토닥토닥, 숲길

   
박여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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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문아카이브
   
14000
2018�� 10��



 

토닥토닥, 숲길
(박여진 지음/백홍기 사진/예문아카이브/2018년 10월/304쪽/14,000원)

■ 책 소개

“타박타박 걷다 보면, 토닥토닥 위로 된다”
여행이 일상이 되는 힐링 산책길

일주일에 하루, ‘온전한 쉼’을 위해 자연으로 떠나는 작은 여행 안내서. 번역가 아내와 기자 남편이 전국을 누비며 찾아낸 가장 걷기 좋은 아름다운 산책길 62곳을 소개하는 책 《토닥토닥, 숲길》이 나왔다. 많은 사람이 바쁜 일상에서 벗어나 휴식과 재충전이 되는 느긋한 여행을 꿈꾼다. 그러나 시간이 없어서, 돈이 없어서, 준비가 복잡해서 등의 이유로 실천하지 못할 때가 있다. 큰 비용과 시간, 완벽한 준비가 있어야만 여행이 아니다. 이 책 한 권과 운동화만 있으면 무료한 주말이 설레는 여행으로 채워지는 특별한 일상이 시작된다.

늙은 나무 사이의 오솔길, 잣나무 껍질이 눈처럼 내리는 숲길, 동네 강아지가 마중 나오는 시골길, 고즈넉한 성곽길, 가슴 트이는 바닷가 마을길까지 자연과 전원에서만 느낄 수 있는 특유의 정서와 풍경을 에세이와 160여 컷의 사진으로 담아 생생하게 전한다. 또한 여행지 가는 법을 시작으로 추천 일정, 먹거리, 장날 등 실용적인 정보와 교통체증 없이 여행하는 법, 여독이 생기지 않는 팁, 여행하며 집안일과 취미를 해결하는 방법 등 수십 년간 축적된 여행 베테랑 부부의 노하우를 수록해 누구나 부담 없이 주말여행을 쉽고 알차게 보낼 수 있도록 구성했다.

■ 저자 박여진
번역가. 어릴 적부터 아버지를 따라 가족들과 숲과 오지 마을을 여행했다. 오랜 친구이기도 한 남편과 주말마다 여행을 다닌 지도 20년 가까이 흘렀다. “저축하듯 작은 여행이 쌓여 삶이 더욱 소중해졌다”는 그녀는 일상생활과 단절되지 않으면서도 완벽하게 쉬고 오는 주말여행 습관을 만들었다. 이런 베테랑답지 않게 길에 사마귀 한 마리만 있어도 무서워서 잘 지나가지 못한다. 그래서 남편 휴대전화에 ‘박쫄단’으로 저장되어 있다.
 
■ 사진 백홍기
잡지사 기자이자 다큐 사진작가.
직업 특성상 지방 출장이 많다 보니 방방곡곡 안 가본 곳이 없고 잘 알려지지 않은 소도시와 시골 정보에 훤하다. 오랜 취재 경험으로 익힌 관찰력과 친화력은 숲길에서도 발휘된다. 땅의 미세한 움직임을 포착해 두더지를 찾고 전투 개미와 연락병 개미를 구분하며 구름과 바람으로 날씨를 예측하는 일은 여행의 즐거움 중 하나다. 느긋하고 낙천적인 성격 탓에 늘 어처구니없는 일을 벌여 아내 휴대전화에 ‘얼척없다’로 저장되어 있다.

