질병 치유에 있어 마음의 능력은 오랫동안 호기심의 대상이 되어 왔다. 병이 회복될 거라스스로 믿는 환자들에게 실제로 기적적인 치유가 일어나는 것을 우리는 종종 보게 된다. 종양학 전문의이자 현재 하버드 의대 교수로 있는 제롬그루프먼은 오랜 임상 경험과 자신의 만성 질환의 치유 과정을 통해 희망이라는 감정이 갖는 치유력의 진정한 의미와 효능을 알게 된다.
제롬 그루프먼은 「라이브러리 저널」 선정 "최고의 책"이자 2004년 초에 아마존닷컴 종합1위를 차지했던 『희망의 힘』에서 병마와 싸운 환자들과 자신의 극적인 실화를 풀어놓으며 감정이 병의 증상에 어떤 영향을 끼치는지 알려준다. 그는희망이 치유의 진정한 근원이라 믿고 있으며 그것을 보여주는 생물학적, 의학적 근거를 풍성하게 제시한다. 또한 의사 출신으로는 드물게대중소설만큼이나 높은 감수성이 배어 있는 글들은 읽는 이의 마음에 깊은 감동을 남긴다.
저자는 의대 본과 4학년 시절부터 몇 년 전까지 30년 간의 이야기를 때로는 환자의입장에서 간절하게, 때로는 의사의 입장에서 냉철하게 들려주는데, 그는 다른 "희망 전도사"들처럼 "희망이 만병통치약"이라는 식으로 허위, 과장광고하지 않는다. 질병의 진행 단계, 개인별 신체적·정신적 특성, 주변 환경 등에 따라 희망을 갖고도 병을 이기지 못할 수도 있고 거짓말처럼나을 수도 있다는 사실을 실제 환자의 사례를 통해 보여준다. 그렇지만 그는 궁극적으로 희망을 갖는 것이 중요하고, 그것이 인간의 질병 치유에생물학적 효력을 발휘하며, 우리는 희망의 치유력에 대해 이제 겨우 걸음마 단계의 지식밖에 갖고 있지 않음을 강조한다.
■ 저자 제롬 그루프먼
컬럼비아 의대를 최우수 성적으로 졸업하고 동대학원에서 생리학 및 외과박사 학위를 받았다. 매사추세츠 종합병원에서 인턴과 레지던트 과정을 수료했으며, 하버드 의대 산하의 시드니 파버 암 센터 및 소아병원,캘리포니아 의대(UCLA)에서 혈액학과 종양학 전문의가 되었다. 국립 심장· 폐· 혈액 연구소의 에이즈 자문 위원, 식품 의학품 안전청(FDA)산하 기관인 생물 평가 연구 센터(CBER)의 자문 위원, 국립 과학 학술원(NAS) 산하의 의학 연구소 초대 회원 등을 역임했으며, 현재하버드 의대 교수이자 부속병원인 베스 이스라엘 디커니스 종합병원의 실험의학과 과장으로 재직하고 있다. 「뉴 리퍼블릭」「워싱턴 포스트」「뉴욕타임스」「뉴요커」「보스턴 글로브 선데이 매거진」 등에 의학·생물학 및 의료 정책에 관련된 글 150여 편을 기고해 왔으며, ABC 방송의 난치병환자 관련 연속 프로그램에도 출연했다. 저서로 『우리 시대의 기준 The Measure of Our Days』(1997), 『못 다한 이야기들Second Opinions』(2000) 등이 있으며, 홈페이지는 jeromegroopman.com이다.
■ 역자 이문희
1970년 춘천에서 태어나연세대학교에서 국어국문학을, 이화여자대학교 통역번역대학원에서 번역학을 공부했다. 3년 동안 출판사에서 일했으며 지금은 전문 번역가로 일하고있다. 옮긴 책으로 『쓰레기 소탕 대작전』『그래, 나 못된 여자다』『자살의 이해』『커피 위즈덤』『천지창조』(인챈티드 월드 시리즈) 등이있다.
■ 차례
머리말 희망 이야기를 시작하며
1장 준비되지 않은 시절
2장 진실된 희망, 거짓 희망
3장 희망의 권리
4장 한 걸음씩 차근차근
5장 그럼에도 불구하고 희망은 계속된다
6장 고통의 미로를 빠져나오며
7장 희망의 생물학
8장 희망을 해체하다
맺음말 나는 무엇을 배웠나
희망의 힘
1장 준비되지 않은 시절
1975년 7월 뉴욕, 나는 컬럼비아 대학교의과대학에서의 마지막인 4학년 과정을 시작했다. 다른 필수 과목은 다 듣고 마지막 외과 한 과목만 남겨놓은 나는 그 극적인 드라마의 현장 속으로 들어갈 날을 손꼽아 기다리고 있었다. 실습이 시작되고 얼마 안 되어 나 역시 의대생의 자격으로 에스터 와인버그라는 환자를 맡게 되었다. 왼쪽 가슴에 종괴가 있는 젊은 여자였다. 에스더 와인버그. 29세. 몸은 뚱뚱한 편이고 아몬드 빛깔의 갈색 눈을 가졌으며, 컬럼비아 의대 인근 워싱턴 하이츠에 있는 정동파 유대교 공동체의 일원이었다.
나는 환자의 양쪽 가슴을 촉진하다 움찔 놀랐다. 왼쪽 가슴에서 만져지는 덩어리가 보통 큰 게 아니었다. 왼쪽 겨드랑이에는 림프절이 아주 많았으며 역시 돌처럼 크고 딱딱했다. 암 덩어리가 이 정도로 커지고 부근의 림프절까지 퍼지려면 수개월은 걸린다. 멀쩡한 젊은 여자가 어찌 이지경이 돼서야 병원을 찾았단 말인가? 그녀의 유방 조직들은 흉벽 근육들과 함께 제거되고, 흉근과 겨드랑이의 모든 림프절도 제거되어야 했다. 결국 남게 되는 건 상처와 갈빗대뿐이었다.
