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글과 오래 논다

   
강인숙 (지은이)
ǻ
열림원
   
18000
2024�� 12��



■ 책 소개


“살아 있는데 벌써 이별이 시작되고 있음을”
삶의 유한함에 대해 질문을 던진다

이 글은 친밀한 이야기를 바탕으로 하면서도, 인간관계와 자연에 대한 교감과 성찰을 다룬다. 저자에게 형제와 가족이 있는 캘리포니아는 고향과도 같은 곳이다. 그곳에서 그는 형제, 자녀를 잃고 가족과의 마지막 순간을 기록하면서, 삶의 유한함을 깨닫고 삶과 죽음의 경계에 대해 다시금 질문을 던진다. 즉 “죽음은 삶의 종착점이 아니라, 새로운 이해의 시작”이라는 것이다. 삶이 유한하므로 순간순간의 경험이 소중하며, 이를 통해 우리는 보다 나은 자신과 만날 수 있음을 캘리포니아에서의 일화를 통해 보여준다. 또한 저자는 캘리포니아에서 자연이 주는 치유의 힘을 깨닫고 평범한 일상 속에서 잊고 지냈던 삶의 소소한 기쁨과 아름다움을 발견한다.

■ 저자 강인숙
문학평론가, 국문학자.
1933년 10월 15일(음력 윤 5월 16일)

사업가의 1남 5녀 중 3녀로 함경북도 갑산에서 태어나 이원군에서 살다가 1945년 11월에 월남했다. 경기여자 중·고등학교를 나와 서울대 문리대 국문과를 졸업하고 숙명여대에서 석·박사 학위를 취득했다. 1965년 『현대문학』을 통해 평론가로 데뷔했으며, 1958년 대학 동기 동창인 이어령과 결혼하여 2남 1녀를 두었다. 건국대 국문과 교수로 재직하며 평론가로 활동하다가 퇴임 후 영인문학관을 설립했다.

■ 차례
1부 La Strada━ 길
관광버스의 앞자리
새벽안개가 감싼 오스티아의 옛길
아피아 가도의 우산 소나무
아그리젠토로 가는 꽃길
카타니아 평원의 밀밭길
아드리아 바다의 해안 도로
침엽수림과 라벤더 꽃밭-홋카이도
석양을 향해 달려라-모하비 사막 도로
이스탄불의 삼중 성벽길
아말피로 가는 벼랑길
못 가본 유적
인도의 나무들
시간 너머에 있는 나라
어느 고양이의 꿈
정오의 공원
문 밑으로 밀어 넣은 사랑의 메시지-도스토옙스키 기념관
아름다워라, 비석 없는 풀 무덤-톨스토이의 집
오스틴 하우스의 서기 어린 풀밭-제인 오스틴관
아시야 바닷가에서 만난 남자-다니자키 준이치로 기념관

2부 오오! 캘리포니아
골든 캘리포니아
ㆍ 휠체어에서 보는 세상
ㆍ 6월의 새너제이
ㆍ 일정 없는 여행의 재미
ㆍ 졸업식
ㆍ 쉬는 날에 하는 일
LA로 가는 길
ㆍ 6년 만의 가족 상봉
ㆍ 한 사람씩 만나기
ㆍ 걸을 때마다 내 생각 해줘
LA에서 오는 길

3부 유행기(遊行期)의 얼굴
코로나 바캉스
유행기의 책 읽기
낙타가 달린다
풀꽃 이야기
노인네 망령은 곰국으로 다스려라
노인성 고집
강태공의 아내
노인과 아이
어느 바보가 본 하늘
피부 밑에는
칼의 주술성
질병과 양보

4부 국문학 산고(散稿)
나는 왜 문학을 하게 되었을까
옛말과 사투리의 미학
ㆍ 옛말에서 묻어나는 정감
ㆍ 사투리의 묘미
박완서의 토착어
최인호 소묘-10주기에 생각나는 것
ㆍ 고래 사냥의 신바람
ㆍ 최인호의 새로움
ㆍ Anti-physics에서 Physics로
ㆍ 최인호의 글씨체
이상, 그가 살았던 1930년대
ㆍ 구인회와 학벌
ㆍ 30년대와 폐결핵
ㆍ 다방의 30년대적 의미망
ㆍ 한일 모더니즘에 나타난 모던걸의 차이
ㆍ 이상 안의 19세기와 20세기

