위로를 주는 빵집, 오렌지 베이커리

   
키티 테이트, 앨 테이트(역:이리나)
ǻ
윌북
   
22000
2023�� 06��



■ 책 소개


한 아이를 살려낸 공감과 연대의 힘,
빵을 구우며 인생을 바꾼 아빠와 딸의 이야기

매주 토요일 오후마다 빨간 머리 베이커 소녀가 빵을 수북이 담은 쟁반을 목에 걸고 나와 줄 서서 기다리는 손님들에게 공짜빵을 나눠주는 곳이 있다. 마치 어느 소설의 배경처럼 느껴지는 이 빵집은 영국의 작은 마을 와틀링턴에 실재하는 ‘오렌지 베이커리’다. 함께 빵을 먹으며 두런두런 살아가는 이야기를 나누는 곳. 어떤 아픔도 흠이 되지 않고, 다만 애정 어린 관심과 공감으로 서로를 돕는 이들이 있는 곳, 한입 베어 물면 따스한 위로가 차오르는 로즈메리 포카치아와 달콤한 초콜릿 쿠키가 있는 곳.

이곳을 운영하는 건 빵 굽는 아빠와 딸, 키티와 앨이다. 두 사람에게는 특별한 사연이 있다. 키티는 우울증과 공황장애를 앓으며 학교를 그만두었고, 앨은 키티를 돌보기 위해 아내 대신 일을 그만두었다. 모든 걸 잃어버렸다고 느끼던 찰나, 두 사람은 빵을 구우며 작은 희망의 씨앗을 발견한다. 요리에는 만드는 사람의 마음이 고스란히 담기곤 한다. 키티는 도넛처럼 뻥 뚫린 외로운 마음을 위로하기 위해, 절망의 바닥에서 자신을 일으키기 위해 빵을 구웠고 그렇게 만든 빵을 이웃들에게 나눠준다. 빵을 먹어본 이웃들은 키티와 앨이 전혀 예상하지 못했던 말을 들려주었다. “빵이 너무 맛있어서 순식간에 먹어치웠어요. 더 먹고 싶은데, 주문할 수 있나요?” 이것이 누구도 계획하지 않은 오렌지 베이커리의 출발이자 시작이었다.

이 책은 느닷없이 슬픔의 도랑에 빠진 한 소녀가 자신이 사랑할 수 있는 일을 발견하고, 그것에 매진하며 ‘다시’ 삶을 향해 나아가는 이야기이며, 동시에 퍽퍽하게만 느껴지는 이 세상에 진정한 공감과 이해, 연대가 살아있음을 보여주는 이야기이기도 하다. 오븐을 빌려주며 먼저 손을 내밀어준 이웃 줄리엣 아주머니, 무작정 찾아간 키티에게 주방 문을 활짝 열고 제빵 기술을 알려준 베이커들, 그리고 오렌지 베이커리를 열 수 있도록 후원금을 보내준 수많은 이들의 존재는 우리에게 더불어 산다는 것의 의미를 새롭게 일깨운다. 세상을 살아가는 데 진정으로 필요한 것은 무엇인지, 서로가 서로의 곁이 되어줄 때 우리는 얼마나 행복해질 수 있는지 깨닫게 된다.

■ 저자 키티 테이트 & 앨 테이트
키티 테이트와 아빠 앨 테이트는 옥스퍼드 와틀링턴에 살며 함께 오렌지 베이커리를 운영한다. 두 사람은 무화과와 호두를 넣은 사워도우, 헤이즐넛 초콜릿 쿠키, 시나몬 번, 피스타치오 페이스트리 등 매일 다양하고 맛있는 빵을 굽는다. 가게 앞에는 빵을 사러 온 사람들의 줄이 길게 늘어서고, 몇 시간 만에 모든 빵이 다 팔린다.

키티는 2018년 열네 살에 우울증을 앓았고 학교도 그만두게 되었다. 앨은 살아갈 이유가 없다고 느끼던 키티에게 함께 빵을 구워보자고 제안했고, 그날부터 두 사람은 한 덩이, 두 덩이씩 빵을 굽기 시작했다. 그 후 키티와 앨은 동네 사람들에게 빵을 주문받아 배달해주는 소규모 빵 구독 서비스를 시작했고, 팝업 매장을 열었으며, 마침내 2년 만에 시내에 빵집을 열게 됐다. 그 사이 키티는 건강해졌고, 웰시코기 한 마리를 입양했다. 옥스퍼드대학교에서 학생들을 가르치던 앨은 이제 선생님이 아닌 베이커가 되었다. 

