재즈, 매혹과 열정의 연대기

   
스터즈 터클(역자: 이정득)
ǻ
이매진
   
10000
2006�� 11��



■ 책 소개
루이 암스트롱부터 빌리 홀리데이까지, 인터뷰를 통해 재구성한거장들의 생애와 재즈의 역사 이야기. 조 올리버, 루이 암스트롱, 베시 스미스, 빅스 바이더벡, 패츠 월러, 듀크 엘링턴, 베니 굿맨, 카운트베이시, 빌리 홀리데이, 우디 허먼, 디지 길레스피, 찰리 파커, 존 콜트레인과 같은 재즈 뮤지션들의 삶과 음악을 주인공의 목소리로 직접들어보면서, 미국 재즈의 역사 뒤에 숨겨진 미국의 역사를 엿보는 즐거움도 맛볼 수 있다.

 


삽화로 담아낸 13명의 초상 속에 재즈 뮤지션으로 산 각자의 삶과 재즈의 역사가 한데 녹아들어 있으며, 루이암스트롱부터 빌리 홀리데이까지 직접 인터뷰하여, 재즈를 만들어낸 거장들의 인간적인 면모를 들려준다.


■ 저자 스터즈 터클
1912년 미국 뉴욕에서 태어나 시카고대학에서 법학박사학위를 받았다. 졸업 후 법조계에 들어가는 대신 공공사업촉진청에서 추진한 작가 구술사 프로젝트에 참여했다. 주부 대상 라디오 연속극에 성우로일하고 뉴스와 스포츠 중계를 하는가 하면, 라디오 음악방송에 출연하거나 구성작가로 참여하기도 했다. 1952년부터 1997년까지 <스터즈터클 프로그램&&이라는 라디오 프로를 진행하면서 밥 딜런이나 레너드 번스타인 등 각계각층의 사람들을 인터뷰해 큰 인기를 끌었다. 이후 시카고역사박물관 특별 상주학자로 있으면서 구술사에 바탕해 미국 민중의 역사를 재구성하는 데 힘을 기울였다.


■ 역자 이정득 
대학에서 수학교육을 전공하고, 대학원에서 신문방송학을전공했다. 2006년 현재 전문 번역가로 활동 중이다.


■ 차례
감사의 말
일러두기


재즈의 제왕, 조 올리버
재즈의 친선대사, 루이 암스트롱
블루스의 여제, 베시 스미스
나팔을 든젊은이, 빅스 바이더벡
유쾌한 천재, 패츠 윌러
삶의 소리, 듀크 엘링턴
스윙의 제왕, 베니 굿맨
환희의 점프, 카운트베이시
신의 은총, 빌리 홀리데이
타고난 지도자, 우디 허먼
소리의 탐험가, 디지 길레스피
야드버드, 찰리파커
끝없는 탐구, 존 콜트레인
재즈, 만인의 음악


음반 목록




재즈, 매혹과 열정의 연대기


재즈의 친선대사, 루이 암스트롱(1901~1971)
1913년, 열세 살 남자아이는 새해를 축하하면서 38구경 리볼버를 공중에다 대고 쏘았다. 누굴 해칠 의도는 없었다. 그저 재미였다. 어른들이 이렇게 새해를 축하하는 모습을 봐왔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이런 행동은 위법이었다. 소년은 경찰서로 끌려가 흑인 부랑자 소년원에 보내졌다. 소년은 그곳에서 소년원 밴드 단원이 됐다. 처음엔 탬버린으로 시작했지만 곧 뷰글, 코넷을 다룰 수 있게 되었다. 소년은 기뻐서 깡충깡충 뛰었다. "코넷은 바로 조 올리버가 부는 악기예요! 제 꿈이 이뤄졌어요, 데이비스 선생님!" 선생님은 루이에게 열심히 연습하라고 일러줬다.


