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래를 사라

   
정선구
ǻ
따뜻한손
   
12000
2005�� 04��



■ 책 소개
휴맥스 변대규 사장, NHN김범수 사장, 다음커뮤니케이션 이재웅 사장 등 14인의 대한민국 벤처 리더들의 삶의 모습을 담았다. 그들이 고난과 역경을 딛고 어떻게 노력하여성공을 거두었는지, 그 과정과 성공 비결을 소설처럼 극명하게, 드라마처럼 박진감 있게 기술하고 있다.

단순히 잘난 사람들의 잘난 이야기에 그치는 것이 아니라, 실패에 실망하고, 좌절한 보통사람들의 진솔한 고백을 그리고 있어 보다 생생하며, 마지막 장에는 국내 굴지의 기업들의 인재관과 인재경영 시스템을 담아, 이 시대가 원하는인재가 되기 위해서는 어떻게 해야하는지, 그 길을 찾는 데에도 도움을 준다.


■ 저자 정선구
연세대 정치외교학과를졸업하고 영국 카디프대 저널리즘 스쿨에서 커뮤니케이션학으로 석사학위를 받았다. 1988년 중앙일보에 입사, 사회부 기자를 거쳐 정치부에서 국회와정당을 담당했다. 그 뒤 경제부와 산업부에서 경제부처와 금융기관을 출입하고, 삼성과 포스코를 비롯한 대기업과 IT기업 등 벤처업계를 두루취재했다. 현 탐사기획팀 차장.


■ 차례
책머리에 - 보통 사람들의 특별한도전 


1. 희망은 절망보다 강하다 
혼을 바친도전 - 박대연 티맥스소프트 창업주 
성공은 위기의 얼굴을 하고 온다 - 변대규 휴맥스 사장 
꼬마 기술자가 만드는 상생의 세상 -조현정 비트컴퓨터 회장 
고독은 나의 힘 - 장흥순 터보테크 회장 


2. 성공엔 공짜가 없다 
미래는 도전하는자의 몫 - 김범수 NHN 사장 
세상은 꿈으로 가득하다 - 윤송이 SK텔레콤 상무 
다르다는 것은 즐거운 것 - 이재웅다음커뮤니케이션 사장 
자유로운 자는 멀리 본다 - 양덕준 레인콤 사장 
감당할 수 있는 것은 실패가 아니다 - 박지영 컴투스 사장


3. 나를 경영하는 자가 세상을 경영한다
낯선 길의 아름다움 - 안철수 전 안철수연구소 사장 
길이 없다면 내가 만든다 - 이성민 엠텍비전 사장 
골리앗 없는 다윗은없다 - 이기형 인터파크 대표 
나에게 사람은 생명과도 같은 것 - 박성찬 다날 사장 
원천기술만이 희망이다 - 최충엽 신지소프트사장 


4. 벤처 리더의 첫 걸음, 직장 인재
빅4 그룹 총수들의 인재관 
4대 그룹의 인재경영 
CEO가 기업운명을 좌우한다


발행인의 편지 - 김창영





미래를 사라


희망은 절망보다 강하다
혼을 바친 도전 - 박대연 티맥스소프트 창업주

1968년, 광주의 한 초등학교를 졸업한 어린이는 중학교에 진학하고 싶은 마음이 굴뚝같았다. 친구들은 모두 새 교복으로 갈아입고 가슴이 부풀어 뛰어다녔지만, 그의 머릿속에는 그러나, 암으로 자리를 보전하고 있는 아버지의 얼굴이 먼저 떠올랐다. 그는 5남매의 장남이었다. 집안은 마음 편히 밥 한 끼 먹지 못할 만큼 가난했다. 가족의 생계를 위하여 세상으로 나가는 길밖에 없었다.


어린 박대연이 취직한 곳은 전남화물이라는 운수회사였다. 그에게 주어진 자리는 한 달에 3천 원을 받는 사환직. 3천 원이면 쌀 한 가마니를 살 수 있는 돈이었다. 누나는 가정부를 하겠다고 고향집을 떠나갔고, 남동생은 시내에서 구두닦이로 나섰다. 사환으로서 아침부터 그는 여기서 부르면 여기로 뛰어가고, 저기서 부르면 저기로 또 뛰어갔다. 교통비를 부수입으로 얻고자 버스를 타는 대신 뛰어다니기 일쑤였다. 키 작은 꼬마가 바지런하게 심부름하는 것이 측은했던지, 회사의 아저씨들은 심부름을 시킬 때면 몇 푼씩 용돈을 쥐어주었다. 꼬깃꼬깃한 돈을 주머니에 넣어뒀다가 집에 오면 그것을 곧게 펴서 어머니에게 드렸다.