그녀와 남편 마르쿠스 와인버그는 독일계 유대인 공동체 출신으로 부모님이 짝으로 맺어준 사람이라고 했다. 에스더와 남편 사이에는 거의 대화가 없었다. 그리고 자신의 사장이 자신에 특별한 관심을 보였는데, 누군가의 욕망의 대상이 된다는 사실만으로도 숨통이 트이는 느낌이었다고 고백했다. 성경에서는 병을 곧 죄에 대한 형벌로 간주하곤 한다. 난 에스더에게 날 믿어도 좋다고 했고, 당신의 비밀을 지켜주겠다고 약속했다. 그런데 에스더는 치료를 시작하지 않았다. 나중에 컬럼비아 의대에 남았던 과 친구들한테서 에스더의 치료 시기가 너무 늦었다는 이야기를 들었다. 암이 재발했고 처음에는 뼈로, 다음에는 간으로, 마침내 폐까지 전이되었다고 했다. 에스더는 서른 넷에 세상을 떠났다.
나는 가급적 에스더 얘기를 하지 않으려 한다. 내 행동들을 돌아보면 거기 감춰진 고통스런 내 무지가 드러나기 때문이다. 처음에 나는 에스더의 일을 좁은 눈으로만 보았다. 그녀는 자신이 죄를 지었기 때문에 희망을 가질 자격이 없다고 믿었다. 하나님은 심판을 내렸고, 하나님의 전지전능은 곧 그녀에게 아무런 희망도, 끝까지 싸울 근거도 없음을 의미했다. 나중에야 나는 내 시야가 얼마나 좁은지 깨닫기 시작했다. 에스더의 종교적 배경과 신앙은 특별한 언어, 즉 은유였으며 바로 그 속에서 절망이 만들어졌던 것이다.
실제로 현실적인 가능성이 있고 자신에게 진정한 선택의 자유가 있다고 인식할 때 비로소 희망은 가능하다. 내가 뭔가 변화를 만들어낼 수 있고 내 행동들이 현재와는 다른 미래를 불러올 수 있다고 믿을 때 희망은 자랄 수 있다. 희망이란 내 능력에 대한 믿음, 지금 내가 처한 상황을 어느 정도 통제할 만한 능력이 내게 있다는 믿음을 갖는 것이다. 그 희망을 가져야만 우리는 자기 바깥의 힘에게 운명을 내맡기지 않는다.
2장 진실된 희망, 거짓 희망
1978년, 레지던트 과정을 마친 나는 보스턴을 떠나 로스앤젤레스로 이사했다. 그리고 캘리포니아 대학교(UCLA) 의과대학에서 혈액 질환 및 종양학을 세부 전공으로 하는 연구원 생활을 시작했다. 연구원 봉급을 보충하려고 로스앤젤레스에서 북쪽으로 두 시간 거리에 있는 한 시골 읍내인 러셀에서 리처드 키스 선생의 일을 대신하는 당직 아르바이트를 시작했다. 유난히 뜨거웠던 8월의 어느 날, 키스 선생이 프랜시스 워커라는 환자를 소개했다. 호리호리한 흑인 여자로 나이는 52세. 같이 온 십대 소녀는 외동딸 샤론이라고 했다. 삼 주 전쯤 연례 건강검진을 받았는데 변에서 혈흔이 보임. 결장경 검사 결과 창자 아랫부분에서 종양이 발견됨. 외과의가 종양의 일부를 잘라냈으나 암은 이미 여러 림프절로 전이되고 간의 좌엽까지 침범함. 4기 결장암 말기! 키스 선생은 워커 씨 모녀를 따뜻하게 맞았다. 기록을 끝낸 키스 선생이 나를 짧게 쳐다보고는 환자를 향해 말을 시작했다.
“장이나 그 주변 림프절의 종양은 모두 제거되었습니다. 간 왼쪽에서 몇 개의 작은 종양 반점들이 발견되었습니다만, 그것들은 화학요법으로 없앨 수 있습니다.”
키스 선생은 말기 결장암의 완치가 얼마나 드문 일인지 누구 못지 않게 잘 알고 있었다. 프랜시스 같은 환자에게 실시하는 화학요법은 완화적 치료로, 수개월 치료를 받는 대가를 치르면서 그만큼 시간을 벌어보겠다는 거다. 1979년 1월 초 어느 금요일, 키스 선생 대신 환자를 보는 날이었다. 악수를 하는데 프랜시스의 손이 떨리는 게 느껴졌다. 종양학 연구원 생활을 오래 하지는 않았지만 프랜시스 같은 환자라면 몇 개월을 넘기기 힘들다는 것은 알 수 있었다. 게다가 암의 급격한 성장 속도는 충격과 슬픔을 안겨 주었다. 화학 요법이 먹힐 가능성과 관련한 정보를 있는 그대로 소상히 설명해준 뒤로 프랜시스는 치료를 중단했다. 이제 프랜시스는 앉거나 먹는 것은 물론이고 말하는 것조차 힘들어했다. 한동안 나는 샤론의 눈을 마주칠 수가 없었다. 내가 먼저 겨우 말문을 열었다.
“키스 선생님도 최선의 노력을 하셨다고 생각해.”
“제 생각에 그분은 우리 같은 사람들은 진실에 대처할 만큼 똑똑하지 않든지, 아니면 강하지 못하다고 생각하시는 것 같은데요.”
“이것은 똑똑하냐 아니냐 하는 문제는 아니야. 키스 선생님과 나는 걱정을 덜어 주고 싶었던 거야.”
“그렇다면 두 분 생각이 틀렸던 거네요.”
로스앤젤레스로 돌아오는데 샤론의 말이 계속 머릿속을 울렸다. 수치심과 죄책감이 나를 옥죈 채 떠나질 않았다. 키스 선생과 나는 워커 씨 가족의 기대를 저버렸다. 키스 선생이 한 일, 그리고 그에게 배우는 자로서 내가 기꺼이 받아들인 일이 그들에게 ‘최선’이었노라고 스스로에게 말하는 것은 기만이었다. 무지는 축복이 아니었다. 그 무지가 문제가 되는 경우라면 결코 축복이 될 수 없었다. 진실을 포기함으로써 키스 선생과 나는 프랜시스를 포기했고, 거짓을 말함으로써 샤론을 소외시키고 쓰라림을 맛보게 했다.