■ 차례
프롤로그
여행을 떠나기 전 알아두면 좋은 12가지
이 책의 활용법

1부_타박타박 가볍게: 쉼표가 필요한 날 훌쩍 떠나기 좋은 길
01_오래된 시간의 흔적을 따라 걷는 강화 교동도
대룡시장, 다을새길(바닷길), 다을새길(임도와 숲길)
02_강과 숲을 따라 무수한 이야기가 펼쳐지는 춘천
자전거길과 물레길, 김유정문학관과 실레이야기길, 레일바이크
03_툭 아무 때나 가도 늘 편안한 파주
반구정, 자운서원, 파주삼릉
04_잣나무 눈이 내리는 치유의 숲 횡성
횡성호수길, 청태산자연휴양림, 풍수원성당

2부_사색하며 깊게: 걸을수록 마음이 편안해지는 숲길
05_여운이 짙게 남는 신비한 숲 영월
광부의 길, 뼝창마을, 어라연, 청령포
06_강들이 태어나는 고귀한 숲 태백
검룡소, 철암탄광역사촌, 태백고생대자연사박물관, 구와우마을, 귀네미마을, 쿨 시네마 축제
07_탄광마을부터 밀밭까지 사연이 가득한 정선
정선아리랑시장, 조양강 수변길, 대촌마을, 사북석탄역사체험관
08_봄 여름 가을 겨울 겨룰 수 없이 아름다운 하동
박경리 토지길, 평사리 들판, 매암다원

3부_구석구석 천천히: 옛 정취에 취해 이야기가 길어지는 길
09_흔적만 남은 성곽 아래 평화로운 공주
고마나루 숲, 공산성과 산성시장, 무령왕릉
10_뒤로는 지혜의 산, 앞으로는 흰모래 강이 흐르는 아늑한 구례
운조루와 곡전대, 화엄사 구층암, 노고단
11_무구한 숲과 돌과 천 개의 불상이 끝없이 이어진 화순
둔동마을 숲정이길, 화순고인돌유적지, 운주사
12_오래된 나무와 책과 마루가 있는 풍경 안동
예던길, 도산서원, 화천서원, 병산서원, 월영교

4부_느릿느릿 오래: 자연의 품으로 들어가는 산책길
13_늙은 느티나무를 따라 세월을 돌아보는 괴산
괴산도서관, 오가리마을, 공림사, 산막이옛길, 화양구곡
14_푹신한 구름을 덮고 있는 순례의 길 청도
운문사, 사리암, 청도읍성, 소싸움
15_시간이 느리게 흘러가는 바람의 섬 거제도
바람의 언덕, 샛바람소리길과 구조라성, 공곶이
16_발길 닿는 곳마다 삶이 반짝이는 바닷가 마을 남해
미조항, 천하마을, 물건마을, 노도

에필로그

 




토닥토닥, 숲길


타박타박 가볍게: 쉼표가 필요한 날 훌쩍 떠나기 좋은 길

오래된 시간의 흔적을 따라 걷는 강화 교동도

여행은 기본적으로 불편하다. 때에 따라 장시간 운전해야 하고, 심사숙고해 고른 맛집 메뉴는 실패할 확률이 높으며, 잘 차려입은 옷은 거추장스럽고 편하게 입은 옷은 추레하다. 운동화는 덥고 샌들은 미끄럽다. 안 답답하고 안 미끄러운 운동화나 샌들은 안 예쁘다.


게다가 여행 중 비가 오면 눅눅해지고 눈이 오면 미끄러우며 눈이나 비가 오지 않은 날의 절반은 덥고 화창한 날의 절반은 꼭 무슨 일이 생겨 여행을 오지 못한다.


숲길 여행은 보통의 여행과 달리 늘 화장실 위치를 파악해둬야 하고, 물이 떨어지지 않도록 신경 써야 한다. 극한의 오지를 탐험하는 것은 아니지만 한창 좋은 길에 취해 있는데 화장실이 급하다거나 목이 마르면 모든 좋은 기분이 ‘화장실’ 또는 ‘갈증 해소’라는 하나의 욕구로 귀결되어 더 이상 여행을 즐기지 못하게 된다.


약간의 불편함을 전제로 여행 준비를 하다 보면 중간 어디 즈음에서 적정한 균형이 생긴다. 그 균형에서 시작하는 여행은 신발이 진흙에 빠지고, 낯선 곳에서 쩔쩔매고, 옷이 비에 흠뻑 젖기도 한다. 그러나 그런 당황스러운 순간에 전혀 다른 여행이 펼쳐진다. 교동도에서의 여행도 그랬다. 불편함 어딘가에 있는 ‘비일상성’은 좀 더 느리고 깊은 교동도를 보여줬다.


