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계를 삼킨 거대한 신화, 렉서스

   
체스터 도슨(역자: 서지원)
ǻ
거름
   
13000
2004년 11월



■ 책 소개
어떻게 도요타 자동차가 세계에서 가장경쟁이 치열하고, 세인의 주목을 한 몸에 받으며, 수익성 높은 시장에서 승자가 될 수 있었을까? 이 책은 그 질문에서 시작하여 렉서스의 기원과신화, 그리고 렉서스의 성장 과정 등 모든 것을 기자 특유의 빠른 호흡으로 상세히 기록하고 있다. 무려 10년이란 시간을 일본에 거주하며,자동차 산업 일반에 도통한 경제통 기자답게 저자 체스터 도슨(Chester Dawson)은 풍부한 내부 자료와 중요 인물들과의 인터뷰를 통해도요타의 비하인드 스토리를 헤집고 다닌다. 

 


이 책은 렉서스의 기원에서부터 렉서스의 최신 모델에 이르기까지 렉서스의 성장 과정을 상세히기록하고 있다. 성공신화의 토대가 된 도요타 생산 방식, 독특한 광고 전략, 미래지향적인 마케팅 전략, 경영, 생산, 브랜드, 서비스, 세일즈전략 등 렉서스의 성공 요인을 짚어본다. 뿐만 아니라 & 도요타가 미국 시장 진출 초기에 저지른 실수, 성공가도를 달리다가 침체기에빠졌을 때의 비하인드 스토리, 렉서스 신화의 단초를 마련한 LS 400을 탄생시킨 주역인 스즈키의 광적인 열정이 불러온 부작용 등, 성공 신화의명암을 모두 보여주고 앞으로 렉서스가 1위 자리를 고수하기 위해 해결해야 할 난제들이 무엇이 있는지에 대해서 제시하였다. 


■ 저자 체스터 도슨(Chester C. DawsonIII) 
미국 경제 주간지 「비즈니스위크」 편집장. 일본 도쿄에서 10년 동안 거주하며「비즈니스위크」「파이스턴이코노믹리뷰」「블룸버그통신」에 "일본 기업들의 사라진 10년"이라는 주제로 다수의 기사를 게재했다. 1992년 오하이오대학을 졸업했으며, 1993년 하버드 대학에서 석사학위를 취득했다. 


■ 역자 서지원 
연세대학교 교육학과, 한국외국어대학교통역번역대학원을 졸업하였다. 2003년 동계올림픽 IOC위원회 수행 통역을 맡았으며, KBS 9시 뉴스 번역 업무를 담당했다. 옮긴 책으로는『벌거벗은 여인』『꿈을 포기하지 마라』 외 다수가 있다. &
 
■ 차례
머리말- 렉서스 비밀의 열쇠 
서문 - 렉서스는 누구로부터 왜 태어났는가 


제1장 성공신화의 토대가 된 도요타 생산방식 
렉서스의기원 | 대중 시장을 공략하라 | 창업자 기이치로의 도전 | 위대한 모방가 도요타 | 미국을 정복하라 | 브랜드는 저축과 같다 | 럭셔리크로스오버 | 가격을 할인하지 말라 | 부가가치를 높여라 


제2장 미래의 고객, 보보스족을 찾아서 
여피는 우리의타깃이 아니다 | 렉서스만의 디자인을 찾다 | 기본으로 돌아가자 | 서서히 형체를 드러내다 


제3장 렉서스의 아버지 스즈키 이야기 
무단결석 학생| 중상위층을 겨냥하라 | 문제의 열쇠는 엔진 | 연료 소비를 줄여라 | 소음이 없는 자동차 | 도요타냐 닛산이냐 


제4장 신화의 태동, 다하라 공장의 기적 
자동화프로젝트 | 완벽을 넘어선 디자인 | 자동화의 문제점 


제5장 끊임없이 완벽을 추구하다 
새로운 영업 네트워크| 렉서스 서약 | 완벽을 향한 끊임없는 추구 | 광고 캠페인이 시작되다 | 고객들에게 깊은 인상을 심다 | 렉서스의 데뷔 


