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시대 역사문화여행

   
최정훈·오주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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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허브
   
15000
2013�� 07��



■ 책 소개
TV 사극처럼 조선시대의 역사와 문화를흥미진진하고 재미있게 즐기자! 

요즘 학생들이 가장 어려워하고 싫어하는 과목이 국사라고 한다. 영화나 TV드라마에서 보는 것처럼 극적이지도 않고, 시험을 위해서 연도와 제도, 사람 이름 등을 머릿속에 담아야 하기 때문일 것이다. 너무 어렵게 접근하면역사는 지루하고 고루한 학문이 되어 버린다. 

이 책은부모와 학생들이 쉽고 친근하게 역사에 다가갈 수 있도록, 교과서에서는 가르쳐 주지 않는 흥미로운 주제로 이야기를 풀어 나갔다. 특히 조선시대는우리와 가장 가까운 역사이면서 TV 드라마 등을 통해 낯익은 역사이기도 하다. 

또한, 최고 권력자인 왕에서부터 짐승만도 못한 취급을 받았던 천민에 이르기까지 조선 사람들의 삶의 모습을 담고있다. 지배 계층과 피지배 계층의 삶의 궤적을 따라가다 보면 역사의 흐름이 자연스럽게 읽힌다. 이 책을 펼치는 순간, 역사와 친해지는 여행이시작될 것이다.

■ 저자
최정훈
 - 서강대학교를 졸업하고 경향신문 사회부·문화부 기자로 일했다. 문화재 담당 기자로 재직하면서 우리나라의 문화재정책과 역사 관련 글을 통해 한국의 문화와 역사 알리기에 힘썼다. 현재는 다음커뮤니케이션 미디어본부장 겸 서비스 총괄 부사장으로 재직 중이다.저서로 에세이집 『당신은 나의 작은 영웅입니다』 『금강산, 그 든든한 힘』 등이 있다.

오주환 - 대학에서 사학을 공부했고, 잡지사와 신문사를 거치는 동안 여행 기자로일했다. 여행을 통해 사람들이 어렵고 재미없어 하는 이 땅의 역사와 문화에 쉽게 다가갈 수 있도록 하기 위해 글 쓰는 작업을 계속하고 있다. 길위에서 과거와 현재를 만나고, 세상을 느끼기 위해 늘 여행을 꿈꾸는 여행자다. 저서로 『문화유산을 찾아서』 『답사 여행 100배 즐기기』 『조선500년 풍류지를 찾아서』『부모와 함께하는 문화유산 상식여행』『내 마음속 꼭꼭 숨겨둔 여행지』 등이 있다.
■ 차례
1부 조선의 왕
왕의 탄생과 태실:왕의 탯줄은 따로 무덤을 만들었다
왕의 성장과 교육: 공부 게을리하면 폐위는 당연지사
왕족 교육: 임금에게 떼밀려 억지로공부
왕의 결혼: 덕과 복을 갖춘 두세 살 연상의 여인과 결혼
왕의 즉위식: 아라비아 인도 즉위식에 참석
왕의 하루 일과:새벽부터 자정까지 격무의 연속
왕의 수라: 하루 두 끼의 식사와 세 차례의 간식
왕의 질병: 종기 고치려 거머리까지 이용
왕의취미 생활: 신하들 간섭 피해 몰래 사냥과 격구 즐겨
왕과 왕비의 농사짓기: 왕은 밭 갈고 왕비는 누에 치고
왕의 효성: 부왕 위해앵두 따고 복어 베고
왕의 죽음과 무덤: 풍수지리설에 따라 명당에 위치
왕의 호칭: 후대의 평가에 따른 ‘조(祖)’와‘종(宗)’

2부 궁궐과 궁중생활
4대 궁궐의 역사: 궁궐의 자취를 읽으면 역사가 보인다
궁궐의 배치: 북악을 등지고 남산을 바라보다
정전과 편전: 왕의 정치적 고뇌가 깃든 공간
왕과 왕비의 침전: 각방 생활이 기본, 길일 잡아 합방
궁궐의 후원: 낚시와뱃놀이 즐기며 온갖 시름 잊던 곳 
후궁의 말년: 왕이 승하하면 여승이 되어 생을 마감
궁녀의 삶: 궁녀와 사랑을 나누면 곤장100대

