두마리 물고기 사랑

   
남기환
ǻ
성하books
   
14800
2014�� 03��



■ 책 소개 


김해 허 씨의 시조이자 가야 김수로왕의 비, 허황후가 사랑을 찾아 떠나온 길을 포토라이터 남기환이 아름다운 사진과 함께 재현한 답사 여행기이다. 아유타국의 공주 허황옥이 지나온 ‘영원한 사랑의 길’ 1만 킬로미터 대장정의 흔적인 ‘두 마리 물고기’를 따라 여행을 한 것이다. 







저자는 인도의 아요디야에서부터 미얀마와 중국을 거쳐 김해에 이르는 길을 두 마리 물고기 문양을 이정표 삼아 답사하며, 2000년 전 시작된 영원한 사랑의 길 ‘포에버 로맨스 로드’가 실크로드와 차마고도를 넘어서는 대한민국의 대표 테마 로드라고 이야기한다. 







길은 역사와 문화와 풍경을 담고 있다. 수많은 길들 중에 아름다운 이야기를 품고 있어 가슴을 설레게 하는 길들이 있다. 실크로드가 그렇고 차마고도가 그렇다. 그리고 아직 세상에 알려지지 않은, 2000년 전 허황옥 공주가 지나온 인도 아요디야에서 대한민국 김해까지 이르는 ‘영원한 사랑의 길’이 그렇다. 영원한 사랑의 화신이 된 김수로왕과 허황옥의 이야기는 각박한 세상을 사는 현대인들에게 순수에 대한 회기와 한 템포 쉬어갈 수 있는 여유를 줄 것이다. 







역사 속에 잠들어 있는 이 영원한 사랑의 길이 세상 밖으로 나와 많은 이들의 사랑을 받는다면, 김해시가 우리나라를 넘어 느낌과 끌림이 있는 세계적인 테마 도시로 거듭날 수 있을 것이다. 







■ 저자 남기환 


남기환은 남다른 여행을 해왔다. 여행을 업으로 하는 양 오해를 사기도 했다. 하지만 욕심이 많아 여행을 업으로 하지는 못했다. 능력 안에서 목적하는 것은 뭐든 이루어왔다. 단 한 가지, 북한을 경유해 유럽 대륙까지 육로로 여행하는 꿈은 아직 이루지 못했다. 지금껏 찍고 써온 것들은 북한을 경유해 대륙의 끝까지 가보려 애쓴 행위의 부산물이다. 하지만 이제는 그것도 중요하지 않다. 모퉁이 담벼락 한쪽 햇살 아래 쪼그리고 앉아 있어도 행복하다. 컴퓨터에 저장된 ‘여행 폴더’ 속 사진 한 장에 담긴 추억만으로도 충만하다. 







한양대학교를 졸업하고 무역회사를 운영하며 유라시아 대륙횡단을 즐겼다. 제64회 FICC세계캠핑캐라바닝대회 유라시아 횡단을 총괄 진행하였고, 기아자동차 주최 독일자동차문화 탐방을 주관했다. 삼척에서 스페인까지, 가족과 함께 한 7개월간의 여행을 끝으로 운영하던 무역회사를 폐업했고, 현재 프리랜서 사진작가이자 여행 칼럼니스트로 활동 중이다. ‘남기환의 행복한 사진여행 이야기’를 운영하며 많은 이들에게 행복을 전하기도, 그들에게서 행복을 전해 받기도 한다. 저서로는 『슬픈 날의 행복여행』이 있다. 







