딴생각

   
박찬휘
ǻ
싱긋
   
16800
2022�� 07��



■ 책 소개


사소하고 당연하게 여겨지지만
결코 지나칠 수 없는 이야기들

작가는 자동차 디자이너가 되기까지 유럽에서 오랜 유학 생활을 거치며 그가 이방인으로서 다른 시각을 지녔다는 사실이 그의 일과 삶에 톡톡 튀는 창의력과 재치를 불어넣어주었음을 고백한다. 특별한 시각이 지닌 힘은 일상에서 발휘된다. 작가는 서핑과 담배의 발명에 대한 아이의 질문을 통해, 아버지로서 아이의 궁금증에 답하는 것과 디자이너로서 세상에 질문을 던지고 답을 찾는 일이 결코 유리되어 있지 않음을 깨닫는다. 멋진 범퍼카를 고르려는 아이의 고집을 통해서는 개인의 취향이 모여 하나의 거대한 트렌드를 이룬다는 사실을 통찰하며, 육각연필로 카세트테이프를 감는 기발함에서는 친근한 일상의 재치를 포착한다. 왼손으로 글씨를 쓰는 것이 금지되었던 학창시절과 수학여행에서 필름카메라로 열심히 사진을 찍은 (그러나 한 장도 남기지 못한) 일을 돌아보기도 하고, 커피 한 잔의 추억에 잠기기도 한다. 흰 종이에 담긴 아버지의 가르침과 여전히 건재한 라디오라는 매체를 통해 아버지와 이어져 있음을 깨닫고, 인공지능이 지배하는 미래를 상상하게 하는 게임과 오랜 장인 정신이 깃든 장난감을 통해 변화하는 세상에 대한 깨달음을 이야기한다.

작가는 또한 색의 상대성을 통해 우리 모두가 각자 세상을 다르게 해석한다는 사실을, 볼트를 통해 작은 것들의 소중한 가치를 돌아본다. 자동차의 아름다운 선을 통해 형태보다 기능에 집중할 때 진정한 아름다움을 드러낼 수 있음을, 비행기를 통해 발명에 얽힌 슬픈 역사를 되새긴다. 기차에서 배운 고독을 떠올리는가 하면, 전기차와 같은 최신 기술만 좇느라 지금 우리 주변에 있는 것들의 소중함을 잊은 것은 아닌지 돌이켜본다. 네트워크를 끊어버리고 좌표를 잃는 경험에 대해 이야기하고, 오래된 것과 단순한 것, 그리고 꾀부릴 줄 모르는 우직함을 찬미한다.

■ 저자 박찬휘
홍익대학교 미술대학교와 영국 왕립예술대학원Royal College of Art에서 석사학위를 받았다. 2005년 세계적인 자동자 디자인 및 제작사이자 페라리의 디자인 하우스로 알려진 이탈리아의 피닌파리나Pininfarina에서 디자이너로서 첫발을 내디뎠다. 같은 해 한국디자인진흥원의 차세대 디자인리더에 선정되었다. 이후 기아자동차 유럽디자인센터, 메르세데스-벤츠(슈투트가르트)와 아우디(잉골슈타트)에서 근무했으며, 2022년부터 전기차 스타트업 회사인 니오 유럽디자인센터(뮌헨)의 수석디자이너로 활동중이다.

최근 출시된 아우디 최초, 순수 전기차 플랫폼 기반으로 양산한 Q4 e-tron이 그의 스케치에서 탄생하였다. 현재 독일 뮌헨에서 거주하며 다양한 주제의 글쓰기와 사진 찍기를 취미로 하고 있다. 

■ 차례
프롤로그

이방인_다른 시선
발명_사소한 질문의 힘
취향_트렌드가 되다
브리콜뢰르_발상의 전환
연필_쓰는 일 말고 그리는 일
종이_태극기 펄럭이며
카메라_유리알 유희
커피_오늘을 살다
라디오_소리로 그리는 세상
게임_진짜 같은 꿈
장난감_장난이 아니다
색_내일의 하늘은 파랗다
볼트_잊고 있던 존재의 별빛
자동차_형태는 기능을 따른다
비행기_발명의 아픔
기차_고독한 공간
전기차_상실의 내일
지도_세상의 중심이 되다
시계_이야기가 담긴 옛것이 좋다
와인잔_단순빠따의 힘
세탁기_부적합의 환호
손_열정의 온기