3부 양반과 서민생활
사대부와 과거 제도: 과거 시험이 개인과 가문의 운명을 좌우
성균관 유생: 기숙사 생활 하며 매일 시험,낙제하면 매까지 
성균관 유생의 상소 제도: 단식 투쟁, 수업 거부, 동맹휴학까지 불사
양반 관료 사회: 관료의 꽃 ‘당상관’,살아서 오르면 다행
관리의 신고식: 빚잔치 벌이다 매 맞고 폐인 되기도
관리의 하루 일과: 새벽별 보고 출근, 하루 12시간 근무
문중 간의 묘지 다툼: 임금이 나서야 겨우 해결되다 
농민의 삶: 국가의 중추 역할 하면서도 각종 노역에 시달려 
삼정 문란:어린아이, 죽은 자의 몫까지 바치다
천민의 삶: 사람 아닌 사람, 노비의 값은 말 1필 
기생의 삶: 노리개로 전락한 예능인의 비애

4부 정치·외교이야기
사관과 실록: 목에 칼이 들어와도 쓸 건 쓴다
세종의 여론 정치: 팔도 백성에게 물어 조세 정책결정
사가독서: 출근하지 말고 독서에 정진하라
조선의 충과 효: 임금을 섬길 날은 길고 부모에게 보답할 날은 짧다
‘줄 대기’금지법: 일등 공신과 왕족에게도 성역은 없다
관리의 뇌물 비리: 뇌물 액수에 따라 곤장형부터 교수형까지 
대중국 외교: 중국 사신이볼까 두렵다, 모든 것을 숨겨라
대일본 외교: 왜구 방비 목적으로 형식적인 관계만 유지
말과 국방력: 말 부족이 임진왜란을불렀다
외국어 교육: 우리말을 쓰면 관직을 박탈하고 곤장을 쳐라
사법 제도: 사형수에게는 재판을 세 번 시행하라 
임금의사면령: 바닷물이 붉게 변했으니 옥문을 열어라
형벌과 고문: “네 죄를 네가 알렸다!” “주리를 틀어라!” 
조선의 붕당정치:성리학의 흐름과 조선의 당쟁사

5부사회·문화 이야기
그린벨트 제도: 나무를 보호하고 건축물을 규제하라
청계천 준설 공사: 21만 5,000명이 일궈 낸조선 최대의 공사
여성의 가발: 가발 무게에 짓눌려 목뼈가 부러질 정도
강간범의 처벌: 피해 여성의 행실에 따라 장형부터교수형까지
차와 다방: 술 문화에 밀린 차 문화
금은 이야기: 중국의 지나친 징발로 세공술 끊겨
김치의 변천: 200년 전부터고춧가루 넣은 김치 먹어
조선의 외국 동물: 일본 사신이 바친 코끼리가 살인죄로 귀양 가다
천상열차분야지도: 일식과 월식은 왕에게내린 하늘의 경고 
세계지도 ‘혼일강리역대국도지도’: 600년 전에 조선 중심의 세계지도 완성
화원과 도화서: 예술가에서 지리학자,스파이 노릇까지 
도자기의 변천: 귀족 취향의 청자에서 서민적인 백자로

부록: 조선 왕조 가계도





조선시대 역사문화여행


1부 조선의 왕

왕의 탄생과 태실: 왕의 탯줄은 따로 무덤을 만들었다

"신체발부 수지부모 불감훼상 효지시야" 공자가 제자인 증자에게 전한, 효도에 관한 내용을 추린 『효경』의 첫 장인 개종명의에 실린 구절이다. 신체와 몸의 털, 피부는 부모에게 받은 것이니 이를 훼손하지 않는 것이 효도의 시작이라는 뜻이다. 유학을 숭상하고 효를 제일의 윤리로 여긴 조상들이 머리털 하나라도 부모에게 받은 것이라 함부로 대하지 않았음을 일컫는 말이다.


이 때문에 조상들은 아기가 태어났을 때 어머니로부터 영양을 공급 받는 생명줄인 탯줄도 태아에게 생명력을 부여할 것이라 생각해 함부로 버리지 않고 소중하게 보관했다.


왕실의 경우에는 사대부나 평민보다 탯줄을 훨씬 더 소중하게 다뤘다. 탯줄이 국운과 직접 관련이 있다고 믿었기 때문이다. 아기가 태어나면 백자 항아리에 탯줄을 넣어 산실 안에 임시로 보관한다.


