저자는 그림이 일상을 대하는 태도와 그것을 표현하는 방법을 살펴, 그림이그러는 것처럼 당신도 당신의 일상을 소중하게 여기고, 아름답게 가꾸라고 이야기한다. 화가가 주변의 사물을 캔버스 안으로 들이는 순간, 의자는단순한 의자가 아니며, 하이힐은 그저 패션 소품 중 하나로 끝나지 않으며, 진주는 부유한 아주머니들의 전유물에서 그림 속 결핍, 즉 생의허전함을 채워주는 빛나는 보석이 된다. 그처럼 우리도 우리 주변의 사물을 화가처럼 바라보고, 우리만의 캔버스를 만들어 의미를 찾으면 일상이그림처럼 특별해지고 소중하고 아름다워짐을 이야기하는 책이다.
■ 저자 이주은
서울 대학교 언어학과를졸업한 뒤, 3년 동안 대기업에서 무난한 직장생활을 했다. 그러다 눈 깜짝할 사이에 흐른 시간 앞에서 진정 자신이 몰입할 수 있는 일이 무엇인지고민하게 되었고, 평소 이미지의 역사와 그 소통 방식에 매력을 느끼던 그녀는 미술사를 선택했다. 이후 미국으로 건너가 덴버 대학교에서 「로제티의제인 모리스 초상에 관한 연구」로 서양미술사 석사 학위를, 돌아와 이화여자 대학교에서 「빅토리안 회화의 인물상을 통해 본 근대 영국 사회의특성」으로 현대미술사 박사 학위를 받았다.
『모던 유럽 아트』와 『1960년 이후의 현대미술』(공역)을 우리말로옮겼으며, 더 많은 사람들과 소통하고 싶어 아름다운 빅토리아 그림 속에 숨은 이야기를 『빅토리아의 비밀』에 담아내기도 했다. 삶이 막막할 때면그림을 가만히 들여다보며 치유의 길을 묻는다는 그녀에게, 미술작품은 연구해야 할 과제이면서 삶을 바라보는 창이기도 하다. 현재 대학에서 미술사를강의하며, 이화여대 박물관에서 학예연구원으로 일하고 있다.
■ 차례
시작하며 _ 우리는 언제나Quick Quick, 그래도 가끔은 Slow Slow
봄날
1. 불안이 거인처럼 커질때
거인과 어울리는 무한한 공간에 서보기
2. 허브 향이 나는 당신을 위해
사람의 냄새가 향기가 될때
3. 쿨한 세상에 올드 보이로 살기
냉정한 세상, 당신의 가슴만은뜨겁게
4. 수염 길러보기
당신의 삶에 작은 혁명을 일으키는 방법
5. 떠남에 대하여
긴 여행을 마치고 돌아온 당신의모습
6. 가족과 행복에 대하여
행복한 가정이 성공의 지표가 된세상에서
여름
1. 나의 파워 슈즈, 하이힐
하루쯤 대단한 사람이 되고 싶은 당신에게
2. 기본에 충실한 드레스의 매력
지난 시간을 지우고 싶은당신에게
3. 뚱뚱하고 매력적인 당신을 위해
잘빠진 몸매보다 잘난마음을
4. 시간 앞에서 허둥대는 당신에게
시간은 시간일뿐이다
5. 내가 중고품처럼 느껴지는 날
당신은 낡은 기계가 아니라 늙어가는사람이다
6. 삶의 중심은 하트
마음 가는 대로
가을
1. 엉덩이의 제안
놀이본능, 감추지 말고 흥겹게 흔들자
2. 넥타이의 다짐
오늘 하루도 신실하게
3. 커피 한 잔의 기적
당신의 정신을 깨우는 작은힘
4. 내게 어울리는 의자 고르기
지금 앉아 있는 의자가 당신의현재이다
5. 내가 나라서 사랑스러워
오만해도 좋다, 당신의 장점에만몰두하라
6. 묵은 김치의 깊은 맛
세월 가는 소리에 가슴을 쓸어내리는당신에게
겨울
1. 긴 머리 자르기
상념에서 벗어나고 싶을 때
2. 진실한 당신의 진짜 초상화
그럴듯한 배경이 없어도, 당신만으로충분한 그림
3. 촛불 아래서 꿈꾸기
당신이 잊고 있던 꿈이 흐뭇하게피어난다
4. 소리 내어 신문 읽기
당신의 목소리로 글자를깨워라
5. 마음이 허전할 때
결핍을 채워주는 보석
6. 잡담의 가치
매일의 수다가 가치 없다 느껴질때
당신도, 그림처럼
봄날
불안이 거인처럼 커질 때
“누구나 요리를 할 수 있다.” 어린이에게 꿈을 심어주는 할리우드식 애니메이션 영화 <라따뚜이>에서는 주방 근처에 나타나기만 해도 경악할 만한 생쥐가 사람이 먹을 요리를 한다. 시궁창 출신의 생쥐는 몇 번이나 스스로 좌절하고 또 몇 번이나 부엌에서 추방당하지만, 운명에 굴하지 않고 편견을 이겨내 마침내 프랑스 최고 요리비평가의 인정을 받는다.
