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를 만든 말

   
신소율
ǻ
필름(Feelm)
   
16000
2023�� 01��



■ 책 소개


“말은 그저 사라지고 마는 것이 아니라
그 순간의 감정과 기억으로 남아, 나를 만듭니다.”

우리는 많은 사람을 만나고 그보다 더 수많은 말을 주고받으며 살아간다. 때론 그 말이 나를 주저앉게 만들고, 상처의 흔적으로 남아 오랜 시간 나를 괴롭힐지도 모른다. 하지만 분명한 건 다시금 일어설 수 있도록 손을 내미는 것도, 한 걸음 나아가게 만드는 것도, 오랜 시간 나를 버티게 만드는 힘도, 모두 말이라는 사실이다. 

신소율 작가의 『나를 만든 말』이 당신을 만든 말을 되새겨 보는 시간이 되길 바란다. 나아가 이 책을 통해 서로의 다름을 인정하고 차별의 언어에 주의하며, 서로의 마음을 따듯하게 물들이는 말들로 채워질 수 있기를. 당신의 말이 누군가에게는 오래도록 간직하고 싶은 소중한 말이 되어 기억되고 있음을 깨닫길 바란다.

■ 저자 신소율
말과 글을 좋아해 책 속을 헤엄치던 아이는
결국 꺼내어 표현하는 꿈을 가지게 되었습니다.

그만큼 언어에 민감하고 표현에 조심성을 기울이다
자신을 만든 말들을 찾아 나섰습니다.

설득보다는 공감으로, 호소보다는 대화로
이야기를 이끌어 나가길 원합니다.

대표 출연작
드라마 〈뿌리 깊은 나무〉
드라마 〈응답하라 1997〉
영화 〈나의 PS 파트너〉
영화 〈상의원〉
드라마 〈유나의 거리〉
영화 〈검사외전〉
영화 〈늦여름〉
드라마 〈트레인〉 등

■ 차례
추천의 글
프롤로그: 너의 말들로 그때를 내가 버티었다

Talk 1. 그렇고 그런 날, 그럼에도 마음을 채워주는 말들
“모든 감정은 언제나 옳습니다”
“여기에 올려놓으세요”
“잘 꿰어졌으면 좋겠다”
“뭐 해? 보고 싶어”
“균형 잡힌 코어의 힘이 쉽게 만들어지는 건 아니지”
“열심히 해서 뭐 해. 잘해야지”
“자세한 이야기는 만나서 하자”
“일어났구나. 빨리 날 쓰다듬어라”
Letter 1. “안녕하세요”

Talk 2. 잊지 않으려 다짐하는 무수히 남겨진 말들
“나는 원래 그런 사람이야”
“손이 없어. 발이 없어”
“말썽 부리려고 태어났어?”
“MSG 좀 그만 치세요”
“스스로를 지키기 위한 최선의 방어”
“아유, 나도 아직 어른이 되려면 멀었다”
“그게 차별이야, 그게”
Letter 2. “오랜만이에요”

Talk 3. 조금은 어긋나도 다시금 가다듬는 말들
“마지막으로 쉬어본 게 언제인가요?”
“꽃길만 걸으세요”
“쏘 쿨”
“포기하면 편해”
“절대로 쪽팔리게 살지 마”
“있을 때 잘했어야 했는데”
“볏짚에 머리만 처박는다고 그게 숨어지냐?”
“흙이 많은 사주네요”
Letter 3. “식사하셨어요?”

Talk 4. 마침내 나를 이루는 사이의 말들
“하루의 길이는 물리적 시간이 아니라 감정에 의해 결정된다”
“소심하니까 세심하고 섬세할 수 있는 거야”
“우린 서로에게 물들었다”
“하고 싶은 거 다 해”
“Seize the day”
“다 괜찮을 테니 안심해”
“내가 너를 모를까 봐?”
“나도 너무 좋아해”
Letter 4. “별일 없으시죠?”

