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의 질문

   
우찬제
ǻ
열림원
   
19000
2023�� 05��



■ 책 소개


우리 시대의 고민과 고전적 지혜 및 성찰적 사유 사이의 대화가 빚어내는 질문들은 모두 6부로 구성되었다. 1부 ‘여기는 아닌, 지금은 아닌, 나는 아닌?’에서는 지속가능성과 생명 평화론, 기후 위기 등과 관 련되는 질문들을, 2부 ‘사막에서 우물의 노래를’에서는 경쟁이 강조되는 신자유주의 분위기를 거슬러 서, 그 피로사회를 넘어 어떻게 웰빙의 가능성을 모색할 수 있을 것인가, 하는 질문들을 펼쳤다. 3부 ‘미 친 상상으로 네잎 클로버를’에는 인간적이고 인문적인 것의 가능성 및 창의적 발견과 수행적 진화를 어 떻게 추구할 것인가, 하는 질문들이, 4부 ‘절망의 산에서 희망의 돌멩이를’에는 절망을 심하게 앓는 시 절에 어떻게 희망을 배울 수 있고 희망의 추구할 수 있을 것인가, 하는 질문들이 망라되어 있다. 또 5부 ‘무의미의 의미와 환대’에서는 삶의 의미에 대한 탐문과 인간성 회복을 위한 성찰을 위한 질문들을, 그 리고 6부 ‘나는 질문한다, 고로 존재한다!’에서는 책과 책 읽기와 관련된 다양한 사유 및 책의 질문과 관 련한 근원적 지혜를 열어나가기 위한 질문들을 담았다.

■ 저자 우찬제
문학비평가. 충주에서 태어나 서강대 경제 학과를 졸업하고 같은 대학 대학원 국문학과에서 「현대 장편소설의 욕망시학적 연구」로 문학박사 학위를 받았다. 1987년 중 앙일보 신춘문예에 평론 「감금의 상상력과 그 소설적 해부학」이 당선되어 비평 활동을 시작했다. 현재 서강대학교 국문학과 교수로 재직 중이다. 미국 아이오와대학(2004), 캐나다 브리티시콜럼비아대학(2011) 방문 교수를 지냈다. 문학비평과 수사학 분야를 연구하며, 『세계의 문학』 『오늘의 소설』『포에티카』『HITEL문학관』편집위원과 『문학과사회』 편집동인을 역임했고, 대산문학상·팔봉비평문학상·김환태평론문학상·소천이헌구비평문학상 등을 수상했다.

저서로 『욕망의 시학』(1993), 『상처와 상징』(1994), 『타자의 목소리-세기말 시간의식 과 타자성의 문학』(1996), 『고독한 공생-밀레니엄 시기 소설 담론』(2003), 『텍스트의 수사학』(2005), 『프로테우스의 탈주』(2010), 『불안의 수사학』(2012), 『나무의 수사학』(2018), 『애도의 심연』(2018)과 공역서 『서사학 강의』(2010), 편저 『오정희 깊이 읽기』(2007), 공편저 『한국문학선집: 소설 2』(2007), 『4.19와 모더니티』(2010), 『우리 안의 파 시즘 2.0』(2022), 『#생태_시』(2022), 『#생태_소설』(2022) 등이 있다. 최근에는 주로 기후 침묵을 넘어 서서 기후 행동으로 나아가기 위한 환경 인문학적 질문과 실천을 모색하고 있다.

■ 차례
책머리에 · 5
아끼는 마음[愛] 없이 아낄[儉] 수 있을까? · 21
1 여기는 아닌, 지금은 아닌, 나는 아닌?
: 헬레나 노르베리-호지, 『오래된 미래: 라다크로부터 배운다』
그는 왜 나무를 심었을까? · 24
: 장 지오노, 『나무를 심은 사람』
철쭉 속의 무한 우주, 그 ‘알지 못함’의 비밀은? · 27
: 웬델 베리, 『삶은 기적이다』
생물 다양성을 어떻게 추구할까? · 30
: 제인 구달, 『희망의 자연』
가난한 문명인과 풍요로운 미개인 사이, 우리의 선택은? · 35
: 헨리 데이비드 소로, 『월든』
어떻게 다양성 속의 조화를 이룰까? · 39
: 제러미 리프킨, 『유러피언 드림』
지속 가능성 혁명은 가능한가? · 43
: 데니스 L. 메도즈 외, 『성장의 한계』
피에타상을 빚어낸 대리석 파편들은 다 어디로 갔을까? · 48
: 지그문트 바우만, 『쓰레기가 되는 삶들』
“여기는 아닌, 지금은 아닌, 나는 아닌”, 과연 그럴까? · 51
: 하라트 벨처, 한스-게오르크 죄프너, 다나 기제케 외, 『기후 문화』
어떻게 생기 있는 심령을 성찰할까? · 55
: 에머슨, 「미국의 학자」
나무처럼 아름다운 시가 있을까? · 58
: 조르주 페렉, 『잠자는 남자』
우리는 지금 무엇을 하고 있는가? · 61
: 『길가메쉬 서사시』
폭탄 돌리기로부터 자유로운가? · 64
: 한스 요나스, 『책임의 원칙』
나는 내 시간의 주인일까? · 67
: 레온 크라이츠먼, 『24시간 사회』
걷는 발의 뒤꿈치에서 생각이 나올까? · 70
: 이브 파칼레, 『걷는 행복』
백척간두에서 진일보할 수 있을까? · 74
: 니코스 카잔자키스, 『그리스인 조르바』
평화에로 초대받을 수 있을까? · 77
: 틱낫한, 『틱낫한의 평화로움』