제6장 위기를 극복하고 브랜드 로열티를 높이다 
위기를기회로 삼다 | 성공 가도를 달리다 | 렉서스의 황금기 | 독일 브랜드의 반격 | 렉서스의 암흑기 | 미국과 일본의 통상마찰


제7장 원하는 모든 것을 렉서스로 만들다 
렉서스의이단아 | 베이비붐 세대의 자동차 | 성장에 따른 고통 | 시장을 평정할 혁신적인 모델 | 젊은 층을 흡수하라 | 인간의 욕망 컨버터블


제8장 세계 시장에서 렉서스 왕국을 세우다 
우리가차이를 만들어낸다 | 해외 생산 공장이 성공하다 | 아시아의 암거래 시장 | 난공불락의 요새 유럽 공략 | 렉서스의 DNA 


에필로그 - 신화는 지속될 수 있는가 
역자 후기 - 우리에게도 "렉서스"가 필요하다
부록 - 렉서스의 계보 




세계를 삼킨 거대한 신화, 렉서스


성공신화의 토대가 된 도요타 생산방식
창업자 기이치로의 도전

사실 도요타 자동차는 말하자면 부유한 집안의 말썽꾼이 순전히 자기가 좋아서 시작한 취미에서 시작됐다. 자동직기를 만드는 부잣집의 아들로 태어나 방랑벽이 다분했던 도요타 자동차의 창업자 기이치로 도요타는 가문의 사업 경영권을 더 뛰어난 비즈니스 마인드를 갖고 있던 매부에게 넘겨준 후 아버지로부터 이어받은 자동차에 대한 열정을 불태우기 시작한다.


1930년대 초반 비즈니스 벤처라기보다 기이치로 개인의 취미에 지나지 않던 작업장은 그럴싸한 오토바이 엔진을  충분히  생산해 내는 1천명 규모의 R&D 사업장으로 변모해 있었다. 당시 중국 동북 지역에서 온갖 행패를 부리고 일본 정부의 정책 전반에 지대한 영향력을 행사하기 시작한 일본 제국 군 고위 간부들의 격려에 힘입어, 기이치로는 1935년 A1이라 불리는 차 모델을 생산하는데 성공했다. 그러나 시보레의 데소토 에어플로우의 조잡한 모방품이었던 A1은 그 후 2개의 모델이 더 나온 뒤 완전히 단종되고 말았다.


새로이 생겨난 도요타라는 단어는 일본어로 글씨를 쓸 때, 10획을 그어야 하는 가문의 이름인도요다보다 2획이 모자란 8획만 써도 됐다. 이러한 우연은 행운을 불러온다고 생각했는데, 왜냐하면 8은 일본에서 행운의 숫자이기 때문이었다. 또한 발음하기도 쉽고, 비옥한 논밭이라는 뜻을 지닌 가문의 이름인 도요다 보다 일본인들의 귀에 더 현대적으로 들렸다.


위대한 모방가 도요타
기이치로 도요다는 1950년 자리에서 물러났고 2년 후 타계했다. 경영난에 직면한 도요타 자동차가 은행으로부터 구제자금을 제공받는 대가로 도요다 기이치로가 지켜보는 가운데 1,600여 명의 직원을 해고했는데, 이로 인해 야기된 파업 사태를 해결하기 위한 협상안에 도요다 기이치로가 사임한다는 조건이 포함돼 있었다.


도요타자동차는 몇 달 지나지 않아 신임 회장 쇼타로 가미야의 지휘 아래 생산량의 급증과 함께 회생의 길을 걷는다. 이번에도 도요타자동차를 살린 것은 군용 트럭 수요였는데, 일본 제국군이 아니라 한국전쟁에 참전하는 미군을 위해 미국이 주문한 것이었다. 꾸준한 미군용품 수요 덕분에 도요타자동차 공장은 계속 가동됐고, 도요타자동차는 투자할 자금을 충분히 모아 1955년 최초의 성공작 크라운 세단을 생산해 낸다.


