쓰다 보니, 쓸 만해졌습니다

   
위한솔 (지은이)
ǻ
필름(Feelm)
   
18000
2025�� 03��



■ 책 소개


기록이란 그저 ‘남기는 것’을 넘어
‘자신을 발견하는 힘’

《쓰다 보니, 쓸 만해졌습니다》는 브랜드 마케터인 위한솔 저자의 첫 책으로, 기록이 어떻게 삶을 바꾸는지를 따뜻하고 진솔한 문장들로 전한다. 저자는 스스로를 “쓸모없는 사람”이라 여겼던 시절부터, 꾸준히 쓰고 기록하며 자신만의 목소리를 찾아온 과정을 솔직하게 풀어낸다. 일상 속 사소한 경험과 감정을 놓치지 않고 정성스럽게 붙잡아두는 이 책은, 평범함 안에도 고유한 무늬가 있다는 사실을 일깨워준다. 더불어 기록은 그저 ‘남기는 것’을 넘어 ‘자신을 발견하는 힘’이라는 것을 다시금 깨닫게 한다. 무엇보다 “기록은 거창할 필요가 없다”는 메시지가 인상 깊다. 

SNS 속 찬란한 성공 대신, 작지만 꾸준한 기록으로 쌓은 성장이 주는 감동이 있다. ‘나다움’, ‘쓸모’, ‘이름력’ 같은 키워드는 독자로 하여금 자신의 삶을 다시 들여다보게 만든다. 완벽하지 않아도 괜찮다는 위로, 그리고 지금 이 자리에서 천천히 나아가도 된다는 격려. 이 책은 특별하지 않은 우리 모두를 위한 따뜻한 응원의 글이다.

■ 저자 위한솔
세상의 많은 일에 호기심을 품고, 브랜딩이라는 언어로 세상을 해석하는 브랜드 마케터.
제일기획, 카카오페이, 배달의민족을 거쳐 지금도 IT업계에서 브랜드의 결을 다듬으며, 좋은 브랜딩이란 무엇인지 고민합니다.
키보드보다는 만년필을 사랑하는 캘리그라퍼이자, 메모가 이야기가 된다고 믿는 기록가.
스마트폰 앨범에는 수많은 캡처가 쌓이고, 세상을 관찰하며 수집한 문장과 정보를 공유합니다.
새로운 경험으로 바쁜 일상을 사는 것 같아 보이지만, 사실은 사랑하는 아내, 고양이 세 마리와 조용히 집에 있는 시간을 가장 좋아하는 내향인.
‘위한솔이 보는 모든 것’이라는 뜻의 인스타그램 ‘위씨리스트(wi_see_list)’를 운영 중입니다.

인스타그램 @wi_see_list

■ 차례
추천의 글
프롤로그

폴더 1. “나다움을 발견하는 시간”
신문과 신문지의 차이
이름력 프로젝트
어떻게 그렇게 책을 많이 읽냐면요
우리에게는 여백이 필요하다
취향은 그저 나의 선택
오늘 뭐 했지?
내일의 나와 친하게 지내자
이름의 의미
19살의 나에게 딱 한 마디를 할 수 있다면
나다운 게 뭔데?

폴더 2. “담담하게 그리고 단단하게”
절벽에서 당겨주는 마음
그저 한마디 칭찬의 힘
미래를 과소평가하는 사람들
특별 강박에서 벗어나기
오스트랄로피테쿠스 같은 순간
누군가에겐 소중했을 내일을 감사하며
비참해지거나 교만해지거나
그렇겐 살고 싶지 않아
손절의 기준

폴더 3. “결국 사라지겠지만, 결코 사라지지 않을 순간들”
그만둘 때 그만두는 것
나이는 숫자에 불과하다
왜 사세요?
날아오르는 껄무새
묵묵한 효율성
운칠기삼
바디프로필을 통해 배운 두 가지 교훈
유지력
넓고 깊은 제너럴리스트

폴더 4. “나만의 가치를 만드는 사소한 차이”
편협한 세상에서 벗어나 보자
관점과 편견의 차이
그때는 맞고 지금은 틀리다
누구나 나아질 수 있다
선택하기 전에는 모르는 법이지
중요한 건 왜 하는지 생각해보는 것
가장 개인적인 것이 가장 창의적인 것
내 삶의 로그라인

 