나는 워커 씨 모녀의 경험을 거울삼아 대학 병원의 환자들한테는 그들 병의 상태와 예후에 대해 상세히 알려주기 시작했다. 한동안 나는 환자의 ‘알 권리’에 매달렸다. 나는 차가운 사실들 쪽으로 너무 멀리, 너무 빨리 달려갔다. 그러자 어느 순간 다시 프랜시스에게 그랬듯이 ‘거짓 희망’의 벽 뒤로 뒷걸음질치고 싶어졌다. 나는 점점 이런 유혹에 약해져 가는 내 모습을 보았으며, 특히 내 가족을 생각나게 화는 환자들을 만날 때는 그 유혹을 물리치기 어려웠다.
프랜시스가 죽은 뒤 우리 둘은 여전히 성실한 관계를 유지하면서도 눈에 띄게 냉정해졌다. 몇 달을 함께 지내면서 나는 그에게서 또 다른 변화의 기미를 발견했다. 외향적이었던 태도가 수그러지고 늘 보여 주던 미소가 얼굴에서 사라진 것이다. 어느 날, 옆방에서 간호사가 소리를 질렀다. 나는 한달음에 달려갔다. 키스 선생은 바닥에 쓰러져 있었다. 검사결과, 그는 담관암이었다. 담관암이란 담관 세포에서 발병하는 비교적 드문 종양으로, 일반적으로 예후가 아주 나쁘고, 진단이 나왔을 때는 이미 치료 시기를 놓쳤을 가능성이 높다. 캘리포니아 대학 병원의 프랭크 앤드루스 선생은 힘주어 말했다.
“이 시점에선 방사선 치료가 가능성이 있습니다. 우리도 정말 효과가 있을지는 알 수 없습니다. 그러니까 당연히 안 좋은 결과에 대해서도 대비하셔야 할겁니다. 유언장을 작성하시고, 또 인공호흡기나 심폐소생술을 원하지 않는다면 그에 따라 조치해 드릴 겁니다. 정말 솔직히 말하자면 상황은 불리한 쪽입니다. 하지만 완치의 ‘가능성’도 있습니다. 방사선 치료로 암의 성장을 늦출 수도 있고, 시간을 벌 수 있습니다. 정말 운이 좋으면, 더 나은 치료법이 개발될 때까지 시간을 벌 수도 있지 않습니까.”
나는 앤드루스 선생이 의식적으로 키스 선생에게 희망의 여지를, 희미하지만 진실한 희망의 여지를 남겨 두고 가는 모습을 지켜보았다. 키스 선생은 방사선 치료를 받으며 힘겨운 시간을 보냈다. 담관암 같은 종양의 경우 보통 오 년 내에 재발이 없으면 완치되었다고 말할 수 있다. 키스 선생이 수술을 받은 지 육 년이 지난 뒤 나는 선생한테서 전화를 받았다. 키스 선생은 직접 환자가 돼 본 경험이 자신을 근본적으로 더 나은 방향으로 바꾸어 놓았다고 했다. 나는 더 이상은 캐묻지 않았으나 의사로서, 또 한 사람의 인간으로서 키스 선생이 진실과 희망이 공존할 수 있는 중간 지대에 더욱 가까이 다가갔음을 감지할 수 있었다.
3장 희망의 권리
의사의 길을 한참 가고 있었던 1987년 어느 여름날 오후, 나는 예전에 키스 선생의 병실을 찾았던 것처럼 또 다른 동료 의사의 병실을 찾았다. 하버드 의대 병리학과 교수이자 학과장으로 존경과 사랑을 함께 받아 온 조지 그리핀 선생이 위암 진단을 받은 것이다. 더욱 씁쓸한 아이러니는 그가 평생의 과업으로 연구해 온 병이 바로 위암이었다는 사실이다. 조지 선생만큼 위암의 악성과 예후에 정통한 사람은 없었다.
조지 선생은 고용량의 화학 요법과 집중적인 방사선 치료를 병행하는 공격적 치료를 받겠다고 강력히 주장했다. 하지만 그렇게 강한 독성의 치료가 그의 경우처럼 한참 진행된 암의 치명적 결과를 바꿀 수 있다는 증거는 없었다. 보통의 경우라면 조지 선생 같은 예후의 환자를 그런 식으로 치료하지 않을 것이다. 공격적인 치료를 받겠다는 조지 선생의 선택은 어찌해 볼 수 없는 상황에서 어떻게든 저항해 보려는 절망적이고 빗나간, 결국은 아무런 소용도 없을 헛수고로만 보였다. 나는 속으로 혹시 조지 선생이 죽음을 너무 잘 알아서 그런 극단적인, 의사인 자신이 스스로를 그런 고문 속으로 몰아넣을 만큼 극단적인 저항을 하게 된 게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었다.
병실로 들어갔다. 침대보가 그의 목까지 올라와 있었다. 눈은 감긴 채 푹 꺼지고, 피부는 잿빛, 입술은 심한 궤양에 피가 바싹 말라붙어 있었다. 조지 선생은 치료를 받으면서 격심한 부작용의 고통을 겪어야 했다. 소화 기관 화상은 기본이고 입술에서부터 직장에 이르기까지 여린 조직이 타 들어가고 궤양이 생기면서 출혈이 발생했다. 고통을 줄이는 유일한 방법은 모르핀과 정맥 주사뿐이었다.
보통의 경우라면 이런 병문안을 마치고 나올 즈음 환자에게 으레 다시 건강을 찾기 위해 끝까지 암과 싸우려는 자세가 얼마나 중요한지 역설했을 것이다. 하지만 조지 선생의 경우 그런 말들은 그저 텅 빈, 진실 없는 공허한 말로 보였다. 그 말들은 전이성 위암의 진실, 조지 선생 스스로 정의한 그 현실을 거부하는 거짓 희망만을 얘기할 뿐이었다. 그래서 나는 대신 모두들 당신을 너무 보고 싶어한다고, 모두들 당신을 가슴깊이 염려하고 있다고, 그리고 당신이 어서 편안해졌으면 좋겠다는 구태의연한 말만을 남긴 채 병실을 나왔다.
