운동화를 신은 마윈

   
왕리펀 외(역: 김태성)
ǻ
36.5
   
17000
2015�� 01��



■ 책 소개

마윈이 유일하게 공식 인정한 책

알리바바를 탄생시킨 27가지 결정적 전환점 


알리바바가 뉴욕 증시 사상 최대 규모의 기업공개를 통해 단숨에 세계인의 시선을 끌어 모으자 창업자 마윈 역시 세계 젊은이들의 영웅으로 떠올랐다. 평범한 집안 출신에 유학도 가 본 적 없고, 못생긴 외모 탓에 취업조차 줄줄이 실패했던 일개 영어 강사가 세계적인 부호가 되었다는 성공 스토리는 주춤한 성장, 고물가, 실업으로 미래를 고민하는 전 세계의 사람들을 열광시켰다. 


『운동화를 신은 마윈』은 알리바바와 마윈이 유일하게 공식적으로 인정한 책으로, 청년 시절부터 오늘날의 알리바바까지 마윈 인생의 결정적 순간을 27개로 나누어 창업가와 매체 종사자의 시각에서 다각도로 분석했다. 27개로 나눈 굵직한 사건 속에는 저자들 자신이 알리바바그룹의 현장에서 취재한 생생한 모습과 마윈 자신의 어록, 인터뷰, 문답, 만남 등이 가득하다. 


■ 저자 왕리펀

베이징대학교에서 박사학위를 받은 뒤 중국 CCTV에서 프로듀서 겸 진행자로 활동했다. 2006년, 중국에서 가장 영향력 있는 창업 방송으로 평가받는 ‘중국에서 성공하기’를 제작하고 진행했다. 2007년부터 2009년까지 세 시즌 동안 마윈은 이 방송의 심사위원을 맡아 촌철살인의 논평과 탁월한 경영 철학을 통해 젊은이의 멘토로 자리매김했다. 2013년에는 공익 방송 ‘중국의 푸른 하늘 푸른 물에서 성공하기’를 제작했는데, 마윈은 이 방송에서도 결선 심사위원을 맡았다. 


10년 전, 다보스 세계경제포럼에서 처음으로 마윈을 만난 뒤 사업상 파트너이자 인생과 경영 철학의 조언자로 돈독한 친분을 유지하고 있으며, 지금은 자타공인 ‘마윈을 가장 잘 이해하는 사람’으로 알려져 있다. 2009년 말 베이징 요우시미 인터넷과학기술유한공사를 설립하여 창업가의 길에 들어섰고, 현재 지식 콘텐츠 포탈 요우미왕의 CEO로서 마윈을 비롯한 젊은 기업인들의 경영 철학을 젊은이들에게 소개하는 일을 하고 있다. 


■ 역자 김태성

1959년 서울에서 출생하여 한국외국어대학교 중국어과를 졸업하고 동대학원에서 타이완 문학 연구로 박사학위를 받았다. 중국학 연구 공동체인 한성문화연구소를 운영하면서 한국외국어대학교 중국어대학에 출강하고 있으며 중국어 문학 번역과 문학 교류 활동에 주력하고 있다. 『노신의 마지막 10년』 『중국문화지리를 읽다』『인민을 위해 복무하라』『문명의 대화』『고별혁명』『사람의 목소리는 빛보다 멀리 간다』『한자의 탄생』등 90여 권의 중국 저작물을 한국어로 번역했다. 


■ 차례

들어가며 : 나의 창업 결정에 가장 큰 영향을 준 마윈 

1. 창업의 세계에 뛰어들다_하이보번역사부터 차이나옐로우페이지까지

/1/ 창업 아이템을 선택하다_1992년, 최초의 창업, 하이보번역사

/2/ 창업의 방향을 찾다_1995년, 차이나옐로우페이지의 성공과 실패

/3/ 창업 팀을 선택하다_1997년 12월, 대외경제무역 비즈니스정보센터

 

2. 알리바바, 그 성공의 시작_골드만삭스 그리고 손정의

/4/ 뚜렷한 비전을 확립하라_199년 1월, 호반가든, 알리바바 창립

/5/ 자본을 이해하는 인재가 필요하다_1999년, 차이충신 알리바바 합류

/6/ 투자유치를 어떻게 취사선택할 것인가_1999년 10월, 첫 번째 투자 유치, 골드만삭스

/7/ 이상적인 투자자란?_2000년 1월, 소프트뱅크 손정의

 

3. 성장, 결집 그리고 전진_무협 문화에서 활로를 찾다

/8/ 규모를 확대할 때 실수를 범하기가 가장 쉽다_2000년 첫 번째 위기, 감원

/9/ 세(勢)를 만들다_2009년 9월, 서호논검, 기업 문화의 조성

/10/ 자신에게 적합한 모델을 찾다_2000년 10월, 중국공급상

 

4. 강호에 선 알리바바 1_타오바오 그리고 즈푸바오

/11/ 알리바바 생태 시스템의 시작_2003년 5월 10일, 호반가든, 타오바오 창업

/12/ 일류의 적수를 찾다_2003년부터 2006년까지, 이베이와의 대전

/13/ 고객의 요구에 맞춰 창조하고 새롭게 하다_2003년, 즈푸바오를 창립하다

/14/ 반드시 꿈이 있어야 한다_2004년 6월, 인터넷 비즈니스 대회

 