쓰다 보니 쓸 만해졌습니다

“나다움을 발견하는 시간”

우리에게는 여백이 필요하다

여백이라는 것은 단순한 공간만을 의미하는 것은 아니다. 마치 우리의 마음을 위한 중요한 '쉼터'와도 같다. 그 쉼터가 있어야만 우리는 자기 자신을 되돌아보고, 재정비할 수 있다. 마치 집 앞에 작은 마당이 있으면 그곳에서 햇빛을 받으며 쉴 수 있는 것처럼, 마음에도 그런 공간이 필요하다. 만약 삶에 여백이 없다면, 우리는 끊임없이 스트레스 속에서 살아가게 될 테고,그안에서 숨 쉴 틈을 찾지 못한 채 결국 고갈될 수밖에 없다. 빈틈 하나 없이 쉽게 나의 공간을 넘어오는 사람들이 많아지도록 그냥 둔다면, 세상 속에서 '나'의 마음을 잘 지키기란 너무나도 어려운 일이다.


그래서 요즘은 약속들 사이에 일부러 30분 정도의 공백을 둔다. 캘린더가 빡빡한 일정 사이로 잠시나마 나를 돌아보고 주변을 느낄 여유를 갖고 싶어서다. 캘린더가 비어있다고 무조건 약속을 잡지도 않는다. 관계에서도 마찬가지다. 누군가의 부정적인 감정, 혹은 비판적인 사고가 나에게 흘러들어오지 않도록 거리를 두는 습관도 들이기 시작했다.


글자와 글자 사이에 '띄어쓰기'가 있어야 문장이 잘 읽히듯, 일정과 일정 사이에도 약간의 틈이 있어야 하루하루가 더욱 선명해지는 기분이다. 마찬가지로 사람과 사람 사이에도 적당한 거리가 있어야 편안하고, 시간과 시간 사이에도 작은 휴식이 필요하다. 그 얼마간의 여백이 있을 때, 우리는 비로소 온전한 나 자신으로 살아갈 수 있다. 그리고 그것이 진짜 '나'로 존재하기 위한 가장 기본적인 조건이 아닐까.


오늘도 여백을 한번 만들어보자. 조금 더 느리게 걷고, 좋지 않은 이야기는 끊어 내려 해보고,내 공간에서는 나 자신과 대화하는 시간을 가져보는 식으로.


오늘 뭐 했지?

"뭐 했다고 벌써 연말이야?!!"


한 해가 끝날 때쯤 습관처럼 내뱉는 말이다. 해변 모래 위에 손가락으로 꾹꾹 눌러쓴 편지가 파도에 쓸려 금세 지워지듯, 우리는 시간을 쉽게 흘려보내곤 한다. 특히 나처럼 MBTI가 'P 유형'의 극단에 가까운 사람들은 계획을 세우거나 지난 시간을 돌아보는 일이 유난히 더 어렵다.


그러다 보니 매해 연말이 되면, 내가 1년 동안 무엇을 했는지 돌아보는 게 쉽지가 않았다. 특히 하루에 18시간씩 회사에만 머물렀던 시절의 기억은 지금 돌아보면 거의 남는 게 없다. 클라이언트 오피스와 회사 사무실을 오가고, 한남대교를 질주하는 택시 창밖 야경을 바라보았던 것, 밤샘 작업과 경쟁 PT에서 패배했을 때의 아쉬움, 당했던 갑질 같은 감정들이 선명하지 않고 흐릿한 잔상으로만 맴돌 뿐이다. 그저 남은 것은 '아, 그때 힘들었지'하며, 그 시절 친구들과 맥주 한잔에 추억팔이를 할 수 있을 정도랄까.


30대 중반을 넘어서면서 문득 두려워졌다. 이렇게 하루하루가 무의미하게 흘러가는 걸 너무 가볍게 여기고 있던 건 아닐까? 20대와 30대도 순식간에 지나갔는데, 40대와 50대는 얼마나 더 빨리 지나갈까? 30대는 시속 30km, 40대는 시속 40km로 달린다는 우스갯소리가 이제는 실감 나기 시작했다.


