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책은 총 5부로 나누어져 있는데 1부와 2부는 속옷 만들기 30년에 관한 이야기로윤경양품점에서 시작해 속옷 디자이너로 거듭나지만 IMF로 인해 힘든 고비를 맞고 다시 일어서기까지의 과정을 담았다. 3부는 보정 속옷으로건강해지고 예뻐지는 것에 대한 여성들의 수다, 4부는 속옷에 관한 상식을 알기 쉽게 풀어냈다. 마지막 5부는 기본 치수 재는 법, 가슴모양에맞는 디자인 선택 요령, 웨이스트 니퍼ㆍ팬티ㆍ거들 선택 요령 등 속옷의 역사와 속옷 실용 가이드에 대해 설명했다.
■ 저자 박명복
이태리 패션스쿨 ESSE MODA수료(1983), 일본 오아키 디자이너 개인지도(맞춤속옷 전문과정) 수료(1987), 롯데 호텔 제1회 끄레벨 팜 패션쇼(1996), 이태리패션스쿨 ESSE MODA 합자(1997), 이태리 패션잡지 ‘르네아 인티마’ 소개(1997), 이태리 밀라노 제1회 패션쇼(1997), 중국상해 패션쇼(1998), 이태리 밀라노 제2회 패션쇼(1998), 롯데 호텔 제2회 끄레벨 팜 패션쇼(1998), LG홈쇼핑 속옷 게스트150여 회 출연(1998~2002. 9), 이태리 MODENA 제3회 패션쇼 및 이태리 패션협회로부터 디플로마상 수상(2002. 5), 교원L&C ‘페르메’ 디자이너로 140여 회 출강(2002~2003. 8). 저서로는『34-24-35 미인 만들기』,『성공을 부르는 몸매이야기』등이 있다.
■ 차례
프롤로그 / 에필로그
PART 1 열정
성내동 윤경양품점 / 시장 아줌마, 공부하러 이태리로
통역사를 두고 강의 듣겠다고? /넌 돌체 가바나 같은 디자이너가 됐을 거야
속옷, 그저 가리개가 아니 구나 / 다시 공부하러일본으로
남대문아줌마, 회사를 설립하다 / 속옷에 미친 여자가 지나간다
끄레벨 팜으로 다시 태어난다 / 그 이름도 무서운IMF타격
홈쇼핑의 여왕 / 윤경양품점이 300평대 사옥으로
빌딩이 높으면 그늘도 크다 / 1%의 희망
마음의 평화에서출발한 찜질방 아이디어 / (주) 에띠엠으로 다시 비상하다
PART 2 희망
고향의 봄 / 비밀의 뜰 / 오르간 그리고 월반
무엇을 할것인가 / 소망과 포부 / 내 아름다운 사람들
PART 3 여자
브래지어 발명 / 1초 동안에도 변화무쌍한 세상에서
배려와도움의 정신 / 진정한 애프터서비스
서로에게 다 좋은 것이라면 반드시 좋다 / 맞춤 상품시대
진짜 귀족과 명품족 / 속옷코디네이터는 1인 기업이다
내 지적 재산권은 줄자 / 몸매를 디자인하는 여자
PART 4 속옷 동의보감
속옷은 입는 보약이다 / 속옷은 몸에 하는 기초화장품이다
속옷에 두 마리 토끼를 잡아넣을 것이다 / 스트레스 날려주는 속옷, 머리 좋아지는 속옷
불균형 여성을 위하여 /반지이론
PART 5 속옷 지식검색
속옷의 역사 / 속옷 실용 가이드
내 체형 바로알면 누구나 날씬해진다 / 날씬해지는 코디 방법
주니어란제리부터 시작하는 몸매관리 / 변하는 몸, 체크해야할 여성의 몸
속옷의종류와 스페셜 언더웨어 / 내 사이즈 바로 알기
남대문에서 밀라노까지
열정
성내동 윤경양품점
젊은 직장여성들이 좋아할 캐주얼 정장을 저렴하게 팔아보자, 오다가다 부담 없이 들러서 입어보고 얘기하다가 옷을 사 갈 수 있는 동네 아줌마들의 쉼터같이 가게를 꾸며보자, 그런 식으로 우선 단골을 확보해보자, 이런 생각을 하니 승산이 있을 것 같았다. 그래서 나는 그야말로 ‘코딱지만한 양품점’을 열게 되었다. 한쪽 벽엔 주부들이 꼭 입어보고 싶어 할만한 홈드레스를 쫙 걸었다. 그 중에서 가장 예쁜 옷을 앞에 걸었다. 다른 벽엔 세련미 넘치는 재킷과 원피스를 걸었다. 그리고 유리 진열장엔 에이프런, 윤나는 스타킹, 손수건 등을 예쁘게 진열했다.
