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준영의 교과서 밖 인물 연구소

   
최준영
ǻ
EBS BOOKS
   
17500
2023�� 02��



■ 책 소개


뻔한 위인전 OUT! 뻔한 성공스토리 OUT!
역사를 바꿔 나간 12명의 매혹적인 반전

『최준영의 교과서 밖 인물 연구소』는 위인전을 좀 더 재밌게 즐길 수 있기를 바라는 이들을 위한 최준영 박사의 초대장이다. 이 책은 우리가 위인이라는 단어를 떠올리면 생각나는 ‘케케묵은’, ‘답답한’, ‘뻔한’ 등의 이미지를 배제했으며, 우리가 잘 안다고 생각하지만 실제로는 별로 아는 것이 없는 ‘마음을 움직이고, 세상에 큰 변화를 가져온 사람들’의 이야기를 뽑았다. 작가는 현재 우리가 사는 세상에서 위인은 우리의 삶을 바꿔 나가기 위해 노력하는 사람들이라고 말한다. 이 책에서 반전과 열정으로 세상을 뒤바꾼 이런 위인 12명을 만나 볼 수 있다.

■ 저자 최준영
어릴 때부터 주의가 산만하고 한 가지 일에 집중을 잘하지 못한다는 이야기를 많이 들었다. 그래도 꾸역꾸역 학창 시절을 보냈고 뒤늦게 산만함이 아닌 다양함과 넓은 시야를 가진 사람으로 평가받게 되면서 인생의 오묘함을 체험하고 있다. 서울대학교에서 조경학을 배우기 시작해 환경, 에너지, 도시계획, 기후변화, 국제 관계 등 상관없어 보이는 다양한 분야로 지식의 범위를 넓히는 것을 즐거움으로 생각하면서 현재 법무법인 율촌에서 전문위원으로 근무하고 있다. 〈최준영 박사의 지구본 연구소〉라는 유튜브 채널도 운영하고 있다.

■ 차례
서문_ 사람들의 마음을 움직이고 세상에 큰 변화를 가져온 이들의 이야기

제1부 반전이 있는 특별한 사람들

01 플로렌스 나이팅게일, Florence Nightingale
백의의 천사? 유능한 행정가이자 여성 운동가!

02 헬렌 켈러, Helen Adams Keller
장애 극복의 대명사? 사회주의자이자 대중의 요구에 맞게 만들어진 유명 인사!

03 하워드 플로리, Sir Howard Walter Florey
페니실린의 아버지가 플레밍이 아니라고?

04 트로핌 리센코, Trofim Denisovich Lysenko
생물학자 한 명이 러시아(구 소련)의 농업 전체를 망쳤다고?

05 스테판 반데라, Stepan Andriyovych Bandera
우크라이나의 독립운동가이지만 나치 부역자라고?

06 헤디 라마, Hedy Lamarr
와이파이 발명가인데 왜 아름다운 영화배우로만 기억되는 거지?

제2부 열정이 있는 특별한 사람들

01 귀스타브 에펠, Alexandre Gustave Eiffel
에펠탑을 설계한 엔지니어의 이름이 바로 에펠

02 조지 워싱턴 카버, George Washington Carver
노예로 태어나 세상을 바꾼 땅콩맨

03 그레이스 호퍼, Grace Brewster Murray Hopper
‘어메이징 그레이스’라는 별명이 딱인 컴퓨터 과학자

04 노먼 볼로그, Norman Ernest Borlaug
세계적인 식량 증산에 기여한 학자, 노벨평화상을 받다?

05 드미트리 벨랴예프와 류드밀라 트루트, Dmitry Konstantinovich Belyayev & Lyudmila Nikolayevna Trut
은여우 길들이기 프로젝트

06 마거릿 해밀턴, Margaret Heafield Hamilton
인류의 달 착륙 성공은 이 사람 덕택

 




최준영의 교과서 밖 인물 연구소


반전이 있는 특별한 사람들

헬렌 켈러, Helen Adams Keller-장애 극복의 대명사?사회주의자이자 대중의 요구에 맞게 만들어진 유명 인사!

오늘날 우리가 생각하는 헬렌 켈러는 한없이 지고지순하고 성스러운 이미지로 각인되어 있지만 사실 그녀도 평범한 사람이고, 평범한 여성이었습니다. 이러한 이미지 역시 사람들이 원하는 대로 만들어 낸 것이기도 해요. 헬렌 켈러도 평범한 여자들처럼 이성에도 관심이 많았어요.