 




나는 글과 오래 논다


La Strada━ 길

관광버스의 앞자리

나는 여행지에서 물건을 잘 사지 않는다. 꼭 마음에 드는 물건이 있어도 될 수 있으면 참는다. 맛있는 음식점을 찾아 헤매다니지도 않는다. 선물용 쇼핑도 자제한다. 기념품과 책은 많이 사고 싶지만, 사이즈가 크면 그것도 양보한다. 하지만 양보할 수 없는 것이 있다. 관광버스의 앞자리다. 그 자리만은 무슨 일이 있더라도 꼭 확보하고 싶다. 거기에서는 시야가 180도로 열리니까, 내가 보러 온 나라의 파노라믹한 모습을 잘 볼 수 있기 때문이다.


시계처럼 잠시도 쉬지 않고 움직이는 관광버스에 앉아서 보는 바깥 풍경은 내게 참 많은 것을 남겨준다. 낯선 문명에 대한 윤곽을 다듬어주기도 하고, 그곳의 지정학적 여건이 문명과 가지는 함수관계도 가늠하게 하며, 건축과 수목과 산세를 통하여 한 문명의 참모습을 발견하게도 만든다. 그렇게 문명의 외형에 몰입하게 만들면서도, 길에는 언제나 깊은 페이소스가 있다. 젤소미나(영화 「길」의 여주인공)의 남자 친구가 나팔로 불던 노래 같은 처절한 페이소스가 서려 있는 것이다. 언제 어디에서나 길은 늘 죽음을 보여주기 때문이다. 길은 무한해 보이지만 언제나 종착점이 있다. 인간이 살아가는 과정은 여로와 흡사하다. 유행가 가사처럼 인생은 나그네길'이다. 그래서 길 위에 서면 종말 의식에서 벗어나기 어렵다.


카메라에 사람을 담지 않고 그 나라의 풍경만 담아 가지고 오던 어떤 학자처럼, 새로운 문명의 다양한 모습을 나는 뇌 속에 모조리 각인시키고 싶어 한다. 자주 여행하는 것이 불가능하니까 관광버스의 앞자리에서 보는 풍경들은 모두 내게는 '두 번 다시 볼 수 없는 것'들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오랜 시간을 차를 타고 이동해도 나는 관광버스에서는 잠을 자거나 옆 사람과 수다를 떨고 싶지 않다. 넓은 창문으로 들어오는 새로운 풍경을 온몸으로 받아들이기 위해 혼신의 힘을 모으고 싶은 것이다. 내가 책에서 얻은 관념적인 지식들을 차는 이동하면서 일일이 시각으로 환산해주기 때문에, 놓치면 그만이다. 보는 일에 집중하기 위해 옆에 누가 오는 것도 반갑지 않다. 혼자 오롯이 앉아 풍경에 몰입하는 것이 내 여행의 최고의 사치다.


마지막에 한 시칠리아 여행은 길동무들이 다 아는 사람들이었고, 내가 설명을 해줄 부분도 있는데다가, 최고령자(85세)였으니 앞자리가 쉽게 내 차지가 됐다. 하지만 모르는 사람들과 갈 때에는 그 자리를 얻으려면 노력이 필요하다. 버스에 일찍 타는 수밖에 방법이 없기 때문에 휴식 시간이 줄어든다. 나는 10분이건 20분이건 개의치 않고 가능한 한 일찍 버스에 타서 어떻게든 앞자리를 차지하려고 애를 쓴다. 그래도 먼저 와 있는 사람이 있으면 도리가 없다. 앞자리를 원하는 건 나만이 아니기 때문이다.


