저 절로 가는 길

   
고원영
ǻ
홍반장
   
20000
2015�� 05��





■ 책 소개


부처를 알면 길이 보이고 길을 알면 부처가 보인다


한국의 절들을 찾아가는 이야기를 담은 에세이집. 이 책에는 서른여섯 개의 절에 가는 이야기가 담겨있다. 제주도의 올레길이나 스페인의 산티아고 순례길보다 더 오래되고 더 깊은 명상을 제공하는 길들이 우리 주변에 존재하고 있었다는 사실을 문득 깨달은 저자는 ‘저 절로 가는 길’을 찾아 도반들을 모아 길을 나선다.


도반들이 모이는 이름은 ‘서울불교산악회’와 ‘저 절로 가는 길’. 사람들이 ‘저 절로 가는’ 목적이 절에 도착해서가 아니라 ‘그 길을 가는 동안 저절로 해결되면 더 좋지 않겠는가’하는 생각을 하면서 걷기 모임의 이름을 ‘저절로가는길’로 지었다. 그러기를 7년, 700여 곳의 절을 탐방, 순례, 참배하면서 떠오른 생각을 적은 글들 중 일부를 이 책에 담았다.
 
■ 저자 고원영
스페인의 산티아고 길과 달리 우리나라는 국토 전체가 성지순례 길임을 깨닫고, 7년 째 순례 중이다. 등산과 걷기여행 모임인 ‘서울불교산악회’와 ‘저절로가는길’ 회원들이 함께 한 700여 차례의 등산과 걷기여행을 통해 전국 각지의 여러 절과 불교유적지를 참배했다. 그 길에 스님, 산악인, 주부, 할머니, 법조인, 시인, 대졸 미취업자, 공무원, 구두닦이 등 다양한 연령대와 직업의 사람들이 ‘도반’으로 참여했다. 2010년 장편소설 ‘나뭇잎 병사’를 발표했다.


■ 차례
들어가는 말


서울의 절길
1. 출가 - 조계사 가는 길
2. 낮은 데로 임하소서 - 금선사에서 승가사 가는 길
3. 중생이 절에 가는 법 - 화계사 가는 길
4. 니사길을 아시나요? - 청룡사 가는 길
5. 지옥과 극락 사이 - 봉은사 가는 길
6. 그리움이 찰랑거리는 물병 - 길상사 가는 길
7. 야만인과 함께 절에 가다 - 문수사 가는 길
8. 선지식이란 무엇인가 - 청계사 가는 길
9. 여름의 절길 - 진관사에서 삼천사로 가는 길
10. 달의 길, 용의 길 - 망월사 가는 길


경기도의 절길
11. 도둑과 미륵이 함께 쓰는 일기 - 칠장사 가는 길
12. 저절로 이루어지게 해주소서 - 보문사 가는 길
13. 누가 용을 보았는가? - 신륵사 가는 길
14. 죽음이 삶을 내려다보는 집 - 수종사 가는 길
15. 나무 곁을 지나다 - 봉선사 가는 길


충청도의 절길
16. 산에서 바다를 찾다 - 일락사와 개심사, 보원사지, 서산마애삼존불 가는 길
17. 나라고 할 만한 게 없다 - 장곡사 가는 길


전라도의 절길
18. 새해 일출을 보러 가다 - 향일암 가는 길
19. 삶이 힘겨운 당신, 다산유배길을 걸으시라 - 다산유배길 걸어 백련사 길
20. 질마재길에서 피어오르는 신화 - 선운사 가는 길
21. 누구나 이 절에서 한 소식 얻어 가리라 - 월명암에서 내소사 가는 길
22. 굴목재길을 걸어 서역에 가다 - 송광사에서 선암사 가는 길, 혹은 선암사에서 송광사 가는 길
23. 그리움이 피워낸 길 - 불갑사에서 용천사 가는 길
24. 달마가 도솔암에 간 까닭은? - 미황사에서 도솔암 가는 길
25. 손오공도 덕유산을 넘었다 - 백련사 가는 길


경상도의 절길
26. 꿈에서 깨어나 울다 - 쌍계사 가는 길
27. 모든 길은 사이에 있다 - 칠암자 가는 길
28. 도마뱀이 내게 말을 걸어왔네 - 연화사 가는 길
29. 크지도 작지도 않은 산이 소백산이다 - 초암사에서 비로사 가는 소백산자락길
30. 인문학이 날개를 편 가을산 - 청량산 가는 길
31. 불국토는 동쪽 나라에 있었다 - 경주 남산, 삼릉에서 칠불암 가는 길


