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구의 가치관과 문물이 유입되며 급격하게 변화해 가던 중국 사회를 기반으로, 의사에서과감히 문학의 길로 전환하여 중국 문화 전반에 새로운 흐름을 만들기까지의 일대기가 주 내용이다. & 특히 문학가이자 좌파 혁명가이기도했던 노신의 활약이 두드러진 전성기에 집중했다. 민족주의 문학·예술지상주의 및 소품문파와의 논쟁, 항일투쟁 전선을 둘러싼 논쟁 등 평생을 논쟁의중심에서 살아가면서 중국 민중의 절실한 삶의 문제를 고민한 노신과 당대의 모습을 보여준다. 180여 컷에 이르는 풍부한 사진 자료가 이해를돕는다.
■ 저자 임현치
광동성(廣東省) 양강(陽江) 출신이다.재야학자로서 중국에서 노신 연구의 최고 권위자로 평가받고 있다. 지은 책으로는 시집 『낙타와 별』『몽상과 상처』, 평론집 『호풍집단사건 :20세기 중국의 정치사건과 정신사건』『밤을 지키는 자의 편지』『시대와 문학의 초상』, 전기 『인간 노신』 등이 있다. "20세기외국문화명인서고" "만다라 역총" "독서여행" "망명자 총서" "기억" 등 여러 총서의 주간을 맡은 바 있고 편저로 『욕망의반항』『들백합화』『노신당안 : 인간과 정신』등 10여 종이 있다.
■ 역자 김태성
1959년 서울에서 태어나, 한국외대중국어과를 졸업하고, 동 대학원 박사과정을 수료했다. 2006년 현재 호서대 중국어과 겸임교수로 있으며, 중국학 연구 공동체인 한성문화연구소대표로 재직 중이다. 옮긴 책으로 『호설암』『정관정요에서 배우는 난세의 지혜』『중국사 뒷이야기』『상경』『변경』『거상』『고별 혁명』『노신의 마지막10년』『책 한 권 들고 파리를 가다』『굶주린 여자』 등이 있다.
■ 차례
제1부 출생과성장
출생지
밑바닥에서
십자로
격동 속의 화산구
환등사건
도쿄: 문학 계획의유산
제2부 혁명의 한복판에서
혁명 전후
쇠로 된 방안에서 외치다
방황 시기
소용돌이 속에서
고도(孤島)
제3부 예술의 길, 혁명의 길
혁명의발원지
꿈에서 추방된 사람
혁명문학가들의 포위 공격
좌련(左聯) 시기
구망(救亡)과 계몽
좌련 해산전후
쓰러지다
옮긴이의 말
연보
찾아보기
노신 평전
“희망은 원래 있다고 할 수도 있고 없다고 할 수도 있다. 이는 마치 땅 위의 길과 같다. 본래 땅 위에는 길이 없었다. 걷는 사람들이 많아지다 보면 자연스럽게 길이 되는 것이다.”
- 노신(魯迅)
제1부 출생과 성장
노신(魯迅)은 본명이 주수인(周樹人)으로 1881년 10월 절강(浙江) 소흥(紹興)에서 태어났다. 중소 도시이자 변방 도시로, 도시문화와 향촌문화가 중첩된 이곳에서 노신은 어려서부터 상당히 수준 높은 교육을 받을 수 있는 기회가 있었다. 노신과 고향과의 악연은 집안이 몰락한 이후 고통의 체험으로부터 비롯되었다. 뇌물사건에 연루된 조부의 투옥과 병마로 인한 부친의 사망은 그의 정신 건강을 심각하게 훼손했고, 그에게 깊은 상처를 안겨주었다. 사람들은 항상 노신의 성격을 묘사하면서 의심이 많고 쉽게 분노한다고 말하곤 하는데, 사실 이러한 습성은 고난의 생활이 가져다 준 필연적 결과였다.
당시 지식인들이 택할 수 있는 가장 흔한 길은 막료가 되거나 상인이 되는 것이었다. 하지만 권력이나 돈의 노예가 되는 것은 둘 다 노신이 가장 싫어하는 일이었다. 이 와중에 당시 변화하는 사회가 개인의 나아갈 길에 대해 전혀 생각지 못한 새로운 계기를 마련해주었다.
1840년 아편전쟁 발발 후 미미하게나마 숨결을 유지해오던 개혁의 흐름이 가속화되기 시작했다. 그리고 이 시기에 이미 중국과 서양의 합작 형태로 학당이 생겨났고, 완전한 서양식 학교도 출현했다. 노신은 학비가 면제된 남경의 강남수사학당과 광무철로학당에 다니기 시작했고, 영국의 유명한 생물학자로서 다윈의 진화론에 지대한 영향을 준 헉슬리의 저작 『진화론과 윤리학 및 기타』를 번역한 『천연론(天演論)』을 읽었다. 역자에 의한 개작에 가까웠던 이 책에서 역자가 강조한 것은 ‘생존경쟁’ ‘적자생존’의 진화론 원리로, 이는 국민들에게 국가의 존망에 대한 경종을 울리기 위한 것이었다. 노신 역시 다윈 학설로부터 깊이 영향을 받았고, 이때부터 위기의식과 투쟁, 과학과 진보가 평생 동안 그의 뇌리에 기본적인 신념으로 자리잡게 되었다.