■ 차례 


프롤로그 


오월의 라일락 꽃향기 


다른 길 


영원한 사랑의 길 


먼 곳에서 온 사랑 







인도 


“델리” 나마스테, 인디아! | “마날리” 마누가 머무는 곳 | 줄레줄레 | “라다크” 실크로드 교역의 거점지, 레 | 달의 땅 라마유르에서 | 기억의 열쇠 | 하늘 꽃 | “타지마할” You happy. I’m happy. | “아요디야” 신들의 전쟁터 | 미쉬라 왕조의 라즈사단 궁전 | 첫 번째 이정표 | 신을 부르는 소리 | “바라나시” 비 내리는 첫날 | 바라나시의 두 마리 물고기 | 스쳐가는 인연들 | 꿈결에 쓴 편지 | “가야” 부다가야에서 만난 이정표 | 천상의 아이들라지기르 가는 길 | 라지기르와 나란다 | 부다가야를 떠나며 







미얀마 


“후교” 영원한 사랑의 길목, 미얀마 국경을 넘어 | “감배지” 미얀마의 국경도시 감배지에서 







중국 


“등충” 옛 실크로드의 선상 | 등충의 고도, 화순향에서 | “대리” 이해 호수에서 만난 여인 | “아안” 차마고도의 숨소리는 사라지고 | “보주” 보주태후의 고향 | 비밀의 정원 | “중경” 양자강을 따라 







가야 


“김해” 영원한 사랑 이야기 | 영원한 사랑의 도시 | 수취인 없는 편지 







에필로그 


영원한 사랑의 편지 


부록




두 마리 물고기 사랑


인도

"델리" 나마스테, 인디아!

나는 인도를 다시 찾지 않겠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사람 마음이란 게 오늘과 내일이 같지 않다. 인도가 다시 나의 첫 여행지가 되었기 때문이다. 기나긴 여행이 결정 되었다. 근심이 시작되었다. 이유 없이 늘 퍼지기를 반복했다. 그동안 남다르게 무모하고 별스런 여행을 계획할 때도 아무런 거리낌이 없던 내게 무슨 변화인지 스스로도 가늠할 수가 없었다. 다시는 찾지 않겠다던 인도였다. 그중에서도 종교 분쟁으로 유혈 충돌에 휩싸인 곳이 가장 중요 시작점이었다. 인터넷 창을 열어 검색어를 두드렸다. 분쟁 관련 기사만 떴다. 여행 정보라고는 찾아볼 수가 없었다.


통역도 길잡이도 없다. 글 작가 노릇도 해야 하고 사진작가 노릇도 해야 한다. 최소 4~5인 이상이 움직여야 할 일을 오롯이 혼자 해내야 한다. 마치 돌아오지 못할 길을 떠나는 사람처럼 밤마다 가위에 눌리고, 열병을 앓다가 깨어난 사람처럼 들리지도 않는 고함을 지르며 맥없이 몇날 며칠을 보냈다. 출발을 앞둔 어느 날 문득 남부 인도 여행을 할 때 커피 농장에서 내게 친절을 베풀었던 아프리칸 인디언 친구의 말이 떠올랐다. "하쿠나 마타타!(걱정 마!)"


비행기는 인디라 간디 국제공항에 나를 떨어뜨리어주었다. 2000년 전 아요디야 공주였던 허황옥의 포에버 로맨스 로드를 본격적으로 시작하기 전 첫 기착한 올드델리의 여행자 거리 파하르간지에 숙소를 잡았다. 다음 날 늦은 저녁부터 일정이 시작될 예정이었다. 먼저 유명한 술탄 샤 자한(Shah Jahan)에 의해 완공된 자미 마스지드(Jami Masjid)에 들렀다. 내 빈곤한 사유와 빈약한 언어로는 부족한 포에버 로맨스 로드에 대한 영감을 얻기 위해서였다. 영원한 사랑의 상징인 타지마할을 세운 그가 생애 마지막으로 남긴 건축물이라니 관심이 갈 수 밖에 없었다.