2 사막에서 우물의 노래를
플랜 Z 시대의 사막에서도 우물을 발견할 수 있을까? · 83
: 생텍쥐페리, 『어린 왕자』
피로스의 승리는 저주였을까? · 86
: 『플루타르코스 영웅전』
프로메테우스와 독수리의 관계는? · 89
: 한병철, 『피로사회』
‘하지 않는 것’을 선택할 수 있을까? · 93
: 허먼 멜빌, 「필경사 바틀비」
그대, ‘공짜 점심’을 꿈꾸는가? · 96
: 가 알페로비츠, 루 데일리 공저, 『독식비판』
새로운 사회계약은 가능할까 · 99
: 제러미 리프킨, 『노동의 종말』
그레고르 잠자는 왜 벌레로 변신했을까? · 102
: 프란츠 카프카, 『변신』
희망을 견인할 공정한 경제 시스템은 어디에? · 106
: 아서 밀러, 『세일즈맨의 죽음』
비밀을 사랑하는 돈은 얼마나 위험한가? · 109
: 게오르그 짐멜, 『돈의 철학』
적당히 재능 있는 사람은 어떻게? · 112
: 로버트 H. 프랭크, 필립 쿡, 『승자독식사회』
최소 소비로 최대 웰빙에 이를 수 있을까? · 115
: 『법정스님의 무소유의 행복』

3 미친 상상으로 네잎 클로버를
사람은 무엇으로 사는가? · 121
: 톨스토이, 『사람은 무엇으로 사는가』
인간은 노력하는 한 방황하기 마련일까? · 125
: 괴테, 『파우스트』
풍경을 통해 나를 재발견할 수 있을까? · 128
: 괴테, 『이탈리아 기행』
겉만 보고 선택하지 않을 수 있을까? · 131
: 셰익스피어, 『베니스의 상인』
‘정다운 무관심’은 어떻게 가능할까? · 134
: 알베르 카뮈, 『이방인』
살아 있다는 것은 그 얼마나 기적인가? · 137
: 셰익스피어, 『리어왕』
지도 없는 항해는 가능할까? · 141
: 다니엘 디포, 『로빈슨 크루소』
젊은 영혼의 대장간에서 무엇을 벼릴 것인가? · 144
: 제임스 조이스, 『젊은 예술가의 초상』
인간은 타고난 수수께끼 해결사일까? · 147
: 오르한 파묵, 『새로운 인생』
미친 상상으로 네잎 클로버를 구할 수 있을까? · 150
: 세르반테스, 『돈키호테』
나는 내 운명의 주인인가? · 154
: 최인훈, 『화두』
편견의 우상으로부터 자유로울 수 있을까? · 157
: A. G. 가드너, 「모자 철학」
호모 사피엔스, 그 얼마나 기기묘묘한가? · 160
: 박경리, 『토지』
손흥민 선수는 울보인가? · 163
: 심노숭, 『눈물이란 무엇인가』
진정한 사모곡은 가능할까? · 168
: 이청준, 『축제』
나의 스토리텔링 지수는? · 171
: 이청준, 『인문주의자 무소작씨의 종생기』
어떻게 마지막 열매들을 익게 할 것인가? · 175
: 라이너 마리아 릴케, 「가을날」
명사형 사고에서 동사형 사고로 전환할 수 있을까? · 178
: 에리히 프롬, 『소유냐 존재냐』
바보들의 항해는 계속될까? · 181
: 제바스티안 브란트 엮음, 『바보배』
행복 창조의 비밀은 무엇일까? · 185
: 아리스토텔레스, 『니코마코스 윤리학』
진화를 위한 몰입은 얼마나 즐거운가? · 188
: 미하이 칙센트미하이, 『몰입의 즐거움』
나잇값의 비밀은? · 191
: 로마노 과르디니, 『삶과 나이: 완성된 삶을 위하여』