관비 유학생으로 선발되어 1902년 일본으로 도착한 지 얼마 되지 않아 유학생들의 반정부 풍조가 점점 노신에게 강한 영향을 미치기 시작했다. 이곳에서 그는 두 가지 중대한 사상적 수확을 얻게 되었다. 첫째는 혁명에 관한 것으로, 사회 변혁의 특수한 방식으로서의 혁명은 언제든지 발생할 가능성이 있었고, 실제로 이미 끊임없이 진행되고 있었다. 그리고 보다 중요한 것은 실제적인 투쟁을 거쳐야 하고, 반드시 피의 대가를 지불해야만 효과적으로 현실을 개조할 수 있다는 것이다. 한편 이 시기에 노신은 첫 번째 글 「스파르타의 혼」을 학원 친구 허수상이 창강한 『절강조』에 발표했다. 또한 과학 관련 논문, 쥘 베른의 『달나라 여행』과 『지하 여행』등을 번역하기도 했다.
1904년, 노신은 센다이의학전문학교에 입학했다. 그가 의학을 선택한 것은 부친이 돌팔이 의사의 오진으로 극심한 고통을 겪어야 했던 기억과 무관하지 않았다. 번역된 역사서를 통해 일본 메이지 유신이 주로 현대의학에서 출발했다는 사실을 알게 됐다는 점도 작용했다. 또한 당시에는 전쟁이 빈번했기 때문에 장차 군의관이 되어 독립과 자유를 위해 싸우다 부상한 병사들을 구호할 수도 있다는 것이 그의 생각이었다. 하지만 세균학 시간에 중국인들이 러시아군의 밀정 노릇을 하다가 일본군에 붙잡혀 무참히 처형되는 장면에서 구경꾼의 대부분인 중국 동포들이 만세를 외치는 필름을 본 노신은 가치관 전체에 중대한 변화를 겪게 된다. 이러한 변화에 관하여 노신은 『외침』「자서」에서 이렇게 밝히고 있다.
“그때 이후로 나는 의학이 전혀 중요하지 않은 일이라 생각하게 되었다. 우매하고 연약한 국민은 체격이 아무리 온전하고 건장하다 하더라도 아무 의미 없는 시위의 구경꾼밖에 될 수 없고, 병사자가 아무리 많다 해도 이를 불행이라 여길 수 없다. 따라서 우리 중국인에게 가장 중요하고 시급한 것은 정신을 뜯어고치는 것이고, 정신을 뜯어고치기 위해서는 무엇보다도 문학예술에 힘써야 한다고 생각했다. 그리하여 문학예술운동을 제창하게 된 것이다.“
노신이 센다이를 떠나 도쿄로 돌아와 가슴 가득 열정을 품고 문학의 꿈을 펼치려 할 때 고향에서 모친의 병세가 위급하다는 거짓 소식을 알려왔다. 노신이 귀국하자 그의 어머니는 미리 정해놓은 신부 주안과 결혼을 시켰다. 하지만 사흘이 지난 후 그는 둘째 동생 주작인을 데리고 다시 도쿄로 돌아왔다.
센다이를 떠난 이후 노신은 도쿄 독일어학회에서 설립한 독일어학교에 학적을 걸어놓고 미래의 문학 계획에 필요한 준비 과정을 밟아나갔다. 유명한 무정부주의자인 유사배가 주편을 맡고 있던 『하남(河南)』 잡지에서 원고 청탁이 온 것을 기회로, 많은 글을 집중적으로 이 잡지에 발표하고, 주작인도 끌어들여 적극적으로 참여하게 했다. 1907년부터 1908년까지 노신이 발표한 글들은 노신이 신문학의 창작활동에 정식으로 들어서는 빛나는 서곡이자 중국의 근대혁명에 발맞추는 행진곡이었다.
제2부 혁명의 한복판에서
7년 동안의 유학 생활을 마치고 귀국한 노신은 허수상의 추천으로 그가 교무부장을 맡고 있는 절강양급사범학당에서 교사로서의 생애를 시작했다. 학교에서 노신이 맡은 과목은 생리위생과 생물 과목이었다. 노신은 주변 환경에 좀처럼 화합하지 못하여 다른 지역에 일자리를 찾아보고자 했으나 그것도 여의치 않아 결국 모든 공직을 사직하고 말았다.