특히 에이프런, 윤나는 스타킹, 손수건 등에 예쁘게 진열했다. 특히 에이프런은 당시 주말 연속극에 등장하는 중산층 주부들이 꼭 걸치고 나와서 많은 주부들이 환상을 품고 있는 소품이었다. 그런 소품은 선뜻 돈주고 사긴 아깝지만 꼭 갖고 싶은 것이기도 했다. 나는 모든 품목을 다른 가게와 비교도 되지 않는 가격으로 싸게 팔았다. 그렇다고 싸구려 옷들을 마구 팔았다는 게 아니다. 그것은 발품의 대가였다. 나는 숨은 물건들을 골라내는 데 재주가 있었다. 도매시장을 온종일 뒤져 싸고도 좋은 옷을 골라냈다. 도매상들에게 묵도 또 물어 사람들이 잘 모르는 판매 루트를 찾아 다녔다. 도매 전문가들도 모르는 공장으로 직접 찾아가서 최하 단가로 옷을 끊어오기도 했다. 이태원 후미진 골목을 뒤져 이국적인 셔츠를 가져오기도 했다. 이런 셔츠는 값을 제대로 쳐서 팔았는데, 젊은 직장여성들이 고객이었다.
손님들은 가게 한쪽엔 좀 비싼 특이한 디자인의 옷들도 취급한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그래서 각기 특성 있는 손님들이 골고루 단골이 되어 주었다. 점점 품목을 넓혀가다 드디어 속옷을 팔기 시작했는데, 거기서 뜻밖의 인생역전이 시작된 것이다. 내가 갖다 놓은 속옷은 하루가 멀다 하고 속속 팔려나갔다. “아니, 어디서 이렇게 예쁜 속옷을 구해요? 윤경양품점은 이래서 온다니까!” “똑같은 걸로 몇 개만 더 갖다 줘요. 친구들이 보고 이쁘다고 난리야!” 나는 놀랐다. 여자들은 분명 지금과는 다른 속옷에 열광했다. 이때부터 조금씩 여성 심리와 속옷에 대한 수요를 감지해 나갔다. 겉옷은 꼭 얼마라도 깎으면서도, 속옷은 라벨에 붙은 가격대로 흔쾌히 구입했다. 깎고 교환하고 환불하는 겉옷과 달리, 속옷에 대한 구입과 정은 매우 단순했다. 갈수록 속옷 장사에 관심을 가질 수밖에 없었다.
통역사를 두고 강의 듣겠다고?
비행기 안에서 나는, 처음 가족에게 유학 계획을 알리던 때를 회상하고 있었다. 공항에 도착할 시간이 되어가고 있었다. ‘정말 내가 무슨 일을 저지른 거지? 말도 안 통하는 이 낯선 땅에서 다 늦게 무슨 공부를 한다고. 가게 일도 벅찬데 무슨 속옷 디자이너가 되겠다고. 아, 차라리 어머니와 남편이 그때 끝까지 말려 주었더라면….“ 착륙 시간을 알리는 스튜어디스의 멘트가 울렸다. 나는 자신감에 차서 비행기에 오르던 때와 달리 점점 불안을 느끼고 있었다. 마음을 가다듬고 찬물을 한 잔 들이켰다. 나는 상상을 시작했다. 세계적인 속옷디자이너가 되어 밀라노에서 화려한 패션쇼를 하는 상상을 해보았다. 모든 여성에게 박수갈채를 받는 박명복도 그려보았다. 기분이 좀 나아졌다. 나는 비행기 유리창 밖으로 고개를 돌리고, 자신에 관해 객관적인 감정을 가져보려고 노력했다. 나 자신에게 말을 걸었다.