1957년 8월 1.5리터 엔진 크라운이 미스 재팬의 호위를 받으며 미국 시장에 진출했으나, 예상했던 판매량을 실현하지 못하자 도요타자동차는 소리 소문 없이 미국 시장에서 철수했다. 미국 시장의 진입 실패는 도요타자동차의 보수적 경향을 더 강화시켜, 큰 위험을 감수하는 데 주저하도록 만들었다. 도요타자동차는 위대한 혁신가라기보다 기존의 디자인을 개선한 모델을 만들어내는 위대한 모방가로서 평판을 날리게 되었다. 도요타자동차는 눈에 거슬리지 않는 평범한 차를 가능한 한 많은 고객들에게 판매하는 전략을 사용한다. 도요타자동차는 다른 고급 차들을 벤치마크 대상으로 삼았음을 공개적으로 시인했다.



미래의 고객, 보보스족을 찾아서
렉서스만의 디자인을 찾다

F1프로젝트 팀 중 디자인을 위해서 미국에 머물던, 우치다를 포함한 다섯 명의 팀원은 미국 시장조사 여행을 마치고 일본으로 돌아갔다. 일본으로 돌아간 프로젝트 팀이 가장 먼저 시작한 일은 BMW, 벤츠, 그리고 기타 브랜드의 최고급 차를 분해해 어떠한 부품으로 만들었으며, 어떠한 방식으로 조립됐는지를 알아내는 것이었다. 그들은 분해한 것들 중 가장 잘 만들어진 부품을 채택해 F1자동차에 적용할 최저 품질 기준으로 삼았다.


1985년 가을, 우치다는 3개의 시험모델을 일본으로 가져와 예비 시사회를 열었다. 이 프로토 타입들은 길고 점점 좁아지는 노우즈(앞부분)와, 차가 도로와 밀착되는 실루엣을 지닌 강력하고 스포티한 감각의 디자인을 선보였다. 그러나 일본 본사의 경영진들은 별로 호의적인 반응을 보이지 않았다. 경영진은 우치다의 모델들이 너무나 미국적이며, 과도하게 공격적이고, 따뜻함을 느낄 수 없으며, 높이도 너무 낮다고 생각했다.


일본 내 판매 영업부는 일본 내 시장에서 F1모델을 시판하는데 흥미를 보이고 곧 디자인 과정에 영향력을 행사하기 시작했다. 그 결과 시간이 갈수록 차 디자인은 점점 근엄한 분위기를 풍겼다. 전 크라이슬러 총괄매니저로 렉서스 출시 초기 렉서스 사업부를 지휘했던 데이비스 일링워스는 다음과 같이 말했다. “원래 프론트 엔드 디자인은 더 젊고 활기찬 느낌이었습니다. 그러나 도요타자동차의 일본 엔지니어들은 할아버지 세대의 구식 스타일 차를 만들려고 했습니다. 우리는 후에 결정된 디자인보다 초기의 디자인이 훨씬 마음에 들었습니다.”


데이비스 일링워스의 말은 매우 의미심장하다. 오늘날까지 렉서스 모델에서 발견할 수 있는 단 하나의 커다란 결함은 변치 않는 보수적인 스타일링으로, 브랜드 이미지에 활기를 불어넣을 수 있는 진정한 스포츠카 기능을 보여주는 모델을 찾아볼 수 없다는 것이다. 우치다 팀은 이사회 임원을 대상으로 매번 다른 실물 크기의 진흙 모델을 만들어 열여섯 달 동안 8차례의 공식 발표회를 갖고 나서야 최종 디자인이 확정됐다.



