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이에게 상처주고 싶은 부모는 없다

   
성진숙
ǻ
서사원
   
17500
2023�� 06��



■ 책 소개


아이들이 바라는 건 그냥 ‘우리 엄마’다.
나를 사랑하고 내 이야기를 귀담아 들어주려 노력하고
따뜻한 관심으로 나를 지켜보는 존재, 엄마!

이 책을 읽는 엄마들이 아이들 자신의 방식으로 진심을 전하는 것을 귀 기울여 들어주었으면 한다. 그리고 처음 만나는 엄마라는 역할에 최선을 다하려고 노력한 엄마로서의 나 스스로를 토닥여주기를 바란다. 설령 방향이 조금 엇나갔다 하더라도 아이들을 사랑하는 마음만은 진심인 엄마로서의 ‘나’를 응원해주기를 바란다. 교실 속 아이들이 전해준 말을 이 책을 읽는 엄마들에게 다시 한 번 말해주고 싶다.

“좋은 엄마가 되려고 노력하느라, 아이들을 잘 양육하느라 그동안 애쓰셨어요. 당신으로 충분합니다.”

■ 저자 성진숙(우리쌤)
아이들이 ‘우리쌤’이라 불러주면 마냥 행복한 초등교사이다. 18년 차 교사로 2023년 현재 15번째 제자들과 생활하고 있다. 경력의 절반 이상(9년)이 고학년 담임교사이다. 아이들의 마음을 알아가는 것, 아이들의 마음을 이해하는 것, 사춘기 아이들과 소통하는 방법에 대한 특별한 관심과 경험이 있다. 그리고 전문상담교사, 울산대학교 상담심리 석사, 울산광역시교육청 게이트키퍼 강사, 울산광역시교육청 회복적 생활교육 강사 이력을 갖고 있다.

아이들은 교사의 뒷모습을 보고 자란다는 믿음으로 말보다는 행동으로 가르치려 노력한다. 완벽한 어른이 아니라 완벽하려 노력하는 어른으로서 교사도 매 순간 성장해야 한다고 믿으며 아이들과 함께 성장하는 순간을 교직의 보람으로 손꼽는 천생 교사이다.

■ 차례
프롤로그_아이에게 상처주고 싶은 부모는 없다

1장 부모에게 말 못한 아이들의 속마음
엄마, 친정에 다녀오세요
네 잘못이 아니야
죽고 싶지만 사실은 살고 싶어요
네가 뭔데 우리 쌤 욕을 하냐?
선생님, 받아쓰기 시험 또 언제 봐요?
아이는 악하고 이기적인 것이 아니다 (1)
아이는 악하고 이기적인 것이 아니다 (2)
나쁜 아이가 되기를 응원해!

2장 아이의 상처를 치유하려면 두 배의 시간이 필요하다
정말 사춘기일까?
아이에게 필요한 건 시간일 뿐이다
아이는 부모의 뒷모습을 보고 배운다
아이들의 성장곡선은 주식 그래프와 닮았다
부모의 자존감 크기만큼 아이의 자존감도 자란다
아이의 상처를 치유하려면 두 배의 시간이 필요하다
부모의 믿음과 격려가 아이를 움직인다
한 명의 아이를 키우기 위해 온 마을이 필요한 이유
아이들의 시계는 저마다 다르다
엄마 아빠가 사이가 좋아서 우리 집이 좋아
무심코 내뱉은 한 마디가 아이 마음에 평생 새겨진다
아이들의 이름을 불러준다는 것
육아의 중심은 우리 아이에게 있다

3장 대화가 잘 통하는 부모
아이의 감정은 사라지지 않는다
엄마의 화로부터 아이를 지키는 방법
아이의 이야기를 잘 듣는 방법
사랑의 매는 없다
아이는 부모 감정의 쓰레기통이 아니다
삶의 주도권은 아이에게 있다
사랭해 양파와 짜증나 양파 실험
진심이 아이의 마음을 움직인다
입이 없는 키티 인형이 인기 있는 이유
실패의 두려움은 넘어져 본 사람만이 넘을 수 있다