Interview

 




나를 만든 말


그렇고 그런 날, 그럼에도 마음을 채워주는 말들

“잘 꿰어졌으면 좋겠다”

초등학교에 다니던 시절, 엄마는 매해 내가 새 학년이 될 때마다 등교 전 가장 깨끗한 옷을 다려 입히고는 머리를 양 갈래로 정갈하게 땋아주며 말씀하셨다. “올 한 해도 이렇게 잘 꿰어졌으면 좋겠다.” 얼마나 촘촘하고 짱짱하게 묶어주셨는지 이마 쪽 두피가 바짝 당겨져 눈꼬리가 올라갈 정도였다. 잘 땋이고 꿰어진 깔끔한 양 갈래 머리와 평소보다 찢어져 올라간 눈을 치켜뜨고 새 교실에 들어서면 무서울 것이 없었다. 새로운 환경에 적응이 느리고 낯을 가리는 성격임에도 먼저 친구에게 다가가 말을 걸기도 하고, 자기소개도 당차게 잘 해냈다. 머리를 쓰다듬으며 해준 엄마의 말이 따듯하고 강력한 마법의 주문이었음에 틀림없다.


초등학교 고학년에서 중학생으로 넘어갈 즈음, 내 머리는 땋을 수 없는 단발이 되었고 매번 행해지던 머리 땋기 전통은 자연스럽게 사라졌다. 그리고 나는 정확히 그 무렵부터 조금씩 관계가 어려워졌다. 물론 사춘기에 접어들며 자아가 새롭게 형성되는 시기인지라 자연스럽게 변한 거겠지만, 돌이켜 생각해 보니 엄마의 주문이 사라지면서부터가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드는 것이다. 예쁘고 따뜻한 말을 하며 희망적인 표현을 자주 쓰던 엄마와의 대화가 서서히 줄기 시작한 것도 그 즈음부터였으니 말이다.


코로나가 한창 기승일 때 무관중으로 경기를 하던 야구장에선 관객이 없음에도 녹음된 함성과 응원가를 틀었다. 넓은 야구장의 썰렁한 분위기를 채우기 위함만은 아니었으리라. 팀의 승리와 선수를 응원하는 순애가 가득 담긴 노래와 구호들에게서 얻는 힘이 분명히 있었을 것이다. 또한 우리는 새해와 명절 때마다 형식적일지언정 안녕과 건강을 기원하고, 개업이나 이사를 한 사람에게는 번성하시고, 대박나라는 축하 문구를 전한다. 결혼을 하는 사람에게는 행복하게 살라는 인사를 건네고 누군가의 마지막 길에는 마음으로 함께하며 좋은 곳에서 평안하길 바라는 기도를 전했다. 모두 염원이 담겨 있다. 몇 마디 안 되는 짧은 문장이지만, 진심을 담아 응축된 힘을 실어 보낸다.


‘떨지 마, 힘내자, 할 수 있어, 난 괜찮아.’ 간절한 바람을 말에 실어 자신을 다스리는 일종의 마인드 컨트롤이라 부르는 혼잣말들이다. 증폭된 기대감으로 인해 나중에 실망이 커질 것을 우려하여 최악의 상황에 미리 대비하는 성향의 사람일지라도 자신을 응원하는 말에 일부러 부정적 어휘를 첨언하는 사람은 극히 드물다. 개인적인 경험을 꺼내어 보자면 확률이 낮은 일에 “할 수 있다”라는 되뇜과 “어차피 안될 거야”라는 마음가짐에서 나오는 에너지는 엄청난 차이가 있지만, 막상 결과가 나왔을 때의 실망감은 비슷하다. 말과 생각이라도 긍정적으로 하는 편이 과정에서 오는 스트레스를 조금 더 줄여준다. “피할 수 없다면 즐겨”라는 말이 괜히 있는 게 아닌 것 같다. 당연한 소리겠지만 꼭 해야만 하는 일을 지겹고 힘들다고 생각하면 점점 더 지치고, 그나마 그 안에서 조금이라도 흥미를 찾으면 빨리 끝내고 쉴 수 있다.


하루에도 수십 번 “짜증 나”라는 말에 자신의 감정을 실어 보내는 사람에게 이유 없이 짜증이 옮을 때가 있다. 아드레날린을 뿜어내며 신나게 운동을 하다가 “힘들다”만 반보하는 친구 옆에서 갑자기 힘이 빠지는 것처럼. 평소 쉽게 해내던 일인데도 기대나 부담의 말을 들으면 갑자기 긴장이 되기도 하고, 평소 좋게만 생각하던 사람의 험담을 들으면 그때부터 괜히 다르게 보이기도 한다. 하지만 피곤하고 지치는 와중에 “좋은 하루 보내세요”라는 가벼운 인사에 기분이 전환되기도 하고, 어려워 보이는 일을 “이까짓거 껌이지”라는 허세로 가볍게 시작하게 될 수도 있다. 말은 적연한 주문이다.