포에버 로맨스 로드를 위해 기착한 델리에서의 첫날은 천태만상이 공존하는 올드델리에서 그렇게 시작되었다. 아주 오래전부터 가슴 깊이 들이켜 온 공기를 마시듯, 매우 익숙한 모습으로 그 안에서 숨 쉬며 그들의 생활 속으로 저절로 빨려 들어갔다. 무의식적으로 내 모든 근심과 걱정도 사라졌다. 이 여행은 가까운 날, 그리고 먼 훗날 또 다른 기억으로 남아 기나긴 여행 이야기가 될 것이다. 나마스테, 인디아!


첫 번째 이정표

우여곡절 끝에 아요디야 미쉬라 왕손의 도움으로 긴장감 속에서 유혈 현장 입성에 성공했지만 군인 경찰이 곳곳에 배치되어 거리 통행이 차단되고 검문검색이 이루어지고 있었다. 난 미쉬라 씨의 도움으로 그의 집사와 함께 일대를 돌아 볼 수 있었다. 나는 긴장감을 뒤로하고 인도 아요디야와 김해에서만 공통적으로 볼 수 있는 두 마리의 물고기가 마주한 문양을 찾는 데에만 열중했다.


먼저 두 마리 물고기 문양을 보고자 가장 분쟁이 심하다는 아요디야 사원으로 향했다. 사원으로 들어가는 입구에서 두 마리 물고기 문양이 새겨진 문을 만났다. 내가 카메라를 들자 근엄하게 군복을 차려입은 군인 하나가 다급하게 다가왔다. 절대 촬영 불가! "Go back!" 하지만 이 중요한 만남에 촬영 불가라는 것이 내게는 있을 수 없는 상황이었다. 이 문양은 김해의 김수로 왕릉의 납릉 정문과 김해의 신어산 자락에 자리한 은하사 대웅전에서도 볼 수 있다. 허황옥 일행이 배의 균형을 잡기 위해 싣고 왔다는 석탑도 남아 있어 허황옥이 인도의 아요디야에서 왔다는 증거물로 전시되고 있다. 그만 큼 이번 여행에서 아요디야의 두 마리 물고기 문양은 중요한 것이었다.


나는 가벼운 농담을 건네면서 그들의 긴장감을 풀었고 2000년 전 아요디야의 공주 허황옥에 관한 이야기를 하면서 그들의 경직된 기분을 맞추어주었다. 그리고 인도인들이 사진 찍히기를 좋아하는 것을 십분 활용했다. 그들의 환심을 사는 것은 어렵지 않았다. 장교는 잠깐의 촬영을 허락했다. 나는 이리저리 방향을 바꿔가면서 그들이 제재를 하는 동안에도 셔터를 멈추지 않았다. 마침내 아요디야와 김해를 연결하는 포에버 로맨스 로드의 첫 번째 이정표인 영원한 사랑의 상징 두 마리 물고기가 내 카메라에 담기는 순간이었다.


바라나시의 두 마리 물고기

바라나시의 골목길은 라마신을 부르는 단조로운 음률과 운구 행렬, 코를 할퀴는 향내, 파트리크 쥐스킨트의 소설 『향수』에서의 묘사처럼 생선 좌판이 깔린 18세기 프랑스 골목길 같은 악취로 가득했다. 내 마음을 움직일 환한 열정의 빛깔은 어디에서도 찾을 수 없었다. 골목길을 가득 메운 장사치들의 소리에 비하면 내 발걸음은 고독했고 희미한 가로등 불빛처럼 약한 빛이었다. 미로 같은 골목에서는 길을 잃기 십상이었다.


그녀는 어디로 발길을 옮겼을까? 아요디야를 떠난 이후 도통 길을 찾아내지 못하고 있었다. 아유타국을 떠나 영원한 사랑을 꿈꾸며 험난한 길을 선택한 그녀의 길을 과연 내가 제대로 따라가고 있는 건지 의심이 들기 시작했다. 그녀가 남기고 갔을 법한 작은 단서라도 찾아내고 싶었다. 오래된 건물이 눈에 들어오면 저절로 발길이 멈추곤 했다. 골목길을 벗어나 대로변으로 나오니 오래된 라고빈스 힌두 사원이 보였다. 드디어 그곳에서 사원의 대문에 새겨진 두 마리 물고기 형상의 부조를 만날 수 있었다. 날개가 달린 사람을 받치고 있는 모양으로, 마누의 물고기 신화를 형상화한 것처럼 보였다.