키티 인스타그램 @kittytaitbaker

■ 역자 이리나
어릴 때부터 책 읽고 글쓰기를 좋아했다. 특히 탐정 소설에 빠져 뤼팽과 홈스를 탐독했고, 추리력을 발휘해 미스터리한 사건을 해결하는 꿈을 자주 꾸었다. 아동문학가가 되고 싶은 소망을 고이 간직한 채 오랫동안 영어 선생님으로 일했고, 어린 시절 꿈을 좇아 번역하고 글 쓰는 작가로 거듭나 독자들을 만나는 행복한 나날을 보내고 있다. 외서 기획 및 전문번역가로 활동 중이다. 옮긴 책으로는 『루시 핌의 선택』 『미스터리 서점의 크리스마스 이야기』 『한 시간 사이에 일어난 일』 『일중독자의 여행』 『화이트 크리스마스 미스터리』 『징구』 『우아한 크리스마스의 죽이는 미스터리』 『명탐정 셜록 샘 시리즈』 『음식의 위로』 등이 있으며 쓴 책으로는 『당신의 떡볶이로부터(공저)』가 있다.

■ 차례
키티와 앨 그리고
오렌지 베이커리 이야기
1 시작
2 첫 번째 빵
3 스타터 퍼거슨
4 우리 오븐 루스
5 더 많은 장작을 베도록 해요
6 망한 우유 카트의 날
7 10번가로 입성
8 우리 냉장고 버사
9 잡초 페스토
10 울라 할머니와 호밀빵
11 크리스티안과 크리스마스
12 우리 차 도도
13 바리케이드와 공짜빵
14 내 강아지 스카우트

레시피
사워도우빵
스위트 도우
페이스트리
쿠키와 케이크

 




오렌지 베이커리


시작

때는 우리 부모님의 결혼기념일 파티가 열리던 2018년 초봄이었다. 오랜만에 키티의 친가쪽 가족들이 다 모였다. 때로는 복잡하고, 미묘하기도 한 가족 역학에서 키티는 부러울 정도로 단순한 위치를 점하고 있었다. 항상 이상한 양말을 신어서 모두를 웃게 했고, 사랑스러운 빨간 머리에, 수다스럽고 주근깨가 많은 유쾌한 아이였다.


변화는 아주 천천히 진행됐고, 아내 케이티와 나는 키티가 얼마나 위축되어 있는지 깨닫지 못했다. 그러나 오랜만에 키티를 본 가족들은 곧바로 변화를 알아차렸다. 키티는 말을 하지 않았고, 산만해졌으며, 창백하고 슬퍼 보였다. 키티의 변화를 눈여겨본 할머니와 고모가 따로 전화를 걸어 키티의 안부를 묻기도 했다.


다음 몇 주 동안 우리는 막내에게 무슨 일이 일어나고 있는지 알아내기 위해 모든 노력을 기울였다. 키티를 가족이라는 울타리로 단단히 감쌌고 이야기를 나누고 귀를 기울였다. 그러나 우리가 노력하면 할수록 키티는 우리에게서 더 멀어지는 것 같았다.


얼마 후 옥스퍼드에 있는 아동‧청소년 정신건강서비스(CAMHS) 센터와 첫 번째 상담 약속을 잡았다. 키티에게는 그 상담이 일종의 자극제가 되었다. 키티는 더 이상 ‘정상’인 척 하지 않았다. 애써 용감한 표정을 지어 보이던 가면을 하룻밤 사이에 벗어 버리더니, 더욱 커다란 절망과 두려움에 휩싸이게 된 것 같았다. 키티는 불안에 떨었고, 집을 나서는 일조차 버거워하게 되었다. 6월부터는 학교에 다니는 게 불가능해졌고 그렇게 중요한 일도 아니게 되었다. 키티가 매일 아침 일어나 옷을 챙겨 입는 것마저 힘들어했으니까.


