날마다, 기타

   
김철연
ǻ
싱긋
   
12000
2023�� 02��



■ 책 소개


뮤지션, 배우, 출판인의 기타 선생님
싱어송라이터 김철연이 딩가딩가 기타를 치며 허우적거리며 살아가는 이야기

“지금도 음악만큼 아름다운 건 세상에 존재할 수 없다”며 언제나 음악을 최고로 여기는 사람. 음악에 삶의 전부를 걸었다가 삶의 일부로 축소하기 위해, 미련을 갖지 않기 위해 안간힘을 쓰는 사람. 음악을 좋아할수록, 음악에 미칠수록 점점 더 누추해지는 자신을 발견하면서도, 그래도 여전히 음악을 꿈꾸는 사람. 평생 딩가딩가 기타를 치며 노래를 부르고 춤추고 살고 싶었지만, 세상에 부딪히며 음악에 대한 열정을 의도적으로 누수시키며 궤도를 조금 수정한 싱어송라이터이자 기타 선생 김철연의 에세이이다. 가수와 기타 레슨을 업으로 삼으면서 느껴왔던 현실과 그 과정에서 만난 소소한 우정과 사랑 이야기를 담았다. 이 책에는 오랜 시간 싱어송라이터로 살며 연마한 필력으로 지금까지 어디에서도 볼 수 없었던 새로운 글맛, 음악 때문에 애절하고 처절하고 때로는 찌질하지만, 또 음악 덕분에 재미있고 유쾌하고 사랑스러운 ‘김철연’의 이야기가 담겨있다.

■ 저자 김철연
서울예대에서 실용음악을 전공했다. 김철연이라는 이름으로 한 장의 정규 음반과 싱글 음원 두 곡을 발표했고, 지금은 기타로 학생들에게 음악을 가르치고 있다. 10대 때는 댄서가 꿈이었다. 20대 때는 뮤지션이 꿈이었고, 30대 때는 좋은 선생님이 꿈이었다. (‘K-POP스타’도 꿈이었다.) 40대인 지금은 정확한 꿈이 없다. 기타도 치고 음악과 더불어 아내와 맛있는 거 먹으며 평탄하게 사는 게 꿈이라면 꿈이다.

되고 싶었던 게 명확하고 많았던 시절에 비하면 뭔가 상실감과 허전함도 있긴 하지만 오늘도 ‘보통의 삶’을 즐기며 살고 있다. 나에게 꿈이라는 것이 사라져버린다면 절망적인 삶을 살게 될 것이라고 막연히 생각했었다. 하지만 지금 보면 그리 절망적이지도, 우울하지도 않다.

■ 차례
프롤로그

기타 선생님이 되었다
당연하지 않을 수 있다
어른들은 더 모른다
음악 하는 친구들
군대 그리고 기타
갤럭시 안드로메다
초라한 뮤지션의 발걸음 1
초라한 뮤지션의 발걸음 2
뮤지션의 재능 기부
‘산다라박’ 기타 선생님
선생님은 커리큘럼을 만들고, 커리큘럼은 선생님을 만든다
방과 후 수업
기타는 기본기가 중요할까, 아니면 재미가 중요할까?
‘아이돌’이라는 이름에 가려진 예술가
레슨이 끝나고 난 뒤
빌런과 맞서 싸우며 음악 하기
음악 샤워
버스킹
밥 잘 사주는 팬
이제 나도 기타를 치면 손가락이 아프다
급매, 기타 팝니다
새벽 기타
영화 보고 노래 만들기
반려동물에게 곡 써주기
“기타 이름이 뭐예요?”

에필로그

 




날마다, 기타


기타 선생님이 되었다

2009년 2월 서울예술대학교 실용음악과를 졸업했다. 서울예대에 합격했을 땐 당장이라도 유명한 가수가 될 것 같았지만, 막상 졸업을 앞두고 보니 뭘 해야 할지 알 수 없었다. 앞으로 내가 음악을 계속할 수 있을까 막막했다.