강원도의 절길
32. 물속에 절이 있네 - 청평사 가는 길
33. 바람의 화두 - 보현사 가는 길
34. 거기에 부처는 없었다 - 선재길 걸어 오대산 적멸보궁 가는 길
35. 거울, 겨울 - 유일사에서 망경사 가는 길
36. 혼자 오르되, 남을 위해 오르는 길 - 봉정암 가는 길


 




저절로 가는 길


서울의 절길

낮은 데로 임 하소서 : 금선사에서 승가사 가는 길

한때 나는 요세미티의 거벽에 매달리는 클라이머를 꿈꾼 적이 있었다. 그러나 지금 나는 싸고 질 좋은 트레킹화에, 배낭 하나 달랑 챙겨 매고 약속장소로 간다. 거기엔 내가 꿈꿨던 클라이머도 없고, 온갖 휘장을 휘날리며 극지법으로 히말라야에 오르는 대규모 원정대도 없다. 나와 비슷한 차림의, 조금 늙은 사람들이 옹기종기 모여 있을 뿐이다.


나의 도반인 그들은 수차례 강조하고 계도해도 번번이 집결시간을 어기기 일쑤인 아마추어들이거나 동네 뒷산을 오르내리는 산책자들일 뿐이다. 늦게 일어났다면서, 지하철 노조가 파업했다면서, 휴대폰 액정이 깨져 시간을 제대로 볼 수 없었다면서 제각각 지각한 이유를 둘러댄다. 영락없는 오합지졸의 모습이지만, 그들은 내 오랜 친구이자 연인이고 스승이자 제자이다. 적어도 나는 그들을 그렇게 생각하려고 노력한다.


사람들에게서 멀어지려고 출가한 부처가 더 많은 사람들을 만나려고 길을 떠난 건 새벽이 터오는 갠지스 강가, 보리수 아래서 동쪽별을 이마에 대고 대정각을 이룬 7일 후였다. 그 며칠 동안 부처는 인도의 안개와 어둠처럼 갠지스 강가에서 몸을 뒤척였다. 온전히 나 혼자 깨달은 것이다.


출가했을 때처럼 그때에도 결단을 내려야 했다. 전법을 결심한 부처는 사르나트로 가는 먼 길을 걷는다. 부처는 인류역사상 자신의 사상을 전파하기로 마음먹고 대중을 찾아간 최초의 스승이었다. 부처 이전, 출가한 사문(沙門)들의 종교인 우파니샤드가 숲에서 은밀하게 전파된 데 비해 부처는 대중 속으로 깊숙이 스며들었다.


비구들이여, 나는 신과 인간의 굴레에서 해방되었다. 그대들 역시 신과 인간의 굴레에서 해방되었다. 이제 법을 전하려 길을 떠나라. 많은 사람의 이익을 위해, 많은 사람의 행복을 위해, 세상을 불쌍히 여겨 길을 떠나라. 마을에서 마을로, 두 사람이 같은 길을 가지 말고 혼자서 가라. 가서, 처음도 좋고, 중간도 좋고, 끝도 좋으니 잘 알아들을 수 있도록 법을 설하라. 부처는 제자들을 가르쳐 조직적으로 포교활동을 펼쳤다. 부처는 출가를 제도화한 최초의 성직자이기도 했다.


부처가 녹야원에서 법의 수레바퀴를 굴리기 시작하신 지 어언 2,600여 년이다. 그 중중무진의 세월을 지나온 법륜이 아직도 우리 앞에 굴러다니는데 어찌하여 우리의 불교는 본래의 전법 의지를 잃어버리고 현실과 동떨어진 박물관 종교가 되고 말았을까. 불교라 하면 우리는 선승의 면벽수행이나 무소의 뿔처럼 혼자서 가라는 숫타니파타의 한 구절을 떠올리며, 타인과의 단절을 당연한 처사로 여긴다.


나 또한 혼자서 길을 걷거나 산에 오르는 것만이 깊이를 추구하는 자의 도리라고 여긴 적이 있었다. 그때 나는 면벽수도 하듯 진지했지만, 헤아릴 수 없는 잡념들이 머릿속을 스멀스멀 기어 다녔다. 무엇보다 견디기 어려운 것은 고독이었다. 텅 빈 충만이 아니라 그저 텅 비어버린 느낌을 뿐이었던 건 내 근기의 한계일까.


지각생들의 합류로 출발부터 어수선했다. 구기동 이북오도청 앞을 지나 왁자지껄 산길로 들어서는 모습이 시장 가방을 챙겨들고 백화점 에스컬레이터에 오르는 동네 아줌마들 같다.


