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안집 사람들

   
강인숙
ǻ
열림원
   
20000
2025�� 10��



 

■ 책 소개

“성안집은 여전히 우리 안에 남아 있다”
폐허 속에서도 매화가 피고 은행나무가 우뚝 서 있던 그곳
그리고 잊지 못할 얼굴들

강인숙은 오랫동안 국문학자이자 문학평론가로 활동하며, 한국 문학 속 여성 서사의 맥락을 밝혀왔다. 그런 그가 집필한 자전적 에세이 전집은 단순한 개인의 회고록이 아니라, 한 여성 지식인이 몸으로 겪어낸 시대와 사회의 초상을 담은 귀중한 기록이다. 『성안집 사람들』은 그 전집의 첫 권으로, 저자가 자신을 길러낸 토양인 성안집에서 출발해 해방과 전쟁, 산업화와 민주화에 이르기까지, 개인과 역사가 어떻게 얽혀 있는지를 탐색한다.

“우리는 모두 언젠가 집을 떠나야 한다. 그러나 집을 떠난다고 해서 집이 우리를 떠나는 것은 아니다. 집은 여전히 우리 안에 남아, 문득 눈을 감으면 그 시절의 빛과 냄새로 되살아난다.”

이 문장은 이 책이 지닌 메시지를 가장 잘 보여준다. 사라졌다고 믿었던 집은 현재와 미래 속에서도 여전히 살아 있으며, 우리의 삶을 지탱하는 힘으로 남아 있다. 저자는 작은 풍경에서조차 인생의 깊이를 포착한다. 마당의 감나무, 계절마다 달라지는 빛과 바람, 그리고 사람들의 얼굴에 스며든 희로애락을 통해, 집이 단순히 ‘장소’가 아니라 시간의 증언자임을 증명한다.

■ 저자 강인숙
문학평론가, 국문학자.
1933년 10월 15일(음력 윤 5월 16일)
사업가의 1남 5녀 중 3녀로 함경북도 갑산에서 태어나 이원군에서 살다가 1945년 11월에 월남했다. 경기여자 중·고등학교를 나와 서울대 문리대 국문과를 졸업하고 숙명여대에서 석·박사 학위를 취득했다. 1965년 『현대문학』을 통해 평론가로 데뷔했으며, 1958년 대학 동기 동창인 이어령과 결혼하여 2남 1녀를 두었다. 건국대 국문과 교수로 재직하며 평론가로 활동하다가 퇴임 후 영인문학관을 설립했다.

■ 차례
1. 나 놀던 옛 동산
성안집의 추억
무더위 속의 강복降福

2. 귀양다리의 후손들
귀양다리의 향학열
소년 가장의 아픔
자기 이름을 손수 지은 대학생
창씨개명 이야기

3. 아버지와의 만남
아버지와의 만남
게아의 딸들
어느 쾌락주의자의 박애주의
아버지의 뗏목
아버지의 집
산과 그림자
말년의 아버지

4. 삭풍과 싸우는 여인
어머니를 위한 비망기
삭풍朔風과 싸우는 여인
어머니와 기독교
어머니의 찬송가
차임벨과 묘지
어머니가 남긴 말들

5. 나의 오빠 오봉五峯선생
호랑나비를 잡던 소년
지카다비와 북행열차
어둠 속에 찍힌 판화-막내가 본 1945년의 북한
어느 카레이스키의 자아비판
상처 그리고 6ㆍ25
전주와의 만남

6. 언니의 혼일婚日
비상시의 이력서
언니의 혼일婚日
향수동
내 집에 가 죽을래

7. 잠자는 공주의 잠꼬대
잠자는 공주의 잠꼬대
가달거리기와 걷어 먹이기
이름값
작은언니와 사르다나 춤

8. 셋째 딸 이야기
딸 많은 집 셋째 딸
어느 고양이의 꿈
조세트 원피스와 무명 속옷

9. 어느 욥의 이야기
어느 욥의 이야기
병복病福
우리들의 병든 기쁨조

10. 남동생의 숙제장
갈대 마나님-죽은 동생의 숙제장

11. 막내의 ‘은하수’
막내의 ‘은하수

 