박대연의 집은 본래 큰 부자였다. 1956년 전라남도 담양에서 그가 태어났을 때, 아버지는 많은 논과 밭을 가진 부농이었다. 수확의 계절이 되면 집 앞에는 추수한 곡식을 실은 수레가 길게 늘어섰다. 그러다 어느 해, 친척 가운데 한 분이 재산상 엄청난 피해를 끼치는 일이 벌어졌다. 아버지에게 남은 것은 식구들이 겨우 몸을 누일 수 있는 집 한 채뿐이었다.


사환생활이 익숙해지고 월급도 오르자, 이미 남의 것이라고만 여겼던 학업의 꿈이 그에게 조금씩 고개를 내밀었다. 그는 광주 동성중학교 야간과정에 입학했다. 낮에는 사환으로 일하고 저녁에 학교에 갔다가 밤늦게까지 자습을 계속해야 하는 고달픈 생활이 시작됐으나, 모처럼 나날이 행복했다. 원래 공부에 소질이 있었는지, 그는 입학하자마자 금세 두각을 나타냈다. 그는 가족에게 조금씩 희망을 보여주고 싶었다. 중학교를 마친 뒤 망설일 것 없이 고등학교로 진학했다. 광주상고. 이번에도 야간부였다. 상고에서도 그는 1등을 놓치지 않았다. 당시에는 광주상고를 졸업하면 시험을 치르지 않고도 은행에 들어갈 수 있는 길이 있었다. 목표가 있다는 것은 얼마나 큰 힘인가.


1975년 그는 한일은행에 입사했다. 초봉은 7만 원. 사환시절과는 비교할 수 없는 큰돈이었다. 뿐만 아니라 목돈을 대출할 수 있어, 3천만 원을 빌려 동생들의 학비를 댔다. 그리고 서울 신길동에 행원용 아파트를 하나 분양 받았다가 때가 돼 되팔았는데, 차익이 5천만 원에 이르렀다. 빚을 갚는 데도 쓰고 어머니와 동생들의 전셋돈으로도 쓸 수 있는 요긴한 돈이었다. 어린 시절을 온통 들씌웠던 가난이 조금씩 자취를 감춰가고 있었다.


그렇게 한발씩 안정을 향해 나아가고 있을 때 사무실에 붙은 작은 공고가 그의 눈길을 끌었다. 본점에서 전산실 직원을 모집한다는 내용이었다. 컴퓨터가 대략 알려지고 있던 시절, 무척 호기심이 들었다. 그는 적성 검사 후 며칠 뒤 전산실 발령을 받았다. 전산실에 배속되자 우선 교육을 받아야 했다. IBM 위탁교육에 응해 기초적인 지식부터 하나하나 배워나가기 시작했다. 컴퓨터는 무척 신기한 기계였다. 그에게 컴퓨터는 “도끼자루 썩는 줄 모른 신설놀음”이었다. 그런 세월이 물처럼 흘러 나중에 따져보니 무려 12년 6개월 동안이나 같은 자리에 박혀 있어 전산실 터주대감이 돼 있었다.


생활이 제 궤도에 접어들면 그는 늘 학문에 대한 열망으로 열병을 앓았다. 그는 일상과 학문 사이에서 망설이며 고민을 거듭했다. 나이는 어느덧 30대 중반. 하지만 그는 결단을 내렸다. 1988년 정든 직장을 뒤로하고 퇴직금 1천 3백만 원을 손에 쥔 뒤 미국행 비행기에 올랐다. 오레곤 대학, 이름 이외에는 전혀 모르는 미지의 곳이었다. 미국에 도착하자마자 그는 몸이 매우 아팠다. 탈장이었다. 하지만 학비를 병원비에 쓸 형편이 아니었던 그는 수술 날짜까지 잡았지만 그 날로 퇴원해버렸다.