앞자리를 차지하지 못하면 그날은 많이 불행하다. 나는 경치를 보러 여행하는 일은 잘 하지 않는다. 관심이 문명에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내가 좋아하는 여행지는 대체로 큰 문명의 발상지다. 거기에서 만날 새로운 문명에 대한 호기심 때문에 나는 여행지를 정하고 나면 몇 달 전부터 잠을 설친다. 그건 욕심이 적은 편인 내가 가지고 있는 가장 치열한 탐욕이다. 여행만 하고, 여행기를 쓰는 일만 하면서 살라고 해도 마다하지 않을 만큼 나는 새로운 문명을 만나는 것을 좋아한다. 그래서 가이드의 설명도 열심히 경청하고, 책도 닥치는 대로 구해서 읽는다.


위가 나쁘니까 평소보다 엄청 많이 걷게 되는 여행은 건강에도 좋아서, 여행은 여러 면에서 적성에 맞는다. 나는 역마살이 단단히 낀 여행광이지만, 가정주부이고 아이 셋 달린 대학의 전임 교수여서, 오랫동안 집을 떠나는 일이 어려웠다. 내가 해외여행을 하기 시작한 것은 아이들이 모두 떠나고 정년퇴임을 한 후부터였다. 너무 늦은 시간에 시작해서 배낭여행 같은 것은 할 수 없었다. 혼자 하는 여행도 어려웠다. 그래서 좋아하는 가이드가 모집하는 소규모 단체 여행에 동참했다. 하지만 21세기에 본격화된 내 해외여행은 2017년이 되면 끝이 난다. 나이도 나이지만 남편의 암이 전이되어 위중해졌기 때문이다. 여행이 불가능해지니까 스쳐 지나온 길들이 새삼스럽게 그립다. 그래서 길 이야기를 쓰기 시작했다. 그건 내가 방 안에서 하는 또 하나의 여행이다.

-2017년 8월


석양을 향해 달려라-모하비 사막 도로

1989년 7월에 언니네 가족과 모하비 사막을 종일 드라이브한 일이 있다. 그 지역은 사면이 모두 지평선까지 닿아 있는 끝을 모르는 평원이어서, 미국이 얼마나 넓은 나라인지 실감할 수 있었다. 대지가 끝없이 광활하니 가슴이 확 트이는 기분이었다. 넓은 게 그렇게 좋다는 것을 미처 몰랐던 것 같았다. 하지만 너무 넓으니 곧 싫증이 났다. 변화가 없기 때문이다. 전날 그곳에 내린 우리 부부는 시차를 극복하지 못해서 눕고 싶었다. 오랜만에 만난 두 집 손자들도 처음에는 반가워서 잘 놀았다. 그런데 그들도 곧 싫증을 냈다. 풍경이 너무 단조로웠던 것이다. 그 광활한 공간을 사막이 모두 차지하고 있어, 줄창 그 회색 지대를 달리기만 했으니 무리가 아니다. 차 속은 에어콘을 켜놓아도 점점 더워 져 오는데, 내려서 쉴 그늘 하나 없었다.


모하비 사막은 이쁘지 않은 사막이다. 하얀 모래톱이 수시로 모양을 바꾸며 요술을 부리는 환상적인 모래사막이 아니다. 모하비 사막은 움직이지 않는 단단한 회색 돌조각 같은 것이 바닥을 덮고 있는 살벌한 공간이다. 거기에 칠지도같이 모든 팔을 하늘을 향해 치켜들고 서 있는 괴기한 조슈아 나무들이 이따금 나타난다. 조슈아 나무는 나무라기보다는 암호문 같은 것을 새긴 거대하고 괴기한 설치 작품 같다. 무기물로 보일 정도로 메말라 있는 기괴한 나무와 회색 바닥이 유일한 볼거리다. 식물까지 목이 말라서 헉헉거리는 것 같은 텅 빈 회색 천지에, 똑바로 그어놓은 아스팔트 길이 지평선을 향해 뻗어 끝날 줄을 몰랐다.


그 위에서 캘리포니아의 작열하는 7월의 태양이 이글거리고 있었다. 시차 적응이 안 돼서 쉬겠다는 것을 형부가 억지로 데리고 와서, 우리 부부도 차츰 짜증이 나기 시작했다. 볼 것이 없으니 앞자리를 차지해도 소용이 없었다.