대룡시장

우리가 교동도에 도착한 날은 눈도 비도 내리지 않는 화창한 초여름의 오후였다. 예쁜 샌들이지만 발이 편했고 편한 옷차림은 그다지 추레하지 않았다. 파리 여행 갔을 때 기념품으로 사온 에코백을 처음으로 메고 나왔다. 여름이 오기 전 쓰려고 사둔 모자도 그날 처음 썼다. 모든 것이 산뜻했고 즐거웠다. 딱 하나, 지갑이 없다는 사실만 빼고는.


새 가방을 들고 나오면서 지갑을 전에 메던 가방에 두고 온 것이었다. 다시 돌아가기에는 너무 늦었고 그냥 즐기자니 마치 완벽하게 공부를 마치고 시험지를 받아들었는데 답안지에 표시할 컴퓨터용 펜이 없는 기분이었다.


대룡시장은 오래된 시간과 오래된 시간을 흉내 낸 현재의 시간이 뒤섞인 재미있는 시장이다. 골목마다 다방, 고무신, 옛날 세탁소 등 오래된 것들을 유쾌하게 재현한 상점들이 있다. 하늘에는 얼기설기 엮은 그물에 공처럼 생긴 열매들이 대롱대롱 매달려 있다. 한동안은 지갑이 없다는 사실도 잊은 채 시장 구경에 푹 빠졌다.


특히 이 시장에서 눈길을 사로잡은 것은 제비집이다. 상점 처마마다 제비들이 야무지게 지어놓은 집들이 있다. 백은 제비집을 보더니 카메라 셔터를 눌렀다.


“어......?”

“왜?”

“메모리카드를 집에 두고...”

백의 말 뒷부분은 잘 들리지도 않았다. 나는 깔깔대며 웃었다.


결국 우리는 맨입과 맨눈으로 시장을 누볐다. 상상으로 사 먹는 음료도 나쁘지 않았고 눈으로 찍는 사진도 괜찮았던 것 같다. 물건을 사지 않고 사진도 찍지 않으니 시간은 어색할 정도로 길었다.


몇 달 뒤 우리는 지갑을 두 번 세 번 확인하고 메모리도 두둑하게 챙겨 다시 이 시장을 찾았지만 상상 속에서 사 먹었던 음료가 훨씬 달고 시원했다. 백도 그때처럼 이곳저곳을 오래도록 관찰하고 머물지 않았다.


다을샛길(바닷길)

낯선 여행지에 가면 시간이 늘어난다. 비슷비슷한 일상을 살다 보면 감성이 새로운 더듬이를 세울 일이 별로 없다. 더듬이를 접어둔 채 늘 보던 풍경을 보고 늘 해오던 일을 하다 보면 시간은 늘 같은 속도로 흘러간다.


하지만 낯선 곳에 발을 디디는 순간, 시간은 왜곡된다. 신발 밑에서 비벼지고 으깨지며 ‘바스락’거리는 흙 소리와 익숙하지 않은 농도의 초록, 상념에서 주로 존재하던 바다의 실물, 아득한 시간이 타는 것 같은 냄새 속으로 들어가면 온 감각이 올올이 일어나 더듬이를 길게 뻗는다. 그때부터 시간은 아주 느리게 흘러간다. 그 시간 속에서는 일상의 사건과 사물에 대한 언어들도 빼곡한 ‘가용사전’ 밑바닥에서 존재감 없이 웅크리고 있던 말들이 나오기도 한다.