“이를 악물고 버티니까 이상하게도 통증이 줄더군요.”


“‘나에게 공부에 전념할 수 있는 기회가 드디어 생겼구나.’ 그것은 너무 고마운 일이었습니다.”


늦깎이 유학생으로 그는 단기간에 학점을 많이 따서 일찍 졸업하는 것을 목표로 삼았다. 중학교 야간과정에 입학하면서부터 줄곧 1등을 놓치지 않았던 그의 관성은 미국에서도 유효했다. 그가 받은 학점은 전 과목 A. 학교에서는 10만 달러에 달하는 장학금을 지급했다. 그는 방학 때에도 학점을 땄기 때문에 학사와 석사 과정을 불과 3년 만에 마쳤다. 그리고 1992년 1월 로스앤젤레스의 남가주대학교(USC)로 옮겨 4년 반 동안 공부하여 박사학위를 땄다.


이후 그는 미국에 자리를 잡고 싶었다. 하지만 마음을 돌려 고국의 젊은이들을 지도하기로 결심하고 국내의 여러 대학에 지원서를 보냈다. 비록 출신 지역과 출신학교, 인맥도 없고 나이도 마흔 둘이었지만, 유학 시절의 탁월한 성적과 경력으로 그는 외국어대학교에 임용됐다. 그리고 계측제어학과 조교수로 분주하게 지내던 중 KAIST 교수직에 지원서를 보냈다. 공학 분야가 전공인 만큼 KAIST가 교육과 연구 환경이 보다 나을 것 같았기 때문이다. 하지만 문제는 인터뷰에서부터 시작됐다. 교수들은 어딘지 모르게 그를 비아냥대는 듯했다. 어떤 교수는 KAIST가 어떤 곳인지 아느냐고 노골적으로 무시했다. 모욕감이 치밀었다. 하지만 그런 것쯤은 그의 인생에서 익숙한 경험이었다. 그래서 그는 차근차근 설명해 나갔다.


과거는 “지금 여기”까지 지나온 한 가닥 항로의 궤적에 불과하다. 현재라는 큰 바다를 항해하는 데 있어서는 이미 지나온 물길보다 현 좌표는 어디이며 앞으로 어느 물길을 따라갈 것인지, 그 방향을 설정할 수 있는 나침반이 더욱 의미가 있다. 하물며 식견과 경험이 풍부한 특급 항해사에게 나이가 무슨 문제인가. 나에게는 지난날 연마한 최고의 실력과 앞날의 가능성을 증명해주는 모교의 객관적인 증명이 있다.


그런 모습이 깊은 인상을 남겼는지, 그는 그 해 KAIST 조교수로 임명됐다. 그 흔한 줄 하나, 백 하나 없이 그 방면에서 최고로 인정받는 학교에서 자신을 불사를 기회가 주어진 것이다.


그는 학생들을 가르치며 연구를 해나가는 바쁜 틈을 타 회사를 하나 설립했다. 외국어대에 재직할 때 만든 것이었는데, 그 회사가 바로 티맥스소프트다. 미국으로 유학하기 이전, 전산실에 근무할 때 이미 그는 데이터베이스와 미들웨어 등 시스템 소프트웨어를 개발해 볼 생각을 갖고 있었다. 남보다 일찍 출근하고 자정이 넘은 시간까지 연구실 불을 밝힌 결실로 드디어 1998년 7월 첫 출시가 이뤄졌다.


하지만 시장의 반응은 의외로 차디찼다. 들불처럼 일어나 쉽게 쓰러져가던 벤처 붐 시기에, 미국 제품을 도용했다는 루머도 나돌았다. 세계에서 미국에 이은 두 번째로 개발에 성공한 순수 원천기술에 가격도 훨씬 쌌지만 제품은 단 한 개도 팔리지 않았다. 그러던 어느 날 국방부에서 전화가 한 통 걸려왔다. 제품은 우선 국방부 사전심사를 통과했다. 성공이 금방 눈앞에 그려졌다. 하지만 달이 바뀌고 해가 바뀌어도 최종 심사결과가 나오지 않았다. 실망은 더 큰 실망을 낳고 시간은 실망의 무게를 더욱 크게 한다. 직원들이 좌절하지 않게 달래는 일이 급선무였던 그때, 국방부에서 소식이 들려왔다. 티맥스 제품이 1등으로 통과됐다는 소식이었다. 가슴이 뛰었다. 직원들은 박수치고, 환호하고, 서로 얼싸안고 자신보다도 더욱 좋아했다. 엉엉 우는 직원도 있었다.