고용량 화학 요법과 방사선 치료로 인한 조지 선생의 화학 화상이 가라앉는 데는 삼 주가 걸렸지만, 치료의 독성이 수그러든 지 얼마 안 돼 조지 선생이 다시 입원해 수술을 기다린다는 소식이 들려왔다. 일곱 시간이 지나서야 수술이 끝났다. 수술을 받는 동안 몇 리터의 체액을 잃은 조지 선생은 수분과 염분 공급을 위한 정맥 주사 병들을 줄줄이 매달고 수술실을 나왔다. 선생의 병리학 실험실 동료들은 그의 몸에서 떼어낸 조직의 생검 분석을 시작했다. 악성 종괴는 석탄처럼 까맣고 표면은 큼직한 구멍들로 뒤덮여 있었다. 의사들이 ‘광범위한 괴저’라고 소견을 기록했다. 이것은 조직의 상당부분이 죽었음을 의미하는 의학 용어였다. 일부 종양은 이런 면에서 악명이 높았는데, 일차 병소들이 완전히 없어진 듯 하다가 몇 주, 몇 달, 심지어 몇 년 뒤에도 간이나 뼈, 폐나 뇌의 전이성 침윤으로 갑자기 튀어나온다. 만일 내가 조지 선생의 담당의라면 단호하게 화학 요법과 방사선 치료를 다시 받기로 한 선생의 선택에 의문을 제기했을 것이다.
2000년 12월의 어느 추운 날, 조지 선생이 위암 진단을 받은 지 십삼 년 째 되던 그 해 나는 병원의 안뜰 카페에 앉아 누군가를 기다렸다. 조지 선생과 서로의 가족 안부를 묻고 병원의 이런 저런 소식을 주고받은 후 이제 만남의 본론을 꺼낼 때가 왔다는 생각이 들었다. 조지 선생은 말했다.
“나는 물론 내 병을 훤히 들여다보고 있었네. 그리고 무엇을 선택할지는 내 ‘권리’였어. 사실 기대는 안 했네만, 그래도 그때 나한테는 그 길밖에 없었네. 가슴 깊이 나는 정말 살고 싶었고, 그러니 싸워야 했지. 그래야 스스로한테 나는 노력은 했다고, 할 수 있는 한 최선을 다했다고 말할 수 있을 테니까. 그래야 후회가 없지 않겠나.
진정한 자유인의 정신, 자기 운명의 결정자로 스스로를 정면으로 내세우는 자의 정신이 여기 있었다. 이것은 생존의 가능성이 거의 없다는 사실을 알면서도 포기하지 않고 끝까지 싸우겠노라며 결심하고 버텨 나갈 만큼 강인한 힘, 희망이었다. 적을 마주할 용기를 내고 싸움을 끝까지 밀고 나가는 힘을 끌어올린 일은 그 자체가 하나의 승리였다. 조지 선생은 항복을 하더라도 스스로 정한 조건으로, 스스로 정한 시간과 장소에서 하겠다는 사람이었다. 견디며, 오래 견디며 기적이 일어날 기회를 주는 것이야말로 인간 정신의 한 얼굴인 것이다.
4장 한 걸음씩 차근차근
1980년대에는 내 환자들 거의가 병을 이기지 못하고 세상을 떠났다. 당시 나는 혈액학 및 종양학 전문의로서 백혈병, 림프종, 유방암 환자를 보는 일 외에 에이즈 치료도 연구했다. 그 많은 죽음들 앞에서 희망을 지켜내기란 쉬운 일이 아니었다. 그리고 시간이 흘러 1990년 초, 임상에 중대한 변화가 시작되었다. 내 환자들 중의 훨씬 많은 이들이 죽어 나가기보다 살아나기 시작한 것이다. 과학이 한 걸음 한 걸음 앞으로 나갈 때마다 희망이 점점 현실화되었다. 그러던 어느 날, 나는 댄 콘래드라는 환자를 만났고 그와의 만남을 통해 희망이 진정 현실이 되기까지는 과학 그 이상이 필요함을 알았다.
댄은 월남전에 참전한 경력이 있으며, 보스턴 시내의 한 건설 현장에서 일하던 인부로, 1995년 크리스마스를 바로 앞둔 어느 늦은 오후 시멘트 반죽을 들어 올리던 중 호흡 곤란을 느꼈고, 응급실로 갔다. 응급실 레지던트는 폐렴 초기로 의심했으나, 흉부 엑스레이 검사 결과 흉부 중앙의 종괴였다. 큰 포도송이만 한 혹이 기도를 압박하고 있었던 것이다. 지름 30센티미터에 달하는 그 종괴는 횡경막을 지나 복부까지 꽉 채우고 촉수들을 뻗어 대동맥과 대정맥 같은 주요 혈관들을 에워싸고 있었다.
나는 말을 하면서 일부러 단호한 의지를 보였고, 시작부터 의도적으로 완치의 가능성을 거론했다. 역설적으로, 이런 유형의 림프종은 화학 요법 반응도가 아주 높았다. 즉, 항암제들은 분열 세포들에 작용하기 때문에 종양이 성장하면 할수록 죽을 가능성이 더 높아지는 것이다. 혈액학자들과 종양학자들은 보다 효과적인 새로운 치료법으로 댄과 같은 환자들을 치료하기를 간절히 고대했다. 하지만 댄의 얼굴은 내가 의도적으로 드러낸 투지에도 좀처럼 밝아지지 않았다. 댄 같은 경우 가능성은 50퍼센트에 조금 못 미친다. 내가 처음 의대에 들어갈 당시에는 제로에 가까웠다. 우리에겐 병을 물리치는 데 필요한 무기가 있다는 사실을 강조하면서 나는 이 환자에게 희망을 주고자 했다. 그런데 이 환자는 싸워 보기도 전에 무릎을 꿇으려 하는 것이다.
수석 레지던트 버지니아 추가 전화로 흥분된 목소리를 전해왔다.
“지금 막 콘래드 부인과 얘기를 하고 오는 길인데요, 댄 씨가 왜 그동안 치료를 거부해 왔는지 알 것 같습니다. 몇 분 전 댄의 아내 벳시가 댄의 군대 동료 중 또 다른 사람한테서 전화를 받았는데, 그 군대 동료가 댄의 상태가 자기 부대 출신의 다른 퇴역병의 경우와 똑같다는 말을 하더라는 거예요. 알고 보니 종전 후 얼마 안 돼서 댄 씨와 가장 친했던 친구 중에 암에 걸린 친구가 있었다는 겁니다. 그 친구 분이 입원하고 중환자실에 있으면서 여러 가지 합병증으로 고생하다 세상을 떠날 때까지 댄 씨가 그 친구 분의 침상을 지키셨답니다.”
