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림에, 마음을 놓다

   
이주은
ǻ
앨리스
   
12800
2009�� 06��



■ 책 소개
백 마디 말보다 따뜻한 그림한 점의 위로! 

 


그림을 통한 새로운 치유법. 그림을 통해 내면의 상처를 스스로 또는 나와비슷한 상황에 처했던 이들의 감정을 공유함으로써 극복하는 새로운 치유법을 보여준다. 나의 마음이 담긴 그림은 나와 같은 경험을 한 타인이 되고,서로 깊은 공감대를 형성할 수 있다는 것. 게다가 이미지는 언어보다 무한하게 열려 있는 세계이다. 언어가 가진 은밀한 폭력성이 존재하지 않아힘들고 상처받은 마음을 마음껏 토로하고 치유받을 수 있다.


이 책은 인간이 겪는 삶의 고단함을 ‘사랑’, ‘관계’, ‘자아’의 세부분으로 나누어 설명하는데, 첫 부분, ‘사랑 파트’는 인간의 다양한 감정을 르네 마그리트의 그림 「인간의 조건 I」에 놓고 이야기하는 것으로시작한다. 그림 속 풍경이 창밖의 풍경인지, 캔버스 안의 그림인지 알 수 없지만, 보는 이에 따라 열려있는 창밖 풍경으로도, 닫혀 있는 캔버스안 그림으로도 보이는데, ‘명확하게 설명할 수 없는 인간의 감정’을 그림에 담아 명쾌하게 풀어준다. 두 번째 부분, ‘타인에게 말걸기’는타인과의 관계로 어려움을 겪고 있다면, 먼저 나의 마음을 열어 상대방을 이해하려 노력하고, 서로의 오해 지점을 용서하는 게 관계의 기본임을프랭크 딕시의 「고백」과 렘브란트의 「돌아온 탕아」를 통해 이야기한다. 세 번째 부분, ‘잃어버린 나를 찾아서’ 에서는 예전에 어떤 꿈을꾸었는지, 지금 서 있는 이곳은 어디인지 돌아볼 겨를 없이 바쁘게 살아온 나를 찾는 방법 열 가지를 담고 있다. 에드가 드가의 「기다림」속모녀처럼 희망도 없이 불안하게 미래를 기다리는 우리에게 저자는 조지 클라우센의 「들판의 작은 꽃」 속 소녀의 작은 행복을 보여준다.


■ 저자 이주은
서울대학교 언어학과를졸업한 뒤, 3년 동안 대기업에서 무난한 직장생활을 했다. 그러다 눈 깜짝할 사이에 흐른 시간 앞에서 진정 자신이 몰입할 수 있는 일이 무엇인지고민하게 되었고, 평소 이미지의 역사와 그 소통 방식에 매력을 느끼던 그녀는 미술사를 선택했다. 이후 미국으로 건너가 덴버대학교에서 「로제티의제인 모리스 초상에 관한 연구」로 서양미술사 석사 학위를, 돌아와 이화여자대학교에서 「빅토리안 회화의 인물상을 통해 본 근대 영국 사회의특성」으로 현대미술사 박사 학위를 받았다. 


『모던 유럽 아트』와 『1960년 이후의 현대미술』(공역)을 우리말로옮겼으며, 더 많은 사람들과 소통하고 싶어 아름다운 빅토리아 그림 속에 숨은 이야기를 『빅토리아의 비밀』에 담아내기도 했다. 삶이 막막할 때면그림을 가만히 들여다보며 치유의 길을 묻는다는 그녀에게, 미술작품은 연구해야 할 과제이면서 삶을 바라보는 창이기도 하다. 현재 대학에서 미술사를강의하며, 이화여대 박물관에서 학예연구원으로 일하고 있다. 