렉서스의 아버지, 스즈키 이야기
문제의 열쇠는 엔진

보통 다른 대부분의 부품이 결정되기 전에 엔진 표준이 결정되는 것이 관례이나, LS모델의 엔진 표준은 출시 예정일 겨우 1년 전인 1988년 3월에 가서야 최종 확정됐다. 엔진 크기가 이처럼 막판에 결정된 것은 스즈키가 LS모델의 성능 목표를 높게 잡아야 한다고 단호하게 고집했기 때문이었다. 게다가 LS모델은 경쟁 차종보다 몇 천 달러 더 저렴해야 했다. 프로젝트에 관여한 직원들은 주력품종 자동차, 즉 F1자동차를 생산하기에 일반적인 3.0리터 엔진은 충분하지 않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지만, 성능을 위해 훨씬 더 거대한 엔진을 장착하면 원가가 대폭 상승하리라는 자명한 사실 또한 알고 있었다. 결국 프로젝트 직원들은 LS모델에는 적어도 3.5리터 엔진을 장착해야 한다는데 의견의 일치를 보았다.


스즈키는 또한 프로젝트 초기부터 높은 연비 효율을 절대적인 목표로 설정했고, 이 때문에 엔지니어들은 또한 골머리를 앓아야 했다. 엔진은 차를 구성하는 가장 값비싼 부품일 뿐만 아니라, 가장 무거운 부품이기도 했다. 갤런 당 22.5마일(리터당 9.6킬로미터)거나 그 아래로밖에 달리지 못하는 차를 대상으로 효력이 발생하는 연료 소비가 많은 차에 부과하는 세금을 피할 수 있을 만큼 가벼운 엔진을 만들어야 하는 것이다. 오랜 심사숙고 끝에 F1엔지니어들은 만족스런 가속도 성능과 함께 무엇보다 연료 소비가 많은 차에 붙는 세금에 대한 우려를 가볍게 일소한 3.8리터 엔진을 개발함으로써 마력과 자동차 무게 사이의 타협점을 찾아냈다.


연료소비를 줄여라
그런데 과연 도요타자동차가 프로젝트 자동차에 강력한 엔진을 정착하기 위한 노력을 충분히 기울인 것일까? 만약 도요타자동차의 오랜 경쟁업체인 닛산 자동차가 새로 출시할 인피니티 고급 세단에 원래 예상했던 3.0리터 대의 엔진 대신 4.0리터가 넘는 더 큰 엔진을 장착한다면 어떻게 할 것인가? 스즈키는 LS모델을 전면적으로 합리화할 필요가 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작은 한정된 공간에 가능한 많은 기능을 끼워 넣는 방식의 일본식 모토가 스즈키를 통해 F1 프로젝트에 발휘된 것이다.


그 결과로 도요타자동차는 매우 강력한 힘을 자랑하는 초경량 4.0리터 엔진을 개발하는 데 성공했고, 후에 이 엔진을 조금 변형하여 소형 비행기에 장착하는 아이디어를 진지하게 고려할 수 있는 단계에까지 이른다. 실제로 1996년 도요타자동차는 미국 항공당국으로부터 LS모델에 장착한 것과 똑같은 엔진을 기반으로 한 프로펠러 엔진을 판매할 수 있는 허가를 얻어냈다.



신화의 태동, 다하라 공장의 기적
자동화 프로젝트

다하라 공장은 인력난 때문에 세계 시장에서 일본의 경쟁력이 떨어질 시대가 올 것에 대비해 직원 없는 무인 공장으로 가는 길을 제시하는 미래형 공장이었다. 이러한 미래형 공장이라는 아이디어 이면에는 훗날 생산량이 증가하고 인건비가 증가하는 날이 오면 초기에 소요되는 막대한 기술 투자가 상쇄될 것이라는 기대가 자리하고 있었다.


사실 다하라 공장의 기계 대부분은 더 적은 노동력만으로 움직이고, 근로자들이 매우 편안하게 일을 처리할 수 있도록 디자인된다. 또한 도요타자동차는 공장 가동 초기부터 베테랑 직원들의 경험을 최신 기계의 성능보다 더 중요시하는 도요타 생산 시스템을 사용해서, 장기간의 경험으로 보증된 생산 모델에 의존했다. 다하라 공장에서 최초로 생산된 자동차는 사륜 구동 하이럭스 경형 픽업트럭으로 1979년 1월 양산에 들어갔다.


