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는 모두 다른 세계에 산다

   
조제프 쇼바네크
ǻ
현대지성
   
16500
2022�� 09��



■ 책 소개


아무에게도 보여준 적 없는 자신의 내면세계를
활짝 열어 보인 한 자폐 지성인의 증언

자폐인은 어떤 결정을 내리기에 앞서 제기된 문제 또는 주어진 상황의 모든 측면을 생각한다. 만약 여행을 떠난다면, 여행의 모든 단계를 계획한다. 여행 가방을 어떤 날에 준비해야 할지 알아야 하고, 가져가야 할 물건 목록뿐 아니라 그 물건들을 어떤 순서로 가방에 넣을지도 미리 생각한다. 그러려면 시간이 오래 걸리고 생각이 복잡해지기 마련이다.

파리의 한 식당에서 친구를 만나기로 했다고 하자. 자기에게 익숙한 장소라고 해도 여러 번 길을 잃고 헤맨 끝에야 식당 건물 앞에 도착한다. 그러고서 이렇게 생각한다. ‘저기에 들어갈까 말까? 어느 순간에 문을 밀고 들어가야 할까? 식당에 10시에 오라고 했는데, 식당 앞을 말하는 걸까 아니면 홀을 말하는 걸까? 5분 전에 도착해도 되나? 5분 후에 도착해도 되나? 그 두 경우에 사람들이 내게 뭐라고 말을 걸까? 그러면 나는 뭐라고 답해야 할까?’

그는 자신이 세상의 어떤 틀에도 들어맞지 않음을 발견한다. 어찌 보면 서글프고 심각한 이야기들인데 그는 대수롭지 않은 듯 유머러스하게 자신의 내면세계를 열어보인다. 지금까지 가족이나 전문가, 제3의 관찰자 입장에서 자폐인을 기록한 글은 제법 있었지만 자폐인이 인식하는 세계에 대해 자폐인이 직접 기술한 생활 속 이야기는 처음이다.

■ 저자 조제프 쇼바네크
1981년 파리 근교에서, 1970년대에 체코에서 이주한 부모에게서 태어났다. 아스퍼거증후군에 걸린 조제프 쇼바네크는 만 6세까지 말을 하지 못했고, 초등학교에 입학할 지적 능력이 없다는 판정을 받기도 했다. 늘 멍청이나 지적장애인 취급을 당했고, 간단한 인사를 하거나 카페에 들어가는 일도 버거워하고 빵을 사는 사소한 일에도 쩔쩔맸다.

우수한 성적으로 바칼로레아(프랑스의 ‘수능’)를 통과하고, 고대 문명에 심취하여 독학으로 10개 언어를 배웠으며(히브리어, 산스크리트어, 페르시아어, 아마르어, 아제르바이잔어, 에티오피아어, 체코슬로바키아어, 독일어, 핀란드어, 영어), 프랑스 명문대 시앙스 포(Sciences Po, 파리 정치대학) 졸업 후 철학 박사학위를 취득했다. 그리고 명사들의 담화문을 쓰고, 전 세계를 돌아다니며 강연한다.

하지만 그는 사람들이 자신에게 붙인 이름(“천재적인 자폐인”)을 거부하고, 오히려 아스퍼거 장애를 지닌 자폐인이 일상에서 어떻게 살아가는지를 유머러스하고 섬세하게 다룬다. 지하철을 타거나 약속 장소에 가기 전에 필요한 어마어마한 준비 과정, 전화벨이 울릴 때 마음을 죄어오는 불안감, 조금이라도 예상치 못한 상황이 닥쳤을 때 느끼는 공황 상태, 평범한 친구 관계를 맺는 과정에서 느끼는 희한한 어려움, 도서관과 책에 대한 강박적인 열정 등을 시종일관 즐겁게 펼쳐놓는다. 그리고 의사가 잘못 내린 판단 때문에 평생 정신병원에 수용되어 생을 마감할 뻔했던 황당한 정신치료 과정도 떠올린다.

쇼바네크는 “나는 자폐증과 함께 산다”라고 고백하며, 자폐증은 자기 삶을 망가뜨린 장애가 아니라 자신을 설명하는 하나의 특징일 뿐이라고 강조한다.