■ 차례
시작하며 - 정말 괜찮나요?
프롤로그 - 나는 언제나 네 편이야 


Part 1 사랑 - 사랑을 두드리다
사랑의 직물짜기 
사랑에 전부를 거는 당신 
사랑을 독점하고 싶은 당신 
오직 두 사람만 존재하는 사랑
배신에 대처하는 자세 
사랑의 기억과 추억 
타인의 사랑만이 구원일까 
나는 정말 너를 사랑한 걸까 
열정을 지나흐르는 사랑의 시간 
사랑하라, 솔직하고 단순하게 


Part 2 관계 - 타인에게 말걸기
관계의 기본, 이해하기 
상대를 지배하려드는 사람 
타인에게 무관심한 사람 
사랑에 중독된 사람 
고통스러운 상상,질투 
우연 같은 만남을 꿈꾸는 당신 
속이고 감추는 관계의 피곤함 
백 마디 말보다 따뜻한 타인의 감촉 
후회 없는그리움, 관계는 기억이다 


Part 3 자아 - 잃어버린 나를 찾아서
나를 찾아 길 위에 서다 
곤두박질하는 내 인생 
보장 없는 불투명한 미래 
겨울처럼 꽁꽁 얼어버린 삶
당신은 존재만으로 향기롭다 
지친 당신, 삶에 쉼표를 찍어라 
내려놓음, 행복한 퇴진 
당신은 자존심 강한 신데렐라이다
중독, 탈출과 감금 사이 
유한한 삶의 매력 


에필로그 - 행복의 모습 
Lost & Found





그림에, 마음을 놓다
 
Part 1 사랑 -사랑을 두드리다
사랑하라, 솔직하고 단순하게

밤늦게 잠은 안 오고 유선 방송 채널을 돌리다가 재방송하는 드라마를 보았다. 주인공 남녀는 서로 사랑하면서도 둘 다 끊임없이 자존심만을 내세우고 감정을 일일이 계산하느라 언제나 섭섭한 마음만 잔뜩 가슴에 품고 지낸다. ‘쯧쯧, 사랑만 하기에도 시간이 부족하건만.’

입이 심심하던 차에 문득 선물로 들어왔던 육포와 와인 세트가 생각났다. 육포를 먼저 꺼내놓고 잠깐 와인 잔과 따개를 찾으러 자리를 비운 사이에 육포가 사라져버렸다. 검은 것이 휘익 재빠르게 달아나는 것이 보인다. ‘이 녀석 루니구나.’ 육포 한 덩어리를 입에 물고 우리집 개 루니가 달아나는 중이었다. 주인이 허락하지 않은 음식은 탐내지 말라고 그토록 가르쳤는데. 달아나는 것을 보니 혼날 줄 알면서도 본능이 시켜서 저지른 모양이다. “음식 훔쳐 먹는 건 쥐나 하는 짓이야.” 훔친 음식 때문에 개로서의 정체성을 의심받게 된 루니는 이미 물고 온 육포를 먹지도 못하고 바닥에 내려놓은 채 눈치만 슬슬 본다. 나는 신문지 몽둥이로 개의 주둥이를 톡톡 때리면서 반성 좀 하라고 일러주었다. 고기만 보면 사족을 못 쓰는 단순한 녀석.


- 사회적 잣대로 재단한 욕망
장 시메옹 샤르댕(Jean Simeon Chardin, 1699~1779)의 그림 「뷔페」를 보면 먹을 것들을 앞에 두고 하염없이 쳐다보며 서 있는 개가 있다. 이 개도 틀림없이 루니처럼 테이블에 차려진 음식은 절대로 먹지 못하도록 훈련받았을 것이다. 그런 개에게 지금 커다란 유혹이 펼쳐져 있다. 특히 탐스러운 석화는 테이블 가장자리에 놓여 있어 앞발만 살짝 들어도 닿을 수가 있다. 개는 지금 갈등하며 망설이고 있다. ‘주인님이 먹지 말라고 했는데, 그래도 조금만 먹으면 안 될까.’ 그림을 잘 들여다보면, 석화 껍질로부터 굴을 떼어내 먹기 위한 칼이 접시 밑에 놓여 있다. 이것이 개에게는 강력한 금지의 의미이다.