‘하면 된다’는 참으로 힘나는 말이었다. 과거시제를 쓰는 까닭은 지난 겨울에 나는 분명 있는 힘을 다했지만, 원한 대로 되지 못했던 쓸쓸한 기억 때문이다. 할 수 있다는 희망을 가지라는 말이 요즘 내겐 조금 약발이 떨어진 것 같다. 노력한다고 해서 누구나 다 꿈을 이룰 수 있는 것은 아니다. 세상은 그렇게 단순하지도 호락호락하지도 않다. 된다는 생각으로 간절히 원하고 결코 포기하지 않으면 그 꿈은 반드시 이루어진다고, 여전히 수많은 성공 지침서들은 이야기한다. 확실히 그런 책들은 읽고 난 후 얼마 동안은 정신을 무장하게 하는 약효가 있다. 하지만 그 효과가 영구적이지는 못해서 수시로 복용해 주어야만 한다. 나도 한때 앤서니 라빈스의 『네 안에 잠든 거인을 깨워라』를 읽고 무슨 보양식을 먹기라도 한 듯 의기충천하는 효과를 봤었다.
“결심하라, 바꾸어라”라고 라빈스는 말한다. 그리고 ‘하면 된다’의 증거로 자신의 경험을 이야기한다. 부엌이 없어 욕조에서 설거지를 해야 할 정도로 좁아터진 더러운 아파트에서, 평균 체중보다 20킬로그램이나 더 나가는 둔한 몸으로 시간을 때우며 살던 그는, 어느 날 삶을 바꿔야겠다고 결심한다. 그리고 정말로 그렇게 할 수 있는 힘이 자기 안에 있다는 것을 발견한다. 그는 단호히 살을 뺐고, 꿈에 그리던 여자의 마음을 사로잡았으며, 열심히 내달려서 일 년에 백만 달러가 넘는 수입을 올리게 되었다.
책 제목에서 거인을 언급한 탓인지 프란시스코 데 고야(Francisco de Goya, 1746~1828)가 그린 「거인」이라는 그림이 떠오른다. 이 그림 속 거인은 내 안에 있는 위대한 힘이라기보다는 차라리 분노가 커지다 못해 폭발해버린 ‘헐크’ 같은 느낌이 언뜻 들기도 한다. 하지만 누가 뭐래도 거인은 그곳에 새롭게 등장한 지배자임에 틀림없다. 주먹을 쥔 그의 손에서 단단한 결심이 감지된다. 오랜 잠에서 깨어난 그는 무력한 조무래기들을 다 몰아내고 마침내 세상을 완전히 바꾸어 놓을 것이다. 고야는 인간 세상에 도사리고 있는 불가해한 공포, 분노, 광기, 그리고 형언할 수 없는 괴력의 존재 같은 것을 종종 표현했던 스페인 출신의 낭만주의 화가이다. 여기서 주먹을 들어 자신의 강인한 의지를 보여주고 있는 거인은 어쩌면 혁명의 위력을 의인화한 것일 수도 있고, 아니면 반대로 사람들로 하여금 미친 듯이 도망치게 만드는 알 수 없는 불안의 요소를 거대하게 형상화한 것일 수도 있다.
결심과 불안은 동전의 양면이다. 내 안의 거인을 깨워 삶에 혁명을 일으켜야 하는데 왜 나는 그렇게 못하는지, 도대체 나에게 무슨 문제가 있는 건지 늘 불안한 것이다. 누구나 꿈을 성취할 수 있는 열린 사회에 살고 있는데도 말이다.
- 거인과 어울리는 무한한 공간에 서보기
세상이 평등해진 이래로 사람들의 불안은 더욱 커졌다고 한다. 자신이 최고가 되지 못하는 이유를 천한 신분을 가진 조상 탓이라든가, 기회가 균등하지 못한 사회구조 탓으로 무조건 돌려버릴 수 있었던 시절에 사람들은 그다지 초조해하지 않았다. 이런 문제를 처음으로 심각하게 지적한 사람은 프랑스의 법률가이자 역사가인 알렉시스 드 토크빌이다. 그는 1930년대의 미국을 돌아보면서 근대의 시민들은 중세의 중간 부류보다 훨씬 나은 생활을 하고 있지만, 감성적으로는 훨씬 궁핍하다는 사실을 알았다.