헬렌 켈러는 “젊은 남자들의 냄새에는 물, 불, 폭풍, 바다와 같이 뭔가 마음을 흔드는 본질적인 게 있다.”라고 말하기도 했고, “내가 누군가를 볼 수 있다면 첫 번째, 일단 결혼부터 하고 싶다.”라고 말하기도 했습니다.


헬렌 켈러는 결혼을 꿈꿨지만, 보통 사람들의 평범한 일상인 결혼이 그녀에게는 무척 어려운 일이었어요. 그녀는 유명 인사로 후원금도 많이 들어오고 경제적인 부족함도 없으니 결혼을 할 수 있었을 거로 생각했지만, 그녀에게 결혼은 그리 쉽지 않았습니다.


그 당시 영국의 가치관에 따르면 사회적으로 여성의 역할, 그리고 여성의 삶의 목표는 딱 두 가지였어요. 바로 출산과 육아였습니다. 하지만 청각, 시각장애인이었던 헬렌 켈러는 출산과 육아가 불가능할 거라과 판단했어요. 그래서 이 두 가지 일을 수행하지 못하는 사람은 결혼할 필요가 없다고 사회적으로 간주해 버렸던 거죠. 그래서 헬렌 켈러가 누군가를 좋아하고, 만나고 싶어 하고, 결혼하고 싶다는 말 자체가 밖으로 나가지 않도록 철저하게 주변에서 관리했어요.


힘들게 장애를 극복하고 열심히 인생을 살아왔지만 정작 자신만의 삶의 행복을 추구하지는 못했어요. 누군가에게 의지하지 않고 나의 행복, 나의 인생을 찾기 위해 노력했지만 사회의 통념이라는 더 큰 벽을 넘는 데는 어려움을 많이 겪었습니다.


장애인 또는 여성이라는 존재에 대해 ‘이건 이래야지, 저건 저래야지’ 하는 보이지 않는 기준과 선입견, 편견이 팽팽하게 자리잡고 있어서, 그 기준과 편견을 넘어서면 관심을 두지 않거나 오히려 박해하는 일들이 그 당시 비일비재했지만 어찌 보면 100년이 지난 지금도 이와 비슷한 경우를 우리는 자주 접할 수 있습니다. 결국 헬렌 켈러의 이미지를 자꾸 어린 소녀의 모습 또는 성스러운 여성으로만 각인시키는 것은 고정관념의 산물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트로핌 리센코, Trofim Denisovich Lysenko-생물학자 한 명이 러시아(구 소련)의 농업 전체를 망쳤다고?

1932~1933년에 걸쳐 소련에는 대규모 기근이 닥칩니다. 그래서 지금으로는 상상하기 힘들 정도로 많은 사람이 굶어 죽습니다. 정확한 통계는 없지만 역사학자들이 대충 추산하기로는 약 500만 명 정도의 사람이 죽었을 거라고 해요. 2년 사이에 말이죠.


당시 스탈린이 열심히 추진하던 집단농장 정책으로 인해서 여러 가지 혼란이 생기면서 수확량이 감소하게 됩니다. 상황이 이러면 재빨리 해외에서 식량을 수입하든지 뭔가 대책을 세워야 하는데 오히려 농가에 곡식을 할당해서 무조건 빼앗아 버렸어요. 그러다 보니 이렇게 수백만 명의 사람들이 굶어 죽게 되었고, 리센코의 주장도 큰 영향을 미쳤다고 볼 수 있죠.


리센코는 ‘식물을 어떤 식으로 처리하면 바뀐다. 그렇게 바뀐 식물은 환경에 잘 적응하고 자손들도 계속해서 잘 적응해 갈 것이다.’라고 가정했죠. 그래서 씨앗을 다양한 온도에 노출하거나 사포로 씨앗을 살살 긁는다든지 산성 용액에 처리한다든지 해서 여러 가지 종자에 자극을 주면 더 잘 자랄 것이라고 했는데 문제는 이 종자 껍질들이 오히려 손상을 입어서 병충해, 곰팡이 감염에 더 취약하게 되었어요. 그 결과 씨앗도 썩게 되고 봄철이 되어 씨를 뿌리려고 보면 뿌릴 씨가 없는 거예요. 그러면 당연히 생산량이 줄어들겠죠. 게다가 리센코는 자기의 방법을 따르면 자본주의자들이 말하는 살충제나 비료도 필요 없다고 했어요.