■ 차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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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문

머리말 대신 쓰는 말

1장 어떤 틀에도 맞지 않는 아이
2장 규칙은 어디까지 규칙이지?
3장 없던 병도 만드는 정신과 치료
4장 자폐증이란 무엇인가?
5장 약물 중독 그리고 내가 만난 새로운 세계
6장 친구부터 직장까지, 결국 인간관계가 핵심이다
7장 정상과 비정상의 경계에 서다
8장 나는 자폐를 잘 모른다

맺음말 대신 쓰는 말

 




우리는 모두 다른 세계에 산다


어떤 틀에도 맞지 않는 아이

난 독서와 글쓰기로 학습했다. 그리고 지금까지도 말로 듣는 것보다 글로 읽는 것이 더 쉽다. 말하기와 글쓰기로 마찬가지다. 손으로 직접 쓰거나 자판으로 입력하는 것이 말보다 쉽다. 그러니 나는 자크 데리다(프랑스 철학자)의 ‘문자론’ 프로젝트에 애착을 가질 수밖에 없다. 언어학이 말로 구현된 언어를 연구하는 학문이라면 문자론은 쓰인 글을 연구하는 학문이다.


하지만 글을 쓸 때나 말을 할 때 중요한 것은 단지 그 ‘행위’가 아니다. 각각의 발언 이면의 사회적 기대는 단어보다 강하다. 어떤 질문이나 요구는 상당히 명료하다(예를 들어, “선분 AB의 센티미터 단위 길이는 얼마인가?”). 하지만 의미가 모호하면서 단어로 기호화되지 않은 것도 있다. 만약 어떤 사람이 뒤에서 당신의 이름을 큰 소리로 부르면 당신은 어떤 반응을 보이는가? 그는 당신더러 돌아서라고 요구하지 않았다. 어쩌면 그가 부른 건 당신이 아니라 동명이인인 누군가일 수도 있다. 그런데 많은 자폐 아동이 이런 사실을 매우 불안하게 여긴다. 그래서 어떤 자폐인은 사람들을 자동차 번호판이나 사회보장 번호로 식별한다. 사람이라는 존재는 번호로 규정해서는 안 된다고들 하지만, 사람을 어떤 이름 안에 집어넣는 것도 썩 기분 좋은 일은 아니다.


내가 아주 어렸을 때, 부모님은 스위스에서 끔찍한 경험을 했다. 나를 잃어버린 것이다. 사실 난 그때 엄마 아빠의 바로 앞의 덤불 속에 있었다. 하지만 두 분의 부름에 답하지 않았다. 그런 일이 생기면 소리 질러 답해야 한다고 내게 알려주지 않았기 때문이다.


걷는 법을 배우는 과정도 만만치 않았다. 나는 걸음이 늦었다. 뒤늦게 걷기 시작했다. 부모님이 팔을 붙들어주었지만 난 허공에 다리를 쳐들고 휘저을 뿐이었다. 여러 움직임을 동시에 하지 못하니 걸을 수 없었다. 가족 영상에는 그런 장면이 가득하다. 지금도 나는 이상하게 걷는다.


어떤 틀에도 들어맞지 않는 아이

“어린이는 학교에서 친구들과 함께 있을 때 즐거워한다.” 참으로 뿌리 깊은 믿음이다. 그런데 자폐를 지닌 아동에게는 더없이 불길한 믿음이기도 하다. 어른들은 등교를 거부하는 아이에게 학교에 가면 친구들을 만날 수 있다는 말로 설득하지 않는가? 부모님은 내게 그런 말을 하지 않았지만, 만약 그랬다면 내 화만 돋우었을 것이다.


‘친구’라는 단어는 대체 무엇을 뜻할까? 자폐 아동에게는 그 ‘친구’들이 자기를 흠씬 두들겨 패는 작은 괴물들이라는 사실은 굳이 말할 필요도 없다.


이런 믿음과 관련해 학교생활의 연장이면서 최고의 순간은 바로 쉬는 시간이라고들 한다. 하지만 누군가에게는 그야말로 악몽이다. 귀를 찢는 듯한 종소리가 울린다. 소리가 그치자마자, 아니 그보다 훨씬 전에 이미 아이들은 놀고 싶어서 소리를 지르고 뛰어다니며 쏜살같이 밖으로 나간다. 나는 공놀이를 할 줄 모른다. 사실 내겐 공놀이가 아니라 아이들이 하는 ‘이상한 게임’으로 보인다. 공식적인 규칙과 그때그때 정해지는 실행법이 아무렇게나 뒤섞여 있기 때문이다. 게다가 그 놀이를 하려면 공의 궤적을 3차원으로 시각화하는 판단력과 섬세한 운동 기능 등 상당한 신체 능력을 지녀야 하는데, 이는 지금까지도 내게 어려운 일들이다.