4 절망의 산에서 희망의 돌멩이를
좋은 담이 좋은 이웃을 만들까? · 197
: 로버트 프로스트, 「담장 고치기」
절망의 산에서 희망의 돌멩이를 캐낼 수 있을까? · 200
: 킹, 「나에게는 꿈이 있습니다」
공평한 관찰자는 실종되었을까? · 204
: 애덤 스미스, 『도덕감정론』
열린 법의 문 안으로 들어갈 수 있을까? · 207
: 카프카, 「법 앞에서」
최선의 나라에서 살아볼 수 있을까? · 211
: 플라톤, 『국가』
비밀을 사랑하는 사람은 얼마나 위험한가? · 215
: 엘리아스 카네티, 『군중과 권력』
2016년 겨울, 촛불의 꿈은? · 218
: 가스통 바슐라르, 『촛불의 미학』
‘벌거벗은 생명’을 어떻게 변론할 수 있을까? · 221
: 조르조 아감벤, 『호모 사케르』
기회의 평등을 위한 정의는 어떻게 작동하는가? · 225
: 존 롤즈, 『정의론』

애도의 시간을 건너 살아있는 진짜 노래를 부를 수 있을까? · 228
: 자크 프레베르, 『장례식에 가는 달팽이들의 노래』
여전히 4월은 가장 잔인한 달인가? · 231
: 텐도 아라타, 『애도하는 사람』
나는 피해자이기만 할까? · 235
: 이청준, 『흰옷』
문제는 희망을 배우는 일인가? · 238
: 에른스트 블로흐, 『희망의 원리』

5 무의미의 의미와 환대

고귀한 복수는 가능한가? · 245
: 도스토예프스키, 『죄와 벌』
환대는 없는가? · 248
: 데리다, 『환대에 대하여』
삶이 속일지라도 슬퍼하거나 노하지 않을 수 있을까? · 252
: 푸슈킨, 「삶이 그대를 속일지라도」
뱀장어처럼 미끄러우면 쉽게 출세할 수 있을까? · 255
: 발자크, 『고리오 영감』
나의 회복력 지수는? · 258
: 캐런 레이비치, 앤드류 샤테, 『회복력의 7가지 기술』
무의미의 의미는? · 262
: 박민규, 『삼미 슈퍼스타즈의 마지막 팬클럽』
실어증을 어떻게 치유할 것인가? · 265
: 김중혁, 「엇박자 D」
행복을 기다려야만 하는 지겨움을 어쩌면 좋을까? · 269
: 김애란, 「호텔 니약따」

우리, 용서라는 말을 들을 수 있을까? · 272
: 이청준의 「벌레 이야기」
‘우리’라는 말잔치를 위한 진화의 방향은? · 275
: 폴 에얼릭, 로버트 온스타인, 『공감의 진화』

6 나는 질문한다, 고로 존재한다!

나는 질문한다, 고로 존재한다! · 283
: 파블로 네루다, 『질문의 책』
대화로 세계의 향연을 열 수 있을까? · 286
: 미하일 바흐친, 『도스또예프스끼 시학의 문제들』
‘이고 메고 지고 업고’ 가는 한국인은 누구인가? · 290
: 김열규, 『한국인의 자서전』
어떻게 내 안의 아레테를 열어나갈 수 있을까? · 293
: 플라톤, 『프로타고라스』
도서관에 없는 게 있을까? · 296
: 보르헤스, 「바벨의 도서관」
우리가 읽은 것이 우리일까? · 300
: 스티븐 로저 피셔, 『읽기의 역사』
책 속에 무엇인들 없겠는가? · 304
:『주자어류(朱子語類)』

 




책의 질문


여기는 아닌, 지금은 아닌, 나는 아닌?

철쭉 속의 무한 우주, 그 ‘알지 못함’의 비밀은? 웬델 베리, 『삶은 기적이다』

“한 알의 모래에서 세계를 보고/ 한 송이 들꽃에서 천국을 보라.” 신비로운 체험을 시로 형상화했던 영국 시인 윌리엄 블레이크의 「순수의 전조」부분이다. 정말 그렇게 볼 수만 있다면 얼마나 좋으랴. 한 순간에서 영원을 보고, 그 무한의 우주를 체험하고 터득할 수 있다면 참으로 황홀하겠다. 그렇지만 그런 황홀경이 실제 삶에서 계속 미뤄질 수밖에 없기에, 일련의 실망이나 절망 속에서도 다시 도전하는 게 아닐까.


흔히 ‘대지의 청지기’로 불리는 미국의 농부이자 시인, 문명 비평가인 웬델 베리는 과학 기술에 근거한 현대 문명을 심각하게 비판한다. 그가 보기에 과학 기술은 객관적 앎의 척도를 제공하기보다 존재하는 생명을 제대로 못 보게 하는 경우가 많다. 가령 모래를 알기 위해 미분화하여 분석, 종합하지만 정작 모래에서 세계를 볼 수 있는 거룩함의 경지에는 이를 수 없다.