최초의 하이럭스가 출시된 지 12개월 후, 다하라 공장의 생산라인에 코롤라가 포함됐다. 이로써 도요타 자동차는 3천만 대째 자동차를 생산하게 되었으며, 이 중 3분의 1은 수출용이었다. 닛산과 혼다가 자사 최초의 미국 현지 공장 건설을 시작하거나 완공 후 생산을 시작하는 와중에도, 도요타 자동차는 천천히 가는 접근법을 고수하며 일본 내 공장에만 투자했다. 얼마 후 에이지 도요다 사장은 제2의 다하라 공장을 건설한다. 다하라 제2 공장은 1980년 2월 가동에 들어갔으며, 수출물량은 계속 증대했다.


1981년은 도요타자동차의 창립자 기이치로 도요다의 아들인 쇼이치로 도요다가 에이지 도요다의 뒤를 이어 도요타자동차의 사장직에 오르고, 에이지 도요다는 회장직을 맡은 해이기도 하다. 사장직에 오른 쇼이치로 도요다는 매일 일어나는 모든 경영활동에 대한 운영 통제권을 쥐게 됐다. 그의 주도 하에 1982년 다하라 생산라인에 셀리카가 추가됐으며, 다하라 공장은 50만 대째 자동차를 생산하는 기록을 세웠다. 1985년 다하라 공장의 제3조립라인이 가동에 들어갔으며, 1986년 7월경 다하라 공장은 200만 대째 차량을 생산하는 기염을 토했다.


1987년 8월, 도요타자동차는 고급 차 담당 부서를 창설한다는 계획을 발표했다. 이미 7개의 다른 모델을 생산하고 있던 다하라 공장은 에이지 도요다 회장이 주력품목 고급 차를 생산하는 능력을 갖추었다고 확신할 수 있을 만큼 지난 10년 동안 성장을 거듭해왔다. 다하라의 연간 생산량은 1980년 고작 5만 대에서 1981년 10만 대, 그리고 1982년 20만 대 수준으로 껑충 뛰었다. 생산량이 증대함에 따라 직원 부인들은 생산 목표량을 맞추기 위해 공장에서 아르바이트를 해달라는 부탁을 받았다. 1984년 또 다시 생산량이 두 배로 뛰었고, 1988년 연간 생산량 90만 대를 기록한다.


이러한 놀라운 생산량 증가는 소수의 엘리트 직원들이 1989년 5월 LS 400 생산 작업에 들어갈 수 있는 기반을 마련했다. 최첨단 기계, 세심한 주의를 기울인 과학적 정확성, 그리고 가장 사소한 디테일에까지 쏟아 부은 관심 속에서 최초의 렉서스가 다하라에서 세계로!라 씌어진 자랑스러운 플래카드 아래 탄생했다.



위기를 극복하고 브랜드 로열티를 높인다
위기를 기회로 삼다

사건의 발단은 9월말 토랜스의 렉서스 사업부 본부가 핫라인으로 서비스 지원 요청을 한 샌디에이고의 한 딜러로부터 골치 아픈 현장 보고서를 받은 데서 시작됐다. 이 판매 대리점에 근무하는 판매사원의 말에 따르면, LS400의 크루즈 컨트롤 시스템(가속페달이나 브레이크를 제어하는 기술)이 시험주행 도중 오작동을 일으켜 오버 드라이브(고속주행 시 엔진의 회전수를 자동적으로 조절해주는 장치)가 작동하고 시승한 고객이 브래이크를 꽉 밟았으나 앞으로 계속 돌진했다는 것이다. 부품과 서비스의 지원을 담당하고 있는 딜러들과 본사 사이에서 기술 관련 문제를 해결하는 수석 책임자인 딕 치티가 이 문제를 맡았다. 딕 치티는 이 문제를 즉각 일링워스에게 알렸다.


