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0세 철학자의 행복론

   
김형석 (지은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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열림원
   
16500
2022�� 28��



■ 책 소개


불안과 불평의 시대,
103세 철학자가 전하는 스스로 행복해지는 법

남에게 기쁨과 도움을 주는 것을 값진 삶이라 여기고 마지막까지 자신의 본분을 다하는 삶 속에서 진정한 행복의 의미를 찾은 사람이 있다. 대한민국 1세대 철학자이자 올해로 103세를 지나는 김형석 교수는 책을 통해 지금까지 살아온 인생에서 깨달은 행복의 철학을 전한다. 성실과 노력, 감사와 사랑, 긍정과 희망, 여유와 건강 등 우리 삶에서 행복을 부풀리는 소중한 가치들에 대한 자신만의 소회와 그간 경험한 행복에 대한 여러 이야기를 들려준다.

“그 많은 고생에도 사랑이 있었기에 행복했습니다.” 100세를 앞두고 한 대학에서 상을 받으며 그가 전한 수상 소감에는 행복의 비밀이 명징하게 담겨 있다. 스스로에 대한 깊은 확신과 사랑, 맡은 바에 대한 성실과 사랑, 타인에 대한 너른 이해와 사랑……. 행복은 지금 우리 삶 안에 사랑과 더불어 있음을 그는 힘주어 말한다.

■ 저자 김형석
1920년 평안북도 운산에서 태어나 평안남도 대동군 송산리에서 자랐다. 평양 숭실중학교를 거쳐 제3공립중학교를 졸업했으며, 일본 조치대학교 철학과를 졸업했다. 고향에서 해방을 맞이했고, 1947년 탈북하여 이후 7년간 서울중앙중고등학교의 교사와 교감으로 일했다. 1954년부터 31년간 연세대학교 철학과 교수로 봉직하며 한국 철학계의 기초를 다지고 후학을 양성했다. 현재 연세대학교 철학과 명예교수로, 103세의 나이에도 방송과 강연, 집필 등 왕성한 활동을 하고 있다.

저서로 『철학 개론』 『철학 입문』 『윤리학』 『역사철학』 『종교의 철학적 이해』 같은 철학서 외에도 『예수』 『어떻게 믿을 것인가』 『우리는 무엇을 믿는가』와 같이 기독교 신앙에 대한 성찰을 담은 책, 『영원과 사랑의 대화』 『백세 일기』 『남아 있는 시간을 위하여』 『백년을 살아보니』 『고독이라는 병』 등 사소한 일상사 속에서 작은 진리의 아름다움을 발견하고 현대인의 보편적 삶의 본질에 대해 성찰하는 에세이들을 펴냈다.

■ 차례
서문- 사랑이 있었기에 행복했습니다

1부 행복이 머무는 자리
지금 여기에 있는 그것, 행복
고난을 견딘 대가
고마운 세상에 살고 있다
행복한 삶은 어디에서 오는가
감사를 아는 마음
약간의 기적

2부 스스로 성장하는 힘
사랑한다면 주어야 할 것
우리에게 필요한 교훈
이제부터 내가 쓰고 싶은 말
인간은 일과 더불어 성장한다
솔직, 겸손, 긍정이 우리 삶에 필요한 이유
어느 편이 값진 인생인가
아름다움을 주고 아낌을 받는 삶

3부 인생을 사랑하고 즐기는 마음
지혜로운 사랑이 귀한 이유
좋은 친구가 된다는 것
만족스러운 인생을 위한 세 가지 선물
값진 인생을 산다는 것
마음의 여유를 갖자

4부 삶의 완성으로 가는 길
나라는 존재를 채우는 것들
약간 우울한 이야기
황혼의 우정과 인생의 순리
나의 건강 비결
건강은 만들어가는 것이다
죽음의 다른 이름, 삶
인생의 야간열차
사람은 얼마나 오래 사는 것이 좋은가

 




100세 철학자의 행복론


행복이 머무는 자리

지금 여기에 있는 그것, 행복

누구나 행복을 구한다. 그래서 행복이 목적인 것으로 착각하는 경우가 있다. 행복해지기 위해서 일을 한다는 생각은 할 수 있다. 그러나 행복이 먼 앞날에 있는 것은 아니다. 행복이 미래에만 있다면 인간은 행복해질 수가 없다. 미래는 아직 오지 않았고 우리는 현재에 살고 있기 때문이다.