이어 생후 7일째가 되면 태를 물로 정갈히 100번 씻어 내는 세태 의식을 거행한다. 물에 씻은 태는 다시 태항아리에 담아 두었다가 명당을 골라 안태했다. 이곳을 태실이라고 불렀다. 말하자면 태의 무덤을 조성한 셈이다.


왕의 성장과 교육: 공부 게을리하면 폐위는 당연지사

조선 시대 세자가 왕이 되기 위해서는 선행 조건이 필요했다. 그중에서도 왕으로서의 덕목을 갖추기 위한 교육이 매우 중요했다. 이렇다 보니 세자를 향한 왕과 왕비의 교육열과 정성은 실로 대단했다.


왕실에서는 임금이나 세자의 첫아들인 원자가 태어남과 동시에 보양청을 설치해 보호와 양육을 담당하게 했다. 원자는 나라의 근본으로 성군이 되고 안 되고는 평소 쌓은 교양에서 시작된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3~4세가 되면 유치원에 해당하는 강학청에서 『효경』『소학』『동몽선습』 등을 가르쳤다.


원자가 15세쯤 되었을 때, 조정의 대신들은 원자의 나이와 학문 수준이 세자로서 손색이 없다고 생각되면 왕에게 세자로 책봉할 것을 요청한다. 그러면 왕이 결정하여 봄철 좋은 날을 택해 책봉례를 행한다. 세자 책봉례는 왕이 원자를 세자로 책봉한다는 공식 임명서를 수여하는 의식이다. 책봉 받은 세장은 성균관 입학례를 행한다. 실제로 성균관에 입학하는 것은 아니었지만 그럼에도 이를 입학례라고 하는 이유는 세자가 유학도임을 만천하에 강조하기 위함이다.


왕세자는 제왕으로서의 덕목을 갖추기 위해 공부를 게을리해서는 안 되었지만, 만일 공부를 게을리하면 처벌도 감수해야 했다. 태종은 양녕대군이 공부를 게을리하자 세자의 공부 시간, 학습 방법에 대해 시시콜콜 간섭을 했다. 그래도 말을 듣지 않자 양녕대군을 보좌하는 내시들이 세자의 마음을 방탕하게 한다 하여 곤장 30대씩을 때리기도 했다. 태종 17년에는 세자가 스스로 반성하며 종무와 주상 앞에 반성문을 올리기도 했지만, 급기야 왕세자의 자리에서 폐위당하고 동생인 충녕대군(세종)에게 세자의 자리를 물려줘야 했다.


왕의 질병: 종기 고치려 거머리까지 이용

사계절 산해진미를 먹고 24시간 어의와 궁녀들로 둘러싸여 극진한 보살핌을 받은 왕들은 얼마나 오래 살았을까? 아이러니하게도 조선 왕들의 평균 수명은 46세에 불과하다. 환갑을 넘긴 왕이라야 태조(74세), 정종(63세), 숙종(60세), 영조(83세), 고종(67세) 정도다. 불혹을 넘기지 못한 왕도 11명이나 된다.


왕들의 사인은 고혈압, 당뇨병, 중풍 등이 일반적이다. 상당수의 왕들을 재위 기간 내내 괴롭힌 질병은 단연 종기다. 종기 때문에 몇 개월 동안 문 밖 출입을 못하고 누워 지낸 경우가 허다했다. 중국 사신을 영접하지 못해 외교적인 문제가 발생한 적도 있었다. 어의에게 종기는 반드시 극복해야 할 질병이었다. 탕제는 물론이고 몸에 바르는 고약, 온천욕을 비롯해 심지어 거머리를 이용하기도 했다.


왜 조선의 왕들은 종기에 시달렸을까? 현대적 관점에서 본다면 가장 큰 이유는 운동 부족과 과도한 스트레스가 아니었나 싶다. 왕은 특별한 일이 없는 한 하루 종일 궁궐을 지키며 업무를 봐야 했다. 정치적 스트레스도 한몫했다. 왕의 모든 행동은 유교적 정치 이념에 부합해야 했으며, 그렇지 않으면 여러 신하들의 따끔한 충고를 감수해야 했다. 과도한 스트레스에 운동 부족이 겹쳤으니 혈액 순환이 원활할 리 만무했고, 악성 종기는 물론 고혈압이나 당뇨병 등의 퇴행성 질환으로 고생할 수밖에 없었다.