나는 댄을 진정한 한 사람의 인격체로 이해하는 데, 그리고 그의 세밀한 삶 속을 깊이 들여다보는 데 실패한 것이다. 중환자실에서 일어나는 일들에 충격 받지 않고, 또 그 환자들 곁을 겁내지 않기까지는 내게도 수년이 필요했다. 나는 댄이 그 당시 목격했을 장면들, 그리고 지금 그 자신이 마주한 그 엄청난 현실을 어떻게 느끼고 있을지 생각해 보았다. 댄의 병실에 도착하는 즉시 난 두 가지 과제를 수행해야 했다. 그 친구의 현실과 댄의 현실을 엄밀히 구별해주는 것 한 가지, 그리고 자신의 앞날에 무시무시한 합병증이 도사리고 있으리라고 보는 생각의 여지를 줄이는 것.
“친구 분 일은 저도 안타깝게 생각합니다. 한 걸음씩 차근차근 갑시다. 일단 첫 걸음만 떼고, 그 다음 일은 결정하지 않으셔도 됩니다. 치료는 언제든 세울 수 있는 기차라고 생각하십시오. 댄 씨 자신이 책임자, 최종 결정자가 되시는 겁니다. 댄 씨를 포기하는 사람은 아무도 없을 겁니다. 이제 왜 댄 씨가 싸울 만한 힘이 없다고 하시는지, 싸워 봤자 아무 소용없을 거라고 생각하시는지 압니다. 하지만 댄 씨는 분명 그 힘을 가지고 계십니다. 제 눈에는 보이니까요.”
마침내 댄의 대답이 떨어졌고, 치료 동의서에 서명을 했다. 첫 단계는 항암제 치료와 방사선 치료였다. 그게 가장 힘겨운 과정이었다. 두 번째는 좀더 쉬웠다. 정말 다행스럽게도 수술 시점엔 댄의 혈구수가 상승세를 타고 있었다. 예상대로 수술 후 발열은 있었으나 혈액, 소변, 타액을 채취해 배양한 결과 세균은 검출되지 않았다. 매일매일 하루를 끝내면서 나는 오늘도 최악의 사태를 면했구나 하는 생각에 조용히 가슴을 쓸어 내렸다. 이 주 뒤 백혈구 수치가 다시 오르며 최악의 상황은 넘긴 듯 했다.
댄의 치료가 끝난 지 거의 십 년이 되었다. 댄은 완치되었다. 댄의 친구는 댄에겐 악몽의 상징이었다. 사람은 누구나 희망과 절망의 증거를 구하고, 살아남았거나 결국은 죽음을 맞이한 이와의 직접 만남을 통해 희망 혹은 절망을 키운다. 하지만 더더욱 중요한 사실이 있다. 그것은 만일 어떤 이가 희망을 찾도록 진정으로 돕고 싶다면 부디 그 상대를 진정으로 깊이 알라는 것이다. 제2의 퍼즐을 푸는 실마리는 바로 그의 지나온 삶 속에 있기 때문이다.
5장 그럼에도 불구하고 희망은 계속된다
2000년 12월 어느 날 나는 바버라 윌슨이라는 환자를 만났다. 학교에서 역사를 가르치다 퇴직한 후 교회 활동을 열심히 하는 예순 일곱의 여자 환자였다. 삼 년쯤 전에 왼쪽 유방에 멍울이 잡혀 생검을 실시해 보니 종양이었다. 바버라는 종양과 인접 림프절들만 절제하고 이어 방사선 치료를 실시하는 ‘종괴 절제술’을 선택했다. 그런데 우리가 만나기 한 달 전 바버라의 하부 늑골 위로 딱딱한 융기가 발견되었다. 결과는 종양의 재발. 뼈와 간에서 암이 자라고 있었다.
“현미경 검사에서 종양 세포들이 공격형으로 관찰됐습니다. 그러니까 앞으로도 추가 증식과 전이의 가능성이 있단 뜻입니다. 제 생각엔 우리도 그 종양을 공격적으로 치료해야….” “제 생각도 같아요. 분명히 말씀드리지만 저는 가능한 한 오래, 제 인생에 가치가 남아 있는 한 오래오래 살고 싶습니다.”
바버라는 이미 나보다 한 발 앞서가 있었다. 치료의 한계를 정하는 문제는 보통 여러 가능성들에 대한 긴 대화와 환자의 오랜 고민 뒤에야 등장한다. 그런데 바버라는 이미 그 한계를 정할 작정으로 나를 만나러 온 것이다. 하지만 설령 그렇다 해도 나는 그 ‘공격적 치료’라는 것이 부작용과 위험의 관점에서 정확히 어떤 의미를 지니는지를 명확히 해 둬야 했다. 하지만 바버라는 자신은 과거 치료 경력도 있는 ‘베테랑’이라며 무슨 말씀인지 잘 알아들었다고 했다.
바버라는 보여줄 게 있다면서 커다란 천 가방에서 두툼한 처칠 평전과 낡고 자그마한 포켓용 성경을 무릎 위에 올려놓은 뒤 다시 가방을 뒤져 종이 한 다발을 꺼내 내게 건넸다. 하나는 치료 위임장, 즉 자신이 판단력을 상실했을 경우 담임목사인 윌리엄 밥콕에게 자기 대신 결정을 내릴 수 있는 권한을 위임한다는 공증 서류였다. 또 다른 하나는 자신이 뇌사 상태에 이르거나 삶의 질이 심각하게 저하될 경우 인공호흡 장치나 심폐 소생술과 같은 과도한 처치를 취하지 말 것을 명시하는 사전 의료 지시서였다. 다시 한 번 바버라의 침착함과 태연함이 인식되면서 이것이 과연 정직한 모습일까 궁금했다. 우리가 나누는 그 어떤 전망에도 바버라는 두려움도 불안도 드러내지 않았다. 인간의 본성인 죽음에 대한 그 깊은 두려움을 넘어서는 일이 과연 가능하단 말인가? 만일 그렇다면 어떻게 그럴 수 있는지 알고 싶었다.