막막한 마음에 무작정 홍대에 방을 얻었다. 가진 돈은 많지 않았지만, 아니 거의 없었지만 졸업과 동시에 백수가 될 수는 없었다. 처음 몇 달은 모아두었던 돈으로 생활하고 그다음부터는 클럽 공연과 버스킹으로 돈을 벌어 월세를 낼 생각이었다. 하지만 클럽 공연과 버스킹을 해서 돈을 벌겠다는 생각은 세상 순진한, 아직 물정을 너무 모르는 어린 뮤지션의 엄청난 착각이었다. 그래서 나도 결국 친구들처럼 실용음악학원에서 레슨을 하기로 결정했다.


음악을 하며 내가 노력한 만큼 돈을 벌 수 있는 방법은 기타 레슨밖에 없었다. 이런 현실이 슬펐지만 한편으론 레슨으로라도 돈을 벌 수 있어 다행이라 생각했다. 기타 레슨을 할 때는 책임감 있는 선생님으로, 무대에서 공연을 할 때는 책임감 있는 선생님으로, 무대에서 공연을 할 때는 자유로운 영혼의 뮤지션으로, 선생님과 뮤지션의 on, off 스위치를 껐다 켰다 했다. 어느 순간 나는 책임감 있는 선생님도 아니고, 자유로운 영혼의 뮤지션도 아닌 그 중간쯤 어딘가 자리한 사람이 되어 있었다.


학생들이 어려워하는 것들을 넘어가거나 이해할 때까지 계속 기다려주다보니 어느 순간 레슨의 방향을 잃어버릴 때도 있었다. 학생이 길을 잃어버렸을 때 나도 같이 길을 잃지 않을 방법이 없을까 고민하다가 기타를 취미로 배우려는 사람들만의 위한 교재로 만들어보기도 했다.


내가 만든 교재로 레슨을 하니 학생들이 어디쯤 와있는지, 무엇을 어려워하는지 한눈에 파악할 수 있었다. 학생이 어려워할 때도 나는 길을 잃지 않고 한 챕터 한 챕터 끌고 갈 수 있었다. 레슨생을 위해서 교재를 만들었지만, 레슨을 할 때 내가 만든 교재로 가르치면 내가 더 신이 났다.


기타 레슨을 하면 할수록 나랑 선생님이라는 직업이 잘 맞는다는 생각이 들었다. 대학교수도 아니고 임용고시를 패스한 학교 선생님도 아닌, 학원에서 기타를 가르치는 알바 선생이지만 진짜 좋은 선생님이 되고 싶었다.


알바로 시작한 레슨이었지만, 레슨을 하면 할수록 내가 기타를 잘 가르치려는 이유와 좋은 선생님이 되려는 이유가 확실해졌다. 바쁜 일상 속에서 시간과 용기를 내어 기타를 배우러 온 학생들에게 기타를 배우기로 한 그 결심이 틀리지 않았다는 걸 보여주고 싶었다.


음악 하는 친구들

2003년 서울예술대학교 실용음악과에 입학한 후 난 음악 소년이 되었다. 밥 먹고 음악 하고, 음악 하고 밥 먹고, 술 먹고 음악 하고, 음악 하고 술 먹고, 음악에 심취해 하루하루를 보냈다. 잠에서 깨면 가장 먼저 스트레칭을 하는 대신 입을 풀고, 안무를 하는 대신 가사를 외웠다.


합주를 하며 드럼 연주에 스텝을 밟고, 베이스 연주에 맞춰 ‘아이솔레이션(목, 어깨, 가슴, 골반 등 신체의 한 부분만을 움직이는 것)’을 하고, 기타 솔로 연주에 맞춰 몸을 움직였다. 기타 솔로 연주가 끝나면 나도 제대로 춤을 추며 온몸으로 솔로를 했다. 자신의 연주에 춤을 추는 나와 나의 춤에 연주를 해주는 친구들은 서로 재미있어하며 땀범벅이 될 때까지 합주를 했다.