‘야, 박명복. 넌 어떤 사람이니? 너의 기질은 뭐니? 네 강점은?’ ‘글쎄…. 하지만 하나는 분명한 걸. 난 말야, 어려서부터 늘 엉뚱한 상상으로 시작하지만 그것을 끝내는 실현시키곤 했어. 레슨비를 내지 못하는 가난한 소녀가 피아니스트가 되겠다고 했던 시절, 피아노 치는 친구 뒤에 자석처럼 붙어서 손가락 움직임을 외워 그대로 쳤어. 늘 나만의 독특한 방법으로 행동했지. 이곳에 온 것도 나의 의지였어.’ ‘그래, 바로 그거야. 그런 의지로 넌 속옷 디자인 공부도 해낼 수 있어. 용감하게 뛰어들으렴.’
‘그래! 이제 이 비행기에서 내리면 모든 게 새로 시작되는구나. 속옷장사로 모은 돈을 다 털어 준비한 유학이다. 갈등은 이제 더 이상 허락할 수 없어!’ 나는 씩씩하게 승강장을 통과해 공항을 나섰다. 석양이 밀려오는 저녁 하늘이 갑자기 내 눈을 뜨겁게 했다. 한순간 나는 가족들을 떠올리고 있었던 것이다. 나는 눈을 감았다. 버스를 타고 학교까지 가는 길은 미리 익혀 두었다. 이태리어를 하나도 못 하니 매사 조심조심 준비를 해야 했다. 중세풍 돌담과 현대식 건물이 근사하게 조화를 이루고 있는 동네를 지나 학교에 도착했다. 그런데 너무 일찍 등교했다. 공부를 단 몇 분이라도 빨리 시작하고 싶은 마음이 간절했던 것이다. 빨리 의자에 앉아 디자인 북에 스케치를 해보고 싶었다.
문이 열리면서 아직 시간이 좀 남아 있어서 학교 앞거리를 쭉 걸어가 보았다. 여기저기 상점들이 막 문을 열고 있었다. 한 바퀴 돌고 내려오자 학교 정문이 열리고 있었다. 가슴이 콩닥콩닥 뛰었다. 그때 내 통역을 맡은 경희씨가 도착했다. 나는 경희씨와 함께 강의실 안으로 성큼성큼 걸어 들어갔다. 내 얼굴엔 의욕으로 꽉 찬 미소가 마구 번지고 있었다. “아니, 마담 박. 그럼 이태리어를 하나도 못 한단 말이에요?” “네, 그래서 이렇게 통역을 두고 공부하겠다는 거 아니에요.”
나는 선생을 바라보며 한국말로 중얼댔다. 곧, 옆에 앉은 경희씨가 내 말을 선생에게 전했다. 학생들이 의아한 눈초리로 나를 돌아보았다. 선생은 아예, 내 책을 덮으며 기가 막힌 듯 인상을 썼다. “랭귀지를 끝내고 와야죠. 말도 못 알아들으면서 어떻게 어려운 디자인 강의를 듣겠다는 겁니까?” “이태리어 따로 배우고 할 시간이 없어요. 저는 빨리 디자인 수업을 받아야 해요.” 경희 씨가 선생과 나를 번갈아 눈치 보면서 기어 들어가는 목소리로 통역을 했다. 선생은 답답해 죽겠다는 표정으로 내게 얼굴을 들이밀었다. “말도 안 되는 소리군요. 그럼 시간이 얼마나 걸리는지 알아요?” “그래서 일주일 내내 수업을 받기로 했습니다.”
“여기 수업은 강도 높은 실습으로 진행합니다. 그러자면 보통 각오로는 안 됩니다.” 나는 ‘무조건 오케이다, 각오는 넘칠 정도로 많다’고 통역을 부탁했다. 그러자 선생은 한풀 꺾인 얼굴로 나를 유심히 바라보았다. “통역으로 진행하면 시간이 모자라서 두 배로 노력해야 되요. 수업료도 두 배로 내야 합니다.” “네, 걱정 마세요. 열심히 하겠습니다. 수업료도 두 배로 내겠습니다!”