중세 사람들은 자신이 속한 사회적 신분 이외에 다른 가능성은 생각해본 적이 없기 때문에, 어느 누구도 주어진 생활에 의문을 품지 않았던 것이다. 그러나 평등해진 근대사회에서 기회는 무제한으로 열렸지만, 그렇다고 해서 모두가 좋은 직업을 갖는다거나 부자로 살 수 있는 것은 아니다. 평등한 우리는 스스로의 가능성에 대해 아주 많은 것을 기대하고, 기대한 만큼 상처받으며 산다. ‘하면 된다’의 세상에 살면서도 요것밖에 되지 못하는 것은 오로지 자신의 무능 탓이라는 자책이 사람들의 마음속에 자리잡게 된 것이다. 기회를 박탈당해서가 아니라 실제로 자신이 열등하다는 것을 수시로 인정해야 한다. 그러니 얼마나 비참한가.
비참함을 다독여주는 그림으로 「뤼겐의 백악 절벽」을 추천하고 싶다. 고야와 동시대에 활동한 독일의 낭만주의 화가 카스파르 다피드 프리드리히(Caspar David Friedrich, 1774~1840)가 그린 그림이다. 이 그림을 추천한 이유는 나와 동갑내기에 관심사도 상당히 비슷한 스위스 출신의 에세이 작가 알랭 드 보통이 무한한 공간 앞에서 서서 자신을 개미처럼 작게 만드는 것은 불안에서 벗어날 수 있는 좋은 경험이라고 권했기 때문이다.
바다를 향한 절벽 위에서 세 명의 인물들은 각기 다른 태도로 자연과 만나고 있다. 화면 왼쪽에, 나무 그루터기 옆에 앉아 있는 붉은 옷의 여인은 바짝 마른 나무줄기를 움켜쥔 채 절벽 끝에 자라난 붉은 꽃들을 바라보고 있는 것 같다. 중앙에는 모자를 벗어 땅에 내려놓은 남자가 앞으로 쓰러지듯 몸을 구부리면서 바로 눈앞의 땅바닥을 샅샅이 살펴보고 있다. 그런가 하면 오른쪽에서는 한 젊은이가 팔짱을 끼고 서서 경계를 알 수 없는 먼 바다와 하늘에 시선을 던지고 있다.
이 세 사람을 삶의 태도와 관련하여 다양한 의미로 해석할 수 있을 것이다. 붉은 옷의 여인은 삶에 대한 열정을, 모자를 벗은 남자는 운명에 대한 겸허함을, 그리고 팔짱을 낀 남자는 어떤 초월적인 가치관을 암시하는지도 모른다. 다른 시각으로 보자면, 이 그림은 각각의 인간이 지닌 능력의 차이를 말하는 것일 수도 있다. 어떤 사람은 평생 몇 미터 앞의 꽃만 쫓을 운명이고, 또 어떤 사람은 한 치 앞밖에 볼 수 없는 작은 그릇으로 태어났는가 하면, 남들보다 훨씬 넓은 비전을 갖고 살아가는 사람도 있다.
하지만 광활하게 펼쳐진 무한한 풍경에 비추어보면 이들의 차이는 아무것도 아닌 듯 여겨진다. 끝없는 자연의 공간 속에서 나 하나는 잘 보이지도 않는 한 개의 점에 불과할지도 모른다. 나뿐 아니라 내 주변에서 대단하다고 여겨지는 사람들도 모두가 한 점 이상이 되기는 어렵다. 미친 듯이 더 미친 듯이 먼저 깨어 밤낮으로 최선을 다하고 있는 지친 거인에게 자꾸만 채찍질을 해대는 대신, 무한한 대지라든가 바다와 같은 진짜로 거인에게 어울리는 공간에 서 보면 어떨까. 그 공간은 비단 자연만이 아니라 절대적 존재라고 해도 괜찮을 것 같다. 아등바등하는 우리끼리 바라보면 크고 작음이 드러나서 서로 고통스러울 뿐이지만 거인의 시선으로 바라보면 인간세상은 너나 할 것 없이 비슷비슷한, 정말로 평등한 곳일지도 모른다.
무한한 우주 속에 서서 사람 사는 일이란 뭐 그리 대단할 바 없다고 포기하듯 인정하고 나면, 역설적이게도 삶의 희망이 그저 스쳐 지나가는 작은 실수처럼 대할 수 있는 여유가 생기기 때문이다. 하면 된다는 억지스런 자기최면이 좀체 약효가 없을 땐, 광활한 공간 앞에 서보라. 당신 안의 거인이 ‘야호’하고 심호흡을 할 수 있도록.