모든 사람이 분명 계기가 있었을 거라며 그게 뭔지 알고 싶어 했다. 그러나 수천 가지 작은 계기가 있었을지 몰라도 뚜렷한 하나의 원인은 없었다. 어쩌면 단순한 DNA 문제였을지도 모른다. 많은 이의 추측과 달리 소셜미디어는 문제의 원흉이 아니었다. 키티에게는 좋은 친구들이 있었고 따돌림을 당한 정황도 없었다. 키티는 학업의 압박이 그다지 심하지 않은 공립학교에서 성실히 생활했다. 그러나 이유가 뭐였던 간에, 뭔가가 꼬여버렸다. 보통 때와 똑같이 스위치를 눌렀으나, 갑자기 폭발해버린 아폴로 13호와 비슷했다.


몇 주 만에 우리 삶은 완전히 변해버렸다.

절망이 무엇인지조차 알기 어려웠다.


진짜 절망은 과장의 모습을 하지 않는다. 침대에서 일어나고, 먹고, 씻고, 심지어 잠을 자는 가장 단순한 일상의 기능을 포기하는 게 진짜 절망의 실체였다. 그걸 지켜보는 일은 공포에 가까웠다. 키티는 일상적인 일을 하나도 하지 못했고, 우리 부부는 키티는 안심시키기 위해 밤낮없이 옆에 있어주어야 했다. 제정신이 아닌 키티를 이성적으로 대하는 것은 거의 불가능했다. 모두에게 당황스럽고 무서운 상황이었지만, 키티 본인이 가장 힘들었다. 아내와 나는 매일 밤 서로에게 묻곤 했다. “왜 이런 일이 생겼을까?” 시간을 한참 흘려보내고 나서야 우리는 ‘왜’라는 질문을 하지 않게 되었다. 대신 ‘어떻게’ 하루를 무사히 보낼 수 있을지 이야기했다.


나는 키티가 어떻게든 나아질 때까지 완전히 문을 걸어 닫고, 우리만의 세계에 숨어 있는 게 가장 좋을 거라 생각했다. 그러나 케이티는 언제나 그렇듯 나보다 훨씬 더 용감했다. 아내는 가족들과 친구들, 이웃들에게 다 털어놓기로 했다.


명랑하고 쾌활하고 밝은 키티가 어쩌다 이렇게 변해버렸는지 아무도 이해하지 못했지만, 모두 도와주고 싶어 했다. 옆집 방갈로로 이사 온 70대 할아버지 피터는 특히나 키티에게 각별했다. 그의 온화한 공감과 위로가 우리의 마음을 어루만졌다. 와틀링턴에 온 뒤 가장 먼저 친구가 된 루시와 로빈 부부는 한결같이 너그럽고 열린 태도로 이야기를 들어주었기에 우리가 겪는 최악의 상황을 마음껏 터놓고 얘기할 수 있었다. 이웃과 가족뿐만 아니라 키티의 학교 선생님들, 우리 집 문틈으로 편지를 넣어주던 키티의 친구들, 때로는 생면부지의 사람들까지 응원을 보내주었다.


키티는 집 근처 유치원과 초등학교, 중학교에 다녔기 때문에 주변에 모르는 사람이 없었다. 와틀링턴은 영국에서도 조그맣기로는 손에 꼽히는 마을로, 여행지라기보다는 대대손손 자손들을 키우며 살기 좋은 곳이다. 와틀링턴은 공감이 바탕이 되는 진정한 공동체 정신이 살아 있는 곳이다. 이후 몇 년 동안 이 사실을 몇 번이고 되풀이해 경험할 수 있었다.


첫 번째 빵
키티와 내가 처음으로 빵을 함께 구웠을 때를 제대로 기억할 수 있으면 좋을 텐데, 그러지 못해 아쉽다. 사실 나는 키티가 집중할 수 있는 활동을 찾아 주려고 여러 시도를 하고 있었고, 빵 굽기도 그중 하나였다. 키티는 TV에는 몇 분도 집중하지 못했다. 정원 가꾸기도 시도했지만 허사였다. 실험 삼아 공예도 해봤지만 도움이 되지 않았다. 담벼락을 캔버스 삼아 그림도 그려봤지만 역시 실패했고, 큰 붓으로 담을 다시 칠해야 했다. 이제 선택지가 거의 없었다. 빵 굽기는 목록에서 한참 밑에 있었으나 빵 굽는 일은 즐거웠고, 그래서 우리는 빵을 구웠다.