소년원 밴드는 야유회나 사교 클럽에 가서 연주를 했다. 모두가 루이의 연주에 감탄을 했다. 꼬마 루이는 낡고 빛바랜 동네의 자랑이자 기쁨이었다. 루이는 열네 살이 돼서야 소년원을 나와 가족의 품으로 돌아갔다. 그러나 소년원 밖의 삶은 결코 만만치 않았다. 1914년 뉴올리언스에는 재즈 뮤지션이 할 일거리가 넘쳐나긴 했지만 급료는 좋지 못했다. 루이는 두 가지 일을 했다. 오전 9시부터 오후 5시까지는 노새 한 마리로 석탄 수레를 끌었다. 밤에는 폰스에서 혼자 코넷을 불었다. 폰스는 동네에서 가장 거친 술집 중 하나였다. 승강이와 싸움이 그치지 않았지만 어린 코넷 연주자를 모두 좋아했다. 때로는 손님들이 찔러주는 팁이 급료보다 더 많았다.


이렇게 생계를 꾸리며 루이는 어디서든 연주하기 시작했다. 자기 느낌 그대로 연주를 하고 노래도 불렀다. 루이는 새로운 연주 스타일을 찾듯 새로운 창법을 찾는 일에도 애를 썼다. 점차 목소리도 코넷만큼이나 중요해졌다. 루이는 좀 쉰 듯한 아주 매력적인 바리톤 목소리를 개발해냈다. 감정이 한껏 녹아 있는 따스하면서도 유쾌한 목소리였다. 나팔에 영혼을 맡기며 즉흥 연주를 했던 것처럼 그는 목소리를 이용하기 시작했다. 가사에는 신경을 쓰지 않았다. 중요한 것은 느낌이었다.   


조 올리버는 루이에게 최고의 가르침을 준 사람이었다. 올리버는 루이에게 자신의 코넷을 주면서 루이를 자신의 양아들로 삼겠다고 했다. 시간이 흐른 후 파파 조(조 올리버)가 시카고에서 공연 요청을 받고 뉴올리언스를 떠났다. 시카고는 도시 전체가 재즈에 목말라 있었다. 수천 흑인들이 남부에서 시카고로 옮겨갔고, 또 계속 이주했다. 누가 파파 조를 대신해 키드 오리 밴드의 리드코넷 자리를 차지할까 모두가 궁금해했다. 그리고 그 자리는 루이에게 주어졌다. 루이에게 진짜 직업이 생긴 것이다. 어린 암스트롱은 즉시 성공을 거뒀다. 루이 암스트롱은 코넷 연주뿐만 아니라 재즈 자체를 한 차원 높은 수준으로 끌어올리고 있었다.


어느 날 루이에게 유람선 밴드의 제왕으로 불리는 페이트 머러블이 찾아왔다. 그는 루이에게 자신과 일하자고 제안했다. 루이는 머러블 밴드에서 그동안 미지의 세계였던 악보 독법을 익혔다. 오선지에 그려진 꼬리표와 막대기의 의미를 처음으로 깨달았다. 어느 날 전보 한 통이 날아들었다. 발신지는 시카고였다. “시카고 링컨 가든에서 함께 연주하자. 주급 30달러. 발신자 조 올리버.” 정말 꿈이 이뤄졌다! 드디어 파파 조와 나란히 연주를 하게 된 것이다. 루이는 시카고 행 기차에 몸을 실었다. 그것은 재즈 역사의 새 장이기도 했다.


시카고는 한 번도 들어본 적 없는 음악으로 가득했다. 당시 유명한 젊은 음악인들은 빅스 바이더벡, 먹시 스패니어, 베니 굿맨 등이었다. 밴드는 조와 루이스, 그리고 클라리넷에 자니 도즈, 드럼에 자니의 동생인 베이비, 그리고 피아노에 지적이고 매력적인 여성 릴 하딩이 있었다. 하딩은 1924년 루이 암스트롱의 아내가 된다.


어느덧 파파 조를 떠나야 할 순간이 찾아왔다. 1924년 플레처 스맥 헨더슨이 암스트롱을 청했다. 커다란 도전이었다. 헨더슨은 뛰어난 작곡자이자 편곡자로 당시 최고의 빅 밴드를 이끌고 있었다. 단원은 모두 자기 분야에서 최고 거장이었다. 루이는 헨더슨의 제안으로 코넷을 내려놓고 훨씬 소리가 좋은 트럼펫을 잡았다. 힘차고 따뜻한 연주였다. 과묵한 플레처 헨더슨과 단원들, 그리고 뉴욕 관중이 모두 환호와 갈채를 보내며 발을 굴렀다. 루이 암스트롱이 동부를 정복했다.