부모님은 물건을 제대로 잡지 못하는 내게 왼손만 두 개 있어서 그렇다고 말하곤 했다. 아이들은 축구장에서 그보다 훨씬 못된 말을 했다. 하지만 가장 기운 빠지는 일은 아마도 그것을 하는 의미를 파악하지 못한다는 사실일 것이다. 그 축구라는 게임을 하는 이유가 대체 무엇인가? 금세 더러워지는 공을 차서 이런저런 방향으로 밀어내는 이유가 뭐란 말인가?


자폐를 지닌 아동 대부분은 걸음걸이와 전반적인 행동 방식이 조금 이상하다. 내가 교실에서 선생님의 지시에 자기들과 같은 방식으로 반응하지 않는다는 사실을 아이들은 금세 알아챘다. 아이들은 관찰력이 뛰어난 터라 그런 식으로 빠르게 학급 친구에 대한 판단을 내린다. 집단 내에서 누가 인기가 많고 사랑받을지, 누가 외톨이가 될지도 빠삭하게 꿰고 있다. 어른들의 사회도 비슷한데, 단지 ‘세련된 위선’이 더할 뿐이다. 직접 때리는 대신 배제하는 어떤 말이나 태도를 활용해서 엇비슷한 결과가 생긴다. 그러니 내가 단체 놀이에 끼는 건 어림없었다. 나도 할 수 있는 놀이가 있었지만, 아이들은 내가 배제되는 상황에 더 익숙해 있었기에 가끔씩 나를 선심 쓰듯 끼워줄 뿐이었다.


자폐증을 지닌 어느 성인 남자가 내게 고백했다. “어렸을 때 새 학급에 가면 가장 먼저 학생 수를 셌어요.” 얼핏 드는 생각처럼 자폐 아동의 괴벽일까? 아니다. 그는 단지 학생 수의 총합이 짝수인지 홀수인지 알고 싶었을 뿐이다. 만약 홀수라면 그는 이렇게 생각했다. ‘이런, 둘씩 짝지어 하는 활동이 있으면 나는 혼자겠군.’


이 이야기를 하는 이유는, 흔히 가진 선입관과 달리 자폐 아동이 집단에 들어가려고 얼마나 실질적인 노력을 기울이는지 알려주기 위해서다. 그 아이가 혼자이고 싶어서, 또는 자기만의 세계에 갇혀 있기 때문에 혼자라고 믿어서는 안 된다. 그런 생각을 하면 벌어지는 모든 상황에 대한 책임을 장애인에게 지우기 십상일 테지만 이는 현실과 다르다.



자폐증이란 무엇인가?

시선 처리와 감정 읽기의 어려움

자폐를 지닌 사람에게 가장 힘든 요소 중 하나는 아마도 시선의 움직임과 작용일 것이다. 각 언어에는 시선과 연관된 무수한 표현이 있다. ‘얼음처럼 차가운 시선을 지녔다’라거나 ‘눈총을 주다’라는 표현은 무엇을 뜻하는가? 자폐인이 그런 표현을 이해하지 못한다고 해서 비웃지 마라. 당신은 그 뜻을 정확하게 설명할 수 있는가? 어떤 점에서 눈이 ‘총’인가? 그에 대해 물으면 돌아오는 대답은 대부분 이런 식이다. “그냥 느껴지고 보여서 분명히 알 수 있는 거야.”


하지만 자폐인에게 그런 일은 분명하지 않다. 그러니 시선을 둘러싸고 온갖 사회적 오해가 생길 수 있다는 사실을 상상하기란 어렵지 않다.


자폐를 지닌 사람들은 대체로 다른 사람의 눈을 똑바로 쳐다보는 걸 어려워한다. 그래서 시선이 이상한 곳으로 향할 수 있으며, 그런 이유로 무례하거나 이중성을 지녔다고 오해받는 일이 흔하다.