빵을 구워온 내 오랜 역사를 생각하면 내 제빵 실력은 충격적이었다. 노력을 들일수록 내가 만든 빵은 더 제멋대로였다. 어딘가 덜 구워지고 뻑뻑했다. 그럭저럭 맛은 냈지만, 모양이 엉망이라 가족들에게 내놓은 적도 별로 없다.


그렇지만 베이킹은 이스트와 시간만 있으면 누구나 할 수 있는 일이라, 휴일이나 주말이면 때때로 빵을 굽곤 했다. 수업에서 듣기로는 반죽이 촉촉할수록 좋다고 했다. 그러나 내가 반죽을 촉촉하게 만들면 나무 작업대에 다 달라붙어서 떼어낼 수가 없었다. 반죽을 치대고 긁어내다 보면 주방은 종말을 맞은 지구 같아졌다. 그때 누군가 뉴욕의 유명한 제빵사 짐 레이히를 알려주었다. 레이히는 반죽 없이 빵을 굽는 ‘무반죽 레시피’로 유명하다. 그의 레시피 덕분에 나는 주방의 카오스를 크게 줄일 수 있었다. 방법은 간단하다. 그냥 밀가루, 물, 소금, 극소량의 이스트를 볼에 넣고 한데 섞은 뒤 밤새 놔둔다.


키티와 처음으로 함께 빵을 만들 때도 이 ‘무반죽 레시피’를 활용했다. 그때가 하루 중 언제였는지, 그날 아침에 우리가 무엇을 하고 있었는지, 어쩌다 그런 대화를 하게 되었는지는 기억나지 않는다. 따로 계획한 것은 아무것도 없었다. 그저 키티에게 “직접 해볼래?”라고 물었다. 내가 오븐에서 빵을 꺼내자 키티는 확실히 관심을 보였다. 오랫동안 키티는 무언가에 관심을 보이는 일이 없었다. 나는 그 순간이 얼마나 중요한지조차 몰랐다. 키티가 언제 다시 빵을 굽자고 제안했는지도 여전히 기억나지 않는다.


우리 가족은 빵을 정말 좋아하지만, 아무리 먹어도 키티의 빵 굽는 속도는 따라잡기 어려웠다. 키티가 흰 밀가루와 통밀가루로 실험을 시작한 지 2주만에 빵은 보관함 뚜껑을 닫지 못할 정도로 산더미처럼 쌓이기 시작했다. 이웃에게 혹시 빵을 원하는지 물어보자고 제안한 사람은 케이티였다. 우리는 제각기 크기와 모양이 다른 주택 열다섯 채가 늘어선 일방통행로에 산다. 이웃 중에는 대가족도 있고 소가족도 있었다. 그들 모두에게 혹시 갓 구운 빵을 먹을 의향이 있는지 물어보러(혹은 간청하러) 다니기 시작했다. 우리가 문을 두드린 집은 모두 빵을 먹겠다고 했고, 키티는 집에 와서 반죽을 준비하기 시작했다.


다음 날 우리는 갓 구운 따끈따끈한 빵 다섯 덩이를 유산지에 싸서 이웃에 배달했다. 이웃들은 기금을 마련하기 위해 교문 밖에서 꽁꽁 언 컵케이크를 파는 아이에게 지음 직한 친절한 표정으로 빵을 받아주었다. 몇 집 아래에 사는 줄리엣은 자기 아이들이 빵을 순식간에 먹어치웠다며 더 주문해도 되냐고 물어보았는데, 그 말을 들었을 땐 정말 깜짝 놀랐다.


키티가 자기 전에 반죽을 만들어놓으면, 우리는 아침에 빵을 굽고 포장한 다음 거리를 오르내리며 빵을 배달했다. 아주 잠깐이었지만, 키티가 반죽으로 동그랗게 모양을 만들거나 캐서롤의 뚜껑을 열거나 아직 따뜻한 빵을 건넬 때 한 번씩 환하게 웃는 모습을 볼 수 있었다. 그건 키티가 어두운 생각에 잠식당하지 않았을 때의 미소였고, 애써 지어내는 게 아닌 진심 어린 미소였다.