우리는 힘들어서, 짜증 나서, 피곤해서, 배고파서, 추워서, 더워서 뒤에 “죽겠다”를 붙여 수많은 이유로 수백 번 생가의 고비를 넘나든다. 수다 떨다가 투정으로 나오는 가벼운 말들에 동조하기도 하고, 응원해주기도 하면서 웃고 넘기지만 매사에 부정적인 어휘만 달고 사는 사람들은 어느 순간 대응하기가 껄끄러워진다. 습관적으로 모든 일에 죽겠다는데 도대체 어떻게 지금까지 살아있나 싶다. 심지어 행보해도, 신나도, 배불러도 죽는데 말이다. 관용적 표현이라지만 자주 듣다 보면 방향을 돌려주고 싶어진다. 이래도 저래도 죽는 거 보다는 어쨌든 살 것 같은 게 더 낫지 않나. 아주 조금의 노력을 기울여 부정적 방향의 생각과 말의 머리를 다른 쪽으로 틀어보고자 한다. 스스로에게 하는 말도, 타인에게 보내는 말도 반반하게 태워 좋은 곳으로 보내고 싶다. 잘 될 거라고, 할 수 있다고, 힘내라고, 평온하라고, 그리고 행복하라고. 말의 힘을 받아 언젠간 말하는 방향대로 갈 것이라고 굳게 믿으며.



잊지 않으려 다짐하는 무수히 남겨진 말들

“스스로를 지키기 위한 최선의 방어”

누구에게나 공평하게 주어지는 것들 중 가장 중요한 것으로 많은 이들이 시간을 꼽는다. 쓰는 방법과 활용에 따라 많은 것들이 달라진다는 걸 우리는 익히 알고 있다. 온전히 내 것이기에 내 자원의 가치를 높이는 건 개인의 능력이다. 사유도 오롯이 내 것이다. 역시 자유다. 머리 아픈 게 싫어 최대한 단순하고 긍정적으로 생각할 수도 있고, 사소한 것 하나에도 관심을 기울이고 꿰뚫어 깊이 바라보기도 한다. 그렇다면 나의 말은? 마찬가지이다. 고로 어떻게 말할 것인지는 각자의 선택이다.


말 한마디에 감동하고, 상처받고, 위로를 얻고, 분노하기도 하는 등 감응의 오르내림이 심한 성질을 가지고 있다 보니 타인의 모든 말에 무량한 의미를 부여하고는 했었다. 나의 말에 있어서도 상대가 괜스레 오해하는 일이 없도록 각별히 신경을 썼다. 사람이 제각기 다 다르듯 말이라는 자원도 여러 방면으로 다양하게 사용한다는 것을 이해한 건, 이미 많이 자란 후였다.


다른 사람이 별 뜻 없이 던진 말을 내 방식대로 해석해서 공연히 상처를 받는 일이 많아졌다. 나라면 절대 쓰지 않을 단어나 문구를 서슴지 않고 내보내는 사람들을 보면서 그게 다 진심에서 우러난 악의인 줄 알았던 때, 마음을 긋는 모든 말을 붙잡아 부득부득 되새긴 후 더 날카롭게 되돌려줄 방법을 궁리하며 다짐했다.


“반드시 당신에게 상처가 될 말을 찾아낼 거야.”


누군가가 말로 공격을 가한다면 바로 태세를 전환해 상대방의 단점을 찾아 비수가 될 만한 말을 꼽았다. 뼈 있는 말, 비꼬는 말, 못된 말, 상처가 될 말을 배로 돌려주는 것만이 최고의 복수이고 다친 나를 달랠 보상이라 생각했었다.