1911년 10월 10일, 무창 봉기가 일어나자 전국 각지에서 이에 호응하여 독립을 선언했다. 1919년 1월 1일에는 손문을 우두머리로 하는 중화민국 정부가 수립되었고, 2월 12일에는 청조 황제가 퇴위함으로써 정치 형식에 있어서 중국의 황제 통치가 종말을 고했다. 양무파 관료들이 제창한 현대화 노선은 그 속도가 느렸고 온갖 위험과 문제를 안고 있었지만 신흥 부르주아 사상은 신해혁명의 기치가 되어 한 시대를 빛내면서 수많은 사람들의 마음을 격동케하고 있었다.
새로 수립된 군 정부의 도독인 왕금발이 자신을 산회초급사범학당의 감독으로 위임한 이후 노신은 구체적인 계획을 세워서 학풍을 정돈하고 교원을 충원하는 대신 다른 경비를 절약하는 등 혁명가로서 모든 열정을 쏟기 시작했다. 안타깝게도 이러한 실천적 사회활동은 그 기간이 너무 짧았지만 그의 일생을 통틀어 이때처럼 아름답고 빛나던 시기는 찾아보기 어려웠다. 이 와중에 왕금발의 통치를 비판하는 신문 발행에 참여하면서 쫓기는 신세가 된 노신은 마침 교육부에 와서 일해달라는 초빙 의사를 전해듣고 곧바로 남경으로 가게 되었다.
원세개가 갑자기 세상을 떠나자 그를 우두머리로 했던 권력의 핵심은 순식간에 해체되었고 한동안 극도의 공포 상태에 처했던 정치 분위기는 다시 여유를 찾았다. 권력 집단들이 여러 차례의 분화와 재건을 거쳐 북양군벌 정부를 수립했을 때는 이미 또 다른 권력 중심, 즉 지식인들로 구성된 새로운 집단이 이에 거세게 도전하기 시작했다.
이 새로운 지식 권력의 중심은 『신청년』이라는 간행물과 북경대학이었다. 이 두 기구는 1917년에 새롭게 개조되면서 급진주의자인 진독수와 자유주의자인 채원배가 각각 이끌어가고 있었다. 이 지식인 집단에서 가장 활발하게 활동했던 인물들은 하나같이 서양의 관념과 개혁의 열정에 지배되고 있었고, 대부분 북경대학을 비롯한 몇몇 대학에서 교편을 잡고 있었다. 이들이 뿌린 사상의 불씨는 가장 먼저 청년 학생들 사이에 불길을 일으켰는데 1919년 5월 4일, 북경대학을 필두로 하여 각 대학 학생들이 5ㆍ4운동을 일으킴으로써 반제구망(反帝求亡)을 주요 특징으로 하는 신문화운동을 절정으로 몰고 갔다. 그러나 이때부터 대중적인 정치운동이 전개됨에 따라 사상운동은 점차 쇠퇴하기 시작했다. 문학도 더는 나팔수의 역할을 담당하지 못해 자신의 방 안으로 돌아갔다.
5ㆍ4운동 이후 신문화운동의 정신적 지도자이자 『신청년』지의 주간이던 진독수는 상해에 도착하여 중국공산당이라는 새로운 정당을 조직하고 『신청년』을 중국공산당의 기관지로 변모시켰다. 노신은 이 잡지의 동인으로서 정치 문제에 있어서 여전히 구체적인 정치적 조작이 아닌 지식인으로서의 입장, 즉 계몽적 입장을 고수해야 한다고 생각했다. 다시 말해서 권력을 위해 글을 쓰는 것이 아니라 저술을 통해 근본적으로 권력에 대항하는 것이 그의 노선이었다. 정치인과 지식인은 그 존재에 의해 명약관화하게 구분될 수밖에 없었다. 분열은 이미 기정사실이었다. 이는 확실히 지식인 집단의 정신적 패배이기도 했다. 이에 대해 노신은 무력하기만 했다.
노신은 이 시기 「아Q정전」「광인일기」「내일」「고향」「사희(社戱)」등을 모아 1923년 『외침』이란 제목으로 출판하였다. 그리고 신문화 운동, 즉 전통 중국의 최신 변화 및 그 결과물에 경도되어 있음을 보여주는 소설집 『방황』, 시적인 언어로 ‘절망적 반항’이라는 철학을 제시한 『들풀』을 집필했다.