 


2부 궁궐과 궁중생활

궁궐의 배치: 북악을 등지고 남산을 바라보다

한양이 조선의 중심이라면 궁궐은 한양 도성의 중심이다. 궁궐은 왕과 왕족이 생활하는 주거 공간이면서 동시에 나랏일이 펼쳐지던 정치적 공간이었다. 또한 외국의 사신이 왔을 때는 외교적인 공간이기도 했다. 궁궐은 조선을 대표하는 얼굴이었다.


궁궐은 국가의 통치 이념과 왕실의 위엄이 자연스레 배어 있어야 했다. 중국의 성리학을 통치 이념으로 받아들인 조선은 중국의 도성과 궁궐 제도를 그대로 따랐다. 중국 고전인 『주례』『예기』『의례』 등을 궁궐 건축의 기준으로 삼았다. 우선 궁궐의 배치는 도성의 시가지 배치에 준했다.


한양을 도성으로 정한 만큼 북악을 기준으로 하여 궁궐이 남쪽을 향하도록 배치하고 그 뒤에 시가지가 형성되었다. 이를 전조후시라 한다. 궁궐의 왼쪽에는 왕실 조상의 사당인 종묘를, 오른쪽에는 토신과 곡신에게 제사 지내는 사직단을 배치했다. 이를 좌묘우사라 한다.


궁궐의 후원: 낚시와 뱃놀이 즐기며 온갖 시름 잊던 곳

궁궐의 후원은 담으로 겹겹이 둘러싸인 구중심처에서 바깥 생활이 엄격하게 제한된 왕과 왕비 등 왕족들의 유일한 휴식 공간이다. 평생 동안 자신의 침전 주변을 벗어나기 힘들었던 왕비에게 궁궐의 뜨락은 자연을 벗할 수 있는 유일한 산책 공간이자 궁중 생활의 쓸쓸함을 달래는 오락 공간이기도 했다.


우리나라는 삼국 시대부터 궁궐에 후원을 조성했다. 조선 왕조에 들어와서는 더욱 기능이 강화되어 궁궐의 업무 및 생활공간과 밀접한 관련을 맺으면서도 자연미를 잃지 않도록 꾸몄다.


궁궐 후원은 기본적으로 연못·시냇물·조산(인공산)·수목 등의 자연물과 누각·정자·담장·다리·굴뚝 등의 건축물, 돌확·돌연못 등의 다양한 석물이 생활공간과 자연스럽게 조화되도록 구성했다.


가장 빼어난 경치를 자랑하는 후원은 창덕궁의 후원이다. 북악산의 줄기인 매봉을 등지고, 자연의 지세에 따라 연못을 파고 연꽃을 심어 누각과 정자를 조성했다. 창덕궁은 1405년 별궁으로 창건되면서 조성되어 여러 왕을 거치며 확장되었으며, 현재 10만3천여 평에 달하는 규모다.


후궁의 말년: 왕이 승하하면 여승이 되어 생을 마감

궁녀들에게 구중궁월의 높은 담은 철장 없는 감옥이나 마찬가지였다. 한 번 궁궐에 들어가면 죄를 짓고 죄인이 되어 쫓겨나거나 늙어 죽기 전에는 궁 밖으로 나갈 수 없었다. 4~5세 정도의 어린 나이에 부모 곁을 떠나 궁녀가 되고 낯설고 엄한 궁궐에 들어와 평생을 수절하며 살아야 했으니 그 삶의 애절함은 이루 말로 할 수 없다.


깊고 깊은 곳에서 세상과 담 쌓고 사는 궁녀들에게 인생을 바꿀 기회가 있었으니, 임금의 눈에 들어 승은을 입는 것이었다. 바로 후궁이 되는 것이다. 승은을 입은 후궁은 승은 내인이라 불렸으며, 이들은 간택 후궁과 달리 일개 궁녀 신분에서 하룻밤 만에 왕의 후궁으로 벼락출세를 했다.