영화인들과 가볍게 식사를 하는 자리였다. 최근 작품 흥행에 성공한 A 감독님이 몇 년째 영화를 찍지 않고 있는 B 감독님을 은근히 깔보는 것 같았다. 선을 넘는 언사에 듣고 있던 나조차 화가 날 지경이었는데, 당하고 있는 감독님은 “허허허” 사람 좋은 미소로만 응수하고 계신다. 부스럼이 날까 선뜻 끼어들지 못하고 불편해하다가 A 감독님께서 잠시 화장실에 갔을 때 서둘러 불만을 내비쳤다. 기분 나쁜 티를 내도 될 정도로 노골적인데, 왜 가만히 계씨느냐고 여쭈었다. B 감독님은 상대방이 말에 뼈를 담아 공격을 하든, 무게 있는 비난을 하든 “내가 받아들일 마음의 여지를 주지 않는다면 떠도는 허공의 말일 뿐이지만 그 말의 꼬리를 잡는 순간 타격을 입게 되는 것”이라고 했다. 괜히 맞받아쳐 불필요한 곳에 굳이 에너지를 쓸 이유가 없지 않냐면서 경계는 하되, “스스로를 지키기 위한 최선의 방어”만 하는 것이라고 하셨다. 혹 유독 특정한 발언들에 열이 나고 기분이 나쁜 것은 내재되어 있는 열등감의 발현일 수도 있으니, 그럴 땐 오히려 자신의 감정 반응을 더 냉정하게 볼 필요가 있다고.


해탈의 경지에 이른 듯한 B 감독님의 이야기를 듣고, 유치하고 치졸하게 복수나 꿈꾸던 나는 확실히 덜 자랐구나 싶었다. 상대의 의도와 상관없이 내 열등감을 건드린 말을 붙잡아 스스로를 찔러댄 것이다. 빗나갈 수도 있었던 화살을 굳이 쫓아가 맞았나 보다. 최고의 공격은 방어라 했던가. 위협으로 느껴지면 되받아칠 게 아니라, 굳게 막아 들어오지 못하게 하면 되는 것이었다. 그럼 한사코 나쁜 말들을 연구하는 수고를 할 필요가 없다. 개중 악의를 가지고 말을 휘두르는 사람이 있다면 그보다 훨씬 더 성숙한 태도로 응수하게 된다.


하루 중 내가 하는 모든 말과 메시지를 정리해 문서화해서 들여다보고 싶다. 과연 마음에서 우러난 문장이 얼마나 있을까? 일차원적인 일상용어 몇 마디, 패턴화되어 버린 습관처럼 흘려 쓰는 표현들, 의미를 담지 않고 내보내는 말들. 고민해 꾹꾹 눌러 담다가 넘친 말들은? 말에 가장 큰 영향을 받는 나조차도 정작 모든 말에 가치를 싣지 않는다. 설사 매 순간 고심해서 의도와 의미를 가득 채우더라도 어차피 모든 말의 편집권은 각자에게 있다. 화자의 의도와 무관하게 각자의 감정과 가치관대로, 때로는 듣고 싶은 부분만 잘라 듣기도 한다. 모든 말에 민감하게 반응하고 있다면 현재의 자신이 작은 공격에도 취약해져 있는 상태라 왜곡해서 편집하고 있는 게 아닌지 돌아봐야 한다.


내 상태를 꼼꼼히 점검했는데도 자꾸 후벼파 들어오려는 말이 있다면 내 안에 박히기 전에 썰어버리면 그만이다. 떠도는 허공의 말에 과감히 칼질을 할 수 있는 건, 나를 향해 오는 말들에 전적인 편집권이 부여되어 칼을 들게 된 내 쪽이니 말이다. 아, 칼날은 항상 바깥을 향하게 두어 안전하게 보관할 것.



조금은 어긋나도 다시금 가다듬는 말들

“마지막으로 쉬어본 게 언제인가요?”

늘어진다. 딱히 힘든 일이 있었던 것도 아니고, 큰 고민을 안고 있지도 않은데 시작점을 모르는 자잘한 생각들과 하릴없는 걱정들이 버거워 비워내고 싶다. 오래된 컴퓨터 마냥 계속 오류 메시지가 뜨고 느려지고 있으니, 잠시 전원을 내렸다가 열이 식으면 다시 재부팅을 할 수 있으면 좋겠다. 이럴 때는 부정적인 생각들이 끼어들기 쉬운데, 지속되면 모든 일에 지레 겁을 먹고 소극적인 자세가 된다. 자존감이 뚝뚝 떨어져 갈 때쯤, 혼자 힘으로는 전환이 쉽지 않아 심리 상담을 받았다.