1920년대, 노신은 북경대학과 북경고등사범학교, 북경여자사범고등학교의 강사를 겸임하고 있었는데, 여자고등사범학교가 여자사범대학(이하 여사대)으로 개칭된 지 얼마되지 않아 새로 부임한 보수적인 여교장의 탄압으로 이에 저항하는 재학생들과 교장 사이에 대립이 격화되었다. 이 와중에 한 여학생이 노신에게 편지를 보내 북경 교육계의 어두운 면을 비판하면서 마음속의 고민과 염려를 털어놓았다. 그 여학생은 사범대학 당국과 학생의 대립 와중에 제적된 허광평이었는데, 노신이 여기에 답장을 하면서 둘 사이에 오가는 편지는 점점 연서의 분위기를 띠었다.
학교 당국이 학교를 폐쇄하고, 무장경찰이 출동하여 학생들을 폭행하는 것으로 확대된 이 사태는 북경의 수십만 학생과 노동자들이 대규모 시위운동을 벌이면서 여사대에 매우 유리하게 전개되고 있었다. 그리고 각 여자대학 학생들이 합세한 가운데 여사대 전체 교원과 학생들은 복교운동을 성공적으로 마무리하고, 각계에 복교의 경과를 보고했다. 곧이어 학생들과 함께 싸운 노신도 복권되었다. 여사대 학생들이 자신들의 승리를 자축하고 있을 때 뜻밖의 충격적 사건이 발생했다.
3월로 접어들면서 풍옥상의 국민군과 장작림의 봉군이 교전을 벌이다가 봉군이 패하자 일본제국주의는 중국에서 자신들의 이권을 보호하기 위해 12월에 국민군의 방어선인 대고구를 공격하는 동시에 신축조약에 참여했던 여러 국가들을 끌어들여 단기서 집정부에 최후통첩을 보내왔다. 18일 오전, 북경의 2백여 단체, 10만여 군중이 천안문 광장에 모여 ‘8국의 최후통첩에 반대하는 국민대회’를 개최했는데, 이날 유혈충돌이 벌어져 학생 47명이 총에 맞아 사망했고 2백여 명이 부상을 당했다. 이것이 바로 ‘3ㆍ18참사’였다.
정부는 이 사건에서 사망한 사람들을 전부 ‘폭도’들이라 매도하면서 청원을 ‘난동’으로 규정했다. 그리고 참사가 발생한 다음날 공산당 지도자 이대교, 국민당 이사 서겸 외에 50여 명의 정치 인사들이 블랙리스트에 올라 군경의 체포 대상이 되었다. 이 명단에는 노신의 이름도 포함돼 그는 한 달을 기한으로 도피 행각을 시작했다. 한편 장기간의 투쟁 속에서 노신과 허광평의 관계는 갈수록 더 가까워졌다. 하지만 그는 아내 주안에게서 완전히 벗어날 수 없었고, 결국 그는 허광평과 북경을 떠나 남하하기로 결정했다.
지인의 주선으로 노신이 가게 된 하문대학은 갖가지 포위와 단절로 인해 고도가 되었다. 하지만 이미 황무한 고도 하문으로 내려온 이상, 불을 놓아 황무지를 개척하고 씨를 뿌리며 어떻게 해서든지 일을 도모하지 않을 수 없었다. 신문화운동의 혜택을 받지 못하고, 구질서를 그대로 따르고 있는 이곳에서 노신은 문학사와 소설사를 강의하고 남는 시간에 틈틈이 잘 아는 학생들의 문학창작을 지도했다. 이 밖에도 그는 여러 차례 강연 요청을 받아들여 자유 평등과 반항의 사상을 전파하는 데도 힘을 아끼지 않았다. 그는 당신의 청년 학생들 가운데서 보다 많은 반역자들이 나타나 기존의 질서를 변화시키는 투쟁에 대거 나서주기를 기대했던 것이다.
적막하고 조용한 환경과 차분하게 가라앉은 하문에서 생활하면서 노신은 사상을 정리하고 종합한 잡문집 『무덤』을 출판했다. 이 책의 말미를 장식하고 있는 후기는 시와 사상을 완벽하게 결합시킨 대단히 창조적인 글로서 그의 일생을 통틀어 가장 중요한 글이기도 하다. 한편 노신은 하문대학의 열악한 환경에 지친 데다 허광평과의 관계도 깊어져 학교에 사직서를 제출하고 1927년 1월 배를 타고 남쪽을 향해 떠났다.
제3부 예술의 길, 혁명의 길
유명한 문화인으로서 노신은 갈수록 긴장이 심해지는 정치투쟁 속에서 자연스럽게 좌파와 우파 모두에게 포섭의 대상이 되었다. 그는 명목이 무엇이든지 간에 이미 정해진 원칙적인 가치를 가지고 눈앞에 펼쳐지는 모든 것을 대했다. 때문에 당장 유행하고 있는 관점들과 다른 많은 것들을 새롭게 발견할 수 있었다.