과학적으로 분석할 때 들꽃의 신비도, 손바닥 안의 무한도 터득하기 어렵다. 그 이유는 피조물 자체의 생명성보다 과학적 환원주의로 치닫기 때문이다. 『삶은 기적이다』에서 베리는 그 위험성을 논한다. 피조물을 대하는 태도가 경의에서 인식으로 바뀐 것이나, 자연에 대한 인간의 관계가 “청지기에서 절대적 소유자, 관리자, 기술자로 바뀐 것”, 그리고 생명의 “‘거룩함(holy)을 전체성(holistic)’으로 바꾼 것”도 위험하다고 지적한다. 소박한 듯 심원한 그의 얘기를 들어보자.


“생명은 우리가 향유하는 것이지만, 우리 너머에 있다. 어떻게 해서, 왜 우리가 생명을 누리게 되었는지 우리는 알지 못한다. 생명에, 그리고 우리 자신에게 무슨 일이 일어날지 우리는 알지 못한다. 그것은 예측할 수 없다. 우리는 생명을 파괴할 수는 있지만 만들 수는 없다. 생명은 통제될 수 없다. 생명에 대한 통제는 환원주의와 함께 엄청난 파괴의 위험성을 내포한다.”


그는 과학적으로 모든 것을 설명하고 조정할 수 있다는 생각은 타당하지 않은 현대의 미신이라고 말한다. ‘알지 못함’의 심연을 헤아리지 못한 채 ‘앎’으로 포장되는 사례가 많은 까닭이다. 그가 보기에 삶은 온갖 ‘알지 못함’으로 넘쳐나는 신비로운 것이고, 과학적으로 분석 가능한 것 이상으로 훨씬 기적적인 것이다. 그런 성격을 회복하는 일이 긴요하다. 신비롭고 기적적인 삶의 심연으로 내려가기 위해 기준과 목적의 변화를 모색해야 한다. “피조물과 애정으로 가득 찬 세계로, 우리가 살고 있는 기쁨과 슬픔의 세계로, 모든 과정들에 앞서면서 동시에 그 뒤에도 살아남는 세계”로 돌아가기 위해서는 기술적 능력보다는 지역과 공동체의 성격에 근거해 행동해야 하며, 생산성보다는 지역에 대한 적응성, 기술혁신보다는 친미성, 힘보다는 우아함, 소비보다는 검소함 같은 건강하고 타당한 생태 윤리의 지평으로 전환할 필요가 있음을 그는 강조한다. 그래야 다시 절망에 도전할 수 있단다.


인공지능, 로봇기술, 생명과학이 주도할 4차산업혁명의 빛과 그림자에 대한 논란이 분분하다. 기적적인 삶의 신비, 그 ‘알지 못함’의 심연이 그 어두운 그림자에 매몰되지 않도록 지혜를 모아야 하지 않을까 싶다. 마침 벚꽃이 지고 철쭉이 신비롭게 피어나는 계절 아닌가? ‘알지 못함’의 비밀을 향한 질문을 거듭 하게 하는 때 아니던가?



사막에서 우물의 노래를

최소 소비로 최대 웰빙에 이를 수 있을까? 『법정스님의 무소유의 행복』

맑고 향기롭게 살아가기 운동을 전개했던 법정 스님은, 두루 아는 것처럼 평생 ‘무소유’의 철학을 강조하고 실천했다. 인간이 필요 때문에 물건을 소유하게 되지만, 뭔가를 소유하게 되면서 집착하게 되고 자유롭지 못하게 된다고 했다. 무소유의 추구를 통해 영혼의 자유와 해탈을 추구하자며, ‘적은’ 것의 지혜를 설파했다.


“될 수 있는 한 적게 보고, 적게 듣고, 적게 먹고, 적게 입고, 적게 갖고, 적게 말하는 습관을 들여야 합니다. 그래야 참으로 볼 것, 들을 소리, 또 살아야 할 삶을 챙길 수 있습니다. 그렇게 할 때 업의 덫에 걸려들 확률이 줄어듭니다. 이것은 소극적인 생활 태도가 아니라 지혜로운 삶의 선택입니다.”

(『법정스님의 무소유의 행복』)


그러나 대부분의 사람들은 적은 것보다는 많은 것, 큰 것을 선호한다. 그로 인해 생명체의 어머니인 대지를 그 자식들인 인간이 마구잡이로 훼손하는 상황을, 법정 스님은 경계했다. 커다란 생명체인 대지는 단순한 흙더미가 아니다. “흙과 식물과 동물들이 서로 조화로운 순환을 통해서 살아 움직이는 생명의 원천”이다. 그러기에 생태윤리가 절실히 요구된다. 생태 윤리의 실천을 위해 법정 스님은 이런 제안을 했다.