**


나는 매일 빵 굽는 시간을 위해 살기 시작했다. 문제는 내가 할 수 있는 일의 양이 제한돼 있다는 거였다. 우리 집 오븐은 자주 과열됐고, 빵 한 덩이를 굽는 데 두 시간이나 걸렸다. 반죽은 많이 만들어낼 수 있었지만, 구울 곳이 없었다. 그때 줄리엣 아주머니가 먼저 제안을 주셨다. 아주머니는 한 번에 캐서롤 냄비 네 개를 넣을 수 있고 우리 집 오븐보다 훨씬 높은 온도까지 올라가는 대류식 오븐을 집에 막 들여놓은 참이었다. 줄리엣 아주머니는 언제든 그 오븐을 쓰러 집에 와도 좋다고 말했다. 이렇게 새로운 루틴이 생겼다. 나는 아주머니네 식구들이 주방을 쓰지 않는 밤까지 기다린 뒤 종종걸음으로 길을 가로질러 그 집으로 가곤 했다.


줄리엣 아주머니네 주방에서 구워낸 빵은 우리 집 낡은 오븐에서 만든 빵보다 훨씬 맛이 좋았다. 열이 더 높아서 반죽이 잘 부풀고 빵 굽는 시간도 반으로 줄었다. 점차 내 빵을 찾는 이웃들이 늘어나서 우리는 근처에 있는 가게에서 캐서롤 냄비를 엄청나게 많이 샀다. 그리고 두 집 아래에 사는 샬럿 아주머니와 필립 아저씨에게 그 집 오븐을 써도 될지 물어보았다.


다음 날이면 나는 반죽을 들어 올리고, 밀가루와 유산지를 흘려가며 이웃들의 주방을 넘나들었다. 당시 매일 빵 여덟 덩이를 만들고 이웃들에게 계속 나눠주었는데도 빵이 남았다. 그 빵을 먹어 줄 집을 찾고 싶었다.


와틀링턴에서 잘 아는 사람들의 이름을 모두 적어보았다(마을 인구의 3/4 정도나 되었다). 우리는 갈색 종이봉투에 신선한 빵 한 덩이를 넣어 그들의 문간에 가져다 놓았다. 종이봉투 안에는 아빠의 전화번호와 함께 메모를 남겼다. 미용실, 정육점, 옛 선생님들의 집, 언덕 꼭대기에 있는 보육원, 소방서, 특이한 우체부 아저씨의 집, 아는 친구들과 그냥 좋아하는 집 등 모든 곳에 따끈한 빵 봉투를 보냈다. 그러나 다음 날까지 아무 소식이 없었다. 그러다 문자가 도착하기 시작했다. ‘빵 맛있었어요. 더 먹고 싶네요. 얼마인가요?’ 하루에 열 덩이까지 주문이 들어왔다.


이렇게 빵 구독 서비스가 탄생했다.


스타터 퍼거슨

내가 사랑에 빠진 것은 빵의 맛이 아니라 스타터였다. 홉스하우스 베이커리에서 배송해준 스타터를 나는 퍼거슨이라 불렀다. 그는 내 모든 것이었고 그를 생기 있고 행복하게 하는 게 내 임무였다. 매일 아침 나는 퍼거슨에게 100ml의 따뜻한 물과 같은 양의 밀가루를 공급해주었다. 일단 퍼거슨이 물과 밀가루를 잘 흡수하면, 절반을 덜어내고 다시 물과 밀가루를 넣어주어야 했다.


나는 주방에 혼자 있을 퍼거슨 걱정에 자다가도 벌떡 일어나곤 했다. 어느 날 밤에는 주방에 놓인 크고 푹신한 벤치에 털 담요를 깔고 거기에서 잤다. 다음 날 밤에도 똑같이 했고, 다음 날 밤에도, 그다음 날 밤도 마찬가지였다. 내가 퍼거슨 곁에 있어줄 수 있다는 것만으로도 잠이 훨씬 잘 왔다. 침실에 갇혀서 스스로 쓸모없는 사람이라는 생각에 자책하며 허우적댈 때보다 마음이 훨씬 편했다.


가족들은 내가 주방 벤치에서 잔다는 사실을

아무 말 없이 묵인해주었다.