가장 첫 번째로 취한 조치는 샌디에이고의 딜러로부터 문제에 대한 자세한 보고서를 받고 결함이 발생한 크루즈 컨트롤 스위치를 일본 본사에 속달로 보내 부품의 사후분석 비판을 실시하는 것이었다. 분석 결과 크루즈 컨트롤 시스템의 작동 스위치가 제작되는 과정에서 결함이 발생해 문제가 생긴 것으로 밝혀졌다. 또한 렉서스 사업부에 차의 배선 설비에 문제가 있다는 항의들이 접수되었다. 에이지 도요다 회장은 판매된 모든 차에 대해 즉각적인 제품 회수 조치를 취하기로 결정을 내렸다. 모든 부품을 무상으로 교체해주기로 한 것이다.


미국법인 직원들은 대리점의 정비사들에게 제품 회수 조치에 관한 설명을 하기 위해 미국 전역을 돌아다녔고, 전국의 LS 400고객 8천명 모두에게 제품 회수 조치에 대한 개별적인 통지를 보냈다. 치티는 새로운 부품이 크리스마스 전까지, 즉 제품 회수 조치가 내려진 후 20일 이내에 모두 장착되기를 바랐는데, 이는 물류적인 여건을 고려해 보았을 때 결코 쉬운 일이 아니었다. 부품교체 때문에 고객들이 겪을 불편함을 보상하기 위해 렉서스 딜러들은 고객이 요구할 경우 렌터카를 무료로 대여했고, 부품을 되도록 빨리 교체하기 위해 LS 400을 직접 회수하고 고객에게 다시 배달하는 역할까지 자처했다.


결국 기한 내에 회수 조치 대상 차량의 95퍼센트가 새로운 부품으로 교체되었다. 나머지 5퍼센트 차는 미국 시장 밖으로 역수출됐거나 경쟁업체들이 구입해 분해한 것들이었다. 렉서스 본부는 회수 조치 대상이 된 모든 차량에 세차와 왁스칠을 하고 무료 연료를 가득 채우는 것을 잊지 않았다. 결국 사태를 능숙하게 처리한 덕분에 렉서스의 명성은 올라갔다. 패배의 문턱 바로 적전까지 갔다가 승리의 기회를 움켜쥔 것이다.



원하는 모든 것을 렉서스로 만들다
젊은 층을 흡수하라

판매량 증가는 렉서스에게 좋은 일이었으나 렉서스를 끈질기게 괴롭히는 문제가 있었으니, 바로 고객의 연령층이 점점 높아진다는 사실이었다. 이는 렉서스의 브랜드 이미지를 위협하기 시작하는 심각한 문제였다. 베이비부머 세대는 렉서스 사업이 성공하는 데 큰 역할을 했으나, 분명히 젊은 감각을 지닌 멋진 고객은 아니었다. 렉서스는 더 젊고 부유한 고객을 끌어들이기 위해 젊은 감각에 어필하는 차를 개발해야 했다.


도요타자동차는 젊은 고객 층에게 어필하기 위해 IS 300모델을 출시했으며, 이는 젊은 층에게 어필하는 BMW 3 시리즈의 아성에 도전하기 위한 렉서스 사업부의 무기였다. IS 300의 더블 위스본 서스펜션은 BMW 3 시리즈와 흡사하지만 똑같은 수준이라고는 볼 수 없는 편안하면서도 안전한 승차 감을 제공했다. 먼저 출시된 IS 200은 미국에서 출시되기 몇 달 전에 유럽에서 먼저 소개되었다. IS라는 이름도 인터내셔널 세단(International Sedan)의 줄임말이었다. 그러나 IS라인의 주요 공략 시장은 언제나 북미 시장이었다.