여름
시간 앞에서 허둥대는 당신에게
나는 정각 오전 11시에 태어난 모양이다. 누렇게 바랜 병원 아기 수첩에 간호사의 글씨로 그렇게 쓰여 있다. 오전 11시는 사주와 궁합을 볼 때 조금 문제시 되는 시간이다. 자, 축, 인, 묘, 진, 사… 이렇게 따져볼 때 사시는 오전 9시부터 11시 사이, 오시는 11시부터 오후 1시 사이를 뜻하는데, 11시는 정확하게 사시와 오시의 경계에 있는 시간이기 때문이다. 약혼할 때 사주단자를 써 보내면서 그 시간 때문에 어머니와 진지하게 고민했었다. “잘 생각해보세요, 엄마가 나를 낳던 방에 혹시 시계 없었어요?” 어머니는 시계를 본 기억이 없다고 답하셨다. “그럼, 간호사가 아이를 받고 나서 시계를 보니 그게 11시였을까요, 아니면, 11시가 조금 넘어 있었기 때문에 아이가 나온 것은 11시였을 것이라고 추정해서 기록한 것일까요.” 우리는 마치 셜록 홈즈와 왓슨 박사가 사건을 캐들어가듯 따져보았다.
그래도 해결이 나지 않자 다소 엉뚱한 면이 있는 우리 모녀는 용하다는 어느 역술인을 찾아갔다. 내가 사시에 태어난 사람 같은지, 오시에 태어난 사람 같은지 물어보기로 한 것이다. 그때 역술인의 대답 역시 참으로 오묘하기 짝이 없었다. 그가 이르기를, 나는 근본적으로 글을 가까이 하는 운세를 타고 났는데 만일 내가 사시에 태어났다면 분석적인 성향이 있어 학자의 길을 가고 있을 것이고, 오시에 태어났다면 창조적인 성향이 있어 작가의 길을 가리라는 것이다. 어머니는 곰곰이 생각하시다 ‘사시가 맞는 것 같네’ 하셨다. 당시 딸이 학자가 되길 은근히 바라셨던 모양이다.
- 시간은 시간일 뿐이다
왠지 시계라는 모티프는 가장 생생하게 ‘바로 지금’을 가리키는 것 같으면서도, 또 어느 한편으로는 시간을 초월해 높은 곳에서 우리를 지켜보는 어떤 존재 같기도 하다. 이탈리아의 형이상학파 화가였던 조르지오 데 키리코(Giorgio de Chirico, 1888~1978)의 작품을 보면 더더욱 시계가 무슨 초시간적인 생명력을 가지고 있다는 느낌에 사로잡힌다. 그의 작품 「시간의 수수께끼」에서는 시계가 태양처럼 아케이드 위에 떠 있다. 빛과 어둠이 강렬한 대조를 이루면서 건물 아래쪽으로 띄엄띄엄 떨어져 있는 사람이 둘 보인다. 흰 옷을 입은 여인과 아케이드 안에 서 있는 잿빛 남자다. 어쩌면 이 그림은 현실이 아니라 희미한 기억 속의 한 장면일지도 모른다. ‘그래, 맞아, 거기에 시계가 있었어. 시계바늘은 3시 5분 전쯤 가리키고 있었지. 흰 옷을 입은 여자가 뒷모습을 보이면서 서 있었어. 그리고 한 남자가 아케이드를 지나가고 있었고, 이층에도 형체를 잘 알아볼 수는 없지만 누군가 내려다보고 있었던 것 같아…’
회상에 대해서라면 마르셀 프루스트의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가 떠오른다. 1909년 1월의 어느 눈 오는 저녁, 마르셀은 과자를 차에 찍어 먹다가 뭐라 형용하기 어려운 광휘와 행복감에 가득 찬 감정으로 벅차오른다. 이 감정에 집중하자 그동안 까맣게 드리워져 있었던 스크린이 싹 걷히고, 갑자기 행복했던 어린 시절 시골집에서 마들렌 과자를 홍차에 찍어먹던 때로 돌아가 있었다. 시간을 되찾는다는 것은 바로 그런 것이다. 과거와 현재의 간극을 완전히 초월하는 경이로운 경험이다. 늘 생각하지 않는다고 해서 완전히 잊혀진 것은 아니다.
그러나 오래도록 머무르고 있다고 해서 꼭 아름다운 기억이라고 할 수는 없다. 초현실주의자 살바도르 달리(Salvadore Dali, 1904~89)의 그림 「기억의 영속성」을 보자. 이 그림에도 시계가 여러 개 등장하는데, 이 시계들은 화가가 좋아하던 카망베르 치즈처럼 늘어져 흐느적거린다. 쉽사리 뇌리에서 떠나버리지 않는 미련들을 그렇게 표현한 것 같다. 탁자 위에 걸쳐진 시계 위에 앉은 파리는 너무 오래되어 신선함을 잃기 시작한 기억을 말하는 것이다. 그 옆의 펜던트 시계 위에는 파리 대신 개미들이 모여 있다. 어느 생물체 위로 삽시간에 몰려들어 새까맣게 덮쳐드는 소름끼치는 개미떼다. 이 개미떼는 인생의 시간을 갉아먹는 존재를 상징하는 것일까, 아니면 반대로 생의 즐거움을 갉아먹는 시간의 존재를 상징하는 것일까.