남대문 아줌마, 회사를 설립하다
점포가 많아지자 체계를 잡아서 조직적인 관리가 필요했다. 나는 그저 가난에서 벗어나고 싶었고, 속옷 디자이너가 되고 싶었던 것인데, 어느 덧 회사 경영자가 될 단계에 올라온 것이다. 솔직히 난 그 당시, 그 정도면 부자였다. 이젠 남대문 시장에서 벗어나, 부드러운 소파에 앉아 디자인 북에 스케치하고 결재서류에 도장도 찍고 하면서 새 삶의 터전을 꾸려도 될 것 같다는 생각도 들었다. 내 나름으로의 그런 인간적인 욕망도 있었다는 말이다. 사무실을 얻어 책상과 집기, 소파에 화분까지 들여놓으니 제법 번듯한 회사가 만들어졌다.
“선생님 축하해요. 이제 끄레벨 선생님도 이 정도는 가지셔야죠.” 모두들 축하의 말을 해주었다.
1990년 초, 나는 ‘유명통상’ 이라는 회사를 만들고 브랜드 ‘이너비(iner B)를 개발 등록했다. 직원 몇 명의 단출한 회사였지만, 내 이름을 건 공식적인 브랜드가 출범한 것이다. 양재동 사무실에 ‘이너비’라는 브랜드 라벨을 단 기능성 속옷들이 전시되었고, 늘어난 남대문 점포에는 새로운 브랜드 이너비를 사러 전국 각지에서 온 사람들로 붐비기 시작했다. 전국 소매상들에 의해 일본 제품보다 싸면서도 품질이 좋다는 소문을 타면서, 일반 손님들도 들끓으면서 나는 그야말로 ‘돈맛’을 보게 되었다.
윤경양품점이 300평대 사옥으로
나는 사옥 꾸미는 일에도 무척 신경을 썼다. 빌딩에 들어서면, 로비에 끌레벨 팜 보정 속옷 쇼룸이 오가는 손님들을 먼저 맞이했다. 5층은 내가 원 없이 속옷 연구에 매진할 수 있는 연구실을 두었다. 그 연구실에만 있으면, 비좁은 남대문시장 점포에서 줄자를 들고 속옷을 만들던 시절이 주마등처럼 스쳐가곤 했다. 사옥을 갖게 되고 난 후, 나는 환경과 일의 능률간의 관계에 대해서 많이 생각하게 되었다. 내 빌딩에서 내 마음대로 연구하고 영업사원들과 만나고 하다 보니, 더 없이 자유스러운 기분이 휩싸였다. 창의적인 아이디어들이 활발하게 솟아났다. 그런 게 아마도 "신바람을 탔다고" 하는 것 같다.
나는 영업사원들의 구체적 작업환경을 업그레이드하는 일에 관심이 갔다. 바깥에서 일을 하고 돌아왔을 때, 소속감을 갖고 편히 쉴 수 있는 공간은 절대 필요했다. 이건 물론 직원 복지 차원에서도 필수적인 요소이겠지만, 시간을 좀 달리 해 접근할 이유가 있었다. 대개, 영업사원들은 외근을 하기 때문에 수금 상황을 계산하는 책상에 몇 분 앉아 있다가 나가는 걸로 생각들 한다. 그러나 영업팀에 가장 중요한 것은 문화 공간이었다. 사람과 부딪히고 대화하고 물건을 파는 데 필요한 기술은 그냥 나오지 않는다. 안락한 소파에서 차 한 잔 마시면서 고객에게 해야 할 말을 정리해야 하고, 최신 유행하는 잡지도 많이 보면서 트렌드를 익혀야 한다.
늘 사람을 대하기 때문에 막상 혼자 있어야 할 시간을 효율적으로 가질 수 있는 공간이 필요한 것이다. 물론, 다른 부서의 직원들에게도 그런 환경은 필요하겠으나, 특히 나는 세일즈 우먼들에게 요구되는 환경이라고 보았다. 곧, 문화 공간을 마련하라고 직원들에게 지시했다.
그 공간은 옥상으로 정해졌다. 옥상은 정원처럼 편안하고 자연미가 나도록 꾸며졌다. 도심 빌딩마다 옥상에 나무를 심어 친자연적인 환경을 꾸미는 것이 유행하기도 했다. 하지만 나는 단순히 구색 갖추기 식의 제스처는 싫었다. 비용을 투자하여 옥상을 가꾸는 만큼, 확실히 가치 만족이 있어야 했다. 오밀조밀 나무도 심고, 화분도 놓고, 벤치도 놓았다.