5. 강호에 선 알리바바 2_실패, 성공 그리고 좌절

/15/ 이어지는 실수_2005년, 양즈위안과 야후의 알리바바 합류

/16/ 유명한 ‘창업 방송인’의 탄생_2006년, ‘중국에서 성공하기’의 심사위원을 맡다

/17/ 정확한 시기를 포착하라_2007년 11월 B2B 상장

/18/ 월등히 앞선 배치로 변화를 포용하라_2008년 알리윈을 만들다

/19/ C2B 시대의 도래_2009년, 알리바바의 축제, ‘쌍십일’

/20/ 폭풍우에 직면한 창업자_2010년, 즈푸바오 VIE 사건, 즈푸바오를 접다

 

6. 마윈의 알리바바에서 모두의 알리바바로_상생과 조화를 통한 혁신과 재도약

/21/ 미래에 대한 희망과 믿음_2010년, 동업자 제도, 102년 가치 문화 증폭

/22/ 바닥을 어루만지다_2011년 2월, 성실하게 부패에 반대하다

/23/ 조직 구조의 대변혁_2011년 6월, 타오바오의 단계적 분할

/24/ 사회에 대한 경외심_2013년 5월, 물류를 세팅하고 ‘차이냐오’를 만들다

/25/ 전통 업종에 대한 인터넷 사유의 침투_2013년 6월, 위어바오의 탄생

 

7. 새로운 시대를 향해_주식 상장 그리고 그 이후

/26/ 새로운 경제 체제를 향한 배치_2014년, IT에서 DT로, 알리바바의 이동 전략

/27/ 과거에 감사하고 미래를 경외한다_2014년 9월, 미국 상장

 

부록 : 마윈 강연 : 젊은이들과 얼굴을 맞대고

 




운동화를 신은 마윈

들어가며 : 나의 창업 결정에 가장 큰 영향을 준 마윈

운전기사의 말에 따르면 마윈은 지금도 평소에는 운동화를 신고 다닌다고 한다. 공식적인 자리에 나갈 때는 구두를 신지만 차로 돌아오면 곧장 운동화로 갈아 신는다는 것이다. 나는 이런 모습이 그가 어떤 사람인지 가장 잘 보여준다고 생각한다. 운동화는 편하고 자유로운데다 공기도 잘 통한다. 언제든지 속도를 낼 수 있으면서도 발이 다치지 않는다. 운동화는 마윈의 일상적인 삶이고 구두는 잠깐의 불가피한 상황일 뿐이다. 때문에 이 책의 제목을 ‘운동화를 신은 마윈’이라고 정하게 되었다.

1. 창업의 세계에 뛰어들다_하이보번역사부터 차이나옐로우페이지까지

창업 아이템을 선택하다_1992년, 최초의 창업, 하이보번역사

1992년, 아직 대학에서 교편을 잡고 있던 마윈은 동료들과 함께 하이보번역사를 설립했다. 이는 항저우 최초의 전문 번역회사로서 ‘하이보’는 영어의 ‘hope를 음역한 것이다. 당시 이 회사는 규모가 아주 작았고 직원은 다 합쳐서 다섯 명이었다. 창업 초기에는 일이 순조롭지 못해 경영에 온갖 어려움이 발생했고, 첫 달 매출액은 1,000위안도 채 되지 않았다. 한 치 앞도 보이지 않는 상황에 직원들은 동요했지만 마윈은 회사가 계속 유지되어 나갈 수 있으리라 굳게 믿었다.

결국 자금난으로 인해 다른 수입원을 찾지 않으면 안 되는 상황이 전개되었다. 우연히 생화와 선물용품이 제법 돈이 벌리는 아이템이라는 사실을 알게 된 마윈은 자루를 들고 기차에 올라 이우 도매시장을 찾아갔다. 마윈은 조그만 공예품으로 가득한 자루를 메고 항저우 거리를 돌아다니면서 물건을 팔았다. 이렇게 소규모 장사를 통해 번 돈으로 마윈은 어렵사리 번역회사를 운영했다.

창업의 문제와 관련하여 마윈은 CCTV에서 주관하는 ‘중국청년창업’ 대회에서 이런 말을 했다. “창업자가 되기 위해서는 먼저 자신의 이상을 찾아야 합니다. 1995년에 저는 우연히 미국에 가게 되었어요. 거기서 인터넷을 보았습니다. 인터넷의 가능성을 발견하긴 했지만 저는 기술에 대해서 아는 것이 하나도 없었지요. 지금까지도 컴퓨터에 대한 저의 지식은 이메일을 주고받거나 사이트를 돌아다니는 수준에 불과합니다. 오늘 아침까지만 해도 컴퓨터에서 USB를 어떻게 사용하는지 잘 몰랐지요. 하지만 이런 건 중요하지 않습니다. 중요한 것은 자신의 이상이 무엇인지 아는 겁니다.”