4장 내가 꿈꾸는 학급, 내가 꿈꾸는 아이들
내가 꿈꾸는 학급
생활지도의 새로운 패러다임
회복적 생활교육을 만나다
공동체 서클의 기적
교사가 보는 홈스쿨링
본질에 가까이 다가가는 질문 “왜?”
완성형 아이와 과정형 아이
교실, 아이들이 마음의 백신을 맞는 곳
아이들에게 갈등 해결의 다양한 선택지를 주자
10월, 우리들의 이야기가 익어가는 시간
교실의 아이를 집으로 데려온 주말
아이와 마음이 통하는 날들
너도 옳고, 너도 옳다!
좋은 어른이 있다는 것

에필로그_엄마에게 상처주는 아이가 되고 싶지 않다

 




아이에게 상처주고 싶은 부모는 없다


아이의 상처를 치유하려면 두 배의 시간이 필요하다

아이의 상처를 치유하려면 두 배의 시간이 필요하다

첫째가 18개월 될 무렵 육아휴직을 마치고 복직해야 할 시간이 되었다. 물론 심리학적으로 안정된 애착은 세 돌 이전에 형성된다는 말을 모르는 바 아니었다. 하지만 첫째가 우리 가족의 새 식구가 된 그 시기는 아이뿐 아니라 불안정한 가정경제로 나를 간절히 필요로 했다. 넉넉지 않은 집에 장녀와 장남으로 만나 둘이 모아놓은 조금의 돈과 많은 대출로 시작하다보니 오래된 아파트에 살아야 했다. 설상가상 양가 부모님의 생계도 많은 부분 우리 부부에게 달려 있었다.


당시 육아제도가 지금처럼 좋지 않았고 무엇보다 그 시절의 선배님들도 나처럼 아이와 경제 사이 선택의 기로에서 경제를 택했을 것이다. 돌아보면 선택하지 못한 결정에 아쉬움과 후회가 남지만 어쨌든 그때 그 결정은 최선의 선택이었을 것이다.


나 역시 그랬다. 복직과 동시에 학교를 옮겼다. 업무에 대한 요령이 없었기에 생전 처음 맡아보는 업무와 처음 맡아보는 학년, 아직 남의 집 같은 새 학교에 적응하느라 엄청난 에너지를 소비했다. 아이는 엄마가 키워야 하고 아이를 맡긴다면 잠은 꼭 집에서 재워야 한다는 것을 알고 있었지만 그러지 못했다. 첫째는 봐주시려고 근처에 집까지 마련해 이사를 감행한 시부모님이 ‘평일에 아이를 맡기고 주말에만 집으로 데려가라’는 말씀에 타협하고 말았다. 그것이 시작이었다.


첫째는 서너 살 시절을 할아버지 댁에서 보냈다. 세 살에는 하루 종일 할아버지 집에서만 생활했다. 네 살에 이르러서야 어린이집에 다녔다. 시부모님은 아이를 정성으로 돌보셨다. 그 무렵 나는 많은 업무로 퇴근 시간을 한참 넘기고서야 퇴근하는 날들이 계속되어 집에 돌볼 아이가 없다는 것이 다행이라 생각되기도 했따.


아이가 금요일 저녁에 집에 와서 일요일 저녁이 되어 할아버지 집으로 갈 때면 눈에 눈물을 가득 담고 가지 않겠다고 버텼다. 그런 모습을 보면 ‘내가 무엇을 위해 이러고 있나?’하는 생각을 지울 수 없었다. 언젠가부터 아이는 엄마 아빠와 헤어질 시간이 되면 할아버지와 퍼즐을 맞추거나 책을 읽으면서 애써 엄마 아빠가 가는 것을 못 본 척했다. 아마도 어린 마음에 아픔을 감당하기가 힘들었으리라.


그 무렵 어린이집 선생님이 전화를 하셨다. “어머님, 지오가 어린이집에서 자꾸 친구 얼굴을 손톱으로 긁어서 상처를 내요.” 앞이 캄캄했다. 우리 아이가 친구들에게 이런 피해를 주게 될 줄이야. 담임선생님에게 전화번호를 물어 상대 어머님에게 허둥지둥 사과했다. 주말에 집에 온 지우와 이야기를 하려고 손을 잡았는데 그때서야 지오의 손톱이 물어뜯어 뭉툭하게 된 것이 보였다. 마음이 쓰렸다. 그렇지 않아도 팔삭둥이로 태어나 깡마르고 예민한 아이인데 얼마나 스트레스가 컸을까 싶었다.