성안집 사람들


나 놀던 옛 동산
성안집의 추억
동쪽에 큰 산이 있다. 산새도 쉬어 넘는다는 마운령 산맥의 끝자락이다. 북쪽은 인공으로 쌓아 올린 높은 동산이다. 동산 뒤는 20미터가 넘는 가파른 낭떠러지. 방어용 요새 터여서 인공으로 만든 북벽이 부자연스럽게 높다. 마운령을 넘기 전 마지막 고을인 곡구에는 왕조 시대의 큰 역참 터가 있었다. 폐허가 된 지 오래인데도 1940년대까지 북쪽은 여전히 낭떠러지였고, 서남쪽에는 개천이 'ㄴ'자형으로 흐르고 있었다. 개천 둑이 방벽이었고, 개천은 천연의 해자였던 것이다. 

규모가 컸던 역참 건물들은 한일합방 후에 모두 헐려서 수만 평의 성안에는 건물이 하나밖에 남아 있지 않았다. 방 세 개짜리 작은 주택이다. 지붕이 절반만 기와로 이어져 있고, 고방도 마방도 없는 단출한 건물을 자연석으로 쌓은 돌각담이 둘러싸고 있었다. 그 작은 건물이 우리가 1942년까지 살던 성안집이다. 

남북쪽으로 보면, 절반이 동산이고 절반은 평지다. 평지는 일할 사람이 없어서 잔풀이 돋아있는 대로 목초지처럼 방치돼 있었고, 넓은 뒷동산에는 과수원이 있어서 풍경이 평화로웠다. 과수원 한복판에 1,200년 된 은행나무가 하나 서 있다. 신라 때부터 있어 온 나무다. 균형이 잘 잡힌 장엄한 거목이다. 늙어서 더 검어진 은행나무 등걸 아래에, 봄이면 백매화가 풍성하게 핀다. 

성안 한가운데를 가로지르는 하얀 길가에는 유록색 댑사리가 심겨 있었고, 5월이면 서쪽에 있던 오동나무 숲에 풍성한 보랏빛 꽃이 만발한다. 그래서 그 폐허에는 폐허다운 황량함이 없었다. 그곳은 내가 지상에서 살아본 가장 아름다운 고장이다. 동산에는 과일이 심겨 있고, 봄이면 복숭아꽃도 핀다. 호랑나비가 날아다니는 여름에는 진달래 교목잎에 벗어놓은 갑옷 같은 매미 껍질이 잔뜩 붙어 있다. 예전에는 텃밭 자리에 천 평짜리 연못이 있었다고 한다. 그곳도 지금은 개천둑이 울타리가 되는 빈 풀밭이다.

시간이 지나면서 개천 둑은 차츰 가라앉아 낮아졌고, 건물은 지대가 높은 데 있어서. 마루에 앉아 있으면, 개천 너머 남쪽 들판에 장난감 같은 기차가 다니는 철로가 보인다. 그리고 철로 너머에 남벽색 바다가 있다. 동쪽과 서쪽에 터널이 있고, 그사이에 둥그스름하게 모래사장이 펼쳐져 있는......풍성하고 아름다운, 청정 해역이다.

옛날 이곳에는 역이 있었다. 마운령이 워낙 험해서 이곳은 옥저 시대부터 국경 지대였기 때문이다. 그 험준한 산마루가 만주와 조선을 갈라놓았고, 신라와 고구려도 갈라놓았다. 이원군은 진흥왕이 순수비를 세운 신라의 마지막 접경지대다. 그 웅장한 산은 고려 때도 중국과의 경계선이었다. 김종서가 육진을 정벌하기까지 그곳은 계속 외국과의 경계선이었다. 지금도 함경북도와 남도를 갈라놓는 경계선이어서, 여기에는 오래전부터 말과 사람이 쉬어 갈 큼직한 성이 세워져 있었다. 그래서 사람들은 그 폐허를 "성안"이라 불렀고, 그 안에 사는 우리를 성안집 사람들이라 불렀다.