드럼 앤 베이스, 트립팝 등 이런 곡 저런 곡을 만들어보다 아방가르드 같은 이상야릇한 곡을 만들기도 했다. 어떻게 편곡하면 아름다워질지, 멋있어질지, 슬퍼질지, 우리의 감정을 흔들 수 있는 음악이 될지 우린 밤새 고민했고, 연구했다.


그때 우리는 너 나 할 것 없이 모두 엄청난 것을 만들고 싶어했고, 또 엄청난 것을 만들고 있었다. 우리의 눈은 피곤에 반쯤 감겨 있을 때도 순간순간 아주 밝게 빛났다. 서로 말을 하고 싶어했고, 또 서로의 이야기를 듣고 이해하고 싶어했다. 우리들의 노래는 합주를 통해 자신만의 세계에 대한 욕심과 또 다른 세계에 대한 배려가 함께 담겨 아름다워졌다. 매일 새로운 음악을 찾아 떠나는 우리들의 항해는 두려움보단 기대감과 즐거움이 더 컸다.


서울예대에서 만난 친구들의 연주 실력은 정말 수준급이었다. 이런 친구들과 같이 음악을 하고 있는 내가 자랑스러울 만큼 세련되게 느껴졌다. 덕분에 난 합주를 하며 드럼, 베이스, 기타, 피아노 등의 악기를 전반적으로 이해하게 되었고 음악을 듣는 귀도 생겼다. 친구 따라 강남 간다는 말처럼 그 친구들 덕분에 단시간 엄청나게 성장했다.


밤새워 합주를 하고 학교를 나올 때면 피곤하다기보다는 행복하다는 느낌을 받았다. 차가운 새벽 공기를 마시며 집으로 가는 길이면 친구들과 밤새도록 춤 연습을 하던 때처럼 꿈을 되찾은 거 같았다.


나는 음악이 너무 좋았다. 실은, 음악 하는 친구들이 더 좋았고, 그들과 합주하는 게 더욱더 좋았다. 같은 꿈을 꾸고 응원해주는 친구가 옆에 있다는 게 얼마나 소중한지 알았다. 음악 하는 친구들과의 시간이 나에게는 아주 소중했다.


나는 대학에서 음악을 같이하는 친구들에게 엄청난 영향을 받았다. 친구들은 친구이면서 선생님이기도 했다. 하지만 무조건적으로 나만 그들의 이야기를 듣는 관계는 아니었다. 같이 음악을 만들며 고민하고, 대등한 관계 속에서 서로의 의견을 날것 그대로 주고받았다. 우리는 함께 여러 방향으로 답을 찾아다녔고, 그렇게 같이 성장할 수 있었다.


믹싱과 마스터링이 잘된 음악보다, 처음 만들었던 상태 그대로의 음악이 더 좋을 때가 있다. 왠지 그대로 받아들여야만 할 것 같은 선생님이나 교수님의 이야기가 아니라 자신의 또 다른 고민, 생각들과 마주했으면 했다.


요즈음은 음악 하는 친구들과 연락을 자주 하지 못하지만 아직도 서로의 음악을 응원해주는 마음은 한결같다. 어쩌다 만나 대학 시절 이야기를 할 때면 정말 많이 웃게 된다. LP판을 차 위에 올려놓은 채 깜빡하고 도로를 달린 이야기, 친구의 기타를 빌려 치다가 잃어버렸는데, 잃어버린 기타의 주인이 화가 나 그 친구의 기타를 빌려 팔아버린 이야기 등 매번 똑같은 이야기인데도 항상 재미있다.


시간이 흐를수록, 우리의 추억들이 희미해질수록 그것들 하나하나가 더 소중하게 느껴진다. 대학에서 만난 내 음악 친구들은 지금까지도 이 험난하고 힘든 음악 생활을 버틸 수 있게 서로 돕고 있다. 그 학생도 자신과 잘 맞는 음악 친구들이 생긴다면 조금이나마 외롭지 않게 음악을 할 수 있을 거라 생각한다. 