자신의 스트레스를 친구의 얼굴을 할퀴는 것으로, 손톱을 모조리 물어뜯는 방식으로 해결하려 했던 지오에게 부모로서 너무나 큰 죄책감이 들었다. 지오야말로 가족의 희생양이 아닌가. 사실 육아가 버거웠던 엄마, 생활비 부담을 아이를 돌보는 것으로 갚고자 했던 할아버지와 할머니, 강경한 부모님의 의견을 거절하지 못한 아빠. 이 모든 어른들의 이해관계 속에서 가장 여리고 힘없는 지오가 희생된 것이다.


정신이 번쩍 들었다. 때마침 둘째가 생겼다. 사실 직장이 너무 힘들어서 둘째가 반가웠지만, 그보다 둘째를 핑계 삼아 첫째를 집으로 다시 데려올 수 있어서 기뻤다. 고령의 고위험 산모를 핑계로 임신하자마자 휴직을 했고, 첫째를 집으로 데려와 오롯이 지오의 엄마로 살 수 있었다. 몸은 힘들었지만 마음은 편했다. 하지만 상처받은 지오와의 좌충우돌 생활은 이때부터 시작되었다.


다섯 살 지오를 어린이집으로 등원시키는 것은 쉽지 않았다. 교실 앞에서 지오는 항상 눈물을 흘리고 엄마 뒤에 숨어 등원을 거부했다. 교실로 들어가면 잘 지낸다는 선생님 말씀에 위안이 되기도 했지만 매일 아침 전쟁 같은 등원을 경험해보니 한편으로는 무난하게 잘 등원하는 아이들이 부러웠다. 지오가 다섯 살, 5월에 지한이가 태어났다. 산후 몸조리와 동생이 목을 가누는 백일이 되는 시기까지 지오는 또다시 할아버지 댁에서 지냈다.


문제는 지오가 여섯 살이 되면서였다. 어린이집을 졸업하고 동네 유치원에 갔는데 등원한 지 한 달이 안 되어 아예 등교를 거부했다. 3월이 채 지나지 않은 어느 날, 그날도 버티던 지오를 겨우 달래 어린이집 버스에 태웠는데 유치원에서 전화가 왔다.


“어머님, 지오가 유치원에서 계속 울고 아무것도 안 해서 생활이 안 될 것 같아요.”


둘째를 업고 부랴부랴 유치원에 갔더니 선생님께서 지오를 집에 데려가는 게 좋겠다고 하셨다. 신생아 둘째를 아기띠에 안은 채 지오 손을 잡고 어르고 달래고 협박까지 하며 꽃샘추위를 뚫고 집으로 오는데 왜 그리 눈물이 났는지 모르겠다. 그 길로 유치원을 퇴소하고 6월에 들면서 집 앞 병설유치원에 다녔다. 도보로 등하원이 가능하고 선생님도 아이들에 대한 수용 범위가 큰 분이셨다.


유치원 등원을 앞둔 5월부터 지오는 놀이치료를 통한 상담을 받았다. 그렇게 지오는 꼬박 2년 동안 매주 수요일 상담에 참여했다. 유치원에 등원할 때는 울고불고 전쟁 그 자체였지만, 상담실에 갈 EO는 엄마와 단둘이서 발걸음도 가벼웠다.


지오는 놀이치료와 유치원을 병행하던 2년이 끝나고 학교에 입학했다. 학교에서도 등원 거부를 하면 어쩌나 걱정이 많았는데, 의외로 학교는 적응이 빨랐다. 일주일 정도 등교를 도와주고 그 이후부터는 혼자 등‧하교를 했고 학교에 가지 않겠다고 우는 법도 없었다. 시간이 되면 가방을 메고 학교에 가는 모습이 그렇게 고마울 수 없었다.


가끔 지오는 “내가 할아버지 집에 있을 때 엄마는 전화도 안 하고 오지도 않았잖아….” 한다. 그럴 때면 “지오야, 엄마가 그때는 정말 미안했어.” 지오 손을 잡고 진심을 담아 사과한다.


상담 공부를 할 때 한 교수님이 아이의 상처는 부모의 진심 어린 사과를 통해서 치유되고 회복된다고 하셨다. 그 말을 마음 깊이 새겼다. 그래서 그 시절 이야기가 나올 때마다 지오에게 매번 사과한다. 시간을 돌릴 수 없고 엄마도 엄마가 처음이라 미숙했던 그때의 나를 솔직히 이야기하고 거듭 사과했다.