그런데 돌아올 때 본 낙조는 진실로 경이로웠다. 서쪽을 향해서 달리고 있어서 시시각각으로 내려앉는 지는 해가 길 앞쪽 하늘에 계속 떠 있었다. 주홍빛 노을이 하늘을 절반이나 덮고 있어 낙조가 황홀했다. 그런 하늘을 보면서 지평선까지 그어진 외길을, 지고 있는 해를 향해 달리고 있는 것이다. 해를 따라잡으려는 놀이 같아서 경건한 기분이 되었다. 가도 가도 해는 여전히 저만치 먼 곳에서 이글거리고 있어서, 끝없는 따라잡기 경주가 계속되었다. 그 길은 태양을 향해 나 있는 직선도로 같았고, 주변에는 우리밖에 없으니, 일대일로 해와 겨루는 게임을 하고 있는 것 같기도 했다. 해가 오래도록 앞에 같은 높이로 떠 있으니 시간이 정지된 기분이었다. 해는 쉬지 않고 서서히 기울어지고 있는데 우리가 다가가서 그렇게 보이는 것이었다. 호화로운 일몰이었다. 구름이 알맞게 퍼져 있어 서쪽 하늘이 주홍빛 꽃밭같았다. 그러다가 드디어 해가 지평선 너머로 가라앉는가 싶더니, 어느 순간에 거짓말처럼 꼴깍 그 너머로 사라지고, 조용히 땅거미가 시작되었다.


자던 아이들이 어느새 일어나 일제히 숨을 죽이고 낙조를 구경하고 있더니, 해가 사라진 순간에 모두 약속이나 한 듯이 큰 숨을 내쉬었다. 그 긴 시간을 한순간 한순간 머리에 새기면서, 해가 무한 속으로 사라지는 것을 음미하고 있던 우리 부부도 아이들처럼 큰 숨을 내쉬었다. 사막의 낙일에 감동을 받은 것은 형부만이 아니었던 것이다. 형부가 왜 어거지로 우리를 끌고 나왔는지 비로소 알 것 같았다.


홀어머니의 외아들로 자란 형부는 자유롭게 성장해서, 어린애처럼 하고 싶은 일을 하지 못하면 못 견디는 습성이 있으시다. 그날 형부가 하고 싶었던 일은 12인승 벤에 사랑하는 사람들을 가득 태워 가지고 가서 모하비 사막의 경이로운 일몰을 보여주는 것이었다. 그 양반은 좋은 걸 혼자 보지 못하는 비상한 가족애를 지니고 있었다. 하지만 언니네 식구들은 직선 도로 달리기 자체를 즐기는 형부의 여행 패턴을 좋아하지 않아서 그분과 하는 여행을 모두 내켜하지 않았다. 우리도 피곤해서 내키지 않았다.


내키지 않는 사람의 수가 압도적으로 많았다. 그런데도 형부는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각개격파를 해서, 결국 자기가 같이 가고 싶었던 사람들을 모두 끌어내서 그 장엄한 낙조를 보게 만든 것이다. 일곱 명이 사막으로 가서 두 끼를 먹고 마시면서 하는 여행을 혼자 준비하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다. 젊지도 않은데 12인승 벤을 종일 운전하는 것도 쉬운 일이 아니다. 그 모든 수고를 혼자 감내하면서, 자기가 아름답다고 생각한 그 무엇을, 사랑하는 사람들에게 꼭 보여주고 싶어 미치는 형부의 요란한 사랑법이 감동적이었다. 그런 형부 덕분에 우리는, 지는 해를 안으러 한 시간이나 사막을 달리는, 좀처럼 하기 어려운 여행을 할 수 있었다.