예상치 못한 곳에서 영원한 사랑의 상징인 두 마리 물고기를 찾아내니 마음이 편안해지고 발걸음도 한결 가벼워졌다. 성스러운 도시로 잘 알려진 바라나시도 포에버 로맨스 로드, 바로 2000년 전 아유타국의 공주가 영원한 사랑을 향해 지나간 길목이라는 확신이 들었다. 여전히 공기는 사정없이 후끈 거렸지만 머리에 수건을 동여매고 흐르는 땀도 아랑곳하지 않은 채 셔터 누르기를 멈추지 않았다. 반가운 마음에 저절로 미소가 지어졌다. 먼지 많은 신작로와 어지럽게 쌓인 쓰레기 더미의 골목에서 만나는 이들에게도 고개를 숙이며 미소를 지었다.


"가야" 부다가야에서 만난 이정표

인도에 가야가 있었다. 바라나시에서 멀지 않은 곳에 가야가 있다는 사실에 흥분을 숨길 수 없었다. 가야는 아요디야를 떠나 김해로 향하는 길에서 바라나시 다음으로 만나게 되는 명품 도시다. 하지만 대부분의 여행자들이 가야로 향하는 내 발길을 붙잡으며 한마디씩 거들었다. 그도 그럴 것이 최근 석가모니가 깨달음을 얻었던 사원에서 아홉 차례에 걸쳐 연쇄 폭발이 발생했고, 티베트 스님을 포함해 두 명이 다쳐서 병원으로 후송했다는 소식이 이곳으로 출발하기 전에 접한 최근 뉴스였다.


2000년 전에 만들어진 길, 아유타국의 공주가 남긴 영원한 사랑의 길을 포에버 로맨스 로드로 만들어나가면서 이 길을 건너뛸 수는 없었다. 아유타국의 여인 허황옥, 그녀가 동쪽으로 향했다면 분명 이곳을 지났을 거라는 확신을 가지면서 작은 근심과 우려를 뒤로하고 설레는 마음과 기대감을 품고 가야로 향했다. 바라나시를 떠난 지 몇 시간이 지났을 뿐인데 인도 여행 중 한 번도 경험하지 못했던 평화로운 풍경이 펼쳐졌다. 초원에서 뛰어노는 아이들의 해맑은 모습과 목가적인 풍경은 테러뉴스로 경직되었던 여행자의 우려와 근심을 한 방에 날려 보낼 만큼 아름답고 평화로웠다.


간단히 샤워를 하고 마하보디 사원으로 향했다. 입장권을 구입하고 신발을 벗고 사원 입구로 들어섰다. 마하보디 사원은 대탑을 중심으로 크고 작은 탑들이 즐비했다. 마하보디 사원에서는 1000년 전 신라의 구법승 혜초가 그랬듯이 먼 이국에서 온 순례자들부터 승려에 이르기까지 보리수나무 아래에서 묵념과 그들만의 경건한 의식을 치르고 있었다. 마지막으로 부처가 여섯 째 주를 보낸 곳이자 거대한 코브라가 부처님을 보호하고 있다는 무찰린다 호수에 이르렀다. 뜻밖에도 호수로 접어드는 입구에서 두 마리 물고기 조형물을 만날 수 있었다.


