진화의 역사 - 크로노스 총서 13
Evolution: The Remarkable History of A Scientific Theory
19세기 진화론의 이론적 발전에서부터 최근 신다윈주의와 사회생물학의 급성장 그리고 미국기독교의 반발과 대립에 이르기까지 정치, 사회, 문화, 종교 등 다양한 측면에서 진화론의 역사를 소개하는 책이다. 퓰리처상 수상자 에드워드 J.라슨은 이 책에서 진화론을 발전시킨 퀴비에, 라마르크, 다윈, 월리스, 헤켈, 갈톤, 헉슬리, 멘델, 모건, 피셔, 도브잔스키, 왓슨과 크리크,해밀턴, 윌슨 등과 같은 협력자이자 경쟁자, 과학자이자 탐험가들의 삶과 이력에 초점을 맞추어 그 논쟁의 기원을 밝히고자 하였다.
또한 진화론을 문화적인 관점에서 프랑스대혁명에 의한 사회적, 철학적 대변동에서부터다윈진화론의 핵심인 "적자생존"과 조화를 이룬 영국의 자유방임적 자본주의, 사회적 다윈진화론과 산업혁명의 배경에 대항하는 우생학의 출현, 유명한스콥스 재판Scopes trial에서 절정에 달한 미국 기독교의 진화론에 대한 반발을 다루고 있다.
■ 저자 에드워드J. 라슨Edward J. Larson
조지아대학교 역사학 및 법학 교수로 1998년 과학과 종교에 관한 논쟁의 역사를다룬 『신들을 위한 여름 Summer for the Gods』이라는 작품으로 역사 부문 퓰리처상을 수상한 바 있다. 최근에 집필한저서로는『진화론 워크숍 Evolution"s Workshop』이 있으며, 그가 쓴 몇몇 논문들은 「월간 대서양」 「네이처」 「네이션」「사이언티픽 아메리칸」 등의 저널에 실리기도 하였다.
■ 역자 이충
성균관대학교 화학공학과를 졸업하고 같은대학 대학원 화학공학과에서 석사학위를 받았다. 이후 국립환경연구원에서 연구원으로 활동하였으며, 현재 (주)엔터스코리아의 전속 번역가로 활동중이다. 옮긴 책으로는『의사들의 전쟁』 『C.S.I.』 『전염병 시대』 『티코와 케플러』 『뇌의 진화』 등이 있다.
■ 차례
Chapter 1. 시간의 한계를 무너뜨리다
Chapter 2 진보에 대한인식의 성장
Chapter 3 다윈설의 기원
Chapter 4 최고의 위치를 차지한 자연주의
Chapter 5 진화의 상승
Chapter 6 잃어버린 연결고리
Chapter 7 유전학의 등장
Chapter 8 응용된 인류 진화
Chapter 9 미국의 반진화설 운동
Chapter 10 현대 종합이론
Chapter 11 현대 문화전쟁
Chapter 12 포스트모더니즘의 발전
진화의 역사
Georges Cuvier(1769~1832)
시간의 한계를 무너뜨리다
조르주 퀴비에(G.Cuvier)는 고지식하고 자존심이 강한 사람으로 그 명성이 자자했다. 퀴비에는 현대 생물학의 기초를 쌓은 업적 때문에 자신을 자타가 공인하는 과학의 창시자 아리스토텔레스에 비유하는 것을 마다하지 않았다. 퀴비에 자신은 끝내 동의하지 않았지만, 퀴비에의 정밀한 실험 방법은 생물 진화에 대한 통찰력을 제공한 지구 생물 역사의 장을 여는 계기가 되었다. 1769년 뷔르템베르크의 프랑스-독일 독립 공국의 프랑스어권에서 살던 퀴비에는 어머니의 교육열 때문에 현대적인 학문 분야를 망라하는 자연사 개론을 공부하며 이 분야에 많은 열정을 가지게 되었다. 공국 정부에 자리가 없어 1788년부터 노르망디에 사는 프랑스 귀족 가문의 가정교사로 일했던 그는 부업으로 해양 무척추동물 연구에 빠졌다. 1793년 프랑스 정부가 고향 땅을 합병하고, 1795년 온건 공화정부가 중앙 과학계를 재건하기로 약속하자, 퀴비에는 과학 분야에서 경력을 쌓기 위해 수도인 파리로 옮겼다.