하지만 정작 본인은 시카고 생각에 외로움만 커갔다. 아내가 그리웠다. 그래서 루이는 윈디시티(시카고의 별칭)로 돌아갔다. 그때부터 4년 동안 루이는 인생에서 가장 풍부한 창조력을 발휘했다. 당시 시카고 재즈는 어떤 때보다 결실이 풍부했다. 그리고 루이는 시카고를 재즈의 메카로 만든 도화선이었다.


루이는 이 시기에 루이 암스트롱과 핫 파이브라는 이름으로 레코드를 몇 장 발매했다. 여기에는 오늘날까지 재즈 역사상 최고의 트럼펫 솔로로 인정받는 명곡이 여럿 담겨 있다. 하지만 이것은 시작에 불과했다. 1929년 암스트롱은 뉴욕으로 향했다. 들르는 곳마다 암스트롱은 유명인사가 되었다. 그는 1949년까지 본인의 개성이 잔뜩 밴 빅 밴드를 이끌었다. 그러나 창의력을 발휘한 재즈 실험은 결코 멈추지 않았다. 3부 형식이라는 참신한 대중음악 연주법도 만들었다.


1932년 여름, 루이가 런던에 입성했다. 청중들은 환호했다. 유럽 대륙도 마찬가지였다. 재즈의 제왕을 향한 존경의 환영이었다. 그러나 가장 감격적인 순간이 아직 남아 있었다. 1956년 봄, 서아프리카 골드코스트(지금의 가나)의 수도 아크라에 도착했을 때 현지인 수천 명이 소리치며 환호했다. 수세기 전 자신의 동족이 바로 그 해안가에서 납치돼 노예로 미국 땅에 이송됐다. 노예들은 신세계에서 새로운 음악, 재즈를 창조했다. 그리고 지금 1956년, 가장 출세한 자손이 재즈를 들고 조상 땅에 돌아왔다.


루이와 올스타스 밴드는 1968년 9월까지 세계를 순회했다. 여러 번 병원에 입원한 끝에 1971년 7월 6일, 루이는 뉴욕 주 롱아일랜드 코로나의 자택에서 잠자던 중 세상을 떠났다. 코넷과 트럼펫 즉흥 연주가 담긴 루이의 초기 녹음은 후대 재즈 뮤지션들에게 중요한 지침이 됐다. 루이는 모던 재즈의 튼실한 음악적 기초를 일궈냈다.   


블루스의 여제, 베시 스미스(1985?~1937)
베시 스미스는 테네시 주 채터누가에서 태어났다. 생년월일은 아무도 모른다. 1895년이라는 의견도 있고 1900년이라는 의견도 있다. 베시 본인도 생일을 몰랐다. 어린 시절은 가난 그 자체였다. 베시는 겨우 말을 배울 무렵부터 노래를 불렀는데, 베시의 낮은 콘트랄토(소프라노와 테너 사이의 성부, 알토와 같은 말) 목소리는 음색이 짙고 힘이 넘쳤다.


블루스에 대한 정의는 저마다 달랐다. "블루스는 가난한 사람의 심장병이다." "늘 원하지만 도무지 다가갈 수 없는 무엇, 그 모든 게 바로 블루스다." 블루스의 깊은 느낌은 서정적 가사가 반복되면서 더욱 짙어졌다. 대개 첫째 줄 가사와 둘째 줄 가사는 같고 넷째 줄에서 운율을 이뤘다. 멋들어지게 블루스를 부르는 베시는 동네의 자랑이었다.


베시가 스무 살 무렵일 때 래빗 풋 악극단이 베시의 동네를 찾아왔다. 블루스 가수 중에서도 가장 유명했던 악극단의 스타, 마 레이니가 베시에게 함께 떠나자고 설득했다. 선배 여가수는 이 도시 저 도시를 순회하면서 공연을 하러 다니는 동안 베시에게 섬세하고 신비한 블루스 창법을 틈틈이 가르쳤다. 그녀는 기교와 요령을 하나둘 배워갔다. 무엇보다 중요한 가르침은 영혼으로 노래하라는 것이었다.