시간 앞에 인간은 언제나 정도를 벗어나 있다. 미치도록 바쁘거나 아니면 미치도록 지루하거나, 너무 일찍 왔거나 아니면 너무 늦게 왔거나 할 뿐이다. 어느 누구도 시간을 자기 것으로 다스리지 못하고, 그저 만인이 원하는 시간에 맞추느라 닦달해가면서 살고 있다. 사실 시간이란 실체가 없는, 그저 인간이 편의를 위해 만들어놓은 눈금에 불과한데도 말이다. 당신 집을 한번 살펴보라. 당신의 벽 시계는 혹시 우러러보이는 장소에 권위적으로 붙어 있지 않은지.
가을
커피 한 잔의 기적
“이 분은 작가이기도 해요” 하고 누가 나를 소개하는 것을 듣고 잠시 멈칫하며 낯설어 했다. 글을 쓰기는 하지만, 단 한 번도 나를 작가라고 생각한 적이 없었던 것 같다. 나 같이 평이하게 사는 사람이 글을 쓴다는 게 아직도 실감이 나지 않는다. 작가는 태생부터 무언가 다르고 창조적인 영감을 주는 환경에 노출된 자라고 생각했다. 나는 돌잔치 때 연필을 거머쥔 아기도 아니었고, 살아온 방식도 주변 환경도 내게 영감을 줄 만한 요소는 별로 없었던 것 같다. 특별히 신경써 개조하지도 않은 아파트라는 네모난 공간에 살고 있으며 찻잔을 제외한 나머지 그릇은 평범함의 극치인 코렐을 쓴다. 여유롭고 풍요로운 라이프스타일에 대해 쓰고 있지만 실제로는 시간 관리를 잘 못해서 산책도 자주 못하고, 하루 종일 공기가 부족한 실내에서 틈틈이 꾸벅꾸벅 졸다가 눈물이 맺히도록 하품만 한다. 물론 단 하나, 믿고 의지하는 구석이 있기는 하다. 내 멍한 정신을 확 개이게 해주는 그것, 바로 커피이다. 글 쓸 때 연달아 마시는 점으로 치자면, 적어도 그것 하나에서만큼은 나도 위대한 문인들과 닮은 셈이다.
- 당신의 정신을 깨우는 작은 힘
독일계 역사학자인 하인리히 야콥은 『커피의 역사』에서 커피로 인해 수많은 사람들이, 커피가 발견되기 이전 시대에는 극소수의 천재들에게나 가능했던 뛰어난 업적을 이룰 수 있게 되었다면서, “한 잔의 커피는 그야말로 기적”이라고 언급한 바 있다. 기적, 이건 내가 가장 좋아하는 단어이다. 대단한 능력을 가지지 못한 내가 무언가를 잘해내기 위해서는 반드시 기적을 불러 일으켜야 하기 때문이다. 특별히 오늘은 새벽 1시에 일어나서 커피를 연거푸 마시며 글자를 두드리기 시작했다. 어제 초저녁부터 곯아떨어진 덕에 남들 잠드는 시간에 눈을 뜬 것이다. 가만있자, 누구였더라. 그래, 맞다. 위대한 문인 발자크였구나. 늘 새벽 1시에 일어나 블랙커피를 마시며 글을 쓰기 시작했다지. 갑자기 발자크라도 된 듯 기분이 들뜬다.
발자크의 글쓰기 습관은 평생 한결같았던 것으로 유명하다. 새벽 1시에 일어나 커피를 마시면서 갈까마귀 깃털로 만든 펜대로 사각사각 쉬지 않고 내리 글을 썼다. 오전 7시가 되면 더운 물로 목욕을 한 후, 삶은 달걀과 커피로 요기를 하고 또다시 책상에 앉는다. 점심도 커피를 곁들여 책상에서 가볍게 해결하고는 글쓰기에 열중했다. 그가 책상에서 일어나는 시간은 정확히 저녁 6시였다. 그 시간에는 커피 대신 잠을 청하기 위해 와인을 한 잔 마시면서 제대로 된 저녁식사를 즐겼다. 저녁에 아는 사람들이 찾아와도 결코 그는 오래도록 이야기를 나누는 법이 없었다. 내일 새벽의 일정을 위해서 평소대로 일찍 잠자리에 들어야 했던 것이다. 그는 일 중독자에 가까웠다고 할 수 있다.