첫째, 색다른 물건을 보고 현혹되어 충동구매를 하지 말자. 둘째, 자동차를 부와 지위의 상징으로 여기지 말고 소형차를 타자. 셋째, 광고는 소비주의를 부추겨 생태적 위협을 가져올 수 있으니, 광고에 속지 말자. 넷째, 꼭 필요한 것만을 갖고 불필요한 것에 욕심을 부리지 말자.


어찌 보면 시대착오적인 제안으로 보일 수도 있지만, 실상 이 넷은 현대 소비사회의 핵심 윤리일 수 있다. 과시 소비, 유행에 따른 대량 소비의 후폭풍은 필연적으로 대량 폐기를 낳는다. 욕망의 조절로 쓰레기를 줄이고 자연과 인간을 동시에 살릴 수 있어야 함을 생각해야 한다. 불교 경제학의 맥락에서 보면 인간 삶의 목적은 “최소한의 소비로 최대한의 웰빙”에 도달하는 것이다. 그것을 위해서는 “적정 생산 틀로 소비를 극대화하려 하지 않고 적정 소비 틀로 만족을 극대화”(문순홍, 『생태학의 담론』)하는 게 중요하다.


무소유의 철학을 강조한 법정 스님은 있는 그대로의 궁극적 존재인 자연 상태를 중시했다. 당장의 편의를 위해서 문명의 이기를 많이 사용한다면 그만큼 자연과 인간이 병들 수 있다고 했다. 그가 보기에 문명은 “서서히 퍼지는 독약”일 수 있다. “문명에서 온 질병을 또 다른 문명으로는 치유할 수 없습니다. 오직 자연만이 그 병을 고칠 수 있습니다. 문명의 해독제는 자연밖에 없습니다.”


미세먼지 문제가 초미의 관심사다. 미세먼지야말로 “서서히 퍼지는 독약” 그 이상임을 우리는 잘 안다. 사정이 결코 녹록치 않기에 그 원인과 근본 처방 문제를 놓고 토론이 많다. 지역과 국가 단위의 법적 제도적 장치들에서 전지구적 차원에서의 생태적 협력에 이르기까지 현안들이 만만치 않다. 그 처방들의 적절성 여부를 따지고 비판하는 것도 중요하지만, 그에 앞서 당장 지금, 여기서, 다른 사람이 아닌, 바로 내가 실천할 수 있는 윤리 감각을 벼리고 실천하는 일도 중요하다. 그런데 아직까지도 많은 사람들은 그 미세먼지의 원인으로부터 자유롭다고 생각하는 것 같다. 그래서 법정 스님을 떠올리게 된다. 작은 것이 아름답다. 적은 것이 맑고 향기롭다.



미친 상상으로 네잎 클로버를

편견의 우상으로부터 자유로울 수 있을까? A. G. 가드너, 「모자 철학」

“우물쭈물하다 내 이럴 줄 알았다.”는 묘비명을 남긴 더블린 출신 극작가이자 소설가 조지 버나드 쇼는 작가로 입신하는 과정에서 고초를 많이 겪었다. 출판사에 수차 원고를 보냈지만 번번히 거절당했다. 그런 수모를 감당하면서도 그는 꿈을 잃지 않고 도전했다. 자기는 열 번 중 아홉은 실패하기에 꼭 열 번 이상 도전한다는 말까지 할 정도였다. 1925년 스웨덴 한림원은 “뛰어난 시적 아름다움에 스며있는 재기발랄한 풍자로 이상주의와 인도주의 사이에 위치한 그의 작품은 감동”에 값한다며 노벨문학상을 수여했다.


풍자에 능했던 그는 때로 독설가로 통하기도 했다. 이런 이야기가 있다. 그는 로댕의 작품을 무턱대고 싫어하는 사람들을 초대해 한 장의 데생을 보여주며, 최근 구한 로댕의 작품이라고 했다. 그러자 손님들은 앞다투어 혹평을 쏟아냈다. 그 제멋대로인 평가들을 다 들은 다음 쇼는 비로소 말했다. 그건 로댕이 아니라 미켈란젤로의 작품이었다고.


네덜란드 출신인 화가 빈센트 반 고흐도 내내 세상의 편견에 시달렸다. 강렬한 색채며 약동하듯 꿈틀대는 마티에르로 치열하게 그렸지만, 거의 인정받지 못했다. 사후 결과적으로 불멸의 화가가 되었지만, 생전에는 그런 예감조차 마련할 수 없을 정도로 드라마틱한 비극의 주인공이었다. 그는 우울증 등으로 고통스럽게 생을 견뎌야 했는데, 그 원인 중 하나가 바로 편견과 인습의 사슬이었다.