창업의 방향을 찾다_1995년, 차이나옐로우페이지의 성공과 실패

마윈은 가깝게 지내던 친구 스물네 명을 초대하여 인터넷에 관한 얘기를 들려주었다. 하지만 당시 중국에서는 인터넷이란 단어가 몹시 생소했다. 친구들 가운데 인터넷 사업이 해 볼 만하다고 생각한 사람은 단 한 명뿐이었다. 여러 사람들의 반대가 심했지만 인터넷에 대한 마윈의 생각은 흔들림이 없었다. 일주일 후 그는 아내 장잉(張英)과 상의하여 인터넷 회사를 창업하기로 결정했다. 창업에 필요한 10만 위안은 여기저기서 융통하기로 했다. 이리하여 1995년 5월 9일, 중국의 첫 번째 비즈니스 사이트인 ‘차이나옐로우페이지’가 탄생했다.

합작을 시작한 지 얼마 되지 않아 쌍방 간에 의견 충돌이 생겼다. 마윈은 지분이 30퍼센트밖에 되지 않았기 때문에 발언권이 거의 없었다. 게다가 마윈은 애당초 항저우텔레콤이 합작을 원했던 이유가 인터넷 기술 수준이 뒤진 상태에서 차이나옐로우페이지를 사들임으로써 기술을 확보하여 결국 자신들의 성장 수단으로 삼으려는 것이었음을 금세 알아차리게 되었다. 이런 사실을 안 마윈은 떠나기로 결심했다.

떠난다는 것이 포기를 의미하는 것은 아니었다. 마윈이 떠나는 것은 더욱 분명한 미래를 창조하기 위해서였다. “무엇을 하고 싶은지를 분명히 하세요. 그런 다음 뭘 해야 하는지 분명히 해야 합니다. 무엇을 해야 하는지 분명히 알고 나면 무엇을 하지 말아야 하는지도 알아야 하지요. 저는 어떤 회사든 창업 과정에서 처음 4~5년 동안 수많은 선택과 기회를 맞닥뜨리게 된다고 믿습니다. 매번 기회를 선택하고 검토할 때마다 처음 일을 시작하는 날 같아야 합니다. 첫사랑을 기억하듯이 맨 처음 가졌던 꿈을 기억하는 것이 가장 중요합니다.”

2. 알리바바, 그 성공의 시작_골드만삭스 그리고 손정의

뚜렷한 비전을 확립하라_199년 1월, 호반가든, 알리바바 창립

“우리는 B2B의 전자 비즈니스 회사를 세울 것입니다. 목표는 세 가지입니다. 첫째는 80년 동안 살아남는 회사를 만드는 것이고 둘째는 중국의 중소기업을 위해 일하는 회사를 만드는 것이며 셋째는 세계에서 가장 큰 전자 비즈니스 회사를 만들어 전 세계 10대 사이트의 하나로 자리 잡는 것입니다. 지금부터 우리는 아주 위대한 일을 할 겁니다. 인터넷 서비스 모델에 혁명을 가져올 거예요! 캄캄한 어둠 속을 다 같이 더듬어 나가면서 함께 외칩시다. 제가 함성을 지르며 앞으로 달려갈 때 여러분은 당황할 필요가 없습니다. 큰 칼을 치켜들고 계속 앞으로 나가세요. 함께 전진하는 데 두려울 일이 뭐가 있겠습니까?”

이렇게 출사표를 던진 회의에서 마윈은 팀원들에게 앞으로 다 함께 할 일에 관해 설명했다. 마윈과 팀원들은 창업 목표를 확정한 다음, 자금을 모으기 시작했다. 각자 주머니를 턴 결과 50만 위안이 모였다. 이 돈이 마윈의 두 번째 창업을 위한 초기 자금이 되었다. 자금이 충분치 않다 보니 오피스텔을 임대할 수 없어 호반가든의 150평방미터 남짓한 집에 사무실을 차리는 수밖에 없었다. 이 집은 그가 대학에 재직할 당시 사 둔 집이었다. 그와 동료들은 하루에 17~18시간씩 일을 했다. 쉴 새 없이 홈페이지를 설계하고 프로젝트를 수정했으며 아이디어를 의논하고 미래의 방향에 대해 논의했다.

마윈이 회사명을 ‘알리바바’로 정한 것은 글로벌 네트워크 회사를 만들겠다는 생각이 반영된 것이었다. 처음 알리바바를 창업할 당시 그들은 언젠가 알리바바가 글로벌 10대 네트워크 회사가 되기를 꿈꿨다. 따라서 회사 이름도 글로벌하고 전 세계가 기억할 수 있는 것이어야 했다. 샌프란시스코 출장을 갔던 마윈은 어느 날 길거리에서 우연히 ‘알리바바’라는 이름을 보고 매우 재미있는 이름이라는 생각을 했다. 나중에 마윈은 자기 테이블로 커피를 날라다 준 여종업원에게 혹시 알리바바를 아느냐고 물었다. 그녀는 당연히 안다면서 ‘열려라, 참깨!’라는 뜻이라고 말해 주었다.