베시는 프랭크 워커라는 매니저를 만나 뉴욕으로 향하고 Down Hearted Blues를 녹음하게 된다. 이 음반은 광고 하나 없이 출시됐지만 이내 히트했다. 애틀랜타, 멤피스, 버밍엄, 뉴올리언스 등 남부의 크고 작은 도시의 거의 모든 음반가게 앞은 베시의 블루스 음반을 사기 위해 몇 블록이나 줄을 선 흑인들로 장사진이었다. 자기네 정통 민요 가수의 노래를 음반으로 듣기는 난생 처음이었다. 마 레이니도 아직 음반은 없었다. 석탄은 못 사도 베시의 음반은 산다는 말이 있을 정도였다. 베시는 흑인들에게 마음 깊은 위로를 선사했다. 1923년 한 해에 2백만 장이 넘는 음반이 팔렸다.


1924년부터 1927년까지가 최고의 전성기였다. 1925년 초반 베시는 뉴욕 플레처 헨더슨 오케스트라의 신참 코넷 연주자가 취입하는 음반 작업에 참여했다. 앨범은 모두 아홉 장이었다. 이 젊은이의 이름은 루이 암스트롱이었다. 두 거물은 영감을 주고받고 즉흥 연주를 하며 새로운 창작에 몰두했지만 여전히 정통 블루스에 충실했다.


목소리가 작은 요즘 가수들과 달리 베시는 마이크가 필요없었다. 극장의 싸구려 맨 뒷자리 관객이나 카바레 무대에서 뚝 떨어진 바에서 술을 마시는 손님에게나 모두 나팔소리처럼 또렷하게 들렸다. 그러니 베시가 처음 마이크를 대변했을 때는 거의 재앙이 닥친 것이나 마찬가지였다. 베시는 스튜디오에서 어쩔 줄을 몰랐다. 녹음기사들이 새로 나온 카본 마이크를 설치하는 동안 안절부절 못하기도 했다.

 

베시는 유머가 넘치는 여자였다. 하지만 삶은 눈물로 얼룩졌다. 베시가 불렀던 느리고 슬픈 블루스는 주변 사람의 슬픔만이 아니라 자신의 슬픔이기도 했다. 어떠면 그래서 돈을 물 쓰듯 써버렸는지도 모른다. 경기가 좋던 1924년부터 1927년까지 일주일에 2천 달러를 꼬박꼬박 벌었지만 저축은 거의 없었다. 베시는 남에게 빈대나 붙어먹는 사람들의 손쉬운 공략대상이었다.


많은 돈도 화려한 갈채도 평생을 짊어진 마음의 짐을 가볍게 해주지는 못했다. 베시는 진을 마셨다. 한 번 마시면 큰 잔에 한가득 들이켰다. 그러면 베시는 난폭하게 변했다. 180센티미터에 95킬로그램의 여자는 욕을 해대고 싸움질을 일삼으며 떠나갈 듯 소리를 질렀다. 그녀는 어느 샌가 극장과 나이트클럽 주인의 골칫덩어리가 됐다.     


1920년대 후반 미국 사람들의 음악 취향이 미묘하게 변했다. 블루스 창법에서 솔직함과 진실함보다는 기교가 중시되기 시작했다. 베시는 자신의 위치가 위협받는다고 느낀 나머지 음악 스타일과 연주곡목에 변화를 꾀하려 필사적으로 노력했다. 그러면 대중의 사랑을 받으리라 생각했다. 하지만 매니저인 워커는 생각이 달랐다. 이런 의견 충돌 때문에 둘의 관계는 끝났다.


베시는 순식간에 내리막길로 접어들었다. 레코드 판매량도 곤두박질쳤다. 공연 계약금도 점점 줄었다. 그러나 씀씀이는 전보다 훨씬 커졌다. 아름다움과 힘이 넘쳤던 블루스의 여제는 품위와 위신을 너무도 빠르게 잃어갔다. 그러나 목소리는 원숙미가 더해갔다. 1933년 11월 저명한 재즈 비평가 존 해먼드가 프로듀서로 나섰던 베시의 마지막 앨범은, 한마디로 눈이 부셨다. 재기를 준비하던 베시 스미스는 미시시피 클락스테일 외곽에서 자동차 사고로 사망했다. 마흔둘이었을지도 모르고 서른일곱이었을지도 모른다. 정확한 나이는 중요하지 않다. 베시는 너무 일찍 죽었다.


