등 희귀한 동물들이 중국으로 왔다. 영락제는 이를 발판으로 세계의 종주국이 되고 싶어했지만 1427년 5차 정벌 때 귀환하다 병으로 사망하고 말았다. 결국 중국은 다시 쇄국정책으로 돌아서버렸다.
어느 반전주의자의 오판 야마모토 이소로쿠 - 미군이 가장 두려워한 전술전략의 리더십
1941년 12월 7일, 미군의 전초기지였던 오아후섬 남안, 호놀룰루 서쪽 10km 지점에 있는 진주만은 여느 일요일과 다름없는 평화롭고 조용한 모습이었다. 그러나 그 정적은 오래 가지 못했다. 온 하늘을 뒤덮듯 새까맣게 날아든 비행기에서 떨어지는 폭탄으로 진주만은 온통 화염에 휩싸였고, 푸른 물은 검게 변하고 말았다. 맹렬한 폭격을 퍼붓고 유유히 돌아가는 비행기의 날개에는 선명한 일장기가 그려져 있었다.
전쟁사에 전무후무한 기습전으로 평가되는 일본의 진주만 공격에 대한 해석은 극명하게 갈라진다. 진주만 기습이 일본제국주의의 몰락을 가져온 직접적 계기가 되었다고 판단하는 이도 있으며, 어떤 이들은 미국의 패권주의를 불러일으킨 도화선이 되었다고 보기도 한다. 이 작전을 입안한 일본군 대장 야마모토 이소로쿠는 이로 인해 미군의 암살 대상자 1호로 떠올랐다. 한편 미 태평양 함대에게 공포의 대상이 되었다. 그가 미리 간파당한 암호전문으로 태평양 한가운데서 격추되지 않고 살아남았다면 미국 군사법정은 당연히 그를 A급 전범으로 기소했을 것이다. 그럼에도 미국에서 그의 위치는 미워할 수 없는 악인이자 우수한 군인으로 자리잡고 있다. 야마모토의 어떤 점이 이런 평가를 내리게 한 것일까?
반정부의자였던 전략가
야마모토 이소로쿠는 1884년 니가타현에서 출생했다. 해군사관학교를 졸업하고 러일전쟁에 참전했으며, 1916년 해군대학을 졸업한 후 주미대사관 무관, 항공전대 사령관을 거쳤다. 그는 1935년 항공본부장이 되면서 공격용 항공기의 개발과 항공부대편제에 역점을 두었으며, 1936년 해군차관이 되어 독?이?일 3국 동맹에 반대했다.
1939년 연합함대 사령장관에 임명되어, 하와이 진주만 공격 등 태평양전쟁 개시 직후의 서전을 지휘하여 제해권 획득에 성공했다. 그러나 미드웨이 해전에서 패하고, 1943년 4월 솔로몬 제도의 부건빌 섬 상공의 기상(機上)에서 전사했다. 원래 그는 대미 전쟁회피론자로, 군사작전의 견지에서 태평양전쟁 개전을 반대했다. 진주만 공격 성공 후에도 전국의 앞날에 우려를 표명하는 등 당시 해군군부 내에서 가장 합리적인 판단력을 했던 인물로 평가되고 있다.
태평양 제패 노린 진주만 기습작전
야마모토 이소로쿠 대장은 완강한 일본 수뇌부의 전쟁 필승론을 반대했다. 누구보다 미국의 저력을 정확하게 평가하고 있었기에, 한마디로 승산이 없는 전쟁을 할 필요가 없다고 판단했던 것이다. 그러나 천황의 지시와 수뇌부의 결정에 따를 수밖에 없는 군인이었다. 그래서 이왕 전쟁을 해야 한다면 미국 해군력이 집중된 진주만을 기습하여, 태평양의 제해권을 확보하는 것이 승전의 지름길이라고 역설했다.
결국 1941년 12월 7일, 일본 해군의 연합 함대는 진주만을 기습했다. 승전 가능성이 낮은 기습작전이었음에도 미국의 늑장 대처와 안일한 판단으로 인해 태평양의 패권은 한동안 일본으로 넘어가 버렸다. 야마모토는 미국의 예봉을 꺾어놓고 협상을 통해 유리한 고지를 차지하는 것이 목적이었으나, 선전포고가 진주만 기습보다 늦어져 미 국민의 감정을 자극시키고 말았다.
야마모토는 이 기습이 절반의 성공, 절반의 실패로 끝날 것임을 운명적으로 느끼고 있었다. 초급 무관 시절 미 하버드 대학에 파견되었으며, 정식 무관으로 대사관에서 근무한 경력이 있어서 미국의 저력과 기술력을 확실히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는 태평양 전쟁 작전에 대해 부정적인 의견을 말했다. 진주만 공격 성공 후에도 일본이 처음 1년 간은 전쟁에서 승리할 수 있으나 2년 이후는 패배할 것이라는 의견을 밝혀 군부의 질책과 비난을 받기도 했다. 하지만 그는 일본에서 가장 객관적인 전략 판단이 가능한 인물이었고 미국조차 가장 두려워하는 인물로 꼽혔다.