자본을 이해하는 인재가 필요하다_1999년, 차이충신 알리바바 합류

차이충신에게 왜 백만 달러의 연봉을 포기하고 알리바바를 선택했느냐고 묻자 그는 이렇게 대답했다. “팀을 조직하는 것은 대단한 예술입니다. 당시 저는 스웨덴 회사에서 투자 업무를 담당하고 있었고 실적도 그다지 나쁘지 않았기 때문에 창업은 생각도 못 했습니다. 그런데 왜 오게 되었냐고요? 알리바바에게 끌렸던 첫째 이유는 마윈이라는 사람의 카리스마였어요. 둘째 이유는 알리바바가 아주 강력한 팀을 갖추고 있다는 점이었지요. 1995년 5월 호반가든에서 처음 만났을 때 십여 명이 한 자리에 있었는데 첫 느낌이 마윈의 리더십이 매우 강력하다는 것이었어요. 팀의 결속력이 대단하다고 느꼈지요. 회사를 만든다는 것은 혼자서는 하기 힘든 일입니다. 팀이 갖춰져야 성공할 확률이 높아지지요. 다른 팀과 비교할 때, 이 팀은 거의 드림팀 수준이에요.”

투자유치를 어떻게 취사선택할 것인가_1999년 10월, 첫 번째 투자 유치, 골드만삭스

협상을 마친 골드만삭스는 총 500만 달러의 자금을 모아 알리바바에 투자함으로써 창업 자본금이 50만 위안밖에 안 되는 이 신생 기업에 새로운 피를 수혈했다. 당시 골드만삭스의 투자금 500만 달러는 알리바바가 창업 초기의 한파를 견디는 데 커다란 도움이 됐다. 매체의 설명에 따르면 이때 투자자들이 가져간 알리바바의 지분은 40퍼센트에 불과했다고 한다. 알리바바 역사상 최초의 ‘엔젤 투자’인 셈이었다.

알리바바와 골드만삭스의 협력은 순조롭고 즐거운 여정이었다. 골드만삭스가 알리바바에 투자한 지 넉 달이 지나서 알리바바는 두 번째 투자(소프트뱅크가 알리바바에 들어왔다)를 받게 되었다. 알리바바의 평가액은 소프트뱅크가 투자하고 불과 넉 달 만에 골드만삭스 투자 당시의 네 배로 뛰어 올랐다.

2001년에 있었던 샤먼 회원들과의 모임에서 마윈은 투자자를 어떻게 취사선택하는지에 관해 얘기했다. “투자 유치는 우리도 괜찮은 편이었습니다. 당시에는 인터넷 업계의 투자 유치가 비교적 쉬운 편이었지요. 어떤 사람들은 돈을 위해서라면 다른 조건들을 포기하기도 합니다. 하지만 알리바바는 투자자들이 우리를 선택하는 것이 아니라 우리가 투자자를 선택한다는 입장을 고수하면서 서른여덟 명의 투자자를 거부했어요. 지금도 생생히 기억이 납니다. 우리를 맨 처음 찾아온 투자자는 국유 기업이었어요. 그들은 우리에게 ‘벤처 투자를 하고 싶다. 100만 위안을 줄 테니 내년에 120만 위안으로 돌려줄 수 있겠느냐?’ 하고 묻더군요. 그래서 제가 그랬습니다. ‘제가 100만 위안을 드릴 테니 내년에 120만 위안으로 돌려주세요. 어떻습니까?’ 당시 국유 기업들은 아직 벤처캐피털에 대한 인식이 확립되어 있지 않았어요. 벤처투자자들은 “지금 어떻게 하고 있느냐”, “앞으로는 어떻게 할 거냐?” 등등 너무 많은 것을 따져 묻습니다. 그들의 질문이 끝나면 이번에는 제가 그들에게 묻지요. “말씀해 보시죠. 돈 말고 우리에게 뭘 줄 수 있습니까?” 대답하지 못하면 우리는 주저 없이 그들을 거절합니다.”

이상적인 투자자란?_2000년 1월, 소프트뱅크 손정의

마윈의 얘기를 6분 정도 듣고 난 뒤 손정의는 알리바바에 대한 구체적인 조사도 전혀 하지 않은 상태에서 4,000만 달러를 투자하겠다고 제안했다. 그러면서 그가 요구한 회사의 지분은 49퍼센트였다. 마윈이 베이징에서 손정의를 만나고 나서 항저우로 돌아올 때 손정의의 팀도 함께 항저우로 왔다. 그리고 20일 뒤에는 마윈이 손정의의 초청을 받아 일본 도쿄로 가서 투자에 관한 협상을 계속했다.

마윈은 소프트뱅크가 알리바바의 지분을 너무 많이 가져가 임원진들의 지분이 희석되면 발언권을 잃게 되지나 않을까 걱정되었다. 이에 그는 곧바로 소프트뱅크와의 재협상에 들어갔다. 마윈은 손정의에게 돈이 너무 많은 것도 어떤 면에서는 안 좋은 일일 수 있으니 투자액을 2,000만 달러로 줄이는 것이 어떠냐고 제의했다. 최종적으로 손정의는 2,000만 달러만 투자하는 데 동의했다. 이는 손정의의 투자 경험상 가장 많은 양보를 한 경우였다.

마윈은 항상 고도의 경각심을 유지하고 있었다. 그는 돈이 목적이 아니라 수단이라는 사실을 잘 알고 있었다. 그는 ‘중국에서 성공하기’에서 출연자들에게도 같은 말을 했다.