등산은 직립 보행자들이 산에 오르는, 수직을 지향하는 운동이다. 백화점 에스컬레이터가 작동하는 곳은 7층까지라고 한다. 그 위로 오르려면 비상구 계단에 발을 놓아야 한다. 에스컬레이터는 물론 엘리베이터도 없이 63빌딩을 오로지 두 다리의 힘만으로 계단을 밟아 오르는 모습을 떠올려보라. 높이 오를수록 숨통은 좁아지고, 말은 좁은 숨통을 가까스로 뚫고 나와 한숨으로 변한다. 봉우리에 오르는 것을 등산의 유일한 목적으로 여겼을 때 생기는 대표적 현상이다.


경쟁에서지지 말아야 한다는 불굴의 의지가 산에서도 되살아난다. 무장해제를 모르는 몸은 넥타이에 백팩을 짊어진 젊은 세일즈맨처럼 결의에 차 있지만 어느 순간 지쳐버리고 만다. 등산은커녕 산을 쳐다보기도 싫다.


40년 가까이 별 탈 없이 산에 다닌 대한민국 남자로서 그런 이에게 힘들이지 않고 산에 오르는 방법을 알려주겠다. 간단하다. 정상찍기를 목적이자 의무로 여기지 않는다면 심장에서 크랭크축이 다시 돌기 시작하고 두 발은 새로 산 자동차처럼 쌩쌩 앞으로 나갈 것이다. 봉우리를 포기하는 것이 봉우리에 쉽게 오르는 방법이다.


한때 나도 배낭에서 바람 소리가 날 정도로 산길을 달렸으며, 누가 먼저 정산에 다녀오느냐를 걸고 친구들과 시합한 적도 있었다. 나이 오십에도 그렇게 기를 쓰다가 정상이 가까운 어느 바윗길에서 지하철 계단에서 헐떡거리는 출퇴근 시간의 내 모습을 발견했다. 바위를 움켜쥔 손은 전철이나 버스 손잡이에 매달린 내 손이었다.


역사서나 지리지를 두루 읽다 보면 본래 한국인의 산 문화에는 등산이 없었다. 우리에겐 산에 들어간다는 뜻으로 입산(入山)이 있었다. 그래서 절에 들어서는 일주문을 산문(山門)이라 불렀다. 절에 들어서는 문이 산에 들어서는 문이라는 뜻에서 나온 말이다. 산사(山寺)는 입산의 모습을 하나의 풍경으로 떠올리게 한다. 말 그대로 절이 산에 들어가 있는 구조이므로, 사람이 그 절을 찾아가면 이미 입산의 경지에 이른다.


도반들과 금선사(金仙寺) 일주문 앞에 이르렀다. 금선사에는 북한산 나무들의 정기가 모인 목정굴(木精窟)이 있다. 조선시대 순조 임금의 잉태 설화가 깃든 관음기도처이다. 번식능력이 다할 때까지 축첩을 해도 누가 뭐랄 사람 없던 완벽한 부계사회에서 왕자, 왕이 될 남자를 점지하려고 부처의 힘을 빌었다는 이야기이다. 지금 들으면 이해하기 어려운 이야기지만 남아선호는 그 당시 불교가 존재하는 이유였다. 도반 가운데 누군가 개탄조로 입을 연다.


   "내가 요즘 산에 다니면서 죽기 살기로 살 빼는 이유가 뭔지 압니까? 울 마누라가 무겁다 캅니다.      지가 올라오면 될 낀데."


   "와아, 아직 밑에 있나베? 울 마눌은 벌써 올라와 버렸는디. 그 육중한 몸매로 말이시. 오늘은 정      말 죽인다, 이래야 살아남아요. 천장에 도배 새로 해야겠네, 이랬다간 크게 다칩니다."


콩 자루가 터진 듯 와르르 웃음이 쏟아진다. 목정굴 안내판 앞에서 이렇게 수다를 떨고 보면 어디로 가야 할지, 왜 이른 아침부터 집을 나왔는지 깜빡 잊고 만다. 금선사 반야전을 비롯하여 여러 전각을 참배하고 나와 다시 산길에 붙는다. 향로봉과 비봉 사이로 난 계곡으로 시냇물이 빠르게 흐른다. 시냇물을 건너자 길이 가팔라지더니 돌을 차곡차곡 쌓은 축대가 보인다. 1968년 1.21사태 때 무장공비에게 밥을 먹였대서 폐사된 포금정사이다. 이 절을 혹자는 향림사가 있던 자리라 지목한다. 포금정사의 전신이 향림사라고 덧붙이지만 이를 입증할 흔적과 기록은 어디에도 없다.