퀴비에는 동물의 내부 구조는 그 구조의 기능과 본질을 그대로 보여준다고 확신했다. 퀴비에는 멀리 러시아와 이집트 등 유럽 각지에서 살아있거나 오래 보존된 것이거나 화석화된 전리품이 있으면 본국으로 이송한 나폴레옹의 군대 덕분에 빠른 시일 애네 다양한 동물학적 유물을 확보하게 된, 세계 최상급의 자연사박물관에 소속된 자신의 지위를 이용해 많은 연구 혜택을 누렸다. 그는 “더욱 세분화된 분류는 단지 개체 발달 과정이거나 아니면 특정 부위가 추가됨으로써 피상적으로 수정된 것일 뿐 상기 기본 분류를 변화시키지는 못한다”는 글을 쓴 바 있다. 가장 단순한 생명체에서부터 최정상에 위치한 인간에 이르기까지 하나의 단계적인 사슬로 이뤄져 있다고 생각한 아리스토텔레스 이후 계속 이어져온 계층적인 개념은 그와 같은 퀴비에의 견해에 의해 산산조각이 났다. 또한 해부학적 분석을 토대로 견고하게 형성된 그의 주장은 현대 분류학에서 수정된 형태로 여전히 그 영향력을 행사하고 있다.
퀴비에 이전의 유럽 자연주의자들은 전통적으로 어떤 종도 멸종한 적이 없으며, 모든 종은 최초에 창조될 때부터 완벽했다고 생각했다. 화석은 단순히 실물의 변화된 형태이거나 아직까지도 살아 있는 종의 잔해이기 때문에 본질적인 중요성을 갖지 못했다. 퀴비에는 이런 생각을 바꾸기 위해 궁극적으로 화석화된 모든 동물은 현대의 종과 다르며, 현대의 종은 실제로 화석 형태로 존재하지 않는다고 결론을 내렸다. 그는 “시간의 한계를 무너뜨리고 일부 화석의 관찰을 통해 세계사와 인류 발생 이전의 일련의 사건을 밝혀낼 수 있는 힘”을 대담하게 요구했다. 퀴비에에게 있어 과학의 목표는 지구상에 존재하거나 존재했던 과거와 현재의 종을 구분하는 것이었으며, 그 자신도 어류와 포유류 연구를 목표로 최선을 다해 노력했다.
생물 진화(또는 종의 돌연변이)의 문제에 대해서는 단순히 퀴비에가 찰스 다윈이 쓴 『종의 기원』이 출판되기 전에 죽었기 때문에 한번도 생물 진화를 심각하게 고민하지 않았다는 것은 사실이 아니었다. 그는 비록 훗날 생물 진화에 대한 다윈의 주장을 옹호하는 차원은 아니었지만 생물 진화를 신중하게 연구했으며 생물 진화만으로는 불충분하다는 사실을 발견했다. 생물 진화에 대한 퀴비에의 결론은 종교적이고 사회적인 자신만의 신념 때문이었으므로 그런 그의 신념은 자연을 과학적으로 이해하는 토대가 됐다.
퀴비에에게는 생물 진화를 거부할 만한 뚜렷한 과학적 이유가 있었다. 그것은 보수적인 이유가 아니었다. 실제로는 그 반대이며 당대 가장 진보적인 과학, 퀴비에가 말하길 지질 연대의 전통적인 한계를 무너뜨리는 과학에 영향을 미쳤다. 퀴비에는 과학 연구와 비교해부학, 화석학과 같은 기초 학문 분야에서 발견한 사실들을 통해 진화는 불가능하다고 확신했다. 진화가 일어나기 위해서는 변화가 축적되어야 한다. 그러나 퀴비에는 자신의 연구 결과를 토대로 어떤 동물의 해부학적 관계는 정교하게 균형을 이루고 있기 때문에 어떤 부위 한 곳에 의미 있는 변화가 발생한다면 그 동물은 생존할 수가 없을 것이라는 결론을 내렸다.