“마지막으로 쉬어본 게 언제인가요?”


현재의 내 상태를 설명한 후 돌아온 질문에 차기작 촬영을 앞두고 쉬는 중이라고 대답했다. 선생님은 ‘일’이라는 개념을 섞지 않은 온전히 몸과 마음을 위한 휴식이 언제였냐고 다시 물었다.


“저는 머리가 복잡해지고 몸이 피곤해지면, 당장 현실에서 벗어나 영화를 보고 책을 읽고, 휴대폰 게임 등을 하며 하루 종일 누어서 쉬곤 해요. 체력이 떨어질 때마다 자주 쉬어주는 편이에요.”


나의 대답에 상담 선생님은 그건 ‘쉼’이 아니라고 단언하셨다. 신체 전원을 잠시 끄고 싶을 정도로 버겁다고 얘기하면서 다른 방법으로 계속 피곤을 쌓아가고 있는 게 아닌지 자문해 보라고 하는 것이다. 버스를 타고 집에 돌아오면서 상념에 잠겼다. 진정한 쉼이 무엇인지 전혀 감이 오지 않았다.


나는 생체 리듬이 엉키면 이를 바로잡기 위해 대청소를 하거나 물건들을 다 꺼내 정리하는 등 생활속 노동을 찾아 떨쳐버리려 한다. 상쾌한 기분과 더불어 피곤한 몸을 얻는다. 몸의 휴식을 위해 아무것도 안 하고 누워있으면 머릿속에 잡념이 채워지기 때문이다. 당장 벌떡 일어나 뭐라도 해야 견딜 수 있었다. 현재를 치열하게 살아내면서 ‘아무 생각 없이, 편하게 쉰다’는 게 가능한 걸까? 휴식과 회복에만 집중하기 위해 여행을 떠나 훌훌 다 털어버리고 온다는 사람들도 있다. 내 기준으론 생업을 내려놓고 ‘쉼’만을 위한 휴식 시간을 가지는 건 용기 있는 자들의 특권인 듯하다. 용기가 없는 나는 당장의 여행경비가 걱정이고, 가뿐하게 비워내고 올 자신도 없다. 돌아와 문제를 다시 마주했을 때 해결 방도가 없다면 전과 전혀 달라지지 않을 테니 말이다.


안 그래도 괴로운 일투성인데 쉬는 것마저 어려우니 참 큰일이다. 나에게만 힘겨운가 싶어 염탐을 해보기로 했다. 사진을 기반으로 한 SNS에 #쉼, #휴식, #힐링을 검색해 보았다. #힐링으로 올라온 게시물이 압도적으로 많다. 푸릇푸릇한 배경의 나들이 사진부터 귀여운 동물 사진, 좋아하는 연예인 사진 등 수많은 게시물 사이에 적지 않은 비율로 눈에 띄는 글들이 있었다. 삶에 지친 사람들을 위로하는 문구, 제대로 쉬지 못하는 누군가를 격려하는 문장, 휴식의 중요성을 피력하며 제발 편히 쉬라고 호소하는 말. 그 아래 찍힌 엄청난 숫자의 ‘좋아요’를 보며 콧잔등이 시큰하다. 나뿐이 아니구나. 다들 잘 쉬지 못하는구나.


어쩌면 그동안 나는 ‘휴식’에 특히 인색하게 굴었는지도 모른다. 생존에 직접적으로 닿아 있는 ‘취식’에 있어서는 누구보다 적극적이면서 말이다. 무얼 먹을까, 어떻게 먹을까, 어디서 먹을까, 누구와 먹을까를 고민하며 조금 더 건강하게, 맛있게, 즐겁게 먹기를 바란다. 능동적으로 맛집을 탐색하고 레시피를 찾아 따라 해 보고, 심지어 다른 사람이 먹는 영상을 찾아보기도 하는 등 온갖 노력을 기울였으면서, 정작 ‘휴식’은 왜 등한시한 걸까? 취식이든 휴식이든 삶에 꼭 필요한 건 매한가진데 말이다. 혹, 쉬지 못하는 게 아니라 쉴 줄 몰랐던 건 아닐까? 관심을 가지고 나에게 맞는 방법을 찾으면 훨씬 더 윤택한 ‘쉼’이 가능하지 않을까 싶어 나름의 방법을 찾기로 했다.