일 때문에 뇌과학과 행동경제학을 공부하다가 이와 관련한 흥미로운 사실을 알게 됐다. 우리가 지난 시간을 선명하게 떠올리지 못하는 이유는 바로 뇌의 문제 때문이다. 우리의 뇌가 "이건 굳이 기억할 필요 없어"라고 판단하기 때문이다. 신체 크기의 2%에 불과한 뇌가 전체 에너지의 20%나 소모하니, 최대한 에너지를 아끼기 위해 '반복되는 정보'는 애써 저장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인간에게 '망각의 동물'이라는 별명이 괜히 생긴 게 아니었다.


이 사실을 알고 나서 "어떻게 하면 내 시간을 선명하게 붙잡을 수 있을까?"에 대한 실마리를 얻었다. 이것을 활용해 나는 세 가지 습관을 실천하고 있다.


첫째, 매일 사소한 새로움을 만든다. '어제와 같은 오늘'은 뇌가 기억하지 않는다는 점에 주목했다. 처음에는 이 '새로움'이라는 단어가 부담스러울 수 있다. 마치 매일 위대한 도전을 해야 할 것 같은 압박감이 들기 때문이다. 하지만 우리가 해야 하는 새로움은 거창한 게 아니다. 그 시작으로 출근길에 가보지 않은 길로 걸어가 본다. 대로변으로만 걷기 시작했다면 굳이 빌딩 숲 뒷길로 걸어가 보는 식이다. 또 점심시간에는 늘 가던 식당 대신 한 블록 건너의 작은 가게를 찾는다. 퇴근길에는 평소와 다른 장르의 음악을 듣는다. 4세대 아이돌의 신나는 음악만 듣다가 태어나서 처음 들어보는 가수의 노래를 들으면 발걸음의 리듬이 달라진다. 그렇게 하나둘 쌓인 작은 새로움이 하루를 특별하게 만든다. 장기적으로는 새로운 취미도 시도해보기로 했다. 완벽하게 하려 들지 않는 것이 가장 중요한 조건이다. 그보다 더 중요한 건 처음 해보는 것이다. 그 서투름 자체가 하나의 새로운 경험이 되었으니까.


둘째, 일상을 기록한다. 과거에는 "대단한 일이나 성취만 기록할 가치가 있지 않을까?"라고 생각한 적도 있다. 하지만 평범한 일상도 기록하는 것 자체가 굉장히 중요하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기록학자 김익한 교수님은 '흘러간 과거의 시간을 현재에 착 달라붙도록 하기 위해서는' 사소한 일상도 기록하는 것이 중요하다고 강조했다. 평범한 일상을 기록하면 보통은 그냥 소모되어 날아가 버리는 시간을 현재에 고이 붙잡아 둘 수 있게 된다.


방식은 어렵지 않다. 2시간마다 한 줄씩, 지난 2시간을 메모한다. "오전 10시, 회의 중 동료의 아이디어에 감탄", "오후 1시, 식당 메뉴판의 친절함이 매우 인상적" 같은 식이다. 때로는 감정을, 때로는 순간의 날씨를, 때로는 스쳐 지나간 대화 한마디를 적는다. 더 중요한 것은 하루가 끝나기 전, 그날의 기록을 통해 짧게나마 하루를 돌아보는 시간을 갖는 것이다. 이 과정이야말로 과거를 현재 에 최대한 밀착시키는 작업이다. 놀랍게도 이 작은 습관이 하루를 더 선명하게 만든다. 기록하는 순간마다 그 시간을 더 의식하게 되고, 결과적으로 더 깊이 있게 현재를 경험하게 만든다.


셋째, 하루에 한번은 내가 주도하는 행동을 한다. 이것은 단순히 '새로운 경험'을 시도하는 것과는 조금 다르다. 회사나 타인이 정해둔 일정을 따라가는 '해야만 하는 시간'이 아닌, 오직 내 의도대로 움직이는 시간을 만들어내는 것이다. 책 《메이크 타임》에서는 이런 시간을 '하이라이트'라고 표현했다.


하이라이트라는 것은 우선으로 처리하고 일정표에서 가장 최우선으로 둘 것을 설정하는 것이다. 매우 중요한 일일 수도 있고, 오늘 하루 정원가꾸기, 아이와 놀아주기와 같은 일상적인 일일 수도 있지만 무엇이든 중요하지 않다.


내가 오늘 반드시 내 자신의 삶을 가치있게 만들겠다라고 생각하는 일을 하나를 설정해서 실행하는 것이 중요하다.