그 제품은 지금 육군본부를 비롯해 삼성전자, 포스토, 현대해상, 대우증권, 우리은행 등 국내 굴지의 기관 600여 곳에서 핵심 전산업무에 활용되고 있다.


“사람들은 ‘이만하면 최선을 다했다’고 말하곤 합니다. 하지만 혼을 바치지 않은 채 최선을 다했다는 것은 아직 미흡합니다. 나는 후배들에게 이렇게 말하곤 합니다. ‘돈을 좇지 말고 혼을 좇아라.’ 혼을 바친다면 잃을 게 없습니다. 그러나 돈만 좇는다면 잃을 게 많지요.”

그는 지금도 ‘기술의 혼’을 좇고 있다. 경기도 분당에 세운 티맥스연구소가 그 결실이다. 이 부설 연구소에는 현재 KAIST를 비롯하여 1백50여 명이 연구에 몰두하고 있다. 자신이 창업한 회사는 영입한 전문 경영인들에게 맡기고, 그 또한 연구소장으로 후배들을 뒷바라지하고 있다.


성공엔 공짜가 없다
자유로운 자는 멀리 본다 -양덕준 레인콤 사장

‘튀어야 산다.’ 이것은 양덕준 레인콤 사장의 창업동기이자 성공전략이다. 언젠가 그는 직원들이 깜짝 놀랄 모습을 하고 회사에 나타났다. 50대로서, 그것도 CEO가 머리를 초록색으로 물들인 것이다. 그리고 일주일이 지났다. 하나 같이 특색 없는 비슷한 모양이었던 직원들의 머리색이 변하기 시작했다. 핑크빛, 빨강, 초록….


양덕준은 1851년 대구에서 태어났다. 집안은 유교적이고 보수적인 가풍을 지니고 있었다. 하지만 그의 어린 시절은 엉뚱함으로 가득했다. 초등학교 시절 꿈은 헬리콥터를 만드는 것이었다. 그래서 동네 곳곳을 돌아다니며 고철 모으기에 열중했다. 그는 초등학교를 졸업할 때가 돼서야 포기해야 한다는 사실을 알고 고철 모으기를 중단했다. 영남대 응용화학과를 졸업한 그는 군대에 있을 때부터 반도체에 관심을 갖기 시작했다. 그래서 삼성전자의 요원 모집에 응해 연구직으로 입사했다. 하지만 연구 분야는 적성에 맞지 않았다. 그래서 30대에 들어 마케팅과 기획 분야로 방향을 바꾸었다. 1985년에는 반도체부문의 미국법인 주재원 생활을 시작했고, 1995년에는 비메모리 마케팅 수출담당 이사로 승진했다. 그의 40대는 눈코 뜰 새 없을 만큼 바빠서 한순간에 그렇게 흘러갔다.


드디어 마흔 아홉. 열심히 일했고 이룬 것 또한 많았지만, 그는 좀 더 멀리 내다보고 싶었다. 세상은 디지털 기술을 중심으로 큰 변화가 올 것이라는 예감과 함께, 그의 천부적인 자유분방함은 직장에서의 성취와는 다른 것을 원하고 있었다. 삼성전자의 임원직은 헌신짝처럼 버릴 수 있는 자리가 아니었지만, 그는 자신이 원하는 것을 선택했다. 이후 디지털 관련 회사를 설립하기 위해 동분서주하며 어려움을 겪을 때, 외국회사에서 좋은 조건으로 스카우트 제의가 들어왔지만, 유혹을 뿌리치고 결국 1999년 레인콤을 설립했다.