“자본은 영원히 입을 열게 해서는 안 됩니다. 자본은 그저 돈만 벌면 되지요. 자본이 말하는 기업은 성공할 수 없습니다. 가장 중요한 것은 자본이 돈을 벌게 하는 것이고, 주주들이 돈을 벌게 하는 겁니다. 어느 날 여러분에게 큰돈이 생긴다면 이 원칙을 잘 지키십시오. 자신이 돈을 벌 수 있다고 생각하는 사업을 하세요. 그러면 자본은 틀림없이 여러분의 말을 들을 겁니다.”

3. 성장, 결집 그리고 전진_무협 문화에서 활로를 찾다

규모를 확대할 때 실수를 범하기가 가장 쉽다_2000년 첫 번째 위기, 감원

먼저 사무실을 이전했다. 알리바바 창업 이래로 모두가 호반가든의 150평방미터 남짓한 아파트에서 일하고 있었다. 사무실 이전은 자금이 생긴 마윈이 가장 먼저 한 일이었다. 두 번째로 돈을 쓴 일은 신속한 규모의 확장이었다. 마윈은 알리바바를 글로벌 회사로 만들어 세계 최대의 전자 비즈니스 회사로 키우고 싶었다. 이에 마윈은 홍콩과 영국에 현지 사무소를 설치하고 실리콘밸리에는 연구개발센터를 세웠으며, 일본과 타이완, 한국에는 합자회사를 설립했다. 그 다음에는 본사를 아예 홍콩으로 옮겼다.

위기가 찾아온 것이었다. 알리바바를 살리기 위해 마윈은 확장을 멈추기로 결정했다. 전선을 축소하고 비용을 절감하는 동시에 대규모 감원을 단행했다. 남은 자금으로 최대한 오래 버텨야 했다. 항저우에서 실리콘밸리에 이르기까지 연봉이 달러 여섯 자리가 넘는 인원들은 전부 정리했다. 한국 지사는 아예 문을 닫았고 베이징 사무소의 직원도 절반으로 감축했다. 또한 마윈은 제로 예산 정책을 도입했다. 광고 예산은 아예 없애버렸고 출장 때의 숙소도 3성급 호텔로 낮췄다. 알리바바의 이러한 ‘장사단완(장수가 자신의 팔을 자름)’ 행위를 두고 나중에 마윈은 ‘중국으로 돌아왔다’라고 표현했다.

‘중국으로 돌아온’ 이후 알리바바는 전략을 큰 폭으로 수정했다. 많은 사업을 접고 중소기업에 B2B 무역 서비스를 제공하는 데 집중했다. 마윈은 이렇게 말했다. “전략이 결과나 목표에 구현되지 못한다면 그것은 공허한 구호에 지나지 않습니다. 정확한 전략을 수립하는 과정이란 우선 ‘정확한 일’을 하는 것이고, 그 다음은 그 일을 ‘정확하게 하는’ 것입니다. ‘정확한 일’을 ‘정확하게 할’ 수 있다면 적은 노력으로도 큰 성공을 거둘 수 있을 겁니다. 하지만& ‘잘못된 일’을 하고 있다면 그 일을 ‘정확하게 할수록’ 더 빨리 망하게 되지요.”

세(勢)를 만들다_2009년 9월, 서호논검, 기업 문화의 조성

창립 초기에는 알리바바를 아는 사람이 그렇게 많지 않았다. 이와 관련하여 마윈은 이렇게 회고한다. “1999년과 2000년, 2001년에는 사람들이 중국 시장에서 알리바바라는 이름을 거의 들어보지 못했을 겁니다. 이벤트를 주로 외국에서 진행했거든요. 유럽과 미국에서 강연을 많이 열었지요. 제 기억에 가장 참담했던 강연은 2000년이었던 것 같아요. 독일에서 강연을 열면서 1,500석을 준비했는데 앉아 있는 사람이 세 명뿐이었습니다. 너무 창피했지요. 하지만 달리 방법이 없더라고요. 혼자서 그들을 위해 강연을 하는 수 밖에요.”

마윈은 문득 인터넷 업계의 뛰어난 인재들을 항저우로 데려다 무협소설의 ‘화산논검’을 모방한 ‘서호논검’을 열어야겠다는 생각을 하게 되었다. ‘서호논검’은 IT 업계의 저명 인사들을 서호의 호반으로 초청하여 발전을 위한 대계를 함께 의논하는 자리였다. 당시 알리바바는 아직 이름이 많이 알려지지 않은 작은 회사였지만 마윈은 회사의 영향력을 키우기 위해 진융을 ‘서호논검’의 진행자로 초청했다. 진융은 명망 있는 무협소설 작가로서 중화권 전체에 그 영향력이 엄청났다.