지오가 집으로 오고 지오는 친구의 얼굴을 할퀴는 습관과 손톱을 물어뜯는 습관이 많이 줄어들었다. 엄마와 전쟁 같은 일상을 보내도 지오에게는 집이 좋았나보다.


돌이켜 생각해 보면 지오에게 집중하지 못한 2년의 시간을 4년의 시간을 들여 회복한 셈이다. 결국 아이에게 준 상처를 회복하기 위해서는 두 배의 시간이 필요했다. 아이를 상처 없이 키울 수는 없다. 오히려 아이의 건강한 성장에는 상처와 치유와 회복의 과정이 반드시 필요하다.


크고 작은 상처를 두려워하기보다 아이가 받은 상처를 마주하고 치유와 회복을 위해 함께 노력하는 것이 엄마와 아이를 성장시킨다. 양육과정에서 아이에게 상처를 주었다고 자책하기보다 일어서서 상처를 회복하기 위해 노력하는 것이 더 현명한 선택이다.


육아의 중심은 우리 아이에게 있다

시대별로 요구되는 인재상의 요건에는 공통점이 있다. 여러 변형 요소들이 있기는 하지만 포함하는 가치는 비슷하다. 성실, 자기주도, 긍정과 같은 도덕 교과서에 나올 법한 가치들이다. 예를 들면, 요즘 유행하는 ‘코딩교육’은 자기주도적 문제해결력이다. 어떤 문제가 발생하면 그 문제를 컴퓨터가 해결하는 방식으로 작게 나누어 해결함으로써 절차적 사고를 학습하는 것인데 문제를 내가 해결하려 마음먹는 ‘자기주도’의 가치가 전제되어야 한다.


학교에서 유행하는 여러 교수학습법기법도 마찬가지다. 생각을 시각화해 표현하는 비주얼 씽킹, 가정에서 학습한 후 학교에서 문제를 해결하는 거꾸로 학습, 질문을 통해 문제를 해결해나가는 하브루타까지 성실, 자기주도, 긍정과 같은 가치들을 길러주기 위해 고민을 거듭한 학습 방법들이다.


결국 추구하는 목표의 본질은 동일하고 방법적 변형이 존재한다는 것이다. 방법적 고민을 거듭하여 교과서도 일정 주기마다 수정된다. 시대마다 조금씩 달라지는 아이들에게 필요한 역량은 무엇이며 어떻게 하면 학습이 잘 이루어질까 하는 고민의 결과일 것이다. 양육도 마찬가지다. ‘맹모삼천지교’라 불리며 학습 분위기를 조성하려 이사를 세 번이나 다녔던 이야기가 ‘학군’이라는 이름으로 거주지를 옮기는 지금까지도 오랜 세월에 걸쳐 반복되고 있다.


아이를 양육하는 것도 어쩌면 왕도가 있지 않을까? 서점에 가보면 양육에 관한 도서가 도서관의 큰 책장을 차지하고 있다. 책장에 꽂혀 있는 책의 목록을 보는 것만으로도 양육의 트렌드를 알 수 있을 정도다. 요즘은 독서, 영어, 홈스쿨링에 관한 책이 많이 눈에 띈다. 사실 아이들의 독서나 영어, 홈스쿨링도 자기주도성과 성실함만 갖추면 가능하다. 아이가 그러한 능력을 갖출 수 있도록 엄마가 양육과정에서 도움을 주는 것이다.


그렇다면 성경이나 불교의 진리를 담아놓은 책처럼 본질에 가까운 도서 하나만 있으면 될 것을 평생 읽어도 다 읽지 못할 만큼의 많은 책들이 쏟아져 나오는 이유는 무엇일까? 아마도 아이들의 성향이 제각각 다르기 때문일 것이다. 아이들의 성향이 다르기에 적용되어야 할 방법도 조금씩 차이가 있다. 어떤 아이는 그림책을 통해 본질에 다가가기도 하고, 어떤 아이는 미술활동을 통해 다가가며, 또 다른 아이는 영어를 통해 다가간다. 한 분야에서 내가 ‘잘 한다’라고 생각할 만큼 집중해서 결과를 이루어내면 그만큼의 경험이 쌓이고 그 경험을 토대로 자신감이 생긴다. 그것이 가정에서, 학교에서 아이에게 마련해 주어야 할 가장 중요한 배움의 시작점이다.