그의 이론에 따라서 여러 가지 품종, 농법들이 개발되고 소련의 많은 지역이 새로 개간되어 파종하기 시작합니다. 하지만 역시 기대했던 성과는 나타나지 않고 대실패를 겪게 되죠. 이 정도면 리센코의 주장이 문제가 있다는 걸 사람들이 알아야 할 텐데 현실은 그렇지가 않았어요.


우리는 업적을 남긴 위인들의 이야기는 반복하여 되새기고 학습하지만, 잘못되고 나쁜 일을 저지를 사람들의 이야기는 자꾸 묻어 버리고 지워 버리는 경향이 있습니다. 하지만 다른 한편으로 보면 이러한 잘못들을 정확하게 알고 앞으로 더는 실수를 반복하지 않도록 하는 것 역시 중요한 일입니다.


한 사람의 잘못된 주장과 믿음으로 얼마나 큰 피해를 줄 수 있는지 소련에 큰 희생을 안겨 준 리센코로 인하여 우리는 알 수 있습니다.



스테판 반데라, Stepan Andriyovych Bandera-우크라이나의 독립운동가이지만 나치 부역자라고?

소련은 원체 거대한 나라였기 때문에 군사력만으로는 소련을 이기기가 쉽지 않겠다고 판단한 독일은 소련 내부에서 혼란을 유도할 수 있는 공작원을 찾게 됩니다. 그리고 반데라가 이끌던 OUNR이 적합한 협력자라고 생각을 했어요. 그들은 소련에게서 독립하겠다는 명분도 있고, 조직원들을 다루기가 쉬울 것 같았어요.


그래서 반데라에게 협조 요청을 했고, 반데라 역시 이에 흔쾌히 승낙했어요. 하지만 협조하는 조건으로 우크라이나의 독립을 도와주겠다는 약속을 받게 됩니다. 참 아이러니한 부분입니다. 독립이 중요하기는 하지만 그렇다고 나치와 협력하는 게 옳은 일이었을까요?


독립하기 위해서 또 다른 세력의 도움을 받는다면 진정한 독립을 이룰 수 있을지 의문이 들지만 당장 혼자 힘으로 독립할 수 없으니 일단은 도움을 받고 그다음 상황을 또 해결하면 되지 않을까 생각하는 것 같아요.


이처럼 당장은 나치의 도움을 받는 게 낫겠다는 판단을 한 반데라는 협력에 동의하고 함께 전쟁에 참여하게 됩니다. 그래서 지금의 우크라이나 수도인 키이우를 공격하는 데 같이 참가하게 되고 결국 키이우 점령에 성공하게 됩니다. 키이우를 점령한 이후 반데라는 이제 우크라이나는 독립국이라고 독립을 선언하고 우크라이나 국민 정부를 수립하게 됩니다.


역사를 배운다는 것은 옛날, 과거를 배운다고 생각하지만 사실 역사라는 것은 현재 그리고 미래까지도 영향을 미친다고 볼 수 있어요. 그 역사 속 인물에 대한 평가 역시 시간에 따라서, 또 보는 관점에 따라서 달라지기도 하기 때문입니다.


반데라라는 인물에 대해서도 독립이라는 키워드를 놓고 보면 그는 당연히 독립투사, 독립 영웅으로 볼 수 있습니다. 하지만 반대로 나치와의 협력이라는 바람직하지 않은 행동은 인류 보편적인 관점으로 봤을 때 용서할 수 없는 전쟁 범죄자일 수밖에 없는 거죠.


스테판 반데라 역시 본인의 처한 상황을 이해하는 판단에 따라 평가가 극과 극으로 엇갈릴 수밖에 없는 인물입니다. 그의 판단, 그의 행동이 나비효과가 되어 오늘날 이처럼 크나큰 전쟁의 원인을 제공하게 되었으니 말이죠.