 




딴생각


이방인

다른 시선

지난 16년간 디자이너로 살아가며 겪은 배움의 과정에는 인종과 문화의 마찰에 따른 좌충우돌 에피소드는 물론, 뿌듯했던 무용담, 일상의 번민까지 헤아릴 수 없을 만큼 다양한 일들이 있었다. 그런데도 여전히 타지에서 새로운 것을 배우고 익히는 일이 적잖이 행복하다. 이러한 마음은 다행히도 나의 정서적 성장판은 아직 닫히지 않았으며 운좋게도 열정적인 디자이너로 좀 더 성장할 수 있을지도 모른다는 희망을 가지게 한다. 이곳의 일상은 아직도 나를 자극하는 새로운 촉매제가 된다. 나에게는 무척 특별해 보이는 발견이 이들에게는 그저 일상의 일부처럼 당연시되는 경우가 많다. 그 속에서 영감을 받고 변화하는 나의 유연성이 다행스러우면서도, 한편으로는 내가 여전히 이방인이라는 사실을 다시 자각하고는 씁쓸해지기도 한다.


디자인을 전공으로 삼으면서 유럽을 막연히 동경하기 시작했다. 내게 유럽은 환상의 섬과 같았고, 그곳에 이르기만 한다면 다양한 분야의 비법을 전수받을 수 있을 것이라고 생각했다. 유럽에서 한두 해 공부하면 슬리퍼 차림으로 다녀도 세련된 사람이 될 수 있을 것 같았고, 클래식 곡을 잠깐 듣고도 누구의 곡인지 척척 맞힐 수 있는 문화적 소양도 자연스럽게 스며들어 내 것으로 만들 수 있을 것 같았다. 그만큼이나 학창시절의 나에게 유럽은 무지개의 끝처럼 느껴졌다.


유럽에 발을 딛기 전에는 만약 내가 유럽의 유명 자동차회사에서 일해본다면 명품을 만드는 비법을 몇 달 만에 알아낼 수 있을 거라고 짐작하곤 했다. 꽁꽁 숨겨놓고 알려주지 않는 초특급 비밀 레시피, 이들의 비법을 잘 배우면 언제 어디서든 마법사처럼 놀라운 것을 맘껏 만들어낼 수 있으리라 확신했다. 그런데 허탈하게도 그 기대는 완전히 어긋났다. 이미 유럽으로 떠나온 지 한 해가 지나고 또다른 해가 지났다. 내 손을 뻗어 닿지 않는 곳이 없을 만큼 시간이 흘렀는데도 비밀 레시피는 찾을 수 없었다. 오히려 그들의 비법이 있을 법한 곳의 모습은 기대보다 훨씬 소박하거나 더 열악했다.


실망스럽게도 어딘가 꽁꽁 숨겨놨을 거라는 기대와는 달리 빼어난 그들의 것에는 특별한 비법이 없었다. 손쉽게 어깨 너머로 읽어낼 수 있는 설명서와 같이 친절하게 정리된 비법서가 없었다는 뜻이다. 이들의 삶 구석구석에 흩어진 사소한 일상의 합이 바로 비법 그 자체였다. 일상의 합은 역사다 더 나은 존재의 가치를 소망한 종교, 존재를 위심하고 살핀 철학, 그리고 존재의 이상향을 표현해낸 예술에 이르기까지 이들의 역사, 켜켜이 쌓아온 이들의 흔적이 형이상의 비법을 만들어 낸 것이다.


그렇게 역사의 요구와 각자의 필요에 의해 등장하기 시작한 것들은 격변의 역사를 통해 진화를 거듭했다. 그렇게 긴 시간을 버텨내다보니 마침내 ‘명품’이라는 칭호를 얻었다. 전혀 상관없어 보이는 작은 요소 하나하나가 서로 연결되어 있었다. 작은 것들이 얽히고설켜 이들의 거대한 역사가 되었으니, 함부로 쉽게 흉내낼 수조차 없고 그 기원을 추적하기에는 매듭의 시작이 어딘지를 찾아낼 길이 없다. 역사를 꿰뚫고 철학에 통달하지 않는 이상 불가능에 가깝다.