그는 여러 차례의 강연과 글을 통해 혁명과 문학의 상호 인증과 상호 발명을 유도했다. 혁명의 눈으로 문학을 바라보면 이른바 ‘문학무용론’이 나올 수밖에 없다. 그 이유는 첫째, 권력이 문학을 완전히 제압할 수 있기 때문이다. 둘째, 혁명도 일종의 패권이 되어 문학을 선전의 도구로 만들고 그 심미적 기능을 소멸시킬 수 있기 때문이다. 혁명과 문학의 관계를 논하자면 무엇보다도 먼저 사람들에 대한 영향을 생각해야 했다. 사람들을 ‘혁명가’들로 만들 수 있어야 하는 것이다.
그렇다면 혁명이란 무엇인가? 노신의 눈에는 혁명에도 ‘소혁명’과 ‘대혁명’의 구분이 있었다. 이른바 ‘소혁명’이란 일반적인 개혁, 즉 점진적인 개혁을 의미하고, 대혁명은 약자들이 강한 압제자들에 대해 두려움 없이 반항하는 것을 말한다. 또한 혁명은 반드시 사상문화 분야에서의 개혁이 뒤따라야 한다. 셋째, 혁명은 자각적인 사회 행위로서 ‘봉지(奉旨)’ 혁명은 혁명이라 할 수 없다. 넷째, 혁명은 후기로 접어들수록 혁명적인 경향을 덜 드러내기도 한다. 다섯째, 혁명에는 필연적으로 희생이 뒤따르기 때문에 희생을 두려워하는 혁명가에겐 의심의 소지가 다분하다. 여섯째, 혁명을 위해 자신을 희생한 진정한 혁명가들이 모든 사람들에게 잊혀질 때쯤이면 혁명의 시대는 이미 지나가 버린다. 혁명정신은 배양되는 것이고 그 생장과정에서 환상에 빠지거나 마음대로 열매를 따려 해서는 안 되는 것이다. 그러나 혁명의 발원지에서 그가 본 것은 이와 같지 않았다. 결국 노신은 혁명의 발원지도 너무나 쉽게 반혁명의 온상이 될 수 있다고 단정지었다.
국공합작이 결렬되었다. 1927년 4월 12일, 노신이 ‘피의 유희’라 칭한 대학살이 시작되었다. 북벌군이 상해에 도착하자마자 장개석은 현지에서 시위를 주도하고 있던 집회조직의 인물들을 규합하여 공산당원들과 노동계 지도자들을 체포, 살육하기 시작했다. 이어서 파업과 시위를 금지하고 노동조합을 해산함으로서 모든 혁명 조직을 제거했다. 같은 달 12일부터 15일까지 나흘 사이에 상해에서만 3백여 명이 살해되었고 5백여 명이 체포되었다. 이 밖에 실종된 사람도 5백여 명이나 됐다. 4월 15일에는 광주의 이제심 등도 대규모 숙청운동을 벌여 중화전국총공회와 성향파업위원회, 동산의 러시아 고문 주택 등을 포위하고 황포군관학교와 성항파업위원회 규찰대의 무장을 해제시켰다. 아울러 노동조합과 농업조합, 학생연합, 부녀자연합 등의 여러 단체들을 조사하고 폐쇄시켰다. 이 과정에서 체포된 공산당원과 노동자가 2천여 명에 달했고, 이 가운데 1백여 명이 살해되었다.
4월 18일, 장개석은 남경에 ‘국민정부’를 수립하고 이단자들을 제거하는 한편, ‘일당전정’의 정권통치 시스템을 구축했다. 그리고 이른 새벽, 중산대학이 포위되었다. 이런 소식을 전해들은 노신은 황급히 학교로 달려가 긴급회의에 참석해 학생들이 체포된 것에 대해 그들에게는 아무런 책임도 없기 때문에 자신이 앞에 나서서 이들을 보호하겠다고 엄숙하게 천명했다. 반면 당의 결정에 복종해야 하고 정부가 실행하는 일에 대해 간여하지 말아야 한다고 주장하는 이도 있었다. 회의는 아무런 진전 없이 황급히 끝나버렸고, 노신은 비분을 참지 못하고 사직을 결심했다.
중산대학을 사직한 노신은 두문불출하며 집 안에 은거하였는데, 고통과 분노, 초조함과 조급함이 뒤엉킨 복잡한 감정에 사로잡혀 있었다. 참다못한 그는 오래된 원고들을 정리함으로써 마음속의 고통과 절망을 달래려고 했다. 그 가운데 하나가 바로 『들풀』이었다. 두 번째 원고는 「옛 일을 다시 제기하다(舊事重提)」였고, 편집 과정에서 이를 개작한 것이 바로 『아침 꽃 저녁에 줍다(朝花夕拾)』이다. 그는 옛 원고들을 정리한 뒤 여러 편의 새로운 잡감문을 써 내려갔다.