하지만 사실은 그렇지 않다. 자폐를 지닌 사람은 누군가에게 등을 돌리고 말하기도 한다. 이는 사회적으로 대단히 무례한 행동이라고 간주되지만, 그들은 절대 그런 의도로 한 행동이 아니다. 그렇다고 대화 상대방을 바라보아야 한다는 규칙이 절대적인 것은 아니어서, 상대방을 계속 뚫어져라 쳐다보는 것 또한 예의에 어긋난 행동으로 간주된다.


그토록 복잡한 상황에 직면하면 어떻게 해야 한단 말인가? 나는 이와 비슷한 내용이 설명된 경영 서적을 읽었다. 거기에는 상대방의 두 눈 사이 어느 지점을 정해 20초 정도 바라본 다음 시선을 떨구고, 잠시 후 어느 지점을 정해 20초 정도 바라본 다음 시선을 떨구고, 잠시 후 다시 그 지점을 바라보라는 요령이 적혀 있었다. 경험에 따르면 이 방법은 잘 통하지만, 취업 면접이 한창 진행되는 중에 20초가 지났는지 확인하려고 손목시계를 쳐다보고 있을 수도 없는 노릇이다. 삶은 참 복잡하고 때로는 희극적인 면을 띄는 것 같다.


감각 때문에 생기는 문제

자폐증을 지닌 사람은 빛이나 소리에 과민하다. 그래서 자주 어려움을 겪는다. 자폐증을 지닌 어린이가 견딜 수 있는 조명 시설을 갖춘 방이 얼마나 될까? 특히 형광등은 문제가 될 수 있다. 빛에 민감한 사람은 형광등이 깜빡이는 것을 감지할 수 있는데, 이것이 지속되면 매우 괴롭다. 사람들이 화창하다고 부르는 시기가 오면, 햇빛은 자폐 아동뿐 아니라 성인에게도 대단한 문제를 야기한다. 햇살 때문에 생긴 밝은 네모 무늬가 탁자에 그려져 있는데 어떻게 제대로 생각하고 일하며 교사의 말을 들을 수 있단 말인가? 몇 분 동안 노력해보지만 곧 쩔쩔매게 된다.


어렸을 때 나는 다른 아이들보다 촉각과 미각, 질감을 더 예민하게 느꼈던 것 같다. 그래서 옷을 많이 껴입을 수 없었다. 지금도 옷장에는 수년간 입어서 익숙해진 옷들만 걸려 있다.


“자폐인=지적장애”는 아니다

자폐인이 보이는 지적장애 문제는 이미 오래전부터 알려져 있지만, 그에 대한 연구는 아직도 충분하지 않다. 자폐인에게도 지적장애가 나타날 수 있다. 하지만 자폐증이 단 한 가지 형태로만 알려져 있었고 그것을 무조건 지적장애와 연관시키던 시절에 사람들이 거론한 수치보다는 비율이 낮을 것이다.


자폐증은 지적장애와 함께 나타날 수도 있고 아닐 수도 있다. 탈모증이나 콩팥 기능 부족, 신체의 특수한 증상이 자폐증과 동시에 나타날 수 있거나 아닌 것처럼 말이다. 자폐증과 지적장애 사이의 연관 관계는 필연적이지도, 확실하지도 않다.


자폐를 지닌 사람이 보이는 지적장애를 어떻게 평가해야 할까? 일부 지능지수 검사에 따르면 나는 심각한 지적장애를 가졌다. 만약 간단하다고 생각되는 질문들과 유아학교 아동이 갖추어야 할 능력으로 나를 평가한다면, 내 점수는 형편없을 것이다. 그 점수를 기준으로 삼는다면 초등학교 입학도 장담할 수 없다.


내가 어렸을 때 학교에서 선생님들은 나의 지적 능력 결핍과 성공 가능성 부족, 내가 바로 몇 주 후면 겪게 될 실패에 대해 온갖 이야기를 늘어놓았다. 유아학교 5세반에 다닐 때, 나는 학급 꼴찌였고 할 줄 아는 게 아무것도 없었다. 신발 끈도 못 묶었고, 색칠도 못했으며, 그림도 못 그렸다. 굴렁쇠를 굴리지 못한 건 물론 쉬는 시간에 반 친구들과 싸울 줄도 몰랐다. 나는 겨우 걸었고 계단은 아주 힘겹게 올라갔다.