치료를 시작한 지 석 달째로 접어들자 관해가 시작됐다. 뼈와 간이 전이된 암은 크기가 반으로 줄고 새로운 침윤은 나타나지 않았다. 치료를 받고 며칠 동안은 몸이 완전히 지쳐 교회 봉사도 주일학교 일도 하지 못했다. 하지만 이러한 급성 부작용이 사라지자 다시 파트타임으로 목사님 일을 도와드릴 수 있었고 일주일에 한 번씩 교회 아이들에게 성경도 가르쳤다. 바버라의 관해는 칠 개월 동안 지속되었다. 그러던 어느 날 오른쪽 늑골 밑으로 희미한 불쾌감이 감지되면서 식욕이 떨어졌다. 간에서 종양이 다시 자라고 있었다. 바버라는 다시 세 차례의 화학 요법을 받았으나 암은 항암제를 가볍게 털어버리는 듯했다. 간과 뼈로 전이된 암은 점점 증식해 갔다. 마지막 화학 요법을 끝내고 나는 항생제를 투여해 초기 감염을 막았다. 바버라가 감염에서 천천히 회복해 갈 즈음 나는 속으로 이제 내가 아는 한 그 어떤 약도, 표준 약제든 실험 약제든 어떤 약이든 바버라의 상태를 개선시킬 만한 실질적인 가능성을 지닌 것은 없다고 생각했다. 이제 바버라에게 말할 때가 왔다. 아주 잠깐 바버라의 입술이 떨렸지만, 그녀는 이제 평정을 되찾았다. 내가 무슨 말을 하려는지 다 안다고 바버라의 눈이 말하고 있었다.
그 주에 바버라는 퇴원해서 집으로 갔다. 바버라는 내게 자신의 ‘음모’가 어떻게 진전되어 가는지 소식을 들려주었다. 그리고 얼마 뒤 암은 결국 바버라의 생명을 앗아갔다. 목사가 내게 전화를 걸어 바버라가 몇 시간 동안 힘겹게 숨을 몰아쉬긴 했지만 이내 깊이 진정되었다고 전해주었다. 짧지 않은 시간 동안 마음의 준비를 해왔건만 상실감으로 가슴이 저려 왔다. 나는 의학의 한계를 인정한다. 하지만 그저 한계로 인정해 버리고 말기에 나는 그녀를 너무 사랑했다. 도저히 그러지 않을 수 없었다. 그러면서 나는 동시에 깊은 감사를 느꼈다. 바버라는 과거 그 어떤 환자한테서도 경험하지 못했던 방식으로 그녀 자신을 내게 열어 보였다.
6장 고통의 미로를 빠져나오며
1979년 가을, 보스턴 마라톤 대회 출전을 위해 훈련을 하던 중에 나는 요추 디스크가 탈출되는 부상을 입었다. 통증이 즉시 가라앉지 않아 디스크 절제술을 받았는데, 탈출된 디스크의 끝 부분만을 제거하는 제한적인 수술이었다. 하지만 수술 뒤에도 나는 이전 상태를 완전히 회복하지 못했다. 달리려고 하면 등과 엉덩이에서 묵지근한 통증이 전해져 왔다. 수술 후 반년 뒤 어느 날 아침, 나는 아침 식사를 마치고 의자에서 일어서려다 그만 바닥에 쓰러지고 말았다. 등 아래쪽이 마치 바이스로 죄듯 찌릿하더니 엉덩이를 타로 다리까지 쏜살같이 전기가 흘렀다. 엑스레이를 찍어 봤지만 통증의 정확한 원인은 나오지 않았다. 수개월 동안 나는 얼음팩 위에 누워지냈고 그 온몸을 마비시킬 듯한 차가움을 통해서야 겨우 몇 분만이라도 통증에서 해방될 수 있었다.
나는 마치 아무리 헤매 다녀도 고통에서 고통으로만 이동할 뿐 출구는 찾을 수 없는 미로 속에 들어선 듯한 느낌으로 집으로 돌아왔다. 나는 지역 내 한 시설에서 물리치료를 받기 시작했다. 물리 치료사들은 친절하고 성실했지만 치료는 대체로 수동적으로 이뤄졌다. 그렇게 십구 년을 살았다. 1999년 여름에도 그런 발작이 찾아왔다. 내 모습을 본 친구 한 명이 등 마사지를 받아 보지 그랬냐고 했다. 불행히도 치료는 너무 공격적이었고 통증은 더 심해졌다.
점점 깊어지는 통증에 막막해진 나는 현재 일하고 있는 베스 이스라엘 디코니슨 의료 센터에서 골관절 질환을 전문으로 보는 류머티즘 전문의에게 소견을 요청했다. 그는 통증 발작이 수그러지면 뉴잉글랜드 침례교 병원에서 근무하는 재활의학 전문의인 제임스 레인빌 박사를 만나 보겠다는 약속을 하라고 했다. 나는 더 이상 잃을 게 없다는 심정으로 척추 센터를 찾아갔다. 레인빌 박사는 내 이야기를 들은 후 이학적 검진으로 들어가 손바닥으로 근육과 관절을 일일이 눌러가며 세심히 강도를 테스트했다. 그리고 모든 확인을 마쳤다는 듯 흡족한 표정으로 몸을 돌려 나를 마주보고 섰다.
“고통의 화산 신이 선생의 주인이시오. 고통은 일종의 붉은 깃발이오. 선생이 지금 선생의 몸에 해를 끼치고 있단 경고를 보내는 거요. 선생은 계속 고통을 피하기 위해 선생이 사랑하는 것들, 인생의 기쁨이 되는 활동들을 희생시키며 그 화산 신에게 이렇게 말하고 있소. ‘만일 고통을 면하게 해주신다면 모든 것을 포기하겠습니다. 부디 고통을 면하게 해주십시오.’ 하지만 그는 그 어떤 재물로도 만족할 수 없는 신이오. 나는 선생이 고통에서 해방될 수 있을 거라 생각하오. 선생 자신을 다시 세우고 지금보다 훨씬, 훨씬 더 많은 일을 할 수 있으리라 생각하오. 이제 선택은 선생한테 달렸소. 한번 해보든지, 아님 말든지. 잘 생각하시오. 생각을 고쳐먹으면 통증도 줄어들 거요.”