아요디야를 제외하고 내가 거쳐 온 바라나시나 이곳 부다가야는 대중성이 있는 여행 루트로 연결하기 위해 시도하는 곳인 만큼 새로운 곳에서 발견되는 두 마리 물고기 무늬나 조형물들은 포에버 로맨스 로드의 기점이 될 수 있으므로 소홀히 할 수 없었다. 마하보디 사원의 무찰린다 호수 입구의 두 마리 물고기 조형물 앞에서 독백을 하고 셔터를 누르며 생각했다. 많은 여행자들이 실크로드처럼 자동차로 탐험을 하고, 다큐멘터리를 찍고, 많은 배낭여행자들이 두 마리 물고기를 따라 여행하기를 희망했다. "너희들도 포에버 로맨스 로드의 이정표다."



미얀마

"후교" 영원한 사랑의 길목, 미얀마 국경을 넘어

인도에서의 일정을 마무리하고 어쩔 수 없이 항공을 이용할 수밖에 없었다. 미얀마는 항공 입국만 허락되고 육로 입경은 봉쇄되어 있었다. 게다가 미얀마를 넘을 기본적인 준비도 안 되어 있었다. 처음부터 항공 입국만 허락하는 미얀마 당국의 방침과 비자도 왕복항공권이 있어야 발급되는 규정에 고민하지 않을 수 없었다. 오랜 경험에 의지하는 수밖에 없어 길 위에서 차선책을 생각하기로 했다. 차선책은 불법 입국이었다. 국경도시 후교로 향했다.


포에버 로맨스 로드의 중간 지점쯤 되는 미얀마와 중국의 국경도시 후교에 여장을 풀었다. 중국의 후교 국경은 미치나라는 미얀마 북부의 최대 도시와 불과 140킬로미터 거리였다. 미얀마 국경을 넘을 방법을 찾아내야 했다. 가장 큰 호텔부터 관공서를 드나들면서 늦은 밤까지 미얀마의 국경을 넘을 방법을 찾았고, 나를 인솔해줄 만한 사람도 찾아다녔다. 우여곡절 끝에 영어가 몇 마디 되는 가이드 겸 드라이버를 찾아냈다. 중국인과 미얀마 사람들만 통행이 허락되는 곳까지 왕복하는 미니버스를 통째로 예약하고 그와 동행을 약속 했다.


이른 아침 약속대로 그는 호텔 앞에서 나를 기다리고 있었다. 우리는 서둘러 미얀마로 들어가는 국경 검문소로 향했다. 중국의 변경도시 후교를 떠난 지 30여 분 만에 너른 아스팔트길을 가로막는 건축물이 보였다. 우리는 엄격한 세관원과 공관들이 일하는 국경 검문소 근처에 멀찌감치 차를 세웠다. 나는 내리는 비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기다란 망원렌즈를 창문 밖으로 슬그머니 내밀고 비 내리는 국경의 검문소와 세관 건물을 카메라에 담았다. 국경 검문소를 어눌한 사진 한두 컷으로 만족하기로 하고 약간의 긴장감 속에 국경 검문소 옆으로 난 작은 길로 차를 돌렸다. 그리고 2000년 전 이미 존재하고 있던 작은 옛길을 따라 영원한 사랑의 길목을 달렸다.


"감배지" 미얀마의 국경도시 감배지에서

마얀마다. 아무런 통제 없이 국경 검문소 옆으로 나 있는 질척거리는 길을 통해 중국 국경을 넘었다. 중국 쪽 검문소는 물론이고 미얀마 쪽에서도 간단한 심사만 받고 별 탈 없이 통과했다. 중국과 미얀마의 허술한 국경 검문은 인도의 아요디야에서 미얀마와 중국을 넘어 김해까지 이어지는 포에버 로맨스 로드를 따라 어렵지 않게 국경을 넘어 달릴 수 있는 육로 여행이 멀지 않았다는 것을 보여주었고, 그들의 국경 개방도 시간문제라는 것을 알 수 있었다.