10월의 교동도는 아직 떠나지 않은 계절과 이제 막 도착한 계절이 공존하고 있었다. 논은 부드러운 황금색으로 출렁였고 길섶 장미는 아직 붉었다. 햇볕은 따가웠지만 바람은 선선했다. 여름도 가을도 아닌 계절에 도착한 우리는 남산포 입구에 주차를 하고 다을새길을 걷기 시작했다. 몇 달 전 초여름, 지갑과 카메라 없이 왔던 때보다 계절이 무르익어 있었다.


남산포에서 다을새길 이정표를 따라 걷다 보면 동진포가 나온다. 동진포에서부터 월선포까지는 바닷가 산책로다. 길 가장자리에는 길과 잡풀을 구분한 나무 기둥이 가지런하게 늘어서 있고 기둥과 기둥은 흰색 끈으로 이어져 있다. 길숲 풀들은 내 머리카락만큼이나 엉켜 있고, 길과 바다 사이에는 제방이 있다. 풀과 길과 바다가 단출한 경계로 구분된 산책로는 적당히 단절되고 적당히 열려 있어 느긋하고 편안했다.


다을새길(임도와 숲길)

월선포 선착장에서 교동향교로 향하는 임도에 접어들었다. 짙은 갈색 땅과 황금빛 논, 비현실적으로 푸른 하늘이 펼쳐졌다. 흙길을 따라다가 보니 그곳 풍경과 묘하게 어울리는 폐허가 있었다.


불에 탄 듯 여기저기 그을리고 칠이 다 벗겨져 희끗희끗한 기운만 남아 있는 시멘트벽에 유리가 다 깨진 아치형 창문이 위태롭게 매달려 열려 있었다. 내부는 더 황폐했다. 마룻바닥은 군데군데 들려 있고 제단은 성스러운 종교 의식이 행해졌으리라고는 짐작하기 어려울 정도로 비참했다. 알고 보니 그곳은 ‘교동도 폐교회’라 불리는 매우 유명한 곳이었다. 황폐함이 주는 묘한 서정성 때문인지 일부러 그곳을 찾아와 ‘폐(廢)’함을 감상하고 사진을 찍는 이들이 꽤 있었다.


페허와 숲길을 지나니 ‘농기계 은행 앞’이라는 버스 정류장에 어스름이 내려앉고 있었다. 주황색 가로등이 아늑하게 비추는 정류장 앞에서 우리는 웃음을 잔뜩 흘렸다. 미쳐 주을 새도 없이 저녁이 내려앉았다. 조금 더 걷고 나니 이윽고 우리가 처음 출발한 남산포였다. 다을새길을 걸은 물리적인 시간은 몇 시간이었지만 기억 속의 시간은 그보다 훨씬 촘촘하고 길었다.


어느 무료한 날, 교동도를 떠올리면 바닷가 산책로에서 풀을 막아 단정하게 길을 내준 흰색 끈에서부터 기억이 시작된다. 시간이 무한히 순환하던 바다와 깔깔거리던 우리의 웃음소리, 오래된 이야기들, 나른하게 엎드리던 오후의 햇살까지 하루 중 몇 시간에 불과했던 그 시간은 아주 긴 추억이 되어 우리 기억의 생을 늘려놓았다. 우리는 가늠할 수 없이 길어진 어떤 날, 어떤 시간들을 또 다시 갖게 되었다.



사색하며 깊게: 걸을수록 마음이 편안해지는 숲길

봄 여름 가을 겨울 겨룰 수 없이 아름다운 하동

사는 건 힘들다. 때론 절망적이다.


절망은 꾸준히 모질고 비극적이다. 자비는 드물고 희망은 고단하다. 비애를 향해 가망 없이 흘러가는 이 버거운 삶을 버티려고 우리는 노래하고, 기도하고, 꿈꾸고, 사랑한다.


박경리 작가는 그런 인간들의 삶을 ‘연민’을 가지고 바라봤다. 작가의 말대로 ‘탄생의 희열과 죽음의 비애라고 하는 두 가지 모순 위에 서 있는 삶’들이 ‘문서화된 땅’을 딛고 서서 사랑하고 증오하며 죽음이라는 비애를 향해 ‘홍수처럼 흘러간다.’ 그곳에서 토지가 시작된다. 비극의 탄생지인 토지에서 아등바등 살아가는 군상들 ‘삶에의 연민.’