우선 휴대폰을 내려놓는다. 그리고 소음이 적은 곳에 누워 눈을 감는다. 온몸에 힘을 빼고 천천히 숨을 쉰다. 호흡이 안정되면 다른 생각이 끼어들지 못하도록 숫자를 세고, 그 수에 맞춰 비눗방울을 하나씩 띄우는 상상을 한다. (명상과 비슷하기도 하고, 잠이 오지 않을 때 양을 세는 것과도 비슷한 방법이다.) 내 숨과 숫자, 비눗방울에만 집중하여 상상의 공간을 채운 후 원하는 순간이 되면 그 비눗방울들을 한꺼번에 터뜨려버린다. 그 과정에서 자연스럽게 잠이 드는 날도 있고, 비눗방울이 터지는 청각적‧시각적 쾌감으로 시원하고 개운하게 눈이 떠지기도 한다. 신기하게도 어떤 날은 웃음이 나고, 어떤 날은 눈물이 난다.


사실 이것도 뇌를 완전히 쉬게 하는 방법은 아니지만, 일시적이라도 나에게 맞는 현재 가능한 휴식을 찾으려는 첫 시도였고, 비눗방울에 몰입해 힘을 빼고 누워 있다 보면 몸의 피로가 좀 가시는 듯해서 만족스럽다. 반대로 몸을 움직여 잡념을 없애고 싶을 땐 고민이 옅어질 때까지 무작정 걸어보기도 하고, 팔다리의 움직임과 숨 쉬는 박자를 맞추느라 걱정거리를 떠올릴 겨를이 없는 수영으로 쉼을 대체하기도 한다.


건강한 휴식만이 내일을 살아갈 양분으로 쓰인다고 했다. 아무것도 안 하고 편하게 쉬는 게 어렵다면 뭐를 해서라도 쉬어줘야 하지 않겠는가. 요즘은 ‘쉼’의 레시피를 많이 모아 두어 든든하다. 오늘은 또 어떻게 쉬지?



마침내 나를 이루는 사이의 말들

“하고 싶은 거 다 해”

보고만 있어도 환해지는 맑은 아이돌의 웃는 사진 아래, 앳된 얼굴로 올림픽에 출전하는 어린 선수의 기사 아래, 혼신의 연기를 펼친 아역배우의 영상 클립 아래.


“우리 OO 하고 싶은 거 다 해!”


시작은 이제 막 자신의 꿈을 향해 발을 내디딘, 어린 친구들을 응원하는 말이었던 이 문장은 점차 영역을 넓히어 성인은 물론이고, 어르신께도, 심지어 동물에게도 건네는 희망의 말이 되었다. 많이 쓰는 문장이지만 볼 때마다 마음이 일렁일렁한다. 어찌나 따듯하고 아늑한 사랑스러운 축복인지.


나도 가끔 이 축복을 받고는 한다. SNS 게시물 댓글로도 만나고, 가까운 지인들과 새해 인사로도 주고 받는다. 새 작품에 들어가는 전 겁내지 말고 마음껏 역량을 펼치라는 뜻으로 감독님과 작가님께 듣기도 한다. 하고 싶은 것. 가만히 입에 올려 이 문장을 읊조려본다. 달다. 기분이 좋아진다. 펜과 노트를 쥐고, 하고 싶은 것들의 목록을 작성해 보기로 했다. ‘1.’이라고 숫자를 붙이고 뭐부터 써야 할지 몰라 망설여진다. 갑자기 수많은 조건들이 따라붙어 버렸다. 조금만 더 어렸다면, 돈이 더 많았다면, 시간이 더 충분했다면 뭐든 다 할 수 있을 것 같은데, 지금 당장은 할 수 있는 게 별로 없어 타격을 입는다. 다시 막연해진다. 방금까지 달았었는데 현실에 쓴맛을 느낀다.