레인빌 박사는 자신이 처방할 프로그램의 기초적인 내용들을 설명해 주었다. 천천히 무게를 늘려가며 근육 강화 훈련을 시행하면서 근육들이 통증의 기억을 떨칠 때까지 ‘재교육’을 실시한다. 그 과정 중에 몸이 어떤 통증을 호소해도 손상은 없다. 내 몸에 가해지는 모든 자극의 목적은 뇌신경을 조정하여 강도와 내구성을 회복하고 통증인지를 지우는 것에 있다. 병원을 나오는데 온몸이 이완되면서 기이한 안도감이 찾아들었다. 의사로서 나 역시 희망의 필요성을 익히 알고 있었다. 하지만 나는 완전히 희망을 포기했었다. 아무리 교육을 받고 지식을 얻고 경험을 했어도 사람이 막상 직접 환자가 되어 고통과 혼란과 절망을 직접 마주하면 스스로 알아서 문제를 처리하기가 아주 어려워진다. 나에게는 외부의 목소리, 나를 이끌어 줄 강하고 단호한 목소리가 필요했다.
나는 떨리는 가슴으로 침례교 병원의 재활 프로그램에 등록했다. 물리치료사를 따라 치료실로 들어가는 순간 나는 깜짝 놀랐다. 탁 트인 넓은 공간에 고문 기구들처럼 보이는 물건들이 가득했다. 하지만 이상하게도 마음속 깊은 곳에서는 전투 의지가 펄럭거렸다. 레인빌 교수님의 수업은 첫 날부터 결코 녹녹치 않았다. 매 동작마다 등에서 시작된 격통이 엉덩이로 허벅지로 다리로 훑고 내려갔다. 그럴 때마다 나는 장밋빛 미래의 그림을 애써 떠올렸다. 딸아이와 산책하는 모습, 비행기 승강장을 내려와 새로운 도시 탐험의 첫 발을 내딛는 모습, 친척 결혼식에서 춤을 추며 빙글빙글 도는 모습…. 이런 상상을 할 때마다 다스하고 부드러운 에너지의 물결이 내 몸 속으로 쏟아지듯 흘러들어 가득 채웠다.
석 달 정도가 지나자 그 끈질긴 통증이 간헐적이 되고, 또 그 뒤에는 드물어졌다. 그로부터 일 년이 조금 지나서 일상의 통증은 거의 사라졌다. 두려움 없이 아침을 맞았고, 하루 종일 편안히 돌아다녔고, 감사의 기도를 올리며 잠자리에 들었다. 다시 태어난 기분이었다. 아무래도 기적만 같았다.
7장 희망의 생물학
통증에서 해방된 뒤 나는 그간의 경험을 통해 내가 과연 무엇을 배웠는가를 생각했다. 그 경험을 통해 어떻게 내 환자들에 대한 이해가 깊어질 수 있었는지, 또 과연 어떤 식으로 그들을 도울 수 있을지를 고민했다. 물론 내 상황과 환자들의 상황은 달랐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중요한 유사점들이 있었다. 가장 힘든 부분은 바로 첫 발을 딛는 일이다. 두려움 때문이다. 많은 경우 그 모든 고통과 괴로움이 무효로 돌아갈지도 모른다는 두려움이 최대의 걸림돌로 작용한다. 내가 그랬듯 내 환자들도 마찬가지다. 그 두려움을 이길 용기를 불어넣어 주는 것, 그리고 고된 치료를 끝까지 견디도록 날마다 의지를 북돋워 주는 게 바로 희망이다.
나는 과학자의 한 사람으로 물었다. 과연 희망이라는 감정에 환자의 회복을 돕게 만드는 어떤 생물학적 메커니즘이 존재하는가? 만일 그 같은 희망의 생리 작용이 존재한다면 그 범위와 한계는 어디까지인가? 아니면 희망이란 단지 특정 생리적 변화들을 동반하기는 하되 그것들과 아무런 인과 관계는 없는 감정일 뿐인가? 나는 신참자가 가질 수 있는 장점과 단점을 모두 안고 출발했다. 그리고 실험적인 정신분석학자들, 정신의학자들, 신경학자들, 뇌영상과 뇌화학의 전문가들, 통증 메커니즘, 신진대사, 근육 생리의 전문의들을 찾아다니며 얘기를 나누기 시작했다. 연구 초기에 만나 이야기를 나눈 그 사람들 중에 브루코 코언 박사가 있었는데, 그는 하버드 의대 교수이자 정신 치료 및 연구 계통으로 미국 내 가장 유명한 병원으로 꼽히는 맥린 병원의 원장이기도 했다. 그는 내 말의 리듬에 맞춰 고개를 끄덕거렸다.
“선생이 방금 말씀하신 경험들, 그러니까 희망이 육체의 통증과 무력화에 영향을 끼칠지도 모른다는 가능성들이나 또 환자들의 도전의지와 인내력까지, 이들 중 그 어느 것도 과학의 영역 밖에 있지 않습니다. 이 분야의 경우 현재로선 모든 작업이 피상적인 수준에 지나지 않고 앞으로 언젠가 지금을 돌아보면 현재 우리의 지식이 얼마나 빈약한가를 깨닫게 될 것입니다.”
코언 박사는 잠시 말을 멈추고 뭔가를 골똘히 생각하더니 희망의 생리 작용에 대한 탐구라면 그 무엇보다 위약(플라시보) 효과에서부터 시작하는 게 좋을 것 같다고 했다. 믿음과 기대, 이 두 가지 희망의 주성분은 플라시보의 생물학적 효과에도 필수적이기 때문이다. 밝혀진 바에 따르면 인간의 몸에는 천연 모르핀이 존재한다고 한다. 바로 ‘엔도르핀’과 ‘엔케팔린’으로 불리는 화학 물질이다. 희망의 두 가지 주성분인 ‘믿음’과 ‘기대’가 뇌에서 엔도르핀과 엔케팔린을 분비되게 하고, 이들이 모르핀 효과를 흉내냄으로써 통증이 차단된다는 것이다.
2002년 7월, 「뉴잉글랜드 의학 저널」에 근골격계 질환 통증에 미치는 플라시보 효과에 대한 기념비적 연구 결과가 발표되었다. 휴스턴 시 베일러 의대의 연구팀이 무릎 골관절염 치료를 위한 관절경 수술 혹은 플라시보 수술 뒤에 나타나는 통증 완화와 기능의 향상을 엄밀히 평가한 것이다. 연구팀은 180명의 환자들을 무작위적으로 나누어 관절경을 이용한 변연절제술과 세척 혹은 플라시보 수술을 받게 했다. 플라시보 그룹에 속한 환자들을 수술실로 옮겨 마치 관결정 수술을 실시하듯 무릎을 다뤘다. 또 모든 환자들을 대상으로 2년의 추적 관찰이 실시되었다. 예상대로 관절경 수술을 받은 환자들은 무릎 통증 감소와 기능 향상을 경험했다. 그런데 플라시보 그룹 역시 동일한 효과를 경험했다.