그렇다고 행복이 과거에 있는 것은 더욱 아니다. 과거는 이미 사라져 없어졌기 때문에 과거의 행복도 있을 곳이 없다. 그러면 행복은 어디에 있는가. 행복이 머무는 곳은 언제나 현재뿐이다. 지금 여기에 있는 행복이 행복이다. 그런데 현재라는 시간은 하나의 과정이며 흐름이다. 미래에서 현재를 거쳐 과거로 간다고 해도 현재는 지나가는 과정이며, 시간이 과거로부터 현재를 거쳐 미래로 간다고 해도 현재는 지나가는 순간순간이다.


행복이 있다면 이러한 순간으로서의 현재에 있을 뿐이다. 인간에게는 행복에의 기대와 욕망이 본래부터 있으며, 그 행복에의 기대와 욕망을 미래로 예측했을 때 행복이 우리 앞에 있는 것이라고 생각할 수 있다. 그러나 미래를 위해 현재를 공허하게 만들 수는 없으며, 과거 때문에 현재를 잃는 어리석음을 범해서도 안 된다.


그렇다면 행복이 현재에만 머물 수 있고, 현재는 지나가는 시간의 과정이라면, 행복은 과정으로서의 현재에 머물러야 한다는 결론이 된다.


많은 가정이 자가용을 가지고 즐기는 시대다. 예전에 내가 처음 차를 샀을 때는 밤에 밖으로 나와 차를 닦으며 야단법석이었다. 내가 아는 친구는 차를 산 날 밤에는 한잠도 못 잤다고 말했다. 그러나 내 친구의 아들딸에게는 그런 행복이 없다. 태어날 때부터 차가 있어 세상은 다 그런 것으로 생각하면서 인생을 시작할 테니 말이다.


집도 그렇다. 처음에는 셋방에 살다가 전셋집으로 가는 즐거움이 있고, 도시 변두리의 작은 집을 샀다가 큰 집으로 옮겨가는 성장의 과정 속에서 행복을 누리는 것이다.


부모가 부자이기 때문에 처음부터 큰 집을 얻어 나가는 젊은이들은 부모들이 겪은 아기자기한 행복과 만족감을 맛보지 못한다. 그래서 서양 가정에서는 자력으로 살며 성장하도록 자녀들을 이끌어주는지 모른다. 그래야 자녀가 유능해지며 진정한 행복을 누릴 수 있기 때문이다.


만일 이와 반대로 한꺼번에 삶의 목표에 도달해버리고 만다면 그는 마지막 행복밖에는 누리지 못한ㄷ다. 등산의 즐거움은 밑바닥에서 높은 정상까지 올라가는 도중에 누리는 것이다. 헬리콥터로 꼭대기까지 수고 없이 올라가고 만다면 등산의 희열은 맛볼 수가 없다.


인생의 층층대를 걸어 올라가는 사람은 그 층계 하나하나에 인생의 뜻을 두면서 오르는 것이다. 그때그때의 의미와 감사를 모른다면 결국은 마지막 층계에 오른 즐거움밖에는 남을 바가 없지 않겠는가.


그런데 여기 더 중요한 문제가 남는다. 등산을 끝낸 사람은 정상에서 내려오지 않으면 안 된다. 등산객은 더 올라갈 곳이 없기 때문에 내려오는 일이 괴롭거나 불행을 동반하지 않는다. 그러나 인생의 과정은 그렇지 않다. 모든 즐거움과 행복은 올라갈 때에 있다. 내려오는 인생은 언제나 슬픔과 불행을 동반한다.


쓴 것이 끝나면 단 것이 온다는 말이 있다. 그것을 거꾸로 놓으면 단 것이 다한 뒤에는 쓴 것이 온다는 뜻이다. 더 올라갈 인생의 과정이 없는 사람은 불행을 겪어야 한다. 인생의 비극이 여기에 있다.


그래서 농사꾼의 아들은 아버지의 혜택을 받지 못했기 때문에 올라갈 것이 남아 있어도, 부자의 아들은 부모의 은혜를 얻어 높이 올라가 있기 때문에 내려오는 과정만이 있을 뿐이라는 이치가 성립할 수 있다.