1927년 10월, 노신과 허광평은 광주를 떠나 상해에 도착했다. 상해에 막 도착했을 때의 상황은 광주에 처음 도착했을 때와 마찬가지로 몹시 바쁘고 혼란스러웠다. 손님들을 만나야 했고, 강연 초청에도 응해야 했다. 하지만 교사 출신인 노신에게 있어서 강연은 자신이 원하는 일이기도 했다. 이런 기회를 이용하여 개인적 사상을 직접 표현할 수 있었고, 특히 청년 대학생들의 마음에 불을 붙일 수 있는 좋은 기회가 되었기 때문이다. 그러다 보니 강연 스케줄은 매우 빽빽하여 평균 한 주에 한 번 꼴로 연단에 서야 했고, 강연의 화력도 매우 집중적이고 맹렬했다.
강연의 핵심은 여전히 정치와 혁명, 지식인 문제 등 사회 현실에 관한 것이었다. 주요 논점은 개조에 집중되어 있었고, 논점의 기초는 모든 사회의 개체, 특히 지식인들이 담당해야 할 위험에 대한 책임에 모아졌다. 몇 차례의 강연에서 문학의 문제도 빠지지 않았다. 노신은 사상투쟁의 실질적인 영역에 따라 문학을 ‘예술을 위한 예술’과 ‘인생을 위한 예술’이 두 가지로 분류하면서 상아탑적인 문학행위에 대해 분명한 반대의지를 밝혔다. 또한 문학의 생명은 진실에 있다고 역설하면서 일체의 허위와 가식을 배제하여 훌륭한 사상은 훌륭하게 써내고 부패한 사상은 더럽고 추하게 그려내야 한다는 것이다. 그는 모든 ‘혁명문학’의 문학적 가치에 대해 회의적인 태도를 보였다. 진실을 잃은 문학은 문학의 모든 의미를 상실한 것이나 마찬가지이기 때문이다.
1930년, 장개석의 국민당 정부는 북경을 북평이라 개칭하여 정식으로 일당 독재의 정권 통치를 시작했다. 이에 중국공산당은 피나는 악전고투 속에서도 용감하게 일어서서 여러 차례 폭동을 일으켰지만 매번 실패로 끝나고 말았다. 혁명이 퇴조로 접어든 것이다. 바로 이때 상해 문학계의 일부 젊은 공산당원들은 ‘혁명문학’의 기치를 높이 내걸고 노신을 포위공격하기 시작했다. 노신을 가장 격렬하게 공격한 인물은 전행촌이었다. 그는 『태양월간』에 「죽어버린 아Q시대」라는 글을 발표하여 노신의 사상은 청대 말기에 완전히 정체해 있어 창작이 주로 과거에 한정되어 있고 미래에 관한 창작이 없다고 비난했다. 또한 그는 노신이 자유주의 사상에 완전히 젖어 있어 지도자 의식, 영웅의식을 뇌리에서 지워버리지 않는다면 앞으로 나갈 길이 없을 것이라고 지적하기도 했다.
이 같은 혁명문학의 포위 공격에 대해 노신은 잡지에 이를 논박하는 글을 기고하면서 전투 태세를 취하긴 했지만 이를 위협으로 느끼진 않았다. 한편 그의 논적(論敵)들은 유물사관을 표방하면서도 이를 자세히 소개하기를 원치 않아 하는 수 없이 노신은 서양의 사회과학 저작들, 소련 동반작가(同伴作家)들의 작품을 사들여 이를 열심히 번역해냈다.
1929년 5월, 노신은 가족들을 만나기 위해 단신으로 북경에 돌아왔다. 북경에 체류하는 보름 동안 노신은 연경대학과 북경대학 그리고 두 곳의 사범대학에서 강연을 함으로써 상당한 명성을 얻게 되었다. 강연의 내용은 주로 신문학 문제와 여성 문제, 그리고 사회 문제와 문화 문제였다. 다시 상해로 돌아온 그해 9월에 허광평과의 사이에서 아들 해영이 태어났다.
형식적으로나마 국민당이 중국을 통일한 후부터 정치적 통제가 더욱 심화되었다. 1929년 국민당 중앙은 「선전물 심사조례」를 반포하여 당의 정강정책과 결의에 반대하거나 위배하는 것은 무조건 일률적으로 ‘반동선전물’로 규정하고 철저히 조사하여 발행을 금지하겠다고 밝혔다. 그리고 10월이 되자 국민당 정부는 모든 서적 및 간행물에 대해 위법 여부를 철저히 조사하게 했다. 이로써 자유와 민주, 인권은 송두리째 짓밟혀버리고 전제 질서가 전쟁과 혼란을 대신하게 되었다.