미얀마의 국경마을 감배지를 둘러보았다. 감배지는 산 속의 작은 변경마을이었다. 이리저리 돌다보니 추적거리는 빗속에 우산을 들고 등교하는 아이가 우리 앞을 지나갔다. 비가 내리는데도 아이는 희뿌연 분 같은 것을 양쪽 볼에 바르고 있었다. 미얀마 사람이라면 거의 모두 천연 화장품처럼 타나카라는 것을 사용했다. 그 아이를 보는 순간 마침내 내가 미얀마에 발을 딛고 서 있다는 것을 실감할 수 있었다. 2000년 전 영원한 사랑의 길의 중간쯤 되는 곳, 미얀마의 비오는 날 국경에서의 짧은 순간을 잊을 수 없을 것 같았다.


이제는 포에버 로맨스 시티, 김해로 향하는 길이 멀지 않다는 생각이 들었다. 김해의 영원한 사랑의 화신이 된 아유타국의 공주 허황옥, 그녀의 뒤를 따라 발길을 재촉했다. 다시 영원한 사랑의 상징인 두 마리 물고기를 찾아 미얀마와 중국의 곤명 사이에 이어지는 옛 차마고도의 기점 등충으로 향했다.



중국

등충의 고도, 화순향에서

두 마리 물고기 흔적을 찾아 시내에서 4킬로미터 정도 거리의 고도인 민속촌 화순향(和順鄕)으로 향했다. 화순향의 고도를 살피면서 알게 된 사실인데, 동서양이 혼합된 건축양식과 서역의 물건들이 곳곳에서 발견될 정도로 옛 실크로드의 한가운데 있었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나는 더욱 호기심을 가지고 지도를 펼쳤다. 먼저 고고학자 김병모 교수의 역사 추적 시리즈 『허황옥 루트 인도에서 가야까지』에서 메모를 보고 도교사원 원룡각을 찾았다.


청나라 때 축조되었다는 쌍홍교를 건너 연못과 같은 호수를 끼고, 명나라 때 축조되고 청나라 때 재건된 원룡각으로 빠른 걸음을 옮겼다. 호수가 끝나는 곳에서 용담이라는 작은 연못을 만났다. 원룡각은 연못과 녹음이 짙은 숲을 품고 있어서 완벽한 구도로 잘 그린 한 폭의 그림처럼 보였다. 원룡각으로 들어가는 정문 앞에 서서 한참을 굳어버린 사람처럼 움직이지 못했다.


2000년 전에 숨겨둔 보물이라도 발견한 듯 신비스럽고 경이로운 체험을 했다. 두 마리 물고기였다. 원룡각 대문에 그려져 있는 두 마리 물고기는 서로 마주 보면서 평화와 평등, 풍요와 영원한 사랑을 보여주고 있었다. 포에버 로맨스 시티, 김해 김수로 왕릉의 납릉 정문에 새겨진 사랑의 징표와 다르지 않았다. 그 순간만큼은 아요디야에서 김해로 향하는 포에버 로맨스 로드를 실크로드만큼이나 누구나 관심을 가지고 한 번쯤 꼭 가보고 싶은 여행자의 로망으로 만들고 싶다는 충동이 가슴을 때렸다.


"대리" 이해 호수에서 만난 여인

미얀마를 넘어 옛 실크로드의 선상에 있던 등충의 고도, 화순향의 원룡각 대문에 그려져 있는 두 마리 물고기를 보고 잠시 안락한 시간을 가졌다가 짧은 휴식을 취하고 다음 목적지인 대리(大理)로 향했다. 대리는 사천성의 주도인 성도를 만나는 길목이다. 나는 여행 출발 전부터 대리를 관심 있게 보았다. 자료를 조사하다가 뜻하지 않게 이곳 이해 호수를 여행했던 여행자의 블로그에서 두 마리 물고기가 한 여인을 떠받들고 있는 사진을 보게 되었다. 사진 속 호수의 여인상은 인도의 아요디야에서부터 김해까지 연결되는 허황옥의 영원한 사랑의 비밀코드, 두 마리 물고기와 관련 있을 것으로 생각됐다.