할아버지는 마을에서, 아버지는 서울에서 딴 살림을 차리고 있는 우리 집에는, 오빠마저 유학을 가서 여자만 가득하다. 윗집도 마찬가지다. 호랑이가 드나들던 시절인데, 그 넓은 성안에 노약자와 아녀자들만 살고 있었다. 홍수가 나면 개천 둑이 성안 쪽으로 터지는 것은 그 때문이었던 것 같다.

1942년에 엄청나게 큰 홍수가 나서 우리 집 쪽 개천 둑이 터진 일이 있다. 캄캄한 밤이었는데 강물이 노도처럼 밀려 들어왔다. 삽시간에 성안 땅이 몽땅 호수로 변한 것이다.

둑이 터질 기미가 보이면, 제일 먼저 자리를 옮기는 것은 은행나무 둥지에 사는 늙은 구렁이다. 터줏대감인 구렁이의 이동은 강력한 위험 경보다. 어머니는 그걸 보시더니 비가 오기 전에 중요한 물건을 모두 뒷집으로 옮겼다. 비가 오기 시작하자 사람들도 옮겨갔다. 제일 먼저 검은 지리멘 띠로 싸 업은 조카가 떠났다. 그다음은 할머니와 우리 형제 차례다. 하지만 어머니는 그곳을 떠나지 않았다. 어머니는 빈 장롱들이 둥둥 떠다니는 홍수의 현장을 그 밤 혼자 지켰다. 밀려들어 온 고목 등걸에서 인광이 피어 도깨비불들이 출렁이는 물살을 따라 미친 춤을 추는 칠흑의 밤에 마흔이 갓 넘은 어머니는 성안을 지키는 수호신처럼 그 재난의 현장에 혼자 서 있었다.

전날까지만 해도 우리는 낮에 새언니랑 유치원놀이를 했다. 수박색 새틴 치마에 하얀 노방 깨끼적삼을 입은 이쁜 언니가 어린 시누이들에게 노래와 춤을 가르쳤다. 탄산수 같은 매미 소리가 울려 퍼지는 그림 같은 동산에서 서늘한 기운이 흘러 내려오는 여름의 한나절을, 우리는 손을 잡고 윤무를 추었다. 

그러나 우리가 윤무를 추는 태평연월은 곧 끝이 났다. 그날 밤에 내린 비로 둑이 터져서 집이 못 쓰게 된 것이다. 할 수 없이 우리는 반딧불이 난무하던 아름다운 성안집을 떠나야 했다. 마치 그것이 신호인 것처럼 재앙이 꼬리를 물었다. 할머니가 돌아가셨고, 오빠는 학도병을 피해 만주로 떠났으며, 큰언니는 정신대에 쫓기게 되었고, 아버지는 토질이 도져서 피를 토하며 돌아오셨다.

그렇게 시작된 재앙은 일본 사람들이 떠나가도 끝이 나지 않았다. 로스케들이 밀려오고, 공산당이 권력을 잡자 숙청 바람이 불기 시작된다. 해방되고 석 달 만에 우리는 그곳을 영원히 떠났다. 우파인 아버지가 숙청 대상에 든 걸 알았기 때문이다. 겨우 손에 들 만큼의 집만 가지고 우리는 기차 꼭대기에 올라갔다. 죄지은 사람들처럼 밤중에 몰래 고향을 등진 것이다. 그것은 우리가 38따라지로 전락하는 비극의 시작이었다.

그곳을 떠난 지 어느새 반세기가 가까워져 온다. 그동안 전라도로, 경상도로 피난 다니던 성안집 후예들은 지금은 거의 다 미국에 가서 아직도 정착을 못 하고 유랑하고 있다. 메마른 지구의 위에서 길 잃은 개미 떼처럼 처절한 행군을 하는 그들을 생각한다. 귀양은 풀렸지만, 고향으로 가는 길은 아직도 뚫리지 못한 것이다.