퀴비에는 해부학적 주장에 화석학적 이유를 덧붙여 진화설에 반대했다. 그 당시 화석기록에 대해 퀴비에보다 더 해박한 사람은 없었다. 1800년 퀴비에는 다음 글을 쓴 바 있다. “누구든 평지를 파헤치거나 산맥 속에 있는 동굴을 뒤지거나 측면의 틈으로 가면 곳곳에서 유기체의 잔해를 발견할 수 있다. 바다에서 아주 멀리 떨어진 곳에서 거대한 조개껍질 더미가 발견되고 석탄 경계층에서는 매우 깊거나 높은 곳에 사는 식물의 흔적도 발견된다. 그러나 무엇보다 놀라운 사실은 그런 잔해들이 축적된 순서가 무질서하다는 점이다. 식물만 있는 층이 조개껍질층을 뒤덮고 있거나 물고기가 있는 층이 육상동물이 있는 층 위에 있고 그 위를 식물이나 조개가 뒤덮고 있다.”
퀴비에는 지질주상도를 통해 지반 융기 주기와 전세계적으로나 지역적으로 교대로 발생한 대홍수의 역사적 패턴을 제안했다. 퀴비에는 프랑스 합리주의 그늘 아래서 연구를 하면서 자신의 과학적 주장을 뒷받침하기 위해 성서의 권위를 빌리지 않았지만, 『기본 강연』에서 노아의 방주에 승선하지 못한 모든 생물을 익사시킨 것으로 추정되는 성서의 대홍수 이야기에 묘사된 날짜가 최후의 대홍수가 일어난 시기를 입증하는 지질학적 증거와 일치한다는 사실을 인정했다.
전설적인 퀴비에의 큰 머리는 인상적인 일화를 남겼다. 그는 종종 현장 사무실에 자신의 모자를 두고 다녔던 것 같다. 방문 과학자 가운데 일부는 위대한 과학자 퀴비에를 기다리면서 그 모자를 한번 써보고 싶은 유혹을 뿌리칠 수 없었다. 그러나 그 모자는 귀와 눈을 뒤덮을 정도로 컸다. 퀴비에의 과학적 사상이 자연사에 미친 영향이 이 모자와 흡사했다. 적어도 다윈이라는 과학자가 세상에 나오기 전까지만 해도 모든 것을 감싸안을 정도로 폭넓은 그의 사상은 대체 이론이 싹트는 것을 초기 단계에서부터 차단시켰다.
다윈설의 기원
1831년, 남태평양 섬들을 포함한 남미의 남쪽 해안선을 도표화할 목표로 2년간의 프로젝트 여정을 떠날 소형 영국 해군함 H.M.S 비글호의 닻이 올랐다. 이번 긴 여정에 참여하는 젊은 자연주의자 찰스 다윈에게는 경력을 쌓으며 종의 기원이라는 태풍의 중심으로 빠져들 5년간의 불운한 항해의 시작이었다. 좋은 집안에서 자란 자연주의자 다윈에게 처음 몇 일간의 여정은 거의 지옥이나 다름없었다. 다윈은 여정 3일째 일기장에 다음과 같이 썼다. “출발 전에 내가 맡은 모든 임무에 대해 자주 후회할 것이라거나 또는 후회해야 한다는 생각을 해본 적이 없다고 말하곤 했다.
Darwin(1809~1882)
나를 엄습한 이처럼 어둡고 우울한 생각이 내 마음을 혼란스럽게 만든 이 상황보다 더 참혹한 상황은 상상조차 할 수 없다”고 썼다.
당시 정부의 지원을 받아 과학적인 발견을 위해 탐험에 나서는 것은 일반적인 일이었다. 아직 공식적인 대학 과정이 없었기 때문에 19세기 최상의 자연주의자 가운데 많은 사람들이 대학, 자연사박물관, 여러 연구소에서 상임직에 앉기 전에 해외 과학 탐험 여행을 통해 경력을 쌓았다. 대학을 갓 졸업한 다윈은 미래가 불확실했지만 비글호를 타고 전세계를 누비는 과학 탐험 여행에 많은 흥미를 느꼈다. 출항 지연과 첫 주의 멀미로 다윈이 처음에 가졌던 열정은 식어갔지만 계획된 첫 번째 착륙지 스페인 남서쪽 그란카나리아(Gran Canaria)섬에 도달할 무렵 다윈은 자신만의 활기를 되찾았다. 그린카나리아에서 콜레라 검역을 위해 여정을 중단했고, 비글호는 열대 지역인 카보베르데 제도(Cabo Verde Islands) 남쪽까지 항해했다. 카보베르데 제도 가운데 가장 큰 섬인 세인트야고(St.Jago)에 정박하는 동안 다윈은 지질학에 대한 자신의 견해를 바꿨다.