누구에게나 상동증이 있다

나는 나이가 더 어렸을 때 여러 유형의 상동증이 있었다. 지금은 그럼 증상이 조금 덜해서 다행이지만, 여전히 몇 가지는 남아 있다. 몇 년 전만 하더라도 나는 몇 시간 동안 계속 손뼉을 칠 때가 있었다. 내 앞에 있는 사람이 무언가 흥미로운 이야기를 하면 더 빠르게 손뼉을 쳤다. 그런 행위를 상대방이 불편하게 여길 수 있다는 걸 몰랐다. 전보다는 덜하지만 집에서는 아직도 그렇게 한다. 사람들 앞에서 나는 손을 흔들지 않으려고 애쓰고, 실수하지 않으려고 조심한다. 기뻐서 펄쩍 뛴다는 말은 내게 비유가 아니라 실제 상황이다. 그런 일을 다른 사람들 앞에서 공공연히 또는 밤늦게 아래층 이웃이 잠을 자고 있을 때 하지 않으려고 애쓴다.


그렇다 해도 자폐인만 상동증을 지닌 게 아니다. 비자폐인의 상동증은 단지 더 자연스럽다고 간주되며 사회적으로 쉽게 용인될 따름이다. 이런 면은 대중교통을 이용할 때 사람들을 살펴보면 알 수 있다.


자폐인의 풍부한 감정

아주 오래된 어떤 이론에 따르면 자폐인에게는 정서적인 삶이 아예 없거나 매우 빈약하다고 한다. 이에 대한 치료법으로 자폐인의 정서적인 삶을 재창조하려는 시도가 이루어졌다. 나는 이런 시도가 심각한 오류라고 확신한다.


인간은 누구나 그렇듯 자폐를 지닌 사람도 자신만의 정서가 있다. 단 그들의 정서는 남들과 다른 형태로 표현될 수 있다. 어떤 사람은 웃고 울고 소리를 지른다. 하지만 자폐인은 조금 달리 감정을 드러내기도 한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 앞에 있는 사람이 어떤 감정을 ‘자신과 똑같은 방식으로’ 표현하지 않으면, 그가 우리와 같은 감정을 느끼지 않는다고 말하고 싶은 유혹을 받는다.


나 역시 상당히 풍부한 감정을 느끼며 살아간다고 생각한다. 서로 중첩되거나 공존하는 여러 감정을 경험한다. 나와 자주 만났던 사람들은 처음 만나는 사람보다 내 행동을 더 잘 판독할 것이다. 나는 자폐를 지닌 젊은 시인들을 만날 때, 그들이 자신의 글에 불어넣은 풍성한 감정들을 보며 놀랄 때가 많다. 위대한 작가들, 위대한 화가들의 약력을 읽을 때면 거기에서 자폐인이 경험하는 요소를 너무도 많이 찾아볼 수 있어서 그들에 대해 여러 궁금증이 생긴다.



약물 중독 그리고 내가 만난 새로운 세계

내가 사랑한 책들

사람들은 어째서 책을 좋아할까? 단지 내용 때문만은 아니다. 출판사들은 사람들이 거의 읽지 않을 게 분명한 책들도 출간한다. 예를 들어 아일랜드의 공항에서 제임스 조이스의 두꺼운 책들을 사간 사람들 중에서 과연 실제로 읽은 사람이 몇이나 될까?


내 경우는 책 한 권을 판단할 때 종이의 종류, 색깔, 질감 같은 내용 외 요인들을 고려한다. 특히 냄새가 중요하다. 나는 어떤 책의 냄새를 맡지 않으면 그것을 진지하게 읽을 수 없다. 다른 사람들 앞에서 공공연히 그런 행동을 해서는 안 된다고 들었기에 이제는 숨어서 책 냄새를 맡는다. 책 제목과 저자는 금방 잊어버리지만, 종이의 냄새와 질감, 종이 재단 방식, 완벽하게 똑바르게 재단되었는지 아니면 약간 오돌도톨하게 재단되었는지, 표지의 색깔은 무엇인지 등은 상당히 잘 기억한다. 내가 보기에는 저자의 이름보다 이러한 것들이 책의 정체성을 만들어내는 진정한 특징이다.