신선한 아이디어, 바람직한 가치가 창출될 수 있는 근사한 공간이 되도록 했다. 그곳에서 각자 꿈의 나무를 키울 수 있다면, 부디 그렇게 된다면 참 좋을 듯싶었다. 나는 보다 매출을 늘리기 위해 거대 유통망을 가진 회사와 손을 잡자는 계획을 마련했다. 시장 조사 끝에, 최대 영업조직을 갖춘 N사로 결정하고 곧 협력 제안서를 만들었다. 그 회사는 탄탄한 유통망을 가지고 화장품, 건강보조식품 등 여성들이 선호하는 제품을 판매했다. 나는 N사에 속옷을 납품하기로 했다.
국내 최대 영업팀을 갖춘 기업과 영업 연계한다는 대사를 치루기 위해 나는 신발끈을 단단히 묶었다. 다시 필드로 나가기 위해 숨을 고르고, 고개를 당당히 쳐들었다. 이제 정말, 소망했던 세계적인 속옷 기업체로 서막이 열리는 것이라고 숨을 내뿜었다. 나는 제안서를 마지막까지 꼼꼼히 점검하고, 옥상으로 올라가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정원의 나뭇잎들이 햇빛에 반짝거리며 흔들렸다. 당당하리만치 강렬한 태양 빛이 내 눈을 찔렀다. 나는 눈을 감았다 내 마음은 긴장과 설레임, 속옷에 대한 열정으로 어느 때보다도 뜨거워졌다.
희망
무엇을 할 것인가
유치원 교사 생활을 그만 두고, 나는 1976년 12월에 결혼했다 스물 한 살. 솔직히 말하면 가난에서 벗어나고자 남들보다 좀 빨리 한 결혼이었다. 여자는 결혼을 통해 꿈을 이루려고 한다지만, 나는 그렇지 않았다. 남편이 들으면 섭섭하겠지만, 그때 나는 사랑이나 행복 따위는 꿈꿀 수 없었다. 남루한 현실로부터의 탈출 같은 것이라고 보는 게 더 맞았다. 남편은 소박하고 욕심 없는 공무원이었다. 우리는 을지예식장에서 결혼식을 올렸다. 결혼식 때 입으시라고 그동안 모은 돈으로 어머니께 새 한복을 지어드렸다. 그게 그렇게 좋았던지, 결혼식 내내 한복을 만지고 또 만졌다. 보는 사람마다 한복 자랑을 늘어놓으며, 소녀처럼 곱게 웃었다.
어머니께 인사를 드리는 순간, 앙상하게 늙어버린 모습이 어찌나 측은하고 속상하던지 울음이 터질까봐 꾹꾹 참았다. 나는 청상과부의 고생과 서러움으로 주름 진 어머니의 얼굴에 고개 숙여 인사를 드렸다. ‘어머니 당신의 둘째 딸이 결혼합니다. 지금까지 그렇게 잘 길러주셔서 감사합니다. 잘 살겠습니다.’ 남편을 따라 금곡에서 신접살림을 시작했다. 그런데 당시 금곡은 생각보다 낙후한 시골이었다. 시댁은 장작으로 군불을 때는 깡촌이었다. 나는 서울에서 살았기 때문에 그런 일은 익숙지 않았다. 나이 어린 새색시는 감히 뭐라고 하지는 못했지만, 좀 실망스러웠다. 사람 좋은 남편은 미안한지 그저 빙그레 웃기만 했다.
가난했어도 서울에서 자유롭게 생활했던 내게 시골 생활은 여간 답답한 게 아니었다. 생각지도 못한 군불 때기에 연신 기침을 하면서 불씨를 꺼트리기 일쑤였다. 남편이 슬그머니 불 때는 일을 도와주었지만, 서울이 그리웠다. 그리던 중 남편이 직장을 옮기면서 다시 서울로 오게 되었다. 서울 생활과 함께 아이 엄마가 되었다. 차츰 생활이 안정되면서 본격적으로 ‘무엇을 할 것인가? 어떻게 돈을 벌 것인가?’ 고민하기 시작했다. 여기저기 가게를 알아보고 장사 아이템을 떠올리며 가슴 부풀어 했다.