그래서 쉽고 빠른 ‘비법’ 대신 사소한 일상에서 발견한 낱장의 소소한 이야기들이 이들의 역사이고 비법임을 확신하기 시작했다. 성급한 비법서의 지름길 대신 작은 조각을 통해 느리게 큰 합을 맞춰나가는 일의 의미를 깨우쳤다. 바로 사소한 것들의 지혜다.


사소한 것들을 지나치지 않는 습관은 나와 비슷한 직종에 있는 사람들에게 새로운 기폭제가 되기도 한다. 매일같이 새로운 것들이 밀려오는 아침을 맞이하는 삶 속에서, 디자인이라는 영역은 언제부터인가 시대의 흐름에 쫓기느라 수동적인 태도로부터 자유롭지 못했다. 디자인의 사명 또한 나날이 ‘확장’되었지만 세상의 흐름은 ‘팽창’에 가까워졌다. 새로운 것을 연일 만들어내느라 설익은 것투성이다. 어차피 훗날 업데이트를 통해 보완, 정정되리라는 안일한 바람을 가진 채 속도전에 치여 적잖은 것들을 놓치고 있다. 결국 사소함은 사람에 대한 배려다. 그래서 디자인은 사람을 배려하는 일이다.


그래서 디자인은 거창하고 복잡한 게 아니라 삶의 질과 직결된다. 결국 사람을 돕기 위해 진화하는 언어가 디자인이다. 그 안에 담긴 작은 말 한마디, 세심한 메시지 하나가 누군가의 마음에 파장을 일으키듯이 사소한 것은 사람의 마음을 움직인다. 그래서 디자이너는 우리의 삶을 돕기 위해 ‘사소함’을 한번 더 각성해야 하는 것이다. 거창한 비법 대신 낱알의 것들에 대한 생각이다. 이곳의 사람들에게 익숙한 것들이 내게 새롭게 보였던 것처럼 말이다. 그리고선 뻔한 것들이 나의 이야기를 통해 스스로 길을 찾기 시작했다.



취향

트렌드가 되다

아이와 함께 놀이동산에 갔을 때였다. 당시 아이가 하도 까다롭게 구는 바람에 하마터면 이미 돈을 다 낸 범퍼카를 타지도 못할 뻔했다. 범퍼카가 곧 출발할 참이라 마음이 급해져서 대화 말미에 서두르자는 부분도 있었다. 그때는 서둘러 아이의 안전벨트를 매어주느라 정신이 없었다. 뒤늦게 생각해보니, 아이가 보여준 까탈스러운 모습이 너무나 재미있었다. 기껏해야 5분 타고 말 범퍼카라고 생각했지만, 까다로운 ‘고갱님’ 덕분에 난생처음으로 놀이동산 범퍼카를 가만히 들여다보게 되었다. 신기하게도 누가 디자인을 했는지 한 대 한 대 생김새와 색이 전부 제각각이었다. 더 충격적이었던 건 내 아이가 보여준 까다로운 ‘취향’이었다.


누군가는 어린아이가 범퍼카 한 대 고른 걸 ‘취향’이라고 할 수 있느냐고 물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취향은 특별한 이들만이 가질 수 있는 것이 아니다. 어린아이에서부터 노인까지, 누구에게나 취향은 있다. 취향이라는 단어를 모르더라도, 내 마음에 드는 것, 곁에 두고 싶은 것을 고른다면 그것이 바로 취향의 발현이다. 즉, 취향이란 선택의 기준이자 내가 누구인지를 드러내는 방법인 것이다. 각자의 믿음과 사소한 취향은 다른 생각의 가능성을 열어젖힌다. 각자의 취향은 하나의 가이드라인을 형성하기 시작하고, 이것이 하나의 방향으로 향할 때 우리는 ‘트렌드’라는 이정표를 세운다. 그리고 그 트렌드를 좇으며 사회적 취향으로 발전하고 문화의 틀을 이룬다.