이 같은 결과를 어떻게 설명할 수 있을까? 아마도 믿음과 기대가 그 강력한 엔도르핀과 엔케팔린의 분비를 유도했을 것이다. 희망 없이는 아무 것도 시도할 수 없었다. 하지만 희망은 보다 나은 목표 지점에 도달할 실질적인 기회를 제공했다. 희망은 우리가 기어오르지 못했을 장애물을 뛰어넘도록 도와주며, 완치의 가능성이 존재하는 그 지점까지 나아가도록 추동한다.
생리 작용의 복잡성을 생각하게 되자 이제 플라시보 효과 너머에 존재하는 긍정적 감정들에 대해 더 알아봐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당시 미국 국립 정신 건강 연구소의 소장을 맡고 있던 스티븐 하이먼에게 전화를 걸었다. 하이먼 소장은 미 전역에 걸쳐 정신 및 뇌에 관한 연구를 장려하고 있었다. 그는 내게 위스콘신 주 매디슨으로 가보라고 했다. 나는 한겨울 눈보라를 뚫고 매디슨에 도착했다.
8장 희망을 해체하다
리처드 데이비슨 교수를 만나기 위해 매디슨에 도착하니 저녁이었다. 데이비슨 교수는 실험심리학자이자 긍정적 감정의 생리 작용을 연구하는 세계적 전문가들 중 한 사람이었다. 우리는 같이 저녁 식사를 하면서 그의 작업에 대해 이야기를 나누고, 그러고 나서 다음날에는 현재 진행중인 몇 가지 실험을 살펴볼 참이었다. 과연 데이비슨 교수는 실험 심리학자의 입장에서 희망을 어떤 식으로 해체할 것인가?
“저는 희망을 두 가지 측면으로 이뤄진 감정으로 봅니다. 인식적인 면과 정서적인 면이죠. 우리는 뭔가를 희망할 때 일정 정도의 인식력을 사용해 자신이 바라는 미래의 사건과 관계 있는 정보와 데이터를 수합합니다. 하지만 희망에는 또 이른바 정서적 예측, 그러니까 마음속에 밝은 미래를 투사할 때 경험하는 그 위안이 되고 힘이 되고 들뜨는 듯한 ‘느낌’도 동반됩니다. 이런 느낌이 들려면 뇌가 자신이 현재 처한 상태와는 다른 종류의 정서적, 혹은 감정적 상태를 만들어 내야 하죠.”
희망의 두 가지 요소인 인식과 느낌은 뇌 속에서 각각 분리된 상태가 아니라 서로 엮이면서 서로를 변화시켜 나간다. 아이오와 대학의 신경과학자인 안토니오 다마지오 교수는 감정이 논리적 의사 결정의 필수적 길잡이라는 사실을 확실히 납득시키기 위해 신경학 연보에 나오는 한 유명한 사례를 예로 들었다. 1848년 여름 철도공사 중 쇠막대기가 튀어 올라 피니어스 게이지란 남자의 두개골을 뚫고 지나갔다. 그것이 뇌의 전두엽으로 관통해 들어갔는데도 놀랍게도 그는 죽지 않았다. 그 부상으로 그는 논리적 사고력의 공백이 생겼을 뿐만 아니라 감정까지 빼앗겼다.
아주 드물기는 하지만 이 같은 사실을 훨씬 극적으로 보여 주는 사례가 있는데, 바로 편도핵 손상으로 두려움의 감정을 상실한 사람들이다. 편도를 뜻하는 ‘아미그달라’는 라틴어로 아몬드를 뜻하며, 이는 뇌 속 깊이 자리한 조직이다. 이 같은 조직은 뇌의 왼편과 오른쪽에 하나씩 있다. 편도는 신호를 보내 두려움에 대한 일반적인 반응을 유발한다. 심장이 쿵쾅거리고, 근육이 딱딱해지고. 온 몸에 땀이 줄줄 흐른다. 이러한 인식 가능한 생리적 변화 외에도 두려움은 또 주요 호르몬들이 줄줄이 분비되게 만든다.
뇌 경로에 손상을 입어 두려움을 상실한 듯 보이는 환자들 중 일부를 대상으로 안토니오 다마지오 교수는 연구를 실시했고, 그 연구 결과는 감정을 적합한 의사 결정을 위한 필수 요소로 보는 그의 모델을 한층 뒷받침해 주었다. 다마지오 박사팀은 「네이처」를 통해 희귀병이자 유전병인 우바흐위데 병을 앓는 젊은 여자 환자 SM의 사례를 보고했다. 이 병은 비정상적 칼슘 침전을 유발하는데, SM에게서는 편도체에만 쌓이는 선택적인 침전을 보였다. SM은 지나칠 정도로 붙임성이 좋았고 믿는 사람들에게 자주 이용당했다. 또한 그녀는 공포나 두려움의 표정을 인식하지 못했다. 물론 두려움이 어떠해야 하고, 무엇이 두려움을 유발하며, 위협적인 상황에서는 어떻게 해야 한다는 사실을 머리로는 알고 있었지만, 이러한 지식이 그녀의 행동을 전혀 인도하지 못하는 것처럼 보였다.
?
SM의 사례를 읽고 난 뒤 나는 과연 진정한 희망과 거짓 희망이 어떻게 다른가를 생각했다. 거짓 희망은 위험과 위협들을 보지 못하지만 진정한 희망은 그것들을 본다. 때문에 거짓 희망은 도를 지나치는 선택과 잘못된 의사 결정으로 이어질 수 있다. 하지만 진정한 희망은 엄연히 존재하는 실제적인 위협을 고려하고 그 위험을 둘러 가는 최선의 길을 걷고자 한다. 희망은 우리가 흔들리지 않게 중심을 잡아주는 든든한 무게 중심이요, 과연 어느 길목에 우리의 발목을 잡아 끌어내릴 위험과 구렁텅이가 있는지 보게 하는 길잡이다. 즉 희망은 우리가 위험을 똑바로 마주하고 그런 다음 그것을 둘러가거나 혹은 견뎌낼 수 있도록 두려움을 누그러뜨려 주는 것이다.