향림사를 찾는 배경에는 고려 태조 왕건이 있다. 당시 거란이 침공하자 왕건의 묘에서 관을 꺼내 다른 곳에 옮겨 숨겼다. 거란족이 전대 왕의 묘까지 파헤치는 만행을 저질렀던 모양이다. 향림사는 천혜의 은신처였다.


포금정사지를 지나면 정상에 이르는 마지막 고비라는 깔딱고개이다. 봉정암에 이르는 고비길도 아닌데 더는 걸음을 옮기지 못하고 늙은 산양처럼 버티고 선 몇몇 도반을 추슬러 가까스로 능선에 올랐다. 눈앞에서 비봉이 우뚝 선다.


비봉에는 우뚝 선 것이 하나 더 있다. 진흥왕 순수비가 그것이다. 왕의 전성기인 동시에 신라의 전성기임을 알리는 비석이지만 당시 진흥왕은 백제와의 동맹을 깨고 한강 이북을 차지했다. 나쁘게 말하면 뒤통수를 쳐서 백제 땅을 뺏어내고는 승자의 구역임을 비봉에 표시했다. 비봉에 올라간 등산객치고 진흥왕순수비를 배경으로 사진을 찍지 않는 사람이 드무니, 어떻게 해서라도 승리를 쟁취하는 것이 상책이란 뜻일까. 그들 가운데서도 정상에 올라야만 목적을 달성했다고 생각하는 사람도 더러 있으리라.


이십 대의 나도 그랬다. 등산, 하면 몸에 로프를 묶고 나이프로 직벽을 찍어 정상으로 오르는 운동인 줄로만 알았다. 등산을 마치면 마치 생사를 건 전쟁터에서 돌아온 양 엄숙한 표정을 지어 무용담을 늘어놓았다. 대부분 추락의 위험을 무릅쓰고 높은 곳에 오른다거나 그 과정에서 혹한과 폭우를 견뎌낸 이야기였다. 나뿐 아니라 그때에는 대부분 등산을 그런 운동으로만 알았다.


두 다리로 산길을 걸어 봉우리에 오르는 것을 당산으로 인식하기 시작한 것은 그 훨씬 뒤였다. 때로는 곧고 때로는 구불구불한 산길을 걷는 트레킹 족이 부쩍 늘어 바야흐로 등산의 시대가 열렸다. 더 높이, 더 멀리 가야만 직성이 풀리는 사람, 별다른 준비없이 무턱대고 산에 오르는 사람도 덩달아 늘면서 클라이밍보다 사고가 잦아지기도 했다.


우리 도반 가운데서도 진흥왕 순수비에 가서 인증샷을 찍고 싶어하는 사람이 있어 잠시 비봉 아래에서 기다렸다. 사모바위에서 오거나 사모바위로 가는 사람들로 내가 서 있는 길이 북적댄다. 산을 도전과 극복, 공격과 정복의 대상으로 여기는 것을 서양문화 탓으로만 돌릴 수는 없다. 우리가 산길을 걷는 즐거움보다 정상찍기라는 결과에 집착하는 것은 아마도 적자생존이라는, 더욱 근본적인 자연계의 업식 때문이지 모른다.


저 어린 부처가 파종식에 참관해서 뜨거운 태양 아래서 힘겹게 일하는 흙투성이의 농부, 채찍질을 당하며 쟁기를 끄는 소, 쟁기 날에 몸뚱이가 잘려나가는 벌레들, 그것들을 날카로운 부리로 쪼아 먹는 새들을 보고서 자신의 가족이나 친척이 고통을 당하는 것처럼 느꼈을 때나 지금이나 달라진 게 무엇인가. 자연계 최상위 포식자인 인간이 외려 더 고통스러운 까닭은 문명이 발달할수록 인간 사이의 경쟁이 치열해지기 때문이다.


좀 더 훗날 부처는 먹고 먹히면서 살아가는 것도 고통이지만, 그보다는 늙고 병들고 죽어야만 하는, 늙고 병들고 죽기 위해 태어나야만 하는 생명계가 궁극적으로 고통임을 알아차린다. 부처의 출가는 고통을 치유하러 나선 길이었다. 그 치유방법을 알아 수많은 사람에게 전파하면서 불교를 탄생시킨 부처가 마지막으로 남긴 말은 뜻밖에 단순하다.


   "모든 것은 변한다. 다만 끝없이 정진하라."


등산 40년 경력자의 조언인, 봉우리를 포기하는 것이 봉우리에 쉽게 오르는 방법이다와 세상을 변화시킨 잠언인 부처의 제행무상(諸行無常)이나 알고 보면 꽤 단순한 것이 세상 이치이다.