칼뿐 아니라 음식과 잔이 테이블 위에 매우 불안정하게 배치되어 있다. 왼쪽 가장자리에 보이는 유리잔은 제대로 놓여 있지 않아서 곧 떨어져 깨어질 것 같고, 과일들은 장식을 위해 층층이 쌓여 있는데 잘못 건들면 곧 우르르 쏟아져버릴 것만 같다. 만일 개가 음식을 입으로 물어가기 위해 테이블에 앞발을 올려놓는다면, 바로 그 순간 칼은 바닥으로 떨어지고 유리잔은 깨어지고 과일들은 굴러 떨어질 것이다.


18세기 계몽주의 시대의 화가 샤르댕은 우화처럼 교훈이 숨어 있는 그림을 주로 그렸다. 정물들이 가지고 있는 숨은 상징성까지 심층적으로 해석하면, 그림의 내용은 단순히 개에 대한 이야기가 아니라 우리 인간에게 널리 전하는 훈계가 된다. 테이블 위에 놓여있는 음식과 물건은 서양에서는 전통적으로 성적 욕망과 관련된 상징물로 여겨져 왔다. 이를테면 싱그러운 과일들은 젊고 탐스러운 육체를 암시하며, 유리로 된 병과 잔은 육체의 순결을 말해준다. 그런가 하면 음식 중에서 조개류, 특히 껍질이 벌어져 있는 싱싱한 석화는 노골적인 유혹의 모습과 관련되어 있다. 개는 여기서 성적인 쾌락을 탐하고 있는 어리석은 인간을 대표하고 있다. 영원하지 못한 본능을 추구하고 있기 때문에 어리석다고 보는 것이다.


- 부끄럼 없이 본능에 충실하기
개는 물론 인간보다 본능에 충실하다. 샤르댕의 그림 속에서 개는 헛된 본능을 좇는 상징으로 나오지만, 개는 그런 본능적인 욕구 못지않게 인간과 함께 하려는 욕구 또한 강한 동물이다. 그 욕구에 솔직한 것이 또한 사람과 다른 점이다. 개를 키우는 사람이라면 누구나 네 발 달린 짐승이 인간을 어쩌면 이렇게 좋아할 수 있을까 하고 생각해보았을 것이다. 좋아하는 척하는 것이 아니라 진심으로 개는 인간을 좋아한다. 아무리 못난 인간이라도 개에게는 자기 주인이 가장 멋지고 훌륭한 사람이다.


동물을 주로 그렸던 영국의 화가 에드윈 랜드시어(Edwin Landseer, 1802~73)가 그린 「늙은 양치기의 상주」를 보면, 주인이 죽은 후에도 여전히 주인 곁을 떠날 줄 모르고 관 위에 머리를 올려놓은 채 그리워하는 개가 등장한다. 인간에 대한 개의 사랑이 느껴져서 마음이 찡해지는 그림이다. 인간과 개 사이에는 아주 오래된 억 겹의 인연이 얽혀 있는 것 같다. 인간의 아득히 먼 조상인 원시인이 동굴 생활을 하며 주변 맹수들의 위협으로부터 가까스로 스스로를 보호하며 살고 있을 무렵, 늑대 못지않게 무섭게 생긴 네 발 달린 짐승 하나가 인간에게 꼬리를 흔들며 다가온다고 상상해보라.