내가 학교에 가지 않거나 매일 같은 옷을 입는 걸

받아들여 준 것처럼. 덕분에 나는 머리가

덜 아팠고, 가족들이 원하는 것은 그뿐이었다.


아직 다른 누군가에게 우리가 만든 사워도우를 먹여볼 용기는 없었다. 따라서 점차 주문이 늘어나는 오버나이트빵에만 집중했다. 우리는 ‘팽 드 캉파뉴’라는 통밀빵과 키티가 ‘위로빵’이라 이름 붙인 마마이트(이스트 추출물을 농축해 만든 스프레드)빵까지 만들며 범위를 넓혔다. 위로빵은 키티가 처음으로 혼자 만들어낸 빵이다.


우리 빵을 주문해 먹는 고객은 모두 우리 집에서 2킬로미터 반경 안에 살았다. 우리는 빵을 약간 식힌 다음 바로 자전거 바구니에 넣어 배달을 가곤 했다. 이건 키티에게 (솔직히 말하면 내게도) 굉장한 용기가 필요한 일이었다. 사람들 앞에 나서고 그들과 교류하면서 나는 우리의 짧은 여름이 지나면 또 어떤 날들이 이어질지 내심 두려웠지만, 키티는 전혀 걱정하지 않았다. 키티는 반짝반짝 빛이 났다.


사람들은 키티의 빵을 받고 진심으로 기뻐했다.

고마워하는 고객에게 따뜻한 빵을 건네며

키티의 안에서 작은 불꽃이 일었다.


빵 구독 서비스 덕분에 밖으로 나갈 자신이 생겼다. 사람들이 내 빵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는지 알아야 했기 때문이다. 나는 사람들이 아침 식사로 빵에 버터와 잼을 발라 먹는 장면을 상상했고, 그 생각만 하면 파란색 자전거의 페달을 밟는 두 다리에 힘이 잔뜩 들어갔다. 밖으로 더 자주 나갈수록 와틀링턴이 더욱 안전한 곳이라 여겨졌다. 매일 아침 배달 길에 만나게 되는 사람도 생겼다.


다음으로 우리에게 필요한 건 이름이었다. 아빠와 나는 ‘브레드 헤드’를 내세웠지만, 그때 엄마가 ‘오렌지 베이커리’란 이름을 떠올렸다. 내가 항상 보드라운 오렌지색 멜빵바지를 입었기 때문이다(그 옷을 입으면 안전하다고 느꼈다). 매일 입다 보면 옷은 반죽으로 뒤덮였고, 꼭 배에 따개비가 들러붙은 것처럼 보였다. 그러면 엄마는 제발 옷을 빨자고 했다. 멜빵바지는 우리 팀 제3의 멤버였다. 그렇게 ‘오렌지 베이커리’가 탄생했다.


우리 오븐 루스

키티는 오렌지 베이커리라는 이름이 생기자마자 인스타그램을 시작했고, 놀랍게도 인스타그램을 편하게 받아들였다. 빵과 베이킹 관련 계정이었으므로 무엇을 게시할지 고민하거나 오랫동안 계획할 필요가 없었고, 사람들이 게시물을 좋아하면 키티도 기뻐했다. 키티의 최신 게시물은 우리 집 주방을 보여주는 짧은 영상이었다. 아니, 정확히 말하면 우리 집 주방의 새로운 버전을 보여주는 영상이었다. 키티는 넓은 선반에 있던 레시피 책들과 높게 쌓여 있던 쓰레기들을 치워버리고 대신 밀가루와 다른 베이킹 재료들을 채워놓았다. 키티는 찬장이 있던 한쪽 구석 공간을 비워두고 마스킹테이프로 네모나게 표시를 해두었다. 거기에는 ‘로프코(ROFCO)’라는 단어가 적힌 A4용지 한 장이 붙어 있었다.


**


집으로 돌아와 우리 로프코를 바라보았다. 로프코는 깨끗했고, 반짝거렸고, 대니엘 덕분에 이제 조금은 덜 무서워 보였다. 내가 로프코를 돌봐야 하므로 늘 하던 대로 먼저 이름을 지어주었다. ‘루스.’ 루스를 켜고 오븐 문을 열었다. 화학약품과 새로 산 신발 냄새가 났다.