출시 첫해 IS 300 고객의 평균연령은 39세였으며, 연봉이 10만6천 달러 수준이었다. 고객 연령층은 2001년 33세, 2002년에는 31세로 낮아졌다. 2004년 IS 300은 29세의 평균 고객 연령을 자랑할 수 있게 되었고, 이는 모든 고급차종을 통틀어 가장 젊은 연령층이었다. 또한 이는 2003년 미국 시장에 출시된 도요타자동차의 세 번째 모델이자 젊은이를 겨냥한 모델 싸이언의 평균 고객 연령보다도 낮은 수치였다.



세계시장에서 렉서스 왕국을 세우다
렉서스의 DNA

렉서스는 고급차 시장에 먼저 확고한 자리를 점한 경쟁업체들과 동일한 전략을 단지 더 뛰어나게 수행함으로써 정상의 자리에 오르는 데 성공했다. 그러나 일단 1위 자리에 오른 후에는 모방자가 아니라 혁신자로서 사고해야 했다. 스스로를 다듬는 일을 그만두고, 자신만의 특징을 정의해야 할 필요가 있었다. 2001년 J.D.파워의 고객 만족과 판매 대리점 서비스 순위에서 렉서스가 5년 동안 고수하던 1위 자리를 GM의 새턴에 내주자, 미국법인은 충격에 휩싸였다.


렉서스 사업부는 렉서스 브랜드의 정체성을 재정의하기 위해, 외부 컨설팅업체를 고용해 거의 1만여 명에 달하는 회사 직원과 판매 대리점 직원을 대상으로 기본으로 돌아가자는 취지의 모임을 13개 도시를 순회하며 열었다. 모임의 목적은 직원들의 사기를 진작시키고 자기만족에 빠지지 않도록 주의시키는 것이었다. 모임에 참가한 직원들은 렉서스 브랜드의 역사와 렉서스를 특별하게 만드는 요소에 관한 강의를 들었으며, 소비자들이 인식하는 렉서스 브랜드의 약점을 극복하기 위한 방법을 생각해보도록 요청 받았다.


2002년 렉서스 고객들의 중간 연령은 52세에 달해, 상위 3개 고급 차 브랜드 중 가장 높은 연령 대를 기록했다. 자동차 구매에 대한 조언을 제공하는 인터넷 사이트인 에드먼즈의 수석 편집장인 칼 브라우어는 다음과 같이 말했다. “자동차 업계 종사자들이 철칙같이 지키는 한 가지 일반적인 규칙이 있습니다. 바로 젊은이들이 선호하는 차를 고연령층 고객에게 판매할 수는 있으나, 고연령층 고객이 선호하는 차는 그 누구에게도 판매할 수 없다는 점입니다.”


도요타자동차는 렉서스 브랜드에 활기를 불어넣기 위해 제품군을 대폭 확대했으며, 모델 개발 주기를 단축했다. 이는 미국 사회가 젊은 세대의 유행과 활기에 점점 더 많은 중요성을 부여하는 추세에 발맞추는 매우 시의 적절한 조치였다. 또한 도요타자동차는 일본 본사의 북미 지부에서 인력을 차출해 15명으로 구성된 렉서스 기획부를 본사에 신설했으며, 고위 경영진과 토랜스 미국법인에까지 권한을 행사할 수 있도록 만들었다.


목표는 제조에서 마케팅에 이르는 렉서스 브랜드의 모든 활동을 잘 조율하는 것이었다. 마침내 렉서스 사업부는 최초로 일본 본사로부터 권리를 당당히 주장할 수 있는 하나의 개체로 인정받은 것이다. 이와 같은 새로운 사업 구조 아래에서 향후 2~3년 동안 렉서스 브랜드는 더 명확한 정체성을 갖추고 더욱 새롭고 남성적인 스타일의 제품 라인이 구체화된다. 렉서스는 아직 확고한 정체성을 찾지는 못했지만, 눈에 보이지 않는 선을 넘어 미국 문화의 주류로 자리잡게 되었다.

(본 정보는 도서의 일부 내용으로만 구성되어 있으며, 보다 많은 정보와 지식은 반드시 책을 참조하셔야 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