개는 인간 편이 되어서 다른 네 발 달린 짐승들을 물리쳐주고, 토끼와 꿩도 대신 잡아다가 인간 앞에 물어다 놓았다. 네 발 달린 짐승들 사이에서 개는 인간 편에 선 괴상한 변절자에 이단아였겠지만, 인간에게 개는 한없이 고마운 존재였을 것이다. 인간은 개들이 물어다준 사냥감을 요리해서 개와 함께 나누어 먹었고, 이렇게 해서 인간과 개와의 오랜 동반 관계가 성립하지 않았나 하는 생각이 든다. 수많은 복잡한 이해관계들을 가지고 있는 인간은 개와 함께 살기 위해 많은 규율을 만들고 개를 훈련시켜야 했다. 식탁 위의 음식은 먹지 말 것, 야생 습성을 버릴 것, 아무나 물지 말 것, 아무 곳에나 변을 보지 말 것 등등. 하지만 개는 인간을 여전히 단순한 방식으로 좋아한다. 개는 하루에도 수십 번 인간에게 반갑다는 인사를 하고 행복하다는 표현을 한다. 꼬리 흔드는 것만으로 부족한지 온 몸을 흔들면서 뛰어다니고, 너무 좋아서 벌러덩 드러눕기도 한다.


그런 개의 모습을 보고 있노라면 실컷 사랑을 표현하지 못하는 인간이 개보다 열등하다는 생각이 들기도 한다. ‘못난 것도 없는 내가 왜 매달려야 할까, 내 모든 것을 바쳐 사랑할 가치가 있는 사람일까, 내가 이렇게 좋아했는데 나를 떠나버리면 억울해서 어쩌지, 나 혼자 상처받으면 어쩌지.’ 이런 의심 때문에 사람들은 정작 사랑은 않고 후회만 할 뿐이다. 그때 더 사랑할 걸 하고.


개는 후회하지 않는다. 좋아하고 있다는 것을 분명하게 소통할 줄 아는 현명한 동물이기 때문이다. 또한 사랑은 준 것 만큼 되돌려 받지 않더라도 충분히 행복할 수 있다는 것을, 인간이 미처 깨닫지 못한 그 사실을 이미 알고 있는 동물이기도 하다. 다른 것은 몰라도 사랑만큼은 개처럼 해야 한다. 사랑하라. 개처럼 솔직하고 단순하게.


Part 2 관계 -타인에게 말걸기
백 마디 말보다 따뜻한 타인의 감촉

"딸도 둘이고 엄마도 둘인데, 모두 합치면 세 명입니다. 어떻게 된 걸까요?" 차 안에서 뒷좌석에 앉은 딸아이가 즉석 퀴즈를 낸다. 어머니, 나, 딸아이, 이렇게 세 명을 가리키는 문제이다. 셋이서 경주에 갔을 때의 일이다. 딸에게는 불국사와 첨성대를 보여주면서 모처럼 좋은 엄마 흉내를 내보고 싶었고, 어머니와는 오순도순 늙어가는 이야기라도 하면서 친구 같은 딸 노릇도 해보고 싶어서 떠난 여행이었다.

내가 고등학교 3학년 무렵 아버지가 하시던 사업이 위기를 맞았다. 어머니는 오랫동안 애착을 가지고 운영하던 보석점을 처분해 아버지 사업을 도와야 했다. 설상가상으로 아버지는 건강까지 나빠지셨다. 갑작스레 모든 일을 모두 떠맡으신 어머니는 내가 고등학교를 졸업하던 날에도 식이 다 끝난 뒤에야 오셨고, 교문 앞에서 기념사진 찍는 게 소원이라 하시던 나의 대학교 입학식에는 꽃샘추위 속에 두 시간이나 딸을 마냥 혼자 세워둔 채 결국은 나오지 못하셨다. 그 시기 나는 집안 상황을 충분히 이해했기 때문에 어머니가 세세하게 챙겨주지 않더라도 날카롭게 받아들이지 않았다. 그런데 서른이 훨씬 넘은 후에 뒤늦게 애정결핍 증상이 나타났다. 내게는 다시 못 올 일생에 단 한 번뿐인 소중한 순간들이었는데, 그 순간들을 어머니마저 지켜봐주지 않았다는 사실이 못내 서럽게 느껴진 것이다.