부유한 사회의 청소년들보다는 가난한 국가의 젊은이들이 더 행복해질 수 있는 이유가 또한 여기에   있다. 인간은 올라가는 과정에서 즐거움과 행복을 누릴 수 있으나 퇴락하는 과정에서는 고통과 불행을 겪게 되어 있다.


그러므로 우리는 행복을 목적으로 삼고 인생이 그 행복을 향해 날아가는 것이라고 생각해서는 안 된다. 성장과 노력의 과정 속에서 행복을 찾아 누려야 한다.


감사를 아는 마음

나는 1947년 여름에 삼팔선을 넘어 남하하였다. 셋방이 없어 아는 사람의 문간에 머물게 되었다. 이부자리가 없고 방을 따뜻하게 할 연탄이 없어 산에서 솔방울과 솔잎들을 주워다가 불을 지피면서 보냈다. 잠자리에 들 때 옷을 벗는 것이 아니라 있는 대로 입어야 체온을 유지할 수 있는 상황이었다.


그때 나는 어떤 중고등학교의 교사로 취임하게 되었다. 취직이 결정되었다는 소식을 들은 내 아내는 금년에는 시골로 쌀을 사러 가지 않아도 되느냐고 반기면서 눈물을 글썽였다. 쌀을 날라다가 팔기도 했기 때문이다.


오늘날 안타까운 것은 노동 현장의 악조건과 분규가 심해지기 시작하면서 직장에 대한 직장인들의 불평과 불만이 높아졌고, 노사 간의 상호 고마움과 감사의 뜻은 약화된 것이다. 크게 불행스러운 일이다.


나는 평생을 교직에 몸담으면서 같은 일에도 감사하는 마음으로 일하는 친구들은 모두가 행복하고 일의 성취력도 앞서 있으나, 불만과 불평이 많은 동료들은 스스로 불행을 자초해서 일의 성과도 뒤처지는 것을 많이 보아왔다. 세월이 지나면 마침내는 감사할 줄 아는 직장인과 기업인이 성공하는 것이 보통이었다.


예전 한때는 불평과 불만을 터뜨리기 위해서 직장을 찾는 사람도 없지는 않았다. 만족스러운 일자리에 대한 열망으로 불평을 갖기 전에 내 기술과 경력의 성장을 먼저 생각하면 어떨까. 불만족에만 집중하는 직장인이 있다면 그 사람은 평생 불행한 위치에만 머물게 되고, 직장과 사회 속에서 진정한 내 자리를 찾아가기 힘들 것이다.


물론 사회에는 모순이 없지 않다. 그러나 일을 사랑하는 사람들이 그 어려움을 이겨낼 수 있고, 일에 감사할 줄 아는 사람이 모순투성이 사회를 혁신할 수 있는 자격을 갖게 되는 것이다.


결실의 계절, 모든 면에서 감사를 깨닫는 계절이 되어야겠다. 그것이 축복의 계절이기도 한 것이다.



스스로 성장하는 힘

솔직, 겸손, 긍정이 우리 삶에 필요한 이유

우리는 모두가 더 좋은 삶과 일터를 바라고 있다. 그것은 학생이 좋은 학교를 원하며 결혼을 앞둔 청년이 더 좋은 가정을 선택하는 것과 마찬가지 이치다.


그런데 이상한 것은 결혼을 한 사람들은 더 좋은 가정을 만들기 위해 노력하는데, 일터에 몸담은 사람은 내가 몸담고 있는 일터를 더 좋은 직장으로 만들겠다는 의지와 신념이 빈약하다. 심지어는 나의 업에 대해 감사하는 마음까지도 약화된 것 같은 인상을 준다. 때로는 투쟁 그 자체가 일의 목적이 된 사람도 있다. 일에 대한 감사의 뜻이 없는 사람은 그 일이 주는 행복을 누릴 수 없고, 직업에 대해 고마운 생각을 품지 못하는 사람은 결국 성공의 길을 열어가지 못한다.