중생대에 생긴 비봉이나 신라 진흥왕 때 생긴 순수비나 오랜 침식과 풍화작용을 거쳐 오늘에 이르렀으며, 앞으로도 그럴 것이다. 비가 오면 비를 맞아야 하고, 햇빛이 나면 햇빛을 쏘여야 하는 것이 자연의 이치이고 부처의 깨들음이다. 비봉도 진흥왕 순수비도 무상하다는 사실을 알면 등산이 입산의 경지로 뒤바뀌지 않을까. 모든 괴로움의 근본은 마음속 번뇌에 있다. 높이에 대한 집착에서 벗어나야만 마음이 홀가분해진다.


비봉에 다녀온 사람이 합류하자 나는 즉시 승가사(僧伽寺) 계곡길로 일행을 이끌었다. 비봉과 사모바위 사이로 내려서는 좁은 길, 승가사로 가는 최단거리이다. 승가사에 이르러 승가굴을 찾으니 금선사 목정굴이 생각났다.


비봉을 경계로 자리 잡은 두 절의 모태가 공교롭게도 석굴이다. 승가사 석굴에는 당나라에서 포교 활동했던 인도의 승가대사가 앉아있다. 사실인즉 돌을 깎아 그 위에 하얗게 호분을 입힌 조각상이지만 불국토에서 온 신성이라고 믿어 불자들의 발길이 끊이지 않는다. 승가굴에서 나오는 약수를 뜨려고도 전국 각처에서 사람들이 찾아온다. 승가대사 역시 목정굴에 있는 약사여래처럼 치유의 화산인 셈이다.


승가사가 자랑하는 또 다른 유적은 고려 때 조성한 마애석가여래좌상이다. 절의 맨 뒤쪽, 승가봉에서 흘러내린 암벽 줄기에 새겨진 거불이 우리를 내려다본다. 그 마애불에 이르려고 108번뇌를 되새기며 108계단을 오른 우리는 마지막으로 회향의 자리를 마련했다. 산행대장인 내가 목탁을 치고, 그 소리에 맞춰 도반들이 한글반야심경을 독경했다. 에스컬레이터에 오르는 동네 아줌마들 같던 얼굴이 맑아졌다. 그 얼굴에서 문수동자의 게송이 곧 울려 나올 기미였다.


성 안 내는 그 얼굴이 참다운 공양구요

부드러운 말 한마디 미묘한 향이라도

깨끗해 티가 없는 진실한 그 마음이

언제나 한결같은 부처님 마음일세


걷는 길 : 불광역 2번 출구(구기터널 방향 7212번 버스 승차) → 이북오도청 하차 → 금선사 →

          포금정사 → 비봉 → 사모바위 → 승가사 → 구기터널 정거장까지


거리와 시간 : 4.5km 정도. 3시간 예상



경상도의 절길

인문학이 날개를 편 가을산 : 청량산 가는 길

서울 사람이라면 봉화 청량산에 있는 청량사(淸凉寺)를 찾아갈 때 자연스레 동대문구 청량리가 떠오를 것이다. 그런데 청량리에도 청량사가 있었다는 사실을 아는 사람은 그리 많지 않다. 오랫동안 매춘을 빼놓고는 생각할 수 없었던 동네가 청량리였기 때문이다. 매춘은 인류 역사상 가장 오래된 직업이라고 한다. 부처의 시대는 어땠을까.


암라팔리는 바이샬리를 빛낸 창녀였다. 그녀의 하루 몸값은 50카나파하, 소 250마리에 해당하는 갑이었지만 희대의 팜므파탈에게 지급할 화대로는 그리 많지 않은 것이었는지 남자들이 줄을 섰다. 그녀의 미모는 그 당시 인도 통일을 꿈꾼 빔비사라 왕의 눈에도 들었다. 빔비사라의 아들을 낳아 왕비에 버금가는 지위를 누린 그녀는 마가다국의 도읍지인 라즈기르에 공창을 만드는 데 일조한다.


부처가 암라팔리 이야기를 처음 들은 건 제자를 통해서였다. 바이샬리에서 걸식하던 한 제자에게 눈부신 여자, 암라팔리가 다가왔다. 그녀는 매우 정중하게 걸식승을 집으로 이끌었다. 스님이 자신의 초라한 행색을 이유로 사양하자 암라팔리는 말했다.


   "마음에 우러나서 사람을 초대하기는 처음입니다."


무엇이 암라팔리로 하여금 초라한 걸식승을 집에 들이게 했을까. 수행자를 만나 위로받지 않으면 안 될 그녀만의 슬픈 사연이 암라팔리에게는 있었다. 그녀는 망고나무 아래 버려진 핏덩이였던 것이다.