-제이크 냅, 존 제라츠키, 《메이크 타임》



“담담하게 그리고 단단하게”

비참해지거나 교만해지거나

홍콩 디즈니랜드의 토이스토리 랜드에 들어가 잠시 쉬던 중 SNS에 접속했다. 그때 마침 리조트에서 수영하고 있는 친구의 사진을 마주쳤다. 순간 나도 모르게 '와, 진짜 부럽다'라는 생각을 했다. 아차 싶었다. 나도 남들이 부러워할 좋은 여행지에 앉아 있으면서 또 다른 누군가를 부러워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홍콩 한가운데서 여행하는 중에 SNS를 보면서 다른 사람을 부러워하는 걸 보니 확실히 비교는 무섭다.


비교에서 나오는 부러움은 블랙홀처럼, 지긋지긋하게도 정말 끝이 없다. 오랜 시간 나는 스스로를 시기나 질투가 없는 편이라고 자부하는 편이었다. 하지만 최근 유독 글을 쓴다는 핑계로 SNS를 많이 보게 되어서 그런지 가슴속부터 스멀스멀 피어오르는 타인과 나를 비교하는 마음은 피할 수가 없었다.


누군가는 나에게 "나름 SNS 팔로워도 많고, 좋은 경력도 쌓고 있으니 부러울 게 없겠다"고 말하지만, 실제로는 그렇지 않다. 원하는 분야에서 일정 수준의 성취를 이뤄도, 늘 그보다 더 높고 멋진 곳을 향해 달려가는 누군가가 있기 마련이니까. 더 많은 팔로워를 가진 사람, 더 많은 책을 파는 사람, 더 뛰어난 글을 쓰는 사람, 더 많은 연봉을 받는 사람, 더 단단한 커뮤니티를 형성해 수입을 올리는 사람, 나보다 훨씬 어린 나이에도 슈퍼카를 끌고 다니는 사람들이 끊임없이 눈에 들어온다. 그러면 마 음 한구석에서 '아, 나도 저렇게 됐으면 좋겠다'는 부러운 마음이 생긴다. 그리고 그 생각은 나를 가만히 두지 않는다. '어쩌면 좀 더 열심히 달렸다면, 나도 저 정도 위치에 오를 수 있었을 텐데'라거나 '나는 이만큼 노력했는데 왜 아직 부자가 되지 못했지?'와 같은 자책과 비교의 늪으로 이어지기 쉽다. 괜히 비교를 '비참해지거나 교만해지거나'의 약자라고 하겠는가. 나를 단단하게 만들지 못하도록 방해하는 최악의 빌런을 꼽으라고 한다면, 나는 단연코 '비교'를 꼽을 것이다.


어쩌면 우리는 본능적으로 비교를 통해 자신을 확인하려고 하는지도 모른다. 어린 시절부터 학교에서 받았던 성적표가 그러했고, 사회에 나와서도 끊임없이 이어지는 경력이나 수입에 대한 평가가 그렇다. 특히, 집단주의가 강한 대한민국 사회에서는 '비교'를 안 할 수가 없다. 비교를 통한 인정, 비교를 통한 자기 효능감은 짜릿할 수 도 있지만, 그 반대급부로 '나는 왜 이렇게 부족하지?'라는 열등감을 남긴다. 결국 비교의 대상은 한없이 확장될 뿐, 어느 지점에서 "이제 됐다!"라고 딱 선을 긋는 것은 거의 불가능하다. 이런 비교로부터 자유로워지지 못하면, 결국 자신을 제대로 돌보지 못하게 된다. 내가 어떤 점에서 성장했는지, 현재 내 속도는 어떤지 돌아볼 여유 없이, 한순간에 타인의 화려해 보이는 성과에 압도당하기 때문이다.


물론 비교도 긍정적인 측면이 있다. 성과를 내기 위해서나 나를 조금 더 단련하기 위한 기준을 준다는 측면에서는 스스로 동기를 부여하는 것보다는 '경쟁자'가 생기는 것이 효과적이기 때문이다. 경쟁자들과 건강한 비교를 통해 나를 성장시키고 기준점으로 삼는 것은, 비교의 순기능이라고 생각한다.


정말로 백해무익한 비교는 따로 있다. 나에게 오로지 해악만 주는 비교는 크게 두 가지로 나누어 볼 수 있다.