“1995년 인터넷을 시작할 때 사람들은 우리를 사기꾼이라고 했습니다. 1997년 차이나옐로우페이지를 내놓았을 때는 저를 정신 나간 놈이라고 했지요. 지금은 저를 미치광이라고 말합니다. 하지만 남들이 뭐라고 말하든 저는 전혀 개의치 않았습니다. 스스로 옳다고 생각되면 그대로 밀고 나갔지요. 억울함이나 오해 같은 것들은 인터넷 공간에서는 지극히 정상적인 일입니다. 저는 오히려 껍질이야말로 연마할수록 더 두터워지는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자신에게 적합한 모델을 찾다_2000년 10월, 중국공급상

2000년 10월 초, 알리바바는 ‘중국공급상’이라는 서비스를 내놓았다. 정확히 말하자면 ‘중국공급상’은 알리바바의 제품 중에서도 핵심 제품이었다. 이 제품의 목적은 이를 신뢰하고 사용하는 중국의 모든 중소기업이 글로벌 공급 업체가 되어 전 세계 각지의 사람들에게 상품을 사고팔게 하는 것이었다.

알리바바를 창업하여 수익을 내기까지 마윈은 5년이라는 시간을 힘들게 싸웠다. 그 동안에 겪은 온갖 고난과 시련은 오직 그만이 알 수 있다. 마윈은 2005년 6월 ‘대화’에 출연하여 당시의 심경을 이렇게 얘기했다. “제가 무릎을 꿇는다고 표현한 것은 서 있을 수 없다는 뜻이었습니다. 그 자리에 꿇어앉아 눕지도 못하고 물구나무를 설 수도 없다는 말이지요. 하지만 겨울이 길어야만 봄이 아름답다는 말처럼 세균들마저 깡그리 죽어버리고 주변의 모든 소리와 소음들이 사라져 고요해졌을 때, 그때도 저는 여전히 서 있었습니다. 그리고 모든 투자자들이 가장 좋아하는 사람, 인터넷 업계를 통틀어 가장 환영받는 사람이 되었지요. 그러니까 당시 우리는 스스로에게 위안을 준 셈이었습니다. 2002년의 우리가 제시할 수 있었던 키워드는 ‘끝까지 견디면 승리할 수 있다’는 것이었지요.”

4. 강호에 선 알리바바 1_타오바오 그리고 즈푸바오

알리바바 생태 시스템의 시작_2003년 5월 10일, 호반가든, 타오바오 창업

2003년 3월, 이베이가 300만 달러를 투자해 이취왕의 지분 33퍼센트를 가져갔다. 이 글로벌 전자 비즈니스의 거물은 이런 방법으로 중국 시장에 진입했다. 2002년 말 마윈 일행이 도쿄에 가서 손정의를 만났을 때 그가 마윈에게 처음 던진 말이 “이베이와 당신의 플랫폼은 같습니다.”라는 한 마디였다. 그때 사람들은 이베이가 너무 강력해서 이길 수 없는 상대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손정의는 마윈에게 그렇지 않다는 사실을 알려주었다. 일본에서는 야후가 이미 이베이를 능가했고, 그 다음은 중국 차례라는 것이었다. 손정의의 이 한 마디가 마윈에게 커다란 자신감을 불어넣어 주었다.

이렇게 비밀리에 설립한 C2C 사이트가 바로 타오바오다. ‘타오바오’라는 이름은 알리바바의 한 직원이 제안한 것으로서 구호는 “건졌다! 너무 좋아!”였다. 타오바오를 만들 당시 마윈의 꿈은 타오바오를 중국 최대의 C2C 플랫폼으로 키우는 것이었다. 이리하여 그 경쟁 상대는 이제 막 중국 시장에 진입한 이베이로 정해졌다.

2003년, 마윈은 하루 수입 100만 위안이라는 목표를 제시했다. 그 결과 하루 평균 100만 위안이 넘는 돈이 들어왔고 가장 많을 때는 500만 위안을 넘어서기도 했다. 2003년의 전체 수익은 1억 위안을 상회했다. 현재 타오바오는 이미 아시아 최대, 나아가 세계 최대의 C2C 전자상거래 사이트가 되었다. 타오바오의 중국 시장 점유율은 80퍼센트가 넘는다.

이후 마윈은 애당초 타오바오를 설립할 때의 취지를 떠올리면서 이렇게 말했다. “제가 아무런 행동도 취하지 않고 3~5년 후에 이베이가 B2B 시장에 진입하는 것을 넋 놓고 기다렸다면 어떻게 됐을까요? 그들은 우리보다 돈도 많고 자원도 많고 국제적인 브랜드 이미지도 강력하잖아요. 그런 상황이 되었다면 우리 알리바바에게는 재난이나 다름없었을 겁니다. 당시 상황은 정말 그랬어요. 하지만 상대는 저라는 존재조차 몰랐지요. 당시 이베이의 눈에 우리는 아무것도 아니었을 겁니다. 저는 바로 이 점 덕분에 우리가 선수를 칠 수 있겠다고 생각했지요. 이베이의 무시가 바로 우리에게는 최고의 기회였던 셈이지요.”

고객의 요구에 맞춰 창조하고 새롭게 하다_2003년, 즈푸바오를 창립하다

2003년 10월 18일, 알리바바는 온라인 거래의 결제 수단인 ‘즈푸바오’ 시범 서비스를 출시했고, 고객들의 반응도 나쁘지 않았다. 2004년에는 즈푸바오의 사이트인 alipay.com이 정식 서비스를 시작하면서 독자적인 운영을 시작했다. 마윈은 즈푸바오를 사용하는 온라인 거래가 타오바오 전체 거래량의 절반을 차지하고 있으며 온라인 상품의 70퍼센트가 이미 즈푸바오를 통해 거래되는 등 불과 1년이라는 짧은 시간에 즈푸바오가 상당히 좋은 반응을 얻었다고 말했다.