이와 같은 트렌드는 어떻게 탄생할까? 종교와 예술은 취향을 정체성으로 이끄는 데 중요한 역할을 한다. 가령 유럽에서는 신에게 이르기 위해 교회와 같은 건축물이 신의 이야기를 전하기 위해 대중들의 취향을 저격하고도 남을 수준 높은 회화와 조각이 등장했다. 혹여 보이지 않는 신에 대한 의심이 들 때면 철학을 통해 끊임없이 질문하고 답을 찾아내려 했다. 종교의 부산물로 태어난 많은 예술품은 시간이 지나 세상이 바뀌면서 각자의 취향에 따라 다양하게 해석하기 시작했다. 아름다운 것과 그렇지 못한 것 혹은 내게 맞는 것과 불편한 것에 대한 각자의 선택과 취향이 존중받기 시작했다. 필요한 것을 각자의 취향대로 만들어 사용하던 수공의 시대를 지나 산업혁명이 도래했다. 효율적인 생산방식, 즉 대량생산이 등장하면서 대중의 취향은 그대로 시장에 반영되었다. 취향을 잘 예측하느냐 못하느냐에 따라 제조업의 운명은 극명히 엇갈렸다. 이리저리 흔들리는 대중의 취향을 그저 무시할 수는 없었다. 여기에서 바로 취향을 측정하고 예측하는 좌표, 대중에게 내일의 취향을 말하는 언어. 디자인이 등장한다.


물론 각자를 드러내는 취향은 선천적으로 타고나는 것만은 결코 아니다. 아비투스 즉, 직업이나 재력 등 환경에 의해 구축되는 사고와 판단체계처럼 주어진 환경과 교육에 의해 얼마든지 후천적으로 개발되거나 체득될 수도 있다. 더 나은 취향을 위해 디자이너는 조금 앞선 것을 조심스럽게 제안한다. 조금씩 조금씩 앞으로 대중을 이끌어주는 역할을 한다. 유행하는 바지 길이가 어느 한순간 갑자기 줄어들지 않듯이 디자이너는 밑단을 조금씩 줄여나가면서 ‘이번엔 좀 짧은’ 스타일을 제시한다. 그래서 대중의 취향을 바탕으로 유행이 만들어진다고 하지만 결국 유행의 앞에는 브랜드와 디자이너가 있다.


한마디로 디자인은 희미하게 보이는 내일을 구상하고, 예술은 아득한 미래를 그린다. 그래서 디자인은 가깝고 예술은 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에게 예술가가 필요한 것은 보이지 않는 그들이 저 먼발치에서 우리의 취향을 이끌어주는 역할을 맡기 때문이다. 반면 디자이너는 당장의 취향을 모아 현재를 반영하는 위치에 서 있으므로 시장이 원하는 대로 타협하고 굴복하기도 한다. 자신이 믿는 대로 세상을 이끌려는 예술가와는 다르다. 예술가는 점을 하나 찍어놓고 그게 우리의 미래라고 말하기도 하고 아무것도 그려놓지 않고 이게 세상의 허무함이라고 말하기도 한다.


오랫동안 타고 다닐 명품 스포츠카도 아닌 범퍼카를 고르며 아이가 겪는 고민의 무게는 결코 가볍지 않다. 그렇기에 디자이너는 작은 것도 함부로 쉽게 넘길 수 없다. 우리는 행복을 찾기 위해 각자의 취향으로 저마다 다른 이야기를 만들어가는 존재이기 때문이다. 이처럼 세상은 수많은 취향과 이야기가 얽힌 곳이다. 세상에 비친 아이의 눈을 통해 패턴이 발견되고 사물이 돌아가는 원리까지 짐작하게 된다. 그 일정한 원리를 발판삼아 디자이너는 동시대의 집단들을 설득하고 오류를 찾아간다. 그깟 사소한 취향에서 등장한 범퍼카는 무수한 다른 형태로 반복되어 사회의 정체성에 이르게 된다. 그런데 쉽지 않다. 가령, 그때 조금이라도 더 멋진 범퍼카를 고르려고 무지 애쓰던 아이는 이제 범퍼카는 쳐다보지도 않는다. 오히려 클래식카에 열광하는 친구들과 어울리더니 이제는 클래식카만 보면 감탄을 한다. 아빠인 나는 죽어라고 일해서 멋진 신차를 만들어놨는데 아이는 50년은 족히 된 옛날 차가 더 멋있다고 한다.


이건 멋진 걸 보고 못 보고의 문제가 아니다. 취향에 얽힌 각자의 구구절절한 사연의 문제다. 할아버지가 좋아하던 차에 의미를 부여하는 어느 유러피언들처럼 이들은 자동차를 고르는 취향 속에 저마다의 사연을 잔뜩 집어넣는다. 각자의 고집스럽고 절절한 사연은 더 특별한 취향을 만들어놓는다. 그래서 취향저격이 더 어려워진다. 일일이 그들을 찾아가 들을 수는 없는 노릇이기 때문이다. 게다가 클래식카처럼 그들의 이야기엔 몇 십 년의 세월이 담겨 있다. 각자의 이야기에서 시작한 이 사소함을 이해하다보면 누군가의 이야기는 다수가 따라갈 수 있는 가이드라인, 즉 문화가 된다.