첫 번째는 다시는 돌아오지 않을 과거의 '나'와 비교하는 것이다. 전에 거둔 '과한 성과'를 기준 삼아 "옛날엔 이랬는데, 왜 지금은 이 수준밖에 안 되지?" 하고 자책하는 경우다. 인간은 놀랍도록 과거를 미화하거나, 혹은 과거 성취에 매여 자신을 채찍질할 때가 많다.


하지만 몸이든 마음이든 한 시절의 컨디션과 똑같이 유지되는 일은 거의 없다. 게다가 그 시절의 '나'는 지금과 조건도 다르고, 열정도 달랐을 것이다. 이 사실을 잊은 채 과거의 전성기에 자신을 계속 견주면, '지금의 나'를 부정하게 되고 성장 가능성을 가로막는다. 다시는 오지 않을 나와 비교하는 것 중 가장 안 좋은 사례는 '원래로 돌아가겠다'는 마음가짐이다. '원래 나는 이렇지 않았는데'라며 자신이 정한 '원래의 나'와 비교하며 지금의 나를 옭아매는 경우다. 나의 경우에는 다이어트를 성공한 이후에 그 몸무게를 마치 내 인생에서 당연히 지켰어야 할 몸무게처럼 나를 채찍질하곤 했다. 왜 그 몸무게를 유지하지 못했냐며 매일 자책하는 삶을 살았다. 하지만 생각을 고쳐먹었다.


'원래의 나'는 없다는 사실을. 지금의 내가 '원래의 나'이다. 이미 흘러서 사라진 '없는 기준'에 나를 맞출 수 없다. '제일 잘나가던 시절의 나', '원래의 나'는 없는 존재이다. 그냥 지금의 내 상태에서 시작하면 된다.


두 번째는 '나'와 전혀 상관없는 주변 사람과 비교하는 것이다. 우리는 전혀 누군지도 모르는 사람과의 비교로 나를 갉아 먹는 일이 너무나도 많다. 아무래도 이것은 SNS의 영향이 지배적일 것이다. 공교롭게도 소셜미디어는 다른 사람들의 '하이라이트'만 편집해서 보여주기에, 대개 가장 빛나는 순간만을 보게 된다. 거기엔 실패나 번뇌, 깊은 고민은 거의 노출되지 않는다. 그래서 SNS를 보면서 "다들 이렇게 잘 사는데, 나만 뒤처져 있나?"라는 불안이 커질 수밖에 없는 것이다.


하지만 사실 우리가 보는 건 '조명'이 가장 잘 비치는 그들의 무대일 뿐이고, 백스테이지는 전혀 볼 수가 없다. 그럼에도 우리는 쉽게 그 무대를 직접 목격한 양 착각하고, 그들을 치켜세우며 스스로를 낮추는 쪽으로 저울을 기울인다. 게다가 우리가 전혀 모르는 사람들의 전시된 삶이라 우리는 그들의 진실을 모르기 때문에 더욱 비참해지기 쉽다. 이런 형태의 비교가 진짜 무서운 이유는 '남이 가지고 있는 것'이라는 이유로 나는 관심도 없는데 그것을 '갈망하게 되는' 효과가 생긴다는 것이다.


책 《너 자신의 이유로 살라》에 따르면, 사람은 "알지 못하고 보지 않은 것을 욕망할 수 없다"고 한다. 쉽게 말해 내가 모르는 걸 갖고 싶어 할 수 없다는 뜻이다. 내가 좋아서가 아니라 '남들이 좋다고 해서', '누군가가 화려한 영상 속에서 쓰는 게 좋아 보여서' 그것을 갖고 싶고, 하고 싶게 만든다는 것이다. 애초에 가질 생각도 없었는데, 나에게 없다는 이유로 비참하다고 생각하는 것이 과연 옳은 방향일까? 조금만 생각해도 답은 나온다.


이렇게 '과거에 다신 오지 않을 나'와 'SNS 속 누군가' 모두와 비교하게 되면, 현재의 나는 어디에도 없어진다는 것이 문제다. 흘러간 시간과도 경쟁하고, 직접 얘기 한번 나눠본 적 없는 사람과도 경쟁하느라 정작 지금의 나는 소진되고 만다. 결국 끊임없이 '뭔가 부족하다'는 열등감을 달고 살게 된다.