군대 그리고 기타

서울예대를 1년 다니고 휴학을 했다. 그리고 마음이 맞는 친구들과 밴드를 만들어 홍대와 대학로 라이브 클럽에서 본격적으로 공연을 시작했다. 그러던 중 입영 통지서를 받았다. 어차피 가야 할 군대라면 빨리 다녀오자는 생각으로 밴드 친구들에게 이야기하고, 그해 8월 입대했다.


아침에 일어나면 항상 소대 모포의 각을 잡고, 전투화를 한 줄로 정렬하고, 선임들이 말하는 바른 자세와 바른 걸음걸이로 절도 있게 움직여야 했다. 심지어 군가까지도 대부분 정박에 딱딱 맞춰 똑같이 불러야 했다.


군가도 노래고 음악이었지만, 옆 소대보다 더 크게 소리를 질러 우리 소대의 군기가 더 확실히 잡혀 있다는 것을 보이는 게 중요했다. 군기가 바짝 들었다며 선임에게 칭찬을 받았을 때쯤, 군가를 부르던 내 목소리도 쉬어버렸다. 내가 그렇게 사랑했던 음악까지도 군대에서는 나를 이렇게 힘들게 한다는 게 슬펐다.


가끔씩 1소대 병장은 우리 소대로 들어와 잠깐 애 좀 빌려 가겠다며 우리 소대 병장에게 허락을 받고 나를 데려갔다. 눈치는 보였지만 그래도 1소대로 가서 기타를 가르쳐주며 잠시나마 기타를 칠 수 있다는 게 너무 행복했다. 기타를 품에 안고 코드를 연주할 때, 기타의 울림과 가슴으로 전해지는 미세한 진동이 좋았다. 예전에 학교에서도 친구의 기타를 가끔씩 쳤는데 왜 그땐 이런 느낌을 몰랐을까 싶었다.


일병 4호봉쯤 된 후에는 모든 일과가 끝나면 의무대로 가서 기타를 빌렸다. 어두운 의무대 앞 화단에 걸터앉아 저녁 점호 준비 전까지 이삼십 분 기타를 치며 노래를 만들었다. 이등병 때는 꿈도 꾸지 못했던 일들이었기에 그 짧은 시간이 꽤 길게 느껴졌다.


홍천의 달을 보며 기타를 치고 있으면 왠지 마음이 편안해졌다. 시키는 대로만 해야 하고 생각하라는 대로만 생각해야 하는 군대라는 곳에서 내가 보고 싶은 대로 보고, 듣고 싶은 대로 들을 수 있는 유일한 시간이었다.


상병 때는 소대에 나와 마음이 잘 통하는 후임 친구들이 생겨 같이 기타를 쳤다. 한 친구는 인디 음악을 좋아했고, 한 친구는 레게를 좋아했고, 한 친구는 뉴에이지 연주 음악을 좋아했다. 휴가를 마치고 군대로 복귀하는 날이면 자신이 좋아하는 밥 말리 CD나 인디 가수의 CD, 또는 뉴에이지 연주 악보를 사가지고 왔다.


그렇게 우리는 20대의 꿈틀거리는 감성을 기타를 치며 채웠고, 서로 좋아하는 음악에 의지하며 군 생활을 버텼다. ‘군인’ 하면 여자 아이돌에 환호하는 사람들로만 비치는데, 내 경험으론 감성 폭발한 20대 군인들은 김태희 등 여자 연예인만 좋아하진 않았다.


밝은 달을 볼 때면, 홍천의 밝은 달과 그 달빛 아래 기타와 만났던 내가 생각난다. 그리고 같이 기타를 치던 후임들이 생각난다. 아무것도 몰랐던, 서툴러서 더 아름다웠던 그 기타 소리가 생각난다.



음악 샤워

직장인이었던 적이 있다. 2018년의 일이다. 11개월 계약직이었지만, 아침에 출근하고 저녁에 퇴근하는 삶을 살았다. 출퇴근하는 데 왕복 두 시간이 조금 넘게 걸렸다. 아침저녁으로 출퇴근을 하며 가장 힘들었던 것은 일도 통근 거리도 아닌 주변의 소음들이었다.