라디오

소리로 그리는 세상

시골에서 자란 아버지의 이야기다. 어릴 때 한번은 어두컴컴한 장롱 위에서 흘러나오는 소리에 졸도할 뻔했다고 한다. 아버지의 아버지, 즉 나의 할아버지가 언젠가 서울에 다녀오신 후로 손이 닿지 않을 정도로 높은 장롱 위에서 아침이면 누군가의 음성이 흘러나왔다고 한다. 당시 시골 촌놈에 불과했던 아버지에게는 너무 무서운 소리였다. 천장과 장롱의 어둑한 틈에서 목소리, 음악, 긴급한 뉴스 등 별별 소리가 나오니 별의별 상상을 다 했다고 한다. 혼자 내린 결론이 위에 누군가 누워 있다는 것이었으므로, 한동안 라디오 소리가 흘러나오는 안방은 아버지에게 공포의 밀실이었다.


뒤늦게 장롱 위에 누가 누워 있는 것이 아니라, 라디오라는 신기한 기계장치가 있다는 것을 알게 되면서 거기서 나오는 소리의 정체를 알아냈다. 신기한 음성과 지직대는 소음, 다양하고 신비하게 들리던 음악은 촌놈의 귀에 달짝지근하기 그지없었다. 이제 그 안에 사람이 진짜로 누워 있다고 하더라도 더 이상 무섭지 않고 그 소리를 계속 듣고 싶었다.


한번은 어느 성악가의 곡에 푹 빠져 그 곡이 끝날 때까지 자리를 뜰 수 없었고 곡이 끝난 후 진행자가 말하는 곡의 제목을 받아 적으려고 했는데 곡명인지 원곡자의 이름인지 구분 못할 낯선 단어에 무척 당황했다고 한다. 제목을 듣자마자 금방 까먹을 것 같았던 소년은 필기구를 급히 찾다가 결국에는 안방에 있는 날카로운 재봉 가위를 집어들었다. 얼마나 급했던지, 어머니가 시집올 때 해온 아끼고 아끼던 장롱 안쪽에 들리는 대로 글자를 새겼다. 정확한 곡명은 ‘돌아오라 소렌토로’였는데, 소년은 ‘돌아오라 소련 토로’라고 잘못 새겨넣었다. 생전 처음 들어본 이탈리아 소렌토의 지명을 당시에 익숙했던 구소련의 이름으로 착각했던 것이다. 소년은 소련이란 나라에서 이렇게 아름다운 음악이 탄생했다고 착각했지만, 차이콥스키와 라흐마니노프와 같은 걸출한 음악가가 소련 출신이기는 하니, 소년의 엉터리 지식은 아주 잘못된 것은 아니었다.


이후 소년은 시골 학교의 음악 수업에서는 배우지도 못할 음악들을 듣기 위해 장롱 앞에 자주 머물렀고, 장롱 위 괴물 덕분에 음악을 익히며 음악가가 되는 꿈을 꾸었다. 교가 가사를 외우지 못해 혼이 나거나 4절까지 있는 비방한 애국가를 토씨하나 틀리지 않고 달달 외워야 했던 음악 시간보다는 그저 흐르는 대로 음악과 음성에 모든 걸 맡길 수 있는 라디오 소리가 촌구석의 소년에게는 큰 행복이었다. 이후 서울에 있는 고등학교로 전학 간 후 처음으로 어렵게 손에 넣은 물건이 ‘돌아오라 소렌토로’가 들어 있는 LP판이었다. 물론 전축은 형편상 가당찮으니 당장 소리를 듣지는 못하더라도 그저 LP판을 소유했다는 이유 하나만으로 기쁨을 얻었다. 이 모든 것은 장롱 위에 누워 있던 정체 모를 누군가의 덕분이었다.