태양이 지평선을 넘어 없어진 후에도 직선 도로로 서쪽으로 달려가는 일정은 끝나지 않았다. 계속 달리면 해를 따라잡을 수 있을 것같이 달리고 있던 차 속에서, 결국 우리는 사막의 어둠에 갇히고 말았다. 나는 어둠이 정말로 장막처럼 내려와서 천지를 까맣게 빈틈없이 덮는 것을 보면서, 내일 해가 다시 뜰 것이라는 확신을 가지지 못했던 원시인들처럼 절박한 기분이 되었다. 그래서 그 길을 계속 과속으로 달려가면 어쩌면 절벽이 있을지도 모른다는 엉뚱한 생각이 들었다. 그러면 그랜드캐니언의 계곡을 향해 풀 스피드로 날아가던 「델마와 루이스」의 자동차처럼, 우리 차도 하늘을 날아서 절벽 밑 심연 속으로 곤두박질칠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스쳐갔다. 그래도 좋겠다는 기분이 되었다. 해지는 풍경이 하도 압도적이어서 다시 일상으로 돌아가는 길이 끊어진 것 같은 심정이 되어 있었기 때문이다.


『25시』의 작가 게오르규는 사막을 두 개의 무한에 갇힌 공간이라고 표현했다. 유목민들은 하늘과 사막이라는 두 개의 무한에 갇혀 살기 때문에, 또 하나의 무한인 신과 쉽게 가까워질 수 있다는 것이다. 모하비 사막의 일몰 시간에 홀려 있던 동안에는 나도 어쩌면 신을 만나고 있었는지도 모른다.

-1989년 11월



유행기(遊行期)의 얼굴

유행기의 책 읽기

계속해서 비상시에 자란 우리 세대는 책 읽는 것밖에 할 놀이가 없는 청소년기를 보냈다. 그래서 많은 사람들이 책 읽기로 문화적 갈증을 달랬다. 그러다 보니 그들의 독서는 거의 활자 중독에 가까워졌다. 책이 귀한 때여서 활자로 된 것은 아무거나 읽는 잡식성 독서법이 생긴 것이다. 읽을거리가 없으면 안내서 같은 거라도 주워 읽는 나를 보고 남편이 활자 중독이라고 놀린다. 하지만 자기도 별수 없는 동시대인이다. 피난을 가서 책이 하나도 없으니까 손금 보는 책을 끝까지 다 읽은 일이 있다고 한다. 책만 있으면 외로운 줄을 모르니, 비상시의 정신문화의 결핍이 긍정적인 효과를 나은 것이라 할 수도 있을 것 같다.


우리 집은 외딴집이어서 활자 중독증이 더 심했던 것 같다. 친구도 이웃도 없으니 온 식구가 책을 들고 살았던 모양이다. 87세에 돌아가신 아버지는 말년에 우리 집에서 『연개소문』, 『자고 가는 저 구름아』, 『도쿠가와 이에야스』 같은 대하소설들을 계속 빌려다 읽으시면서도 성이 안 차셔서, 아파트에 오는 순회 도서관 회원이 되셔서 늘 원하는 책을 읽으며 사셨다. 마지막 병이 나시던 날도 이도형의 『흑막』을 빌려다 읽으시다가, 중추신경에 마비가 와서 의자에서 주르르 미끄러져 내리셨다고 한다.


새해에 아흔다섯 살이 된 큰언니는, 노인 아파트 안에 한국 책이 있는 독서실이 있어서 혼자 살면서도 외롭다는 말을 하지 않는다. 어느 핸가는 몇 해 만에 온 딸네 집에서 『토지』 스무 권을 다 읽고 가느라고 우리 집에도 자주 오지 않았다. 하지만 로스앤젤레스에는 한국 책이 많지 않으니 차례가 오면 아무거나 가져다 읽을 수밖에 없어서, 책의 수준이 널을 뛴다.


석 달 전에 큰언니가 마지막으로 귀국했기에, 선심을 쓴다고 스무 권짜리 『도쿠가와 이에야스』 일본판을 빌려주려고 했더니, 옛날에 다 읽었다고 마다했다. 노쇠해서 수도꼭지 잠그기를 잊어 두 번이나 경고를 받은 상노인이면서도 독서 행위는 여전히 지속하는 언니를 보면, 활자 중독이라는 말이 실감이 난다. 그래서 언니는 이국의 노인 아파트에서 혼자 살아도 불쌍하지 않다. 독서 행위를 통하여 아직은 호모 사피엔스로 존재하고 있기 때문이다.