나는 나이가 꽤 들었을 때까지 책은 인간 저자가 쓴 것이 아니라 돌멩이와 강이 존재하듯 자연에 주어진 어떤 정보라고 생각했다. 나는 어떤 사람이 특정한 시기에 책을 썼다는 사실을 깨닫지 못했다.


책은 에너지를 불어넣고 생각을 제자리에 되돌려 사회적인 상호작용을 시도하게 만든다. 물론 이것이 책의 궁극적인 목적도 아니고 독자가 책을 읽으면서 계속 그런 생각만 하지도 않겠지만, 이런 사실은 독서에 매력을 더할 수 있다. 당신이 산딸기 먹는 것을 좋아한다고 가정해보자. 그렇다고 당신이 그 외의 어떤 사회적 상호작용도 하지 않는다는 뜻은 아니다. 자폐를 지닌 사람도 마찬가지다. 도서관을 좋아하면서 동시에 몇몇 친구들과 접촉할 수 있다(적어도 그러길 희망한다). 사람들이 믿는 것과 달리, 독서는 타인을 손쉽게 발견하는 통로가 된다. 내가 그랬듯 겉으로 보기에는 아무것이나 닥치는 대로 읽는 것 같지만 그 과정을 통해 사고의 지평을 넓혀가는 것이다.


물론 클럽게 가도록 코칭을 받는 것이 어느 잊힌 저자의 먼지 풀풀 날리는 책 한 권을 읽는 것보다는 사회화 측면에서는 훨씬 더 효과적으로 보인다. 하지만 독서는 사회화에 장기적인 도움을 준다. 예를 들어 당신은 책을 읽음으로써 어떤 나라의 수도를 알게 되고, ‘각하’를 사용해야 할 때 ‘씨’를 사용하는 말실수를 저지르지 않을 것이며, ‘몽 콜로넬’이라고 말해야 할 때 ‘콜로넬’이라고 하지 않을 것이다(프랑스의 군대 규정에 따르면 대령이 남성일 때에는 몽 콜로넬, 여성일 때에는 콜로넬이라 칭해야 한다. 여기에서 ‘mon’은 남성에 대한 존칭인 ‘monsieur’의 약자다).


쥘 베른 작품의 등장인물은 대부분 조금씩 특이하다. 물론 좋은 의미다. 그리고 쥘 베른은 과학에 천착하는 매우 독특한 세계관, 또 여성성이 부수적이거나 거의 전무한 세계관을 지녔다. 얼핏 보기에 그의 책들은 사회적 상호작용을 배우는 데 적절한 도구가 아닌 듯하지만, 주요 수단은 될 수 있다. 그의 책 몇 권은 내게 깊은 인상을 주었으며 나는 그의 책들을 다른 언어로 읽고 또 읽었다. 번역가가 원서를 다른 언어로 옮길 때 어려운 장애물을 어떻게 교묘히 피해갔으며, 작품의 출발 언어에 담긴 문화를 다른 문화권의 언어로 어떻게 재현하고자 시도했는지 알아보는 일이 무척 재미있었다.


내가 그 책들을 첫 페이지부터 마지막 페이지까지 속속들이 알고 있다고 말할 수는 없지만, 어떤 구절은 종종 통째로 떠오르곤 했다. 내게 『지구 속 여행』은 단어들 속으로 떠나는 여행이었다. 책을 읽으면서 쥘 베른이 왜 어떤 때에는 마침표를 쓰고 다른 때에는 쌍반점(;)을 썼을지 궁금해했다. 한 문장을 두고 그런 식으로 궁리하며 몇 시간을 보낸 적도 있었다. 내가 시간을 허비한 것일까? 그랬을지도 모른다. 그때 한 생각들을 전부 잊어버렸으니 더 그렇게 느낄 수도 있다. 다행스럽게도 어린 시절에 하는 일들이 이른바 계산적인 의미에서 유용한 경우는 드물다. 여성의 매력에 푹 빠진 이 방종한 인물조차 결국은 자신의 젖먹이 신분을 충분히 활용하지 못했다며 요란스레 후회한다. 이처럼 인간은 실패와 게임을 겪으며 성장하는 법이다.



나는 자폐를 잘 모른다

자폐인의 비율은 얼마나 될까?