「모자 철학」에서 A.G. 가드너는 인간이 저만의 특유한 창구멍으로 세상을 보고 판단하는 경향이 있음을 지적한다. 모자집 주인은 모자를 통해, 치과의사는 치아를 통해, 실업가는 회계실의 열쇠를 통해 보고 판단하기 때문에 편견에 사로잡히기 쉽고, 그러면 진실을 발견하기 어렵다고 말한다.


“우리들은 모두가 인생을 걸어가는 데 각자의 취미나 직업이나 편견으로 물든 안경을 쓰고 가는 것이고, 이웃사람들을 우리 자신의 자로 재고, 자기류의 산술에 의해서 그들을 계산한다. 우리는 주관적으로 보지 객관적으로 보지 않는다. 즉, 볼 수 있는 것을 보는 것이지, 실제로 있는 대로 보는 것은 아니다. 우리가 사실이라는 그 다채로운 것을 알아보려고 할 때에 수없이 실패를 하는 것은 결코 이상한 일이 아니다.”


『사전꾼들』에서 앙드레 지드는 “편견은 문명을 떠받치는 기둥”이라고 말하기도 했지만, 볼테르의 지적처럼 어리석음의 으뜸 되는 것이 편견이다. 그럼에도 인간은 언제나 편견의 우상에서 자유롭지 못하다. 편견을 대문으로 쫓아내면 언제나 창문으로 되돌아 들어온다는 말도 있지 않은가.


학력, 출신 지역, 학연, 가문, 성별, 편(내편/네 편) 등 여러 면에서 편견 없이 진실이 가려질 수 있으면 좋겠다. 편견의 창에 덕지덕지 붙어 있는 얼룩들을 서둘러 지우자.



절망의 산에서 희망의 돌멩이를

나는 피해자이기만 할까? 이청준, 『흰옷』

잘되면 내 덕으로 여기고, 잘못되면 남 탓하기 쉽다. 이기적 유전자의 측면에서 인간을 보면 자연스러워 보인다. 개인을 합리화하여 그 존재를 지속 가능하게 하는 어떤 원동력처럼 여겨진다. 만약 그런 사람들만 모여 있다면 세상은 디스토피아를 크게 벗어나지 못할 수도 있다. 그래서 타인을 이해하고 공감하는 연습이 필요하다. 그런데 그게 쉽지 않다. 어떤 보고서에 따르면 인간은 고작 150명 정도에게 공감할 수 있을 뿐이란다.


실천하기 어려워서 그렇지, 사실 우리는 타인을 향한 공감을 위해 내 탓을 먼저 승인하는 연습이 필요하다는 얘기를 많이 들어왔다. 지성적인 작가 이청준은 그것을 ‘가해자 의식’으로 풀어보려 했다. 민족의 분단과 좌우 갈등의 문제를 다룬 「가해자의 얼굴」(1992)에서 그는 피해자 의식 앞서면 가해와 피해의 악순환에서 벗어날 수 없을 것이라는 생각을 펼친다. 자신을 피해자라 여기며 가해자를 원망하고 보상받기만을 바라는 사람들만 있다면 해묵은 원한을 풀기 어렵다. 반면 의식의 방향을 바꿔 자신도 피해자임을 승인하고 참회와 용서를 구하는 마음을 앞세우면 화해의 가능성이 새롭게 열린다. 상처와 한을 치유하고 행복과 평화의 지평으로 나아가기 위해서는 가해자 의식을 바탕으로 반성해야 한다는 것이 이청준의 핵심적인 사유였다.


이런 맥락에서 씌어진 장편 『흰옷』(1993)은 인상적인 해한(解恨)의 서사다. 대립과 충돌이 횡행하는 현실에서 용서와 화해, 함께 아파하기, 대신 아파주기, 감싸안기 등을 강조했던 것이 이청준의 문학 윤리가 잘 드러난 이 소설에서 작가는 해방기의 혼돈과 전쟁기의 폭력으로 인해 일그러진 우리네 정신사를 바로 세우려는 예지를 보인다. 남도지방의 버꾸놀이가 전쟁기의 악몽을 거치면서 예전 같은 무한포용의 신명기를 잃고 거친 쇳소리로 변해버린 이야기를 하면서 자유로운 영혼들이 허심탄회하게 어울릴 수 있었던 예전의 신명을 회복하기 위한 진혼을 시도한다.


소설에서 영매자는 간절하게 축원한다. 이 땅에서 벌어진 부정하고 불순한 것들을 씻어내고, 이 땅에서 사는 사람들 마음속에 웅크리고 있는 어둡고 더럽고 부정하고 욕된 생각들을 모조리 깨끗이 씻어달라고 말이다.