컬럼비아 레코드사에서 녹음한 160여 곡의 노래가 남았다. 절반 이상이 블루스 명곡으로 꼽힌다. 수많은 뮤지션과 가수가 베시의 영향을 받았다. 최고의 재즈 가수 빌리 홀리데이든, 가장 위대한 가스펠 가수 마할리아 잭슨이든, 첫 번째 음악 선생님은 바로 베시였다. 모두 어린 시절 베시의 목소리를 들으며 가수의 꿈을 키웠던 것이다.  


스윙의 제왕, 베니 굿맨(1909~1986)
1937년 3월의 어느 날 아침 7시. 뉴욕의 패러마운트 극장 앞에는 십대 청소년들이 긴 행렬을 이루고 있었다. 이렇게 많은 젊은이들이 뉴욕 곳곳에서 모여든 이유는 바로 새로 떠오른 자신들의 우상, 베니 굿맨의 음악을 듣기 위해서였다. 사람들로 발 디딜 틈도 없는 극장은 말 그대로 열광의 도가니였다. 밴드가 무대에 등장하자 관객은 함성을 질렀다. 그날 패러마운트 극장의 유료 관객은 2만1천 명이었다. 신기록은 그것뿐만이 아니었다. 이날 극장 매점은 9백 달러 이상의 매상을 올렸다. 아직 경제 불황은 끝나지 않았지만 미국의 젊은이들은 흥겨운 음악을 받아 안을 준비가 돼 있었다. 바야흐로 스윙의 시대가 도래했다. 팬들의 만장일치로 베니 굿맨을 제왕으로 추대했다.


베니 굿맨이 어릴 때부터 음악을 한 이유는 아버지의 꿈 때문이었다. 아버지 데이비드 굿맨은 아들에게 재능이 있다는 것을 알고부터 비용이 얼마든 최고의 선생을 붙여주려 했다. 아버지는 시카고 심포니 오케스트라의 유명한 클라리넷 주자인 프란츠 쉡에게 베니의 개인 레슨을 부탁했다. 쉡은 친절했지만 완고했다. 어린 제자에게 음계를 가르치고 연습을 시켰을 뿐만 아니라 진짜 음악이 뭔지를 가르쳤다. "모차르트, 브람스, 하이든…. 이 양반들은 훌륭한 클라리넷 연주곡을 남기셨단다. 언제나 너도 이 천재들의 대작을 연주하게 될 거다."


선생님은 재즈를 쓰레기 음악이라고 폄하했지만 어린 베니는 그 흑인 음악에서 뭔가 울림을 느꼈다. 소년은 무엇보다 인기가 높은 클라리넷 연주자 테드 루이스에 매혹됐다. 1921년 어느 날 베니의 형 루는 베니를 데리고 센트럴 파크 시어터의 음악 감독을 만나러 갔다.

규 클라리넷 주자가 몸이 아파 대체 연주자를 뽑는 오디션이 진행 중이었다. 베니는 테드 루이스와 완전 판박이였다. 그는 일자리를 따냈다. 베니는 음악으로 돈을 벌 수 있다는 사실을 처음으로 알게 됐다. 클래식은 나중에라도 연주하면 됐다. 지금은 생활비가 중요했다. 초등학교를 다니는 동안 베니는 그때그때 멤버를 정해 연주하던 여러 시카고 밴드에서 일자리를 얻었다. "베니 굿맨의 연주를 들어봐. 아직 꼬맹이지만 연주는 거인 같다네." 뮤지션들 사이에는 이런 이야기가 퍼졌다.