레인콤은 처음부터 MP3 플레이어 시장을 목표로 한 것은 아니었다. 여러 솔루션을 새로 디자인해서 VCD와 DVD용으로 파는 것이 시작이었고, 점차 MP3 플레이어 솔루션 분야를 구상했다. 당시 국내에는 1백30여 개의 MP3 플레이어 제조업체들이 난립해 있었다. 그래서 회로와 소프트웨어를 개발해 그 업체들에게 파는 일부터 시작했다. 하지만 제조업체들의 이해 부족과 레인콤이 받는 턱없이 적은 수수료를 고려할 때 그는 중대한 결심을 할 수밖에 없었다. 직접 MP3 플레이어를 제작하는 것!


이미 100여 개의 업체들이 난립한 시장에서의 또 하나의 후발주자. “어차피 빈 손, 망하면 다시 시작하지요. 걱정하지 마십시오.” 이래환 이사의 말이다. 레인콤의 돌풍 뒤에는 바로 그가 있었다. 그는 레인콤의 공동 창업자다. 하지만 제작은 쉬운 일이 아니었다. 인터넷 포털이나 반도체칩 사업이 아니면 벤처기업으로 인정도 하지 않는 이상한 풍토에서, 벤처캐피털 회사들은 레인콤을 굴뚝 산업 취급했다. 결국 양덕준은 외국으로 눈을 돌려 평소 친분이 두터웠던 AV컨셉으로부터 5백60만 달러의 거금을 투자 유치했다. 그에게는 다른 고민도 있었다. MP3 플레이어의 브랜드 명을 어떻게 할 것인가? 결국 고민 끝에 외부 공모를 통해 채택한 이름은 ‘아이리버(iRiver)였다. 인터넷의 강이라는 의미로 회사의 제품 이미지와도 잘 맞았다.


아이리버가 처음 납품된 곳은 미국의 소닉블루였다. 주문자개발생산 방식으로 세계 진출 브랜드는 소닉블루의 리오(Rio)로 물건을 납품하고 한국 내에서는 아이리버 브랜드로 판매한다는 조건이었다. 하지만 독자 브랜드가 없다는 것은 여러 가지 측면에서 서러운 것이었다. 이에 레인콤은 내부에서도 반대가 만만치 않았지만 더 먼 미래를 보고 2001년 당시 레인콤의 전체 매출의 75%를 차지하는 절대 고객 소닉블루와 결별했다.


거대한 매출자와 결별하고 나니 당장 새로운 판로 개척이 절체절명의 사안으로 대두됐다. 그는 미국 베스트바이로 진출을 모색했다. 베스트바이는 미국에만 5백 개 이상의 매장을 가진 세계 최대의 가전 양판점이었다. 하지만 이들을 한번 만나는 것조차 하늘의 별 따기만큼이나 어려웠다. 어렵사리 마련한 자리에서도 별 반응을 보이지 않았다.


“한국이란 작은 나라의, 그것도 신생 회사의 신생 브랜드를 어떻게 믿을 수 있나?” “품질은 어떻게 보장하며, 적기에 납품은 가능한가?”


그러던 차에 베스트바이가 데이터플레이 MP3에 관심이 많다는 정보를 입수할 수 있었다. 데이터플레이는 동전만한 CD의 양면에 500메가바이트의 데이터를 저장할 수 있는 혁신적인 저장장치였다. 절호의 기회였다. 그 동안 데이트플레이를 꾸준히 준비해온 회사에 찾아온 준비된 행운이었던 것이다. 그는 세계 최초로 완료한 데이터플레이를 2001년 7월까지 양산하겠다고 제안했고, 결국 OK를 받아냈다.


처음에는 레인콤의 주력제품인 CD타입 MP3 플레이어도 같이 진열해줄 것을 간곡히 부탁했다. 하지만 베스트바이는 그 요청을 “별개의 문제”라며 사실상 거절했다. 그런데 2001년 6월, 그는 다시 베스트바이로부터 뜻밖의 제안을 들었다.


“CD형 MP3 플레이어 단일 제품으로는 라인업이 부족하니 플래시메모리 타입 MP3 플레이어 2만8천 개를 만들어 9월 20일까지 납품하면 두 제품 모두 입점 처리하겠습니다.”


그는 정신이 번쩍 들었다. 하지만 한 번도 만들어본 적이 없는 제품을 3개월 내에 양산하라니….


“무조건 해낸다.”