악양 평사리 들판은 소설 《토지》가 시작되는 곳이다. 그리고 하동 여행을 시작하기 좋은 곳이기도 하다. 들판은 어느 계절이나 아름답다.


청보리가 꿈처럼 흔들리는 봄도, 벼가 푸르고 거칠게 자라는 여름도, 들판이 깊게 익은 가을도, 쓸쓸하게 황량한 겨울도, 모두 아름답다.


들판 가운데 소나무 두 그루가 서 있고 바람이 지날 때마다 청보리와 벼를 품은 들판이 우수수 일렁인다. 너무 아름다워서 마치 온 여행길이 순탄한 듯, 삶이 비애를 향해 흘러가고 있지 않은 듯 보인다. 하지만 바람이 지나가고 나면 뜨거운 태양이 내리쬔다. 자연의 무자비함을 피할 곳이 없다. 하동안 바람이든 태양이든 온몸으로 감당하고 여행을 시작해야 한다.


평사리 들판

평사리 들판에서는 봄에 보리가 익고 가을에 벼가 익는다. 겨우내 언 땅이 녹아 부드러워지면 흙을 헤피고 나온 보리싹들이 봄이 늦도록 푸른 꿈을 꾸다가 초여름에 여문 보리가 된다. 보리가 나간 자리에는 벼가 들어선다. 벼는 늦여름까지 진한 초록으로 꿈을 꾸다가 가을에 익는다. 평야는 땅을 녹이고 뿌리를 잡아주다가 겨울에 긴 잠을 잔다. 그렇게 오랜 세월을 녹고 단단해지고 굳고 다시 녹기를 반복한 평야는 무수한 생명들에게 무수히 많은 날의 목숨을 주었다.


백과 나는 들판을 하염없이 걸었다. 우리는 어디에서 멈춰야 할지 알지 못했다. 가끔 이런 순간들이 있다. 아무 목적도 지향도 없이 하던 일을 계속 하게 되는 순간, 바람과 들판 사이를 걸어들어갈수록 바람은 흩어지고 들판은 아득해진다. 한복판의 소나무 두 그루만 지긋했다. 섬진강으로 해가 저물며 어스름이 청보리를 담요처럼 덮었다. 청보리는 담요아래서 누렇게 여무는 꿈을 꿀 것이다.


우리는 들판에서의 그 순간을 오래도록 사랑했다.


매암다원

아무에게도 알려주고 싶지 않은 장소가 있다. 우리에게는 매암차문화박물관에 있는 매암다원이 그랬다. 차 박물관을 찾다가 우연히 알게 된 다원은 알고 보니 그렇게 비밀스럽게 다닐 필요가 없는 꽤 유명한 곳이었다.


매암다원에는 초록색 정원과 소박한 차 박물관, 작은 차밭을 보며 차를 즐길 수 있는 정원 테이블 등이 무심하고 편안하게 펼쳐져 있다. 다원은 무인으로 운영된다. 그래서 손수 차와 다기를 고르고 물을 끓이고 넉넉하게 차를 즐긴 다음, 사용한 다기를 설거지해야 한다. 번거롭게 느끼는 사람도 있겠지만 우리는 이 과정이 모두 즐거웠다. 게다가 차 한 잔 값이 3000원밖에 하지 않는다!


우리는 마음에 드는 차와 다기를 골라와 풍경 좋은 곳에 앉았다. 나는 최대한 차에 집중하고 싶었다. 차를 잘 알지는 못했지만 품위 있게 마시고 싶었다. 잘 모르는 것은 어쩐지 나를 주눅 들게 한다. 매암다원에서도 나는 최대한 소심하고 조심스레 차를 마셔본다. 하지만 백은 쉴 새 없이 두리번거리고, 어딘가에서 나타난 어린 개와 놀아주고, 이름 모를 곤충을 쫓아다니며 분주했다.