자폐증은 특이하게도 분류법이 유동적일 뿐 아니라, 걸리는 비율도 제각각이다. 이는 단지 소수점 이하의 차원이 아니다. 수십 년 전부터 1,000명 중 한 명 꼴이라는 낮은 비율부터 매우 높은 비율까지 온갖 수치가 제시되었다. 150명 중 한 명 혹은 166명 중 한 명 선에서 어떤 합의점이 정해졌으나 이것도 오래가지 못할 것이다. 주로 영미권 단체들이 이미 자폐인 비율은 약 80명 중 한 명으로 높이려고 압력을 가하고 있다. 수치는 특정 연구에서 나오고, 이른바 특정 ‘파벌’에 의해 활용된다.


자폐증에 걸리는 비율이 이런 식으로 높아지는 현상은 확실히 불가사의하다. 가장 널리 퍼진 설명에서는 오래된 통계 자료에서 자폐증을 제대로 감안하지 않아 그 수가 극히 적게 집계되었다는 주장을 동원한다. 하지만 최근 몇 년간 여러 연구에서 백신의 영향부터 다른 종류의 오염에 이르기까지 여러 단서를 제시해가며 자폐증이 생기는 비율을 높이는 방법이 탐색되었다. 프랑스에서는 현재 보편적인 기준으로 제시될 만한 연구가 없는 실정이다.


나는 그 주제를 다루는 여러 토론회에 청중으로 참석했다. 나는 그러한 수치가 핵심적이라고 생각하지 않는다. 내가 보기에 그 문제는 자폐증의 실상보다는 분류 체계에 전제된 내용과 기준들을 반영한다. 자폐증은 인위적으로 구축되는 의학적 또는 사회적 범주로서 현실을 불완전하게 반영할 수밖에 없다. 우리가 정신활동으로 하는 분류법에 현실도 맞장구를 친다는 명제를 치밀하게 증명해보이지 않는 한, 그런 주장을 믿을 이유는 전혀 없기 때문이다.


자폐증의 유전적, 사회적 또는 다른 원인에 대해서도 마찬가지다. 다른 학문 분야도 그렇겠지만 유전학과 사회학은 그 자체로 존재하지는 않으며, 매우 서서히 이루어진 학부들 사이의 조정, 연구자들과 여러 정치적 쟁점들 사이에서 발생한 무수한 경쟁에서 생겨났다. 어째서 우리 대학들이 정한 비이성적이고 유동적인 구분선을 현실이 따라가야 한단 말인가? 모든 것이 상대적이라고 주장하려는 게 아니라, 우리의 지식을 사용하고 그 한계를 인정할 때 신중해야 함을 말하고 싶을 따름이다.



맺음말 대신 쓰는 말

하나의 설명으로 가둘 수 없는 존재

가끔 내가 ‘자폐증을 지닌 사람’이라는 표현을 사용하면 사람들은 왜 그렇게 말하냐고 나를 비난한다. 사람이 시계를 지니듯 자폐증을 ‘지닐’ 수는 없으며, 그냥 자폐‘인’이라는 것이다. 그래서 나는 조금 도발하려는 의도에서 ‘자폐증을 지닌’이라는 표현을 다른 표현과 더불어 계속 사용한다. 내가 여행 가방을 지니고 다니듯 그다음 날에 자폐증을 집에다 놔둘 수 있다고 믿어서가 아니라, 그럴 수 있다는 가능성을 단순히 암시함으로써 상황이 어떻든 사람은 자신의 소유를 넘어서는 존재라는 사실을 드러내기 위해서다.


결국 인간은 매우 복잡한 존재라고 생각한다. 단 하나의 기준으로 인간을 묘사할 수는  없다. 그 때문에 나는 자폐증이라는 영역 안에 내 모든 것을 욱여넣을 수 없다. 자폐증은 내 신장이 약 195센티미터라는 것과 같은 내 여러 특징 중 하나다. 자폐증을 기술하는 유일한 기준표가 존재한다 해도 그것으로는 나의 성격도, 그 누구의 성격도 기술할 수 없다. 나는 인간을 시계와 같은 메커니즘으로 축소하려는 이론들을 경계한다. 인간은 그보다 더 복합적인 존재이고 계속해서 변화한다. 인간을, 우리 자신을 어떤 하나의 설명에 가두지 말자. 그렇게 한다면 우리는 정말 정신이 이상해질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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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 정보는 도서의 일부 내용으로만 구성되어 있으며, 보다 많은 정보와 지식은 반드시 책을 참조하셔야 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