여신상은 무릇 나약한 여성들을 위해 투쟁하다가 승전보를 울린 여전사처럼 늠름해 보이기도 했고 호수의 여신처럼 아름답고 신비롭기도 했다. 호수를 배경으로 선 여인은 홀로 걷는 이의 쓸쓸한 마음을 읽었는지 나를 향해 미소를 짓고 있었다. 이 여인이 왜 여기서 물고기의 보호를 받으면서 서 있는지 역사적으로 고고학적으로 깊이 알 수는 없었다. 이 여인을 허황옥이 남긴 흔적이라고 장담하거나 적용할 수도 없었다. 하지만 흘려버릴 만한 단순한 여인상도 아니었다. 물고기의 보호를 받고 있는 여인상은 이곳 백족의 여신이었지만 포에버 로맨스 로드의 물고기를 신성시하는 문화 코드는 같았다.


이해 호수의 여인상과 짧은 만남을 끝내고 호숫가를 산책하듯 걸었다. 길게 뻗은 대리석 길을 따라 들어가 호수를 바라보면서 사직을 찍으려고 들고 있던 우산을 내려놓으려는 순간 나는 신비롭고 경이로운 여행 속으로 빠져들어 갔다. 두 마리 물고기가 호수를 유형하듯 나를 반기고 있는 것이 아닌가. 허리춤까지 올라온 대리석에 두 마리 물고기가 조각되어 있었다. 기록도 자료도 없던 대리, 이곳도 허황옥이 가야로 향하다 머문 영원한 사랑의 길목이었다는 확신을 갖게 되는 순간이었다.


"보주" 보주 태후의 고향

보주는 지금의 사천성 자양시에 있는 안악현의 옛 지명이다. 허황옥 그녀의 영원한 사랑의 길을 계속 밟아보기로 했다. 안악현의 허씨 사당에 이르자 "보주 태후 허황옥의 고향"이란 푯말과 한글 안내판이 보였다. 마을 어귀에는 중국식 현대 가옥들이 자리를 잡고 있었다. 길을 따라 푸른 대나무 숲 쪽으로 들어가자 작은 구릉 아래 시골집 몇 가구가 놓여 있었다.


카메라를 들고 마을 어귀를 서성이는데, 한 노인이 한눈에 내가 한국에서 온 여행자임을 알아봤다. 노인은 나를 그곳의 촌장인 허평 씨에게 안내했다. 우리는 가볍게 인사를 나누었고, 그의 안내가 지체 없이 시작되었다. 허평 씨의 중국어 가이드가 시작되면서 내가 이국의 시골에 와있음을 새삼 느꼈다.


그는 먼저 허황옥 사당으로 나를 안내했다. 허씨 사당에서 이것저것들을 살펴보니 족히 300~400년은 되었을 법한 고가구에서 두 마리 물고기가 선명하게 보였다. 한쪽 구석에 세워진 현판에서도 두 마리 물고기가 서로를 바라보고 있었다. 참으로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김해 김수로 왕릉의 납릉 정문에서 본 두 마리 물고기와 크기는 달랐지만 아요디야부터 바라나시, 부다가야, 그리고 차마고도의 기점 등충의 고도 화순향 사찰에서 본 것과 다르지 않았다. 두 마리 물고기 문양이 발견될 때마다 긴 여행의 피로도 잊고 점점 더 흥미와 재미가 더해졌다.



가야

"김해" 영원한 사랑 이야기

2000년 전 아유타국 공주의 발자취를 따라 인도 아요디야를 출발해 미얀마, 중국을 두루 걸쳐 왔다. 1만여 킬로미터가 넘는 길이지만 허황옥이 남긴 두 마리 물고기를 찾아 그 길을 따라왔다. 이방인으로 홀로 걷던 긴 여향을 마치고 포에버 로맨스 로드의 종착지 김해로 향하고 있다. 김해공항에서 수로왕릉까지 이어지는 경전철을 타기로 하고 공항 역사로 향했다. 포에버 로맨스 로드의 마지막 도시 김해의 경전철 안 풍경은 평화롭고 사랑스러웠다. 해반천을 가로질러 수로왕릉으로 향하는 교각에 만들어진 두 마리 물고기 조형물은 경전철의 안전을 기원하듯 수로왕릉역을 지키고 있었다.