하지만 왕이 승하하고 나면 그저 한여름 밤의 꿈이 되고 말았다. 재혼은 꿈도 꾸지 못했다. 더 이상 궁궐에 머물 수도 없었다. 자신의 아들이 왕이 되거나 대비나 왕비가 궐 안에 살도록 허락해 주지 않는 이상 궁궐을 나와야 했다. 그렇다고 사가로 갈 수 있는 것도 아니었다. 아들을 둔 후궁은 아들과 함께 사가로 나가 살 수도 있었지만, 대부분은 도성 한쪽에 마련된 별처에서 죽는 날까지 정절을 지키며 외롭게 여생을 보냈다.



3부 양반과 서민 생활

성균관 유생: 기숙사 생활 하며 매일 시험, 낙제하면 매까지

조선의 학교교육은 조선의 건국 이념인 성리학을 보급하여 유교의 실천 윤리인 삼강오륜을 일깨우는 데 목적을 두었다. 새로 개국한 나라의 정치적 성패가 교육에 달려 있다고 보았다. 실제로는 양반 자제들을 학교에서 가르침으로써 인재 양성을 도모하려는 목적이 더욱 컸다고 볼 수 있다. 학교 교육이 관리 선발을 한 과거 시험의 준비 과정이었던 셈이다.


성균관에 들어가기 위해서는 소과에 합격해야 했지만, 15세 이상의 사학 학생 중 『소학』 및 사서오경 중 1경에 능통한 학생, 공신과 3품 이상 관리의 아들로 『소학』에 능통한 사람, 하급 관리 중 지원자 등도 입학이 가능했다. 이처럼 유생이 될 수 있는 자격은 대체로 양반 자제로 국한되었다.


성균관에 입학하면 수많은 특전이 주어졌다. 학비와 숙식 제공은 물론 3년마다 치르는 문과 시험을 기다리지 않고 특별 시험에 응시할 수 있었다. 성적이 우수하면 곧바로 관리로 특별 채용되기도 했다. 이 같은 특전에는 엄격한 학교생활이 요구되었다. 학생 수는 세종 대 이후부터 200명이었는데, 동재와 서재에서 전원 기숙사 생활을 했다.


성균관 유생들은 엄격한 학칙, 빡빡한 일정 이외에도 각종 평가 시험에 시달려야 했다. 시험은 일일 고사, 10일마다 치르는 순말 고사, 월말 고사, 학년 말 고사 등을 치렀다. 시험 성적에 따라 매우 잘 이해하고 있다는 대통, 잘 이해하고 있다는 통, 대략 알고 있는 약통, 제대로 이해하지 못한다는 조통 등 4등급의 성적을 매겼고, 꼴찌에 해당하는 조통은 유생들 앞에서 망신과 함께 벌을 각오해야 했다.


관리의 하루 일과: 새벽별 보고 출근, 하루 12시간 근무

예나 지금이나 직장인의 아침은 분주하다. 조선 시대 관리들의 아침은 더욱 바빴던 모양이다. 매일 아침 소속 부에 출근 도장을 찍어야 했는데, 출근 시간이 묘시(오전 5~7시)여서 새벽 댓바람부터 서둘렀다. 해가 짧은 겨울에는 진시(오전 7~9시)로 늦춰지기는 했지만 바쁘기는 매한가지였다.


궁궐에서 일하는 고급관료, 당상관들은 더욱 골치가 아팠다. 국왕에게 문안하는 새벽 조회, 즉 상참과 조참이 인시(오전 3~5시)를 전후로 열리기 때문에 조회 전에 대문을 나서야 했다. 그야말로 새벽별을 보면서 출근한 것이다. 하급관리의 경우에도 별반 차이가 없었다. 상하 관계가 엄격했던 만큼 반드시 아랫사람이 일찍 출근해서 윗사람을 기다려야 했다. 윗사람이 출근하면 문 앞까지 나가서 맞이해야 했으니 시대를 막론하고 졸병은 불쌍한 처지였다.


아침 일찍 새벽별을 보고 출근한 관리는 하루 12시간 이상 업무를 보고, 숙직이 있는 날에는 하룻밤을 꼬박 세워야 했다. 그러나 이는 규정일 뿐 왕의 건강, 왕위 계승 등 왕실의 여러 가지 대소사, 화급한 정치적 현안이 발생하면 근무 시간을 넘겨 밤샘하는 일이 비일비재했다.