나는 내 모친이 가난한 우리 집으로 시집을 와 품팔이를 해가면서 고생하던 일을 지금도 기억하고 있다. 그 대가로 노년에는 50명이나 되는 자손들의 존경과 사랑을 받으셨다. 내 아내는 삼팔선을 넘고 한국전쟁을 겪으면서 시골에서 쌀과 채소를 구해다 파는 수고를 마다하지 않았다. 그 결과로 생전에 많은 자녀들의 아낌과 사랑을 받았다.


우리도 나 자신이 몸담고 있는 일터를 더 좋은 곳으로 만들어 더 큰 행복과 보람을 주는 공간으로 키워나가야 할 것이 아니겠는가. 나는 혜택을 누리기만 하고 누군가가 좋은 일터를 알아서 만들어줄 것으로 기대한다면 그것은 이기적인 마음의 자세인 것이다.


더 좋은 일터를 만드는 하나의 조건은 우리의 일터는 좀 더 행복한 공간으로 만드는 것이다. 그리고 이 노력은 우리 모두의 책임이다. 회사의 대표 한 사람이나 간부 몇 사람만이 책임질 문제가 아니다. 행복은 만드는 사람에게 주어지는 선물인 것이다.


그러면 무엇이 우리를 행복하게 만들어주는가. 가장 선행하는 조건은 우리들의 마음가짐이며 그에 따르는 선하고 아름다운 인간관계다. 내 마음씨가 삐뚤어져 있는데 어떻게 즐거울 수 있으며, 내가 이기적이고 배타적인 성격을 가지고 있는데 어떻게 행복하고 즐거운 인간관계가 이루어질 수 있겠는가.


적어도 우리는 두세 가지 마음의 자세와 동료들 간의 선한 사귐을 갖도록 노력하려는 의지와 책임이 있어야 하겠다.


그 하나는 언제나 솔직하고 깨끗한 인품을 가지고 모든 일을 올바르게 처리하려는 태도와 자세다. 우리는 자칫하면 솔직하지 못하기 때문에 동료들의 신뢰와 협력을 얻지 못하며, 모든 면에서 깨끗하고 바르게 행동하지 못하기 때문에 친구나 상사들의 신임을 얻지 못하는 경우가 있다. 솔직하지 못하다는 것은 거짓이 낄 수 있는 가능성을 말하며, 깨끗하고 바르지 못하다는 것은 일을 함께하기 어렵다는 결과를 가져올 수 있다. 인간관계는 물론 직장과 사업 관계에 가장 중요한 것은 믿음과 협력이다. 남이 나를 믿어주지 않고 내가 남과 협력할 수 없다면 우리는 아무 일도 할 수가 없다. 그런 사람은 사업과 직장에 피해를 입히는 불행을 초래하게 된다.


일이 언제 우리에게 행복을 더해줄 수 있는가. 우리 모두가 좀 더 솔직하고 밝고 깨끗하며 올바른 마음을 가졌을 때 가능해진다. 그것은 나와 우리 모두에게 행복과 즐거움을 더해줄 수 있다.


나와 직장 생활의 조화와 즐거움을 증대시키기 위해서는 모두가 좀 더 겸손해져야 한다. 우리 중에는 선천적으로 겸손하며 성실한 성품을 가진 사람들이 있다. 그러나 대부분의 사람들은 대단치 않은 것을 가지고 교만해지며 실력 이상으로 자신을 과대평가하여 남들이 내 의견에 따르지 않는 것을 불만스럽게 생각하기 쉽다.


우리는 겸손을 위한 겸손이나 억지로 행하는 겸손을 바라지는 않는다. 언제나 스스로를 정당하게 평가하여 성실한 노력을 계속하기 위한 마음의 겸손을 높이 평가하는 것이다. 벼는 익을수록 머리를 숙인다는 격언은 우리 모두의 일터의 행복을 위한 조건이 아닐 수 없다.


예전 세대는 ‘하면 된다’는 구호를 부르짖으며 일에 임했고 그 결과로 오늘의 한국 경제를 쌓아 올렸다. 그러던 것이 최근에는 ‘하면 될까?’라는 소극적인 자세로 변했고, 소소수의 청년들은 ‘하기 싫다’는 쪽으로 흐르기도 한다.