그 소년의 아들인 내가 살고 있는 독일의 작은 도시 잉골슈타트는 장롱 위에 누워 있을 법한 괴물이 등장하는 으슥한 소설 ‘프랑켄슈타인’의 배경인 도시다. 이 도시는 도나우강이 동서로 가로지른다. 집에서 정확히 10분만 걸어가면 도나우강을 볼 수 있다. 아버지는 이오시프 이바노비치의 ‘도나우강의 잔물결’이라는 곡을 처음 들었을 때 대체 도나우강은 얼마나 다른 강이길래 물결이 잔물결일까, 물결이 얼마나 아름다우면 이런 곡이 떠올랐을까 늘 궁금했다고 했다. 한번은 독일에 오신 아버지가 내게 이런 말씀을 했다.


“고맙다, 아들아. 꿈에 그리던 도나우강 옆에 내 아들이 사는 것만으로도 행복하다.”


내 대답은 “그런데 잔물결 참 별거 없죠?”였다. 아름다움이나 크기로 보나 한강이 더 운치 있으니 말이다.



자동차

형태는 기능을 따른다

고속도로에서 잘생기고 요란한 소리가 나고 차체가 낮은 페라리 같은 자동차가 빠르게 지나갈 때면 아니는 하던 걸 멈추고 시선을 던진다. 그리고 맹수 같은 자동차의 모습에 감탄사를 던진다. 아이만 그런 것이 아니다. 나도 그렇고 차에 조금도 관심이 없는 사람이라 할지라도 저 요란하고 멋진 물건이 도로를 지나갈 때면 하던 일을 멈추고 잠시라도 쳐다본다. 멋진 자동차가 지나가는 일은 모두의 시선을 사로잡는다.


“와!”


자동차는 독립적인 문화의 총체다. 누군가는 바퀴 달린 외교관이라고 할 만큼 자동차는 한 국가의 문화를 그대로 보여준다. 작은 볼트 하나에서 시작하여 커다란 형체를 이루고 도로 위를 질주하기까지, 수만 개의 부품으로 구성된 고뇌의 산물인 자동차는 산업의 총체다. 말을 타고 달리기 시작한 이후 인간은 몸을 싣고 보다 빠르게 이동하기 위한 수단을 진화시켜왔다. 자동차라는 발명을 통해 인류의 편리를 도모했음에도 불구하고 지금 우리가 직면한 배기가스에 따른 환경문제, 주차 문제와 같은 공간의 문제에 이르기까지 예상치 못한 문제를 낳기도 했다. 이처럼 자동차는 진화하는 모습을 통해 긍정적인 면과 부정인 단면을 지니고 있는 총체가 되었다.


또 수많은 브랜드는 그들의 역사와 제조철학에 이르는 각자의 모습을 자동차에 그대로 반영하는 데 여념이 없다. 좋은 자동차를 만드는 나라치고 경제적으로 어려운 국가는 없다. 독일에 가보지 않았어도 독일산 자동차를 보면 독일이란 곳이 어떠할지, 독일인들이 어떤 성향을 지닌 사람들일지 대략 짐작이 될 만큼 자동차는 하나의 문화권을 대변한다. 이 특별한 물체는 인간이 엔진이라는 동력을 탄생시킨 후 ‘운송수단’이라는 불변의 용도를 바탕으로 끊임없이 진화하고 있다. 즉 헨리 포드에 의해서 탄생한 이후 자동차는 여전히 ‘스스로 움직이는 물체’로 남아 있는 것이다.


세상은 하루가 다르게 서로가 서로를 통합시킨다. 마치 내 손의 전화기 속으로 모든 기술이 깡그리 들어간 것처럼 말이다. 세상의 편리가 모두 하나의 물체로 편입되어버렸다. 모든 기능이 통합되니 한때 각자의 분야에서 독립된 비중을 차지했던 것들이 하나둘씩 설 자리를 잃어버렸다. 더 이상 독립된 개체로 남아있을 이유가 없어졌다.