부처를 친견한 암라팔리는, 산전수전 다 겪은 여자치고는 너무도 순순히 흰 천으로 마음이 염색되고 만다. 선승들은 사람의 마음을 공중에 비유한다. 어떤 비도 공중을 적시지 못하고, 어떤 바람도 공중을 흔들지 못한다. 희대의 창녀 암라팔리의 마음인들 어찌 희거나 검겠는가. 망고나무의 아이였던 암라팔리는 훗날 자신의 망고 숲을 부처에게 보시하고 비구니가 되니, 청량리라고 해서 청량사가 들어서지 말란 법은 없다.


공창이 있던 인도의 옛 도시 라즈기르, 왕사성이라고도 부르는 이 도시를 다섯 봉우리의 산이 둘러쌌다. 오대산이다. 월정사가 있는 강원도 오대산의 이름이 여기에서 유래했다고 어떤 이는 주장한다.


오대산을 청량산으로도 부른다. 이름이 다르지만 근본을 따지면 문수신앙이란 같은 갈래에서 나왔다. 문수산, 길상산, 오대산, 청량산, 사자산도 각각 이름과 위치가 다르지만 문수보살이라는 같은 문화적 갈래에서 나와 공간적으로 확산된 산이다.


문수신상이 널리 퍼진 우리나라는 오대산의 원래 이름인 청량산이 전국 각지에서 펴져 있다. 경북 봉화의 청량산, 인천 청량산, 경기 안성 청량산, 남한산 청량산, 경남 창원 청량산, 전북 완주 청량산, 고창 청량산이 그것이다. 청량리 유곽들이 헐리고 그 자리에 초고층 주거단지가 들어선다는 소문이다. 물론 손꼽는 명산이라는 봉화 청량산도 산불이 나서 순식간에 폐허로 변할 수 있다. 실제로 청량산 청량사가 폐사됐던 전력이 있으니, 퇴계 이황이 노래한 청량산가와 더불어 무상을 실감할 뿐이다.


청량산 열두 봉우리(六六奉)를 아는 이 나와 희 갈매기뿐

흰 갈매기야 말하겠느냐 못 믿을 것이 복숭아꽃이라도

복숭아꽃아 물 따라 가지 마라 배 타고 고기 잡는 이 알까 두렵구나


청량산이 세상에 알려져 사람들의 발길이 잦아지면 자신이 누리는 즐거움이 사라질까 염려한 이황의 시도 불타오르는 우리나라의 가을을 극복하진 못했다. 가을이면 세상의 모든 산이 단풍으로 물들지만 청량산의 가을 단풍처럼 눈이 부시지 않기 때문이고, 그걸 알고 외지인들의 발길이 끊이지 않기 때문이다. 그들은 대부분 청량사를 들머리로 최고봉인 장인봉으로 직행한다. 그러나 응진전을 모르고 청량산에 오른 자 정신은 놔두고 몸만 다녀온 껍데기이다. 우리 문화에 조금이라도 관심이 있는 사람에게라면 나는 주저 없이 입석에서 응진전으로 가는 청량산 들머리길을 권하겠다.


이황의 청량산 사랑은 그의 호 청량산인을 통해 알 수 있다. 그가 청량산에 자주 올랐던 건 에베레스트에 오른 힐러리처럼 산이 거기 있기 때문은 아니었다. 청량산은 가문의 산으로, 5대 고조부 이자수가 공신으로 책봉되면서 나라로부터 받은 봉산(封山)이었다. 이황은 부패하고 문란한 조정과 싸우는 대신 초야에서 학문에 몰두했다. 그런 그에게 조정은 기이하게도 중요한 관직을 차례차례 하사했다. 정권의 고비 때마다 그랬고, 그랬기에 조정과 초야의 청량산을 큰집과 작은집 드나들 듯했다.


이황은 도산서원을 마련하기 전까지 청량정사라는 집을 지어 후학들을 가르쳤는데 지금도 청량사 부근에 남아있다. 이황의 사상을 집대성한 퇴계 성리학은 청량산에서 경전 탐구와 내면의 수신에 힘썼기에 가능했으리라 집작해도 지나치지 않다. 청량산이 퇴계학의 성지로 후대 사람들의 발길을 이끄는 연유이다. 이황이 청량산에 빠져 살았을 무렵 청량사는 어땠을까.


청량사는 우리나라의 적지 않은 절들이 그렇듯이 창건주가 원효대사라고도 하고 의상대사라고도 하는 절이다. 당시 33개의 부속건물을 갖춘 대사찰이었으나 조선조에는 유생들의 탄압과 6.25 전쟁을 거치면서 유리보전(琉璃寶殿)과 응진전(應眞殿)만 겨우 살아남은 폐사로 전락했다. 청량사가 그나마 명맥을 이은 건 송광사 16국사의 마지막 스님은 법장 고봉선사의 중창 덕분이다.