2005년 2월 2일, 마윈은 즈푸바오의 전면적 업그레이드를 선언했다. 같은 도시 내에서 거래하든 다른 지역 간에 거래하든 즈푸바오를 통해 이루어지는 모든 거래에 대해 수수료를 전혀 받지 않겠다는 내용이었다. 마윈이 수수료를 없앤 이후 즈푸바오를 통한 거래가 하루 만 건을 넘었고 거래 금액도 수백만 위안에 달했다고 밝혔다.

알리바바의 제8회 인터넷 기업 총회에서 마윈은 즈푸바오의 성공에 대해 이렇게 말했다. “불과 몇 년 전만 해도 은행은 모든 업무에서 고객들에게 무리한 수수료를 부과했었습니다. 그러나 지금은 수수료를 계속 낮추고 있지요. 이 부분에 대해 즈푸바오가 크게 공헌했다고는 감히 말할 수 없겠지만 어느 정도의 기여는 했다고 봅니다. 현재 수많은 젊은이들이 현실에 대해 불만을 갖고 있습니다만 저는 긍정적인 개선을 선호한다고 말하고 싶습니다. 중국이동(중국 최대의 통신회사)을 무너뜨리면 중국이동보다 더 훌륭한 통신회사를 만들 수 있을까요? 우리는 민영 기업의 밥그릇을 뺏는 데는 관심이 없습니다. 하지만 위기감이 결여된 대기업을 혼내주는 데는 흥미가 있습니다. 이것이 바로 인터넷의 힘입니다.”

5. 강호에 선 알리바바 2_실패, 성공 그리고 좌절

정확한 시기를 포착하라_2007년 11월 B2B 상장

2007년 11월 6일 오전 열시, 국내 최대 전자상거래 기업인 알리바바 B2B가 홍콩증권거래소에 성공적으로 상장되었다. 개장 주가는 30홍콩달러로 발행가 13.5홍콩달러에서 122퍼센트 오른 가격이었다.

알리바바는 상장 전에 기업 공개를 통해 400억 달러 정도를 조달할 수 있을 것으로 예상했다. 그러나 뜻밖에도 홍콩에서의 첫 번째 로드쇼에서 이미 360억 달러가 모였다. 싱가포르로 가서는 자금 조달액이 600억 달러에 달했다. 마지막으로 뉴욕에서의 기업 공개로 자금 조달액은 이미 1,800억 달러가 되었다. 마윈과 알리바바가 맨 처음 정한 발행가는 12홍콩달러였다. 하지만 로드쇼 반응이 상당히 좋은 것을 보고 사람들은 발행가를 24홍콩달러로 올릴 것을 제안했다. 주당 1홍콩달러만 올려도 10억홍콩달러가 늘어나는 셈이었다. 따라서 그들이 24홍콩달러로 올렸다면 120억 홍콩달러를 더 모을 수 있었다. 그날 밤 마윈은 팀원들을 모아 놓고 회의를 했다. 그리고 그들에게 유혹 앞에서 “No!"라고 말할 줄 알아야 한다고 말했다. 탐욕에는 대가가 따르기 때문이었다. 결국 그들은 발행가를 13.5홍콩달러로 정했다.

알리바바의 첫날 개장가는 30홍콩달러였고 종가는 39홍콩달러로 마감되었다. 무려 192.59퍼센트나 폭등한 것이었다. 상장한 지 두 달 뒤에는 최고가가 41.8홍콩달러에 달했다. 알리바바는 순식간에 홍콩 주식 시장의 ‘새로운 블루칩’으로 등극했고 국내외 언론이 앞다투어 보도하는 ‘중국에서 가장 돈 잘 버는’ 인터넷 기업이 되었다.

C2B 시대의 도래_2009년, 알리바바의 축제, ‘쌍십일’

2009년 8~9월, 타오바오몰 업체들의 규모가 그다지 크지 않을 때 알리바바는 온라인상의 쇼핑데이를 만들고 싶었다. 11월로 선정한 것은 그 달의 계절 변화가 가장 커서 소비자들이 살 물건이 특히 많기 때문이었다. 더구나 11월에는 큰 명절도 없었다. 이 한 달 동안 소비자들의 수요는 있지만 큰 이벤트가 없었다. 11월로 선정한 것은 날짜를 기억하기 쉽기 때문이기도 했다.

2009년 쌍십일 날에는 27개 브랜드만 참여했는데도 최종적으로 5,200만 위안의 매출을 기록했다. 참여한 업체들은 모두 인기 아이템이 품절되는 상황에 처했다. 2009년의 성적이 좋았기 때문에 2010년에는 모두들 훨씬 더 자신감이 넘쳤다. 작년과 같은 품절 사태를 막기 위해 업체들은 심지어 오프라인의 물건들까지 온라인상으로 가져와 판매했다. 당일 매출액이 9억 3,600만 위안에 달해 홍콩의 하루 매출액을 초과했다. 하지만 동시에 이처럼 높은 매출액은 한편으로는 대규모 물류 대란을 초래했다. 당시 전자상거래에 대한 업계의 인식이 여전히 단순한 인터넷만의 수요나 공급 수준에 머물러 있어서 물류가 제대로 준비되지 않았기 때문이다.