“헛된 이념과 사상의 사슬, 대립과 미움과 원한과 복수의 사슬, 거짓과 속임수와 미망의 사슬”을 끊어 달라고 말이다. 그렇게 해묵은 상처를 어루만지면서 소망스런 꿈을 펼쳐 보인다.


“망자들은 망자의 길을 가게하고, 생자들은 제 생자다운 세월을 살게 하고……. 그리고 저 아침풀잎 같은 고운 아이들에겐 저들에게 더 잘 맞는 저들의 노래 속에 솝고보다 더 고운 옷을 입고 고운 춤을 추게 하고, 그래서 이쪽이고 저쪽이고 이제는 이 산하가 온통 저들의 행복스런 춤판이 되게 하고……. 저들은 아직도 우리들의 소망이요, 꿈이니께, 저들이 이젠 이 땅의 내일의 모습이니께……. 그러니 참으로 고맙고 부끄럽구나. 그동안도 저들은 저렇듯 힘차고 곱게 자라주고 있었으니. 우리의 꿈은 옛날에 실패했으되, 그 꿈이 저들에게서 저렇듯 다시 스스로 내일의 문을 열어 건강하고 아름답게 어우러져가고 있으니……”(이청준, 『흰옷』)


가해자 의식을 바탕으로 반성할 때 소망스런 미래를 꿈꿀 수 있다는 메시지는 지금, 여기를 사는 우리에게도 많은 생각거리를 제공한다.



무의미의 의미와 환대

환대는 없는가? 데리다, 『환대에 대하여』

일이 많아 주말 밤늦은 시간까지 연구실에서 작업을 하는 경우가 종종 있다. 대개는 마감에 쫓기는 시간들이다. 그런데 느닷없이 잡상인이 노크하거나 학생들이 찾아오는 경우가 있다. 늘 자비로우셨던 어머니를 따라갈 수 없는 나는 그럴 때 참 난감해진다. 그 손님을 환대할 마음이 가난한 까닭이다. 내 시간을 손님에게 나눠주기 싫기 때문이다. 관용의 미덕을 외면하고 가능하면 서둘러 손님을 내보내고 싶어 한다. 그 순간 환대는 없다. 손님의 처지를 충분히 헤아리지 못한 채 나의 상황에만 빠져 환대하지 못하는 나는 필경 산문적인 인간일지 모른다. 그럴 때 “환대 행위는 시적일 수밖에 없다”는 자크 데리다를 떠올린다.


데리다는 현대의 생활세계에서 진정한 의사소통을 위해 타인에 대한 관용을 중시했던 하버마스를 넘어서 환대를 강조한다. 관용도 중요한 미덕이지만, 관용에는 권력을 쥔 편의 시혜적인 느낌이 강하기 때문이다. 권력자의 선한 얼굴을 떠올리게 하는 관용에는 일정한 선을 넘어서는 안 된다는 문턱이 존재한다. 이 관용의 문턱을 해체하고 데리다는 무조건적 환대 혹은 절대적 환대를 내세운다.


“도래자에게 자신의 자기-집과 자기 전체를 줄 것, 그에게 자신의 고유한 것과 우리의 고유한 것을 주되 그에게 이름도 묻지 말고 대가도 요구하지 말고 최소의 조건도 내세우지 않을 것.”(『환대에 대하여』)


초대하여 베푸는 조건적 환대는 실천 가능하지만, 초대하지 않은 방문자를 무조건 환대해야 하기에, 데리다 스스로도 실천 불가능할 수 있다고 본다. 그럼에도 무조건적 환대를 강조하는 것은 ‘도래할 민주정’에의 기대 때문이다. 환대라는 주제를 위해 이방인 문제를 먼저 다룬 데리다는, 이방인에게 문호를 완전히 개방하여 진실로 환대하지 않은 생색용 관용만으로는 진정한 민주정에 이를 수 없다고 생각한다. 그래서 그가 누구인지 묻지 말고 대가도 바라지 말고 자기 것을 모두 내주는 무조건적 환대가 그토록 중요하다.


여러 이민족들의 교섭과 갈등이 빈번했던 유럽의 전통을 잘 아는 데리다가 이방인의 주제를 민감하게 다루며 환대를 강조한 것은 결코 우연이 아니다. 단지 과거의 역사가 아니라 현재의 문제이며 미래의 소망을 함축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브렉시트에서 유럽 곳곳의 테러 현장을 보면서 이방인과 환대에 대한 데리다의 관심에 거듭 눈길이 간다. 물론 그의 말대로 무조건적 환대는 당장 실현 가능한 게 아니다. “환대는 없다.” 그러나 진실한 평화를 위한 ‘환대 연습’은 요긴하다.



나는 질문한다, 고로 존재한다!