발자크의 모습을 가장 실감나게 표현한 조각가는 오귀스트 로댕(Auguste Rodin, 1840~1917)일 것이다. 파리 시 당국으로부터 발자크 기념동상을 의뢰받은 로댕은 여러 사람들에게 들을 것을 바탕으로 발자크 생전의 모습을 눈앞에 그려보았다. 로댕은 발자크가 막 잠에서 깨어 헝클어진 머리를 하고는 약간 한기를 느낀 듯 실내가운을 걸친 채 새벽을 여는 모습으로 동상을 제작하였다. 마침내 그 동상이 공개되었을 때 시 당국과 시민들은 발자크의 그런 모습을 보고 실망감에 주저앉고 말았다. 프랑스 최고의 천재 문인상이 어마어마한 재능으로 번쩍번쩍 광채를 내며 그곳에 서 있으리라고 기대했던 사람들은 그렇게 땅딸하고 이상한 옷을 걸친 초라한 모습이 차마 발자크일 거라고는 상상조차 하지 못했던 것이다. 그러나 오랜 시간이 흐른 후에 발자크 연구가들은 로댕의 동상이야말로 가장 발자크다운 모습이라고 재평가했다. “그는 3만 잔의 커피로 살았고 또 죽었노라”라고 새겨진 발자크의 묘비문은 장난처럼 들리긴 하지만, 발자크하면 커피를 떠올리지 않을 수 없게끔 만든다.
발자크가 새벽마다 마시던 커피는 아침의 음료이자 각성의 음료이다. 유럽에 처음 커피가 소개된 17세기 무렵의 유럽인들은 수시로 알코올 성분이 있는 음료를 마시고 있었다. 그냥 믿고 마실 수 있는 물을 구하기 어려웠던 까닭이었다. 당시 독일과 영국의 가정에서는 아이들도 물 대신 낮은 알코올 도수의 맥주를 마시게 했다. 그런가 하면 냄비에 맥주를 넣고 끓인 뒤 달걀을 풀고 빵을 잘라 넣어 소금으로 간을 한 네덜란드 식 맥주수프도 아침에 만들어 먹기도 했다. 그러니 식사 때마다 마시는 와인과 틈틈이 마시는 맥주로 인해 사람들은 늘 졸린 듯 취해 있었고 감각도 무딜 수밖에 없었다. 이런 사람들에게 커피의 등장은 기적이었다.
커피를 마신다는 것은 두뇌가 ‘깨어 있는’ 진보적인 인간으로 다시 태어나는 것을 의미했다. 커피가 보급되자마자 커피하우스가 곳곳에 생겨났고, 그 인기는 대단했다. 술집에서 시끄럽게 웃고 떠들기만 했던 사람들이 이곳에 와서는 제대로 된 논리적인 대화를 나누기 시작했다. 커피하우스는 제2의 캠퍼스라고 불릴 만큼 토론과 지적인 대화가 오가는 장이 되었다. 이렇듯 ‘대화’를 양성하는 커피하우스가 글의 문체에 끼친 영향은 획기적인 것이었다. 무겁고 장황한 셰익스피어 식의 문체는 사라지고 점차 대중적이고 경쾌한 대화로 바뀌면서, 자연스럽게 구어체 문학이 발전하게 되었다. 누구라도 글을 쓸 수 있다는 생각이 만연하게 된 것도 알고 보면 이 시기 커피하우스 덕분이다.
커피의 효능에 대한 연구도 활발해졌다. 커피를 소개하는 17세기의 의학 책자에 따르면, “커피는 풍기(風氣)를 낫게 하고, 간과 담즙을 강화시키며, 수종(水腫)을 완화시키고, 피를 맑게 하며, 위를 안정시키고….” 여기까지는 별 무리 없이 이해할 수 없지만 그 다음 말은 무척 양가적이다. “…식욕을 돋우지만 떨어뜨릴 수도 있고, 졸리지 않게 해주지만 수면을 촉진시키기도 한다. 우울한 사람에게는 활기를 불어넣어주고, 흥분하기 쉬운 사람에게는 진정의 효과가 있다…. 한 마디로 커피는 어디를 낫게 한다기보다는 몸이 한쪽으로 치우치지 않도록 균형을 잡아주고 심성을 조화롭게 해주는 데 특효가 있다는 이야기다. 아마도 당시 사람들에게 커피는 만병통치약쯤으로 보인 모양이다.
17세기 커피하우스에서 공적인 대화를 여는 매개체로 선보였던 커피는 18세기를 거치면서 각 가정의 아침과 오후를 시작하는 음료로서, 즉 사적인 대화의 매개체로 자리 잡아 갔다. 프랑스에서는 커다란 그릇에 따뜻한 우유와 커피를 섞은 카페오레를 개발해 바게트와 함께 먹는 가정용 아침음료로 변모시켰다.