그러니까 '비교하지 않기'를 연습해야 한다. 물론 말처럼 쉽지는 않다. 현대사회가 주입하는 경쟁 논리와 SNS가 주는 눈부신 '편집된' 일상들은 매일같이 우리를 유혹한다. 그럼에도 선택은 우리에게 달려 있다. 내가 하루를 마무리할 때, "왜 난 저 사람만 못할까?"라고 비교하는 대신, "오늘은 어제보다 조금은 나아졌을까?"라거나, "지금 나에게 가장 필요한 한 걸음은 뭘까?" 하고 스스로에게 질문해 볼 수 있다.


그래서 요즘 나는 이렇게 한다. 비교 대신 관찰이나 영감이라는 단어로 바꿔 보는 것이다. 저 사람과 비교하는 게 아니라 저 사람이 나에게 새로운 영감을 준다고 생각한다. 누군가 부럽다면, 그 사람에게서 무엇을 배울 수 있는지 생각해본다. 단순히 "저 사람보다 못하다"가 아니라, "저 사람은 이런 식으로 역량을 키웠구나, 나도 이 점을 참고해서 변화를 시도해볼까?" 하고 접근하면 비교에서 오는 열등감이 훨씬 줄어든다. 또 과거의 나를 '원상복귀해야 할 기준점'이 아니라 '오늘의 나를 위한 과거의

좋은 경험'으로 받아들이면 예전 성과에 갇히지 않고 현재를 더 유연하게 볼 수 있다. 결국 '비교의 늪'에 빠질 것인가, '관찰과 성장'의 동력으로 삼을 것인가는, 내가 어떻게 받아들이느냐에 달려있는 것 같다.


오늘의 내 한 걸음은 어제의 나보다 조금 더 나은가? 지금 집중해야 할 건 내 삶인가, 남의 삶인가? 이 두 가지만 생각해도, 비교로 인한 소모를 한결 덜 수 있다. 남의 하이라이트만 보고 스스로를 깎아내리는 악순환을 멈추고, 나를 지키기 위한 노력을 시작해보자.



“나만의 가치를 만드는 사소한 차이”

관점과 편견의 차이

친구들과의 모임에서 한 친구가 "동료와 함께 일하는 것은 너무 즐거워"라는 말을 꺼냈다. 그 말을 듣자 여러 친구에게서 서로 다른 목소리들이 튀어나왔다. 누군가는 차가운 웃음과 함께 "회사는 너무 믿지 마. 등에 칼 꽂히기 싫으면"이라고 했고, 또 다른 이는 눈을 반짝이며 "나에게 회사는 꿈을 준비하는 공간이야. 그래서 많이 배우고 있어"라고 말했다. 같은 공간과 대상을 두고 전혀 다른 이야기를 하는 그들의 말은, 모두 틀리지 않았다. 모두 각자의 경험으로 만든 세계를 이야기하고 있었으니까. 누군가는 회사에서 배신을 경험했을 것이고, 또 다른 이는 성장의 기회를 얻었을 테니까.


이렇게 각자의 시선으로 세상을 바라보는 것을 '관점'이라고 한다. 정확하게는 사전을 찾아보니 관점은 '사물이나 현상을 관찰할 때, 그 사람이 보고 생각하는 태도나 방향 또는 처지'라고 되어 있다. 마치 프리즘을 통과한 빛이 각도에 따라 다른 색으로 분산되듯, 같은 현상도 보는 이의 위치에 따라 전혀 다른 모습으로 해석될 수 있다는 의미이다.


각자가 살아온 환경이라는 토양, 개인이 겪은 경험이라는 날씨, 축적된 지식이라는 양분이 어우러져 저마다의 고유한 관점이라는 꽃을 피워낸다. 그렇기에 세상에는 완벽히 동일한 두 개의 관점이 존재할 수 없다. 결국 관점이란 옳고 그름의 영역을 넘어선, 각자의 인생이 만들어낸 고유한 안경과도 같다. 각자의 눈에는 자기만의 고유한 안경을 쓰고 있다. 모든 이의 관점은 그 자체로 귀중한 가치를 지닌다. 마치 모자이크를 이루는 각각의 조각처럼, 서로 다른 관점들이 모여 더 풍성한 세상의 모습 을 그려내는 것이다. 그렇기에 관점이 다양한 사람들이 모여 사는 세상은 풍부하고 매력적이다.