아이를 영재로 만든 학습법, 몇 개 국어에 능통한 아이로 만든 학습법은 그 아이와 부모에게 맞는 학습법이다. 아무리 친절하게 안내해놓아도 우리 집에서 그대로 실현이 잘되지 않는다. 세상에 같은 아이는 없다. 양육서에서 말하는 방법도 성향이나 환경이 유사한 소수의 아이에게 맞는 방법일 수 있다. 아이의 성격도, 부모의 성격과 관심사도 다른 책이 우리 아이에게 완전히 맞지 않는 것은 그런 의미에서 당연한 것이다.


그렇다면 우리가 해야 할 일은 무엇일까? 세상 밖의 많은 부모와 아이에게 돌렸던 관심을 우리 집 아이에게 돌리는 일이다. 영어를 다섯 살에 시작한 옆집 아이에게서 시선을 돌려 우리 아이가 왜 매일 아침 어린이집에 가기 싫어하는지에 관심을 가져야 한다. 옆집 아이와 책 속의 아이에게서 우리 아이에게로 시선을 돌려야 한다. 시선을 아이에게 돌리면 아이의 생각이 궁금해진다. 왜 어린이집에 가기 싫은지, 아이가 듣고 싶어 하는 말은 무엇인지, 아이를 행복하게 하는 일은 무엇이고 화나게 하는 것은 무엇인지, 궁금하면 아이에게 물어보게 된다.


부모가 궁금해서 물어보는데 화를 내는 아이는 없다. 함께 이야기하고 대화하다 보면 아이는 자신을 잘 표현하게 되고 부모와 신뢰가 쌓이게 되면서 마음이 안정된다. 이 과정을 거쳐 아이는 비로소 자신에 대해 관심을 가지고 공부든, 다른 무엇이든 해보려고 시도하게 된다.


모든 길은 로마로 통한다는 말이 있듯이 아이의 존재 자체에 관심을 갖는 것이 자기주도성과 긍정의 본질로 가는 첫 걸음이다. 가정에서 부모와 관심과 대화로 신뢰가 쌓인 아이들은 사춘기에도 자기 자신의 내면의 소리를 듣는 데 집중하기 때문에 부모와 큰 갈등을 일으킨 가능성이 현저히 줄어들 것이다.



대화가 잘 통하는 부모

삶의 주도권은 아이에게 있다

몇 해 전 가을, 다섯 살 둘째의 어린이집에서 주최한 가족 마라톤대회에 참여했다. 햇살 좋고 약간은 서늘한 가을 공기가 운동하기 딱 좋은 날씨였다. 며칠 전부터 둘째는 마라톤대회를 마치고 가족에게 줄 메달을 만들어놓았다며 설레어 했다. 매주 토요일에 있는 첫째의 과학 수업도 빠지고 우리 가족은 마라톤대회에 참여하기로 의견을 모았다.


동네 호수공원을 한 바퀴 도는 것이 마라톤 코스였는데, 작년 이맘때 어른의 빠른 걸음으로 20분 정도 소요되는 이 호수공원을 한 바퀴 산책했을 때, 아이들이 힘들어하던 모습이 떠올라 이번 대회에서는 큰 욕심 부리지 않고 산책하듯 천천히 한 바퀴 완주하는 것에 의의를 두어야지…. 하는 가벼운 마음으로 대회에 참가하였다.


그런데 생각지 못한 반전이 일어났다. 대회 시작하자마자 둘째가 쏜살같이 달려 나가는 게 아닌가? 공원 초입까지만 하더라도 나는 곧 둘째를 만날 줄 알았다. 그러나 어느 순간 둘째의 뒷모습은 보이지 않았고 초조해진 나는 둘째를 만나기 위해 뛰기 시작했다. 그런데 아무리 뛰어도 둘째는 보이지 않았다. 기진맥진한 내가 어린이집에서 잠시 마련한 중간 쉼터에 도착했을 때, 그곳에서 의기양양하게 앉아 있던 둘째를 만날 수 있었다. 마음 같아서는 한 시간쯤 쉬고 싶었던 짧은 휴식 시간을 마치고 다시 코스를 달리기 시작한 후에도 역시나 나는 결승선까지 둘째의 뒷모습을 보며 따라가느라 코스 내내 전력을 다해 뛰어야 했다.


불과 몇 년 전까지만 해도 나의 보살핌과 도움 없이는 밥먹는 것도, 씻는 것도, 심지어 산책하는 것조차 혼자서는 하지 못했던 아이가 어느새 자라서 엄마보다 더 잘하는 것이 생겼다!