그의 결심은 확고했다. 어차피 후발주자인 마당에 큰 모험을 걸 수밖에 없는 상황이었다. 그때부터 3개월 동안 모든 직원들은 회사에서 먹고 자는 지옥훈련에 돌입했다. 그리고 눈물나는 고통 끝에 프리즘이란 제품을 만들어 정확히 기한을 맞춰 납품했다. 이 제품은 베스트바이 매장에서 포터블 디지털 분야 판매고 1위를 기록한 뒤에도 무섭게 팔려나갔고, 레인콤은 베스트바이와 ‘전략적 제휴’까지 맺을 수 있었다. 말 그대로 대박이 터지는 순간이었다.


프리즘처럼 그가 만들어낸 MP3는 플레이어는 늘 파격이었다. 그리고 이후에 베스트바이의 독점권을 풀기 위해 창안한 후속모델로 만들어낸 크래프트는, 프리즘의 인기를 훨씬 능가하며 팔려나갔다. 플래시메모리 공급 부족으로 가격이 천정부지 올랐을 때도, 미리 예상하고 가격 결정을 해 놓은 크래프트는 레인콤의 사장 점유율을 끌어올리며 팔려나갔다.


그는 모든 공과 열정과 노력을 쏟아 부은 임직원들에게 돌렸다. 그는 직원, 고객, 거래처 등 어떤 사람을 만날 때도 늘 솔직하고 진실한 인간관계를 맺는다. 그의 “사람 중심 철학”은 자연스럽게 레인콤의 문화가 됐다.


양덕준 사장은 레인콤을 꾸려가면서 수많은 결단의 순간에 서야 했다. MP3 플레이어 제조업으로 사업 방향을 바꿨을 때, 아이리버 독자 브랜드로 해외시장에 진출했을 때, 크래프트의 가격을 결정할 때…. 하지만 그 순간마다 항상 정도(正道)를 걸었다. 여기서 정도란 도덕적 개념이 아니라, 사업의 본질적 측면에서 궁극적으로 가야할 길을 택한다는 것이다. 그러면 결정단계에서 마음이 편해지고 결과에 대해 후회가 없다고 그는 말한다.


나를 경영하는 자가 세상을 경영한다
원천기술만이 희망이다 - 최충엽 신지소프트 사장

1993년 11월, 최충엽은 한국무역정보통신(KTNET)연구소 대리였다. 직책은 프로그래머. 평범한 회사 업무에 종사하던 그가 기회를 잡은 것은 새로운 CEO가 부임하면서부터다. CEO는 “미래전략을 세워야 한다”는 의욕에 불타고 있었다. 그 일환으로 한국무역정보통신의 10년 전략을 세우고자 앤더슨 컨설팅사에 컨설팅을 의뢰하며, 회사 내부에서 이 프로젝트를 수행할 담당자를 물색했다.


그러나 간부급에서는 마땅한 인물을 찾을 수 없었다. 고심 끝에 CEO는 대리에 불과한 그를 과감히 발탁, 앤더슨의 파트너로 임명했다. 회사의 운명이 대리 직급에 불과한 한 말단의 어깨 위에 놓이게 된 것이다. 그때부터 그는 개발자에서 기획자?경영자로 변신을 시작했고, 한국무역정보통신의 십년지대계를 세우는 주역이 됐다.


1997년 7월 그는 한국무역정보통신의 미래개발팀장으로 근무하고 있었다. 직책상 벤처기업들과 자주 만날 수 있는 자리였다. 그 기간에 그는 다양한 벤처기업인들과 접촉하며 직간접의 경험을 쌓았다. 이후 직접 벤처기업을 운영하고 싶은 생각이 들었고, 직장을 MINET로 옮겼다. 그런데 당시 외환위기가 불어 닥쳤다. 그는 짧은 기간에 벤처기업의 단맛쓴맛을 다 보았고, 결국 GE 계열사인 GE 인포메이션서비스에 입사해 컨설팅 업무를 다시 시작했다.


그는 2000년 초 재기를 위해 벤처기업 아이디어클럽닷컴을 설립했다. 무선인터넷의 가능성을 내다본 것이다. 그곳에서 대표로 있으면서 그는 핵심 인력들을 모으기 시작했다. 이것이 신지소프트가 점프하는 활력소가 됐다.