천민의 삶: 사람 아닌 사람, 노비의 값은 말 1필

신분의 상하 질서가 엄격하게 적용되었던 조선 시대에 천민은 최하층을 이루는 계층이었다. 천민의 가장 대표적인 형태는 노비였다. 노비란 남자 종을 가리키는 노와 여자 종을 일컫는 비가 합쳐진 말이다. 노비의 신분은 세습되는 것이 일반적이어서 아무리 발버둥 쳐도 노비에서 벗어날 수 없었다.


노비는 집이나 땅처럼 여겨져 양반 사대부들 사이에서 매매되기도 하고 상속이 가능한 재산으로 취급되었다. 고려 말에는 소나 말보다 가치가 낮아 말 1필의 값이 노비 2~3명에 해당했다. 1398년의 기록에 당시의 노비 가격은 비싸야 오승포(5승으로 짠 마포, 1승은 80올) 150필 값인데, 말 1필의 가격은 400~500필에 달했다. 그러다 노비의 가격을 15세 이상 40세 이하는 400필, 14세 이하나 41세 이상은 300필로 개정했다.


이뿐만이 아니었다. 사노비는 인간 이하의 삶을 살았다. 상전은 노비에게 어떤 형벌도 가할 수 있었다. 죽었을 경우에만 해당 관청에 신고해 허가를 받았다. 관청의 허가를 받지 않고 참혹한 방법으로 노비를 죽였을 때만 상전에게 곤장 60대와 중노동(도형) 1년 또는 곤장 100대의 형벌을 주었다. 그리고 피살된 노비의 가족은 사노비에서 공노비로 바꿔주었다. 노비는 상전의 모반 음모를 제외한 어떠한 범죄에 대해서도 관아에 고발할 수 없었다. 상전을 고발하는 것은 삼강오륜을 짓밟는 일로 간주되어 교살에 해당하는 중죄로 다스렸다.



4부 정치·외교 이야기

사관과 실록: 목에 칼이 들어와도 쓸 건 쓴다

실록의 간행 목적은 있는 그대로의 역사를 정직하게 기록해 후손들이 경계하도록 하는 데 있다. 왕의 일거수일투족을 기록함으로써 왕에게 선정을 베풀라는 압력으로도 작용했다. 이는 신하들도 예외가 아니었다. 『조선왕조실록』은 왕권과 신권의 적절한 견제와 조화 속에서 기록되고 간행될 수 있었던 것이다.


이 같은 귀중한 문화유산을 오늘날까지 전해 온 사람들이 바로 사관이다. 넓은 의미의 사관은 역사를 기록하고 이를 모아 편찬하는 관청인 춘추관에 소속된 모든 관원을 말한다. 이들은 벼슬이 참하직에 불과한 하급 관리로 대개 문과에 급제한 전도가 유망한 청년 관리였다. 청년들을 사관으로 임명한 것을 때가 덜 묻은 만큼 조정에서 일어나는 사실을 있는 그대로 정직하게 기록할 것이라는 믿음 때문이었다.

 

사관들은 궁궐 내의 정전, 편전 등에서 열리는 모든 회의에 배석해 왕과 신하들 사이에 벌어지는 국사에 대한 논의를 지켜보면서 이를 빠짐없이 기록했다. 왕과 신하 사이에 오고간 시시콜콜한 대화까지 빈틈없이 적었다. 그러나 단지 사실만을 기록한 것은 아니었다. "사신은 논한다" 이 같은 구절로 시작되는 문장 속에는 왕과 신하에 대한 인물평에서부터 정책에 대한 비판, 대안 제시에 이르기까지 후세에 귀감이 될 만한 정론 직필의 날카로운 역사 평이 함께 실렸다.


줄 대기 금지법: 일등 공신과 왕족에게도 성역은 없다

고려 시대 말에는 인사 청탁이 큰 사회 문제로 등장했다. 그 결과 파당이 생기고 정치 질서가 극도로 혼란해지는 심각한 폐단을 낳았다. 시쳇말로 줄 대기 문화의 원형쯤 되는 셈인데, 이런 일이 조선 시대에도 일어났다. 조선은 고려 말의 폐해를 거울삼아 집권 초에 아예 법을 제정해 인사 청탁을 제도적으로 금지했다. 정종 원년(1399)에 제정된 분경 금지법이 그것이다.