사실 아무래도 상관없었다. 낮결이 순하게 익어가는 시간, 먼지조차 투명하게 반짝이는 오후, 버려진 곳 없이 살뜰하게 꽃이 피고 윤기가 나는 정원, 결과 톤이 다른 초록들이 이어진 녹색의 능선. 이런 곳에서 차를 마시다 보면 인생이 아득하게 느껴진다. 시간이 무리 없이 잘 익어가고 있다는 생각이 든다.



느릿느릿 오래: 자연의 품으로 들어가는 산책길

발길 닿는 곳마다 삶이 반짝이는 바닷가 마을 남해

테라스가 늘어선 거리 위로 뉴베드피더드가 보였다. 얼음을 뒤집어 쓴 거리의 나무들은 맑고 차가운 공기 속에서 반짝반짝 빛났다. 술통 위에 술통이 거대한 구릉과 산처럼 쌓여 있는 부두에 온 세계를 돌아다니던 포경선이 마침내 안전학고 조용하게 정박한다. 가까운 곳 어딘가에 목수와 술통 만드는 사람이 있는지 배의 갑판에 방수재로 쓸 역청을 녹이기 위해 불을 지피고 금속을 내리치는 소리가 요란하다. 이 모든 것이 새로운 항해가 시작될 것임을 예고하는 것이다. 가장 길고 위험한 항해가 끝났다는 것은 두 번째 항해가 시작되었음을 의미하고, 두 번째 항해의 끝은 세 번째 항해의 시작을 의미한다. 항해는 영원히 끝나지 않을 것이다. 이것은 끝도 없는, 아니 참을 수 없는 이 세상의 일상이다.

_허먼 멜빌, 《모비 딕》중에서


미조항

항구 도시를 막연히 동경하게 된 것은 《모비 딕》의 구절 때문이었다. 항구도시를 찾을 때마다 늘 저 구절이 떠올랐고 늘 설레였다.


남해에서 우리가 찾은 첫 번째 항구 마을은 미조항이다. 《모비 딕》에서 나오는 것처럼 큰 항구 도시는 아니었지만 미조항은 내가 알지 못하는 일상에 내가 알지 못하는 질서를 유지하며 분주히 맞물려 돌아가고 있었다.


조선소에서는 거대하고 둔탁한 것들이 요란하게 마찰되는 소리가 났고, 항구에는 조업용 배가 쉬지 않고 드나들었다. 조업을 나가는 배 뒤로 흰 물보라가 따라갔고, 돌아오는 배 뒤로 흰 갈매기들이 따라왔다. 길에는 입에 생선을 문 고양이들이 총총히 다녔다. 이 모든 풍경에 햇살이 축복처럼 내려앉아 비릿하고 쾌활한 일상에 윤기를 더했다.


저만치 커다란 배에서 연기가 자욱하게 피어올랐다. 불이 난 줄 알고 황급히 배로 달려가 보니 수증기였다. 배에서 방금 잡아온 디포리를 무럭무럭 쪄내고 있었다. 팔딱이던 물고기들은 뜨거운 수증기가 피어오르는 네모반듯한 나무틀에 누웠고 신속하게 우리에게 익숙한 생선이 되어 나왔다. 한참 구경하니 어부가 갓 쪄낸 디포리를 건네며 먹어보라고 권했다.


미조항의 일상은 뉴베드피더드의 항해처럼 영원히 끝나지 않을 것이다. 조업 나간 배는 펄떡이는 물고기를 싣고 들어올 것이고 그 뒤로 갈매기가 따라올 것이다. 갓 잡은 물고기들은 수증기 배 안에서 우리 식탁에 오를 생선이 될 것이다. 고양이들은 무럭무럭 자랄 것이다. 우리는, 이곳의 비릿하고 반짝이는 일상들을 또 다시 그리워하게 될 것이다.