여자
1초 동안에도 변화무쌍한 세상에서
나는 1초를 어떻게 보내고 있는가? 1초, 1분, 1시간이 쌓여 우리의 인생을 이루는 것인데, 그 시간을 어떻게 활용하고 있는가? 특히 전업주부와 함께 이 점에 대해서 고민해 보고 싶다. “주부님, 혹시 낮잠으로 시간을 때우거나 연속극 보는 일로 하루를 보내시는 건 아니세요? 주부님, 이제 시대를 따라잡으세요. 전업주부의 힘, 그 위력을 발휘하시라고요.” 이러면 전업주부들이 화를 낼까? 지금도 나는 여전히 주부이다. 가정을 건사하는 것이 얼마나 손을 많이 타고 보이지 않는 노력이 필요한 일인지 모르는 사람이 아니다. 그러나 집에서 시간을 보낸다는 이유 때문에 안일하게 살아갈 확률도 높은 게 또한 주부이다.
최근 몇 년 동안의 자료에 따르면 한국 가사노동의 총 부가가치는 국내총생산GDP의 20%에 해당하는 150조 원에 이른다고 한다. 임금이 높고 인가가 많은 미국은 1조 달러가 넘으며, 전 세계적으로는 12조 달러라고 한다. 이 부가가치에 대해, 가사노동을 세액공제 대상에 포함시켜야 한다는 제안이 국회에서도 논의되었다. 이런 주부의 능력이 가정에서 나아가 보다 확장된 차원에서 발휘된다면 그 가치는 더욱 높아질 것이다. 요즘의 주부들은 입시 위주의 잘못된 교육을 비판하는 교육 커뮤니티나 대안 교육 커뮤니티를 형성하기도 한다. 독서 모임을 만들고, 물물 교환을 통한 재활용 장터를 열기도 한다. 그저 모이면 먹고 쇼핑하면서 명품 자랑이나 하는 주부들은 시대착오적 주부상임을 스스로 알아가고 있는 것이다.
실생활에서 피부로 느낀 모순들을 개인의 문제로만 인식하지 않고, 자신이 속한 공동체에서 함께 시정하려고 행동할 줄 아는 것이다. 요즘 주부들이 내 자식 내 남편에게 갇혀 있기보다는 남의 자식, 타인의 소외된 환경에도 관심 갖는 모습을 자주 보게 된다. 특히 주부들은 아이를 키우는 입장에서 가난한 아이들, 소외된 이웃들, 이런 그룹들에게 보다 실천적으로 배려할 능력이 있는 계층이다. 여성이고 주부이고 가정을 건사하는 장본인들이기 때문에 보다 섬세하게 불평등문제를 관찰하고 도움을 줄 수 있다.
“아이 하나 키우는 데에 얼마나 돈과 시간이 많이 드는데, 남의 아이 생각할 겨를이 있나요? 또 돈 없으면 못 사는 세상에 도울 여력도 없고….” 그 말뜻을 모르는 것은 아니다. 하지만 답은 바로 주부들의 그 말에 있다. 말 그대로 아이 키우며 살아가는 데 시간과 돈이 아주 많이 드는 세상이다. 그렇다면 이런 사회에서 가장 기본적인 것조차 누리지 못하는 사람들, 그들에 대해선 어떻게 인식해야 하는가? 가장 무지한 엄마는 자기 자식도 결국 그들과 함께 세상을 살아가게 되어 있다는 것을 모르는 엄마라고 생각한다. 이 세상은 여러 사람들이 어울려 살아가고 있다는 것을 가르쳐야지, 저런 애들하고는 어울리지 말라고 하면 아이들은 나약한 사회인이 될 것이다.
이러한 최소한의 태도, 적극적으로 돕기가 어렵다면 차별하지 않으며 이해하려는 시각이라도 갖는 것이 중요하다고 본다. 왜냐하면 어떤 시선으로 사물과 현상을 바라보느냐에 따라 결과는 크게 달라지게 때문이다. 보드랍게 보다보면 맘이 동해서 가진 것의 100분의 1이라도 나눌 수 있게 된다. 그렇게 나누다 보면 어느새 조금씩은 나아진다. 따듯한 시선이 있는 사회가 진정으로 행복한 사회라고 생각한다.