- 단절된 교류의 기억
어머니의 기억 속에서 나는 고등학교 3학년 어느 시점에서 성장이 멈추어버린 듯했다. 일 때문에 정신이 없으셔서 자식이 자라고 있다는 사실을 잊으신 것이다. 그동안 나에게는 묵묵히 많은 변화가 일어났다. 대학을 다니면서 말없이 장래를 고민했고, 뚜렷한 목표도 세우지 못한 채 경제적으로 독립해보겠다고 무작정 취직을 했다. 아버지의 죽음을 받아들여야 했고, 그리 좋지 않은 형편에서 다시 공부를 시작했으며, 결혼해서 나를 닮은 딸도 낳았다. 그리고 이제는 중년이 되었다. 하지만 그 오랜 시간 동안 어머니와는 나이 들어가는 것이 어떤 것인지에 대해 공감하는 대화를 한 번도 나누어본 적이 없었다.


어머니와 나처럼 대화가 통하지 않게 된 모녀를 그린 그림이 있다. 쉬잔 발라동(Suzanne Valadon, 1867~1938)의 「버려진 인형」이다. 발라동은 툴루즈 로트렉, 르누아르 등 당시 파리에서 이름을 떨치던 화가들의 누드모델로 생활하면서 곁눈으로 그림을 배운 화가이다. 그녀는 캔버스 앞에서 스스로 이런저런 포즈를 취해보던 풍부한 경험 덕분에 동작을 통해 인물의 미묘한 심리를 그려내는 데 능하게 되었다. 「버려진 인형」속에서 어머니와 딸은 언뜻 친밀한 듯 보이지만 자세히 보면 그렇지가 못하다.


어머니는 목욕을 막 마친 딸을 수건으로 닦아준다. 딸은 그런 어머니의 손길이 부담스러운지 한 손으로 슬쩍 엄마의 손길을 거부하듯 막으며 등을 돌린다. 발 밑으로는 인형이 버려져 있는데, 그 인형의 머리 위엔 딸이 한 것과 똑같은 리본이 달려 있다. 어머니에게 딸은 아직도 그저 이 인형처럼 자그마하고 어린 존재이다. 하지만 소녀는 더 이상 인형을 가지고 놀 나이가 아니다. 소녀에게는 언제부터인가 자기만의 세계가 생겼다. 그녀가 왼손에 들고 있는 손거울이 그것을 말해준다. 소녀는 거울을 통해 성숙해진 자신의 몸을 바라보고 있다. 거울 안의 세계는 타인의 눈으로는 바라볼 수 없는 그녀만의 세계인 것이다.


- 친밀한 촉감의 추억
경주로 가면서 나는 나만의 거울로 바라보았던 세계를 어머니에게 조금 열어 보여드리고 싶었다. 되돌릴 수 없는 시간들이지만 예전에 덜 받은 사랑에 대해서 위로받고 싶었고, 오늘이 되기까지 당신의 딸이 어떤 생각을 하며 살아왔는지도 이야기하고 싶었다. 어머니는 처음에는 열심히 들으시는 것 같았는데 어느새 손녀를 무릎에 눕히고 함께 스르르 잠이 드셨다. 두 사람이 잠든 모습이 너무나 평화롭고 잘 어울려서 한참을 바라보았다. 어머니의 삶에는 이제 내 어머니로서의 역할은 더 이상 남아 있지 않고, 손녀의 할머니로서의 역할만이 남아 있는 것이로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돌이켜보면 나 역시 그동안 어머니가 어떻게 세월을 한 겹 한 겹 맞이하고 계셨는지, 어떻게 늙음이라는 쓸쓸한 경험들을 삭이고 계셨는지 조금도 알아채지 못했다.