허황옥 동상이 있는 수릉원과 수로왕릉을 곁에 두고 있는 김해 한옥체험관에서 마지막 여장을 풀고 한숨 잠에 빠지니 스산한 가을바람이 숙소의 깊은 방까지 스며드는 것 같았다. 이른 아침 서둘러 은하사를 찾아 숙소를 나섰다. 신어산에는 우리나라 최초의 절로, 허황옥의 오빠 장유화상이 48년에 창건했다고 전해지는 은하사가 있다. 은하사의 대웅전 천장 대들보에도 오랜 세월에 빛바랜 신어(神魚)가 그려져 있었다. 수미단의 두 마리 물고기 그림과 대들보의 신어를 보고 있자니 은하사가 긴 세월 동안 신령스러운 물고기의 보호를 받고 있다는 느낌이 들었다. 은하사는 2000년 전 수로왕과 허왕후 그리고 장유화상의 정령이 살아 숨 쉬며 가야 초기의 역사적 흔적들을 충분히 느끼게 했다.


영원한 사랑의 도시

한 곳 한 곳 김해 도심에 몰려 있는 비밀스러운 고대왕국의 도시를 살피다 보니 타임머신을 타고 시간여행을 하고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국립박물관과 고분박물관 등을 보는 것만으로도 역사 도시로서의 김해의 품격 있는 면모를 보여주었다. 이제 이역만리 길을 떠나 영원한 사랑의 결실을 맺고 김해 땅에서 왕비가 되어 영원한 사랑의 화신으로 잠든 김수로 왕비릉으로 발길을 옮겼다.


허황옥 공주의 이야기처럼 김해의 역사는 가야의 역사이고, 신비롭고 경이로운 사랑이 남긴 설화의 역사이다. 허황옥 공주는 서역 땅에서부터 공주의 신분으로 길을 떠나 멀고도 험한 길을 찾아왔다. 우마차를 타기도 하고, 때론 설산을 걸어서 넘기도 했다. 배에 빨간 깃발을 매달고 양자강의 무서운 급류에 몸을 맡겼다. 바다를 만나고 풍랑을 헤치고 가야로 향했다. 그 험난하고 고단한 여정을 지나 이역만리 가야까지 왔다. 그리고 김수로왕을 만났다.


인도의 아요디야부터 김수로 왕릉 정문 납릉의 문설주에 까지 새겨진 두 마리 물고기처럼 그들은 높지도 낮지도 않게 서로를 바라보면서 영원한 사랑을 이루었다. 허황옥 공주의 발자취를 따라 인도의 아요디야를 출발한 지 한 계절이 자났다. 11월, 김해의 푸른 하늘과 맑은 공기는 잿빛 하늘의 서울과 달랐다. 공기는 맑고 바람도 시원했으며 햇살도 풍요로웠다.


소박하게 낮은 돌담에 둘러싸인 그녀의 무덤은 변한 게 없었다. 그녀가 풍랑을 만나 배의 균형을 잡기 위해 싣고 왔다는 파사석탑도 그대로였다. 아요디야에서부터 김해에 이르기까지 영원한 사랑의 길목에서 만난 두 마리 물고기들이 만감을 교차하며 머릿속을 스쳐 지나갔다. 그녀의 숨결과 여리고 고운 목소리가 가을 오후의 미풍에 실려 귓전을 맴돌았다.

"저는 아유타국의 공주로 성은 허(許) 씨, 이름은 황옥(黃玉)이며 나이는 열여섯 살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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