입석에서 등산로를 따라 30분 정도 오르면 절벽에 기대앉은 응진전을 만난다. 절벽의 담쟁이가 타들어가는 밧줄처럼 붉었다. 전각에 가까이 가니 열린 문 사이로 공민왕과 노국공주의 영정이 보인다.


노국공주가 산고 끝에 죽자 공민왕은 식음을 전폐했다. 어쩌다 밥을 먹을 때도 왕이 손수 공주의 초상을 그려 밥상 맞은편에 놓고 밥을 먹었다는 게 고려사절요의 기록이다. 노국공주의 죽음을 과도하게 슬퍼한 나머지 심질에 걸린 군주는 기행을 일삼았다. 여장을 하고 다니는가 하면, 미소년들을 불러 모아 자제위란 경호부대를 만들었다. 새로 맞은 왕비 대신에 늘 경호원들을 가까이하고, 심지어는 네 명의 정비를 경호원 홍륜과 동침시키려 했다. 마침내 공민왕은 그토록 믿었던 홍륜에게 살해당했다.


공민왕은 생전의 바람대로 노국공주 곁에 잠들었다. 개성에 있는 공민왕릉은 왕과 왕비를 함께 모신 유일한 쌍능이다. 공민왕이 직접 설계한 왕릉 내부는 부부의 혼령이 소통하도록 구멍이 뚫려있다.


공민왕과 노국공주의 영정은 종묘에 모셔져 있다. 잘 알려지다시피 종묘는 조선 왕실의 역대 임금과 왕비를 모신 사당이다. 더구나 조선은 유교를 국시로 내세운 국가이지 않았던가. 고려의 역사를 마땅히 검게 칠해야 했지만 공민왕과 노국공주의 지극한 사랑만큼은 그대로 놔둬야 했다. 보라. 650여 년이 지난 지금도 두 사람의 사랑은 웅진전을 배경으로 단풍처럼 타오른다. 그 어떤 사랑도 신화가 될 수 없는 요즘 세태 때문인지 응진전을 떠나는 발길이 무거웠다.


산안개가 꼬리에 꼬리를 물고 천천히 계곡을 떠다녔다. 그 모습이 경상도 한량들이 도포자락을 펄럭이며 추는 학춤 닮았다. 안개가 끼지 않는 날, 어풍대에서 김생굴 사이에서 V자를 그리는 골짜기는 끝이 안 보일 정도로 깊고, 벼랑에 뻗어 내린 울긋불긋한 단풍까지 더해져 지독한 현기증을 불러일으킨다. 김생굴은 통일신라 서예가인 김생이 수학했던 바위굴로 경일봉 아래 있다.


평민 김생은 이 굴에서 10년 동안 글씨를 연마했다. 김생굴에서 골짜기를 내려다보니 김생체의 힘찬 기운을 담은 폭포가 벼랑은 타고 떨어진다. 신분을 극복한 당대의 명필 김생이 쓴 불경 40여 권을 청량산 연대사(連臺寺)란 절이 보관했었는데, 어느 땐가 수수께끼처럼 사라졌다고 한다.


청량산에는 김생 말고도 신라의 최치원과 관련된 유적이 산재한다. 최치원이 수도했다는 풍혈대, 바위틈에서 흘러나오는 약수를 마시고 총명해졌다는 총명수가 그것이다. 유감스럽게도 총명수는 내려다보기조차 민망한 탁류로 변해버렸다. 청량산은 안개가 자주 출몰하는 산이다. 주세붕이 쓴 유청량산록(遊淸凉散錄)에서 수목과 안개가 서로 어울려 마치 그림 같은 풍경이라고 묘사했거니와, 자소봉으로 오르는 산길은 올 때마다 항상 안개가 자욱했다.


안개에 넋이 팔려 길을 잃은 듯 걷다 보니 어느새 자소봉 앞이다. 거의 수직에 가까운 철계단을 밟아 보살봉이라고도 부르는 자소봉에 올랐다. 북쪽으로는 소백산이 있는 백두대간이 시야에 닿고, 동으로는 일월산, 남으로는 축융봉이 마주 보이는 봉우리이다. 일찍이 주세붕이 묘사한 풍경도 고스란히 발아래 펼쳐진다. 줄지어 선 봉우리는 물고기의 비늘과 같고, 층층이 늘어선 벼랑은 꼿꼿하기만 하여 정녕 단아하고 곧은 선비와 같다.