경주 톨게이트를 통과할 무렵, 나는 평소에 좋아하던 그림 하나를 머릿속에 떠올리고 있었다. 바로 인상주의자 메리 카사트(Mary Cassatt, 1844~1926)의 「목욕」이다. 「목욕」의 엄마와 아이는 서로 뗄 수 없는 관계임을 보여주듯 몸을 교차해 앉아 있다. 모녀는 서로의 손과 발이 맞닿은 곳에 시선을 맞추고 있다. 보는 곳이 같다는 것은 서로 마음이 하나로 통하고 있다는 증거이다. 아이와 어머니가 서로에게서 느끼는 포근한 유대감을 카사트 만큼 잘 표현한 화가를 본 적이 없다. 아이의 보드라운 살갗의 감촉과 향긋하고 그리운 엄마 냄새가 그림에서 물씬 배어나온다.


그림 속의 아이는 화가의 딸이 아닐까 상상할 수 있다. 하지만 실제로 카사트는 평생 독신으로 살았고 아이를 낳아본 적도 없다. 조카를 돌보기는 했지만 모성애를 가졌다기보다는 냄새나지 않고 깔끔하며 예쁜 아이만 좋아했다고 한다. 화가는 아이를 안아주었던 기억보다는 차라리 스스로가 엄마 품에 안겨 있었던 어린 시절을 떠올리면서 엄마와 아이를 그렸을 것이다.


나 역시 오래도록 잊고 있었던 어린 시절의 느낌들을 되살려보았다. 엄마가 머리카락을 만지작거리면 솔솔 졸음이 오던 나른한 그 느낌, 엄마가 머리를 감겨줄 때 간지럽게 머리 위로 물이 스며들던 그 느낌, 엄마가 배를 문질러 줄 때의 커다랗고 따스했던 손의 느낌……. 세상에 태어나는 첫 순간부터 어머니와 나누었던 교감은 언어가 아니라 바로 이런 느낌들로 이루어진 것임을 기억해냈다. 그 순간, 왠지 나누어야 할 것 같은 대화보다 내 몸에 닿던 그 느낌이 뭔가 더 풍성한 것을 건네주는 느낌이 들었다.


Part 3 자아 - 잃어버린 나를 찾아서
유한한 삶의 매력

부여에 갔다가 운 좋게도 궁남지에 수련이 가득 핀 모습을 본 적이 있다. 꽃 하나하나가 정세에 물들지 않은 선비처럼, 기품 있는 여인처럼 맑고 고고했다. 탁한 물에서 이렇게 맑은 꽃을 피우다니 그 높은 덕망의 경지를 존경하지 않을 수 없었다. 하지만 곧 꽃의 공덕이 꽃 자체에 있지 않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꽃의 고결함을 지켜주기 위해서 뿌리와 줄기 그리고 잎들이 말없이 더러움을 감당하고 있었다. 물에서 양분을 뽑아 깨끗한 것만 걸러내어 꽃으로 공급해주느라 그것들은 어쩌면 찌꺼기만 먹었는지도 모르는 일이었다. 이렇듯 다른 부분들을 모두 희생시키더라도 꽃만큼은 최고로 정결하고 향기로워야 할 만큼, 식물에게 꽃은 최상의 가치이자 존재 이유임에 틀림없다.


- 시간 앞에 선 우리의 삶은 무력하다
그렇게 인내하며 피워낸 꽃이건만 꽃은 허무하게도 금방 시들어버린다. 그런 이유로 꽃은 줄곧 인생무상을 의미해왔다. “헛되고 헛되며 모든 것이 헛되도다. 해 아래 모든 수고가 자기에게 무엇이 유익한고.” 성서 중 「전도서」의 일부이다. ‘해는 높이 떴다가도 원래 자리로 돌아가고, 바람은 그토록 약삭빠르게 불다가도 결국에는 불던 곳으로 돌아가며, 강물은 철철 넘쳐 바다로 흐를지라도 바다를 다 채우지는 못한다’고 「전도서」는 전한다. 인간이 제아무리 파란만장한 삶을 펼쳐본다 한들 세상은 새로울 것이 없고 세대는 그저 반복될 뿐이라는 것이다. 꽃 역시 아무리 어렵게 봉오리를 터뜨렸어도 곧 사라질 운명이기에 그 노력이 다 소용없는 듯 느껴진다.