세 살 아래인 작은언니는 도서관에서 책을 빌려다 읽는 보다 적극적인 독서 생활을 하고 있다. 그쪽도 빌릴 수 있는 책이 많지 않아서 닥치는 대로 읽는 편이다. 두 권짜리 『고려사』를 다 읽고 나서, 그다음에는 여섯 권짜리 『람세스』를 빌려다 읽고, 그 다음에는 『어우동』을 읽는 식의 계통 없는 독서 행위다. 하지만 그것은 고맙게도 노년의 고독과 아픔을 잊게 해주니, 외로워하지 않아서 좋다.


계통 없이 책을 읽는 건 나도 마찬가지다. 강의를 할 때에는 할 수 없이 전공 서적 중심으로 책을 읽었지만, 정년 퇴임을 하니 닥치는 대로 읽을 자유가 생겼다. 정년이 좋은 것은 아무 책이나 닥치는 대로 읽어도 되는 그 자유 때문인지도 모른다. 닥치는 대로 원하는 책을 골라 읽으면서, 청탁이나 의무에 얽매이지 않고 쓰고 싶은 글만 쓰며 사니 눈앞이 환해지는 느낌이 든다.


문학관이 있으니까 수상 작품집이나 베스트셀러를 주문해서 읽는 일도 있기는 하지만, 문인들이 남편한테 보내는 단행본이 많아서 우리 집에는 읽을거리가 풍성하다. 그것들을 마음 내키는 대로 골라서 읽으니 신이 난다. 문학 작품 중에서는 소설이나 에세이를 주로 읽는다. 소설론이나 수필론을 강의하던 때에 생긴 관성이다. 어느 날은 김채원의 『초록빛 모자』를 읽고, 다음에는 가와바타 야스나리의 수필집을 읽으며, 그다음에는 이상문학상 수상 작품집을 읽는 식이다. 단편집과 수필집은 토막 나는 시간에도 읽을 수 있어서 좋다.


전공 외 분야에서는 더 닥치는 대로 읽는다. 요즘은 『세계사의 정리』라는 일본 책을 머리맡에 놓아두고 토막 난 시간에 띄엄띄엄 읽는다. 그러다가 월 듀런트의 『문명 이야기』로 넘어가고, 그 다음에는 『이슬람 문화사』를 읽는 식이다. 좋아하는 것은 소설과 역사책이어서, 지난달에는 소설책을 세 권이나 읽었고 역사책도 두어 권 읽었다. 요즈음은 『나의 문화유산 답사기』 일본편, 『하얼빈』, 『친밀한 이방인』 같은 책들이 머리맡에 놓여 있다. 책에 의존해 사니까 눈이 아주 중요하다. 그래서 환갑이 되기 전해에 뇌하수체 수술을 받았을 때, 열한 시간의 긴 마취에서 깨어나면서 제일 먼저 챙긴 것이 눈이었다. 물건이 보이니 살았다는 생각이 들었다. 책 읽는 것밖에는 소일법을 모르니 시력 소식이 제일 궁금했던 것이다.


책 크기는 가벼울수록 좋다. 요즈음은 무거우면 팔목이 저린다. 그래서 문고판이 제일 고맙다. 누워서 읽을 때는 가벼워서 좋고, 다니면서 읽을 때는 작아서 편리하다. 문고판 책이 가장 요긴한 시기는 병원 복도에서 기다릴 때다. 하지만 90대인 내가 책을 읽고 있으면 사람들이 가만 놓아두지 않는다. 노인이 책을 읽고 있으니 '눈 사정'이 궁금한 것이다. "그게 보여요?" 한 사람이 와서 묻는다. 조금 있다가 다른 사람이 같은 질문을 또 한다. 보이니 읽겠지 하고 가만두지 못할 만큼 한국 사람들은 남에게 관심이 많다.