우리는 무엇이든지 할 수 있고 해야 한다는 긍정적 자세를 갖는 기상이야말로 청춘들의 무기 아니겠는가.



삶의 완성으로 가는 길

나라는 존재를 채우는 것들

하이데거는 인간을 던져진 존재라고 했다. 누가 내던졌는지는 아무도 모른다. 따라서 내던진 이에게는 아무 책임도 물을 수가 없다. 우리가 아는 것은 ‘나는 이미 내던져진 존재로서의 스스로를 발견했다’는 사실뿐이다. 그러므로 끝없는 관심과 불안이 우리를 지배하고 있다. 던져진 곳으로 돌아갈 수도 없고 고요히 머물 만한 안식처도 없다. 고향을 상실한 현대인, 집 없는 나그네 같은 현실이 우리의 현실 존재다.


그렇다면 이제 남은 과제는 무엇인가? 어떻게든 잃어버린 고향을 찾아야 하며 안심하고 살 수 있는 고장을 이뤄놓아야 한다. 그것이 근본적인 과제이면서도 우리에게 주어진 지상명령이다.


이제 생각의 방향을 잠시 돌려보기로 하자. 과연 우리는 목적도 의미도 없이 던져진 존재일까? 빈 하늘에서 호박이 떨어지듯이 무책임하게, 아무 뜻도 없이 굴러떨어진 존재일까?


그렇다고 가정하자. 그래도 내가 이 세상에 태어났을 때는 나를 극진히 사랑해주는 부모가 있었고, 어떤 경우에라도 나를 저버리지 않는 형제가 있었다. 다정한 이웃들이 따뜻한 품을 제공해주었고, 뜻이 맞는 친구들이 사랑의 사귐을 지속해주었다. 이유나 조건을 묻지 않고 사랑해주는 사람들이 있었고 나의 삶을 끝까지 보살펴주는 친지, 동료들이 한가지로 삶을 누리고 있었다. 내가 좀 더 착하고 보람 있게 그들을 대했더라면 그들의 마음은 훨씬 더 가까이 있었을 것이며, 나는 그 깊고 넓은 정의를 잊을 수 없었을 것이다. 이렇게 생각한다면 나는 오히려 던져진 존재라기보다는 주어진 존재, 무엇인가를 위해 맡겨진 존재라고 봄이 맞겠다.


다시 생각을 연장해보자. 저 맑고 푸른 하늘, 유유히 넘나드는 넓은 바다의 파도, 우거진 숲속의 고요함, 제각기 다른 위치에서 밤하늘을 빛내주는 별들, 다정한 미소를 던져주고 열매를 맺는 화초들, 마을을 나눌 수 있는 다감한 벗들, 이유도 없이 깊은 사랑을 속삭일 수 있는 이성들, 고요한 산천을 울리는 새소리들......


그것이 곧 즐거운 삶이며 삶의 보람이며, 아름다움이 주는 행복 아닐까? 그 속에서 불만을 말하고 불행을 토로하며 불평을 일삼는 사람들은 지나치게 이기적이며, 자연과 우주의 질서를 모르는 태도와 처사가 아니었을까?


이렇게 본다면 인간은 던져진 존재가 아니다. 차라리 택함을 입은 존재, 축복을 받은 존재겠다. 그렇게 생각하는 사람도 적지 않다.


같은 것을 기쁘게도, 슬프게도 보는 것이 인간이다. 한 가지 사실을 괴롭게도, 즐겁게도 대하는 것이 우리들이다. 문제는 그중 어느 편이 나인가 함이다. 나는 어느 편일까?


그것은 우리들 각자의 문제다. 부정에서 긍정으로, 불안에서 믿음으로, 절망에서 희망으로, 상실에서 실제로의 길이 우리의 요청이며 뜻이다. 그 길을 채우기 위해 선조들이 걸어왔으며, 그 뜻의 충족을 위해 선인들이 노력해왔다. 그 정성과 수고를 계승할 책임이 우리에게 성실하게 주어져 있다.


공간의 무한성이 나의 참됨, 아름다움, 선함으로 채워질 수 있는 그때를 위하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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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 정보는 도서의 일부 내용으로만 구성되어 있으며, 보다 많은 정보와 지식은 반드시 책을 참조하셔야 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