분경은 분추경리의 준말로 벼슬을 얻기 위해 고관대작의 집을 분주히 드나들며 엽관(관직을 얻으려고 갖은 방법으로 하는 노력)과 청탁을 하는 것을 말한다. 정종은 하급 관리가 상급 관리를 방문하지 못하도록 명을 내렸다. 분경 금지를 통해 공신의 경우 3촌, 4촌의 가까운 친척이나 각 절제사의 대소 군관을 제외한 일체의 관리가 집에서 사사로운 이유로 사람을 만나는 것을 막았다.

 

분경 금지법은 실제로 시행되지 못하다가 태종이 즉위하면서 실시되었다. 태종은 즉위 이듬해에 더욱 강력하게 분경죄 척결의 의지를 다졌다. 그러나 왕의 노력에도 불구하고 관료에게 아첨하며 분경 하는 일이 끊이지 않았다. 태종 이후에도 분경 금지법은 여러 차례 보완되면서 성종 1년(1470) 분경의 금지 대상이 확정되어 조선의 기본법인 『경국대전』에 성문화되었다. 이조·병조의 제장, 정 3품 이상의 당상관, 사헌부 및 사간원 관리의 경우 친가 8촌, 외가 6촌 밖의 사람을 사사로이 집에서 만나다 발각되면 모두 분경자로 간주하여 100대의 곤장과 함께 3,000리 밖으로 귀양 보내도록 규정했다.


외국어 교육: 우리말을 쓰면 관직을 박탈하고 곤장을 쳐라

조선 시대에도 외국어는 매우 중요했다. 그러나 지금과 같은 사교육의 일환은 아니었다. 외국어는 중국과 일본, 여진족 등 주변 국가와의 외교 관계에서 필수적이었으므로 국제 관계에서 통역사가 필요했던 것이다.


조선의 왕들은 외국어 학습을 각별히 장려했으며 교육도 나라에서 장려했다. 태조는 즉위 2년 만인 1393년 외국어 통역과 번역을 담당하는 사역원을 설치했다. 사역원은 관청으로서의 기능과 함께 중국어, 일본어, 몽골어, 여진어 등 외국어 및 각국의 문화를 가르치는 교육 기관으로서의 역할도 했다.


사역원의 교육은 엄격했다. 외국어 성취도에 따라 학생들에게 상벌을 내렸으며, 교수들도 이에 준하는 상벌을 받았다. 3년을 공부해도 외국어에 능통하지 않은 학생은 퇴학시키고 군역을 담담케 했다.


하지만 외국어를 익힌다는 것은 예나 지금이나 쉬운 일이 아니었던 모양이다. 외국인 교수를 영입하고 온갖 혜택을 주는데도 학생들의 외국어 실력이 향상되지 않자 세종은 사역원에 극약 처방을 내렸다. "사역원 내에서는 일체 우리말을 금지하고, 오로지 외국어만 쓰도록 하라." 이를 어기면 벌까지 내렸다. 문신의 경우 다섯 번 이상 우리말을 쓰다 적발되면 관직을 박탈당하고 1년 동안 관직에 나가지 못했으며, 학생은 적발된 횟수만큼 매를 맞았다.



5부 사회·문화 이야기

여성의 가발: 가발 무게에 짓눌려 목뼈가 부러질 정도

머리 모양을 아름답게 가꿔 예쁘게 보이려는 여성의 욕구는 동서고금을 막론한다. 우리나라에서도 숱이 많고 윤기 있는 검은 머리는 여성들의 오랜 소망이었다.


여성들이 머리숱이 많아 보이기 위해 다른 사람의 머리카락을 모아 머리 위에 덧넣어 장식하는 풍속은 삼국시대부터 나타났다. 이를 다리 또는 다래라 불렀는데 가발의 원조 격인 셈이다.

 

머리에 다리를 얹은 풍습은 조선 시대에 가장 성했다. 고려 말 원나라 다리 풍습이 전해지면서 더욱 크고 사치스러운 다리가 등장한 것이다. 다리는 젊은 처녀보다는 아낙네들이 즐겨 사용한 머리 장식이다. 왕비는 물론 사대부가의 아낙네, 평민, 기생 등 조선 시대 모든 여성들은 정도의 차이는 있지만 다리를 조금이라도 더 얹어 미를 한껏 과시하고자 했다.