17세기 네덜란드의 화가 윌렘 반 알스트(Willem van Aelst, 1627~83년 경)가 그린 「꽃 작품」을 소개한다. 꽃으로 유명한 나라답게 네덜란드에는 꽃을 그린 화가들이 많다. 꽃 그림은 주로 허무함과 관련된 상징물들과 함께 그려지곤 했다. 「꽃 작품」에서는 바로크 스타일의 검은 바탕 위로 조명을 받은 듯 선명한 색채의 꽃들이 두드러져 보인다. 꽃의 전성기임을 말해주듯 나비들이 앉았다. 그런데, 그림 안에 어떤 상징적인 물건이 우연을 가장한 채 슬그머니 놓여있다. 오른쪽에 있는 포켓용 시계이다. 시계는 시간의 흐름과 관련되어 있다. 여기서는 ‘이 아름다운 꽃들이 시간의 흐름에 얼마나 견딜 수 있을까’하는 안타까운 마음을 전하기 위해 그려진 것이다. 아름다움이란 시간 앞에 얼마나 무력한가.


생의 유한함에 대해 이야기하는 「전도서」는 성서 중 가장 조심스럽게 읽어야 하는 글로 알려져 있다. 자칫 생을 비관하는 염세주의라든가 무기력을 정당화하는 글로 해석될 우려가 있기 때문이다. 유한하다는 이유만으로 생이 헛되다고 할 수는 없다. 허무함이라는 단어는 꽃처럼 찬란해본 적이 있는 생에 대해서만 쓸 수 있다. 단 한 번도 피워보지 못한 생을 살았던 이가 삶이 허무하다 말할 수는 없다.


- 지더라도 피어나야 꽃이다
꾳에 얽힌 전설이나 신화를 보면 식물이 꽃을 피우기까지 얼마나 공을 들이며 기다리는지 짐작할 수 있다. 영국 왕립 아카데미의 원장을 지냈던 프레더릭 레이턴(Frederic Leighton, 1830~96)이 꽃과 관련된 그리스 신화를 소재로 그린 그림이 있다. 작품의 중앙에서 온 몸을 활짝 열어 하늘을 향하고 있는 여인이 바로 그림의 제목이기도 한 클뤼티에이다. 물의 요정인 클뤼티에는 태양신 아폴로를 짝사랑하여 늘 태양이 수면 위로 떴다가, 그 너머로 사라질 때까지 이렇게 고개를 뒤로 젖힌 자세로 꼼짝하지 않고 태양을 바라보았다. 하지만 물의 요정인 그녀의 몸은 태양빛에 견디기 어려웠다. 특히 태양이 하늘에 떠있는 동안 물 박으로 나오면 수분이 모두 말라버려 생명이 위험할 정도였다.


클뤼티에의 유일한 소원은 아폴로가 단 한 번만이라도 자신에게 눈길을 주는 것이었다. 그러나 그 소원이 이루어지기도 전에 그녀는 양 손을 벌리고 얼굴은 위로 향한 채 말라 죽고 말았다. 그녀의 몸은 수증기처럼 하늘로 퍼져 올라갔고, 죽은 자리에는 해바라기가 피어났다고 한다. 언뜻 듣기에 사랑을 얻지 못한 슬픈 짝사랑의 이야기로 들리지만, 짝사랑 정도에서 끝나는 이야기는 아니다. 이는 한 식물이 자신의 존재를 세상에 알리고자 고통과 외로움을 참고 견뎌냈으며, 장하게도 마침내 꽃으로 피워낸 기적의 이야기인 것이다.

(본 정보는 도서의 일부 내용으로만 구성되어 있으며, 보다 많은 정보와 지식은 반드시 책을 참조하셔야 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