1930년 2월, 상해에서 중국자유운동대동맹이 결성되었다. 그리고 자유동맹의 설립과 거의 동시에 좌익 문예단체가 탄생하게 되었다. 중국공산당은 국민당 정부의 문화봉쇄 정책에 효과적으로 대응하기 위하여 노신을 끌어들여 그를 통해 영향력 있는 외곽 포위조직을 형성하기로 결정했다. 노신은 ‘중국좌익작가연맹’(이하 좌련)이라는 명칭을 기꺼이 받아들이면서 자신의 독자적인 투쟁을 방해하지 않는다는 원칙을 조건으로 제시했다.
중국공산당의 일부 지도자들은 일방적인 정치적 고려에 따라 처음부터 좌련을 정치조직으로 간주했고, 이를 비밀조직으로 만들어 작가들로 하여금 전단을 배포하고 표어를 붙이며 시위활동을 진행하게 했다. 그리하여 좌련은 ‘제2당’이라는 별명을 갖게 되었고, 애당초 노신이 가입을 결정했을 때의 소망과는 갈수록 멀어져만 갔다. 하지만 좌련에 가입한 이후 노신은 여전히 자신의 ‘참호전’을 계속하면서 사회비판과 문화비판을 진행했고, 동시에 청년들을 양성하면서 신문학 건설을 계속해나갔다. 이 시기 그는 현대 목각(木刻) 작업으로 화집도 내고, 번역과 출판 업무에 적극적으로 매달렸다.
1931년 1월 국민당 특무들의 습격을 받아 좌련 작가 30여 명이 체포되었다. 이들의 안위를 걱정하던 노신에게 다음달 대부분의 사람들이 총살당했다는 소식이 전해졌다. 그는 큰 충격을 받았지만 “장차 누군가가 반드시 그들을 생각하고 그들에 대한 이야기를 할 때가 오리라는 것을”알고 있었기에 다시 일어서 야마가미가 일본어로 번역한 「아Q정전」의 교열작업에 착수했다.
1931년 일본군은 불과 석 달 만에 중국 동북 지역 전체를 점령했다. 이에 따라 나라 전체가 한편에서는 투항과 후퇴로 소용돌이쳤고 다른 한편에서는 구망운동이 고조되었다. 이때부터 노신은 다수의 시사평론을 발표하여 일본 제국주의의 침략정책을 폭로하는 동시에 국민당 정부의 투항정책과 전제정책을 비판하기 시작했다. 그는 항상 권력자의 전제정치 수단과 국민의 우매함을 함께 표현하고 권력자의 정치심리와 국민당의 문화심리를 결합하여 보다 철저하게 분석하고 묘사함으로써 통치자들이 모습을 감출 곳이 없게 만드는 동시에 국민들로 하여금 자신들의 책임을 의식하게 만들었다. 한쪽은 구망(救亡)이었고, 다른 한쪽은 계몽(啓蒙)이었다. 구망이 계몽을 압도하는 것이 아니라 구망 속에서 계몽하고, 계몽으로써 구망하는 것이었다. 특정한 구망의 시기에 계몽의 주요 임무는 중국의 정치 연극을 주도하는 연출자들의 기만성을 타도하고 막후에서 벌어지는 더러운 연극을 무대 앞으로 끌어내는 것이었다.
1932년 1월, 일본 침략자들은 산해관을 공격한 데 이어 열하까지 쳐들어왔다. 그리고 국민당 정부는 군대를 출동시켜 중앙 소비에트 지구에 대한 토벌을 계속하는 동시에 수배와 체포, 구금과 고문, 혹형과 학살을 통해 공산당원과 진보적 인사들에 대한 탄압의 고삐를 늦추지 않았다.
이런 가운데 거의 반 년에 이르는 배양과 준비작업을 거쳐 12월에 정치범들을 보호하고 구명운동을 벌이며 공민의 권리를 보호하는 것을 취지로 한 중국민권보장동맹이 상해에서 정식으로 창립을 선포했다. 노신은 집행위원으로 선임되었는데, 민권동맹이 보장하는 것은 정부에 의해 정죄당한 사람들의 인권이자 사회 전체가 발전하는 데 필요한 사상과 정치의 자유였다.
노신은 처음부터 끝까지 민권동맹의 모든 투쟁에 참여했지만 정부 측의 압력으로 인해 노신을 포함하여 핵심 분자들의 수가 이미 너덧 명을 넘지 않게 되었다. 이 즈음 가까이 지내던 정령의 실종과 양전의 죽음이 노신의 마음을 무겁게 누르는 가운데, 사방에서 유언비어가 난무하며, 양전을 죽인 데 이어 송경령과 채원배, 노신 등을 살해하려 한다는 소문이 도처에서 들려왔다. 이에 대해 노신은 삶에 대한 원망도 없고 죽음에 대한 두려움도 없다면서 완강한 태도를 견지했다. 양전이 죽자 중국민권보장동맹의 활동은 중지됐고 거의 반년에 가까운 투쟁과 몸부림 끝에 소리 소문도 없이 해산되고 말았다.