열정이 있는 특별한 사람들

조지 워싱턴 카버, George Washington Carver-노예로 태어나 세상을 바꾼 땅콩맨

인종차별에 좌절하지 않고 자신의 능력을 보여 주고 그 능력으로 사회를 이끌어 나간 조지 워싱턴 카버를 아시나요? 미국의 유명한 초대 대통령을 떠올리게 하는 이름이지만 미국의 과학자이자 농학자입니다. 우리나라에는 잘 알려지지 않았지만 미국에서는 “땅콩맨”, 즉 “피넛맨”으로 잘 알려진 무척 유명한 사람이에요.


카버는 땅콩을 이용해서 미국 농민들이 겪고 있던 어려움을 해결해 주고 더 많은 소득을 올릴 수 있도록 했어요. 미국 농업경제의 판도를 바꿔 놨다고 평가를 받는 사람입니다.


카버는 어릴 적부터 인생이 참으로 파란만장했어요. 태어나자마자 카버와 부모님이 모두 노예 매매단에 납치된 거예요. 노예 주인이었던 독일계 이민자 모지스 카버는 빼앗긴 노예를 다시 찾으려고 사람을 샀으나 조지 카버만 찾고 부모님과 다른 식구들은 찾지 못했어요. 그래서 모지스 카버는 조지 카버만 데리고 와서 친자식처럼 대하며 공부도 열심히 시켰어요. 조지 카버라는 이름도 모지스 카버가 자신의 성을 쓰도록 해서 조지 카버가 된 거죠. 우리가 보통 노예라고 하면 착취와 학대가 떠오르지만 사람과 사람의 관계는 생각보다 무척 다양합니다. 이처럼 불평등 관계에서도 끈끈한 애정 관계가 성립될 수도 있고 서로 존중하는 관계가 될 수도 있어요.


조지 카버는 호기심도 많고 영리한 아이였지만 학교에는 갈 수가 없었어요. 가까운 곳에 있는 공립학교에서는 흑인을 받아 주지 않았기 때문이죠. 흑인 아이들을 위한 학교는 16킬로미터 정도 떨어진 곳에 있었어요. 조지 카버는 이 먼 거리를 걸어 다니면서 초등학교, 중학교, 고등학교까지 졸업했어요.


조지 카버는 재주가 참 많았는데 그림도 무척 잘 그렸어요. 그는 자신의 그림 재능을 이용해서 1888년, 아이오와주에 있는 감리교회에서 운영하는 심프슨 칼리지에서 드디어 첫 번째 흑인 입학생이 됩니다. 조지 카버를 지도하던 에타 버드라는 강사는 그의 그림을 보고 그냥 넘어가지 않았어요. 조지 카버는 꽃과 식물의 그림에서 아주 세밀하게 정밀한 부분까지 잘 그렸는데 그런 그의 관심을 알아채고 농과 대학을 진학해서 식물을 제대로 공부해 보라고 격려하죠.


인생에서 좋은 부모님을 만나는 것도 복이지만 이렇게 좋은 선생님, 좋은 지도자를 만나는 것도 정말 큰 행운인 거죠. 왜냐하면 부모님은 미처 알아채지 못하는 것을 선생님들은 좀 더 전문적인 시각으로 재능을 발견할 수 있거든요.


조지 카버는 고민하다가 결국 농학자가 되어서 흑인 복지를 향상하는 데 공헌하겠다는 생각으로 아이오와 주립 대학 식물학과에 입학합니다. 여기서도 그는 첫 번째 흑인 학생이에요.


조지 카버는 어릴 적부터 식물 표본도 만들고 식물 키우는 걸 좋아했기 때문에 교수님들의 눈에 금방 띄었어요. 결국 교수님들의 권유로 조지 카버는 대학원까지 진학하게 됩니다. 대학원에 진학학 조지 카버는 식물의 질병을 치료하는 데 집중했어요.


당시 미국 농업은 무척 큰 위기 상황에 놓여 있었습니다. 처음에는 나무를 베어 내고 거기에 곡식을 심으니 곡식들이 잘 자랐어요. 하지만 100여 년의 시간이 흐르다 보니 땅에 영양소가 없어지면서 식물도 잘 자라지 않고 병충해도 많아져 농민들이 점점 어려운 상황이 되었어요.


그래서 농민들은 이 병을 낫게 하려면 무슨 약을 써야 하는지 고민했는데 조지 카버는 약을 쓰는 게 아니라 근본적으로 식물들이 튼튼해지면 이런 일이 발생하지 않을 거라고 말해요. 그래서 우선 토양을 건강하게 만들어야 한다고 했어요.