세인트야고에 정박해 있는 동안 다윈은 이 섬의 특이한 화산 토양과 열대식물에 압도되었으며 일기장에 “시각 장애인이 개안한 것과 같은 영광스러운 날이었다”라고 썼다. 다윈은 산호 암초를 지속된 침전의 결과로 해석하고 갈라파고스 군도를 형성하고 있는 활화산을 목격함으로써 지속적인 자연의 힘이 심오한 영향을 미치고 있다는 증거를 자신의 주변에서 발견했다. 다윈은 비글호 탐험 초기, 카보베르데 제도에서 수행한 관찰을 통해 생물 진화에 관한 영감을 얻었고, 1837년 관찰 결과를 진화론적 측면에서 설명하는 체계를 잡아가기 시작했다.
그는 첫 번째 노트에 “화산섬들에 대한 생각이 떠올랐다. 그런 다음 특정한 식물들이 창조됐다. 그러나 새로운 창조는 인접 대륙의 영향을 받는다”라고 썼다. 다시 말해 새로 형성된 섬에 가장 가까운 곳에 서식하는 개별 동식물이 그 섬에 군체를 형성하고 그곳에서 부모 세대로부터 고립된 다음 그 섬의 환경에 적합하게 진화하면서 적절한 생태 지위를 차지해야 한다는 것이다. 다윈은 1838년 노트에 동일한 문제를 언급하며 수사학적으로 자문했다. “창조주가 대륙에서 멀리 떨어져 대양에 있는 섬에 인근 대륙과 동일한 형태의 새로운 종들을 창조했을까? 이 사실은 매우 의미심장하다. 내 이론은 이 질문에만 답하고 있다.” 창조주는 인근 대륙의 기후가 아니라 지역 환경에 맞는 종을 창조했을 것이라고 추론했다.
다윈이 생각한 개념이 큰 발전을 이룬 해는 인류 진화 사례를 고민하고 있던 1838년이었다. 대부분의 사람들이 돌연변이 문제에 관심을 가지고 있었고, 다윈도 인류 진화에 관한 문헌을 알고 있었다. 비글호 탐험 도중 우연히 티에라델푸에고 원주민을 만났을 때 이 문제에 직면했다. 다윈은 그들이 런던 동물원에 있는 유인원과 매우 비슷하다는 생각으로 돌아왔다. 다윈은 노트에 “언어 사용은 잊어버리고 단지 여러분이 보는 것만 가지고 판단하자. 푸에고 원주민과 오랑우탄을 비교한 다음 감히 차이가 크다고 말해보자”라고 적었다. 그는 동물에게도 있는 인간의 능력 가운데 하나로 “종종 언급되는 것처럼 사람이 사용하는 언어는 인간과 동물의 차별성이 매우 크다는 것을 입증한다. 그러나 너무 과대평가하지는 말자. 동물도 서로 의사소통을 하기 때문이다”라는 점을 지적했다.
다윈은 토머스 멜서스의 『인구론』을 탐독했다. 멜서스는 인간을 포함한 모든 종은 매우 높은 비율로 번식하며, 모두에게 돌아갈 만큼의 식량이 충분하지 않을 경우, 중대한 일반 자연법칙인 필요성은 이미 설정된 경계 안으로 종에게 제한을 가한다고 했다. 다윈은 이 원리를 모든 생명체로 확장하고 그 속에서 진화론적인 발전을 위한 자연적인 메커니즘을 발견했다. 그는 모든 종의 모든 개체는 자연적으로 다르다는 가정을 필두로 각 종 내부에서 생존경쟁은, 약한 개체는 제거하고 강한 개체 혹은 잘 적응한 개체는 남겨서 번식하도록 하고 이익이 되는 적응력은 다음 세대에 물려줄 것이라고 가정했다. 다윈은 자신의 이론을 ‘자연선택’이라고 명명했다.