속옷 지식검색
속옷의 역사
우리나라 여성 속옷은 개화기를 시작으로 여성들 사이에 퍼져나갔으나, 일반화된 것은 1960년대 이후부터이다. 한복에서 양장을 입으면서 근래의 팬티나 브래지어 등이 유행하게 된 것이다. 이전까지 우리나라 여성들 속옷은 한복 중심의 고전적 속옷이 주였다. 속옷 디자이너로서 나는 우리나라 속옷의 아름다움에 매번 감탄한다. 속옷 만드는 것이 좋아서 디자이너가 되었지만, 늘 우리 한복과 속옷에 대해 관심이 많았다. 외국에 나갈 때마다 서양인들이 한복 예찬을 하면, 나도 시간 가는 줄 모르고 한복 이야기를 늘어놓곤 한다. 한복 실루엣이나 디자인, 색조 등은 세계적으로 자랑할 만한 수준의 의상이라고 할 수 있는데, 속옷은 더 고혹적이고 아름답다. 지금은 모든 의식주가 서구화되어 한복이나 고전 속옷이 우리 생활에서 멀어진 게 사실이다.
우리나라 속옷에 관한 가장 오래된 기록으로는 삼국시대 벽화를 들 수 있다. 벽화 속의 사람들을 보면 윗옷 속에 속저고리를 입고 있으며, 바지 밑으로 속바지를 입었다. 주름치마 안에는 신분에 따라 각기 다른 속치마를 입고 있다. 당시 풍속관련 문헌을 살펴보면 속저고리의 소매, 몸통, 너비 등에 관한 설명이 있다. 이것은 우리 조상들이 어떤 민족보다도 속옷에 대한 명확한 개념을 가지고 있었음을 알게 한다.
조선시대에는 여러 가지 ‘속곳’을 입었는데, 현재도 한복을 제대로 차려 입고자 할 때에는 주요 속곳을 착용한다. 속곳은 본래 속속곳과 단속곳의 총칭인데, 속옷의 우리 옛말로 해석하면 된다.
우리 옷의 모양은 하후상박이라고 하여, 하의용 속옷이 많음을 알 수 있다. ‘속적삼’은 상의의 맨 처음 입는 속옷이다. ‘삼작’이라 하여 저고리 3개를 한 벌로 입었다. ‘다리속곳’은 가장 밑에 입는 속옷으로 홀 겹의 긴 감을 허리띠에 차게 되어 있는 형태였다. 오늘날의 팬티 같은 것으로 볼 수 있다. 바지 밑에 입는 속바지는 ‘속속곳’이라고 불렸다. 다리통이 넓고 밑이 막히게 되어 있는 형태의 옷이다. 피부에 직접 닿는 속옷이므로, 옥양목, 무명, 광목 등을 사용했고 상류층에서는 명주 등의 부드러운 감을 사용하였다.
‘무지기’는 상류층에서 정장을 할 때 입었던 속치마의 일종이다. 12폭의 모시를 이용해 3층에서 7층 정도 길이가 다른 천을 허리에 단 것으로, 젊은 사람은 다양한 색을, 나이든 사람은 단색으로 입었다. 서양의 패티코트 격인 속옷으로, 한복을 맵시 있게 부풀리기 위한 목적의 속옷이다.
‘대슘치마’는 왕족의 속옷으로써, 정장 시 무지기 안에 대슘치마를 한 번 더 받쳐 입었다. 대슘치마의 밑단에는 4cm 정도의 모시를 붙였는데, 문헌에 의하면 대슘치마를 두고 ‘서도 앉은 것 같고 앉아도 선 것 같은 자세를 위함’이라고 쓰여 있다. 엄격한 왕가 풍속도를 엿볼 수 있는 대목이다.
‘단속곳’은 여성의 속치마 다음에 입는 것으로, 바지통이 넓고 직선이며 홑으로 되었다. 속치마 대용으로 쓰이기도 했다. ‘바지’는 단속곳 속에 입었는데, 통이 넓고 배래선이 둥글며 앞뒤가 트인 형태이다. ‘너른바지’는 상류계급이 정장할 때, 단속곳 위에 입어 하체를 풍성하게 보이게 한 속옷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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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 정보는 도서의 일부 내용으로만 구성되어 있으며, 보다 많은 정보와 지식은 반드시 책을 참조하셔야 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