각자의 관점으로 조화롭게 이 세상을 살아가면 참 좋겠지만, 문제는 이런 관점이 흑화되어 버릴 때 생긴다. 이것을 '편견'이라고 한다. 관점과 편견의 차이는 무엇일까? 누군가는 생각을 관점으로 만들어 해석하고 누군가는 편견에 갇혀 버리는 걸까?


'편견'의 사전적인 뜻은 '공정하지 못하고 한쪽으로 치우친 생각'이다. 전체적인 맥락에서는 '관점'과 비슷하지만, 그 안에 들어있는 감정은 사뭇 다르다. 관점과 편견의 가장 큰 차이는 '치우침의 유무' 즉, '다른 것에 대해 얼마나 수용할 수 있느냐'이다. 관점이 편견이 될 때는 내가 보는 세상을 중심으로 '다른 사람도 그래야 해' 혹은 '이 세상은 모두 이래야 해'라고 한정 지을 때 생긴다.


요즘 자신의 경험을 강연으로 풀어내는 이들이 꽤 많다. 그들을 향한 시선이 두 갈래 길처럼 나뉜다. 한쪽 에서는 "진짜 실력자는 강연할 시간도 없어"라는 냉소와 "진짜 중요한 정보를 누가 공개하겠어?"라는 의심으로 가득하고, '강의 팔이'라는 단어로 그들을 욕하기 바쁘다.


이들의 말도 마냥 틀린 말은 아니다. 분명 그런 경험을 했을 테니까. 하지만 정반대의 경험도 있다. 순수하게 좋은 정보를 나누는 이들도 만났고, 그들의 진심 어린 조언으로 인생이 바뀐 사람들도 보았다. 자신의 본업에 충실하면서도 주말에 시간을 쪼개 강연을 준비하는 사람도 만났다.


이처럼 이 세상은 어떤 문제에 대해 단 하나의 정답만을 허용하지 않는다. 그런데 편견은 왜 하나만을 정답처럼 고집하게 하는 걸까? 세상은 이렇게 여러 가지 시선으로 뻗어나가는데 누군가는 왜 나와 다른 세상의 존재를 부정하려 하는 걸까. 어쩌면 그것이 가장 편한 방법이어서일까? 아니면 불확실성을 받아들이기 두려워서일까?


편견이 아닌 관점이 되기 위해 중요한 건 '그럴 수도 있다'는 마음의 여유를 챙기는 것 같다. 내가 경험한 세상이 전부가 아님을, 내가 보지 못한 곳에도 다른 진실이 존재할 수 있음을 인정하는 것. 그것이 관점과 편견을 가르는 결정적인 차이일 것이다.


이는 마치 거대한 산을 오르는 등산객과도 같다. 누군가는 동쪽 능선에서 일출을 바라보고, 또 다른 이는 서쪽 절벽에서 낙조에 취해있다. 북쪽 바위에 앉은 이는 구름 아래 펼쳐진 도시를 내려다보고, 남쪽 숲길을 걷는 이는 울창한 나무들 사이로 스며드는 빛을 발견한다. 그들이 보는 풍경은 모두 다르지만, 그 누구의 시선도 틀리지 않았다. 다만 각자가 본 것은 거대한 산의 한 단면일 뿐, 불완전할 따름이다.


회사 사람을 너무 믿지 말라고 했던 친구의 말로 돌아가 보자. 그 친구의 관찰이 틀린 것은 아니다. 다만 그것이 전부가 아니라는 것을, 더 넓은 세상에는 다른 모습도 있다는 것을 알게 되면, 그때 비로소 '관점'이 될 수 있지 않을까.


누구나 마찬가지다. 내 경험이 만든 가치관을 존중하되, 그것이 전부가 아님을 인정할 때 우리는 더 넓은 세상을 볼 수 있다. 나 역시 관점이라고 주장하지만, 편견의 시선으로 가득 찬 영역들이 생기곤 한다. 하지만 이제는 조금 더 넓은 마음을 갖고 묻고 싶다.


"제 세상은 이런데, 혹시 그쪽이 바라보는 세상은 어때요?"


* * *


본 정보는 도서의 일부 내용으로만 구성되어 있으며, 보다 많은 정보와 지식은 반드시 책을 참조하셔야 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