다윈은 이용 가능한 지리적 공간과 생태 지위를 채우기 위해 일반적인 공통 조상에서 다른 방향으로 진화한 다양한 종을 통해 진화의 가지치기 과정을 가시화했다. 그는 순전히 자연적 인자에 의해 사망률이 달랐던 것이 새로운 종을 창조하는 계기가 됐다고 생각했다. 신은 그 과정에 불필요했다. 최소한 진화설은 인간을 포함한 개별 종을 형성하는 데 있어 창조주라는 개념으로부터 자유로웠다. 좀더 비평적으로 얘기하자면 다윈은 새로운 생물종을 창조하기 위해 같은 생물종간에 치열한 경쟁을 하는 자연선택 메커니즘이 그 어떤 자비롭고 신성한 행동에 관한 관념과도 양립할 수 없다고 생각했다. 그는 “서로 다른 두 종의 인간이 만나면 서로 싸우고 잡아먹고 질병을 옮긴다. 그런 다음 더 치명적인 전투, 다시 말해 그 시대를 차지하기 위해 가장 최적화된 조직이나 본능, 예를 들어 인간의 지능을 가지려는 투쟁이 이어진다”라고 썼다. 다윈은 분명 전세계적으로 승승장구하고 있는 영국 제국주의의 힘을 정신적인 눈을 통해 보았던 것이다.
다윈이 자신의 이론을 고안한 것은 1838년이지만 거의 20년 동안 그와 관련된 어떤 내용도 출간된 적이 없었다. 다윈은 과학자들 사이에 돌연변이 가설을 반대하는 정도를 잘 알고 있었기 때문에 자신의 이론에 가해질 반대를 미리 예측하고 그에 대한 답을 찾는 데 20년이라는 세월 대부분을 보냈다. 그는 그런 과정 속에서 경쟁으로 인해 구분이 확연한 생물종, 즉 변종이 점진적으로 확산되고 있다는 자신의 생각을 완성했으며 비교해부학과 발생학을 통한 진화의 증거를 정리했다. 다윈은 크게 보면 비종교적이었지만 자신의 이론을 발표할 경우 종교를 믿는 사람, 특히 자신의 아내에게 미칠 영향력을 걱정했다. 그러나 1850년대 무렵 영국 대중들의 의견은 진화설에 호의적이었다.
포스트모더니즘의 발전
1953년 영국 생물물리학자 크릭과 캐번디시연구소에서 포스트닥 과정을 밟고 있던 스물네 살의 미국 생화학자 제임스 웟슨은 재치 있고 발빠르게 다른 과학자들이 이미 발견한 사실들을 결합시켜 유전자의 이중나선 구조를 밝혀냈다. 유전자가 현대종합이론의 심장부에 위치했지만 1950년 이전에는 하나의 블랙박스였다. 이때까지만 해도 많은 과학자들은 유전자를 해독하는 데 수십 년이 걸릴지 모를 복잡한 단백질 집합체로 생각했다. 그러나 점점 드러나고 있는 증거의 실체는 생각보다는 더 단순한 고분자물질인 디옥시리보핵산(이하 DNA)이 유전 정보를 전달한다는 사실을 제시하고 있었다. 기본적으로 가장 원시적인 단세포 동물을 포함한 모든 종에서 공통된 유전자 코드를 공유한다는 발견은 그들이 공통된 조상을 가진다는 것을 의미했다. 따라서 다양한 유기체의 DNA 비교연구를 통해 그들의 진화 관계를 해명할 수 있었다.
이타주의의 기원은 가장 눈에 띄는 진화퍼즐이었다. 만약 전통적인 다윈론자들이 주장하는 것처럼 자연이 개체의 생존이나 증식 성공을 이끌어내는 특징들만 선택한다면 자신의 자손을 도우려는 것을 제외한 자기 희생의 근원은 초자연적인 것이어야 한다. 생식 능력이 없는 일개미와 꿀벌, 말벌 집단의 폐쇄적 체계는 자기를 희생하는 사회적 행동의 좋은 예이다. 다윈은 그런 특징으로 집단의 생존을 촉진시키면 시킬수록 자연은 그런 특징을 소유한 집단을 선택한다. 그러나 그 집단에 속한 개체들이 그런 특징을 배우고 다음 세대에 전달하지 못한다면 그런 특징을 가지고 있는 단일 개체는 다른 개체보다 더 빨리 죽을 것이기 때문에 실패로 돌아갈 것이다.