천하마을

남쪽 지방의 겨울은 물렁하고 따뜻했다. 한겨울의 천하마을은 이제 막 봄이 시작된 마을처럼 붉은 흙이 신선하게 풀어져 있고 푸른 마늘잎이 밭에 빼곡했다. 빨간색 지붕과 파란색 담벼락, 민트색 창고와 진한 갈색 고목들이 어느 화가의 캔버스처럼 자리하고 있었다. 잎을 떨군 가지만으로도 무성하고 거대한 나무 옆으로 깨끗한 물이 흘렀고, 그 옆에는 오밀조밀한 돌담이 나란했다. 속이 완전히 텅 빈, 마른 고목조차 기품 있고 단정했다.


마늘밭에는 할머니 농부가 밭을 매만지고 있었다. 마을 담벼락에 깨진 타일 조각들을 커다란 커피잔 모양으로 붙이고 있는 주민도 있었다. 그날 문을 연 카페라고 했다. 우리는 반가운 마을에 뜨거운 커피를 사서 마을에 있는 몽돌해변으로 갔다.


도로와 바다는 평범한 시멘트 제방으로 구분되어 있었다. 이런 평범함은 아무렇게나 ‘털썩’ 앉을 수 있는 편안함을 준다. 제방에 앉으니 파도에 부드럽게 닳은 몽돌들이 펼쳐졌고 그 너머로 바다가 있었다. 우리는 제방에 앉아 커피를 마시며 바다를 감상했다.


우리는 끝도 없이 시시했다. 저만치 낮은 섬이 편안하게 엎드려 우리 이야기에 귀를 기울였다. 바다도 반짝반짝 초롱거리며 경청했다. 이따금 알싸한 마늘향이 우리 곁에 들어와 뭉긋하게 앉았다. 해변을 가득 메운 몽돌은 파도가 들어왔다 나갈 때마다 데굴데굴 웃었다. 우리는 천하마을 몽돌해변에서 커피를 마시고, 바다를 보고, 흉을 봤다.


물건마을

물건마을에는 ‘어부림’이 있다. 어부림은 해풍을 막고 바닷가 어류들이 서식하기 좋은 환경을 만나기 위해 인공적으로 조성한 숲이다. 물건마을에 어부림이 조성되고 350년이 넘게 흘렀다. 수백 년 간 바닷바람을 버틴 수천 그루의 나무들은 강하게 늙었다. 단단하고 굴곡진 가지들이 하늘과 바다로 뻗어 있었다. 길은 길지 않으니 나무들이 주는 밀도에 깊은 산책을 할 수 있다.


이 마을에는 요트학교가 있고 요트들이 정박되어 있다. 조업용 배가 아닌 여가용 배들은 특유의 느리고 여유로운 분위기를 자아낸다. 요트는 노을이 내려앉아 붉어진 바다를 매끄럽게 유영하고 있었다. 요트들 너머로 영원히 만나지 못할 등대 두 개가 서로 마주보고 있다. 우리는 요트가 정박되어 있는 마을 선착장에서 맥주를 마시며 노을이 보라색이 되었다가 다시 짙은 바다색이 되는 광경을 지켜봤다. 바다는 검붉게 뒤엉켰고 바다 너머 산은 아직도 붉었다. 맥주에서는 바다맛이 났고 새우깡에서는 진짜 새우 맛이 났다. 어디에선가 매콤한 찌개 냄새도 풍겨왔다. 신선하고 아름다운 저녁이었다.


이런 저녁이 있는 하루는 근사하다. 노을을 보고, 맥주를 마시고, 가장 오래된 친구와 함께 두런거리는 저녁, 어부림은 어스름에 검은 윤곽만 남긴 채 여전히 강건하게 마을을 지키고 있었다.


마을 누군가가 오늘 저녁에도 맛있는 찌개를 끓여먹을 수 있도록, 이 어촌을 찾은 이방인들이 아늑하게 맥주를 마시며 노을을 볼 수 있도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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