1920년대 초반 시카고에서 베니 굿맨은 여러 재즈 뮤지션들을 만나 이들의 연주기법을 하나씩 모두 빨아들이는 동시에 스승의 가르침을 잊지 않으며 자기만의 스타일을 만들어갔다. 흐르듯 부드럽고 자유로우며 기품이 있었다. 그런 2년 동안 대학교 댄스 파티에서 가장 환영받는 연주자로 떠오른 베니는 일주일에 1백 달러 정도를 벌었다. 낮에는 해리슨 고등학교 학생으로, 밤에는 재즈 연주자로 사는 일은 십대 청소년에게 쉬운 일이 아니었다.


1926년 시카고의 베테랑 드러머 벤 폴락은 자기네 빅 밴드에 들어오라며 열일곱 살의 베니를 캘리포니아 주 베니스로 불렀다. 멤버 모두 솔로 연주자로서 재능이 대단했다. 베니의 기예는 무르익어갔다. 베니는 재즈 뮤지션으로 확고한 자리를 잡았다. 가족은 그를 자랑스러워했다. 특히 아버지는 더했다. 그러던 어느 날 불행이 찾아들었다. 1926년 12월, 베니의 아버지가 교통사고로 숨졌다. 베니에게는 감당하기 힘든 충격이었다. 그는 폴락의 밴드를 그만뒀다.


베니는 프리랜서 음악가로 승부를 걸어보리라 마음먹었지만 그때는 불황이 막 시작될 무렵이었다. 수년 동안 베니는 힘든 시간을 보냈다. 그러던 중 혈기왕성한 젊은 재즈 비평가 존 해먼드를 만나 1934년 베니 굿맨 밴드를 결성하게 된다. 당시 굿맨 밴드에는 드러머 진 크루파, 피아노 제스 스테이시, 트럼펫 버니 베리건이 합류했다. 베니는 편곡자로 플레처 헨더슨을 들였다. 가장 중요한 결정이었다. 그들에게 음악은 삶 그 자체였지만 초창기는 좌절의 연속이었다.


1935년 운명의 투어가 시작됐다. 관객이 보인 반응은 그저 그랬다. 여행지를 서쪽으로 옮길수록 반응은 더욱 나빠졌다. 멤버들의 사기도 땅에 떨어졌고, 덴버 공연은 최악이었다. 모두 내키지 않는 발걸음을 LA 팔로마 볼룸으로 옮기며, 밴드가 해체되면 무엇을 해야 하나 고민했다. "오늘이 마지막 공연이야." 베니가 애처로운 목소리로 말했다. 공연장은 서서히 꽉 찼다. 베니 굿맨의 명성을 익히 잘 아는 웨스트코스트의 뮤지션들이 상당수였다. 밴드 멤버들은 모두 같은 생각이었다. "자, 해보는 거야. 더 잃을 게 뭐야?" 그날 밤 밴드는 어느 때보다도 훨씬 더 자유롭고 거리낌 없이 연주했다. Sugar Foot Stomp, Sometimes Im Happy 등 헨더슨 편곡 작품들 중에서 최고작들을 골랐다. 스테이시와 크루파와 베니의 솔로에 박수와 환호가 터져나왔다.


그날 밤은 진정한 시작이었다. 대중은 흥겹고 적극적으로 음악을 즐기고 싶어했다. 불황의 늪을 헤어나기 시작한 미국은 스윙을 받아들일 만반의 준비가 되어 있었다. 굿맨 밴드의 동부 귀환은 한마디로 금의환향이었다. 6주 예정이던 시카고 콩그레스 호텔 계약은 7개월로 연장됐다.


베니에게 1936년은 상업적 성공과 더불어 재즈적 실험을 풍성히 한 해였다. 이때 베니 굿맨 트리오가 등장했다. 섬세한 피아니스트 테디 윌슨과 베니, 그리고 크루파는 음반 몇 장을 녹음했고, 대중의 반응은 대단했다. 이때부터 트리오는 굿맨 밴드의 정규 레파토리가 되기 시작했다. 1936년 8월 정력적인 라이오넬 햄프턴이 가세하면서 트리오는 쿼텟(4인조 밴드)이 됐다. 이 작은 콤보 밴드는 예술적으로도 신선한 공기를 불어넣었을 뿐만 아니라 사회적으로도 중요한 의미를 가졌다. 윌슨과 햄프턴은 흑인이었다. 비공식적 합주를 제외하고 피부색이 다른 음악가들이 정식으로 한 그룹에서 연주하기는 그때가 처음이었다. 이렇게 흑백분리가 깨졌다.