해밀턴은 1964년 논문에서 적어도 이론상 이기적 유전자 측면에서 명백한 이타주의적 행동을 해석할 수 있음을 보여주기 위해서 소위 ‘혈연선택(kin selection)의 대수학을 풀었다. 그는 “전형적인 인간사회에서 우리는 단 한 사람을 위해서 자신의 생명을 희생할 수 있는 사람은 없지만 2명의 형제나 4명의 이복형제 혹은 8명의 사촌을 구할 수 있을 경우에는 모두가 자신을 희생할 것으로 기대한다”고 결론을 내렸다 이런 방향의 유전 경향이 유지되고 보급돼야 한다. 이런 형태 속에서 자연주의적 생존경쟁이 이타적인 행동의 중심에 위치할 수 있었다. 이와 같은 개념적인 발전을 통해 모든 형태의 인간과 동물의 행동을 설명할 수 있는 생물학적 토대를 찾을 수 있는 길이 열리는 듯 했다.
윌슨은 1975년 『사회생물학 : 새로운 합성』에서 성에 토대를 둔 행동을 설명했다. 윌슨은 수컷이 많은 배우자를 두는 것처럼 자연적으로 자신들의 풍부한 정자를 퍼트리려고 하는 반면, 암컷은 배우자 선택과 후손 양육에 많은 투자를 하고 자신들의 부족한 난자를 보호하려는 경향을 나타낸다고 주장했다. 그의 설명은 일부 독자들에게 전통적인 성 역할을 정당화하는 것처럼 들렸으며, 특히 인류는 위험을 무릅쓰고 자연을 경시했다는 윌슨의 주장대로라면 사회생물학은 사회적 현상유지 혹은 현상악화를 인정하고 있는 듯했다. 그는 “유전자가 문화를 꽉 쥐고 있다”고 주장했고, 환경결정론에 빠져 있던 많은 사회과학자와 인본주의자들은 윌슨의 주장에 대해 격렬하게 맞섰다.
굴드는 진화를 설명하기 위해 유전자의 자연선택에만 너무 의존한 나머지 유기체를 형성하는 인자들을 간과했다고 불편했다. 1979년 굴드는 발달 억제는 적응을 제한하고 방향을 바꾼다고 주장했다. 그는 티라노사우루스의 퇴화된 앞다리처럼 어떤 특징들은 적응 목적을 따르지 않을 수 있지만 더 커진 뒷다리처럼 다른 적응 형태의 부산물로 나타날 수도 있다. 몇 년에 걸쳐 굴드는 형태가 반드시 기능을 따르는 것은 아니며 많은 것이 제비뽑기처럼 우연한 기회에 달려 있다는 견해를 상세히 설명해왔다.
자연주의적 현대종합이론은 여러 가지 도전에도 불구하고 현재 진화과학의 중심에 위치하고 있으며 유전자 돌연변이와 유전자 재조합을 통한 유기체는 변한다고 주장한다. 다양한 개체군 가운데 적자만이 자신의 유전자를 전달하면서 살아남는다. 변화는 눈에 띄는 단절 없이 서서히 일어난다. 현대종합이론을 지지하는 식물학자들은 매우 유사한 종 사이의 이종교배는 개체가 변하도록 만드는 유전자 흐름을 추가시킨다. 최근 연구 결과에 따르면 바이러스와 박테리아는 다른 유기체 세포에 침투해서 자신들의 유전자 혹은 다른 유기체로부터 획득한 유전자를 숙주의 DNA 속에 이식시킬 수 있다고 한다. 이것으로 변이는 다시 일어날 수 있다. 생물의 다양성을 진화시킬 때 선별 작용을 하는 자연선택을 위한 유전 재료로 돌연변이와 재조합 이외에 자연적인 이종교배와 유전자 획득도 추가된다.
다윈은 『종의 기원』 마지막 문장에 “중력의 법칙에 따라 지구가 회전하고 있는 동안 너무나 아름답고 멋진, 수많은 생존형태가 단순한 시작으로부터 진화했으며 진화하고 있다는 이런 관점 속에 위대함이 있다”고 표현했다. 모든 현대 진화론자들은 다윈의 의견에 동의할 것이다. 굴드의 대표작의 제목이기도 한 유명한 영화제목 ‘멋진 인생(Its a Wonderful Life) 속에 들어 있는 함축적 의미를 함께 나눈다. 우연이든 아니든 그것은 멋진 삶인 것이다.
(본 정보는 도서의 일부 내용으로만 구성되어 있으며, 보다 많은 정보와 지식은 반드시 책을 참조하셔야 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