토양에는 여러 가지 성분의 영양분들이 있는데 그중에 제일 중요한 성분이 질소입니다. 공기 중의 70퍼센트가 질소이지만 땅에는 질소가 부족한 경우가 많아요. 하지만 콩 같은 경우는 공기 중의 질소를 바로 소화하는 능력이 있어요. 그러다 보니 아무 데나 심어 놓아도 아주 잘 자랍니다. 조지 카버는 그런 콩의 능력에 주목하기 시작했어요. 다른 작물들은 자라면서 땅속의 영양소를 모두 가지고 가 버려 땅에는 다음에 심게 될 작물을 건강하게 할 힘이 남아 있지 않아요. 하지만 콩을 심으면 스스로 알아서 대기 중의 질소를 빨아들여 땅에 다시 넣어 주기 때문에, 땅에 먼저 콩을 심고 그다음에 다른 작물을 심으니 훨씬 더 잘 자랐어요. 정말 간단한 방법이었죠. 콩 심고 다른 작물 심고, 콩 심고 다른 작물을 심고! 이 방법은 금방 소문이 나면서 조지 카버는 유명 인사가 되었어요.


1020년쯤 미국은 중국으로부터의 땅콩 수입이 증가하고 있었어요. 미국도 땅콩 생산이 많았지만 중국산 땅콩이 워낙 대량으로 저렴하게 수입되어서 국가적인 차원에서 이것을 막기 위해서는 적절한 관세를 부과해야 했는데 미국 의회에서는 이런 문제에 별로 관심이 없었다고 해요.


그래서 조지 카버는 미국땅콩협회와 힘을 합쳐요. 2921년 그는 미국 의회 하원의 세입위원회라는 곳에 출석하는데, 이곳은 관세 부과에 관련된 일을 하는 곳입니다. 그리고 이야기하죠. 미국산 땅콩으로 이렇게 많은 제품을 만들어서 농민들이 이익을 얻고 있는데 지금 외국에서 저렴하게 수입되는 땅콩으로 인해 그 농민들이 얼마나 힘들어졌는지 아느냐? 그렇게 사람들이 별 관심 없던 주제였지만 조지 카버의 뛰어난 프레젠테이션과 설득 능력으로 이목을 집중시킵니다. 의원들은 조지 카버의 설명에 동감하면서 관세를 부과하는 것에 동의하게 되고 미국 땅콩 농업의 기반을 유지할 수 있게 되었습니다.


마거릿 해밀턴, Margaret Heafield Hamilton _ 인류의 달 착륙 성공은 이 사람 덕택

마거릿 해밀턴은 1936년 8월, 인디애나주에서 태어났습니다. 이후 미시간주로 이사를 해 1955년, 미시간 대학에 입학하면서 수학 공부를 하다가 어머니가 다니고 있던 얼햄 대학으로 편입하면서 부전공으로 철학도 공부했어요. 해밀턴의 할아버지는 교장 선생님이었고, 아버지는 철학자 겸 시인이었어요. 그래서 어릴 적부터 철학 쪽으로 영감을 많이 받았다고 해요.


대학을 졸업한 해밀턴은 24세의 나이에 곧바로 결혼했습니다. 남편이 하버드 대학 로스쿨에 진학하면서 보스턴으로 이사했는데 마침 인접한 MIT에서 기상 예보와 관련된 분야에서 사람을 뽑는데 수학 전공자를 우대한다는 공고를 보고 해밀턴은 지원합니다. 그리고 이곳에서 해밀턴은 컴퓨터와 인연을 맺게 됩니다.


이 당시에는 컴퓨터를 제대로 아는 사람이 없었기 때문에 작동 원리에 대해서 딱히 도움을 받을 사람은 없었다고 해요. 해미턴은 어쩔 수 없이 혼자 고민하며 프로그래밍을 익히고 파악해야 했어요. 그리고 컴퓨터로 날씨를 예측하는 소프트웨어를 개발합니다.


1960년대 초반은 미국과 소련이 본격적인 냉전 시대에 돌입해서, 미국은 소련이 갑자기 공격을 해 오면 어떻게 방어를 할 것인가를 걱정하던 시기였어요. 그러다 보니 미국을 둘러싼 레이더망을 구축하고 이것을 통제할 수 있는 컴퓨터를 어떻게 갖출 것이냐는 것이 굉장히 중요한 문제로 등장했습니다.