언제부터인지 하루를 버텨낸다는 심정으로 지낸다. 뭉친 어깻죽지와 피곤한 눈꺼풀을 들어올리기도 벅찬데, 하고 싶은 거 따위 할 체력과 에너지가 남아 있지 않은 것 같다. 그래서 가끔 “하고 싶은 거 다 해”라는 문장이 조금은 애잔하게 느껴지기도 하나 보다.


부정적이고 어두운 생각에 휩싸이면 한도 끝도 없다. 하고 싶은 거 다 하라는 응원까지 받은 김에 뭐 하나라도, 내가 정말 하고 싶은 걸 찾고 싶다. 우울에 빠지려는 감정을 끌어올려 붙들어 맸다. 거대한 꿈, 인생의 목표, 가치관을 다 떠나서 ‘지금 당장’ 하고 싶은 일을 생각해 봤다. ‘지금 당장’ 담백한 두유를 왕창 섞은 커피 한 잔을 마시고 싶다. 완연한 고요, 나른한 온도에 폭 쌓여 편한 의자에 앉아 푹 빠질 수 있는 새 책 한 권을 읽고 싶다. 저녁엔 얼큰하고 속이 확 풀리는 짬뽕 한 그릇을 완뽕하고 싶다. 맞지 않거나, 손이 가지 않는 옷을 정리해 옷장을 쾌적하게 만들고 싶다. 그래서 지금 나에게 필요한 건, 커피를 타기 위해 부엌으로 갈 의지, 책 한 권과 짬뽕을 사 먹을 돈, 그리고 조금의 시간이었다.


하고 싶은 일들을 하고 살려면 조건과 대가가 따르는 게 당연하다. 당장의 내 여건과 쉽게 맞바꿀 수 있는 아주 사소한 바람들을 풀고 보니, 그동안 하고 싶은 게 없던 게 아니라, 귀찮고 성가시니 그냥 할 수 있는 일만 하면서 핑계나 대왔던 게 아닐까 싶다. 날씨 좋은 주말에 인테리어가 예쁜 카페에서 친구와 사진을 남기고 싶어졌다. 이를 위해 나는 다음 주 촬영 대본을 미리 숙지해 놓아야 하고, 친구는 주중에 미팅 자료 준비를 끝내 놓아야 한다. 해야 할 일들을 당겨서 해야 하지만, 이 정도는 무리가 없다. 조금 더 욕심을 내봐야겠다.


부모님과 여행을 가고 싶다. 어릴 때는 부모님이 여기저기 많이 데리고 가주셨으니 이제 내 차례다. 아직 우리 가족은 같이 비행기를 타본 적이 없다. 해외로 가야겠다. 복잡한 곳을 싫어하시는 부모님을 위해 휴양지로 생각하고는 있는데, 비용이 만만치 않다. 결혼을 하고 이사를 하느라 지출이 늘었을 뿐 아니라, 예전에 비해 일도 줄었고, 그마저도 꾸준하지 않다. ‘시간도 없고, 돈도 없으니 나중에 갈까’라고 합리화하고 싶은 마음이 스멀스멀 올라온다. 하지만 “나 한 살이라도 젊을 때 딸이랑 여행 가보고 싶어”라고 했던 엄마의 말이 떠오른다. 아빠도 말씀은 안 하시지만 분명 기대하고 계실 것이다. 나에게도 꼭 하고 싶은 일이지 않는다. 나중이 되면 더 나중을 찾을 게 분명하다. 더 이상 핑계 대지 말자. 온 가족의 염원이 모인 일이니 반드시 하고야 말리라. 외식비를 줄이고 불필요한 소비를 줄이자. 사고 싶은 물건이나 옷들도 장바구니에만 머물렀다. 매달 조금씩 ‘하고 싶은 일’의 조건이 나의 소비 욕망을 맞바꾼 결과로 우린 곧 떠날 것이다.


하고 싶은 일이 있다는 것은 내일을 기대하게도, 미래를 소망하게도, 현재의 나를 발전시키기도 한다. 하고 싶은 게 있는가. 현실적 제약이 있더라도 그것을 무너뜨릴 만큼 간절한가. 그렇다면 꼭 하길 바란다. 이루길 바란다. 해도 된다. 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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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 정보는 도서의 일부 내용으로만 구성되어 있으며, 보다 많은 정보와 지식은 반드시 책을 참조하셔야 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