신지소프트는 2000년 3월 설립한 모바일 솔루션개발 전문회사. 창업자는 무선인터넷 다운로드 솔루션인 GVM과 콘텐츠 플레이어 GNEX를 개발한 고석훈 상무이사다. 그는 SK텔레텍의 소프트웨어 개발팀에서 전임 연구원으로 근무하던 중 게임에 대한 열정 하나만으로 이상춘 이사와 단 둘이서 회사를 설립했다. 조그만 오피스텔에서 단돈 2백만 원을 가지고 시작한 회사인 만큼 초라하기 짝이 없었지만 그는 신념을 가지고 게임개발에 전념했다.


진지소프트의 사업 아이템은 바로 휴대전화 임베디드 게임. 요즘과 달리 당시의 휴대전화에는 게임이 없거나, 있다 해도 게임이라고 말하기 어려운 수준이었다. 고 상무와 이 이사는 휴대전화에 내장된 게임 기획에서 제작, 디자인까지 손수 한데다 휴대전화 제조사에 영업까지 했다. 그 결실로 3~4개월 만에 4억 원의 매출을 기록했고, 인력도 충원할 수 있었다. 휴대전화를 단순히 음성통화를 위한 전화기에서 벗어나 게임까지 즐길 수 있는 복합기계로 재탄생할 수 있게 한 것이다. 그러나 같은 게임만 즐기다 보면 지루해지는 법. 신지소프트는 임베디드 게임이 한계가 있음을 느끼고 휴대전화에서 다양한 게임을 직접 다운로드받을 수 있는 방법을 연구했다. 그러던 가운데 게임 다운로드 서버를 공급해오던 최충엽이 합류하면서 신지소프트는 원군을 얻게 됐다.


2000년 7월, 신지소프트는 휴대전화에서 게임을 다운로드 받는 데 처음으로 성공했다. 이후 SK텔레콤과 GVM 사용계약을 맺고 그 해 10월부터 시험서비스를 시작하면서 회사는 괄목할만한 성장세에 들어서기 시작했다. 신지소프트는 2000년 10월 세계 최초로 휴대전화에 무선인터넷 솔루션을 공급하면서 3년 만에 약 2조 원이라는 엄청난 규모의 국내 무선인터넷 시장이 형성될 수 있는 초석을 마련했다. 뿐만 아니라, 2003년에는 국내 무선 표준 플랫폼 위피(WIPI)를 기반으로 하는 위피 게임 솔루션 GNEX를 출시하여 모바일 솔루션 전문기업으로서의 입지를 다지고 있다.


최충엽은 혁신을 추구하는 것으로 정평이 나있다. 그는 신지소프트가 꾸준히 성장해 지금의 위치에 있을 수 있었던 이유는 정체하지 않고 지속적으로 혁신을 추구했기 때문이라고 말한다.


“독자적인 핵심 기술을 바탕으로 세계 최고의 제품을 만들어야 글로벌 경쟁에서 살아남을 수 있다.”


현재 국내에서 1천5백만 대의 단말기에 탑재돼 서비스되고 있는 GVM 솔루션은 36개월 만에 누적 컨텐츠 다운로드 수가 1억 건을 돌파했고, 현재 7백10여종 5만 개의 컨텐츠를 보유하고 있다. 2002년에는 IT강국인 이스라엘에 GVM을 수출, GSM망에서 최초로 무선인터넷을 상용화하는 데도 성공했다.


최근 신지는 사업영역을 확대해나가고자 킬러 애플리케이션 개발에 주력하고 있다. 다양한 디바이스와 플랫폼들이 지속적으로 개발, 출시되고 있는 시장 상황 속에서 어떤 디바이스나 플랫폼에도 탑재 가능한 임베디드 버추얼 머신을 만들어 내겠다는 전략이다. 이러한 전략에 따라 연구개발 투자를 한층 강화하고 기술력 향상에 매진함은 물론, 임베디드 버추얼 머신의 국내 및 해외시장 진출확대를 다각도로 모색하고 있다. 아울러 국내의 디바이스 제조사들과 긴밀한 파트너십을 유지하여 상생의 전략을 추구하는 한편, 이스라엘 오렌지사에 GVM 솔루션을 공급한 경험을 바탕으로 해외시장을 적극적으로 공략할 예정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