도서관에 없는 게 있을까? 보르헤스, 「바벨의 도서관」

“도서관에는 모든 것이 다 있다.” 아르헨티나 출신의 환상적 리얼리즘 작가 호르헤 루이스 보르헤스는 그렇게 말했다. 그는 미궁 같은 세상, 미로를 닮은 현실에 대해 숙고했던 작가다. 창조주의 설계도는 매우 정교했다. 그런 설계도를 바탕으로 조성한 미로 같은 세계는, 합리적이고 이성적인 질서의 눈으로 관찰하거나 성찰하더라도 제대로 헤아리기 어렵다. 고작 인간은 불완전하고 무질허하고 혼돈스런 사실만 확인할 따름이다. 세계는 영원한 미궁인데 반해, 그 미궁의 설계도를 훔쳐낼 방책이 인간에게 주어지지 않을 까닭이다. 그러니 인간은 겸허하게 미궁 속의 존재임을 수긍하는 쪽이 차라리 낫다.


바벨탑을 쌓으려는 만용은 위험하다. 미궁을 상상하고 추리하는 일이 가장 인간적인 일인지도 모른다고 보르헤스는 생각한다. 그렇다면 인간의 길은 어떻게 열릴 수 있을까. 보르헤스가 보기에 인간의 길은 도서관을 통해서 그 가능성의 일부나마 탐문할 수 있다.


아르헨티나 부에노스아이레스에서 살았던 아버지의 도서관에서 태어난 보르헤스는 도서관에서 유년을 보냈고, 하급 사서에서 국립도서관장에 이르기까지, 그의 생애는 거의 도서관을 배경으로 전개되었다. 그러니 “보르헤스는 도서관에서 태어나 도서관에서 살다가 도서관에서 죽어 도서관에 묻혔다”고 말해도 지나치지 않을 정도로 “도서관의 작가”였다. 읽고, 생각하고, 상상하고, 쓰는 일이 ‘혼돈 속의 질서’처럼 격렬하게 융합되면서 전혀 다른 차원의 이야기들을 창안할 수 있었다. 생각하는 인간, 읽는 인간, 허구적으로 꾸미는 인간이 서로 스미고 짜이며 끊임없이 갈라지는 새로운 이야기들을 빚어낸 것이다. 그러면서 세상이란 미궁으로부터 비상할 수 있기를 꿈꾸었다.


미궁일 수밖에 없는 세계를, 보르헤스는 도서관 혹은 책이라는 개념으로 이해하려 했다. 「바벨의 도 서관」에서 그는 도서관은 무한한 우주이고, 책은 신이라 했다. 인간이 우주의 신비와 질서를 성찰하기 위해서는 신이 쓴 책을 다 읽고 이해할 수 있어야 한다. 그러나 그게 어찌 가능하랴. 그러니 우주와 세계는 영원히 미궁일 수밖에 없다. 그러니 바벨의 도서관이다. 바벨은 아시리아 말로는 신의 문을 뜻하지만, 히브리 말로는 혼돈을 뜻한다. 고로 바벨의 도서관이란 “우주의 신비가 담겨진, 그러나 인간의 능력으로는 그 신비를 알 수 없는 혼돈스런 도서관”인 셈이다.


“도서관에는 모든 것이 다 있다. 미래 세계의 상세한 역사, 천사들의 자서전들, 도서관의 믿을 만한 서지 목록, 수백만 개의 가짜 서지목록, 그 가짜 서지목록들의 허구성을 증명한 책, 진짜 서지목록의 허구성을 증명한 책, 바실리데스의 그노시스적 복음, 이 복음의 주해서, 그 주해서의 주해서,…”(「바벨의 도서관」) 이런 “무한공간의 미로”에서 몽상하며 새로운 문을 열기를 그는 즐겼다.


강남 핵심의 대형 쇼핑몰 안에 도서관이 조성되어 화제다. 일상 속에서 인문학의 즐거움을 교감하면서 새로운 모색을 시도하라는 취지란다. 운영자는 이 장터 속 도서관이 “또 다른 세상으로 통하는 문”이 되기를 소망한다. 이윤 추구를 위해 소비 욕망을 자극하는 쪽으로 장터가 조성되었던 흐름과는 다른 것으로, 적극 환영할만한 일이다. 이런 분위기가 더 넓고 깊게 퍼졌으면 한다. 그동안에는 학교 도서관이나 공공 도서관이 대부분이었는데, 이와 같은 민자 시설 도서관이 많아진다면, 그만큼 우리 사회의 문화적 품격은 높아질 것이고, 인문학적 성찰은 깊어질 터이다. 다양한 도서관을 통해서 많은 이들이 또 다른 세상으로 통하는 문을 거듭 열어 나가면 우주의 신비와 신의 섭리에 가까이 갈 수 있지 않겠는가.


* * *


본 정보는 도서의 일부 내용으로만 구성되어 있으며, 보다 많은 정보와 지식은 반드시 책을 참조하셔야 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