1933년이 되어 문단은 갈수록 복잡해지면서 검열이 심해지고 작가들 사이의 이간질이 극심해졌으며, 요언과 음모가 횡행하는 등 갖가지 사건들이 끊임없이 발생하는 가운데 많은 신문들이 노신을 공격했다. 그리고 1934년 국민당 중앙정부는 100종의 문예 및 사회과학 서적에 대해 판매 및 열독을 금지시켰고, 76종에 달하는 정기간행물의 발행을 중단시켰다. 그리고 금서목록을 공포하라는 밀령을 내렸다. 물론 노신의 저작 및 번역물도 전부 금서목록에 포함되었다. 그리고 수많은 문학작품들이 삭제되거나 금지되고 몰수되는 결과를 불러온 국민당 중앙선전위원회 도서잡지 심사위원회가 설치되었다. 아울러 어떠한 성명서 발표도 허락되지 않았다. 이처럼 고압적인 정치 상황과 동인들의 협공 속에서 노신은 도처에서 날아오는 공개적ㆍ비공개적 갖가지 공격에 맞서 힘든 싸움을 하고 있었다.
국민당 정부의 문화전제주의의 오랜 뿌리를 잘라버리기 위해 노신은 명ㆍ청 시기의 필기소설과 야사, 금서, 공문서 등을 읽으면서 「격막(隔膜)」「소학대전을 사면서(買小學大全記」「병후잡감(病後雜感)」등의 글을 써서 명ㆍ청 시기의 문자옥을 통해 당시의 현실을 폭로했다. 이런 글들은 검사관들의 검열을 거쳐 많은 부분이 삭제되어 실렸다. 글을 쓴다는 것이 이런 지경에 이르렀다면 무엇 때문에 글을 쓰려 하는가? 하지만 세상 어디에도 피할 수 있는 곳이 없었다. 그는 상해를, 중국을 떠날 수 없었다. 그는 자신의 위험한 처지를 잘 알고 있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족쇄를 찬 진군’을 계속할 생각이었다.
제3인터내셔널 제7차 대표대회가 끝난 후 국제혁명작가연맹의 좌련 대표 소삼은 고국으로 편지를 써서 이 조직에서 좌련을 제명한다는 소식을 전했다. 좌련의 해산에 뒤이어 처음에 ‘작가협회’로 불렸다가 나중에 ‘문예가협회’로 개칭된 새로운 조직이 6월 정식으로 설립되었다. 하지만 “내가 보기에 이 조직은 얼마 못 가서 와해되거나 변화하고 말 걸세”라고 단언한 노신의 말처럼 이 협회는 얼마 지나지 않아 조용히 사라지고 말았다.
1936년 3월, 노신은 추위로 인한 기침에 시달리게 되었고 며칠 후부터 몸이 갈수록 쇠약해졌다. 하지만 그는 여전히 아무 일 없는 듯이 일을 했고 특별히 휴식에 관심을 갖지도 않았다. 이 시기 집필한 글 가운데 「깊은 밤에 쓰다」는 글 전체에 격정과 외침이 가득 차 있고 뼈를 뚫는 풍자의 힘이 담겨 있다. 그러나 5월로 접어들면서 노신은 정신이 극도로 쇠약해졌고 나중에는 일기마저 쓸 수 없게 되었다.
양쪽 폐가 완전히 병들고 병세도 심각한 상태라는 의사의 진찰 결과를 전해 듣고도 노신은 놀랄 일이 아니라면서 입원과 요양 제의도 거부했다. 그는 여러 차례에 걸쳐 이렇게 말했다. “그렇게 누워서 세월을 보내다 보면 너무 무료해서 자신이 살아 있다는 것을 느끼지 못하게 된다. 그래서 난 항상 일을 안 하면서 몇 년을 더 사느니 차라리 열심히 일을 하면서 몇 년 덜 사는 것이 낫다는 생각을 하곤 했다. 왜냐하면 삶의 결과는 마찬가지이기 때문이다.”
그는 일로써 자신을 마비시키고 자신을 위로하면서 자신을 애써 격려하고 있었다. 일로써 죽음에 대항하고 있는 것이었다. 병세가 조금만 나아져도 그는 당장 글쓰기로 복귀했다. 얼마 후 그의 몸은 점점 회복되는 기미를 보였다. 그러다가 갑자기 자신의 참호에서 쓰러지고 말았다. 때는 1936년 10월 19일 오전 5시 25분이었다.
(본 정보는 도서의 일부 내용으로만 구성되어 있으며, 보다 많은 정보와 지식은 반드시 책을 참조하셔야 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