루스에 첫 반죽을 넣고 작고 둥근 창 안으로 반죽이 부풀어 오르는 모습을 지켜보았다. 이때 나는 여전히 TV를 10분도 제대로 보지 못했는데, 빵이 구워지는 과정은 한 시간이라도 지켜볼 수 있었다.


빛깔이 없던 반죽은 서서히 통통한

황금빛 빵으로 변신했다. 오븐에서 꺼낸 빵은

유쾌하게 탁탁 갈라지며 쉭쉭 소리를 냈다.


주말이 되자 루스에는 이미 반죽이 잔뜩 튀어 있었다. 이제 한 번에 빵 열두 덩이를 구울 수 있었고 빵 요청도 쇄도했다. 오렌지색 멜빵바지에는 밀가루를, 캔버스 운동화에는 마른 반죽을 잔뜩 묻히고 협동조합에 갈 때마다 누군가 내 앞에 나타나 이렇게 물었다. “네가 빵 굽는 아이지? 나도 빵 먹고 싶은데 어떻게 하면 돼?” 마치 와틀링턴의 마약왕이 된 것 같았다. 사람들이 원하는 것들은 종이에 자세히 받아쓰고, 그들이 주문할 수 있는 빵 종류와 요일을 적어 문자 메시지를 보냈다. 이제 내 파란색 자전거만으로는 배달을 다 해낼 수 없어서 아빠와 나는 차고에서 오래된 흰 캐비닛을 꺼내 칠판 페인트로 칠을 한 뒤 우리 집 앞에 세워두었다. 이건 우리가 개발한 다소 원시적인 방식의 드라이브 스루 시스템이었다.


이제 사람들은 캐비닛에 적힌 자신의 이름을 확인하고 그 안에 든 빵을 직접 가져갔다. 사람들은 빵을 가져가면서 보답으로 우리에게 무언가를 남기고 갔다. 그래서 우리는 그걸 ‘마법 캐비닛’이라 불렀다. 때로 편지와 그림, 달걀 등이 놓여 있었고, 한번은 처음 보는 무언가가 가방에 담겨 있었는데 알고 보니 마르멜로 열매였다. 줄리엣이 화원에서 가져온 꽃을 두고 갈 때도 있었다. 오늘은 또 어떤 기분 좋은 선물이 캐비닛에 담겨 있을지 궁금해하며 일과가 끝나기를 기다리는 게 일상이 되었다.


울라 할머니와 호밀빵

새 학기가 시작되는 그해 9월에 키티는 옥스퍼드의 NHS 정신건강센터와 멀어지기로 했다. 키티는 공황발작과 슬픔을 막아내는 데 필요한 것들(빵 굽기, 가족, 개 산책, 일상생활)을 찾아냈고, 혹시 그런 증상이 나타나도 전처럼 속수무책으로 떨고만 있지는 않았다. 키티는 자기에게 더 친절해지는 방법을 알아냈을 뿐 아니라 다시 행복해질 수 있다고 조금씩 믿기 시작했다. 우리는 키티의 이런 징후가 점점 더 뚜렷해질 때까지 그렇다는 사실조차 모르고 있었다.


첫째, 키티의 웃음이 돌아왔다. 눈가에 주름이 잡히고 온몸이 흔들릴 정도로 깔깔거리던 웃음이 돌아온 것이다.


키티의 인스타그램에는 그해 가을 키티가 강에

뛰어드는 사진이 있다. 그리 따뜻하지도 않은

날이었다. 씩씩하던 어릴 적 키티의 모습이 보였다.


두 번째 지표는 소음이었다. 전에 키티는 묵묵히 일하는 걸 더 좋아했지만 이젠 늘 음악과 함께한다. 데이비드 보위, 닉 케이브, 플레이밍 립스가 우리 베이커리의 플레이리스트를 주로 차지한다. 때마침 키티는 팟캐스트를 발견하기도 했다. 일하며 들을 수 있는 팟캐스트는 키티에게 안성맞춤이었다. 키티의 멜빵바지에는 늘 휴대폰이 들어 있었고 거기서는 늘 정체를 알 수 없는 목소리가 스톡홀름 신드롬이나 부디카 여왕의 일생 또는 모르몬교의 기원 같은 내용을 들려주곤 했다. 키티는 하나의 주제에 관심을 가지면 그에 관한 모든 정보를 조사하며 깊이 파고들었다. 덕분에 키티는 대중적인 교양 지식에 대해서는 잘 몰라도 전문적인 분야에 관해서는 의아할 정도로 해박한 지식을 갖고 있다.