지금 나는 뻐꾸기가 우는 북한산 기슭의 외딴집에서 잡초를 뜯으며, 살아 있어도 서로를 볼 수 없는 미국의 혈육들을 생각한다. "내 조국은 내가 자란 브루클린 14구다"라고 헨리 밀러(HenryMiller)가 말했다. 그러나 내게 고향은 어느 고장이 아니다. 어느 마을도 아니다. 내 고향과 내 조국은 어려서 살았던 퇴락한 성안집 울타리 안이며, 거기서 함께 살았던 혈족들이다. 집은 예전에 없어졌고, 사람도 자꾸 줄어든다. 그래서 내 고향의 판도도 날마다 달마다 작아지고 있다.
-1975년 『한국문학』

삭풍과 싸우는 여인
어머니를 위한 비망기
1969년 9월 24일: 마치 영원한 삶을 약속받기라도 한 것처럼 사람들은 '오늘'에 집착하면서 살아가고 있습니다. 자기만은 죽음의 대열에서 제외된 인간이라는 착각 속에서 눈앞의 현실에만 정력을 쏟아붓고 있는 겁니다. 때로는 사소한 감정의 움직임에 몰입하여 순간을 예찬하기도 하며, 때로는 별 볼 일 없는 이해관계에 얽매여 큰소리로 싸우기도 합니다. 그런 비본질적인 일에 휘말리면서 우리는 삶의 러시아워 속에서 허우적거리고 있는 겁니다.

그러다가 어느 날 예고도 없이 찾아드는 죽음의 회오리에 휘말립니다. 느닷없이 나타난 강도가 식칼을 옆구리에 들이대듯이, 죽음은 그렇게 예기치 않은 시간에 인간을 습격합니다. 죽음에는 정년이 없습니다. 죽음의 신은 남녀도 노소도 가리지 않습니다. 문득 죽음이 우리에게 다가서면 그만입니다. 인간에게 예약되어 있는 가장 확실한 자리는 무덤입니다. 오죽하면 남의 돌잔치에 가서 아이에게 해줄 수 있는 가장 확실한 예언이 '그 애는 틀림없이 죽을 것'이라는 말밖에 없다고 김성탄(중국 문인)이 그랬겠습니까? 사과가 씨앗을 지니고 태어나듯이 우리는 언제나 죽음을 안에 담고 있는 존재라는 릴케의 말도 맞습니다. 인간(man)은 반드시 죽는 존재(mortal)니까요. 중세의 수도사들처럼 우리도 만나면 "죽음을 기억하라(memento mori)"는 인사말을 하는 것이 온당할지도 모릅니다.

시계의 시간(clock time)은 불가역적인 시간입니다. 그것은 되돌아갈 줄을 모릅니다. 흐르는 물처럼 전진할 줄밖에 모르는 겁니다. 그 위에 올라탄 우리도 앞을 향해 나아갈 수밖에 없습니다. 빅토르 위고의 말대로 '오늘의 문제는 싸우는 것'입니다. 하지만'모든 날의 문제는 죽는 것'이지요. 그런데도 우리는 눈앞의 싸움에 정신을 빼앗겨 죽음을 생각하지 않습니다. 그리고 옆에서 쓰러진 사람들을 쉽게 잊어갑니다. 죽은 사람은 더 말할 필요도 없겠죠. 죽은 정은 하루에 천 리씩 멀어져간다고 하지 않습니까? 어떤 전제군주도 그 망각의 벽 앞에서는 무력합니다. 어떤 사랑도 그 벽을 초극하지는 못합니다. 그래서 누구나 한번 쓰러지면 문득 망각의 벽 앞에 서게 되는 것입니다.

우리 어머니는 그러나 아직 돌아가시지 않았습니다. 이따금 혼자서 하나님을 찾습니다. 때로는 일하는 아이를 꾸짖기도 하고, 때로는 "걱정 마. 내 해줄게." 하며 우리를 격려하기도 합니다. "배고파.", "목말라" 그러시기도 하고요, "아파! 아파!" 하며 낮을 찡그리기도 합니다. 미음도 드십니다. 다문 채로 마비된 이빨 사이로 조금씩 흘려 넣어드리면 됩니다. 우유나 과일즙 같은 것도 그렇게 넘기십니다. 대변도 보시고 소변도 보십니다. 그런데 사람을 못 알아봅니다. 몇 달을 내리 주무셔서 어린애의 것처럼 맑아진 눈으로 우리를 오래 응시하시는데, 이미 시각은 기능을 상실한 겁니다. 시각뿐 아닙니다. 말을 못 하십니다. 어머니 입에서 나오는 말들은, 발음은 분명하지만 의미를 지니지 못합니다. 의식의 밑바닥에 깔려 있던 상념의 파편들이 무작위로 소리가 되어 나타나는 것뿐이어서 졸가리가 없기 때문입니다.