물론 보이니 읽는다. 90이 되어도 독서가 가능한 비결은 백내장 수술을 할 때 한쪽 눈을 근시로 초점을 맞추어 놓은 데 있다. 늙어서도 책을 읽기 위해서였다. 나다니기를 좋아하지 않으니, 좁은 집 안에서는 약간 원시인 오른 눈의 도움을 받아가며 안경 없이 살 수 있다. 나갈 때만 안경을 끼면 되니까 불편이 별로 없는데, 이점은 아주 많다. 한눈으로라도 죽을 때까지 책을 읽을 수 있고, 약 설명서도 읽을 수 있다. 그런데 그 비법을 가르쳐주어도 아무도 내 말을 듣지 않는다. 그러면서 노인이 책을 읽고 있으면 별일이나 난 것처럼 요란을 떤다. 인간은 참 재미있는 동물이다.


90이 되니 읽고 나면 금방 눈이 아물거리는 것도 문제지만, 내용도 아물아물해지는 상태가 심화된다. 기억력이 나쁘지 않은 편이어서 지금도 80년 전에 배운 일본 군가는 4절까지 다 외울 수 있는데, 어제 읽은 책은 테두리만 희미하게 남아 있을 뿐 디테일이 번져서 아슴푸레하다. 작년에는 누가 다달이 모세의 5경을 한 권씩 보내줘서 생전 처음으로 그걸 완독한 일이 있는데, 지금은 그 내용이 모두 보카시가 되어 막연한 테두리만 남았다. 주일학교 때 계통 없이 배운 성서 공부만큼도 남는 것이 적다.


그래서 나는 사이즈가 다른 촉이 아래위로 붙어 있는 녹색 마크펜으로 줄을 그어가면서 읽는다. 형광등 밑에서 보면 녹색이 가장 눈에 잘 띄기 때문이다. 더 중요한 곳에는 굵은 줄을 치는 것도 가능해서 편리하다. 누워서 읽으면서 줄을 그으니 줄이 삐뚤어져서, 책은 표지를 종이로 쌌는데도 금방 헌책처럼 지저분해진다. 하지만 다 읽고 나서 밑줄 친 부분만 다시 훑어볼 수 있어서 좋다. 마크 펜에는 수명이 길지 않다는 장점이 있다. 몇 해 지나면 자취도 없이 사라져버리니, 죽은 후에 누가 빌려다 봐도 들킬 염려가 적다. 하지만 그래도 입력이 잘 안 되면 중요한 부분을 노트에 옮겨 적기도 한다. 그래도 역시 잊혀지지만, 글로 쓰려면 힘이 드니까 손으로 베껴 쓴 부분은 좀 더디 잊혀진다.


영어 단어 외우기도 쓰면서 하면 훨씬 잘 외워지던 생각이 난다. 그러니까 요즘 내가 하는 독서 행위는 무효화되는 일을 하는 일종의 무상의 행위가 되어버렸다. 머리에 남지도 않는 책을 계속 읽는 것은 정말로 중독자의 행태다. 그래서 고민이었는데, 어느 날 이쓰키 히로유키의 「유행기(遊行期)」라는 에세이를 읽고 좀 위로를 받았다. 그에 의하면 75세 이상은 전체 삶에서 보면 유행기에 속한다고 한다. 불교에서 하는 분류법이란다. 유행기는 노는 시기라는 뜻이니 유아기와 다르지 않다고 그는 말하고 있다. 그러니 아이들처럼 행동하면 된다는 것이다. 어린아이들은 종일 기저귀를 차고 기어다녀도 불평하지 하지 않으며, 공짜로 얻어먹으면서도 미안해하지도 않고, 무얼 몰라도 부끄러워하지 않으며, 들은 것을 잊어버려도 면구스러워하지 않는다.


그러니 노인도 같은 일을 못 할 이유가 없단다. 금방 읽은 책을 잊어버려도 불편해하거나 부끄러워할 필요가 없다니 위로가 된다. 그는 노인이 무얼 잊어버리는 것은 세상에서 주워온 것들을 제자리에 돌려주는 행위라는 말도 해주었다. 잊어버려도 놀랄 필요가 없다는 것이니 마음이 놓인다.