키티는 빵을 굽는 일 말고는 아무것도 할 수 없었던 시간을 보상이라도 하려는 듯 각종 지식과 정보를 마구 집어삼켰고, 일하면서도 어떤 이슈에 관해 궁금한 것이 생기면 바로 내게 질문을 퍼부었다.


그해 9월에는 내게도 두 가지 뚜렷한 변화가 생겼다. 첫째는 키티의 교육에 대한 죄책감을 떨쳐버렸다는 것이다. 아내와 나는 키티에게 맞지 않는 전통적인 교육 방식을 더는 강요하지 않기로 했다.


이제는 키티가 조금 다른 길을 선택했다는 사실을

받아들이고 그게 잘 풀리기를 바라기로 했다.


키티가 심한 아픔을 겪으며 우리 가족들 역시 큰 상처를 입었다. 겨우 벼랑 끝에서 한 발짝 물러난 상태인데 키티에게 맞지 않는 평범한 길을 고집하며 아이를 다시 위험에 빠뜨릴 수는 없었다.


결정을 내리는 데는 키티의 옛 학교 선생님들 두 분이 큰 도움을 주셨다. 두 분은 감사하게도 매주 시간을 내 우리 집에 와서 키티가 궁금해하는 것들에 관해 이야기해주었다.


키티가 다른 길을 선택했다는 걸 받아들인 것처럼, 나도 교직에 복귀한 가능성이 낮다는 사실을 인정해야 했다. 베이킹은 더 이상 딸을 돕는 방편이 아니라 내 새로운 직업이었다. 이제 어설프게 기웃거리는 걸 멈추고 과감히 뛰어들어야 했다.


몇 주 후 친구들과 저녁 식사를 함께했다. 친구들은 얼마 전에 유언장을 작성했다며 우리 부부에게 증인이 되어달라고 했다. 증인 서류를 쓰며


나는 처음으로 내 이름 옆 직업란에

‘베이커’라고 적었다. 기분이 좋았다.


엄마 아빠는 누군가에게 내가 아프다거나 학교에 가지 않는다거나 우울증에 걸렸다는 이야기를 하면 사람들은 종종 그게 다 소셜미디어 때문이라고, 그게 사람을 힘들게 한다고 말하곤 했다. 그러나 인스타그램은 늘 나를 도와주었다. 내 인스타그램 피드는 빵과 베이커리와 요리사와 레시피와 요리 도구와 재료로 가득했고, 그 모두가 나를 기죽게 하는 게 아니라 얼른 아픈 걸 회복하고 밖으로 나가 베이킹에 관해 더 많은 걸 배우고 싶게 했다. 세상에는 내가 집에서 머리만 싸매고 있기에는 너무 아쉬운 멋진 일이 많이 벌어지고 있었다. 내가 편안한 곳에만 머문다면 닿지 못할 일들이었다. 그러다 여름에 한 번 더 인스타그램 덕분에 멋진 경험을 하게 됐다.


코펜하겐에 초대를 받은 것이다.

인스타그램은 나를 움직이게 했다.


3주 후 우리는 코펜하겐 공항에 도착해 호밀빵 장인인 울라 할머니와 니콜라스의 가족들을 만났다. 니콜라스네 집은 아주 희고 아주 네모난 모양이었다. 코펜하겐에 있는 동안 울라 할머니는 호밀빵에 관한 모든 것을 가르쳐주었다. 호밀빵을 만드는 데는 이틀이 걸렸고, 우리가 영국으로 돌아가야 할 시간에 딱 맞춰 빵이 완성되었다.


비행기를 기다리는 동안 배낭 안에 넣은 호밀빵의 온기가 등에 전해졌다. 울라 할머니의 가족들은 아마 모를 것이다. 그들 덕분에 내가 일상을 벗어나도 공황발작을 일으키지 않을 수 있다는 걸 깨달았으며, 나아가 큰 자신감을 얻었다는 사실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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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 정보는 도서의 일부 내용으로만 구성되어 있으며, 보다 많은 정보와 지식은 반드시 책을 참조하셔야 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