이러한 세상의 위협적인 급진적 변화에도 자동차의 본질, 즉 이동수단이라는 역할만큼은 다른 것과 통합되지 않았다. 버스를 타고 동네를 이동하는 일이나 비행기를 타고 국경을 넘나드는 일은 다른 어떤 것에 통합될 수 없다. 즉 장소 간 이동은 ‘순간 이동’ 같은 마법이 세상에 등장하지 않는 한 운송수단 없이는 불가능하다. 공간 이동을 자동차, 비행기와 같은 수단에 의지하지 않고 이동하는 것은 머나먼 미래에도 불가능할 것이다. 물론 영화 ‘매트릭스’에서 케이블을 통해 사람이 시공간을 이동하는 모습을 그리기는 했지만, 영화 속 가상 현실의 이야기일 뿐이다. 물리학에서조차 순간 이동이 가능해지는 순간 우주의 존재에 대한 논의부터 다시 시작되어야 한다고 하니 분명 이동수단이라는 역할은 영원히 독립적일 것이다. 결국 사람들은 어디로 가기 위해선 문을 열어 이동수단에 올라야 하고, 바퀴를 달았던 운송수단에 몸을 싣고 예정된 길을 가로질러야만 목적지에 도달할 수 있다. 단지 동력기관이 종류에 따라 목적지에 도착하는 시간만 좀 다를 뿐이다. 특히나 자동차는 우리의 일상에 보다 가깝게 있기 때문에 바퀴로 땅 위를 달리는 자동차의 독립성은 더욱 특별해진다.


‘형태는 기능을 따른다.’


한편 아이의 감탄처럼 자동차를 바라보는 일반적인 대중의 시선은 크게 ‘멋지다’ 혹은 ‘멋지지 않다’로 나뉜다. 자동차는 아무리 복잡한 기능과 좋은 성능이 있다고 할지라도 ‘첫인상’, 즉 생김새에 대한 것을 쉽게 간과할 수 없다는 얘기다. 자동차를 애기하면 대표적으로 독일이 빠질 수 없다. 철학자 니체가 언급했듯이 독일인들은 자신이 체험한 것을 질질 끌고 가는 데 탁월하다. 자동차 한 대를 만드는 데에는 지독할 만큼의 인내가 필요한 것과 같다. 그래서 자동차는 독일들이 평생에 걸쳐 만들기에 매우 적합한 물건이다. 독일인을 대표하는 ‘솔직함(offenheit)’과 ‘우직함(biderkeit)’, 이 두 단어만으로도 자동차 제조업을 쉽게 묘사할 수 있다.


‘형태는 기능을 따른다(Form follows function)’를 통해 잘 알려진 독일의 디자인 학교 바우하우스. 이들의 슬로건은 과연 ‘단순한 게 최고’라는 걸까? 물론 일반적으로 단순함이 중요하다는 뜻으로 해석할 수 있다. 하지만 이 문구를 기술적으로 정확하게 이해하는 경우는 많지 않다. 먼저 ‘형태는 기능을 따른다는 것’은 형태와 기능 중 뭐가 중요한지를 나누는 것에 결코 큰 의미를 두지 않는다. 물론 형태가 기능을 간과하고 섣부른 형상을 갖춰서는 안 된다. 형태가 기능을 완벽하게 존중하지 않으면 모양새는 조잡해지고 기능은 조악해진다. 한마디로 기능을 숨기지 않고 솔직하게 만들자는 이야기다. 기능 때문에 어쩔 수 없이 심미적으로 못생길 수 있는 부분조차 솔직하게 인정하고 더 드러내자는 것이다.


시공을 초월하여 앞으로도 영원히 사람을 이동시켜야 할 자동차의 고집스러운 숙명은 그 존재의 가치를 더욱 숭고하게 한다. 언제나 볼트 하나에서 시작해 완성된 모습을 갖출 때까지, ‘멋’보다는 더 ‘빠르고’ ‘안락’하기 위해 노력할 때, 즉 집착에 가까울 만큼 기능에 충실하다 보면 한층 더 우아해질 것이다. 물론 무조건 기능을 따른다고 수억 원짜리 페라리나 람보르기니와 같은 모습이 된다는 말은 아니다. 동일한 조건일 때, 더 나은 것이 되기 위해서 멋보다 본질에 충실할 때, 즉 형태는 기능을 따르며, 멋보다는 편리를 따르고 꾸밈보다는 안전을 추구해야 한다. 번지르르한 겉모습보다 내면으로부터 좀더 사색해야 한다는 철학적 조언도 다르지 않다. 자꾸 한번 더 치장하고 싶은 마음이 들더라도 두 눈 질끈 감고 욕심을 내려본다면 일을, 그리고 속는 셈 치고, 한번 더 기능을 따른다면, 나 스스로도 ‘멋지다!’고 만족할 수 있는 오래 기억될 내실 있는 아름다움을 얻게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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