그런데도 잊어버리면서 자꾸 독서를 하는 행위는 문제가 있다 싶었는데, 월 듀런트의 책에서 재미있는 글을 보았다. 그리스 민주주의의 기반을 세운 솔론이 늘그막에 사포의 서정시를 작곡한 노래에 반했다. 그래서 그걸 가르쳐달라고 조카에게 자꾸 졸랐더니, 옆에 있던 친구가 "다 늙은 사람이 그건 배워 무얼 하냐"고 핀잔을 주었다. 솔론이 대답했다. "배우고 죽으려고 그런다, 왜?"


죽으면 무용지물이 될 노래를 굳이 배우는 행위는, 잊힐 줄 알면서 독서를 하는 행위와 흡사하다. 그래서 그 말이 내 귀에 쏘옥 들어왔다. 유용성을 배제하니 순수하게 알고 싶어 읽는 무상의 독서 행위에 의미가 생기는 같았다. 하지만 유용성을 배제한다고 해서 완전히 무용해지는 것은 아니다. 책 한 권이 모두 잊히는 것은 아니기 때문이다. 나는 그 말을 『문명 이야기』에서 건졌다. "오! 하나님! 내게 죽는 날까지 자신의 육체와 영혼을, 싫증 내지 않고 응시할 힘을 주소서" 하는 보들레르의 말(『시테르 섬으로의 여행』)과 같은 맥락을 지니고 있어 잊히지 않는 것이다.


매켄지가 일본과 우리나라의 근대화 과정을 보면서 말한 대목도 잊히지 않는 부분 중의 하나였다. 한국은 처음 나타난 외국 배를 불태우고 그 싸움에서 이겼다. 그래서 쇄국정책을 강화해서 결과적으로 근대화가 늦어져 식민지가 되는데, 일본은 처음 나타난 쿠로부네(서양 배)에 졌기 때문에 근대화가 빨라져서 동양 삼국의 맹주가 될 수 있었다는 이야기다. 그런 말은 처음 들은 것이어서 신선했다.


하성란의 「그 여름의 수사」에서는 "보고 싶다"는 10자 이내의 짧은 전보가 야기시킨 변동의 크기가 인상에 남았다. 아버지는 평생을 어머니와 다른 곳에서 사신다. 돈을 아끼기 위해 어머니는 딸에게 늘 10자 이내로 남편에게 전보를 치게 했다. 그런데 마지막에는 딸이 엄마의 사연을 10자 이내로 줄이는 것이 어렵자, "보고싶다"고 전보문의 내용을 멋대로 바꿔버렸다. 그랬더니 기적이 일어났다. 평생 집 밖에서 떠돌던 아버지가 짐을 싸들고 돌아왔기 때문이다.


김채원의 「얼음집 」에서도 건진 것이 있다. 우물이 넘쳐서 마당 전체가 빙판이 된 집에 사는 소녀가, 문득 그 얼음 속에 이쁜 단풍잎 같은 것들이 갇혀 있는 것을 발견하는 장면이다. 하지만 더 감동적인 것이 이 소설에 있다. 그 차가운 얼음 저 밑에서는 물이 여전히 흐르고 있다는 대목이다. 책들은 이렇게 감명을 깊게 하는 대목을 하나씩은 가지고 있다. 안 남는 것이 아니라 적게 남는 것이니 소식하는 노인에게는 알맞은 독서법인지도 모른다.


요즈음은 그 적은 소득을 얻는 재미로 책을 읽는다. 96세인 김남조 선생님이 적어도 하루에 한 가지는 배운다는 말씀을 하셨다. 그거면 족하다. 많아서는 또 무얼 하겠는가? 어차피 '배우고 죽기'식 독서인데. 그렇게 잊어가면서도 아직 읽고 싶은 책이 많으니, 그것도 축복으로 받아들여야 할 것 같다.

-2021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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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 정보는 도서의 일부 내용으로만 구성되어 있으며, 보다 많은 정보와 지식은 반드시 책을 참조하셔야 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