잃은 것은 그것뿐입니다. 그런데 그게 전부인 것 같습니다. 쌍까풀 진 크고 아름다운 눈, 아직 절반도 세지 않은 검은 머리가 그대로인데도 어머니가 아주 없어진 것 같이 느껴집니다. 우리는 이제 무엇으로도 어머니를 기쁘게 해드릴 수 없기 때문입니다. 아무 반응도 없는 어머니의 육체를 우리는 어머니라고 생각할 수 없습니다. 피가 통하지 않는 하반신에 욕창이 무성합니다.

까맣고 모진 딱지가 앉고, 그 밑에서 살이 썩어들어가는 겁니다. 오늘도 조카며느리와 둘이 딱지 제거 작업을 시도해보았습니다. 하지만 핀셋으로 긁어내다 못해 간호사를 불렀습니다. 역청 같은 검은 막이 너무 질겨서 우리 힘으로는 어찌해볼 수가 없었습니다. 조카며느리의 말로는 엉덩이의 그 깊은 살이 모두 상해서 뼈가 들여다보이는 곳도 있다고 합니다. 그래도 어머니는 모르십니다. 혈관 벽이 물러서 주삿바늘이 들어가면 툭툭 터집니다. 그래서 자꾸 찔러대도 어머니는 아픔을 모릅니다. 뇌혈관 일부분이 막힌 것뿐이라는데...... 열정과 의욕에 가득 차 있던 박력있는 한 인간이 산 채로 송장이 되어가는 겁니다. 인간의 육체는 얼마나 무르고 약한 것입니까?

처음에 우리 형제는 만사를 제쳐놓고 어머니 곁에서 시간을 보냈습니다. 그러다가 하루에 한 번, 다음에는 이틀에 한 번······낮과 밤이 지날수록 자꾸 어머니에게서 멀어져갑니다. 혹은 구들을 고치기 위해, 혹은 아이들 운동회에 가기 위해, 혹은 시댁행사에 참여하기 위해 어머니에게서 멀어져가는 겁니다. 아직 생존해 계시는데 망각의 여정은 이미 시작된 겁니다. 오늘은 추석 전날입니다. 어머니가 쓰러진 지 45일째 되는 날이군요. 비누와 설탕, 과일 같은 선물이 들어와 마루에 쌓입니다. 늘 나누어쓰던 물건들 속에 앉아 어머니를 생각합니다. 가족들 눈치 보느라고 마음 놓고 울지도 못했는데, 자정이 지난 시간에 기어이 울음보가 터졌습니다. 휴지가 한 통 다 젖도록 울었습니다. 그러다가 문득 울기를 그쳤습니다. 가슴을 내리 쓸면서 눈물을 억지로 수습한 것은 내일 일과에 생각이 미쳤기 때문입니다.

아침 일찍 병원에 가야 합니다. 막내가 볼거리를 앓고 있습니다. 용태가 심상치 않습니다. 소변이 붉고 간도 나빠졌다는 겁니다. 되도록 일찍 가서 많은 사람 앞에 서야 합니다. 그들에게 퉁퉁 부은 얼굴을 들키고 싶지 않다는 생각이 났습니다. 그런 얄팍한 타산이 눈물을 멈추게 했습니다. 그러다가 더럭 겁이 났습니다. 내가 어느새 당신을 잊어가고 있는 것이 아닌가 하는 두려움 때문입니다. 그래서 이런 글을 쓰려고 합니다. 당신을 위한 비망의 기록들을요. 살고 죽는 일에 잊음과 기억함이 무슨 큰 의미가 있겠습니까. 당신이 아주 없어져버리는 마당인데······. 그런 것이 무슨 위안이 되겠습니까만 그래도 당신을 그렇게 쉽게 잊어서는 안 될 것 같습니다. 어머니! 당신은 내 존재의 뿌리요, 토양입니다. 서른이 넘는 이날까지 내가 숨을 쉬며 살아온 그 모든 자취마다 당신의 손길이 서려 있습니다. 한때는 탯줄로 이어져 한 몸이었던 나의 어머니! 당신은 내 살이요, 몸이 아닙니까? 당신을 잊고 싶지 않습니다.