굿맨 밴드가 어디서 공연을 하든 트리오와 쿼텟이 함께 했다. 밴드 안에 또 하나의 밴드가 있는 셈이었다. 그렇게 해서 두 가지 차원의 재즈, 즉 사람들을 흥분시키고 어깨를 들썩이게 만드는 신나는 풀 오케스트라 음악과 최상의 솔로 연주를 선보이는 소규모 콤보 밴드가 동시에 관객을 찾았다. 멤버의 면면은 자주 바뀌었지만 언제나 실력은 최고였다. 그들은 카네기홀에서 공연하는 영광을 누리기도 했다.


이런 성공에도 불구하고 베니는 안주하지 않았다. 그는 언제나 클래식을 갈망했다. 매일 음계 연습과 훈련을 게을리 하지 않았다. 베니는 1937년 부다페스트 스트링 쿼텟과 모차르트 클라리넷 5중주를 녹음했다. 1938년에는 함께 타운홀 콘서트 무대에도 섰다. 유명 재즈 뮤지션이 클래식 연주자로 인정받은 첫 사례였다.


1939년에는 스물한 살에 일렉트릭 기타 명인의 반열에 오른 크리스턴이 굿맨 밴드에 합류하면서 재즈의 새로운 유파인 비밥의 탄생을 도왔다. 이때 베니 굿맨 섹스텟(6인조 밴드)이 결성됐다. 베이스도 보태졌다. 비평가들은 이 콤보 밴드가 당대 최고의 앙상블이었다고 입을 모은다. 예술적으로나 상업적으로나 더할 수 없는 영광을 누리던 10년 세월이 흐른 뒤, 베니는 1944년 밴드를 해체했다. 은퇴한 예술가의 삶 또한 아주 좋았다. 1955년에는 베니의 영화가 영화로 만들어지면서 다시 한번 베니의 음악에 대한 관심이 일었다. 스윙의 시대는 끝났지만 스윙의 제왕은 영원하다.
 

신의 은총, 빌리 홀리데이
1927년, 열두 살이 된 빌리는 엄마를 따라 뉴욕으로 이사했다. 시절은 어려웠다. 엄마는 가정부 자리를 구하려 동분서주했지만 운이 따르질 않았다. 빌리는 예전처럼 청소 일을 하며 돈을 벌어야 할 상황이었다. 하지만 빌리는 노래를 부르고 싶었다. 열다섯 살이 된 빌리는 제리 프레스턴이 운영하는 로그 캐빈이라는 나이트 클럽에 갔다. 빌리가 Body and Soul을 불렀고 빌리의 목소리에 반한 사장 덕에 일을 할 수 있었다. 그날 빌리는 팁으로 18달러를 벌었다. 이날부터 빌리 모녀는 삼시 세 끼를 먹을 수 있게 됐다.


소문은 금세 인근 뮤지션들에게 퍼졌다. 노래를 아주 색다르게 부르는 아이가 있다. 단지 몸 동작이나 목소리의 기교가 아니었다. 정말로 섬세하게 악절을 넘어가는 빌리의 목소리는 미묘한 신비로 가득했다. 음절을 붙들고 템포를 늘어뜨리면서도 전체 박자를 놓치지 않았다. 음의 고저를 자연스레 연결하면서 새로운 음색을 더하는 독특한 창법이었다. 하지만 재즈 가수로 확고히 자리를 잡은 데에는 그것을 넘어서는 뭔가가 있었다. 빌리는 모든 노래를 가슴으로 불렀다.


그렇지만 길은 험난했다. 대중은 냉담했다. 그러나 점점 관객은 빌리의 독특함을 인정하기 시작했다. 시카고 나이트클럽에서 쫓겨난 지 7년 뒤, 빌리를 해고했던 그 업주가 뉴욕의 카페 소사이어티에서 빌리의 노래를 들었다. 왕족처럼 당당한 몸가짐의 레이디 빌리는 이미 스타였다.