6. 마윈의 알리바바에서 모두의 알리바바로_상생과 조화를 통한 혁신과 재도약

미래에 대한 희망과 믿음_2010년, 동업자 제도, 102년 가치 문화 증폭

2010년, 알리바바그룹의 창업 멤버 열여덟 명이 ‘창업자’ 신분을 내려놓고 그룹 내부적으로 ‘동업자 제도’를 시행하기 시작하면서 매년 새로운 동업자를 선발하여 합류시켰다. 알리바바의 동업자 제도는 지분 비율에 따라 이사 지명권을 분배하는 것이 아니라 ‘동업자’로 불리는 사람들이 이사회의 대다수 이사를 지명한다는 것이다. 또한 알리바바의 ‘동업자 제도’ 방안은 공동출자기업의 동업자들과 달리 기업의 채무에 대한 연대 책임을 질 필요도 없다. 마윈은 동업자가 회사의 경영자이자 사업 설계자이며, 문화 계승자이자 주주로서 회사의 사명과 장기적 이익을 견지하고 고객과 직원, 주주를 위한 장기적 가치를 창출한다고 설명했다.

마윈은 줄곧 한 가지 위대한 이상을 품어 왔다. 중국인들 자신만의 가장 위대한 회사를 만들겠다는 것이다. 2009년 알리바바 10주년 기념 행사에서 마윈은 알리바바를 102년의 역사를 갖는 기업으로 만들 것을 제안했다. 처음에 마윈이 제창한 구호는 80년 기업을 만드는 것이었다. 마윈이 당시 ‘80’년이라고 정한 것도 고심 끝에 나온 숫자였다. 1999년 당시 인터넷 업계에는 수많은 회사들이 상장 8개월 만에 달아나 버리는 상황이 비일비재했다. 대부분의 중국 국민들이 인터넷 회사들은 상장을 해서 돈을 긁어모으면 곧장 달아나버린다고 말하곤 했다. 그래서 당시 마윈은 80년 동안 살아남는 기업을 만들겠다고 선언했던 것이다.

조직 구조의 대변혁_2011년 6월, 타오바오의 단계적 분할

“변화는 고통스러운 일입니다. 어떤 변화도 순조롭게 이루어지지 않지요.” 마윈은 이렇게 말했다. “우리는 반드시 변해야 합니다. 변화가 다가오기 전에 먼저 변해야 합니다.” 기업의 관리자들은 시장의 위기와 기회를 가장 먼저 파악하고 위기가 닥치기 직전에 대응 전략을 수립해야 한다. 마윈은 대기업을 소기업으로 분할하는 것은 시장과 경쟁자들에게 보다 많은 도전의 기회를 주는 동시에 알리바바 자신들에게도 더 많은 기회를 주기 위해서라고 말했다.

“저는 우리 중국이 매우 이상하다는 생각이 듭니다. 특히 1960년대는 대단히 이상했지요. 걸핏하면 완벽한 세상을 꿈꾸면서 위대한 사회를 만들겠다며 모든 것을 뒤집어 버렸습니다. 저는 이미 48세가 되었습니다. 기억하십시오. 남을 변화시키려면 자신이 먼저 변해야 합니다. 세상을 완벽하게 만들려면 자신이 먼저 완벽해져야 하지요. 남을 잘 도와주고 싶다면 먼저 자신을 도우십시오. 자신을 제대로 돕지 못한다면 모든 것이 헛될 뿐입니다.”

7. 새로운 시대를 향해_주식 상장 그리고 그 이후

새로운 경제 체제를 향한 배치_2014년, IT에서 DT로, 알리바바의 이동 전략

마윈은 중국 모바일 인터넷의 기회가 PC 인터넷을 뛰어넘어야 한다고 생각했다. 3,4선 도시(중소도시)들이 특히 그랬다. 중국의 농촌은 PC 시대를 뛰어넘어 모바일 인터넷 시대로 바로 넘어갈 가능성이 있었다. “저는 개인적으로 휴대전화가 데이터를 소비하는 주요 기기가 될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진정으로 변화시키는 것은 우리의 라이프스타일이지요. PC가 우리의 일하는 방식과 생산․제조 방식을 바꿨다면, 무선 인터넷은 라이프스타일 전체에 일대 변혁을 가져올 것입니다.

마윈은 무선 사업부에 대해 동료들에게 여러 차례 이렇게 말했다. “여러분들이 할 일은 타오바오를 무너뜨리는 것입니다. 타오바오를 더욱 강력하게 만드는 것이 아니라 타오바오를 무너뜨렸을 때가 바로 여러분들이 성공하는 때입니다. 잘 될 때는 반드시 스스로를 무너뜨릴 방법을 생각해야 하고, 안 될 때 스스로 강해질 방도를 생각해야 하는 겁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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