다리에 관한 기록은 『성종실록』에서 처음 보인다. "부녀자들이 높은 다리를 좋아하여 사방의 높이가 한 자나 되었다." 높이가 한 자나 된다는 것은 머리 위로 다리가 30㎝나 부풀어 올랐다는 말이다. 머리 사치를 위해 가산을 탕진했다거나, 다리 무게에 짓눌려 목뼈가 부러졌다거나, 가체를 마련하지 못한 집에서는 혼례를 치르고도 시부모 보는 예를 행하지 못했다는 우스갯소리가 전해져 오는 것을 보면 부녀자의 꾸밈에 가체가 절대적이었음을 짐작할 수 있다.


조선 후기로 갈수록 다리는 하나의 사치품으로 성행해 커다란 사회 문제가 되었다. 아낙네들의 다리가 점차로 더 높아지고 사용 계층도 평민은 물론 천민에게까지 확대되었다. 이런 탓에 조선 초기부터 다리를 제도적으로 금지시키려는 논의가 여러 차례 있었지만 모든 여성들이 워낙 광범위하게 사용해 손을 쓸 길이 없었다. 이를 보다 못한 영조가 조선 왕들 중 처음으로 다리 금지령을 내려 족두리를 쓰도록 명령하기도 했다.


차와 다방: 술 문화에 밀린 차 문화

차는 우리 선조들이 즐겨 마신 기호 식품으로 그 역사가 매우 길다. 『삼국사기』에는 신라 27대 선덕여왕 때 차가 전래되었다고 전한다. 이는 당나라에서 수입한 차였으며 승려나 상류 계층에 국한되었다.


조선 시대에 이르러서는 차가 이전 시대만큼 유행하지는 못했다. 하지만 궁궐에 다방이라는 관청을 설치해 다례를 담당하게 했다. 다방은 이조에 소속되어 외국 사신의 접대는 물론 꽃, 과일, 술, 약, 채소 등을 관리하는 곳이다.

 

조선 중기에 와서는 차 마시는 풍습이 쇠퇴해 다방이 사라지게 되었다. 각 관청에 소속된 다모의 기능도 변질되어 관청에서 차를 끓이던 일에서 포도청의 비밀 여자 형사로 성격이 바뀌었다. 몇몇 문인들과 승려들 사이에서만 차 문화의 명맥이 이어졌다. 대다수의 양반층과 일반 백성들은 차보다는 술 문화를 더욱 가까이 했다.


조선의 외국 동물: 일본 사신이 바친 코끼리가 살인죄로 귀양 가다

조선 초기에 인도나 아프리카에 사는 코끼리가 살인죄로 귀양을 가는 초유의 사건이 벌어졌다. 문제의 코끼리는 태종 12년(1412)에 일본 왕 왕의지가 조선과 일본 간의 친선을 도모하자며 사신을 통해 진상품으로 바친 것이다. 왕은 외교적 선물이기에 목장과 동물을 담당하던 사복시에게 명해 잘 기르도록 했다.


코끼리는 하루에 콩을 너댓 말씩 먹고 괴물 같은 덩치에 귀가 크고 기다란 모습이 여간 신기한 게 아니었다. 당연히 많은 구경꾼들이 몰려왔다. 전 공조판서 이우도 코끼리를 보러 왔다. 이우는 코끼리의 꼴이 추하다고 비웃으면서 장난기가 발동해 침을 뱉기까지 했다. 그런데 잘 길들어진 코끼리였지만 성이 나서 그만 이우를 밟아 죽이고 말았다.


이 사건으로 코끼리는 전라도 순천의 장도라는 섬으로 귀양 아닌 귀양을 가게 되었다. 귀양 간 코끼리는 이후에도 계속 골칫거리로 남았다. 왜 조선은 사람을 셋이나 죽이고 아무짝에도 쓸모없는 코끼리를 죽이고 못하고 쩔쩔맸을까? 코끼리가 희귀한 동물이었기 때문도 아니고 동물을 사랑하는 마음에서도 아니었다. 단지 외국에서 조공으로 바친 선물이었기 때문이다. 당시에는 다른 나라가 보내온 희귀한 동물이나 값비싼 물건은 함부로 하지 못하고 조심스럽게 다뤄야만 했다. 그렇지 않으면 양국 간에 커다란 외교 문제를 낳을 수도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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