아침에 버스를 타면 사람들 사이에 끼어 전화벨 소리, 통화 소리, 라디오 소리, 안내 방송 소리에 정신이 없었다. 버스에서 내려 지하철역으로 가는 길에는 여러 상점들의 스피커에서 당시 유행하던 노래들이 섞여 내 귀로 들어왔다.


그래서 난 출퇴근을 할 때면 항상 귀에 이어폰을 꽂고 다녔다. 음악을 한 곡 두 곡 듣다보면 아침의 붕 뜨는 감정도 조금 가라앉고 마음이 안정되는 듯했다. 이어폰으로 들려오는 좋아하는 아티스트의 음악들은 내가 보고 싶은 대로 세상을 볼 수 있게 해주고, 나만의 세상을 만들어주기도 했다. 원래도 좋아했지만, 그때 한참 더 빠져 있었던 이소라의 노래를 들으면 웃고 있는 사람도 뭔가 서글퍼 보였다.


정류장에 설 때마다 보이는 사람들의 표정, 깜박이는 신호등에 횡단보도를 뛰어가는 사람들, 임대 안내 종이가 붙어 있는 빈 점포와 조각난 건물들, 그 위로 보이는 십자가, 하늘의 구름까지 영화나 뮤직비디오의 한 장면처럼 하나하나 특색 있게 보였다.


이어폰 없는 날은 거리의 소음들과 좋지 못한 음향 상태로 나오는 음악들이 ‘내 일상 속 음악’이 되었다. 그런 날에는 집에 들어오자마자 대자로 뻗었다. 잠깐 동안 불 꺼진 방에 조용히 있다가 시간이 조금 지난 뒤 기타를 들었다. 그리고 내가 좋아하는 곡을 한 곡 두 곡 연주했다.



밥 잘 사주는 팬

밥도 먹지 못하고 쉬는 시간 없이 레슨을 하다 힘들어졌을 때쯤 석진 씨가 리치몬드 과자점 슈크림 빵을 사 왔다. 석진 씨는 내 공연을 자주 보러 와주고 내 음악을 좋아해준 나의 팬이었는데, 어느 날 기타를 배우겠다며 학원을 찾아와 나의 레슨생이 되었다.


그후로 어떤 땐 나의 팬 같기도 하고 어떤 땐 나의 레슨생 같기도 한 친구가 되었다. 석진 씨는 레슨 시간에 음악 이야기를 하는 걸 좋아했다. 그래서 레슨 시간의 절반은 서로 이야기를 나누는 데 쓰고 나머지 절반 동안 수업을 진행했다.


그때는 식진 씨가 내 팬이니까 기타를 배우는 것보다는 나랑 음악 이야기 하는 걸 더 좋아하는 거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지금 생각해보면 밥도 못 먹고 레슨을 하고 있는 내가 안쓰럽고 너무 지쳐 보여서 그랬던 게 아닌가싶다.


“지금은 제가 돈을 더 잘 버니 제가 살게요.”라고 하던 석진 씨의 말투가 지금도 생각난다. 보통 밥을 얻어먹으면 신경이 쓰이는데, 이상하게도 석진 씨한테는 밥을 얻어먹어도 부담스럽지 않았다. 지금 생각해도 정말 세상 이런 팬이 없었다.


그때 석진 씨가 사주었던 ‘따뜻한 밥’은 날 배부르게 했을 뿐더러 내 마음까지도 따뜻하게 데워주었다. 석진씨는 특정한 내 노래를 좋아하지는 않았지만, 내 노래를 이해해주었고 항상 귀 기울여 들어주었다.


어느 날은 나에게 한번 사용해보라며 작은 똘똘이 앰프를 선물해주었다. 나는 지금도 그 앰프를 사용하고 있다. 똘똘이 앰프에 잭을 꽂고 연주를 할 때면 항상 석진 씨가 강제 소환된다. 그럴 때마다 석진 씨에게 무언가를 선물하고 싶다는 생각을 하게 되는데, 아직까지도 마음뿐이다. 난 이 앰프를 고칠 수 있을 때까지 고쳐가며 사용할 거다. 자주 하는 농담이지만 “난 이것을 평생 사용할 거다.”