원칙과 경험, 전략과 용병의 리더십
진주만은 세계 해전사 중 대표적인 기습전의 성공 사례로 손꼽힌다. 그럼에도 이 기습전이 불완전한 승리였다는 비판은 여전히 존재한다. 엔터프라이즈와 같은 주력 항모가 진주만에 없어 이를 공격하지 못한 점과 진주만 병참기지를 제대로 공략하지 못한 점 때문이다. 또한 승리에 도취한 일본은 체계적인 전략 수립에 실패했다. 기습 후 재빨리 미국과 협상을 벌여 유리한 고지를 차지하고서는 종전을 이끌어내지 못한 것이다. 이로 인해 일본은 개전 초기를 제외하고는 미국의 페이스에 끌려가고 있었다. 야마모토는 이를 알고 있었고 그런 약점을 만회하기 위해 미드웨이 해전을 기획하게 되었다. 그러나 1942년 6월, 태평양 미드웨이 섬 인근 해상에서 미 태평양함대와 치른 미드웨이해전은 일본의 완패였고, 이후 일본군은 태평양 제해권을 잃어버렸다. 교만과 자기 과신이 패전을 몰고 온 것이었다.
? 군인의 길과 멋을 알았던 남자 : 야마모토는 160cm 단신이지만 그의 머리에서 쏟아져 나오는 전술 전략은 부하들은 물론 적국까지 휘어잡고 남음이 있었다. 그는 자신의 유서에서 ‘마음 굳건히 먹고 적진 깊숙이 들어가 일본 남자의 피를 보여 주라’며 독전하고 있다. 그가 잘못된 전쟁을 수행한 것은 분명히 오판에 기인한 것이지만 군인으로서 명령에 충실할 수밖에 없는 한계를 생각한다면 그의 빼어난 리더십은 분명 배울 만한 것이 있다. 특히 그는 전술 파악에 특별한 재능이 있었다. 미군 수뇌부도 야마모토라면 어떻게 생각할 것인가를 늘 고민하고 있었다. 2차 대전사에서 미군 수뇌부가 수많은 인력과 예산을 투입하여 동맹국의 적장을 이토록 깊이 연구한 것은 야마모토와 롬멜 정도에 불과했다. 전략전술가로서 대단히 객관적이고 합리적이었던 그는 ‘영국의 넬슨과 자신을 비교하는 것은 받아들일 수 있어도, 조선의 이순신과 자신은 비유될 수 없다’고 말하곤 했다.
? 풍부하고 다양한 실전 경험 : 그는 일찍이 러일전쟁에 참가하여 현대 전쟁의 기습전 전략을 철저하게 배웠다. 이 전쟁에서 그는 일진호를 타고 나갔다가 함대의 오발로 손가락 두개를 잃고 온몸에 부상을 입었다. 전쟁의 무서움을 직접 체험한 것이다. 이러한 육체적, 정신적 체험 외에도 그는 전략과 전술 각 방면에 걸친 깊은 지식과 경험을 갖추고 있었다. 포술사관 출신으로 포에 대해 이미 해박한 지식을 가졌으며, 해군항공대로 보직을 바꿔 항공기 조종 교관을 지내기도 했다. 한마디로 육해공군의 실전 지식과 경험을 모두 체득한 것이다. 그는 이런 경험을 바탕으로 당시 해군항공대 전력 증강을 요구하는 장문의 시정건의서를 올려 일본 해군 함재기 전략의 비약적 발전을 이루어낸 것으로 전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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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강한 부하 키워낸 양병술 : 야마모토는 유능한 부하들을 키우는 데 남다른 식견이 있었다. 다양한 군 생활을 통해 그가 인정한 부하들을 일찍부터 점찍어놓고 교육을 시켰다. 그는 참모급 이상으로 승진한 후 최신예 항모 아카기의 함장을 거쳐 항공전대사령관을 맡았는데, 이때 해군 항공전술 개발과 전력 강화에 참여하면서 자신이 키운 부하들을 함께 참여시켰다. 그가 태평양전쟁 개전 이전에 해군차관에서 해군의 최고 자리인 함대사령장관으로 자리를 옮겼을 때는, 이미 휘하에 일본 해군에서 가장 똑똑한 인재들을 두루 꿰차고 있었다. 해군소장 우카키 참모장을 비롯하여 작전참모 미와 요시다케 소장, 선임참모 쿠로시마 소장, 전무참모 와다나베 소장 등이 그들이었고 영관급 다수의 참모진들이 이들을 받쳐주고 있었다. 야마모토는 늘 ‘시범을 보여라. 말해서 들려준 뒤 시켜보라. 칭찬하고 시키면 누구라도 할 수 있다’는 눈높이 칭찬 교육법을 활용해 부하들이 최선을 다하도록 분위기를 독려했다. 막강 일본 해군은 그렇게 해서 탄생했던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