빌리는 1930년에 베니 굿맨과 생애 최초로 레코드를 취입했다. 빌리의 열렬한 추종자였던 재즈 비평가인 존 해먼드가 빌리를 추천했다. 주옥 같은 빌리의 명반 중 몇 장은 1935년과 1939년 사이에 녹음됐다. 빌리는 컬럼비아에서 음반을 여러 장 내면서 느린 발라드뿐만 아니라 활기차고 템포가 빠른 곡도 아주 편안하게 소화한다는 사실을 증명했다. 드디어, 빌리 홀리데이는 성공했다. 독특한 재능을 온 세상이 인정했다.


하지만 삶의 소박한 행복은 언제나 달아나기만 하는 듯했다. 빌리는 마약에서 도피처를 찾았다. 1947년 빌리는 마약소지 혐의로 붙잡혀 수감되기도 했다. 1948년 7월과 8월, 타는 듯한 더위 속에서도 뉴욕 스트랜드 극장에서 빌리는 최다 관객 동원 기록을 세웠다. 빌리 홀리데이가 돌아온 것이다. 빌리 홀리데이는 여자로서 일산의 안온함을 한 번도 맛보지 못했지만, 가수 빌리 홀리데이는 언제나 편안했다. 노래를 부르면 온 세상이 집처럼 아늑했다. 빌리는 무대에 오를 때 언제나 치자꽃 한 송이를 머리에 꽂았다. 눈을 반쯤 감고 부드럽게 손가락을 퉁겨 소리를 냈다. 더없이 평온하게 나부끼듯 몸을 흔들며 노래를 불렀다. 말 그대로 귀부인 레이디 데이였다.


뼛속까지 지치고 영혼까지 상처입은 여인 빌리 홀리데이는 1959년 5월 31일 뉴욕의 메트로폴리탄 병원에 소용됐다. 자료에는 빌리가 마약과 벌인 지독한 싸움의 흔적이 남아 있다. 1959년 7월 17일 빌리는 세상을 떠났다. 고난으로 가득한 빌리의 삶과 몸부림이 그렇게 끝났다. 애달픈 울음도 더는 들리지 않았다.    


재즈, 만인의 음악
재즈는 다양하다. 아주 일부만 알려지고 나머지는 대부분 이름조차 갖지 못한다. 뮤지션들은 70년이 넘는 세월 동안 재즈를 연주하고 노래했다. 또 수백만의 사람들이 그 음악을 듣는다. 재즈는 가장 독창적인 미국 음악이다. 다른 나라들은 오페라, 교향곡, 협주곡, 소나타 등의 클래식 음악을 미국에게 주었다. 미국은 세계에 재즈를 선사했다.


재즈는 오랜 길을 걸어왔다. 20세기 길목의 초기 재즈는 원시적이었다. 제대로 훈련받은 재즈 뮤지션도 거의 없었다. 너무 가난해서 교육을 받을 형편이 안 됐다. 그래서 스스로 배우고 가르쳤다. 악보도 없이 연주를 했다. 그렇게 시간이 흐르고 젊은 뮤지션들이 재즈 세계에 등장하기 시작했다. 클래식을 전공한 사람이 다수였다. 이런 현상은 1940년대부터 두드러지기 시작한다. 이 뮤지션들이 재즈라는 새로운 음악을 연주하면서 좀더 발전되고 복잡한 형태를 띠었다.


하지만 재즈는 언제나 기쁨과 자유를 노래했으며 몸을 움직이게 했다. 그렇지 않으면 재즈가 될 리 만무했다. 진정한 재즈 뮤지션은 언제나 음악으로 자신의 감성을 표현한다. 그 감성은 때로 "핫"하기도 하고 "쿨"하기도 하다. 하지만 결코 무정한 차가움은 아니다.

?

재즈의 내력은 지금도 계속 이어진다. 새로운 뮤지션이 나타나 자신의 감성과 시대를 표현한다. 언제나 그래왔듯 말이다. 그 원천이 기억되는 한 재즈는 언제나 우리와 함께 한다.

(본 정보는 도서의 일부 내용으로만 구성되어 있으며, 보다 많은 정보와 지식은 반드시 책을 참조하셔야 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