응진전이 있는 금탑봉, 김생굴이 있는 경일봉뿐 아니라, 공민왕이 쌓은 청량산성이 있는 축융봉, 의상이 수도했다는 장인봉, 외장인봉, 자소봉, 선학봉. 자란봉, 연화봉, 연적봉, 향로봉, 탁필봉 등 육육봉이라 부르는 12개 봉우리의 이름을 주세붕이 모두 지었다. 퇴계 이황과 더불어 주세붕을 빼놓고 봉화 청량산을 말할 수 없는 이유이다.


유감스러운 건 이데올로기가 자연에까지 영향을 끼쳤다는 사실이다. 주세붕은 불교를 극도로 혐오하여 불교적인 징표를 드러냈던 봉우리 이름을 모조리 유교식으로 바꿔버렸지만, 산 이름 자체는 개명하지 못했다. 문수보살의 청량산은 보현보살의 아미산, 관음보살의 보타낙가산과 함께 인도의 대표적인 성산으로 꼽는다.


풍기 군수 주세붕이 문서에서 모조리 지워버렸어도 사람의 입은 여전히 장인봉 대신 의상봉, 자소봉 대신 보살봉이라 불러 불교를 상기한다. 자소봉에서 잠시 쉬고서는 탁빌봉으로 건너갔다. 거대한 입석들이 삐죽삐죽 돋아난 봉우리다. 생긴 모습이 붓끝을 모아 놓았대서 필봉이라 하는데 역시 주세붕이 지은 이름이다.


탁빌봉에서 연적봉을 거쳐 뒤실고개 쪽으로 향한다. 뒤실고개 능선에서 직진하면 하늘다리가 나타나고, 왼편으로 하산하면 청량사 코스다. 뒤실고개 능선을 지나면 자란봉이다. 자란봉 건너편은 선학봉, 이 두 봉우리 사이에 하늘다리가 놓여있다. 2008년에 완공된 청량산 하늘다리는 길이가 90cm로 국내에서 가장 긴 상악현수교량이다. 등산객들이 몰리는 가을에는 아무리 조심스레 걸어도 다리가 출렁거리고, 그 바람에 하늘다리 위에서는 비명과 웃음이 그칠 새 없다.


고소공포증이 있는 사람에게 하늘다리는 하나의 선택이다. 멀리서 온 외지인이라면 하늘다리 앞에서 선택은 하나 더 늘어난다. 하늘다리를 건너 선학봉과 장인봉을 가기엔 시간이 너무 걸리기 때문이다. 나는 여기서 다시금 길을 권하겠다. 순전히 불교순례를 위해 청량산에 왔다면 되돌아서 청량사가 있는 곳으로 내려가라고. 물론 청량산에서 가장 높은 장인봉에 오르면 도도히 흐르는 낙동강 줄기를 눈에 담을 수 있다.


선택은 나도 해야 했고, 나는 청량사를 향해 내리막길을 걸었다. 청량사가 열두 봉우리로 둘러싸여 연꽃의 꽃술 자리에 자리 잡았다는 비유를 어디서 들은 것도 같다. 청량사는 내청량사와 외청량사, 두 곳으로 나눠 부른다. 내청량사는 연화봉 아래 유리보전이 본전이고, 외청향사는 금탑봉 아래 응진전이 본전이다. 이 두 절은 꽤 거리를 두고 떨어진 건, 그 사이에 있던 전각들이 역사적 시련을 겪어 폐사됐기 때문이다.


경상북도 유형문화재 제47호인 청량사의 유리보전은 동방에서 유리광 세계를 다스리는 약사여래를 모신 전각이라는 뜻이다. 무엇보다 눈에 띄는 것은 공민왕의 친필을 걸어놓은 유리보전의 현판이다.


유리보전에는 중생의 병을 치유한다는 약사여래상이 모셔져 있다. 청량사에 들른 군주는 그때 이미 자신의 앞날을 예견했던가? 노국공주에 대한 공민왕의 지극한 사랑은 차라리 상처에 가깝다. 땅 속에 묻힌 노국공주가 비를 맞을까 봐 아방궁을 지으려 한 자신의 깊은 상처를 약사여래가 치유해주기 바랐는지도 모른다.


모든 것이 변한다지만, 변하는 가운데 변하지 않는 것이 우리나라의 가을이다. 2012년 가을, 청량산이 가을의 명소임을 청량사도 아는지 사중 곳곳에 심어 놓은 단풍나무가 불꽃나무가 되어 타오르고 있었다.


걷는 길 : 입석 → 응진전 → 어풍대 → 김생굴 → 자소봉 → 탁필봉 → 연적봉 → 자란봉 →

          뒤실고개 → 청량사 → 선학정


거리와 시간 : 4.5km 정도. 3시간 예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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