해밀턴은 기상 예보 과정에서 컴퓨터를 다뤄 봤던 경험이 있기 때문에 이 프로젝트에 자연스럽게 참여하게 되었어요. 그때 그녀의 나이가 대략 26세였습니다. 그 나이에 오늘날로 말하자면 국방부 주요 프로젝트에 참여하게 됐던 거죠.


그녀가 했던 일은 ‘사지(SAGE)’라고 해서 방공망 구축 사업이에요. 우리가 해외여행을 갈 때 항공사에 예약을 해야 하는데, 이 예약 시스템이 그 당시에 개발된 기술에 근거하고 있습니다. 1960년대 초반에 만들었던 기술에 지금까지 의존하고 있는 거죠.


원래 컴퓨터는 정해진 일만 반복하는 경우가 많았는데 달에 가기 위해서는 순간순간 데이터를 입력하고 여기에 맞춰서 컴퓨터가 계산하면 거기에 맞춰서 우주선 항로를 바꿔야 하는 상황이 되었어요. 즉 컴퓨터가 컴퓨터에 어떤 일을 해야 하는지 미리 알려줘야 하는데 이것이 바로 코딩 프로그램이었습니다.


아폴로 계획 초반 문서들을 보면 프로그래밍, 소프트웨어 이런 개념 자체가 전혀 없었어요. 기계나 전자 부품으로 만들기만 하면 된다고 생각했으나, 필요한 계산과 정확도를 따지다 보니 컴퓨터에 뭔가를 입력해서 작업하는 게 필요하다는 것을 깨닫게 되었습니다. 결국은 시간이 지나면서 한쪽에서는 로켓을 만들면서 다른 한쪽에서는 이 소프트웨어라는 게 있어야만 한다는 것을 알게 되었죠. 그러다 보니 이쪽 일을 담당할 사람을 찾게 되었고 이런 능력과 경험이 있던 해밀턴은 미항공우주국(NASA)에 스카우트됩니다. 그녀는 달 착륙 프로젝트인 아폴로 우주선의 비행 소프트웨어 책임자가 되었어요. 그녀의 나이 29세였습니다.


사실 해밀턴 같은 경우는 소프트웨어 공학이라고 부르는 표현을 1968년에 처음 사용한 사람으로 미국에서는 꽤 유명합니다. 소프트웨어 분야가 기술적으로 상당히 전문성을 요구한다는 것을 강조하면서 이 용어가 오늘날 최첨단의 상징으로 자리 잡을 수 있도록 많은 이바지를 했습니다.


2016년 11월 22일, 해밀턴은 미국 오바마 대통령으로부터 과거 달 착륙선과 관련된 여러 가지 일을 했던 공헌을 인정받아서 백악관을 방문해 대통령 자유 메달을 받습니다. 2019년 7월 18일에는 아폴로 11호의 달 착륙을 기념하여 구글에서 해밀턴의 모습과 아폴로 11호의 모습을 10만 개가 넘는 태양광 패널을 이용해 띄웠어요.


이처럼 과학기술이나 소프트웨어 발전에 여성들의 공헌이 참 큰 부분을 차지했는데 뒤늦게 알려지는 경우가 많아요. 역사적으로 보면 여성들은 많은 편견과 맞서 왔습니다. 오늘날에도 여자들은 수학이나 과학 쪽에 재능이 없다며 이공계를 피하고 인문계로 가야 한다는 얘기를 종종 하곤 합니다. 하지만 많은 연구를 통해 밝혀진 바로는 남녀 간의 뇌 기능이나 특히 수학과 관련된 능력은 성별의 차이는 전혀 없다고 해요. 단지 못한다, 약하다는 이야기를 계속 들으면 실제로 그렇게 인정되어 버리는 경향이 나타나는 것은 분명하다고 합니다. 편견에 빠져 미리 못한다고 자신감을 잃지 말고 호기심과 자신감을 북돋아 여성들도 도전할 수 있도록 사회 인식이 변화해야 할 것 같습니다.


* * *


본 정보는 도서의 일부 내용으로만 구성되어 있으며, 보다 많은 정보와 지식은 반드시 책을 참조하셔야 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