나의 오빠 오봉(五峯)선생
호랑나비를 잡던 소년
우리는 세상에 태어나서 고작 7, 80년의 세월을 살다가 가는 동안에 수없이 많은 사람과 만나고, 또 그들과 헤어진다. 사람의 일생은 그 이합집산이 축적된 역사라고 할 수 있다. 하지만 평생을 두고 만남을 하나의 축복으로 받아들일 수 있는 복된 인연은 그다지 많지 않다. 내게 있어서 오빠와의 만남은 축복으로 받아들일 수 있는 복된 인연 중의 하나였다. 그건 신이 내게 준 특혜이기도 했다. 15년이나 연상인 오빠는 내가 한 인간으로 성장하는 데 필요한 정신적인 지주였다. 나는 그를 통하여 학교에서 가르치지 않는 한글을 깨우쳤고, 나는 그를 통하여 우리에게는 금지되었던 한국의 역사를 배울 행운을 얻었다. 그를 통하여 세계 문학에 눈을 떴고, 그를 통하여 자연과 인간을 사랑하는 법을 배웠다. 어렵고 가난한 사람들을 향한 연민, 모든 아름다운 것들에 대한 심미적 개안, 그리고 타협을 모르는 정의감······ 그 모든 것이 오빠가 나에게 남겨놓은 정신적 유산이다.

오빠는 내 스승이었고, 선배였으며, 정신적인 아버지였고, 스스로를 사랑할 힘을 북돋아주는 멘토였다. 그가 세상을 떠난 후 새 책이 나왔을 때, 나는 그 책을 제일 먼저 드려야 할 분이 오빠라는 생각 때문에 방 안에 주저앉아 한동안 아무 일도 할 수 없었다. 그에게는 책을 부칠 주소가 없다는 사실이 새삼스럽게 그의 부재를 너무나 절실하게 실감시켰던 것이다. 산다는 것은 날마다 조금씩 죽어가는 것, 날마다 조금씩 소중한 것을 잃어가는 것을 의미한다던 영화 「나자리노」의 주제가처럼, 사랑하는 사람과의 이별을 통해 우리는 정신적으로 날마다 조금씩 죽어가고 있는 건지도 모른다.

오빠의 존재를 처음 의식한 것이 언제였을까? 나는 그 정확한 시기를 생각해낼 수 없다. 하지만 내 기억의 첫 장에 남아 있는 오빠의 가장 오래된 모습은, 호랑나비를 채집하던 키가 큰 소년이다. 우리는 그때 옛 성터에 있는 외딴집에 살고 있었다. 동산에 꽃이 피어 흐드러진 여름날이었는데, 오빠는 희귀종 나비에 홀려 온몸을 이슬에 적시며 시간을 잊고 있었다. 열다섯 살이나 연상인 오빠는 우리 집에 다니러 온 경이로운 외계인 손님 같았다. 산새가 울고, 매미가 울고, 솔바람 소리와 시냇물 소리가 어우러진 그 태고의 동산에, 한여름의 햇빛이 축복처럼 쏟아져 내리고 있었다. 꽃뱀같이 현란한 무늬의 나비 날개가 햇빛을 받아 인광을 발하던 그 아침의 몽환적인 구도 속에서, 나비 뒤를 따르던 오빠는 너무나 멋이 있는 미소년이었다. 상처 하나 내지 않고 곱게 잡은 귀족적인 나비들이 박제가 되어 늘어서 있던 오빠의 방은 어린 나에게는 늘 신화의 나라였다.