어느 날씨 좋은 가을날 호수공원으로 소풍 온 친구들 사이에도 커피는 예외 없이 등장한다. 영국과 프랑스를 오가며 작업 활동을 펼쳤던 제이스 티소가 외광 아래 그린 「휴일」을 보라. 친구들이 야외에서 편안하게 오후의 커피타임을 벌이고 있다. 달콤한 과일파이와 파운드케이크 같은 것이 커피와 함께 곁들여져 있는 것도 눈에 띈다. 줄무늬 옷 색깔마저도 블랙거피와 밀크를 연상시키며, 서로가 서로를 풍부하게 하고 조화롭게 하는 자리처럼 보인다.
오늘도 많은 사람들이 커피를 옆에 두고, 혹은 사이에 두고 앉아 있다. 커피 향과 더불어 책에 몰두하고 있는 사람들도 있고, 발자크처럼 창작에 심취한 사람도 있을 것이다. 커피는 그들 모두에게 기적의 처방을 내려줄 것이다. 대화가 없는 심심한 연인에게는 우유거품 같은 풍성함을, 졸린 독서가에게는 쓰디 쓴 일깨움을, 머릿속이 지쳐버린 작가에게는 진하고 강렬한 아이디어를 선사해줄 것이다.
겨울
잡담의 가치
꽃게를 삶아 상에 가득 쌓아놓고, 그믐달 아래서 술을 한 잔씩 먹는 풍성한 자리에 운 좋게 한 자리를 차지하게 되었다. 미식가 예술인 한 분이 꽃게 철을 그냥 보내기가 아쉬워 노량진 수산시장에서 제일 팔팔하고 굵은 것으로 미리 한 상자 주문해놓았으니 저녁에 모이자는 연락을 돌리신 것이다. 늘 무슨 명목이 있어야 사람들을 만나던 나는 “오늘 무슨 좋은 일 있어요?”하고 물었다. 모임을 주최하신 분이 답하신다. “매일 매일이 축복이지.” 그렇구나.
모두들 퍼질러 앉아 게살을 파먹으며 이야기를 주고받았다. “그랬다던데.” “왜 그랬대?” “모르지 뭐.” 이야기는 인과관계도 없고 연결고리도 없이 싱겁게 이어진다. 말들은 하나의 요리로 만들어지지 않는 영 어울리지 않는 개별 재료들의 나열 같았다. 작가로서의 직업의식이 발동하여, 지금 여기 이 대화들을 잘 모아보면 무슨 제대로 된 이야기를 만들 수 있지 않을까 딴생각하다가 문득 무라카미 하루키가 소설 『회전목마의 데드 히트』에서 선보인 글쓰기 방식이 떠올랐다.
- 매일의 수다가 가치 없다 느껴질 때
이 책을 읽노라면 술자리에서 주고받는 잡담을 듣고 있는 착각이 인다. 하루키도 머리글에서 자신의 문체를 ‘스케치’ 단계라고 말하는데, 제과점으로 치자면 이 책은 빵으로 만들기 전, 밀가루 상태를 그대로 판매대에 진열해 놓은 셈이다. 이야기라고 하기엔 뭔가 부족하고 부자연스러운 점이 있는데, 그건 날 재료이기 때문일 것이다. 소설이란 아무리 실화를 바탕으로 한다 할지라도 재료들을 먹음직하고 소화하기 좋은 상태로 바꾸어 놓지, 날것 그대로를 나열하지는 않는다.
첫 번째 단편을 예로 들어 보자. 십대의 딸을 둔, 평범한 삶을 살던 한 여인이 어느 날 독일로 여행을 갔단다. 그곳에서 남편을 위한 ‘레더호젠(독일식 반바지)’을 맞추기 위해 남편과 비슷한 체형의 낯선 남자에게 어렵게 부탁을 하고 허락을 받아낸다. 그녀는 가봉한 옷을 입은 그 낯선 남자에게서 갑작스레 견딜 수 없는 혐오감을 느낀다. 자신도 도저히 납득할 수 없지만, 그 끔찍한 감정을 참을 수 없어 집에 있는 남편에게 전화로 이혼을 통보해버렸단다. 이게 이야기의 전부이다. 일반 소설이라면 그녀의 어린 시절을 들추어낸다든지, 어떤 사건을 복선으로 내비친다든지 하는 방식으로 부지런히 개연성을 만들었을 것이다. 하지만 하루키는 그런 작업을 전혀 하지 않는다.