“이제는 엄마가 모든 것을 돌봐주지 않아도, 엄마보다 잘 하는 것이 점점 더 많이 생기겠구나!”


그날 이후로 아이들이 나보다 잘하는 것들이 하나둘 늘어나기 시작했다. 엄마보다 만들기를 잘하고 그림을 잘 그리는 첫째, 엄마보다 운동을 잘하는 둘째, 엄마보다 곤충에 대해 많이 알고 있는 첫째….


이제 아이들은 온전히 나의 도움과 양육과 배려가 필요한 존재가 아니라 엄마보다 잘하는 무언가를 계속 찾아가고 발전시켜 나갈 수 있는 존재인 것이다. 나보다 잘 하는 것이 생기는 이 시기를 기점으로 아이들은 내가 돌봐야 하는 존재가 아니라 응원하고 격려하고 지켜봐야 할 존재로서 대해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아이가 변하면 엄마의 역할도 변해야 하지 않을까. 아이가 직면한 과제에 우월한 어른으로서 지나치게 개입하지 않고, 아이를 믿고 격려해줄 수 있는 엄마, 자신만의 영역을 가진 아이를 존중하며 독립된 인격체로 대하는 엄마, 그런 아이의 독립을 기쁜 마음으로 지켜보며 아이에게 삶의 주도권을 줄 수 있는 엄마가 되고 싶다.



내가 꿈꾸는 학급, 내가 꿈꾸는 아이들

본질에 가까이 다가가는 질문 “왜?”

“현장에 나가면 학교에서 배운 것들과의 간격이 커서 당황스러울 수도, 이상과 현실의 괴리가 느껴져 실망할 수도 있습니다. 그렇게 시간이 지나면 환경에 적응해 매일을 오늘도 무사히, 퇴근 시간을 기다리는 평범한 직장인이 될 수도 있습니다.


나는 여러분께 당부하고 싶습니다. 무엇을 하든 마음속에 “왜?”라는 질문을 항상 가지고 있으라고, 그 질문을 잊지 말고 답을 찾아가는 여러분이 되라고 말입니다.”


대학 시절 존경하는 교수님께서 졸업 전, 마지막 수업에서 당부하신 말씀이다. 중년이 되면 교수님과 같은 모습의 지성인이고 싶었다. 교수님의 수업에서는 지금껏 알고 있던 상식을 뒤엎는 날카로운 시선과 현상의 이면을 꿰뚫어보는 혜안이 가득했고 나는 강의마다 이 모든 것들을 신선함과 충격으로 때로는 선망의 마음으로 보고 듣고 느낄 수 있었다.


마지막 수업에서 “왜?”라는 질문을 강조하신 교수님의 말씀이 아직도 기억에 생생하다. 졸업 전에는 졸업의 기쁨과 교사로서의 출발점에 선 설렘에 그 말씀이 크게 와 닿지 않았다. 하지만 교수님의 이 말씀은 대학 시절 전 과정을 통틀어 가장 기억에 남는 말이며 졸업 후 10년도 훨씬 지난 나에게 더욱 생생하고 또렷하게 남아 영향을 미치고 있다.


인생의 성장은 계단식이라고 했던가? 10년차에 접어들면서 좌충우돌하던 학급이 안정되고 새 학년이 시작되는 막막함과 불안보다는 기대감이 더 큰 비중을 차지하게 되었을 때 비로소 ‘왜’라는 질문에 집중할 수 있게 되었다.


‘왜’라는 질문을 마음에 담으면 현상 뒤에 숨은 본질과 만나게 되고 생각을 거듭해 질문의 답을 찾게 된다.


프랑스의 소설가 폴 부르제는 ‘생각하며 살지 않으면 사는 대로 생각하게 된다’고 하였다. 바쁘게 돌아가는 일상에 매몰되어 살다가 어느 날 문득 내 삶을 돌아보기보다는 내가 원하고 바라는 것이 삶을 이끌어갈 수 있도록 항상 깨어 있는 사람이고 싶다. 그리고 교실에서 나와 더불어 생활하는 아이들도 각자가 자신의 고유한 삶의 주도권을 가지고 ‘왜?’라는 질문을 마음에 품고 살아가기를 소망해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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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 정보는 도서의 일부 내용으로만 구성되어 있으며, 보다 많은 정보와 지식은 반드시 책을 참조하셔야 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