거기서 오빠는 그림도 그렸다. 이마동 선생의 애제자였던 오빠는 수채화에 탁월한 재능을 보이는 화가 지망생이었다. 비너스와 아그리파의 데생이 붙어 있는 방 안에서 그는 즐겨 물감을 풀었다. 집 뒤에 있던 오봉산을 사랑하던 오빠는 그림에 언제나 '오봉생'이라고 서명했다. 그가 그리는 그림은 대체로 풍경화였지만, 이따금 풍속화도 있었던 것 같다. 하지만 그는 화가가 되는 일을 금지당했다. 맏아들인 데다가 종손이었기 때문이다. 그것은 오빠가 겪은 최초의 좌절이었다. 아버지가 약대에 원서를 내셨는데, 오빠는 그 시험을 거부해서, 재수하기로 하고 임시로 혜화전문학교 불교학과에 적을 두게 되었다. 학적이 없으면 당장 징집대상이 되기 때문이다. 

학교에서 불교를 배우다가 오빠는 사학에 대한 관심을 갖게 되었다. 아무도 가르쳐주지 않는 한국 역사였다. 국사를 독학하면서 해방 후에 대학에 들어가려 했는데, 아버지 사업이 망해버렸다. 오빠는 가족을 부양해야 해서 군산중학교에 가게 되었다.

호남과의 인연은 그렇게 시작되었다. 교편을 잡으면서 전북대 사학과에 적을 두셨다. 전공을 바꾼 후에도 오빠는 늘 그림 그리기를 좋아했다. 30대 중반까지도 해마다 달력을 그려 친지들에게 나누어주던 일이 생각나는데, 불행하게도 내게는 오빠의 그림이 한 장도 남아 있지 않다. 6 · 25와 1·4 후퇴 때문이다.

보성학교 시절의 오빠는 기타의 명수이기도 했다. 태곳적 같은 성안집의 정적을 뒤흔들며 오빠의 경쾌한 기타 소리가 울려 퍼지는 것은, 그것 자체가 하나의 축복이었다. 서울에서 공부하던 오빠는 방학 때밖에 집에 올 수 없었다. 그래서 내 기억 속의 오빠는 언제나 호랑나비를 몰고 왔고, 아니면 몇 자씩 쌓이는 백설과 함께 있었다. 여자들만 사는 한적한 외딴집에 오빠는 늘 기적을 몰고 왔다. 오빠가 오면, 뒷방에 호랑나비가 늘어서고, 죽었던 자연은 화선지 위에서 빛이 되어 소생하며, 집 안은 기타와 축음기에 휩싸여 생동한다. 먼 곳, 가까운 곳에서 친척들이 몰려오고, 부엌에서는 밤낮으로 잔칫상을 마련하는 도마 소리가 들려온다. 그러면 여섯 명의 동생들은 오빠를 둘러싸고 춤을 추며 노래를 부른다. 
상앗빛 단추가 잔뜩 달린 오빠의 세고비아 기타는 요술 상자였고, 우리가 부르는 노래는 모두 하나의 주문이었다. 그 주문 속에서 우리가 세월을 잊는 도취에 잠기던 시기는 우리 집안의 신화의 계절이었다. 

신화의 계절은 1842년의 대홍수와 함께 끝이났다. 그날도 오빠네 가족이 내려와 우리 집에는 축제가 벌어져 있었다. 햇덩이를 안아 내린 것 같은 오빠의 아들 건이는, 공처럼 이 손, 저 손을 옮겨 다니면서 캔캔 환성을 지르고, 남동생이 선사 받은 꽃술 달린 세발자전거에 온 동네 아이들이 따라붙어 일본 군가를 부르며 행군놀이를 벌였다. 반딧불이 난무하는 찬란한 밤하늘....... 신화의 종장답게 화려한 축제의 밤이었는데, 갑자기 불어닥친 폭풍우가 다음 날 외딴집을 물바다로 만들었다.

우리는 집을 잃었고, 더는 외딴집에 살 용기도 잃었다. 시간이 흘러서 아버지에 대한 감시도 흐슨해져서, 우리는 역전의 큰 거리에 새집을 지었다. 다시는 매미 소리와 반딧불의 난무를 볼 수 없게 되었고, 마루에 앉아 청남색 바다를 감상할 수도 없게 되었다. 자정이 지난 후의 신데렐라처럼, 마부는 생쥐로 변하고, 호화로운 황금마차는 호박으로 바뀌었다. 호랑나비와 솔바람 속에서 신선같이 살던 오빠의 삶에도 홍수가 밀어닥쳤다.
1978년 《전북사학》3집