제목을 ‘회전목마의 데드 히트’ 라고 해놓은 것은 의미심장하다. 화려한 불이 켜진 놀이동산의 회전목마(merry-go-round)처럼 겉으로 보기에는 더할 나위 없이 행복하고 순탄하게 돌아가는 일상이 정작 당사자에게는 이유 모를 슬픔과 괴로움을 안겨주는 틀이라는 의미를 담고 있기 때문이다. 데드 히트(dead-hit)란 맘대로 빠져나올 수도 없고 앞의 사람을 따라잡을 수도 없는, 그야말로 아무 것도 할 수 없는 상황에서 어떻게든 행복해보려고 안간힘을 쓰면서, 우울함과 치열한 접전을 벌이는 과정을 말한다. 남편의 바지를 사러간 여인이 특별한 계기도 없이 이혼을 통보한 것은 혹시 이제 그만 회전목마로부터 뛰어내리려는 충동적인 시도가 아니었을까.
자코모 발라(Giacomo Balla, 1871~1958)가 그린 「밤의 월드 페어」에서는 1900년경의 회전목마를 볼 수 있다. 회전목마는 본래 기사가 말 위에서 창을 던지는 연습을 하기 위해 만들어졌는데, 1800년대를 전후로 해서는 귀족들의 가든파티용 놀이기구로 인기를 끌기 시작했고, 1900년대에 들어서 좀 더 대중적이 되었다. 신분과 관계없이 누구라도 하룻저녁 동화 속 왕자와 공주가 되어 말과 마차를 타고 꿈의 궁전으로 실어나르는 기구였던 것이다.
이탈리아 태생의 자코모 발라는 움직이는 대상을 화면에 담기 좋아한 화가였다. 스케치를 위해 한참을 회전목마 앞에 서 있던 화가는 한 바퀴, 두 바퀴, 세 바퀴가 돌아가는 동안 나타났던 사람을 보고 또 보고 계속해서 보게 된다. 이들은 움직이고는 있지만 어디론가 가는 중은 분명 아니었다. 후에 발라는 움직임을 통해 역동적 삶의 일면을 찾으려는 미래주의에 가담한다. 하지만 다른 미래주의자들과는 달리, 그는 움직임의 변화무쌍한 면모보다는 반복적인 리듬을 표현하는 데 주력한다. 회전목마 앞에 서 있던 그날의 경험 때문이었을까.
한편 바실리 칸딘스키(Vassily Kandinsky, 1866~1944)의 작품 「말 탄 연인」은 회전목마를 그린 것은 아니지만, 회전목마 안에서 느끼는 환상의 세계를 보여주는 것 같다. 「말 탄 연인」은 칸딘스키가 추상작업을 선보이기 이전에 인상주의 기법을 시도했음을 보여주는 미술사적으로 의미 있는 작품이면서, 한 남자로서의 삶으로 보자면 미술계의 가장 지적인 남자로 알려진 그가 젊고 재능 있는 여제자와 사랑에 빠져 있던 시절에 그린, 로맨스의 흔적이 흠씬 느껴지는 작품이기도 하다. 말을 탄 연인의 뒤쪽 저 멀리에 연인들이 곧 도착하게 될 반짝 삶의 진실도 어쩌면 밑도 끝도 없고 인과관계도 없는, 제대로 연결되지 못한 잡담들 속에 있는지도 모른다.
하루키를 초현실주의 계열의 소설가로 부르기도 하는데, 그 이유는 아마 낯선 재료들을 함께 붙여놓는 글쓰기 기법 때문일 것이다. 초현실주의 예술가 메레 오펜하임(Meret Oppenheim, 1913~85)이 만든 「오브제」를 보자. 어울리지 않는 재료들이 마주쳐 있다. 용도를 알 수 없는 이런 물건은 아무것도 아닌 것으로 취급되기 마련이다. 하지만 1930년대의 초현실주의자들은 그런 물건이야말로 현실의 논리를 넘어서서 오히려 훨씬 더 풍부한 진실을 담고 있을 거라 생각했다.
용도와 목적이 없는 행위들은 모두 잡일일 뿐이라고 생각된다. ‘그럴 듯한’ 이야기를 만들어가는 데 있어 별로 필요치 않은 군더더기처럼 여긴다. 하지만 진정한 삶의 보람과 만족감은 바로 이런 잡스러운 것들에서 나오는지도 모른다. 시간 낭비처럼 느껴지는 수다 속에서 기쁨 호르몬이 솟아나와 몸에 쌓이고, 목적 없는 몰두 속에 뇌는 생기를 얻는다. 오직 회전목마의 기둥만 꼭 붙잡고 있다고 해서 꿈꾸던 궁전에 도착할 수 있는 것은 아니다. 잡담과 잡학에서 모은 잡다한 소재들을 가지고 정말로 행복한 자기만의 궁전을 조금씩 지어나가야 할 것 같다. 그것만이 쳇바퀴 운명에서 벗어날 수 있는 유일한 통로이지 않을까.
(본 정보는 도서의 일부 내용으로만 구성되어 있으며, 보다 많은 정보와 지식은 반드시 책을 참조하셔야 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