석진 씨가 이 이야기를 읽거나 듣게 된다면, “뭐 그런 거에 의미를 둬요, 버려요”라고 말할 거 같다. 석진 씨는 자신이 나에게 얼마나 큰 영향을 주었는지 상상하지 못할 것이다. 팬에게 받은 배려와 응원 덕분에 20대와 30대를 지나 40대가 된 지금도 나는 아름다운 기억들에 웃음 짓는다.



“기타 이름이 뭐예요?”

첫 레슨이 끝난 후 내가 학생들에게 하는 공식 질문이 있다. “기타 이름이 뭐예요?” 질문을 받은 학생들의 반응은 다양하다. 자신의 기타엔 벌써 있다며 이름을 말하며 신나하는 학생도 있고, “네? 이름이요?” 라고 되물으며 무슨 말을 하는 건지 몰라 머리를 갸우뚱하는 학생도 있다.


기타 메이스에서 기타를 꺼내는 일처럼 기타에 이름을 지어주는 일은 어떻게 보면 쉽지만, 그리 쉽지만은 않은 일이다. 몇 초 만에 짓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몇 날 며칠을 고민하다 나에게 지어줄 수 있냐며 부탁하는 학생들도 있다.


그럼 난 기타 이름을 같이 지어주기도 한다. 자신이 좋아하는 게 뭔지, 기타를 배워서 무엇을 하고 싶은지, 혹시 기타와 관련한 에피소드가 있는지, 기타를 선택한 이유가 무엇이었는지 학생에게 물으며 어떤 이름이 좋을지 같이 고민한다. “이 이름은 어떨까요?” 하고 서로 묻고 답하다보면 학생이 마음에 들어하는 이름을 지을 수 있었다. 어떤 학생은 내 덕분에 괜찮은 기타 이름을 지었다며 어느 날 나에게 작명값이라고 와인을 선물하기도 했다.


나의 첫 기타 이름은 갤럭시안이다. 갤럭시안은 내가 지어준 그 이름처럼 연주할 때마다 나를 갤럭시 안드로메다로 데려다주었다. 난 시간이 날 때마다 갤럭시안을 연주해주고, 프렛과 프렛 사이를 닦아주고 기름칠을 해주며 소중히 아꼈다.


예전에 갑자기 돈이 필요했는데 어디에서도 구할 곳이 없어 갤럭시안을 중고 장터에 올렸던 적이 있다. 기타를 사겠다는 문자를 받자마자 바로 정신이 들었다. 급한 돈이 해결되어 안 팔기로 했다고 죄송하다며 글을 바로 내리겠다고 문자를 보냈다.


나의 20대와 30대 때의 고민을 들어주고 나를 치료해주었던 주치의 겸 친구 갤럭시안은 어느 순간 그냥 악기가 아니라 나만의 친구, 나만의 보물이 되어 있었다. 각박한 세상에 지칠 때면 항상 나에게 위안을 주었던 갤럭시안의 소리를 다시는 들을 수 없다고 상상하니 순간 너무 아찔했다. 내 옆에 있는 갤럭시안을 보며 하마터면 돌이킬 수 없는 큰일을 벌일 뻔했다며 가슴을 쓸어내렸다.


어떤 방법으로든 서로에게 의미가 생기는 일들을 만들어보자. 오랜만에 만나도 어색하지 않은 친구처럼 세상 둘도 없는 친구가 될 수 있다.


지금 또는 나중에 ‘방구석에서 먼지만 쌓이고 있는 기타’라 할지라도 다시금 그 기타와 여행을 떠날 수 있게 될 것이다. 몇 년 동안 기타를 치지 못하고 있다는 그 학생도 바쁜 일들이 다 지나가 다시금 기타와 함께 새로운 여행을 떠날 수 있길 바라본다.


* * *


본 정보는 도서의 일부 내용으로만 구성되어 있으며, 보다 많은 정보와 지식은 반드시 책을 참조하셔야 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